역사신학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역사신학 고찰

하나님아들 2024. 4. 1. 22:55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역사신학 고찰

 

 

 

 

 

<한글초록>

“개혁신학과 한국교회의 갱신(Renovation): 장로교회를 중심으로”이라는 주제 아래 있었던 한국개혁신학회 정기 학술심포지엄에서 역사적인 사례로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의 개혁주의생명신학 운동을 제시하여 발표했던 글을 정리한 것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표제어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를 역사신학적인 접근으로 고찰하였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은 신학 하는 자들에게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나 사변화 된 신학과 학문적인 열정으로 머물고 목회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한다면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신학의 학문성 논쟁은 이미 18-19세기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이라는 용어도 13세기 스콜라신학에서 사용되었다. 이 글에서는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의 역사적 이유들을 영지주의자들,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예에서 살폈다.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말할 때 진리의 계시와 사도성을 부정했던 무리들의 학문적인 노력의 결과물, 신학을 “학문”으로 주장했던 스콜라신학과 지나치게 교리에 의존하고 교조주의화 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신학의 근거는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신학은 신학 하는 자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따라야 한다. 신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주제어: 갱신, 개혁주의생명신학, 지식욕, 진리의 위로자들, 오직성경, 경건의 규범, 경건의 연습

● 논문투고일:2012년6월11일. 수정투고일:2012년8월9일. 게재확정일:2012년8월15일

 

 

 

서론)

 

 

한국교회가 철저하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교회 안팎으로부터 받고 있다. 여러 학회들도 관련 주제를 갖고 한국교회의 갱신을 논하고 있다. 한국개혁신학회 역시 “개혁신학과 한국교회의 갱신: 장로교회를 중심으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집중하여 연구․논평․토론 하였다. 이 글은 이를 위한 역사적인 사례로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의 개혁주의생명신학 운동을 제시했던 것을 정리한 것이다.

물론 백석학원의 설립 목적은 복음전도를 통한 예수 생명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살아가도록 교육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설립목적이 설립자의 지나간 30여년의 교육 사업을 통하여 개혁주의생명신학으로 구체화되었다. 설립자는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표제어로써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신학 자세에 대하여 도전을 주었다. 그리고 개혁주의생명신학이 무엇이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구체화 했다. 또한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은 2012학년부터 개혁주의생명신학의 구현을 위하여 교과과정을 대폭 수정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설립자의 1) “제2회 백석강좌 주제 강연”(2004년 10월 11일)에서 잘 드러났고, 개혁주의생명신학에 대한 것은 2) “제4회 개혁주의생명신학 정기학술대회에서 행한 주제 강연”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것은 낯설지 않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통념적으로 신학이 사변화된 지식에서 끝나는 학문의 특성과 학문의 결과물들을 보편적 그리스도교가 거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주장을 학문으로서 신학에 익숙해 있는 우리들이 거북살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으로 이해해 왔던 신학의 방법이나 신학의 학문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의 근거를 떠나 인간의 이성이나 사변화된 신학의 결과물을 반박하고자 한다. 또한 신학이 단순히 학문으로 머물러 목회현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생명을 낳지 못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학문을 도구로 바른 신학을 정립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신학자들에게 도전을 주어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1장에서 근대교회 역사에 있었던 논쟁을 정리하고, 2장에서는 역사 신학적으로 신학의 의미와 이해를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3장에서는 본 연구의 중점사항을 보일 것이다. 고대 교회 역사에서 근 현대 역사까지를 아우르는 글이 되다보니 부분부분 깊이와 원 자료 활용의 아쉬움을 인정하면서도 할 수 있는 만큼 원 자료를 활용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시대간의 연결고리나 연구의 보편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TRE(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의 항목 “Theologie”을 활용하였다.

 

I. 18-19 세기의 신학의 학문성 논쟁(갈등)

 

 

우선 현대교회사에서도 신학의 학문성 여부에 대한 갈등과 논쟁을 살필 수가 있다. 르네상스와 문예부흥이후 인류역사는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양으로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다변화 되고 전문화 되면서 신학의 내용 역시 전문화 되고 더욱 세분화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은 17세기 중엽 계몽주의 운동으로 역사상 어떤 다른 사조로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와 신학의 관련성으로부터 그들의 세계관을 확립하려고 들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 학문으로써의 신학을 거부하였던 루터를 뒤 이은 여러 신학자들은 신학이 무엇인지와 방법론들을 확립하기 위한 글들을 많이 남겼다.

18세기 말에 강하게 일어난 신학의 학문성 논쟁은 점차 심화되었고 19세기 초 슐라이에르마허에 이르러 오늘과 같은 신학이해를 갖게 되었다. 18-19세기의 이러한 논쟁의 역사를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조직신학』 책에서 간결하게 정리해 놓았다. 벌코프는 신학의 학문성을 부정하는 일이 18세기 말에 일어났다고 보았다. 벌코프는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 부정하는 자들의 주장 근거로 칸트와 ‘이름에 알맞은 유일한 학문’이라 주장하는 자연과학과 실증주의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즉 이러한 학문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학이 관찰할 수 없고, 학문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권위인 이성에서 찾지 않고 계시에서 찾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벌코프는 이러한 부정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응을 메킨토쉬(Macintosh)의 견해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벌코프는 또한 이러한 논쟁들을 정리하면서 신학의 학문성을 유지하는 일이 어느 관점에서 불가능하고 또 어느 관점에서 가능한지를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들을 정리하여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벌코프는 “관찰과 실험의 학문방법에 따라 역사적 자료와 경험의 자료”를 다루어 그리스도교나 종교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입장에서 신학이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반박한다. 그리고 미국의 학자들과 유럽의 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생각을 비교하면서 일반적으로 학문(science)을 미국학자들이 “자연과학”이라고 이해해서 신학의 학문성을 부정하는 것이지, 독일 학자들처럼 “체계화 된 지식(systematisiertes Wissen)”의 의미에서 학문(Wissenschaft)이라는 이해를 갖게 된다면 학문으로써 “교의 신학(dogmatic theology)”이 설명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벌코프는 학문을 “단지 체계화된 지식” 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인간의 공통의 지식[인식]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을 말할 때 신학의 학문성을 주장하는데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벌코프는 신학을 설명하기를, “신학의 주제-재료(the subject-matter)는 오직 계시에 의하여 주어질 수 있고, 신학자의 의무는 그렇게 얻은 지식을 체계 세우는 것이고 성경의 유비(비슷함, analogy/ likeness)에 의하여 엄격히 그것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의 독특한 방법을 갖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신학이 “계시에 의해 주어진 자료”를 다룰 때, “이성은 이 자료의 원천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도구이다.”라고 주장하여, 신학과 이성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신학을 “절대적 진리(absolute truth)를 다루는 규범적인 학문(a normative science)”이라고 정의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교부들의 가르침과 말씀에 굳게 서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강력한 주장들은 안타깝게도, 19세기 베를린 대학(1810년)이 창립될 때, 피히테(Fichte)가 초대 총장으로서 신학부를 철학부 안에 종교학 분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하였다. 이를 막아 선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였고, 그는 그의 『신학연구 입문』이라는 책을 통하여 그는 신학의 학문성을 강조하여야 했다. 또한 그는 신학이 대학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해야 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는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부교수로 그리고 초대 신학부 학장으로 제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신학은 역시 하나의 순수한 학문(reine Wissenschaft)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인 목적을 위하여 행하였던 실제적인 학문(positive Wissenschaft)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는 신학을 세 분야로 나누었다. “신학연구의 왕관”으로써 실천신학, “몸체”로써의 역사신학, (새로운 개념 창안으로써 학문-이론의 토대 위에서) “철학/ 이론 신학”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본 글은 근․현대 역사에서 신학이 학문이 아님과 신학이 학문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II. 교회사에 나타나는 신학의 의미와 오늘의 신학 이해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신학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살펴보면 헬라어로 θεολογία, θεολογεῖν, θεολογός 등의 단어로, 라틴어로 theologia, theologus 그리고 드물게 deiloquium, deiloquus로 사용하였다. 헬라어 θεολογεῖν은 신에 대하여 혹은 하나의 신을 말하는 것으로써 θεολογία는 신에 대한 학문을 말했다. 이 단어를 그리스도교에 적용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찬양에서 적용하였었다.

 

신학이라는 말이 어원학에서 어떤 한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하여 에벨링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우선 철학자인 플라톤이 그의 글에서 단지 1회 사용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철학자들로서 이 단어를 종교와의 논쟁에서 신에 대하여 철학적 가능성을 고려하기 위하여 활용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서와 사도교부들의 글들에서는 하나님(θεός)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신학이라는 단어를 그들의 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교회역사에서 교회사가 헬라교부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260-339)에 이르러서야 신학이라는 단어가 자주 그리스도교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에우세비오스에게서 그 근거를 그의 철학적인 자료들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온 생각을 결정하는 이교도 종교에 대항한 교회의 승리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신학자들은 신화의 시인(창작자)들 대신에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사도 바울과 특별히 복음전도자 사도 요한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4-5세기에 헬라교부들에게서 자연스럽게 θεολογία와 θεολογεῖν이 삼위일체 신앙 논쟁에서 정통신앙의 특색 있는 용어가 되었다.(누구보다도 아레이오파기타의 디오니시오스에게서) 그러나 그에 비하여 라틴어 언어권에서는 이러한 단어들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관련하여 스콜라철학 전성기(13세기)에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라틴 철학자 키케로나 라틴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학자들(theologi)”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헬라-로마의 신화시인들을 일컫는데 사용하고 있다. 또한 “신학(theologia)”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교의 의미 밖에서 테르툴리아누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여러 차례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부들에게 “신학”의 의미들은 역시 여전히 “하나의 생리학(Physiologie) 안에서 전도된 신학에 대한 철학내부의 비판의 범주 내에 머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가 당대의 키케로(106-43BC)의 친구요, 역사, 철학, 예술, 로마문화 등에 대하여 다작의 글을 썼던 마르쿠스 바로(Marcus Varro, 116-27BC)의 글들을 인용하여 그가 주장하였던 “신학”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여러 글들에서 바로를 거론하여 반박하고 있지만, 바로가 주장하는 “신학”에 대한 비판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글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에 집중되어 있다. 4권부터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6권부터 8권까지 바로의 주장에 대한 해석과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교도 바로의 신학 이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가 주장하였던 “세 종류의 신학(tria genera theologiae)” 즉, “mythicon”(신화의), “physicon”(자연의), “civile”(국가의/ 정체의)신학을 논박의 중심에 두고 있다. 바로의 신 이해는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서 발상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의 신화의 그리고 자연의 신학은 신들의 범죄를 드러내고 있고, 국가의/ 정체의 신학은 사악한 마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차례 “신학”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였으나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의미하는 곳은 없다. 로마제국 안에서 동방지역 교회와는 달리 서방지역 교회는 오래도록 신학이라는 용어를 활용하기를 꺼려 왔음을 본다.

역사적으로 신학이 무엇이가를 칼 하인쯔 라쪼프의 연구결과를 제시해 본다. 그는 1)신학을 하는 방법의 다양성과 철학, 신앙의 역사와 유대학에 대한 명확한 고려 안에서, 그리고 2)교회의 다양한 실천상황들 안에서 “교회의 사건”과 관계 때문에 신학의 개별분야들에 접근하는 통합의 일치를 통하여, 그리고 3)하나님 안에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의 토대와 전제로써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의 일치를 통하여 구성하는 총체적 관계로 보았다. 그리고 신앙의 확증에 대하여 성경의 내용을 명시적으로 반향 하여 형성하였던 것들은 중세 전성기(13세기 중엽)에 대학에서 학문으로써 신학을 확정하기에 앞서서 시초의 그리고 결정적인, “사고하는 신앙의 합리성 형태들”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신학이 ‘유럽과 미국 사회 안에서 현대화 하는 과정에서 신학의 개개의 분야들의 형성과정과 신학 교육기관들의 서로 다른 반응의 방법들에 따라서 다양하게 발전 하여 왔다.’고 분석하여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들은 현대신학의 발전이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공헌하기 보다는 단순히 학문성취를 추구하는 과정에 많은 병폐를 낳고 있음을 본다. 옥스퍼드대학의 역사신학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충실한 신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점차 커져가는 이질감에 대하여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 자료를 위한 자리에서 성경학자들의 태도와 사람들의 태도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이 둘 즉, 학문공동체와 신앙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오늘의 성경연구방법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는 오늘날 신앙의 사람들이 “대학의 신학에 환멸(the Disillutionment with Academic Theology)”을 느끼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오늘의 성서학의 해석과 전통적인 조직신학사이에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어서 이것의 조화가 가능할지에 대한 회의도 갖게 한다. 이러한 문제를 앉고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주장을 역사신학적으로 고찰해 본다.

 

 

 

III.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A.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증거

 

나타나는 질문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역사적으로 “신학은 학문인가”라는 질문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그리고 학문으로써 신학을 비판하여 왔다.

모든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성경과 관련이 있다. 우리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성경) 안에서 신학의 원형을 찾는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야훼 하나님의 관계를 기초로 하는 하나님의 계시신학인 구속역사의 신학을 세웠다. 헤르만 스피커만은 그의 글에서 구약성경의 신학을 1) 구속역사의 신학, 2) 예언의 신학, 3) 현재 구원의 신학, 4) 지혜의 신학, 5) 묵시의 신학으로 열거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에서 신학을 정립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일은 교부들이 2세기 말 성경이 모아진 후 점차적으로 발전해 갔던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학문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지향하고 때로는 목표로 하는 높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아니었다. θεολογία는 구약성경 70인 역에서처럼 아직도 활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매 시대마다 혼탁해진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이러한 원시그리스도교의 신학과 교부들의 글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성경의 해석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성서의 해석은 통일성에 따른 질문으로부터 이루어졌다. 신약성서신학의 신학의 수용은 구약성서와의 관련부분으로부터 신구약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되어졌기 때문에 어떤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신학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발쯔는 오늘날의 신학을 보면서 오늘날의 신학이 ‘신약성서 신학 안에서 (그 내용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잘 못된 신학 이해에 따른 분석이 우리들에게 “나사렛 예수께 대한 재 질문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비판과 함께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일반적인 관계 안에서,” ‘유대인들의 비난을 통하여 원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의미가 증대되었거나 거절되었던 관계 안에서,’ ‘나사렛 예수가 이루시고, 선포하신 것들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구약성경과 이스라엘 백성의 의미 안에서,’ 등등에 따라 신학이 새롭게 확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에 형성된 신학들도 재검토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속력 있는 신학은 고대후기에 발전하였다. 성경을 토대로 하여 로마제국의 사회, 종교, 정신과 유대교의 실천적이고 종말론적인 요소들이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은 헬라사고를 이용하였다. 특히 중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라틴어 문화권에서 신학은 윤리적인 실행을 위하여 스토아주의 자들과 로마 법률의 사고에 빚지고 있다.

교부들의 신학은 두 가지 토대를 갖는다. 철학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헬라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제한으로 규정을 갖는다.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서 나타난 특징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냉담한 분(ἀπαθής)이고, 말로 할 수 없는 분(ἄρρητος)이고, 낳아지지 않은 분(ἀγέννητος)이고, 볼 수 없는 분(ἀόρατος)이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 이해하려는 철학에 대하여 격멸하듯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 가르침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 할 수 있었다.

헬라교부 오리게네스는 첫 번째 초월적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두 번째 영이나 하나님을 통하여 자연적인 질서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정한 신학의 원천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 또한 성경말씀이 모아지기 이전 공동체 내에 구전전승에 의하여 형성 되었던 이레나이오스의 “신앙의 규범” 혹은 “진리의 규범”을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가 따랐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단어 이해를 그의 그리스도교의 주변 환경 안에서 배웠다고 증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교부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가 신앙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학논쟁들이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의 진술들은 논쟁들을 통하여 철학을 신학과 함께 일치시키기 위하여 교부들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했다.

 

고대교회의 신학처럼 중세교회에서 신학은 역시 학문적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12세기까지의 신학은 수도원 중심의 신학이었다. 수도사들은 전체 성경을 그리스도의 복음(알레고리)으로, 교회와 그것의 성취(유형론)로, 그리고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살폈다. 이러한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스콜라신학에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전통의 권위 옆에 다양한 전승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이성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신학자들이 원자료를 선택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강조하게 됨으로서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양대 사상의 대립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090년 이래로 보편성 논쟁이 일어났다. 아벨라드(Peter Abaelard, 1070-1142)는 그의 글 Sic et non (『예 그리고 아니오』)에서 변증법을 사용하여 ‘교회의 진리성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항상 성의를 다하여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여정은 “탐구하고 숙고하는” 작업 너머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방법은 전체 스콜라주의와 연관 되어 있다. 그리고 스콜라주의 자들은 모순을 극복하고 남아 있는 진실성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통은 철학적인 비판과 논리적인 논쟁의 도움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결과적으로 이제까지 진리(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를 찾고, 발견하여 보존한다는 신학의 특성을 변혁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베네딕투스 수도회 속소 수도사였던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von Canterbury, 1033-1109) 역시 신학방법론으로 변증법을 중시하였으며, “이성과 계시”의 문제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를 지닌 말로 자신의 주장을 세웠다. “알기 위하여 내가 믿고 믿음은 앎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함께 중세 전성기 초에는 신학과 철학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고, 사람들이 철학을 활용하여 신학을 학문화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런 이유로 1210년과 1215년 파리대학에서는 Aristoteles의 강의가 일시적으로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신학이 학문화 되어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이고 학문이 갖는 문제점이 그리스도교의 본래의 가르침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는 위험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본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고 학문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본질을 변형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신학이 학문으로 머무는 것에 대한 도전은 종교개혁 이후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B. 신학을 학문이라고 할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입증되는 것은 시대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하고 타종교들과 이단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하여 당대의 백성들의 의식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배워 성경말씀에 능했던 오리게네스는 아버지가 순교(203년)하자 뒤 쫒아 순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어머니의 만류로 살아남아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기위하여 판타이노스가 세운 철학학교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함께 철학 선생을 하였다. 후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이오스가 세례문답교시자학교를 설립하여 그를 책임자로 세우자 그는 이제까지 생계를 위하여 사용하였던 세상적인 도구인 철학서적들을 내다 팔거나 철학자로써 자신이 집필한 글들을 태워버렸고, 성경으로만 가르치려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배우는 학생들과의 배움의 장에서 만남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은 두 단계의 교육과정으로 나누어 가르치면서 도구로써 철학을 다시 활용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230년 이후 오리게네스가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레이아로 옮겨 동일한 학습기관을 유지하는 동안, 그는 폰토스 출신 그레고리오스와 그의 형제 아테노도로스를 5년 동안 교육하여 그들의 고향 폰토스에 선교감독으로 파송하여 그들의 고향 선교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리게네스가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은 ‘헬라-로마 학문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선 철학을 가르쳤고, 최종적으로 “거룩한 훈련(연습)(τὴν θείαν ἄσκησιν)”으로 그들의 처음 연구를 바꾸어 놓았다.’고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는 기술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매일 밤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근본적으로 학문으로써의 신학은 13세기 첫 50년에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신학자들은 신학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을 기하학에서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 같은 방법론을 찾아낼 때만 하더라도 아직도 은혜를 강조하는 특성이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을 활용하는 신학자들은 신학의 학문적 설명의 원리로써 신앙의 항목(신앙고백)을 파악하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항목에는 학문으로 이해하였던 신학의 학문적인 원리를 위하여 하나의 본질적인 속성인 ‘명백한 증거’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당시 세속성직자들에 의하여 대변되었던 조명이론(Illuminationstheorie)이 신앙의 항목들에 신비의 증거를 덧붙였다. 물론 이들은 학문이 신학에 종속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크뷔노의 토마스(1225-1274)는 관계성에 있어서 신학과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 학문이라는 이해에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글 summa theologica(『신학의 최고의 것들/ 신학대전』)에서 얼마간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방법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수행하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3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수도회들(Dominicus 수도회, Franciscus 수도회 등등)은 다른 종교들 즉 이슬람교도, 유대교도들과 그리고 이교도들과의 접촉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항하여 제기하였던 항변들을 논박하는 방법들을 찾아 내어야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완성의 예증 아래서 신앙의 전제들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전제들에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이 속했다. 이러한 진리들이 그것들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앎을 제공하였다. 또한 이 진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통하여 실증되었다.

실증을 위한 노력들은 중세 전성기에 두 가지의 거대한 전통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떠한 상관관계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가?”를 고찰하여 종합을 이룩한 사람은 아크뷔노의 토마스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적인 사고 가운데 나타나는 내용의 다양성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중적인 진리의 문제로 조화를 이루었다. 토마스는 철학의 관점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신학적인 관점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는 또한 철학과 신학, 자연과 은총, 지식과 신앙을 이층집 모양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철학이라는 아래층은 위층인 신학을 돕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식과 신앙의 언어들은 구별되지만, 총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서로 대응하여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잘 아려진 대로 이 시기에 신학은 학문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학문으로써 신학을 이해하여 활용하였던 중세 전성기의 신학은 신앙의 내용의 명백한 증거와 다른 종교들이 제기한 항변들을 논박하려는 시도에서 학문성을 증대시켰으나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분명히 하고 보존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중세 후기에는 이러한 사상체계에 다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토마스가 신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었지만 학문으로써의 신학이 가져온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세 전성기의 신학은 진리의 다중성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단 규정의 범주 안에서 옥캄의 윌리엄(Wilhelm v. Ockham, 약 1285-1347/49)은 성경의 내용들, 사도의 전통들, 계시들, 역사적 선포들과 그것들로부터 도출되었던 결과들을 “보편적인 교회의 진리(veritates catholicae)”로 설명하였다.(Dialogus I,2,5) 후기 중세의 신학자였던 윌리엄은 토마스와 다르게 다시 신학과 철학을 날카롭게 구별하였다. 그에게 하나님은 이성을 통하여 이해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는 이성은 단지 이세상적인 것에 관해서만 유용한 것이고, 성경은 계시의 역사성에 대하여 올바른 설명을 제시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옥캄의 윌리엄의 은총론은 무게 중심을 인간 편에 두는 경향이 있어서 펠라기우스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윌리엄의 사상은 튀빙엔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95년 사망)을 통하여 훗날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찰스 로(Charles Lohr)는 그의 글에서 중세 후기의 “개혁신학”의 특성으로 하나의 감동적인/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신학(Theologia affectiva)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로는 당시 신비적인 사고들이 theologia affectiva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신학의 특징은 지적인 하나님 이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생동감 있는 하나님 경험에 달려 있다. 1427년 이전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 Christi)은 하나의 “사변적인 행동이론”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게 되었던 영성”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은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도덕적이고 계몽되어졌던 중세 개혁신학은 15세기 수도원과 대학에서 그 의미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의 발전은 16세기 종교개혁 논쟁들을 통하여 의미 있는 자극들 받았다. 로테르다무스의 에라스무스(Erasmus v. Rotterdamus)는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해 성경의 원문을 강조하였다. 이제 중세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의하여)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Zwingli) 당시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는 교회의 전통이나 그것과 관련된 것들에 대하여 불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루터는 복음의 공공연한 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을 실존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위하여 신학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전통신학의 역사를 일률적으로 규정에 맞추었다. 젊은 루터에게 개혁의 신학프로그램이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구조에서 형성되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루터의 개혁 프로그램이 아마도 최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승된 전통들의 비판적인 재 습득으로써 그의 견해의 빛 안에서 창조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가 허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후계자 이었던 멜란히톤(Melanchton)은 종교개혁을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회복(Repristination)으로 간주하였다. 교부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칼빈(Iohannes Calvinus)의 총체적인 글들을 위하여 하나의 렌즈를 제공한다고 맥그래스는 주장한다. 그 렌즈를 통하여 칼빈은 성경을 읽었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경해설에 대한 체계적인 강력한 가르침이 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기독교강요/ 그리스도교 신앙심에 대한 강의(가르침)』)를 기술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신학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사도들에 의하여 전해진 진리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의 재발견 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중세에 신학과 철학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신학을 학문으로 깊은 관심을 갖고 전개하였던 신학의 산물에 대한 비판과 수정을 이루었다.

 

 

2. 신학이 학문이 아닌 역사적인 예증

신학이 학문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크고 작게 수 없이 역사 속에서 실증되었다. 그 중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세 가지, 1)최초의 라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2)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3)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예에서 살피고자 한다.

 

 

1) 테르툴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있어서 그가 당면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영지주의와 마르키온과 그의 제자인 아펠레스, 헤르모게네스와 같은 이단들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영지주의는 140년경부터 180년경까지 교회를 혼란에 빠뜨려 그리스도교 존폐의 위기를 가져다주었던 이단이었다. 이들은, 아직 교회가 체계화 되지 못하였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갈 뛰어난 지도자들이 없을 때, 여러 사상을 혼합하는 철학 사조의 교육받은 자들로서 “학파의 우두머리들,” “체계화 하는 사람들”로 불릴 만큼 학문에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영지주의 자들은 위경을 써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들의 글들의 구별을 어렵게 하였던 자들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때는 교회사적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약성경이 모두 모아져 거의 모든 공동체들에 알려져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아진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의 문제와, 높은 혼합주의 철학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핵심내용을 왜곡하여 항변하는 이단들과의 논쟁이 현안문제로 떠올랐던 때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당대의 이단들이 철학으로 무장하여 진리를 왜곡하였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발렌티누스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와 다르게 플라톤 철학으로 “아이온들(무한히 긴 시간),” “무수한 형태들,” “인간의 삼분할”을 가르쳤고, 마르키온주의 자들은 “하나님이 침묵으로부터 더욱 선하신이다”라고 가르침으로써 스토아 주의자들을 따르고 있다고 비판을 가한다. 마르키온의 제자였던 아펠레스는 한 여인과의 타락으로 마르키온의 금욕주의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로 떠났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와 알렉산드리아 영지주의를 도시 로마에서 소개하는 자가 되었다.

발렌티누스는 부활을 부정하였고, 30개의 아이온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유일한 아이온의 오류로부터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기원을 이끌어 내었다. 마르키온은 창조자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가르쳤고, 아펠레스는 창조자를 위하여 데미우르고스를 들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구별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학문성으로써 “지식욕(curiositas)”을 규명하였다. 이단들이 마 7:7, “...찾으라..”라는 말씀을 증거로 자신들의 학문적인 작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항변할 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성구를 해석하여 이단들을 반박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이고,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인 자들은 “해석의 조종간을 가지고 온전한 방법으로 찾으라.”는 뜻인데, 이렇게 찾는 일은,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명백한 가르침”을 가져왔음으로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찾았을 때 믿을 수 있기 위하여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찾는 일이 지식욕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는 즉시 믿고, 믿음 안에서 받아들였던 것을 보존하는 일 외에 어떤 찾는 일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적으로 그리스도가 가르쳤던 것, 즉 믿음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찾고, 찾는 즉시 믿으며, 그리고 이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지 계속하여 진리를 찾을 이유가 없다고 명확히 주장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들이 성경 중 몇몇 책들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의 교리의 주장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첨부물”과 생략을 통하여 변조하였거나, 때로 어느 정도 성경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상반된 날조를 통하여 성경을 변형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마르키온은 신약성경을 구약성경과 나누었고, 발렌티누스는 다른 영지주의 자들로부터 유래한 것들에 의하여 성경을 상이하게 설명하고 “정정하였다.”고 판단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들을 “진리의 위조자들(adulteros veritatis)”이었다고 비판하였다. 이 날조자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해석을 통하여서도 날조하였다. 성경의 변조는 “제거를 통하여 혹은 첨부를 통하여 혹은 치환을 통하여” 일어났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있어서 바른 신학은 영지주의자들처럼 지식욕에 의하여 이루어진 학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각종 철학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진리의 근원과 출처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인간이며 하나님, 신앙의 스승, 보상의 약속자(mercedis repromissor)로서 칭한다. 진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에게 위탁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기원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많고 위대한 교회들이 근원인 하나인 교회 즉, 최초의 교회에 관련이 있다고 정의한다. 시초의 사도들의 교회들과 신앙의 기원들과 일치하는 모든 가르침이 진리에 합당한 것이다. 이 진리는 “교회들이 사도들로부터, 사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2) 마르틴 루터와 칼빈

1509년경에 루터는 요한네스 폰 스타우핏쯔의 권면으로 성경을 읽고 교부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개혁은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1513년 이후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종교개혁신학의 발견이 구체화 되었다. 루터는 이미 공로(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의에 이르게 된다는 사상을 이 시기에 발견하였다. 아울러 루터는 1545년 임종 전 해의 회상에서 “낙원의 문”이 자신에게 열리게 되었던 것을 언급하면서, 1518년에서 1519년 사이 로마서의 중심 본문 1:17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이제까지 뚝을 쌓아 막아두었던 종교개혁을 위한 만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에게 종교개혁의 중심 세 가지 표제어가 1513년부터 1519년 사이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루터는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 그리고 이러한 은총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신앙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만 얻어진다. 생명의 원천이고 하나님의 증서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하나님은 계시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고 확립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성경의 해설자요, 성경원리의 옹호자인 루터는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것이 성경해설의 기준이라고 가르치고 “오직 그리스도로(solo Christo/ solus Christus)”를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제시하였다.

종교개혁 과정에서 루터는 철저하게 성경을 활용하여 당시 학문으로 확립되었던 스콜라신학을 반박하였다. 루터는 그의 반박에서 당신 학문으로써 스콜라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근거하여 제공하였던 신학개념들과 사고의 범주들을 중심적으로 비판하였다.

1545년 3월 5일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라틴어 저작들을 모아 출판하면서 자신이 “낙원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혐오하였다고 회상한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선생들의 관례와 습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형식적이고 능동적인 의(iustitia activa)”로 “철학으로 이해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 자신이 “수도사로서 책망할 것 없이” 살았지만 그와 같은 공로가 자신을 “가장 불안한 양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였고, 당시의 중요한 가르침이었던 “보상(satisfactio)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이 화해되었던 것을 신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의로우시고 죄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더욱 더 혐오하였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루터는 종교개혁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밤낮으로 말씀들의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는 동안”에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자신이 롬 1:17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의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는 즉,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이러한 의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수동적 의(iustitia passiva)를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때 자신이 “열려진 문을 통하여 낙원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하였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우리들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권능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을 능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을 뜻하고....”라고 열거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은 당시 신학을 학문으로 이해하였던 스콜라 신학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오직 성경을 밤낮으로 연구하고 해설함으로써 중세의 그릇된 사제교회를 철저하게 개혁할 수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독일어로 쓴 글들을 모아서 출판하는 책의 서문을 쓰면서 많은 교부들과 교회회의들의 글들과 자신이 쓴 글들이 보존되는 것이 유익하고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의 범주라고 주장하고, 그것들이 결코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낫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쓴 그와 같은 것들이 몰락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유감스럽지 않다고 피력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만약 사람들이 루터 자신의 글을 읽기 위하여 성경을 의자 밑(발아래)에 놓는다면 자신의 글들이 오래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강조하였다. 루터는 신학을 학문과 구별하여 경험의 지혜라고 표현하고 신학이 사변화 하는 것을 경계하여 실천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계속하여 신학의 바른 방법으로, “시편 119편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시편에서 보는 것처럼 세 가지 규범들”을 제시한다. 즉, 기도(Gebet), 묵상(Meditation), 안페히퉁(Anfechtung-영적인 시련과 경험). 첫째로, 기도라는 항목을 설명하면서 루터는 성경 이외에 어떤 책들도 영생에 대한 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다른 책들을 몰상식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할 때 이성을 가지고 그 안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요구한다. - “나를 가르치소서! 나를 지도하소서! 나를 이끄시고 나에게 보이소서!” 둘째로, 묵상이라는 항목을 설명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 마음으로만 아니라 외적으로 구술과 성경 안에서 단어들을 반복하여 읽고 다시 한 번 더 읽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그와 함께 생각하는 것을 열심히 주의하고 숙고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이것이 더 이상 특별한 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셋째로, 안페히퉁을 설명하면서 이는 스스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힘이 있고 위로가 되는 지를 그리고 또한 모든 지혜들 위에 지혜인지를 알고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험하도록 가르치는 시금석이라고 주장한다.

 

1536년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그리스도교 신앙심(경건)의 학습/ 강의)를 집필하면서 종교개혁을 이끌기 시작하였던 요한 칼빈(Iohannes Calvinus)는 “마르틴 루터의 가장 유명한 문하생” 가운데 하나였다. 칼빈은 루터에 비하여 성경의 위치에 대하여 더욱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주권과 존엄성을 더욱 강조 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신학을 보다 진전 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칼빈에게는 루터가 주장하였던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의 신앙의 가르침을 강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의 신학을 확립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증언(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으로부터 나온다.

아울러 칼빈은 그의 주저에서 신학이라는 말을 3회(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5,12; I/8,3; IV/7,27) 애굽의 신학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신학을 신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경건의 규범(pietatis regula, I/14,3; I/17,6)”과 “신앙심과 경건의 규범(religionis pietatisque regulam, III/10,1)”을 강조하고 매우 빈번히 그의 글에서 “경건의 연습(pietatis studium)”을 요구하고 있다.

 

 

3) 독일의 경건주의

독일의 경건주의는 1675년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의 글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루터교 정통주의는 고백(신조)에 속하는 신학의 한 부분이다. 교리와 호교론 이 둘이 중심학문 분야 이었다. 칭의가 루터교 정통신학의 중심이었다. 이와 같이 마르틴 루터의 개혁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다시 학문의 특성이 강해지게 되고 점차 쇠퇴하여 교리화, 교조주의화 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공동체들에게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럼으로 이에 반박하여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싸움은 계몽주의라는 거대한 공동의 적이 등장하면서 약화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도 웨슬리운동이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들 등에 일어난 부흥운동이 당시 생명력을 일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의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해 오게 되었다.

 

 

 

결론

 

 

한국교회 갱신의 하나의 사례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표제어를 제시하였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아직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신학용어가 아직 명료하거나 넉넉하지 않다고 평가 받는 부분이 있어도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계몽주의와 견주어 오늘까지의 역사적인 진전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이단들은 성경의 가르침 이외에 찾아야 하는 진리(비밀의 가르침)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일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제외시키거나 내용을 첨부하거나 변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식욕(학문)”을 충족시켰다. 이에 대하여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그리스도-사도들-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더 이상 찾을 이유가 없이 그 진리를 보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신학을 “학문”으로써 주장하였던 스콜라신학/ 철학을 반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마르틴 루터 사 후에 루터교 정통주의에 의하여 신학이 교리화하고 교조주의화 하여 그리스도교가 생명력을 잃는 것에 반박하여 독일의 경건주의가 일어났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에서는 웨슬리 운동이, 그리고 미국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역사가 주는 교훈은 신학이 학문으로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신학이 단순히 학문으로 머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신학이 학문인가 아닌가의 질문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13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신학을 학문으로 이해하면서 신학이해의 발전과 함께 스콜라철학은 곧바로 스콜라신학이었다. 이 시기에 신학은 학문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학의 전통은 오늘까지도 로마 카톨릭교회에 남아 있다.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신학의 학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신학의 학문적 노력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것 조차도 무의미하다. 신학이 학문으로 끝나는 것을 경계한다. 신학이 한낱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학의 학문성을 인하여 학문의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신학의 근거는 하나님의 계시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시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진리가 신학의 근거요 내용이다. 신학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Abstract>

 

Heutigentags sei die koreanische Kirche einer kritischen Lage gegenüber gestellt. Für das Überwinden dieser Krise hat der Gründer des Baekseok Institutes Rev. Dr. Jong Hyun Chang “the Reformed Life Theology” vorgeschlagen. Er behauptet, daβ “the Reformed Life Theology” ein ‘Majungmul’ d. h. ein ‘Priming’(eine Zündmasse) für “the Reformed Theology” sei. Das Schlagwort zu “the Reformed Life Theology” ist ‘die Theologie sei keine Wissenschaft.’ In diesem Traktat erzälhle ich einige kirchengeschichtliche Beispiele als eine kirchengeschichtlich-wiederholte Aufforderung über ‘die Theologie sei keine Wissenschaft’ in der Theologiegeschichte bei Tertullianus, Martin Luther, Calvinus und im Verhältnises zwieschen der lutherlischen Orthodoxie und dem Pietismus.

 

 

● Key Words: Renovation, The Reformed Life Theology, curiositas, adulteros veritatis, sola scriptura, pietatis regula, pietatis studium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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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백석대학교 역사신학교수)/한국개혁신학회 논문집 제 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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