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적 블랙홀인 전 천년 세대주의 권오훈 (목원대학교 교수, 선교학)
I. 들어가는 말
하늘/땅이라는 짝을 나눠 땅을 빨아들이고, 영/물질이라는 짝을 나눠 물질을 빨아들이는 세대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전 천년 세대주의라는 선교학적 블랙홀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전 천년 세대주의는 건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빨아들이는 아주 위험한 블랙홀이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성경적 세계관을 가로막고 왜곡하는 7중 장애물을 “(1)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신학적 유산. (2) 계몽주의의 영향. (3)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4) 미국의 개인주의. (5) 무비판적인 애국심. (6) 피조물에 대한 성경적 교리의 무시. (7) 전 천년 세대주의”라고 꼽는다. 스나이더는 장애물 목록 중에서 마지막으로 꼽은 전 천년 세대주의의 위험을 특별히 경고한다.
전 천년 세대주의의 본류는 세대주의다. 조종남은 “특히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주장하는 그룹에서는 전 천년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라며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밝힌다. 스나이더는 ‘포괄적이고 함축적인 하나님 나라 모델과 반대 극단’에 있는 세대주의적 모델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의 구속 활동을 종종 몇몇의 성경적인 도식(창조의 6일, 성경 언약,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을 따라 별개의 시대 혹은 “세대”’로 나누는 데 이러한 ‘분할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속에 내재된 긴장들을 와해시킨다.”라고 평가한다. 스나이더는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 통치의 신비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여섯 가지 근본적인 긴장점 또는 양극성’을 다음과 같이 추출한다. 1. 현재적인가, 미래적인가? 2. 개인적인가, 사회적인가? 3. 영적인가, 물질적인가? 4. 점진적(gradual)인가, 급진적(climactic)인가? 5. 하나님의 행위인가, 인간의 행위인가? 6.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동일한가, 다른가? 스나이더는 여섯 가지 양극성을 전제로 하나님 나라를 여덟 가지 모델로 분류한다. 1. 미래의 소망: 미래의 나라 (the future-kingdom) 2. 내면의 영적인 경험: 내면의 나라(the interior kingdom) 3. 신비로운 사귐: 하늘의 나라(the heavenly kingdom) 4. 제도적인 교회: 교회의 나라(the ecclesiastical kingdom) 5. 대안 사회: 저항의 나라(the subversive kingdom) 6. 정치적인 국가: 신권 정치의 나라(the theocratic kingdom) 7. 기독교화된 문화: 변혁의 나라(the transforming kingdom) 8. 지상의 유토피아: 유토피아 나라(the utopian kingdom). 스나이더는 하나님의 통치의 신비인 이러한 건강한 긴장을 해제하기에 세대주의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II. 세대주의
스나이더는 ‘세대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하나님의 oikonomia 또는 구속 계획 전반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왜곡하는 것이다.” 스나이더에 따르면 “대부분 현대 성경역본이 ‘dispensation’(세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 반해,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신약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네 번 발견되는데, 모두 헬라어 ‘oikonomia’(오이코노미아, ‘economy’ 혹은 ‘stewardship’)를 번역한 것이다.” 스나이더가 소개한 티모시 웨버(Timothy Weber)의 분석에 의하면 dispensation은 “‘oikonomeo’(오이코노메오)와 그 파생어에서 연유한 말로, 헬라어 신약성경에 약 20번 등장하며 ‘집안일을 처리하다, 조정하다, 관리하다, 계획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 사용될경우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의미한다.” 남기철은 “오이코노미아는 경륜, 계획이라는 뜻과 관리(管理)나 행정 한다는 뜻이 있다.”라고 정리한다.
스나이더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모습으로 역사 속에 계시하셨다는 것’이 ‘세대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 세대란 ‘하나님께서 다른 시기에 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시기’이다.” ‘세대주의적 접근’은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수(數)의 짝을 ‘성경적 산술법’으로 작업해 ‘둘이나 셋, 혹은 일곱, 심지어는 열두 세대’로 구분한다. “다수의 선택 사양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많은 개연성을 허용해 주며, 역사 속의 어는 시점에서든 우리는 지금 마지막 혹은 마지막을 눈앞에 둔 시대에 살고 있고 마지막 절정은 바로 다음 언덕 너머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해준다.”
스나이더에 따르면 “역사를 보는 하나의 방식인 여섯 혹은 일곱 ‘이레’ 도식은 일찌감치 1~2세기경에 교회에서 채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본뜬 수많은 변형체가 비록 그것이 학술적으로 세대주의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 왔다.” 스나이더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 중 하나의 스승인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6,000년 동안 지속되는 역사가 이미 끝나고 천년왕국이 500년경에 시작될 것이라는 주장을 그 한 예로 든다. 프랑스의 신비주의 목사 피에르 푸아레(Pierre Poiret)의 사상은 ‘더 철저히 세대주의적’인데, 그는 역사를 ‘창조의 경륜, 죄,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회복,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회복, 하나님의 운행에 대한 인류의 협력, 우주적인 복종’의 여섯 세대로 나누었다.
세대주의를 본격화한 이는 이탈리아의 대수도원장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Fiore)이다. 그의 대표작 『Harmon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와 다른 신비적-역사적-종말론적 저작들에서 요아킴은 역사에 관한 세대주의적 모델을 수립했다. 남기철은 세대주의의 시작을 영국의 플리머스 형제단(The Plymouth Brethren)으로 본다. 이어서 그는 세대주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미국에서는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가 그 본산이 되었고, 1909년에 발간된 스코필드 대조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통해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수용되었으나 학계에서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스나이더는 “훨씬 이후의 존 다비처럼 생각과 방식과 숫자 이해에서 창의적이었다.”라고 요아킴을 평가한다. 요아킴은 ‘역사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생각한 최초의 체계적인 사상가’로 여겨지는데, 그는 “둘이나 셋, 그리고 일곱과 열두 세대의 반복을 연구하면서 삼위일체의 위격(person)에 상응하는 역사의 위대한 세 시대 이론을 발전시켰다.” 요아킴은 구약성경을 성부 시대, 신약성경과 교회 시대를 성자 시대, 그리고 새로운 갱신이 시작되는 시대를 성령 시대로 보는 세 시대 이론을 확립했다. 요아킴은 그 당시 막 시작되려는 성령의 새 시대는 ‘복음의 약속의 완전한 만개를,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맛본 사랑의 시대를 가져올 것’이며, “성령의 시대에서만 사람들은 성경의 가장 깊은 영적인 비밀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의 껍질은 버려지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요아킴의 천재성은 “창조의 엿새와 안식의 마지막 날에 상응하는 역사의 일곱 시대라는 전통과 하나님 나라가 삼위일체의 서로 다른 위격에 상응하여 역사 속에서 상당히 다른 양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던 카파도키아(Cappadocian) 전통을 결합”한 것에서 드러난다. ‘세계 역사의 일곱째 날을 성령의 나라와 결합’한 요아킴에게 “세상의 종말 전에 있을 역사의 위대한 ‘안식’과 성령의 나라는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요아킴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모델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하나님 나라 이론을 전개하며 자유를 강조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의 자유로, 아들의 나라는 아버지 자녀의 자유로, 성령의 나라는 하나님 친구의 자유로 구성한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서만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김균진은 몰트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육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붙들린 피조물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며, 이 사멸의 삶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하는 변용(Meramorphose)을 뜻한다.’ 이에 상응하여 그리스도인의 영 곧 그들의 ‘자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로 변용된다.”
요아킴은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할 두 증인(계 11:3)과 ‘천이백육십 일 동안’ 광야로 도망가서 아들을 양육하는 여자(계 12:6)와 같은 구절을 바탕으로, “성령의 새 시대가 1260년에 시작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聖父와 聖子의 王國은 곧 지나가고 정확하게 1260년경에 성령의 왕국, 즉 세계의 여름 즉 사랑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태리의 수도원장 요아킴에게는 王國이 다시 歷史 內的 實在로 되어버렸다. 이것은 후에 극단적인 정치적인 요구로 가득 채워졌다.” 요아킴의 주장에 매료된 그 시대의 많은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교회의 위계를 바꾸며 번성하며 확장되던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을 성령 시대의 선도자로 간주했다. 프랭클린 리텔(Franklin Littel)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급진적인 프란체스코회(Franciscans)는 교황권에 저항하는 요아킴의 지적 전술(戰術)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서구에는 급진적인 종말론의 지하 수맥이 흘러내렸다.” 리텔은 이어서 이렇게 주장한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종말론은 그 기원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운동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예를 들어, 코튼 매더(Cotton Mather)와 그의 ‘영원한 복음의 승리의 시대’, 그리고 칼 마르크스와 국가의 소멸에 대한 사상 속에서.”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도 같은 맥락에서 “요아킴의 역사 세대 이론이 칼 마르크스(Karl Marx)에게서도 메아리치고 있다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신학대전』(Summa Theologia)에서 요아킴의 주장을 반박했지만, 종말론적 사변의 유혹은 안타깝게도 요아킴 이후로도 되풀이됐다. 일견 세상과 교회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이제 막 ‘새 일’을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 요아킴의 세대주의적 모델이 빨아들인 빛은 ‘강력해진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영화(spiritualization)이다.’ 그러므로 베릴 스몰리(Beryl Smalley)는 요아킴을 ‘문자를 육체와 동일시하고, 독실한 신자의 특권인 영적 해석을 그 반제(antithesis)로 간주한 교부 전통의 정점’으로 여긴다. 신비주의자 요아킴의 세대주의적 모델은 영/물질 세계관의 분할로 하늘과 땅의 간격을 한층 더 벌리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III. 천년왕국적 세대주의
천년왕국설은 요한계시록 20장 6절의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의 천년 지상 통치(‘천’에 해당하는 로마어와 그리스어에서 파생한 ‘millennialism’ 또는 ‘chiliasm’)’로 이해한다. 오트는 묵시문학을 천년왕국설의 기원으로 꼽는다. “千年王國이라는 관념은 유대교의 묵시문학(에스라書, 바룩書)에서 由來한다. 이 千年王國說이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있어서는 초기의 現世的 종말론과 후기의 彼岸的 종말론 사이에 있던 對立性을 해소하고 중재하는 기능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가 천년 간 왕성(flourish and prosper)하리라는 천년왕국설은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뒤이을 것(the millennium will follow the parousia, ‘second coming,’ of Christ)이라는 전 천년설(premillennialism)과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설 것(the millennium will precede the parousia, ‘second coming,’ of Christ)이라는 후 천년설(postmillennialism)의 두 진영(camps)으로 나뉜다. 두 진영 안에도 다양한 변이가 있다. 인간의 장래라는 관점에서 전 천년설은 비관적이고 후 천년설은 낙관적이다.
스나이더는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 통치는 문자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아니면 단순히 무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며 천년왕국적인 견해와는 정반대인 무천년주의적인 견해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정확히 말하면 세 진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종남은 무천년설(amillennialism)을 요한계시록 20장에 있는 ‘천년을 상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고 예수의 지상 통치가 없을 것이라는 견해’로 설명한다. 조종남은 세 진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가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무 천년설, 천년왕국이 끝난 뒤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후 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시대를 열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 천년설”로 정리한다. 조종남은 무 천년설을 지지하는 그룹은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그리고 칼빈’이고, ‘복음 전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결국은 온 세상이 회심하게 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근거’한 후 천년설은 ‘대체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가르쳐 왔으며,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을 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전 천년설은 19세기 중엽부터 “보수진영에서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오늘의 성결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그리고 독립적인 근본주의 교회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분류한다. 시대의 아들이자 교단의 아들이기도 한 조종남은 전 천년설에 살짝 경도된 모습을 보인다. “어떤 이들이 비판하는 대로 결코 단 하나의 성경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에 대해 암시하는 내용들이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전 천년설이 무 천년설보다 더 적절한 학설이라고 사료된다.”
1. 후 천년 세대주의
후 천년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설 것이며, 지상을 교회가 다스리는 황금기(a golden age of the reign of the CHURCH on earth)가 있은 다음에 선과 악의 갈등에 이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으로 생각한다. 스나이더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성령의 시대를 기대’한 요아킴의 종말론을 후 천년주의적이라고 평가한다. 스나이더는 요아킴의 견해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미래에 있지만[스나이더의 하나님 나라 모델 1(미래의 나라)] 지금 사회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모델 7(변혁의 나라)이나 모델 8(유토피아의 나라)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또한, 그의 관점은 흔히 미래 모델에는 없는 낙관주의를 이러한 모델과 공유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스나이더는 ‘삼위일체 교리, 요한계시록, 그리고 신비적-상징적 성경 해석’을 함께 섞어 수립한 요아킴의 세 시대 이론은 ‘몇 가지 점에서 6세기 이후의 존 다비(John Nelson Darby)의 전천년설의 세대주의와 유사한 세대주의적 이론’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스나이더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개시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인가? (전 천년주의), 아니면 그 마지막 절정에서 돌아오실 것인가? (후 천년주의)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천년 통치의 의미에 대한 현대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두 가지 쟁점에 대해 오트는 千年期說이라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전 천년주의는 “千年王國은 시간의 마지막에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데, 일종의 경이로운 시간 단편이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들과 더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인데, 이것은 사탄이 그의 파괴적 활동을 하도록 마지막으로 다시 풀려 나오기 이전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역사내적 장래는 ‘사악한 시간’이어서 참고 견디어내야만 신앙의 시험에 합격하게 되며 마침내 모든 역사의 장래적 피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오트는 후 천년주의를 역사내적 종말론(歷史內的 終末論)으로 보며, 일련의 질문으로 이를 소개한다. “우리에게 歷史內的인 종말의 때가 올 것인가? 즉 이전의 모든 시대보다 더 좋고 더 참되고 더 인간적인, 그리고 급기야 역사 안에 다시는 그것을 능가할 것이 없는 어떤 새로운 역사의 시기가 올 것인가?”
오트는 두 가지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모든 역사의 피안에 있는 장래에 관한 입장과 역사 안에 있는 더 좋은 장래에 관한 입장, 두 가지 종말론적인 장래의 관점은 서로 배제하지 않고 도리어 서로 포섭한다.” 오트는 ‘희망의 개념과 신앙의 개념과 함께 상호 종속’되는 사랑의 개념으로 두 가지 전망을 결합한다. “사랑이라면 내가 그 사랑받는 사람의 장래를 믿는 것이요, 그의 영원한 장래 및 또한 그의 시간적 장래를 믿는 것이다. …역사의 피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장래라는 사상은 역사의 한계 안에 있는 더욱더 나은 장래를 믿는 신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더 인간적인 장래를 믿고 결연히 이를 위해 투쟁하는 정열적인 신앙 속에서 모든 사람의 영원한 神的 規定(天命)을 믿는 신앙이 표현되고 확증된다.” 오트는 더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地上的 將來를 믿고 싸우는 신앙과 투쟁을 동시에 인간을 섬기는 봉사로, 그리고 神的인 위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사람에게 영원한 장래를 선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신앙에게다 그러한 봉사를 하도록 용기를 주신다.” 오트는 이런 식으로 두 가지 장래의 대망을 하나로 결합하며 서로 관련시키고 난 후 ‘유일하고 완전하며 종결짓는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있을 유일한 “천년왕국”을 믿을 필요’가 없다며 “인류 역사 속에 하나의 ‘천년왕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많이 있을 것임을 뜻한다.”라고 해석한다. 오트는 역사 안의 ‘퇴보와 동요’를 염두에 두고 ‘인간을 위한 종말론적인 희망’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서, 언제나 다시 보다 나은 인간 사회의 새로운 ‘千年’을 위해서 일하고 싸우도록 모험하게 하며, 이 경우에 인간의 장래를 사랑하시는 분 곧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알고 있게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스나이더는 ‘최종적인 영광의 나라, 우주적인 화해의 때, 샬롬(Shalom)이라는 위대한 구약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만물의 회복”을 기대한’ 존 웨슬리와 18세기 감리교도들도 후 천년주의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웨슬리의 주된 초점은 미래 영광의 나라가 아니라 현재의 은혜의 나라에 있었다. 즉, 미래보다는 신자들의 마음과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의 경험에 더 초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스나이더는 웨슬리의 견해를 자신의 하나님 나라 모델 2(내면의 나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존 웨슬리의 견해는 후 천년주의적이었지만, “그는 이 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최후 심판의 확실성 속에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앞으로 올 것이 분명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재적인 활동에 더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마지막에 완성될 영광의 나라에 미리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의미를 누릴 수 있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는 ‘하나님 나라를 지금 현존하는 것으로 보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리하는 것’으로 보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rthan Edwards)의 온전한 세대주의(moderate dispensationalism)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에드워즈는 네 가지 연속되는 사건 혹은 세대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왕국이 설립된다고 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출현’, ‘이방 로마제국의 멸망’, ‘적그리스도의 멸망’, 그리고 최후 ‘심판’이다. “에드워즈는 후 천년적 틀 위에서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켰으며, 교회의 천년기는 그가 살던 당시에 부분적으로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을 통하여 동트기 시작했다고 암시하였다.”
2. 전 천년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주로 (또는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점진적이기보다는 급진적으로 임한다’라고 본다. 전 천년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재림 직전에 세계는 엄청난 재난과 악폐와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적그리스도를 멸하실 것이며, 믿는 자들은 죽음에서 살아날 것이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거룩한 사람들에게 천년 간의 평화와 질서가 뒤따를 것이다. 이 시간이 끝날 때(천년왕국 이후), 사탄이 풀려날 것이며 악한 세력들이 다시 한번 더 날뛸 것이다. 그때 사악한 자들이 살아날 것이며 사탄과 모든 악한 것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 질 최후의 심판이 진행될 것이다.
1800년대에 기획된 전 천년 세대주의는 “실제적인 성경적 또는 역사적 지지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이것은 보수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널리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 신학자는 이것에 ‘이상할 정도로 거의 주목’하지 않았으며, “정도를 벗어난 성경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이론이 이단인지 아닌지를 묻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대신에, 이 관점은 역사적 정통 내에서 단지 사소한 변종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 결과 “슬프게도 오늘날 수백만의 그리스도인은 전 천년 세대주의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단순히 믿고 있다. 전 천년 세대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한 교파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새로운 이념은 많은 복음주의자의 마음을 거처로 만들었다.”
영국계 아일랜드인 존 다비(John Nelson Darby)는 “성도들의 ‘휴거’라는 특징적인 전 천년 교리를 고안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을 잘못 해석하여, 다비는 휴거 신학을 생각해냈다.” 데살로니가서 4:16-17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땅으로 돌아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가 두 번째로 땅에 올 것을 예언한다, 그러나 다비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늘로 ‘비밀스럽게 휴거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17절은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죽은 자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한다. 연구자는 이 17절의 두 단어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첫째. ‘영접’이 주요 목적이다. 영접은 주로 집에서 나가서 맞이하는 행위를 말하고, 영접 나간 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다. 영접하기 위해 오른 공중이 최종 거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그리하여’라는 접속 부사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원인이거나 앞의 내용이 발전하여 뒤의 내용이 전개될 때 쓴다. ‘그리하여’를 발전과 전개로 해석하면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극적 부활이 먼저 있고, 그 후에 그들이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거’는 말이 안 된다. ‘휴거’ 교리의 폐해는 한국과 세계교회를 어지럽혀온 다양한 시한부 종말론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비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은 많은 사람을 땅에 남겨두고 자신들이 어찌어찌 알게 된 특정한 날에 자신들만 비밀스럽게 ‘들림’ 받겠다는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이기에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다비는 1862년부터 1877년까지 미국을 7번 방문하며,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지 뮐러(George Müller)와 함께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확산시켰다. 스나이더는 ‘초기 수용자 명단’이 마치 ‘미국 근본주의 인명사전’ 같다며, ‘목록의 일부분’인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고든(A. J. Gordon), 윌버 채프먼(J. Wilbur Chapman), 토레이(R. A. Torrey), 심슨(A. B. Simpson),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피어슨(A. T Pierson), …헨리 모리슨(Henry Clay Morrison)’을 열거한다. 무 천년설의 견해나 후 천년설의 견해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이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예를 들어, 드와이트 무디는 1877년에 다비주의로 전환하고, 메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예언자 대회(Prophecy Conferences)에서 그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거의 주요한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무디의 지도를 따랐으므로, 수많은 ‘저널’이 출판되고, ‘성경 대학’이 세워지고, ‘구제 전도단들’이 설립되고,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다비의 세대주의를 주창하는 수백 개의 지역 협회들이 만들어졌다.”
현대의 전 천년 세대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구원사의 총체적 틀로 보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계획의 한 국면으로만’ 본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는 천년기까지로 미뤄진다.” 예수께서 알리신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그로 인해 사실상 하나님 나라는 지연되었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스나이더는 일곱 세대로 나누는 스코필드 참조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현대의 전 천년 세대주의의 대표적인 한 예로 여긴다. “1. 순결—아담과 하와의 창조부터 타락까지 2. 양심—타락부터 홍수까지 3. 인간 지배—홍수부터 아브라함까지 4. 약속—아브라함부터 시내 산에서의 율법 전수까지 5. 율법—시내 산부터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까지 6. 은혜—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부터 재림까지 7. 하나님 나라—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스나이더는 “다비-스코필드의 이론은 ‘전 천년적’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천년왕국’, 즉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전에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하며, 그들의 핵심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때까지 사회와 세상의 조건은 아주 나빠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계획이기 때문에, 지금의 일들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우리는 오직 영원한 미래를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스나이더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다비의 신학이 ‘이미 서구 신학을 괴롭히고 있는 땅과 하늘의 이혼을 크게 강화’했다는 점이다. 스나이더는 “대부분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은 땅에 연결된 세계관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대중적인 미국 그리스도교를 ‘휴거시켜’ 버렸다.”라는 재치 있는 표현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운다. 스나이더에 의하면 ‘피조물의 치유에 대한 성경의 소망 전체가 가라앉도록 위협하는’ 전 천년 세대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피조물의 갱신을 배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위치시킴으로써 성경적 세계관을 서서히 약화’ 시키고 땅과 물질적 피조물 전체가 파멸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견해를 대중화’해 ‘피조물에 대한 관심을 무의미하게’ 만든 부분이다. 곧, 파멸될 이 땅이라는 개념의 오류를 지적하며 스나이더는 다음과 같이 예증한다. “베드로후서 3:10의 열과 불은 제련, 드러냄 그리고 정화를 의미하지, 파멸이나 소멸은 아니다. 이것이 장 칼뱅(John Calvin)이 본 방식이다. …웨슬리는 로마서 8:21에 관해 이렇게 썼다. 파멸은 해방이 아니다. …웨슬리는 사실 ‘피조물의 어떤 부분도’‘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스나이더는 “하나님은 파멸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제련하고, 재활용하고, 재창조하는 일을 하신다.”라고 강조한다.
스나이더는 19세 후반에 ‘세대주의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 근본주의’와 더불어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을 주도한 미국과 유럽의 보수적인 개신교 분파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령으로, 점진적인 발전에서 위기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후 천년주의적인 이해에서 전 천년주의적인 이해로 그 강조점’이 이동했음에 주목한다. 오순절 운동의 관점에서는 “세기의 전환기에 방언 현상이 나타났을 때 이것은 성령 충만의 표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방언은 종말의 표징이었고, 임박한 재림과 하나님의 지상 통치의 표징이었다.” 스나이더에 의하면 독자적인 교파를 형성한 오순절 운동과 달리 기존의 교파에 남은 은사 운동은 ‘더 많이 중산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생명력과 개인의 영적인 성장 및 증언을 위해 유용한 것’으로 이해하며 초기의 오순절 운동에서 강조되던 종말론적인 중요성은 많이 사라졌다. 스나이더는 그 차이점을 사회 경제적인 요인에서 찾는다. “기독교 희망의 묵시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비전(vision)은 가난한 사람들(또는 상당히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천년왕국설은 ‘가난한 자들의 사회 운동, 그리고 사회 혁명의 기독교적인 기원과 관련된 쟁점’과 더불어 “다른 여러 가지 쟁점도 함께 불러일으킨다.” 스나이더는 마르크스주의와 북아메리카 근본주의 전천년주의는 ‘하나님 나라 비전이 매우 비슷’하기에 공통점이 많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전 천년주의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오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거의 배타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통해, 또는 굽히지 않는 역사의 힘에 협력하거나 그것을 반영하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올 수 있다는 점이다. 고로 스나이더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모두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긴장을 해소해 버리며, 따라서 그만큼 성경의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측면들과 부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다.”
IV. 나가는 말
스나이더는 노만 콘(Norman Cohn)이 천년왕국 분야의 고전적 연구서가 된 그의 책 Pursuit of the Millennium에서 ‘천년왕국 운동이 교회사에서 때때로 사회 구조를 결속시키거나 분열시키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세대주의적 접근은 ‘역사적’, ‘성례전적’, ‘신비주의적’, ‘심리학적’ 접근 등과 더불어 약속된 하나님 나라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긴장을 해결할 선택 사양 중 하나이긴 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이론’으로 여겨지는 세대주의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해소하고 역사를 엄격한 틀 속에 강압적으로 밀어 넣을 위험을 안고 있다.”라는 점이다. 거기에 더하여 세대주의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 19세기 말의 자유주의나 현대의 상대주의적 인본주의처럼 제한적이고 피상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고정시켜 버린다.”
스나이더가 ‘후 천년 신학으로부터 전 천년 신학으로 이동하는 것’의 위험을 잘 지적했다며 소개한 랜달 발머(Randall Ballmer)의 견해는 가치가 크다. 그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에 접근하는 방식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예수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천년왕국 시대 이전에 오리라고 믿는다면, 천년왕국의 시작’은 지금 일어날 수 없다. ‘이로써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지금 분명히 나타내는 ‘책임을 면제시켜 준다.’” 전 천년 세대주의가 피조물의 치유에 무책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천년 세대주의를 ‘그리스도의 몸의 많은 부분 곳곳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널리 발견되는 강력한 바이러스’로 보는 스나이더는 “이 질병은 피조물을 치유하는 교회의 역할을 방해하면서 그것의 증언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라고 경고한다.
스나이더는 전 천년 세대주의가 잘 드러나는 찬송가 하나를 꼽고 바람직한 개사 안을 제시한다. 전천년설이 등장하던 1878년에 터너(H. I. Turner)가 작사하고 1906년경 제임스 맥그라나한(James McGranahan)이 작곡하고 무디의 찬양인도자였던 아이라 생키(Ira Sankey)에 의해 Gospel Songs No. 3로 출판된 “It May Be at Morn”이라는 찬송가다. 문제가 되는 가사는 “오, 기쁨! 오, 기쁨! 우리는 죽음 없이 가야 하리/아픔도 슬픔도 두려움도 울음도 없으리/위로 올려져 구름을 지나 우리 주와 함께 영광으로 들어가리/예수께서 ‘자기 사람’을 받아들이실 때”라는 3절이다. 스나이더는 이를 “오, 기쁨! 오, 기쁨! 죽음 없이 그를 바라보리/아픔도 슬픔도 두려움도 울음도 없으리/그의 영광의 빛 안에서 땅에 거하리/예수께서 ‘자기 사람’을 되찾으실 때” 정도로 성경적으로 개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이유는 우리를 구름 위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스나이더는 자신의 소망이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번지기를 기대한다. “천국보다 더 좋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의 부활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우리는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벧후 3:13) 우리의 목표는 천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최종적인 새 창조 안에서 하나님과 서로 완전한 사귐을 갖는 것이다.” 지금부터 새 창조까지 이어질 하나님과 서로와의 완전한 사귐이야말로 전 천년 세대주의라는 위험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닻이다. 스나이더의 오래된 선언으로 논문을 마친다. 재림 때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 정의,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 모든 피조물을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하실 것이다. (롬 8:21) 그래서 이 땅에 진정한 샬롬의 시대를 이룰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완전히 성취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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