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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이유

하나님아들 2024. 3. 16. 11:39

자살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이유

 

자살, 가장 불행한 선택

 

 

경찰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하루 평균 3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보다 적었던 2006년의 통계로 견주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치인 하루 평균 30~32명보다도 더 많다.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자살하면 그 파장은 매우 크다.

 

유정화 간호사는 “12년간 유명인 자살을 분석한 결과 영화배우 이은주 씨가 자살했을 때 일반인의 모방자살이 가장 많았다. 어느 여성자살자는 자살하기 하루 전에 전화를 걸어 ‘이은주가 죽는 걸 보니 나도 빚에서 해방될 방법을 찾았다’는 말을 했다. 이 씨가 자살한 2005년 2월 22일부터 1개월 간 총 1천160명이나 자살해 유명인의 자살이 없던 다른 해 같은 기간보다 425명이나 많았다”고 설명했다.

 

자살공화국된 한국

 

한국의 자살은 어느 OECD국가보다 높은 편이다. 안재환 씨에 이은 최진실 씨의 자살은 물론 무명인의 자살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높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병리적 현상이다.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사회적인 복잡한 요인이 있지만, 이것이 마치 자살자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과 함께 도피처처럼 생각하는 것이 결국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지 않나 싶다.

 

자살의 이유

 

자살에 대한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회적(제도적) 원인과 개인적인 원인이다. 하지만 그 원인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다. 우울증과 스트레스는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이것이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압박이 동반될 때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택할 수 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자살을 부추기는 심각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카드빚과 사채로 죽음을 선택한 안재환 씨가 그런 경우다. 세상의 가치관은 많이 소유한 것이 행복할 것이라고 속삭인다. 편부모, 노인성질환, 소외된 이들, 성적비관 등 비뚤어진 제도와 가치관은 사람들에게 가장 불행한 선택을 하도록 종용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불행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조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최진실 씨의 죽음과 함께 다시 논란의 도마에 오른 인터넷 악플은 ‘사이버공간에 있어서의 책임’에 대한 법적 제재를 두고 여당과 야당이 공방을 하고 있다.

 

사이버의 무도덕성은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자유는 도덕이 동반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의 악플과 관련된 구조개선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이유의 자살

 

자살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그 중에 우줄증은 자살 원인의 상위에 속한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자살자의 상당수가 이미 가벼운 우울증단계에서 자실을 결심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자살예방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우울증 환자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가 우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도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우종민 교수팀이 2005년 보건복지가족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인이 9.8%가 언제든지 불안장애에 걸릴 수 있는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잠재군은 22.2%로 전체 직장인의 32%가 불안장애 위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부적응과 직장이 없는 이들의 자살, 성형수술 부작용 비관 자살 등 자살은 이유 없는 사회적인 반항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살의 심각한 문제는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 오는 것이다. 한림대 철학과의 오진탁 교수는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자살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둘째, 자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기 않기 때문이다.

셋째, 자살이 끝이 아니며, 자살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에게는 자살권이 아니라 인간답게 죽을 권리만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자살은 남은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여섯째,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자살 이후에 대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다면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죽음관이 있다면 사람들은 쉽게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죽음의 선택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 이후의 삶은 그가 선택할 수 없는 또 다른 고통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사후는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그 죽음과 관련된 책임 추궁, 그리고 심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자살한 자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주지한다. 자살은 곧 지옥이라는 도식적인 틀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결국 선택은 제삼자가 아닌 본인이라는 점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자살하면 현재의 고통을 단숨에 벗어난다는 무지몽매한 착각은 자살을 쉽게 선택한다. 또한 이 세상과 사회가 나를 자살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엄연한 자기 도피다. 모든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고, 또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통제 권리가 이미 그리스도께 양도되었다는 점에서 자살은 용납되고 타협해야 할 사안은 아니다.

 

또한 한 영혼은 개인의 것이지만 사회조직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준다. 가족에게는 가장 큰 상처를 남기고 그것이 평생 가지고가야 할 짐이다. 또한 유명인들의 죽음에 따른 모방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끼치는 사회적 연관성을 볼 때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의 자살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기독교인의 자살이다. 정다빈, 이은주, 안재환, 최진실 씨 등은 모두 교회를 출석했던 성도들이다. 더구나 안재환 씨의 경우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간증까지 하고 다녔다. 연예인들의 간증에 대한 문제는 지금 다룰 수는 없지만, 이들이 말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그들의 삶, 그리고 자살은 지금 교회가 성도들에게 참 생명을 가르쳤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물음이다. 또한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가장 불행한 선택인 자살을 함으로써 끝을 맺은 것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여부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없다. 최진실 씨는 물론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 이들의 장례에 등장한 십자가, 그리고 예배의 모습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사탄은 그들의 목적에 희생된 이들을 통해 교회를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유명한 이들만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살을 한다는 점이다. 유명한 교회 장로 한 명도 최근 자살을 했다. 교역자보다 더 열심히 교회를 섬겼던 그가 채권자를 음독으로 살인한 뒤에 본인도 음독자살을 해버린 일이 벌어졌다.

 

이제 자살은 교회 밖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고백이 얼마나 허무하고 쉬운 입술의 고백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맡기지 못하는 ‘내 삶의 주인’ 노릇하는 연약함이나 혹은 참된 거듭남이 없는, 성령의 사로잡힘이 없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회는 우선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우리 자신의 참된 생명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필요하다. 더구나 거듭남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할 때가 왔다. 모든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입술의 고백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에서 벗어나 성령의 온전한 인도 가운데 마음으로 시인하는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루이스 에빌리는 “의지로 종교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교회를 다녀도 종교적인 틀에서 머무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이방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아닌 그분의 전적인 역사 속에 항복된 순종으로서의 영생이 있어야 쉽게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자살에 대한 성경적 이해

 

가톨릭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정죄한다. 기독교 역시 자살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한 이들에게 대해 장례도 거부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자살은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으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함에도 그것을 거스려 스스로 생명을 통제하려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가 된다.

 

또한 자살은 살인행위가 죄이듯 자신을 살해했다는 점에서 죄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죄악이다. 창 9:6의 말씀처럼 이웃살해와 동일하게 본인이 본인을 살해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자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예수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당신의 생명으로 대치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생명으로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택했다면 복음을 거부한 것이 된다.

 

신원하 교수(고신대학교 기독교윤리)는 “자살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신 교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것 같이 보이는 삶도 감사와 소망의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고 자원이다. 그러나 자살은 이런 소만과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이다”고 말한다.

 

자살에 대한 예방

 

자살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어리석음을 계속 저지르는 죄악이다. 일본의 경우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만 파악했다는 반성을 토대로, 지난해 처음 정부 차원의 대책백서를 내고 예방에 힘쓰고 있다. 핀란드는 1980년대 말부터 자살자들에 대한 사후 정밀조사를 바탕으로 대책을 마련해 인구 10만명당 30명이 넘던 자살률을 10년 만에 20명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기독교에서는 자살 문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참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은 물론 공동체적인 관심을 개인 개인에게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적인 악의 구조를 개선하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인터넷의 악플을 없애는 문제, 우울증에 대한 대처, 죽음을 이해는 모임 갖기 등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야 한다.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연약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배려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