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15)

하나님아들 2015. 7. 22. 16:02

 

갈라디아서 강해(15)

 

M.R 디한


 

왜 율법을 주셨는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사도 바울이 앞 구절의 말씀을 언급한 후에 이 구절에서 질문을 제기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서신을 써보내면서, 율법의 목적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것을 예측하고서, 미리 그 질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1~3장에서 모세의 율법은 사람을 더 좋게 만들거나, 또는 구원하지 못하며, 더군다나 의롭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함으로써,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야말로
"구원이 율법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증거가 됨을 이미 보여주었다. 즉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모두 다 부인하는 것이 된다. 율법은 사람을 거룩케 하거나 더 낫게 개선시키지 못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소망이 없는 존재임을 나타내 보여주는데 있었다.

그러면 율법은 왜 주어졌는가?
그래서 바울은 죄인이나 성도가 율법으로써는 의롭게 되거나, 거룩케 되거나, 죄값을 지불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한 후에,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냐?' 만약 사람이 율법을 통해 구원받거나 개선되거나 보존될 수 없다면, 과연 율법이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상의 간단한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내용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1. 율법은 시작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더한 것이라' 즉 율법이 오기 전에 존재했던 무언가에다 더해졌다는 의미이다.

2. 율법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범법함을 인하여'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죄를 범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참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3. 율법은 또한 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율법이 시작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다. '더한 것이라…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즉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 끝이 나버렸다.

성경 그 어디에도 율법의 목적이 이 구절만큼 뚜렷하게 언급된 곳은 없다. 그런데 이 구절이 구약성경의 의식법이나, 음식에 관한 법이나, 위생에 관한 법이나, 제사에 관한 법에만 적용된다고 결코 말하지 말라. 바울은 여기서 율법(THE LAW) - 즉 율법 전체, 특히 십계명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죄인을 저주한 율법, 곧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구분하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보다는 율법에 의해 정죄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조작해 낸 인간적인 고안에 불과하다.

율법의 시작

이제 갈라디아서 3:19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좀더 자세히 주목해 보자. 즉 율법에 관하여 언급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것들에 주목해 보라.

1. 율법의 시작
2. 율법의 목적
3. 율법의 마침

첫째는, 율법의 시작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이 율법이 더해졌을 때, 율법은 무엇에 더해진 것인가? 먼저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선포했던 세례 요한의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는 요한복음 1:1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ꡒ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ꡓ

이 구절보다 그 의미가 더 분명한 구절도 없으리라. 율법(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율법 전체)은 모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3:19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여기서 그 중보자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율법을 전달해준 모세이다. 우리는 출애굽기 20장의 기록을 통해, 영감을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기신 이 십계명을 주시기까지, 이스라엘인들은 지금과 같은 이러한 율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담에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이천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십계명을 주신 적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5:13에 의해 아주 분명해진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이 구절의 하반부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상반부인 ꡐ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ꡑ는 말씀에 주목하기 바란다. 율법이 주어진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기록된 형태의 계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바울이 언급한 대로 율법이 더해지기 전에, 이미 어떤 것이 존재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가 어떤 것을 '더한다'고 할 때는, 그 이전에 무엇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율법이 더해지기 전에, 무엇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기 전에, 사람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살았을까? 우리는 모두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담은 은혜 아래 있었으며, 노아도 은혜 아래 있었고, 아브라함도 은혜 아래 있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인간을 은혜로 다스리셨고, 율법시대에도 은혜로써 다루셨으며, 율법시대 이후에도 그리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을 은혜로써 다루고 계신다. 갈라디아서 3:8에서 우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이 이미 아브라함에게도 전파되었음을 보게 된다. 이제 복음은 죄인에게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된다. 그러나 율법은 죄인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범죄자와 죄인에게 아주 아주 나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러한 죄인에게 그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주기(말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인은 이 율법에 의해서 정죄받고 저주를 받게 되며, 따라서 자기의 죄에 대하여 율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의 나쁜 소식이 은혜의 좋은 소식에 더해졌던 것이다. 바울이 명확히 말하고 있는 바대로, ꡒ더한 것이라ꡓ고 한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율법은 은혜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아니었고, 은혜와 혼합된 것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완하는 것도 아니었다. 율법은 다만 '더해진' 것이었다. 여기서 '더해진'이란 단어는 헬라어 원형으로 '프로스티데미(prostithemi)'인데, '옆에 나란히 놓여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은혜 곁에 나란히 놓여(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를 분명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율법이 주어졌을 때, 은혜는 제거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는,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이 전적으로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고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도망하여,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자신을 의탁하려는 모든 자를 위하여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인들도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아브라함이나, 율법시대 이후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구원받았던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임

그러므로 율법이 은혜의 복음에 더해진 것은 죄의 심각성과 그 특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아무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고, 또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21,22에서 예상적으로 제기한 또 다른 질문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복음)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굳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으신 구주를 무엇 때문에 필요로 하겠는가? 또한, 만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그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매일 드리시는 대제사장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사람은 결코 율법이나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것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율법은 죄인을 죽이는 역할을 함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율법이나 자신의 행위에서 돌이켜, 오직 자기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모세의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율법을 범하는 것만이 죄라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세상에 죄가 없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 이것은 그 때에도 죽음이 존재했던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율법을 범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 이상이다. 확실히 하기 위해 바울은 로마서 4:1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바울을 통해서 선포된 이러한 영감된 말씀에 주의하기 바란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즉 율법이 이르기 전에는, 율법을 범함도 있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당신은 곧장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가 없었는가?" 오, 친구여, 그 때에도 틀림없이 죄가 있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마치 율법이 주어진 이후와 똑같이 악하고, 무서우며, 심각했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율법을 범함이 없었다. 이처럼 율법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 죄의 심각성과 두려움을 깨닫지 못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범한 죄의 심각성을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자,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던 죄가 이제는 '법적으로' 잘못된 범죄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 (범죄의 구성 요건인)위반성이 가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ꡐ범함ꡑ(율법을 어긴 것, 범법)이란 '죄'의 한 국면일 뿐이다. '범함(transgression)'이란 단어는 원래 '너머로(trans)'와 '나아가다(gresso)'의 합성어로서 '지나쳐 나아가다(to go beyond)'란 뜻이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들에게 죄가 정도에 관계없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서 3:20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죄를 만들어 내지 않고, 죄를 더욱 나쁘게 만들지도 않으며, 더구나 율법 자체가 죄는 아니었다. 다만, 율법은 범죄 행위들 때문에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해서' - 다시 말해서, 그들이 범한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5:2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은 죄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죄는 언제나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이었는데, 율법은 이제 그것을 '법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만들었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Whosoever committeth sin transgresseth also the law; for sin is the transgression of the law)'(요일 3:4)

성경에서 이 구절 만큼 잘못 이해되고, 오용되어 온 구절도 없을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마치 '죄는 언제나 율법을 범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율법을 범한 경우만이 죄를 지은 것이다.'라는 뜻인 양 언제나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용인할 수 없게 만드는 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또한(ALSO)이란 단어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또한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단지 법적인 정의이다. 즉 범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미 죄가 있었으나, 그것은 율법을 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는 잘못되었지만, 아직은 법적으로 옳을 수 있다.

노예제도

미국에서는 100년 전만 해도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었다. 그 때에는 아무나 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또한 노예를 사고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 어떤 법을 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노예금지법이 제정됨으로 말미암아 노예를 소유하거나 사고 파는 것은 불법적인 일이 되었고,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사실 노예제도는 노예금지법이 제정되기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똑같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금지하는 법이 없을 때에는, 그 법을 범하는 일도 없었다.

또한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술을 제조하거나 팔거나 마시는 것이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음주 및 주조 금지법이 제정됨으로써 술을 만들거나 사고 파는 것은 범법행위(법을 어기는 것)가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18번이나 그에 대한 수정이 가해져서, 지금은 그것이 합법적인 행위가 되어버렸다. 금주법은 이제 폐지되어 버렸다. 따라서 음주행위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금주법이 발효 중 일 때에는 그것이 범법행위였다. 따라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의 한 단면일 뿐이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으로써 사람을 구원하거나 더 낫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금주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술을 못 마시도록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술을 마시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음주 행위는 주류를 밀매하는 시대에는 널리 성행하였으며, 또한 그 시대에 폭력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은 왜 주어졌는가?"라고 우리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음과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을 때, 율법 행위에서 영원히 돌이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함으로써, 명백히 금지한 법을 의도적으로 범한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따라서 율법은 당신이 정죄 아래 있음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러므로 죄인이여, 이제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헛된 소망을 다 버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출처 : 복음과 삶 (Gospel and Life)
글쓴이 : Rejoice-You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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