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포로 칠십 년’과 다니엘의 기도(9:1~19)
1. 다니엘이 예언된 연수(年數)를 깨달음(9:1~2)
막강한 세력을 떨치던 바벨론 제국도 영원할 수 없었다. 세계적인 대제국이었던 그 나라는 이미 오래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종말을 맞게 되었다. 바벨론은 벨사살 왕이 통치하던 BC 539년에 메대의 다리오 왕에 의해 패망했다. 바벨론이 패망하고 새로운 왕국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국제 정치적인 사건을 넘어서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벨론에 속한 시민들뿐 아니라 그들의 속민(屬民)이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감당한 인물은 역시 다니엘이었다. 바벨론 제국이 패망하고 갈대아 출신의 다리오가 새로운 왕국의 최고 통치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주셨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칠십 년’(렘25:11; 29:10)에 관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바벨론의 패망과 더불어 새로운 왕국이 설립된 직후 다니엘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구속사적인 소중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된 ‘칠십 년’(렘25:9~14; 29:10~13)
(1) 다니엘의 예레미야 인용
예레미야는 다윗 왕조의 마지막 시기 멸망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던 요시야 왕 제13년(BC 626년경)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멸망한 직후까지 40여 년 동안 예언했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하던 중에 말씀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던 요시야 왕이 전사하게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도로 타락한 상태였으며 이미 다윗 왕조에 대한 멸망이 예언되고 있었다.
하지만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을 향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준엄한 책망은 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는 이방 신을 끌어들인 세력과 친애굽 세력은 그에게 노골적인 저항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위협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성전 출입까지 금지하였다.
여호야김 왕 시대에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하고 악해졌다. 여호야김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예레미야의 예언을 불사르며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시드기야 왕은 비참한 종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BC 586년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함락되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성전 안에 보관되어 있던 소중한 기물들은 빼앗겨 바벨론 지역으로 옮겨졌다. 시드기야 왕은 자기 자식들이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으며 자신도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일은 인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직면한 처참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겪어야만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심판이었기에 달리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패망한 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는 대신 정치적인 이유로 애굽으로 가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일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유다 왕국은 멸망해 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배도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들먹이면서 예루살렘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입술의 평화’를 노래하며 ‘거짓 믿음’을 앞세워 백성들을 기만했다. 그들과 반대로 이스라엘의 패망을 예언한 예레미야는 도리어 옥에 갇히게 되고 숱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2)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생생하게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방 신을 약속의 땅 안으로 끌어들여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었다. 배도한 지도자들의 그런 종교적인 태도는 신앙이 어린 백성들을 혼란케 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상태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풍요로운 삶을 추구했다. 그들은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뜻을 망각하고 교만의 극치를 향해 치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배도에 빠진 자들을 그냥 보고 계시지만 않았다. 그들은 무서운 징계를 받아야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저들에게 이방인들을 불러 엄한 징계를 내리시겠다는 뜻을 전하셨다. 하나님을 떠나 교만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 당할 것이며 그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이방지역으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에게서 기쁨과 행복의 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고통과 괴로움, 신음의 소리만 들리게 될 것이다. 저들은 풍요가 아니라 궁핍한 삶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래에 임하게 될 그 사실을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셨다.
“나는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 북녘의 모든 족속들을 거느리고 쳐들어 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전멸시키고 이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게 하리라. 사람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기뻐서 노래하며 흥겹게 노는 소리도, 즐거운 신랑 신부의 소리도, 맷돌질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으리라. 다시는 등불이 켜지지 않으리라. 이 일대는 끔찍한 폐허가 되고 여기에 살던 민족들은 모두 칠십 년 동안 바빌론 왕의 종노릇을 할 것이다. 그 칠십 년이란 시한이 차면 나는 바빌론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여 바빌론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이미 선언해 두었던 벌을 그 땅에 내리리라. 뭇 민족이 받으리라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벌을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그 땅에 내리리라. 그리하여 이번에는 바빌론 사람들이 도리어 남의 종이 되리라. 뭇 강대국의 대왕들을 섬기게 되리라. 이렇게 나는 바빌론 사람들이 한 짓들도 그대로 갚아 주리라.”(렘25:9~14, 공동번역)
(3)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은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통한 자신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게 되지만 그것이 저들의 궁극적인 승리가 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파괴하고 자기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이방인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에 대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뜻을 계시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칠십 년이 지나면 그들을 다시금 본토로 인도해 내시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정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패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 말씀이 유일한 소망이 된다. 배도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효력이 있을 따름이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빌론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운 다음에야 약속대로 나는 너희를 찾아 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 주는 것이 좋을지 나는 이미 뜻을 세웠다.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하여 주지 않고 잘 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밝은 앞날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를 부르며 나에게 와서 빌기만 하여라. 그렇게 하면 들어 주리라. 마침내 너희는 일편단심으로 나를 찾게 되리라. 그렇게 나를 찾으면 내가 만나 주리라.”(렘29:10~13, 공동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는 ‘바벨론 포로’의 징계가 무서운 재앙을 내리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우선은 재앙같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장래 영원한 소망을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도록 요구하셨다. 그렇게 하면 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즉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만나주신다는 것이었다. 이방인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저들이 지은 죄악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는 것이었다.
3. 깨달음의 결과에 따른 다니엘의 금식과 기도(9:3~19)
(1)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쓴 다니엘의 기도(9:3~4)
바벨론 제국이 패망하고 다리오가 왕위에 오른 BC 539년에 다니엘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금식을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다니엘의 기도는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 기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대표성을 띠는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니엘은 먼저 자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임을 고백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을 위해 언약을 지키시며 인자를 베푸는 분임을 믿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는 심중으로부터 우러나는 그런 고백과 더불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다니엘이 그렇게 기도했던 것은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과 연관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에게 기도하며 전심으로 찾는다면 응답할 것이며 만나게 되리라는 약속을 기억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2) 죄의 자복(9:4~15)
다니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자복하였다. 그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죄를 자복하는 것과 성격이 다르다.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패망케 한 원인을 제공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공적인 입장에서 회개했다. 다니엘은 유다 왕국에 속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도한 결과 바벨론에 의해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혔던 사실을 기억하며 민족의 죄악을 회개한 것이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패역함으로써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로부터 떠났음을 고백했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열왕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을 듣지 않음을 자복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고 저들에게 치욕이 돌아간 것은 저들의 죄악과 배도 행위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말했다. 다니엘 당시까지 언약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 떠나와 이방지역에 포로로 잡혀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 때문이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들은 과거부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가볍게 여겼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허락하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음으로써 저들에게 저주가 임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으로 정당한 징계였음을 다니엘은 자복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에 이전에 없었던 큰 재앙이 임하게 되었던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내용대로 엄청난 재앙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그 죄악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참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도 않았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 때문이었음을 자복했다. 압제 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심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난 하나님의 명성을 저버리고 그 앞에서 범죄하고 악을 행한 결과 무서운 재앙이 임하게 되었음을 고백했던 것이다.
(3)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거룩한 산(9:16)
다니엘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대한 깨달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았던 인물이다. 이는 그가 하루 세 번씩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던 사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단6:10,13). 다니엘이 그렇게 기도했던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연관된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할 때는 이미 성전이 파괴되고 없는 상태였다.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그 안에 아무런 성물(聖物)들도 없었으며 제사장들에 의한 제사 행위도 행해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당시에는 모든 귀중한 성전 기물들이 바벨론의 이방지역으로 옯겨져 모독을 당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머지않아 회복되어야 할 거룩한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거룩한 산 위의 예루살렘성에 내리시던 노여움과 진노를 이제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잘못과 조상들의 죄 탓으로 예루살렘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이웃 백성들에게 욕을 당하고 있읍니다.”(단9:16, 공동번역)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특별히 기억했던 것은 그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의 성소(聖所)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소란 예루살렘 성전과는 다른 특별한 장소적 개념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성소였던 까닭은 하나님이 그곳을 특별히 지명하여 구속 사역을 이루어 가시고자 했던 것과 연관된다.
예루살렘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살렘 왕 멜기세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창14:17~24 참조).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그와 그의 후손들이 멜기세덱에게 속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인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하신 장소도 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는 장소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 산을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셨다. 아브라함이 그곳을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소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정해 주신 것이다.
그때 이후로 예루살렘은 중요한 언약의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의 실제적인 초대 왕이었던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그곳에 성전을 건립하도록 하셨던 것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립된 것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이 일차적으로 완성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구약시대의 여러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이 바쳐졌다. 또한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직전 애굽에서 있었던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하는 제물들이 바로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쳐지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예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례자 요한이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묘사한 것과,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그의 몸이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진 사건은 예언에 대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바쳐졌음에 대한 증거는 그의 목숨이 끊어질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사건’(마27:51)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니엘이 이방지역에 거주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을 열고 그것을 바라보며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이런 의미와 연관되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서 예루살렘과 거기 있는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고 원래의 상태가 회복되도록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4)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간구(9:16~19)
다니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용서를 구했다. 예루살렘과 그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이방지역에서 치욕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해 하나님의 공의를 좇아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의 얼굴빛이 황폐하게 된 성소인 예루살렘에 비쳐지기를 기도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택하신 주의 백성이 치욕 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다니엘의 기도는 간절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언약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황폐한 상황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의 의(義)를 의지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큰 긍휼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했다. 다니엘은 그 일을 지체하지 말고 응답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는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주님, 들어 주십시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읍과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읍니다. 그러니 주의 명성을 돌보시어 지체하지 마시고 곧 이루어 주십시오.”(단9:19, 공동번역)
우리는 다니엘의 기도 가운데 이 부분을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는 예루살렘 회복과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지체하지 말고 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인 열망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칠십 년’ 기한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신 내용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감하기 위해서라는 점에 앞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임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주시도록 간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의 패망이 예루살렘 회복과 성전 재건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에 충실했던 다니엘이 바벨론의 멸망과 새로운 왕국의 발흥을 보며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4. ‘바벨론 포로 칠십 년’의 기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5년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유다 왕국을 굴복시킨 후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게 된다. 그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 다니엘이 섞여 있었다. 바벨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을 뿐 아니라 그때부터 유다 왕국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왕을 임의로 폐위시키고 임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이 아직 파괴된 것은 아니었지만 유다 왕국은 사실상 바벨론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는 형편이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597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또다시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 가운데는 선지자 에스겔이 포함되었다.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가지고 있던 민족적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일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바벨론 제국에 등을 돌리고 애굽의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그것이 빌미가 되어 바벨론 제국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침공해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고 성벽마저 허물어버렸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벨론에서의 칠십 년 포로 기간은 BC 605년부터 계산되는 것이 옳다. 그로부터 칠십 년 후는 대략 BC 536년이 된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바대로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메대의 다리오 왕에 의해 패망하고, 그 후 BC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유대인들의 본토 귀환이 허용된다. 본토 귀환이 허용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시 본토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얼마 동안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과 토지를 비롯한 소유물들을 처분하고 귀환을 원하는 자들의 전체적인 명단을 작성하고 정리하는 데 몇 년을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약속의 땅 가나안 본토에 귀환한 연대는 BC 536년 경이었다.
이는 고레스 왕이 특별히 친유대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말이라기보다 신흥 페르시아 제국의 관용 정책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바벨론 제국이 시행했던 강압 정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종의 차별정책을 폄으로써 피지배 민족들로부터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온 종족들에 대한 고레스 왕의 귀환 허용 칙령은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종족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4. 본받아야 할 다니엘의 삶과 기도
다니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에 충실한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의 성소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성취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과 메대-페르시아 제국에서 최고위 공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바벨론 제국은 유다 왕국을 패망시킨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였다. 바벨론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성전 기물들을 바벨론으로 강탈해와 더러운 이방 신전에 둠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아와 저들의 관할 아래 두고 엄청난 핍박을 가했다. 그런 원수의 왕국에서 다니엘은 최고의 공직자로 지냈다. 나아가 바벨론 제국이 패망한 후에는 뒤이어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페르시아 제국의 최고위 관료가 되었다. 그것 역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 나라의 충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메대-페르시아 정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수용했다.
우리는 다니엘의 그런 정치적인 자세를 통해 그의 관심은 세상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음을 엿보게 된다. 그에게는 세상에서 누리는 지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형편과 여건에 따라 세속 왕국의 정치와 행정에 가담했으나 그것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왕국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경륜 가운데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한 다니엘이었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생활 칠십 년을 앞두고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와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했다. 다니엘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성도들 역시 다니엘의 신앙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죄를 자복하며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다니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자신을 위해 이루어져 가도록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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