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칠십 이레’(9:20~27)

하나님아들 2024. 3. 13. 13:22

‘칠십 이레’(9:20~27)

 

 

 

   1. 다니엘이 한 기도의 본질(9:20)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작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기도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을 위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먼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죄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문제였다. 다니엘이 그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자복한 것은 그가 실제로 지은 구체적인 죄라기보다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백성으로서 그의 죄도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은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소간 다르다. 아담의 자손인 모든 인간은 당연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죄의 집단성에 관한 문제이다. 다니엘은 의인이자 믿음의 조상으로 설령 큰 죄가 없이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한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는 한 그 역시 죄에 참여한 것이 된다. 즉 다니엘은 자기와 이스라엘 민족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인 윤리를 앞세워 의인이 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또한 올바른 교회의 자리를 벗어나 혼자 의로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하고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을 떠난 위치에 있다면 다른 악한 자들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은 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동시에 자복했다. 그는 그 죄를 자복함으로써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결심을 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의미에 국한된다면 그것 역시 개인의 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한 방편이 될 우려가 있다. 다니엘은 메시야를 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2. 하나님의 응답(9:21~23)

 

   선지자 다니엘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 무렵 그가 기도하는 동안 앞서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와서 앞뒤 정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칠십 년의 포로 생활 이후 본토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다니엘이 알고 있던 때였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자신이 온 목적은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그는 또한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자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구속사적인 내용이 있음을 언급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칠십 이레’와 앞으로 오시게 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메시야에 관련된 예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의미이다. 다니엘에게 특별히 그 말씀이 주어진 것은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 본토로 돌아가게 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는 단순한 역사적 전개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토 귀환은 결코 자유로운 삶의 획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귀환의 근본적인 목적은 저들의 독립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방 민족의 압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그 점을 분명히 알려 주셨다. 이는 비록 다니엘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깨달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본분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루살렘과 그 가운데 세우신 성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 칠십 년을 마친 후 본토로 귀환하게 되면 장차 그곳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특별히 칠십 이레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주셨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그 의미를 마음속에 깊이 품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모든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연대에 관한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는 하나님께서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그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생각하면 인간들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연대기적인 비밀의 영역에 가두어 둠으로써 겸손한 삶을 요구하셨음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서에 기록된 말씀을 마지막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도록 하신 것(단12:9)에는 그런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칠십 이레에 관한 예언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니엘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무리하게 해석하여 단정적으로 확정 지으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되 모든 것을 확정 지으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칠십 이레에 연관된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해석을 하는 가운데 자기주장을 확정 지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겸손한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그 말씀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달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다윗 왕국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에 관한 예언이 커다란 소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니엘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이 칠십 이레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선지자들과 민족 지도자들은 그에 더욱 민감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다니엘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에스겔을 비롯해 그 후에 살았던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선지자들은 물론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등 온전한 신앙을 가졌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그것의 의미를 깊이 상고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들은 숫자적인 의미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비단 정확한 연대를 산정하여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3. ‘칠십 이레’의 기한(9:24~27)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 왔다. 그것을 전적으로 상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연대를 분명히 제시하는 세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자들도 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단순한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칠십 이레에 관한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연대기적 접근을 해야 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연대를 손꼽아 계산하며 하나님의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힘든 여건 가운데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계시된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원천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셨음을 다니엘에게 알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은혜였다. 그때가 완료되면 모든 허물과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9:24)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는 이 말씀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진행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는 공의로운 심판과 더불어 마감하시게 된다. 따라서 정한 기한이 이르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게 되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사실 불신자와 배도자들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이방인의 포로로 사로잡혀 신음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본토에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말씀 자체가 소망과 기쁨이 되었다. 그전에 여러 선지자들과 다니엘에게 보여주셨던 모든 이상들과 예언들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은 궁극적인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위 본문 말씀 가운데 또 하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지극히 거룩한 자’에 관한 이해이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극히 거룩한 자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 거룩한 자가 장래 칠십 이레로 정한 때가 이르면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실제로 이 세상에 오셔서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이 되어 자기 백성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최상의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은 칠십 이레의 의미와 그 기한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종말의 시기에 대해 궁금해하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재림의 때와 기한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던 제자들을 기억한다.

 

   이처럼 다니엘서에 예언된 칠십 이레의 기간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때와 기한에 대해 궁금해하던 제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답변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는 ‘칠십 이레’라는 구체적인 연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 추정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에 대한 구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즉 그것이 일반적인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그 가운데 구체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름대로 칠십 이레에 대한 연대를 추정 계산하며 계시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듭 밝히지만 여기서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연대를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연대 자체의 정확성과 그에 대한 확정을 짓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주의 깊게 더듬어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은혜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해서 연대기 자체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과거 역사와 더불어 이를 더듬어보기 위해 바벨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패망과 포로 생활 70년, 그리고 그 후 본토 귀환과 함께 전개되는 연대기적 순서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및 공 사역과 예루살렘 성전의 최종적인 파괴 연대를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및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소유한 구속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에 대한 대략적인 연대는 다음과 같다.

 

   BC 605년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침공을 받아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또한 BC 597년에는 바벨론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침공해 또다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BC 586년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또한 성전은 파괴되어 그 안에 있던 거룩한 성전 기물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으며 유다 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은 처참한 상태에서 이방의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포로 생활 70년’이 예언된 바대로 예루살렘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했던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메대-페르시아 왕국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 뒤이어 BC 538년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한 속민(屬民)들의 귀환 허용이 포함된 ‘고레스 왕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그에 따라 BC 536년 이스라엘 민족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 귀환이 이루어졌으며, BC 458년 에스라에 의한 제2차 귀환, 그리고 BC 445년 느헤미야에 의한 제3차 귀환이 진행되었다.

 

   그 기간 중에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본토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들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면서 일시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그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결국 성전 재건공사는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22~486)가 통치할 때인 BC 520년경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 의해 재개되었다(학1:14~15). 그리고 그 성전은 다리우스 1세 즉위 6년인 BC 516년에 봉헌하게 되었다(스6:15~16).

   또한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Artaxerxes I, BC 464~424) 왕은 BC 458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지도자였던 에스라에게 본토 귀환을 원하는 자들을 인도해 가도록 조서(詔書)를 내림으로써 두 번째 귀환이 이루어졌다(스7:11~13).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는 본토로 귀환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하고 영적 회복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페르시아 제국의 법보다 모세를 통해 허락된 이스라엘 민족의 법을 우선시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BC 445년 페르시아 왕은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중건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무너진 성곽을 건축하게 된다(느2:7~9). 그런데 페르시아 왕은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분명한 사실은 페르시아 제국이 그에 연관된 정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 유대인들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활동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 ­- 율법 교육 -­ 성벽 중건의 도식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된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허물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다시금 확립되어 갔다. 그 가운데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하는 언약 백성들을 통해 메시야가 선포되고 있었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 사역, 그리고 그에 대한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최종 파괴 연대이다. 예수님은 BC 4년경 탄생하여 AD 26년경 공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 후 AD 30년경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셨다. 그로부터 40년 정도 지난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