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바울

하나님아들 2023. 10. 5. 19:34
바울









목 차

1. 바울의 시대
2. 바울의 활동
3. 바울의 신앙
4. 바울의 생애와 성격


1. 바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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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 제국 길리기야 주(州 다소의 시민입니다. 지도를 펼쳐 보면 다소는 지중해의 동북 구석, 바로 소 아시아가 시리아로 굽어지는 곳에 있으며, 해안에서 약 50 리쯤 들어가 위치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다소는 낮은 지대이지만, 거기서 1 리쯤 북쪽으로 가면 고지가 나오고, 15 리쯤 가면 타우르스의 준령이 솟아 있습니다. 북방 4-5 리의 고지에 상(上) 다소의 도시가 있으며, 이곳은 다소 시민이 여름 동안 보내는 도시였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상하 다소를 합쳐 인구 백만에 가까운 대도회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소에 입성(入城) 기원 전 334 년입니다. 대왕이 죽은 뒤 이 지방은 셀리우코스 왕국에 속했으나, 기원 전 170 년경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다소를 재건하고, 다수의 희랍인 및 유대인을 이곳에 이주시켰습니다. 셀리우코스 왕국이 쇠퇴하고, 로마의 세력이 동쪽으로 미치게 된 뒤 다소를 유명하게 한 사건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이 땅에 소환하였다가, 오히려 그녀의 미모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안토니우스는 다소에 자유시의 특권을 부여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이것을 확인했습니다. 폼페이우스, 시이저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등이 다소의 주요한 시민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준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집안도 아마 셀리우코스 시대에 팔레스틴에서 다소에 이주한 유대인으로, 조부의 대나 아버지 대에 로마의 시민권을 받은 것 같으며, 바울은 자기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은 사람임을 자랑하던 일이 있습니다.

다소에서는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원 전 45 년에서 15 년에 걸치는 30 년 동안 로망 살며 아우구스투스의 고문으로 일했으나 만년에는 고향 다소에 돌아와 살았습니다. 그를 뒤이어 네스톨이라는 스토아 철학자가 나와 다소는 학문, 특히 스토아 학파의 중심지로서 로마 제국 안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가 사도 바울의 고향입니다. 인구로 보면 희랍인과 유대인의 두 요소로 구성된 도시, 문명으로 보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과의 병존, 접촉, 교류로 이루어진 도시, 정치적으로는 셀리우코스 시대 이래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자치가 인정 된 자유 시, 학문적으로는 아우스투스 계의 스승이 출생한 스토아 철학의 도시—이런 도시에서 바울은 태어나고 또한 자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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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어드」를 군대용 짐 속에 넣고 인도 원정을 떠났다는 알렉산더 대왕의 발길이 닿은 곳에 동서 문명이 융합하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이 세계는 로마 제국 아래에서 더욱 정치적으로 공고하게 되고, 지리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서쪽으로 옮겨지면서 지중해는 로마 제국의 내해(內海가 되었습니다. 바다로, 육지로 로마의 지배를 운반하기 위해 軍用路ㅎ렸으며, 그 길은 상업용의 여행에도 이용되었습니다. 팩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영향 아래, 동으로 서로 여객 및 상품의 교통은 빈번하게 되고, 소송을 하러 수도 로마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통의 법률, 안전한 도로 외에, 공통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의 결합을 도왔습니다. 그것은 희랍어입니다. 희랍어는 당시의 국제어로서, 상업 거래에도, 학문 및 사상의 전달에도, 또 일상 회화에도 널리 쓰여, 그 보급의 범위 및 정도는 오늘의 영어 이상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인은 통치와 군사로 세계를 정복했지만, 언어와 사상과 종교에서 그들의 구실은 헬레니즘을 세계적으로 전파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헬레니즘화에 대하여 이제 다른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헤브라이즘입니다. 가나안 사람의 바알 신앙에서 로마인의 신들에 이르기까지 희랍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가운데 홀로 유대인만은 그 일신교인 야웨 신앙을 집요하게 유지했습니다. 다만 팔레스티나의 토지와 이스라엘의 민족에 한정된 민족 신앙으로서의 유대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외부의 영향에 의하여 그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원 전 6 세기의 바빌론의 유폐에서 시작했지만, 페르시아 시대, 희랍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들어와, 유대인으로서 팔레스티나 이외의 땅에 이주하는 사람, 희랍인으로서 팔레스티나에 오가는 사람, 도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과 희랍인이 함께 사는 사람이 증가하여 유대인의 사상과 생활을ㄹ 세계적으로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희랍인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하고 유대인의 할례를 받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으로서 희랍어를 말하고, 희랍식으로 리버럴한 사고 방식을 갖는 이도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시세의 필요에 응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0 명의 유대인 학자가 모여, 히브리 말의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70인역」이라 불리우는 성서로, 그 완성은 기원 전 285 년부터 150 년까지의 사이로 측정됩니다. 그 이래 유대교에 들어온 희랍인은 물론 유대인 사이에도 성서는 「70인역」이 일반적으로 읽혀졌으며, 이 신약성서에서 인용되는 구약의 본문도 거의 이에 의합니다. 이 「70인역」은 단지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희랍적인 해석과 풍격(風格 구약성서의 의미를 전했기 때문에 그만큼 헤브라이즘의 헬레니즘화, 바꾸어 말하면 헤브라이즘을 그 민족적 성격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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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리즘은 유대인의 국제적 이주에 따라 헬레니즘의 세계에 퍼져가고, 동시에 헬레니즘은 헬브라이즘의 성격에 영향을 주어 이를 세계화하고 있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의 세계관의 중심은 하나님 본위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라고 한다면, 헬레니즘은 세계관의 특색을 인간 본위이고,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로마 제국 아래서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에 접촉하여, 하늘과 땅과 하나님과, 인간은 입을 맞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격심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격동 속에서 태어나 세계를 새롭고 일단 높은 수준으로 종합하고, 지양하고, 창조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세계적으로 전하는 사도로 뽑힌 이가 다소의 시민인 바울이었습니다.

다소란 도시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도, 역사적 전통으로 보아도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과의 교류지이며, 새로운 세계 정신의 전파자가 태어날 가장 적지(適地입니다. 바울은 그 태생으로 말하면 순수한 유대인이고, 그 교양으로 말하면 자유스런 희랍 사상의 영향을 호흡한 사람이며, 그 언어는 알람 말을 말했으나, 또 희랍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데도 자유로우며, 그 사회적 지위는 자유시 다소의 자유민이요 로마의 시민권으ㅡㄹ 갖는 자이고, 그 직업은 도시의 주민인 천막 제조의 수공업자였습니다. 이 최후의 점에 대해선느 특히 한마디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나 요한과 달리, 어부가 아니고 수공업자며 시골 출신이 아니고 대도회의 시민이었습니다. 농민이나 어부는 대체로 보수적이지만, 상인이나 수공업자는 새 사상을 배우는 일에나, 도 여행 이주에 있어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적극적입니다. 바울의 신앙과 성격에 대해서는 뒹 말하겠지만, 환경적으로 보아 참으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뽑혀, 그리스도의 복음을 팔레스티나 이외의 넓은 세계에 옮겨 널리 펴는 데 최적의 그릇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세계에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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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태어난 해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죽은 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생애의 연대를 확정하는 유일한 단서는 사도행전 18장 12절에 있는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總督)이 되었을 때” 라는 말입니다. 이 해를 판정하고, 성서의 기사에 따라 바울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을 위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위로 계산해서, 연대적(年代的)으로 추정(推定)하는 방법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위의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었던 해를 추정하기 위해 많은 학자가 노력했으나 다이스간 교수의 고증에의하면 갈리오의 착임은 기원 51년의 여름 중간이고, 바울은 50년 초에 고린도에 와서, 51년의 여름 늦게 고린도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학자의 설에 의하더라도 1,2년 또는 2,3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 대개 이 정도로 생각해도 좋겠지요. 이 계산에 입각해서 소급하여 따져보면, 바울의 회심(回心)은 기원 30년 내지 33년으로 추정되지만, 그 때의 그의 나이를 알 수 없으므로, 그가 태어난 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회심의 때가 25세쯤이었다 하면, 그는 예수보다 10세 아래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생전에 만난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 사건은, 그가 어느 땐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경험이었습니다.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소년 시대 몇 해 동안을 예루살렘에 와서, 율법학자 가마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가마리엘은 헬레니스트적인, 자유스러운 사상 경향을 가진 학자였으나, 바울 소년은 의식적으로 열심인 바리새파였습니다. 당시 겨우 독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기독교회에 7인의 집사가 선출되었는데, 그 한 사람 스데반은 특히 성령의 힘에 충만하여 이스라엘의 민족사와 모세 율법에 대해 새로운 세계사적 해석을 내리고, 예수가 대망의 메시아로 오셔서 시대를 일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긍지를 해치고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유대인의 맹렬한 반감을 초래하였으며, 급기야 스데반은 돌로 맞아 죽어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박해의 주동자의 한 사람이고, 스데반을 처형할 때는 하수인의 옷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났는데, 바울은 기독자의 집집에 침입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을 체포하고, 투옥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스스로 자원해서 대제사로부터 첨서(添書)를 받아, 시리아의 다메섹으로 가, 거기 피난하고 있던 기독자들도 포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근처에 갔을 때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치었으므로, 그는 정신이 아뜩하여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사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은 유대 이름입니다. 같은 한 사람이 두 이름을 갖는 것은 당시 흔히 행해지던 습관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비친 흰빛으로 바울은 사흘 동안이나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의 읍에 들어가, 그곳에서 아나니아라는 한 사람의 기독자의 방문을 받고 자기가 “이방인, 왕들, 이스라엘의 자손 앞에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갈, 예쑤의 선택된 그릇”이라는 자각이 주어졌습니다. 이 자각을 갖게 되자, 그는 곧 “아라비아”로 피해갔습니다. 이 “아라비아”란 시나이 반도의 아라비아가 아니라, 다메섹에 가까운 동방의 사막 지방일 것입니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각을 가진 직후, 먼저 황야에 인도되어 40일 낮과 밤을 사탄의 시험을 받았듯이, 바울도 회심하여 예수를 믿고,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각을 갖고 새 활동의 생애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야에 피해가 기도의 밤낮을 보내고, 앞으로의 전도 생애의 대방침에 대해 신중히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바울은 즉시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습니다. 듣는 사람은 모두 놀라,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 아닌가?” “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 제사장에게 넘겨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고 말했지만, 바울은 그런 비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힘을 주어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논증하여 유대인을 설복시켰습니다. 마침내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노해서 그를 죽이려고 계략을 꾸몄으나, 그것을 안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 그를 바구니 속에 넣어 성읍의 돌벽에서 달아내려 피신시켰습니다. 잡으러 한 자가 쫓기게 되고, 박해하던 자가 박해받는 몸이 되고, 예수의 적이었던 자가 예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일신상의 180도의 전환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세계의 역사도 180도의 전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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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에서 회심한 뒤 약 30년에 걸친 바울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에 전하기 위한 불요불굴의 활동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5회의 예루살렘 방문과 적어도 3회의 대전도 여행을 하였습니다. 곧 그의 활동 방향은 예루살렘 방향과 희랍-로마 세계의 방향 둘이 있었지만, 그 주체는 후자고, 전자는 다만 후자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생존 중에 선택하신 12사도의 한 사람인 베드로 및 예수의 형제 야곱을 중심으로 기독교회가 점차 형서되고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아직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하지 못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팔레스티나는 말하자면 베드로들의 전도 구역(傳導區域)이었습니다. 새로이 예수의 사도로 소명(召命)을 받은 바울은, 이 기정(旣定)의 전도 구역을 침해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이 놓은 기초 위에는 집을 짓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새로운 너른 세계가 그의 전도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베드로에게 맡기라. 나는 희랍-로마의 이방인 가운데서 일하리라. 이것이 바울의 사명관이었습니다. 그는 각자의 활동 영역에 있어서 행동의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습니다. 곧 그는 예루살렘과 분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이에 대하여 반기(叛旗)를 들려고는 터럭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함께 예수의 복음 전파를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특이 이방인 전도를 위해 소명을 받았다는 바울의 입장은,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이것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도 지역의 협정보다 더 중대한 사항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은 우선 유대교도가 되지 않아도, 이방인 그대로 직접 기독자가 될 수 있다.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앞서 말 한대로,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에 들어간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이 경우에는 신체에 할례를 받는 것이, 유대인으로서의 민적 취득(民籍取得)의 필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유대교에 들어는 갔더라도, 원래가 희랍인이니까, 유대인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데 충분히 철저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자유파인 것이 자연스러운 경향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의 고을 고을에 가서 전도할 때는 대체로 그 토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주로 말했으나, 청중 가운데는 이렇게 유대교도가 된 희랍인이 적지 않아,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은 이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도, 또는 유대적인 기독자들은 이들 이방인 신자의 율법에 대한 자유스러운 태도를 비난하고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무엇보다 힘을 기울여 싸웠던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주장했습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신앙만으로 누구든지 구원받는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 거기에는 인종적인 구별도 민족적인 구별도 없다. 유대인도 희랍인도 똑같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 할례를 받아 유대교도가 될 필요는 없고, 유대인으로서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유대인은 유대인 그대로, 희랍인은 희랍인 그대로,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이 주장의 관철에서 비로소 유대교는 그 굳은 민족적 껍질을 깨치고 그 속에 담긴 영원한 진리로 세계적인 표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의 복음에 의하여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고, 인간이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는 민족적 제약을 타파하고,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활동과 싸움에 의하여, 기독교는 지역적으로나 성질적으로나 세계 종교로서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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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중에 바울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편지 열 넷이 있습니다. 그 중 히브리서는 바울이 쓴 것이 아님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나머지 열 세 통은 과거에 학자들의 비판적 의견은 있었지만, 근대의 학자들은 대개 그 모두를 바울이 쓴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연대적으록 ㅏ장 오랜 것은 데살로니가 전후서(前後書)로 두 편지는 기원 52년이나 53년쯤 고린도에서 쓰여졌으리라고 추정됩니다. 그 다음이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및 로마서의 4대 편지고, 다시 로마의 옥중(獄中)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옥중 편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및 빌레몬서)가 있고 ‘목회(牧會) 편지’라 통칭되는 디모데 전후서 및 디도서의 셋은 바울 만년(晩年)의 작품으로여겨지고 있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로마서와 같이 정연한 논술도 있는가 하면 빌레몬서와 같이 인정미 넘치는 개인적 소품도 있지만, 어느 편지고 모두 바울의 발랄한 신앙과 개성의 발로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이에 의하여 그의 사상과 인물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이스만이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신학자형의 사람이 아니고, 예언자형의 사람입니다. 그의 편지는 신학 체계가 아니라 개인적 편지입니다. 예수의 자유스런 복음을 바울이 신학적으로 체계화했다는 비평은, 바울의 편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정당한 태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렬한 신앙과 자유스러운 희랍적 교양으로, 용감하게 신앙의 근본 문제 및 신앙에 입각한 실제 문제의 해석에 대해 논의하고 적에 대한 논박과 설복, 우리 편에 대한 계몽과 위로가 그렇게 빈틈 없을 수 없으며, 그의 논술 가운데 기독교 교의의 중요한 점은 모조리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 주요한 두세 가지 점에 대하여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장(自由)의 문제입니다. 그가 유대주의자에 대항하여 이방인의 신앙적 입장의 자유를 옹호한 것은 앞서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앙 자유의 문제를 단순히 민족적 무차별의 형태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 주장의 밑바탕에는 사람은 율법의 행윙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도덕적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의식적(儀式的)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있습니다. 할례 그 밖에 의식적인 율법에 의해서는 물론, 도덕적인 성질의 율법에 의해서도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없다. 율법의 완전한 실행에 의하여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노력하면 할수록 사람에 그 실력이 없는 것을 알게 할 뿐이다. 이것은 비단 모세의 율법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민족이 갖는 도덕률에 의해서도, 예를 들면 플라톤의 가르침에 의하건, 세네카의 교훈에 의하건 도덕을 지키는 것으로 도덕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대하여 고통의 원인이 될지언정, 구제의 길은 될 수 없다. 의문(儀文)은 사람을 죽이고 율법은 사람의 무력을 폭로시킬 뿐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전부 율법에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죄의 용서를 믿는 것에 의해서만, 사람은 하나님께 의로 인정된다. 이 신앙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마음에 자유가 주어지고, 생생하고 활발한 생명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석방하셨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 노예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이것은 인간의 혁명이고 비약입니다. 환경의 노예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도덕률의 노예도 되지 않는다. 이 근본적인 혁명에 의하여 사람은 참으로 능동적인 창조적인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체의 개인적 자유 및 사회적 자유의 근원입니다. 바울이 주장한 예수의 복음의 주요 내용의 하나가 이 자유의 부여(賦與)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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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기독교회가 예수의 부활의 사실 위에 성립하였음은 성서의 기사가 그럴 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승인을 얻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믿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이것을 믿은 것은 사실이고, 그리고 그들이 이를 믿은 것이 지어 낸 것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고,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기술에 의하면, 예수는 죽어서 매장되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 베드로에게 나타나고, 뒤에 12제자에게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아직 달이 차지 아니한 나 같은 자에게도 나타나셨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요,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3-10)”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의 전환과 그 격심한 싸움과 그 활동과 용기와 인내와 희망의 근원을 모두 예수의 부활로 돌린 것입니다. 바울뿐이 아닙니다. 베드로 기타의 사도들도, 예수의 부활을 보기 전과 뒤에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띄었습니다. 전에 그들은 유대인의 박해가 두려워 숨어 지내며 집의 문을 닫고 전전 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를 본 뒤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복음을 증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도 바울은 가장 열심히 부활을 논증(論證)하였습니다.

그는 논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가 머무는 몸(體)이 있다. 몸에는 물질적인 몸이 있고, 또 영적인 몸이 있다. 땅에 속한 몸이 있고, 또 하늘에 속한 몸이 있다. 땅 위에 있는 생명에 혈기(血氣)의 몸이 있듯이,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는 영적인 몸이 없으면 안 된다. 물질적인 혈기의 몸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고, 죽음에 의하여 썩어 없어지나, 그것으로써 죽은 사람은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각자 부활의 은혜가 주어진다. 죽은 사람은 부활하여, 썩지 않는 영체(靈體)가 주어지고, 그에 의하여 영원히 산다. 즉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에 의하면 사람의 개성은 부활에 의하여 영원히 살고 각자가 완성한다. 이것은 결코 추상적이고, 막연한 영혼 불멸론이 아니요, 구체적-개별적인 신체 부활론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외치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때, ‘죽음은 승리에 삼켜졌다.’고 기록된 말은 성취될 것이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네 가시는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가시는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인 것이오. 그러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확고하고 동요함 없이, 항상 주의 일을 힘쓰시오. 그대들의 그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5:54-58)

부활의 신앙은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으로, 개인의 자유는 구체적으로 뒷받침됩니다. 이제는 땅 위에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환난도 고난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칼도 예수를 믿는 사람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 중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의하여 이기고 남음이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로마서 8:37). 이것은 바울 자신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과, 신앙의 논리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부활의 신앙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의 개가(凱歌)로 힘차게 노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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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구속(救贖)과 신체 부활의 신앙은 바울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죄의 압박과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도, 생활의 곤란도 병도 죽음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마음의 평안을 어지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는 죽음을 넘어 저편에 빛나는 나라를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환난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는 일 없이, 용기와 희망과 인내와 환희로써 생애를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 의하여 가르쳐진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개인의 해방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우수한 사회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즐겨, 때때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사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일치를 권하여 “몸은 하나 영도 하나”라고 하며, 이는 우리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점에서 성장하여 으뜸이시 ㄴ그리스도에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바탕으로 하여 온 몸은 모든 마디들의 도움으로 굳건하게 맞춰지고 또한 연결되어 각각의 부분이 부넹 맞게 하고 그 몸을 성장시켜, 사랑 가운데서 육성(育成)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에베소서 4:4, 15-16).
그러나 실제로 지체(肢體)는 많지만, 몸은 하나요, 눈이 손을 보고, ‘너는 필요 없다’고는 말하지 않고, 또 머리가 발을 보고, ‘너는 필요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 가운데서 다른 것보다 약하게 보이는 시체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몸 가운데 분열(分裂)이 없고, 각각의 지체가 서로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의 지체가 괴로워하면, 다른 지체도 모두 함께 괴로워하고 하나의 지체가 존중되면, 다른 지체도 모두 함께 기뻐하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인 것입니다 고 논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20-27)

이런 말 속에 사후의 통일성과, 유기적 여고나성과 성장과 직능에 대한 고찰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은 콩트 이래 근대 사회학자가 생각해 온 과학적 사회관을 1900년 전의 옛적에 이미 깊은 통찰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라므이 사회를, 바울은 “에클레샤”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흔히 “교회”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과 같은 제도 교회는 바울 시대에 아직 없었습니다. “에클레샤”는 제도 교회 같은 형식적인 개념이 아니라 좀더 넓고, 자유스럽고 탄력성이 있는 생생한 개념입니다. 이 에클레샤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유기적으로 결합된 신자의 몸이고, 그 몸을 순환하는 혈액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신진 대사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신선 활발한 사랑의 활동에 의하여 에클레샤는 성장 발달하여 그리스도의 완전에까지 도달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본 사회의 이상이었습니다.

4

에클레샤의 성원(成員)인 사람은 유대인, 희랍인, 노예, 자주의 구별 없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몽을 이룹니다(고린도 전서 12:`13). 그 안에는 인종, 민족, 빈부, 계급의 차별 없이 모든 성원이 다같이 자유고, 평등이고, 그 사이를 지배하는 법률은 “우애”입니다. 곧 근대 데모크라시의 기본 원칙은 바울의 사회관 속에 간결 명료하게 설파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바울을 떠나서는 데모크라시를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 시대의 사회에서는 아직 노예 제도가 일반적으로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회적 현실로서는 “노예, 자주인(自主人)의 구별”을 인정했지만, 신앙적 현실로서는 그는 “노예, 자주인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서 부름받은 노예는, 주에 의해 자주인이 된 사람이며, 또 부름받은 자주인은 그리스도의 노예인 것”이지(고린도 전서 7:22) 자주인, 노예느 ㄴ인간의 본질적 구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자유를 얻었다는 뜻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주고, 생애를 바쳐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뜻으로는 모든 사람이 노예입니다. 자주인, 노예라는 사회적 신분은 제일의(第一義)의 문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억지로 계급적 해방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석방할 수 있다면 석방하는 것이 좋고, 또 노예의 소유주는 그를 노예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대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고린도 전서 7:21, 빌레몬서 16: ). 바울의 인간관과 사회관은 필연적으로 노예 해방의 사상을 낳습니다. 제도로서의 노예는 사회적 생산 관계가 일정하게 성숙할 때까지는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상으로서의 노예제는, 바울에 의하여 이미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시대는 또한, 인종적-민족적인 차별감이 아직껏 강한 세상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은 전통적인 선민 사상을 자랑하여, 이방인을 멸시하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에클레샤에서는 “유대인, 아랍인의 구별 없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혁명적인 의견이었던 것입니다. (“희랍인”이란 말은, 유대인 편에서 보아, “이방인(異邦人)”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유대인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예며, 하나님의 선미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겉모습의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오, 또 겉모습의 육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오히려 숨겨진 유대인이 유대인이오, 또 문자(文字)에 의하지 않고 영에 의한 마음의 할례야말로 참 할례로 그 자랑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라고 갈파했습니다(로마서 2:28-29).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는 참 선민은 혈통에 의한 유대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는 사람이다. 곧 아바르함의 육의 자손이 아니라, 신앙의 자손이야말로 참 선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지 않고, 율법과 의문에 의하여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인종적-민족적으로는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선민으로 되는 참 유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방인이라도 참 의미에서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종적 차별이나 민족적 우열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일소(一掃)되어, 참 국제적 데모크라시의 기초가 놓여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종래 이민족으로 서로 질시하고, 증오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서로 가까워져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두 민족 사이에 놓여 있던 “적의(敵意)의 장벽”을 헐고, 둘이던 것을 그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사 평화를 이루시고, 십자가에 의해 둘을 하나의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 2:14-16). 그리스도는 “평화”입니다. 그 안에서 세계의 여러 민족은 서로 원한이 소멸되고, 세계 평화는 실현된다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로마 제국은 무력과 법률에 의한 세계 통일을 시도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한 세계의 일체화와 평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5

바울의 세계관은 이와 같이 웅대했습니다. 그는 결코 관념적인 추상론의 허공 속을 떠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간관이 매우 현실적이었던 것 같이, 그의 세계관에도 물질적 기초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영 뿐 아니라, 육체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 깃들지 않은 육체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육체를 갖지 않은 영혼도 또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에는 영의 자유와 육체의 부활이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세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계를 떠난 자연은 무의미하고 자연을 떠난 세계는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가 완성되려면, 아무리 해도 세계의 존재의 환경으로서의 자연, 곧 세계의 자연적 조건의 완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자연계는 결코 완성의 상태는 아닙니다. 토지의 생산력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기상의 변조나, 지진이나, 해일이나, 천변 지재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불화, 나라와 나라와의 쟁투도 주로는 물질적 이익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물질적 이익에 관한 투쟁은 토지의 부족, 자원의 결핍 등에 의하여 일어나는 수가 많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자연에서는, 세계 평화의 물질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인식한 바울은 어떤 유물론자보다도 더욱 철저한 리얼리스트였습니다.

그러면 인류 평화의 사상은 결국 하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고,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환영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세계 평화 등은 생각하는 만큼 무모한 일이고 인류의 역사는 이기주의자의 위선에 그칠 것입니다. 역사는 목표를 잃고, 인류는 이상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습니다.
피조물(被造物)은 실로 절실한 소원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소. 왜냐하면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복종시키시는 분에 의한 것이고, 또한 피조물 자신도 멸망의 종의 상태에서 놓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들어가는 소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알고 있소. 모든 피조물 전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 신음하고 함께 해산의 고통을 계속하고 있음을.
(로마서 8:19-22)

”피조물이라 함은 곧 자연계의 만물입니다. 자연계의 생산력이 속박되고 있고, 때로 “자연의 폭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 원인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원래 자연은 사람의 생활 환경이고, 사람의 영적 상태와 자연의 물적 상태와는 밀접하고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은, 인간의 티없이 순진한 것에 적응하여 자연도 “낙원”이었습니다. 그렇던 것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범하고, 영의 자유를 잃은 결과, 자연계에도 또 이에 의하여 위화(違和)와 변조가 생겨 멸망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죄가 구속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영광의 자유에 들어갈 수 있으면 자연도 또한 이에 따라 그 멸망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질서와 평화와 풍요한 생산력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에 이르러 개인의 평화와 사부의 평화와 자연의 평화는 서로 상응하고, 서로 연결되어 인류의 역사는 완성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우주관이었습니다.
5. 바울의 생애와 성격




1


이와 같은 큰 희망과 신앙의 복음을 들고 바울은 일어섰습니다. 아니 일으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도 사회의 구원도, 세계의 평화도 우주의 완성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인류의 희망은 모두 그에게 달려 있다. 다만 사람이 그를 믿기만 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일찍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박해한 자였음을 생각하면, 크게 돌이켜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제, 복음 전도의 열정은 스스로 불같이 그의 뼈 속에서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혼자서 생각해 낸 열심도 아니고, 또 누구에게서 임명된 것도, 의뢰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사로잡고 그를 강요해서 넓은 이방인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띠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되살아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사도 바울”(갈라디아서 1:1)이라는 것이 그의 자각이었습니다.

바울은 서재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행가였습니다. 그의 활동으로 보거나 성격으로 보아 그는 오리겐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가 아니라, 엘리아나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형의 인물이었습니다. 신약 성서 27권 중 바울의 서신이 열셋 있습니다. 즉 약 반수가 바울이 쓴 것입니다. 이 밖에도 바울이 쓴 서신에서 오늘날 전해 내려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 서신은 그 속에 신학적인 변증(辯證)도 포함되고 있지만, 그것을 결코 체계적인 신학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여행의 산물이고, 사신(私信)의 성질을 띤 것으로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도처에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는 여행지에서 또는 연금되고 있는 감옥에서, 자기가 일찍이 방문했던 또는 이제 방문하려는 각지의 형제 자매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이들 서신을 쓴 것으로 바울에게 있어서는 여행과 서신이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형태를 얼마간 오늘까지 지니는 것은 개인 잡지에 의한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붓을 들어 서신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구술(口述)하여 필기시켰던 것입니다. 다만 서신의 끝부분에 가서, 자필 문안만은 부기(附記)하는 것이 습관이었던 듯합니다. 갈라디아서 말미에 “보시오, 내 스스로 지금 붓을 들어 이렇게 큰 글자로 당신들에게 쓰고 있는 것을”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11). 바울이 스스로 붓을 들어 적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너무 바빴기 때문에 희랍어의 문장이 서툴렀기 때문에 시력이 약해서 또는 천막 제조의 노동으로 굵어진 손마디가 펜대를 잡는 데 접합하지 않아서 등등, 그 이유는 판명되고 있지 않지만, 때로는 의자에 앉아, 때로는 서서 방은 거닐면서 때로는, 한 마디 한 마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또박또박, 때로는 마른 풀에 불이 붙는 기세로 그는 말을 토해냈을 것입니다. 수신인을 눈 앞에 둔 듯한 절박한 현장감이나 진실감에서, 구술에 의한 서신은 가장 바울 바울에 어울리는, 바울다운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바울의 발은 또, 복음을 나르는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람제이 교수가 그 저서에 「여행자(旅行者) 성 바울」이라고 제목을 붙일 정도로, 그는 여행가였습니다. 바울의 주요한 여행을, 연대순으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메섹에서 회개한지 3년 지나,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나 야곱에 소개되었습니다.

(2) 안디옥의 교회에서 파견되어, 기근 구제(飢饉救濟)의 의연금을 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3) 역시 안디옥의 교회에서 파견되어 키프로 섬 및 갈라디아 지방에서 제1회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4) 할례 문제에 대한 협의차, 세 번째 예루살렘 상경

(5) 아시아주(州)의 내륙지방을 서쪽으로 나아가, 에게 바다에 임한 도로아스 항에 이르러,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를 건너,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데네, 고린도 등의 여러 도시를 전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제2의 전도 여행으로, 이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비로소 유럽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6) 고린도로부터돌아오는 도중, 예루살렘에 네 번째 방문을 한 뒤,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7) 소아시아 및 희랍으로 제3회 전도 여행

(8) 빈민 구제금을 가지고, 다섯 번째의 예루살렘 방문, 이때 보수파(保守派)의 유대인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陰謀)를 계획했으므로, 로마의 총독 벨릭스는 그를 가이사랴의 감옥에 2년간 보호 감금하였습니다. 그 다음 총독(總督) 베스도로 바뀌었을 때, 바울은 자기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가이사에게 상고(上告)할 것을 신청하고, 그에 따라 로마로 호송 받게 되었습니다.

(9)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해로(海路) 호송 도중 폭풍우를 만나 파선하여 마르타 섬에 상륙했지만, 다음 해 봄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보초를 세운 세든 집에서 연근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 후 바울의 생애는 확실히 모르지만, 한 번 석방되어 스페인에 갔다는 상상설도 있고, 또 고린도, 에베소 등 동북 도시를 방문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어쨌건 한 번 석방되었던 것은 사실 같고, 그 뒤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압송(押送)되어 그곳에서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여행한 이정(里程)을 합치면 굉장한 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이스만 교수는, 바울이 여행한 지역이 올리브나무가 생육하는 동온 지대(同溫地帶)에 있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철학자 필로가 있고, 신플라톤파 철학이 번영한 학문의 도시였지만, 어떻게 된 이유인지, 바울은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선배 바나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남이 놓은 기초 위에 세우기를 바라지 않는 바울이, 이집트에 가지 않았던 것도 수긍이 갑니다. 예루살렘은 베드로에 알렉산드리아는 바나바에, 그리고 나 바울은 서부 희랍, 로마, 스페인으로. 그렇게 바울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쨌건 바울의 발걸음은 남쪽으로 향하지 않고, 서쪽으로 뻗었습니다. 한 덩어리의 빵, 한 모금의 물, 그리고 몇 알의 올리브 열매를 가지고, 천막 제조의 나그네 직인(職人) 바울은, 서쪽으로 동쪽으로 몇 차례고 준령을 넘고, 대해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3


바울은 여행자로서의 어려움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로서의 심로(心勞)는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를 괴롭힌 사람의 제일은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주장한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을 하나님의 모독자, 율법의 파괴자로 알고, 몇 번이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둘째는, 이교(異敎)의 신들을 숭배하여 이익을 얻는 무리였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여신 알테미스의 은제(銀製)의 소궁(小宮)을 제조하여 팔고 그것으로 돈을 벌던 은 세공인들이 바울의 전도로 자기들의 장사가 문 닫을까 두려워, 소요를 일으켜 바울을 잡으려 한 일이 있습니다.

셋째는, 로마의 총독 이하 관리들도, 유대인의 인기를 얻으려 바울을 감금하고, 공정히 취급하지 않았던 일이 있습니다.

넷째는, 같은 전도자 중에 바울을 질시하는 사람이 있어서, 혹은 그의 사도로서의 자격을 의심하고, 혹은 그의 자유의 복음을 비판하고, 혹은 그의 성격의 결점을 걸어 인신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런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고 해도, 이런 비난에 끌려, 바울이 가르친 신자들이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떠나, 율법에 집착하는 형식주의의 신앙으로 후퇴해 가는 것은 바울로서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의 신자들을 향하여 비분에 차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들 눈앞에 선하거늘, 도대체 누가 그대들을 미혹케 했단 말이오, 나는 오직 이 한 가지 일을 그대들에게 듣고 싶소. 그대들이 영을 받은 것은 율법을 행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들어서 믿었기 때문인가?
(갈라디아서 3:1-2)

이것은 바른 신앙의 길에서 떠나가는 율법주의적 경향의 신자에 대한, 폐부에서 울려나오는 사랑의 부름이었습니다.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다. 그 가르침은 복음이 아니다. 돌아와, 돌아와 하고.

바울의 전도와 사람 됨됨이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한 사람은 상당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베드로 등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달리, 예수의 직제자(直弟子)가 아니니까, 그 사도로서의 자격이 베드로만 못하다든가, 또는 바울이란 인물은 떨어져 있으면 강한 듯이 말하지만, 만나 보면 약한 사람이다. 즉 이불 안에서만 활개 친다든가, 또는 바울은 전도 여행의 핑계로 돈을 벌고 있다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비평 및 중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사람에게 부친 서신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지만 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에 다음과 같이 부러지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이오, 나는 미친 듯이 말하오, 나는 그들 이상이요, 그렇소. 고생하기를 더하고, 투옥된 일도 더 많고, 매 맞은 것은 훨씬 더 많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여러 번 하였소. 유대인으로부터 40에서 하나 모자라게 매를 맞은 일이 다섯 번, 로마 사람에게 매를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破船)한 것이 세 번, 그리고 꼬박 하루 밤낮, 바다 위에서 표류한 적도 있소. 몇 차례를 여행하고, 강의 어려움, 도적의 어려움, 같은 국민의 어려움, 이방인의 어려움, 도회의 어려움, 황야의 어려움, 해상의 어려움, 거짓 형제의 어려움을 만나고 애쓰고 괴로워하며, 수시로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때로 먹을 것이 없고, 추위에 얼고, 벗은 채로 지낸 적도 있소. 여러 가지 일이 있는 외에, 날마다 내게 닥치는 여러 교회의 걱정거리가 있소.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않을 수 있겠소. 만일 굳이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내 약함을 자랑하리다. 영원히 찬양받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내가 거짓을 말하지 않은 것을 아실 것이오.
(고린도 후서 11:23-31)




4


참으로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면서 고난과 전투의 일생을 보냈습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에 인류의 구원의 희망이 의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적을 가졌습니다. 그는 많은 적과 격심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이겼습니다. 이겼던 것입니다.
우리들 사방에서 환난을 받아도 궁하지 않소. 앞길이 막혀도 희망을 잃지 않소. 박해를 당해도 버려지지 않소. 넘어져도 멸망하지 않소.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우리들의 몸에 지고 있소. 그것은 또한 예수의 생명을 우리들의 몸에 나타내기 위함이오.
(고린도 후서 4:8-10)

라는 것이, 바울의 생애의 경험이고, 실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투만이 바울의 생애는 아닙니다. 그에게 큰 환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써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 그들 사이에서 별과 같이 이 세상에서 빛나고 있소.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는 내가 달린 길이 헛되지 않고, 애쓴 것도 헛되지 않았던 것을 자랑할 수 있소. 그리고 정녕, 그대들이 신앙의 제물을 바치는 제단에, 내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이오. 그대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오. 그와 같이 여러분들도 기뻐하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시오.
(빌립보서 2:15-18)

여러분들의 신앙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나는 순교의 피를 뿌려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슬픔의 사람 바울은, 그러므로 환희의 사람이고, 전투의 사람 바울은 그러므로 평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의 사람이었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순을 모순 그대로 살았던 야인이었습니다. 그를 “성(聖) 바울”이라느니 하여 떠받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바울입니다. 그저 바울입니다. 우리들은 그를 통하여 자유의 평민을 안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유럽에 전해진 것은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인류의 문명사(文明史)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영향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세계적 전파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이 싸운 싸움은, 그 뒤 여러 차례나 문명의 위기 중에서 싸워져 인류를 형식주의, 율법주의의 침체와 허위에서 구원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율법주의의 베라기우스와 싸웠던 무기는 바울이었습니다. 루터가 형식주의의 가톨릭 교회와 싸운 것도 바울에 의해서였습니다.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가 일체의 중냄새나는 제사적(祭祀的) 그리스도교와 싸운 것도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해서였습니다. 예부터 모든 종교 개혁은 언제나 바울로 돌아가 싸워졌던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정신은 자유롭고 혁신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낡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때 학자 사이에는,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단순한 복음을 부자연스럽게 왜곡시켰으니까, 우리들은 바울을 떠나 예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를 왜곡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바울도 왜곡하고, 예수도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예수의 발자취는 거의 유다 밖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바울의 발자취는 널리 세계에 미쳤습니다. 예수는 시골 출생이었지만, 바울은 도시인이었습니다. 예수는 학교를 다니지 아니하였으나, 바울은 가마리엘의 문하(門下)에서 배웠습니다. 그와 같은 차이점은 있었지만, 바울은 가장 자유롭게, 가장 신선하게, 예수의 복음을 후세에 권한 사도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중의 의미로 바울을 필요로 합니다. 이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들 각자의 구원의 확립을 위하여, 이 황폐한 세계에 평화가 영속하기 위하여, 이 미쳐 날뛰는 우주가 완성되기 위하여, 우리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랑하는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씨는 의식이나 전통이나 율법 등의 불순물을 섞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발아력(發芽力)을 방해는 일체의 불순물에 미혹됨이 없이, 어디까지나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애쓰며,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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