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캘빈의 빌립보서

하나님아들 2022. 1. 15. 08:36

캘빈의 빌립보서 

 

16:9-15, 1:1 칼빈의 빌립보서 주제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1:1)에게 보내진 편지형식의 주의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로 유럽 땅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 빌립보(Philippi)는 일반적으로 드레이스(Thrace)의 변방에 위치한 마게도냐(Macedonia)의 한 도시로 알려집니다.

 

 

 

 

 

1. 빌립보는 안토니(Antony)와 옥타비아누스 이후 씨이저(Caeser), 부루투스(Brutus), 카시우스(Cassius)에게 정복당했던 폼페이(Pompey) 평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로마의 시민전쟁은 이곳을 두 개의 잊을 수 없는 격전장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2. 바울은 주께로부터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부름 받았을 때 누가가 사도행전 1612절에서 15절에 설명한 대로 그곳에 처음으로 교회를 설립했었습니다.

 

본 서신은 이 교회가 확고한 믿음을 잘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가 불어나고 믿음의 덕을 부요케 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주께서 사도 바울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자기들의 목회자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이 감옥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과 기타 특별하게 써야 할 것들을 보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이 때에 틀림없이 교회의 모든 형편을 설명하면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권고의 말씀을 사도 바울에게 요구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필요로 하는 권고라는 것은 거짓 사도들이 바른 교리를 부패케 하기 위해 곳곳에서 벌이는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지역의 교인들은 진리 가운데 확고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통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변치 말기를 당부했습니다.

 

 

 

 

 

 

빌립보서 주제

 

. 그러나 사도는 에바브로디도가 우려했을 인간적인 약점을 생각하고는 교인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평안할 때 강건하여지기를 위해서 이에 적합한 충고들을 덧붙였습니다.

 

 

 

1. 1장에서 사도는 먼저 그 교인들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정중한 감사를 표했습니다

 

다음에 사도는 계속해서 교인들이 죄인이 된 자기 때문에, 또 자신이 당하는 생명의 위험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형편과 구속된 사실에 대해 말합니다.

 

그 다음에 따라서 사도는 이 사실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배우게 하기보다 복음 자체의 실례를 통하여 만사가 미리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첫 장을 조화와 인내에 대한 짤막한 권면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2. 2장에서 사도는 그러나 야심이란 거의가 항상 불화의 씨가 되느니만큼, 새롭고 기이한 교리들을 향해 문호를 개방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경고합니다.

 

먼저 바울은 서두에서 신중하게 교인들로 겸손과 정절에 힘쓸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다음에 바울사도는 또 이 사실을 교훈하기 위해 여러 방도의 논조(論調)를 사용합니다.

 

그 다음에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사는 교인들에게 보다 좋은 것을 붙잡도록 하면서 조만간에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합니다.

 

또 그 다음에 심지어는 바울 자신이 그들을 방문하기 원한다고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에바브로디도의 늦어짐에 대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3. 3장에서 바울은 한편으로는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고, 또 한편으로는 교인들의 쓸데없는 자만과 그들이 말하는 할례 교리를 제거합니다.

 

먼저 그들의 모든 헛된것들 대신 그리스도만을 내세우고 그들의 자만심에는 자신의 옛 생활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엿볼 수 있는 현재의 생활을 비교하여 보여줍니다.

 

다음에 바울은 우리가 일생동안 애쓰지 않으면 안되는 완전해지고자 하는 목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친구되는 것으로 말하면서 자신을 예로 들어 증명합니다.

 

 

 

4. 4장에서는 먼저 사도 바울은 특별한 훈계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다음에 사도는 곧 부드럽게 어조(語調)를 바꾸어 말합니다.

 

끝으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로 이 편지를 끝맺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의 필요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선물을 보내준 것이 결코 잘못된 것으로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

 

1:1-6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 사도와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빌립보 교회에 축도(祝禱)합니다(1, 2).

 

사도는 빌립보교인들의 믿음과 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3).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가 간절한 사실을 말합니다(4-5).

 

사도는 말로든 글로든 빌립보 교회 신자들을 총체적으로 격려합니다(6).

 

 

 

 

 

1. 본문 1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입니다.

 

1) 본문 1절 초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입니다.

 

바울은 자신이나 자기 사역에 명성을 얻을 만한 칭호를 사용하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자기가 그리스도의 참 사도인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장황스런 찬사가 필요 없었기에 생략하고 있습니다.

 

2) 본문 1절 하반에 감독들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공적 말씀 사역의 존귀함 때문에 목회자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이 한 교회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아 모든 말씀 사역자들에게 일반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과 목사와 장로는 같은 뜻입니다.

 

제롬(Jerom)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에바그리우스(Evagrius) 에게 보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사도에 대한 설명에서 이 귀절을 인용했습니다.

 

후에는 대학에서 지명한 개교회 장로들만을 감독으로 부르는 것이 습관화되었습니다.

 

물론 장로는 인간 관습에서 나온 것이요, 성경 말씀의 권위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실로 우리가 알기로는 사람의 마음이나 습관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주관하지 않고는 말씀의 사역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질서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지 나라 전체나 전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단어에 대해 논쟁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이 생각해 낸 잘못된 것을 택하는 것보다는 방언의 창시자이신 성령 하나님을 따라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모든 장로들이 동급이기에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 중에 한 사람을 말의 와전으로 인해서 새로운 이름의 미명아래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게 하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

 

3) 본문 1절 하반절에 집사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명칭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도와주는 자에게 사용됩니다.

 

또 이 명칭은 도덕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장로들에게 사용됩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도와 주는 의미를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구제품을 주고 받는 것을 관리했던 청지기로 생각합니다.

 

 

 

2. 본문 2-3절은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기쁨으로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사도는 이 말씀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했습니다

 

둘째로 사도는 교인들의 지난 생활을 칭찬하여 앞으로 더 인내를 권장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기도에 썼던 것을 열망해서 자기 사랑을 다른 방법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즐거운 일을 말할 때마다, 곧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는 이와 같은 사실들이 우리 가운데 일반으로 행해져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과 교제를 나눔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에서 내가 너희를 자주 생각한다는 뜻을 보여줍니다.

 

 

 

3. 본문 4절은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입니다.

 

정확히는 항상 나의 모든 기도 중에 너희 모두를 위하여 간구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앞서 그 신자들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기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는 그 신자들이 자기의 모든 기도 속에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기쁨으로 그 신자들을 위해 간구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쁨은 과거에 대한 것이고 기도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이 복된 출발을 한 것과 그들이 완전해지는 열망을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족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는 것은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해 줍니다.

 

 

 

4. 본문 5절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입니다.

 

1) “첫날부터라는 말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교리를 즉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알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칭찬합니다.

 

 

빌립보서 1

 

2) 본문의 이제까지라는 구절은 인내를 가리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즉시 따른다는 것과 끝까지 변치 않고 인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덕()인지를 알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즉각 순종하기를 게을리 하고 심지어는 변절하여 돌아서 버립니다.

 

3)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는 말씀에서 바울은 이제 자신이 누리는 기쁨에 대한 또 다른 이유 하나와 그 기쁨의 근간이 되는 최상의 상태로 넘어갑니다.

 

바울이 누린 기쁨은 그 신자들이 복음의 교제 안에 들어온 것 때문입니다.

 

그 신자들이 믿음으로 복음에 참여한 자들이 되어진 사실에 있었습니다.

 

복음이란 그 복음의 총체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교제라는 말은 비록 바울이 복음을 믿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함께 모이는 것을 가리켜 말했다고 할지라도 일반 성도들의 교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5. 본문 6절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입니다.

 

1) 교인들의 장래에 대하여 성령의 감화로 된 확신은 사도에게 기쁨을 더해 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떻게 인간이 육체의 질병과 나약함, 위험, 방해 속에서 감히 내일을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확신을 인간적인 우월성이나 불변성에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단순히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교인들에게 선언하심에서 이 확신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는 것은 우리가 장래에 잘 되어질 소망을 가질 때입니다.

 

이런 은혜가 즉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아버지같이 돌보아 주심을 증거해 줌으로, 앞날에 확신이나 용기가 없이도 감사함으로 이런 은혜를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고 싶은 진리는 하나님은 선을 행하기에 지치고 기진하여 있는 인간과 같지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자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하여 묵상하게 하심으로 장래에 대한 용기와 확고한 소망을 갖게 하고 또 항상 삼단논법을 마음속에 생각나게 하십니다.

 

2) 선지자의 증거대로 주님은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138:8, 64:8). 우리 모두는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시작하신 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단순히 창조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우리를 부르시어 그의 아들로 삼아주신 구원의 서정 전체를 뜻합니다.

 

 

빌립보서 1

 

주께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한 사람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사람 자신에게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이때에 성령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 개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성령의 밖으로 나타나는 효험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으로 객관화되어 나타나 보여주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이 둘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의 확신이란 자기 속에서 일어나서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의 확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어떤 증거를 느낄 수 있을 때는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선한 소망을 가짐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멸시받지 않고 사랑으로 공평하고 인간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반 법칙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자기 노력을 없애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4) 본문 중간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싸움의 끝까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죽음으로라야 끝이 납니다.

 

성경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말할 때 이런 말씀으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멸망할 육체에서 자유한 자들이 더 이상 육체의 욕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반면에 그 자유한 자들은 아직 자기들이 소망하는 점에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보하는 중에 있다거나 또 그들이 바라는 복과 영광을 아직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소망 중에 감춰 있는 보배들이 나타날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주께서 주시는 영원한 소망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우리의 눈을 우리 속 사람이 싫어하는 그 이상으로 복된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1

 

1:7-11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본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대한 사도의 확신과 애모(愛慕)와 기구(祈求)가 어떠함을 밝힙니다(6-11).

 

 

 

 

 

1. 본문 7절은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입니다.

 

1) 7절 초는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참된 경건의 표식(標識)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 표식은 양자(養子)의 영이 자신을 드러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와 함께 은혜의 참여자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성도들이 끝까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에라스무스(Erasmus)가 분별력이 있는 신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구절을 독특하게 번역한 것에 대하여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바울이 근본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잘 되기 바라고 있다는 견해를 말했습니다.

 

또 에라스무스는 그 교인들이 복음을 옹호하고 복음 안에 묶인 바 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은혜의 참여자이었다고 말합니다.

 

2) 본문 7절 중간부분은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랑한 사실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항상 할 수 있는 능력껏 바울을 도와줌으로 복음의 동기를 유지함에 바울과 친구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비록 육체는 서로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모든 일에 능력대로 봉사하고자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묶여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너희를 가짐은은 신실하고 거짓이 없이 조금도 의심하는 마음이 없는 확실성으로를 의미합니다.

 

은혜에 참여한 자나의 매임은 복음으로 보장이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이와 같이 함께 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성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빌립보서 1

 

3) 본문 7절 끝부분은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입니다.

 

갇힌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 것은 세상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진리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고난당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흔치 않은 영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1) 하신 말씀은 공연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친구되는 것을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변명과 확정함매임을 첨부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나님의 대적들과 대항해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 영광스러운 봉사임을 표현하려 했을 것입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복음을 변호케 한 것은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순교자들은 이러한 사상으로 무장해서 모든 불신 세력을 경멸하고 각종 고문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사상이 신앙 고백을 위해 부름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호자로 택함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사상을 가진 자는 보다 큰 용기를 얻어 배반하고 버림받는 자리로 쉽게 돌아서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의 확정이 인간의 꿋꿋함에 있단 말인가 고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는 너무 확고하여 외부적인 요소가 첨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거짓말쟁이가 되어도 하나님은 결코 진리에서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약한 양심이 앞에서 말한 방법으로 도움을 받아 확고하여진다는 데는 애매한 점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확정함은 인간에게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많은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복음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 속에 그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인쳐져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터틀리안은 그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거룩한 피 곧 하나님의 영광의 우승자는 자녀들을 자라게 하는 씨가 되어질 것이다라는 어떤 시를 흉내 내어 봅니다.

 

 

 

 

 

2. 본문 8절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입니다.

 

 

빌립보서 1

 

1) 상반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대조함으로 자신의 사랑이 거룩하고 신적(神的)인 사실을 암시합니다.

 

사도가 육신을 따라 자신의 이익을 좇아 사랑했다면 환경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도의 마음이 시시각각 변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에게 믿는 자의 마음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노저어 감으로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참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심장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장을 여시는 것처럼 우리를 찔러 깨우치는 막대기가 된다면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내가 사모한다는 표현을 통해서 논리적인 형식을 구분했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것들을 사모하는 것이 사랑의 증표임을 나타냅니다.

 

2) 본문 8절 하반부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입니다.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더욱 명백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맹세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가 장성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이런 맹세가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봅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바울의 사랑이 빌립보교인들에게 철저하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르치는 자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교훈에 대해서 크게 신용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진리의 증인으로 부른 것은 하나님만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사랑의 증인이라 함은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9절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단순히 한번 말했던 것에 대해 기도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자기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간구한 모든 것을 통해 교인들로 기도하는 요령을 배우게 하고 간구하는 은혜가 점점 더 풍성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자기들 자신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너희의 존경’ ‘너희의 주라는 무식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한 일도 없고 그 실례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불완전하고 칭찬할 만한 단순하고 자연스런 말의 의미에서 떠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1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장은 지식과 총명과 사랑이 점점 풍성하게 될 때 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의 습관을 따르면 안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으로서(by)’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 말이 도구적 혹은 형식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풍성해지면 풍성해질수록 더욱 우리의 사랑도 증가되어야 합니다.

 

이 의미는 너희의 사랑이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입니다.

 

모든 지식은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충만하고도 완전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4. 본문 10절은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입니다.

 

1) 본문 10절 초두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란 선하고 유익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서 쓸데없고 무익한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무익한 것을 배움으로 열매 없게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르본 학파(Sorbonnist)의 신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신학은 우리의 일생이 천국생활을 바라는 점이나 영적인 유익을 얻는 점에서 유크리드(Euclid) 보다도 못한 교훈을 합니다.

 

만약 이 교훈을 옳다고 가르친다면 영적 교리에 대한 치명적인 신성모독 이상으로 비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성경 말씀은 유익한 것’(딤후3:16)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억지 이론만을 꾸미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0절 후반부는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입니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로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흥미를 교묘하게 기대함에서 떠나 순전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하여 줍니다.

 

크리소스톰은 적극적 의미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하게 되기를 원했던 만큼 인간들 앞에서도 칭찬받을 만한 생활을 하도록 하여 주위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생활로 말미암아 해를 끼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은 소극적 의미로 보는 것이 보다 문맥에 맞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지식을 간구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들의 부르심 안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가 빈번히 자빠지고 비틀거리며 방황하게 되는 것은 무지(無知)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단이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시시때때로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던져 우리를 돌아서게 했는지를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5. 본문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입니다.

 

선한 양심은 생활에 선한 열매를 나타내기에 이 말씀은 외면 생활에 관계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러한 열매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있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열매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은 성령으로 성별될 때에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따라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경우를 나무에다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돌감람나무여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열매 맺는 나무가 되도록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15:1)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외모로는 지극히 선하다고 할지라도 이 목표를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부패한 것이요 냄새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함의 의는 믿음의 자유로운 의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의의 열매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에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게 순종함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라고 할 수 없으며 참 성도들 중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경우입니다.

 

분명히 선행은 좋고 아름다운 의의 열매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은 성령의 중생을 통해 우리 가운데 의를 창조하시고 죄를 용서하심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모든 의는 믿음에 의존합니다.

빌립보서 2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본문 말씀은 1:27-30절 말씀, 곧 반대자들의 준동에 흔들리지 말고 단합하라는 말씀의 계속입니다.

 

 

 

1. 본문 1절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입니다.

 

바울은 가장 부드럽게 권면하기를 빌립보 교인들이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피차 조화를 이루어 안에서 다툼이 일어남으로 해서 서로 틈이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 거짓 사도들의 속임수를 드러내라고 말씀합니다.

 

다툼은 항상 사단이 악한 교훈을 퍼뜨리도록 문호를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사단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어책이 됩니다.

 

παρακλήσις 는 자주 훈계로 번역되기에 첫 구절은 다음 방법으로 설명됩니다.

 

만일 주의 이름 안에서와 주의 권위로 온 훈계면 너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문맥에 보다 적합한 의미는 이와는 다릅니다.

 

만일 너희 중에 무슨 그리스도의 권면이 있다면 이것으로 너희가 나의 슬픔을 감하여 주는 것이요 만일 너희가 나에게 어떤 권면과 위로를 보내준다면 너희는 분명히 나에게 사랑 외에는 빚진 것이 없으며 만일 너희가 성령의 교제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할 것이며, 너희 중에 무슨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너희가 나의 고통을 덜어주고 너희를 충만케 하는 것이니라 등등.’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깨닫게 되고 목회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교인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과 같은 존경을 요구하기 위하여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사용했을 때, 사도는 그 교인들의 동정을 애원함으로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권위가 필요할 때 그것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애원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이 방법이 그들의 사랑을 얻는데 보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가르치고 순종케 하려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은 주의 사도께서 친히 수행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위하도록 잘 양육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

 

2. 본문 2절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입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생각과 뜻에서 연합하라는 권면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바 교리와 성도간에 피차의 사랑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이 둘이 같은 것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마음이 되어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을 권하여 말씀한다고 봅니다.

 

τατό 라는 표현은 신자들 스스로가 피차간에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의 상호 사랑은 외면적인 조화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이 사랑으로 연합되지 않으면 이것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피차간에 사랑을 하도록 같은 마음이 되어지면 뜻이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번역해야 하는 이유는 관사가 때때로 부정사 대신에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번역을 우리는 조금도 무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3. 본문 3절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입니다.

 

1) 본문 초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입니다.

 

다툼이나 허영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는 가장 위험한 두 개의 독소입니다.

 

다툼은 각자가 자기 의견을 끝까지 고집할 때 일어납니다.

 

다툼은 한번 들어선 길을 무모하게 돌진하기 위해 노하기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 자기가 꾸며낸 생각으로 즐거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평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요, 특별히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것입니다.

 

욕망이란 모든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부채질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허영은 어떤 자기 육신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어찌 헛되지 않겠습니까?

 

 

 

 

 

 

 

 

빌립보서 2

 

2) 본문 끝부분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병폐에 대해 좋은 의미에서 복종이라는 한 가지 치료법을 제시합니다.

 

복종은 겸손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게 함으로서 쉽게 무질서한 상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들에게 진정한 겸손을 정의하기를 기뻐합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진정한 겸손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 어떤 불화가 있다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이 그토록 귀한 미덕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임금으로 삼고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명령한다. 이 얼마나 큰 교만인가! ’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이 어리석은 찬사로 말미암아 형제들을 멸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명한 것과는 너무도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략하고서라도 머리가 되기를 원치 않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자기보다 훨씬 아래 있는 자를 자기보다 위에 있는 자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부족함을 바로 깨닫는 데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어느 누구도 외면적 복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복을 자기가 잘난체하는 데 사용하도록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달아 교만해지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기 스스로 그러한 생각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이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여 수정케 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반면에 타인에게서 어떤 칭찬을 받을만한 훌륭한 점이 있을 때에는 사랑으로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이 같은 방법을 잘 따른 자는 자기보다도 타인을 낫게 여기는데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 사실을 자기가 성령의 감동으로 첨부한 말, 즉 각자가 자기의 일만 돌아보지 말고 자기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라는 말씀에서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비록 자기가 우위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길 수 있는 일이 분명히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2

 

4. 본문 4절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돌보지 않고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잘 되기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옥에 갇히고 착고에 채이웠고, 큰 죄목을 가지고 있기에 아직 고통을 당하기 전이었지만 핍박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실제적인 사실이었을지라도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바 사도의 충만한 기쁨과 또 그리스도의 교회가 잘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교회가 부흥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조건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과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답게 형제간에 화목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시편은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우리의 큰 기쁨은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137:6).

 

바울의 모든 완전한 기쁨이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에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들은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이중으로 고통을 더해주는 가장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2:5-8 너희 안에

 

 

 

 

 

본문은 주께서 자기 택하신 자들을 위한 최상의 봉사에 최상의 낮아지심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곧 주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의 구원이 됩니다.

 

 

 

 

 

1. 본문 5절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입니다.

 

바울은 여러 말로 권면 했던 것을 이제는 주의 본을 보여주면서 겸손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를 닮도록 우리를 설득하여 이것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겸손에 초대함으로써 참된 영광을 얻는 길을 걷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을 권면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겸손의 모형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동사를 능동태로 번역하였지만 칼빈은 수동태로 봅니다.

 

그 이유는 의미에 차이가 없기 때문인데 칼빈으로서는 단지 바울이 사용했던 표현 방식을 그대로를 신자들에게 보여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2. 본문 6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입니다.

 

1) 본문 6절 초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입니다.

 

(1) 그런데 이것은 유사성의 비교가 아니라 더 위대함과 덜 위대함의 비교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스스로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수치스러운 자리로 낮추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겸손도 위선된 생각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행해야 할 모든 것들을 마지못해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 계셨으므로 자신을 하나님의 본체로 보여주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자신을 비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할진대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어찌 어리석게도 교만하여 높아질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서 2

 

(2)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는 그분. 곧 하나님의 위엄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외모를 통해서 그 본체가 알려지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위엄은 바로 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적당한 비유를 든다면 왕의 본체는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비나 훌륭한 모습, 즉 그의 홀, 그의 왕관, 그의 곤룡포, 그의 시종들, 그의 심판대, 기타 왕권의 상징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 집정관의 본체는 자주 빛으로 테를 두른 망토, 상아 의자, 몽둥이와 도끼를 든 릭토르(Iictors)였습니다.

 

릭토르란 로마에서 몽둥이로 상판 밑에서 죄인 처벌을 업으로 삼던 관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천지창조가 있기 전 하나님이 본체였습니다.

 

요한복음 17:5절에 그가 말한 대로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기 전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지혜는 초라하고 천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웅장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분이었으므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보여줄 충분한 권리가 있었지만 사실 그대로 보이지 않으시고 인간이 보기에 그리스도가 그러한 권리를 가지셨다고 볼 만한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2) 본문 6절 하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입니다.

 

(1)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고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이 여기지 아니하시고했을 때는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며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자발적인 것이요 필연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는 그가 여겼다고 직설법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지만 문맥은 가정법으로 번역할 것을 요합니다. 또 바울은 보통 가정법 대신 과거 직설법을 사용했는데 그때는 보충으로 소위 가정관사 ν() 을 남겨 두었습니다.

 

로마서 9:3 ηύΧομην(에우코멘 : 내가 원하는 바) 고린도전서 2:8 έίϒάρϒνωσαν(에이 갈 에그노산 : 만일 그들이 알았더면) 이 그 실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바울이 여기서 의도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취급함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높이 평가하도록 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2)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이 말씀 안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장님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2

 

에라스무스가 이 구절을 다른 사람들이 하듯 말재간으로 설명해 넘기려고 했던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였습니다.

 

그가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알고 있었더라도 만일에 그의 정통적인 고백이 성경적인 권위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우리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기로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리스도는 피조된 하나님, 곧 성부보다 못한 분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등을 반대한 아리안주의(Arians)의 불경을 논박할 충분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빼놓는다면 어디서 취한 것이 하나님과 동등 된다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이사야가 부르짖은 분과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아 있노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입니다(48:11).

 

3) 본문에 사용된 본체라는 말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모습혹은 외모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하지만 하나님에게 그 형상을 적용할 때는 거짓이나 꾸며댄 것은 없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영원한 신성의 증거가 됩니다(1:20).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체는 그리스도의 위엄으로부터 올바르게 증명되었습니다.

 

그 위엄은 스스로 낮아지시기 전에 성부와 동등으로 취하셨습니다.

 

모든 마귀들이 이 구절을 외곡되게 할지라도 최소한 가장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본체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7절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입니다.

 

1) 본문 7절 초두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입니다.

 

(1) 비운다는 것은 낮추셨다와 같은 말로 다음 말들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은 έμφϲτικοτέρως ....... 아무 것도 없게 한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실은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잠간동안 중지하시고 육체의 나약함 아래서 보이지 않게 되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는 자기 영광을 축소시킨 것이 아니라 감추심(suppinendo) 으로 간직하셨습니다.

 

(2)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행하셨단 말인가?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도 이 말에 동조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본체는 어디에 있었는가?

 

 

빌립보서 2

 

여기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육신 속에 나타난 하나님 즉 전체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여기서 비운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속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인간을 인간은 죽는 존재이므로 단지 세상만을 생각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전인(全人)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단지 인간적인 면, 즉 육체만을 죽는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한 품격에 두 가지 성질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는 하나님과 동등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신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는 자기의 영광을 억제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3) 둘째로 야기되는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이적과 능력을 통해 증명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것이 항상 나타났다고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1:14)를 어떻게 비웠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낮아지심은 자기 신적 위엄을 가리우는 베일에 불과했다고 답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까지는 변형된 모습이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17: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죽음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17: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는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1:4) 합니다.

 

다른 곳에는(고후13:4) “그는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고난 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도 외면적 모습이 낮아지는 방법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비워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이 인간의 종이 되신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할례의 수종자(15:8)라 불렀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기를 증거 하기를 섬기러 온 자(20:28)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는 벌써 오래 전에 보라 나의 종”(42:1) 이라 예언했습니다.

 

2) 본문 7절 하반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입니다.

 

(1) 여기 Γενάμενος cmstihutus (만들어진 혹은 정해진) 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졌기에 그 모양이 사람의 일반적인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씨온 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자기들이 상상해 낸 허영(虛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별로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

 

3:1-6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서신(書信)으로 하는 일도 수고였겠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그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무거운 짐도 가볍게 생각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의 교훈 때문에 신앙이 견고해지며 안전해지며 그것으로 사도는 만족합니다.

 

선량한 스승은 그 제자들이 옳은 길에 확실성 있게 서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여깁니다(요삼1:4).

 

 

 

 

 

1. 본문 1-2절은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입니다.

 

1) 본문 초두는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이 부분은 이제까지 사도가 말씀한 것의 결론입니다.

 

사단은 매일 풍문을 퍼뜨려 교인들을 실망시키기를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용이하게 좋은 용기를 갖도록 합니다.

 

바울은 교인들이 한번 받은 교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이 방법으로 권면합니다.

 

종말로는 수많은 방해 가운데서도 거룩한 기쁨을 누리기를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사단이 십자가의 쓰라림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합니다.

 

또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싫어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맛봄으로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불안과 비애를 감수하는 것은 매우 흔치 않은 미덕입니다.

 

2) 본문 중간부분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바울은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가볍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필요한 몇 마디만 골라서 거짓 사도들을 격렬하게 논박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빌립보 교인들을 유혹했을 뿐이지 완전히 정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전 분야에 걸쳐 다 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게 귀를 빌려주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

 

그러므로 바울은 교인들에게 근신하여 거짓 사도들을 분별해 막아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첫째로 그 거짓 사도들을 ’(dogs) 라 부릅니다.

 

이 비유는 그 거짓 사도들이 배 채우기만을 위하는 자들임과 어리석은 부르짖음으로 참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불순하고 야비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 거짓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헐뜯기에 그렇게 불리운 것이라고 하나 우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그 거짓 사도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 합니다.

 

이것은 교리를 건설한다는 미명아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진멸하기만 했다는 뜻입니다.

 

그 거짓 사도들 중에는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공적 대변인 같은 자는 그라쿠스(Gracchus)가 했던 대로 게으르게 앉아 있기만 했던 자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라는 조롱을 당합니다.

 

그라쿠스는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라쿠스는 치명적인 폭동의 주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하는 자들을 분별케 해서 믿는 자들이 악한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세 번째 이름은 고상한 것으로서 προσονομασία(프로소노마시아), 곧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그 거짓 사도들을 교회의 단일성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놓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부름으로서 그들의 자랑을 흉내를 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성령께서는 자기의 사역자들을 통해서 항상 재치와 유모어를 사용하신다는 실예를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우지 않도록 바울은 허둥지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선지자들에게서 셀 수 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도 이사야가 가장 재치 있는 비유와 은유를 풍부하게 사용합니다.

 

우리가 더 세심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는 바울의 열심입니다.

 

이 거룩한 열정이 작열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고 부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무절제함과 과격한 말들이 열심의 가면 아래 스며들지 않게 조심합니다

 

바울이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우리에게는 수고로움이 없다고 말했을 때는 자기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미 글을 쓴 일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자기가 쓰는 것을 통해서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주 그들에게 말했던 것들을 기억나게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러한 독소들을 막아내야 한다고 자주 말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3

 

그러나 만일 바울이 잠잠하고 있다면 넘어뜨리려는 위험한 요소들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것들을 다시 반복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확실히 좋은 목회자들은 양무리를 살진 꼴로 먹여주며 자기의 양들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이리떼들이 양무리를 공격해 올 때는 쫓아 보내며 또 계속해서 경성하여 경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도적들과 강도들은 항상 교회를 해치려는 기회를 두루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몇 차례만 용기를 내서 물리치고 아홉 번째나 열 번째 공격에 넘어져 버린다면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또 이렇게 반복하는 것이 까다로운 것으로 여긴다든가 불필요한 것으로 멸시하는 것을 방지하여 주기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경과민이어서 같은 것을 두 번씩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그날 그날의 일에만 크게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10년 후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이 권면을 빌립보 교인들이 듣고 크게 도움을 받아 바울이 교황주의자들을 목표하고 있는 이리떼들을 알아냈다면 이는 누가 그들의 헛된 교훈을 분별해내지 못하겠습니까?

 

바울이 삼가라고 한 것은 누구를 가리킨 말입니까?

 

이 말은 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자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은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5, 27) 고 했습니다.

 

 

 

 

 

2. 본문 3절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입니다.

 

1) 본문 중간 부분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직 그들과 대조가 되고 있는데 우리는 실제를 붙잡고 있으나 그들은 상징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 한다고 한 구절과 잘 부합됩니다.

 

바울은 육체라는 말 속에 사람들이 그 내용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자랑을 삼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육체라는 말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

 

바울은 이와 같이 율법에 괴팍스런 열심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것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고 가차없이 폭로합니다.

 

바울은 한 가지 것에 대해서 자랑한다는 말과 신뢰한다는 말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신뢰는 사람의 의기를 돋우어 자랑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여 주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2) 본문 끝 부분은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참 아브라함의 씨요, 할례의 표로 인쳐진 언약의 후사라는 뜻입니다.

 

참 할례란 영적인 것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내적인 것이지 육신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29).

 

성령으로 봉사하며라는 말로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으며 자기 자신을 버리고 순전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짓 사도들은 이와는 정반대로 단지 의식적인 봉사만을 주장하고 있다고 바울이 질책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외부적인 의식을 통해서 봉사할 것을 강요한다. 그들은 율법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거짓된 자랑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참 할례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자들은 진리란 세례와 성찬과 같은 성례를 배제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형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지되었고 할례는 세례로 바뀌었다는 원리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 원리에서 순전하고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이제 율법적인 의식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신자들은 모험에서 분리된 참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 따라 나옵니다.

 

 

 

 

 

3. 본문 4절은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입니다.

 

1) 본문 초두는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나입니다.

 

바울은 자기 외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어리석은 말을 흉내내어 본다면 자기에게도 자랑할 만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실로 나의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육체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냐고 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자기를 자랑하는 오만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를 배웁니다.

 

 

빌립보서 3

 

만일 우리에게도 그들이 자랑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우리들에게도 있다고 말대꾸함이 없이도 그들의 그리스도를 거스리려는 어리석은 자랑을 용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들이 제일로 꼽았던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는데 모든 육신의 신뢰는 헛된 것이요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2) 본문 후반부는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들과 같은 수준에 있는 자 중에 하나로 생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보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의 탁월함을 부러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부족함을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피차에 우월함을 견주어 보기를 원한다면 자기가 다른 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곧 이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로 그들이 가진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신뢰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육체의 자랑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여져서 자기를 신뢰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4. 본문 5절은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입니다.

 

1) 본문 초두는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8일의 할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율법에 정한대로 정당한 예식을 통해서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통상적인 할례를 바울이 곧 이어서 지적한 것처럼 다른 민족과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였으므로 자기들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흔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예식이 이방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개종하게 되면 젊을 때, 혹은 어른일 때, 심지어는 노인이 되었을 경우에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3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족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바울이 자기가 베냐민 지파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남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 그 지파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이 방법으로 자기가 참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확증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같은 견지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세가 아브라함을 가리켜 사용했습니다(14:13).

 

그러므로 바울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야곱의 씨에서 나왔으므로 그는 선조들이나 조상들에 대해서 말할 만하고 또 흐려져 가는 과거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본문 끝부분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입니다.

 

바울은 자기 혈통의 고상함을 말한 후 이제는 개인적인 독특한 성품에 대해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깨끗한 생활과 교훈을 가진 자들이라는 평을 들었던 자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 중의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는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분리주의 성격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명석한 기억력의 소유자 카피토(Capito)가 말했듯이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은사를 가졌다고 자랑하고 있었기에 이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어 ש (파라쉬)는 해석을 의미합니다.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해석을 그대로 지키는 자들로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전통이라는 구실 아래 모든 성경 말씀을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부패케 하였고 동시에 약간의 건전한 해석들마저도 관습으로 저하시켜 놓고 이것을 최고로 존중해야 할 것으로 주장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이란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리는 자들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만 하나로 뭉쳐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 받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요세푸스(Josephus)는 그의 저서 <Aʼntiquities> 13권에서 모든 파들은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생겨났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말을 오늘날의 교황들이 저지르는 바와 같이 당시의 부패된 종교적 교훈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기 열심이 능숙치 못하고 잘 배우지 못한 많은 교사들이 가진 열심과 같다고 합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했던 것은 실로 무서운 죄악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율법에 대한 열정에 끓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와 모세를 혼합하는 것 같은 자들을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교회를 핍박했던 이유였습니다.

 

 

빌립보서 3

 

5. 본문 6절은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입니다.

 

이 말이 율법의 모든 의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단지 의식적 의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서 율법을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완전한 흠 없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또한 율법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여지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의가 주어졌는데 무엇이 더 완전해지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공통적인 견해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의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은 다만 죽은 글자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율법의 의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말합니다.

 

첫째는 영적인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으로서 교리 중에는 포함되어 있으나 실제 생활 속에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의입니다.

 

둘째는 문자적인 의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위선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그들의 완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이중의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의 판단에 따르자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이었습니다.

 

이 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단 한번밖에 없는 진귀한 찬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하도록 합시다.

 

 

 

 

 

 

 

 

 

 

 

 

 

 

 

 

 

 

 

 

빌립보서 3

 

3:7-11 그러나 무엇이든지

 

 

 

 

 

 

 

본문 초두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안 뒤에는 그 소위 유익들이 해로운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전에 플러스였던 것이 이제 허무(虛無)와 바뀌는 정도만 아니고 플러스 자체가 마이너스로 변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되는 소위 좋다는 것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생활에 붙잡아 두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1. 본문 7절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자기가 얻었던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헛된 자만심으로 교만해 지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선으로 헛된 생각을 하는 것, 교만하여 지는 것, 오만해지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면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면 그 즉시 전에는 헛된 영화로 우리의 눈이 부셔 있었던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나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아직 소경이었을 때, 외모만을 보고 취했던 모든 것들이 그 눈이 밝아졌을 때는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해가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감에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데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또 있겠습니까?

 

이제 바울은 첫째로 자기 자신의 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의에 대해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여기고, 무익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의란 그리스도를 내쫓는 것이기에 이것보다 더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

 

4:1-3 그러므로

 

 

 

 

 

본 장은 바울 사도의 결론적인 권면 형식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도가 온 교회와 각각 개인 신자들에 관한 특수한 부탁의 말씀입니다.

 

 

 

 

 

1. 본문 1절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입니다.

 

1) 본 절 초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입니다.

 

바울은 자기 교훈을 자기가 흔히 사용하는 매우 강한 권면으로 끝맺습니다.

 

이로서 자기 권면이 교인들의 마음 속에 보다 확고하게 뿌리를 박도록 합니다.

 

바울은 말로만 아니라 진실로 신실한 사랑을 가진 교인들에게 사랑의 정을 나타내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 교인들에게 우애(友愛)를 일으킵니다.

 

2) 본 절 중간은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을 자기 기쁨이요 면류관으로 말합니다.

 

자기 수고를 통해 얻은 영혼들이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주께서 친히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여진 일들에 대하여 자기에게 면류관을 주실 때에 앞서 말했던 승리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3) 본 절 끝부분은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입니다.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가 앞서 언급했던 교훈을 지시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바울이 교인들의 형편을 인정해 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해석이 타당한 것은 교인들의 현재 형편을 칭찬해 줌으로서 신자들이 더욱 인내할 것을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교인들은 이미 자기들의 견고함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연약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장래에도 성도들이 확고히 서게 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바울이 두여인 간의 분쟁을 진정시키기 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말에서 그들 사이에 분쟁이 있다고 추측할 근거를 못 찾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준 증거들을 볼 때 두 여인이 뛰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 여인들을 복음의 동역자라 부름으로서 대단히 높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들이 서로 화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교인들에게 서로 조화를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들이 서로 불화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서로 하나 되라고 말할 때는 언제나 그 한계가 주 안에서라고 말한 점입니다.

 

주 밖에서 맺어지는 모든 연합은 필경 불행하게 되어질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를 제외한 연합은 하나같이 다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재결합되어야만 합니다.

 

 

 

 

 

3. 본문 3절은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입니다.

 

1)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에 대해서는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남자를 말하는지 여자를 말하는지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해석은 매우 빈약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여기에 여자들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여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것을 주장합니다.

 

바울이 곧 이어 글레멘트라는 이름을 보충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는 논쟁은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바울의 아내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결단코 반대합니다.

 

이 주장이 정당한 근거를 가진다면 우리도 그 사람들을 결코 멸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용한 문헌은 위조된 유세비우스의 글이나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도사 등에 의해 기록된 글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조금도 신용할 만한 가치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로 인해 영향을 받지 말고 사실 그 자체를 살펴봅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쓸 때 자기가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고전7:8).

 

이 편지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떠나기를 준비하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는 얼마 있지 않아 예루살렘으로 갔고 감옥에 있었고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아내와 결혼생활을 했다는 생각이 그 시대에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사도에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이었던가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그때에 옥에 갇히는 생활과 핍박을 견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누가에게 스스로 밝혀주었습니다(21:13).

 

또 바울이 결혼은 했으나 부부관계는 금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에게 바울이 자기처럼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하는 말씀은 이 말과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면 그 상태란 바로 독신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어째 내가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전9:5)라는 말이 사도가 아내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논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바울이 결혼했다 할지라도 두 번 밖에 가지 않았다는 빌립보, 곧 사도가 두 달 밖에 머물지 않았던 빌립보에 어떻게 아내를 데려다 거주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바울이 자기 아내에 대해 말한다고 하는 주장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또 사도가 어떤 여자에게 말했다고 하는 생각도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성도의 판단에 맡깁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συλλαμβνεσθαι(쉴람바네스다이)라는 말은 사물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와 함께 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본 절 끝에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책은 출 3232절 말씀 대로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책을 인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정한 영원하신 뜻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의 위치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집의 글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교훈이 시편 6928절에도 있습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가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저희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와 나라 안으로 받아들이신 신자 속에 계산하지 마소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비밀 속에 있는 자들을 선포하는 권세를 경솔하게 침범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 합니다.

 

 

 

 

빌립보서 4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를 나타내시는 표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받은 자라는 표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책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밝혀 드러내주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해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합니다.

 

또 양과 염소를 구별해 내는 것도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목자 되신 그리스도께 순종으로 복종하는 자, 그리스도의 우리에 함께 모인 자, 계속 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자를 알아내는 것은 우리 편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특별히 베푸시는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감추인 택한 자들의 인()을 우리에게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지극히 높이는 것도 우리 편에 달려 있습니다.

 

 

 

 

 

 

 

 

 

 

 

 

 

 

 

 

 

 

 

 

 

 

 

 

 

 

 

 

 

 

 

 

 

 

 

 

 

 

 

 

 

 

 

 

빌립보서 4

 

4:4-9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본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과 함께 주어지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1. 본문 4절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그 시대에 잘 어울립니다.

 

당시에 경건한 신자들의 형편은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또 신자들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고통 혹은 조바심 때문에 자기 길을 돌이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적대와 방해를 당해서도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명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셔서 얻는 영적 위로는 모든 사람들로 자기를 절망케 하려는 모든 세상의 유혹이 올 때도 용기를 갖게 해줍니다.

 

우리는 당시 실례를 통해 특별한 곤경에 빠졌던 바울의 입으로 선포된 이 말씀이 분명코 효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당시의 신자들이 핍박이나 갇히는 것이나 추방이나 죽임을 두려워했을지라도, 또 갇힌 자 가운데 있거나 핍박의 극심한 불 가운데 있거나 심지어는 죽임의 위협을 당할지라도 사도는 자기 혼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기뻐할 것을 격려합니다.

 

주께서 자기 편에 서 계시는 신자들은 기뻐할 충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사도가 자신의 권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끊임없이 그리고 끝까지 주안에서 기뻐하라. 단지 일순간에 그치지 말고 주안에서 너희의 기쁨이 계속되고 계속되기를 바라노라입니다.

 

분명히 이 기쁨은 세상에서 얻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믿을 수 없고 나약한 것이며 점점 식어져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기쁨을 정죄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6:25).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4

 

2. 본문 5절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입니다.

 

1) 본 절 초두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들의 예리함과 존절함을 어떤 자들이 불평하려고 할 때에는 곧 자기들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했다는 해석입니다.

 

너희에게 함부로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의 공평과 겸손을 알게 하라입니다.

 

이 해석은 알게 하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라는 의미로 봅니다.

 

둘째는 바울이 교인들에게 조용하게 모든 것을 견디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두 번째 해석을 택합니다.

 

헬라어 τὸ ἐπιεικές 는 영적인 관용을 가리켜서 손해를 당해도 쉬 동요되지 않고 역경을 당해도 쉬 넘어지지 않고 계속 평정(平靜)을 유지할 때 사용됩니다.

 

키케로(Cicero)내 마음은 평온하며 모든 것을 좋은 면에서 취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인내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평온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요구합니다.

 

실로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말이 여기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오만한 행동을 금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가 교인들에게 모든 일에 평온하게 행하도록 지시함으로서 손해나 불편함도 스스로 억제하라고 말씀합니다.

 

2) 본 절 끝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어떤 반대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선수를 치는 말씀입니다.

 

육체적 감각은 앞서 말한 것과 반대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분노가 우리의 온화함 때문에 더욱 불이 붙을수록 우리는 더욱 인내할 준비를 갖추게 되고 더욱 어떠한 손해에도 용기를 가지게 됨으로서 모든 어려움 중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인내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잠언에 우리는 이리 가운데서 부르짖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양과 같이 행하는 자들은 이리에게 곧 잡혀 먹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악한 자들의 흉악을 그에 상응하는 힘으로 억눌러서 그들이 우리를 태연스럽게 모독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가까우시느니라는 말씀 속에서 주님의 능력이 그들의 뻔뻔스러움을 정복할 것이며 주의 선하심이 그들의 원한을 이길 것이라는 뜻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순종하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

 

그런데 어느 누구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음받은 세상의 모든 것들로 보호받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씀으로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많은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無知)가 모든 불인내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무지 때문에 쉽게 혼란에 빠져 배반하게 되며 주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주 실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한가지는 단지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깨닫게 되어서 맹목적으로 운명의 지배를 받거나 악한 자들의 공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사실을 믿는 자들은 어떤 일에도 안심하게 됩니다.

 

이제 사도가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심판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시편 14518절과 같이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도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주께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다고 할지라도 경건한 자들을 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자기 보호와 인도 아래 두시고 어느 곳에서나 자기 손으로 지켜주시기에 바울은 교인들에게 악한 자의 분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solicitudo(염려)라는 말은 매우 일반적인 말이고 잘 알려진 말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도우심을 불신함으로 생긴 걱정을 가리킵니다.

 

 

 

 

 

3. 본문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입니다.

 

1) “오직 모든 일에라는 말씀에서 바울은 중성 단수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ν παντί(엔 판티)in omni negotio(모든 문제에)와 동격입니다.

 

προσευχή(프로쉬케 ; 기도), καδέησις(카이 데-시스 ; 간구)는 여성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윗이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말했듯이(55:22) 베드로가 그랬듯이(벧전5:7) 그들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고 권합니다.

 

우리는 시험에 흔들리지 않도록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에게는 위로와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맡긴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 모두 맡기는 신앙의 확증은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확신은 오직 우리가 주의 선하신 뜻을 따라 기도할 때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 당할 때는 언제나 기도함으로 은밀한 피난처를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구할 것이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비록 신자들의 마음은 그들이 자신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헛된 위로를 찾아 방황하는 자들이 혹 어느 정도의 위로는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직 유일하게 안전히 거할 안식처는 주님께 의지하는 길뿐입니다.

 

2) 본 절에 감사함으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불평하거나 중언부언함으로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떤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에 하나님이 즉각 순응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고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기도로 감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꼭 필요한 것들을 주께 구할 때는 우리의 마음을 주의 뜻에 복종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사도는 우리가 간구하는 동안에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말씀했습니다

 

분명히 감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최고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4. 본문 7절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기구법(祈求法)에 해당하는 미래 시제로 바꾸어 해석해서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을 확신함으로 생기는 열매요 기도의 결실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입니다.

 

성경 말씀은 보통 사람의 영혼을 그 기능에 따라 마음과 생각으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이해력을 의미하고 생각은 모든 경향성과 의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영혼 속에 모두가 포함되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악한 자들의 생각과 그들이 구하는 것에 빠져 하나님께 등을 돌려대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옥중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빌립보 전체 강해  (0) 2018.09.28
[스크랩] 골로새서 한눈에 보기  (0) 2018.08.30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15)  (0) 2015.07.22
[스크랩] 에베소서 개론정리  (0) 2015.05.15
[스크랩] 에베소서  (0) 2014.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