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스크랩] 에베소서(서론,종말론) 강의안

하나님아들 2014. 6. 27. 16:02








에베소서(서론,종말론) 강의안

   최갑종 교수(백석대학교)


1. 에베소서 서론


전통적으로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중에(주후 54-57년) 설립해 약 3년 동안 목회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로 알려져 왔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리우며, 주후 61-62년 사이에 로마에서 쓴 편지로 알려지고 있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바울 신학의 중심 사상이 잘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신학의 요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찍이 요한 칼빈이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the Crown of St. Paul’s Writings)이라고 규정할 만큼, 에베소서는 지난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바울 서신 중 하나다.



1) 저자

에베소서를 누가 썼는가? 사도 바울이 썼는가, 아니면 바울의 사상을 잘 아는 제자 중 하나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는가? 다시 말해, 에베소서는 과연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편지인가, 아니면 이차적인 바울의 편지인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적으로 에베소서는 바울이 쓴 편지로 알려져 왔다. 에베소서 1:1과 3:1에서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쓴 당사자임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자체가 바울에 대한 여러 가지 개인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1:15,16: 4:1; 6:19-20).

실제적으로 성경에 대한 과격한 비평 방법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은 의심되지 않았다. 주후 95년경에 쓰여진 로마의 클레멘트의 편지에도 에베소서가 바울의 편지로 언급되고 있고, Ignatius, Polycarp, Irenaeus 등 여러 초기 교부들도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주후 180년경에 나타난 Muratorian Canon에서도 에베소서가 바울 서신 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는 등 지나간 교회 역사를 통해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적 시도가 대두하기 시작한 19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비평학자 F.C. Baur와 그의 제자들이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 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결여

비평학자들은, 에베소서가 실제로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면, 그리고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처럼 바울이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에베소에서 많은 선교 시간을 보냈다면, 에베소서에는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의 경우처럼 에베소 교인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언급들이 있어야 하는데, 에베소서에는 이러한 언급들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실제적으로 에베소서는 바울의 어떤 서신보다도 편지의 수신자들과의 밀접한 개인적 관계를 말하는 내용들이 적다. 심지어 적지 않은 고대 사본에는 편지의 수신인을 가리키는 1:1에 ‘에베소에’(ejn jEfesw)라는 문구가 생략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보내야 하는 바울 자신이나 수신자들의 긴박한 역사적 정황에 대한 언급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2) 이질적인 언어와 문체들

비평학자들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많은 단어와 문체들이 바울의 진정한 서신들로 알려진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 등에 나오는 단어와 문체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이질적인 것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단어 중 84개의 단어가 바울의 서신 중에서 독특하고, 에베소서에 나오는 헬라어 문장도 바울의 다른 서신과 비교해 볼 때 대체적으로 길다.



(3)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문학적 유사성

적지 않은 학자들은 에베소서가 그 내용과 문학적 스타일 면에서 골로새서와 너무나 유사한 점들이 많다는 점에 근거해 익명의 저자가 골로새서를 근거로 해 에베소서를 썼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골로새서에 나오는 1,570개의 단어 중 34%가 에베소서에 나타나고,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2,411개의 단어 중 26.5%가 골로새서에 나타난다.



(4) 신학 사상의 시대적 상황성

또 어떤 학자들은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신학 사상이 바울 당대보다 오히려 후대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의 성취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여전히 서로 긴장관계에 있던 바울 당대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학자들이 제기하는 위의 4가지 근거들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할 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

첫째, 에베소서에 바울의 개인적인 언급이 적다는 이유로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하는 것은 편지를 쓴 바울 자신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에베소서가 단순히 에베소 교인들뿐 아니라 일종의 회람 편지로서 주위의 여러 가정 교회에도 읽혀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능한 한 사적인 언급들을 제한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에베소서의 언어와 문체를 문제 삼아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하는 것은 바울 자신의 언어 능력과 그의 비서 활용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편지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언어 구사를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일 바울이 옥중에서 에베소서를 쓸 때 로마서의 경우처럼 비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비서의 언어 구사 때문에 에베소서의 언어와 문체가 바울의 다른 서신에 비해 독특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셋째, 에베소서가 골로새서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해서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바울이 에베소서를 먼저 쓰고 골로새서를 썼는지, 아니면 골로새서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에베소서를 썼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의 상황이 서로 유사했다면, 바울은 어느 한 편지를 다른 편지를 쓰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가 많은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 자체가 양 서신의 바울 저작권을 옹호할 수도 있다.

넷째, 에베소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학 사상-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서로 화해되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강조하는-이 바울 후대의 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울 이후에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과의 관계가 더욱 심한 긴장 관계로 바뀌었다. 주후 60년대 이후부터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했고, 주후 70년 이후에는 바리새파 유대교의 재무장과 함께 기독교와 유대교는 서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권 사상과 화해 사상은 이미 고린도전서 15장, 고린도후서 5장, 그리고 빌립보서 2장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만일 에베소서가 바울의 말년에 로마 옥중에서 쓰여졌다면 바울이 자신의 원숙한 신학 사상을 충분하게 요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2) 에베소서의 중심 메시지

에베소서 전체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들(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우주적인 구원(하나님의 비밀)의 문제다. 즉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구원의 현장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1-3장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이루신 구원’(the once fulfilled salvation)/화해/교회를 강조하는 반면에, 4-6장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해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the on-going salvation)/화해/교회를 강조하고 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며, 후자는 성령 안에서 주어지고 있는 혹은 앞으로 주어져야 할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는 ‘이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직설법), 후자는 ‘아직’의 성격을 통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명령법).



(1) 하나님의 비밀

에베소서 1장은 에베소서 전체의 중심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서곡이다. 특별히 ‘축복송’이라고 불리는 1:3-14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놀랍고 축복스러운 구원 역사의 절정인 하나님의 비밀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축복하셨다(3b), 우리를 선택하셨다(4), 우리를 예정하셨다(5a),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베푸셨다(6-9), 우리를 부르셨고(11a), 성령 안에서 우리를 인치셨다(13).

1:15-23은 하나님께서 부활하셔서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를 다스릴 수 있는 주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통치할 수 있는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에베소서 2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 가운데서 한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해 율법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가 되게 하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울타리로, 즉 이스라엘을 불결한 이방 사람들로부터 분리하고 보호하기 위한 담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 당대에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분리시키는 울타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전체를 갈라 놓는 이중적인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물론 하나님과 인간 전체의 장벽을 무너뜨리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화해의 죽음’으로 간주한다. 이 그리스도의 화해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어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 평화다. 이것은 바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다. 또한 이것은 에베소서 2장의 중심적 사상이다(참조 갈 3:28; 고전 12:12-13).



(3) 바울의 소명

에베소서 3장은 이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바울 자신이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음을 강조한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위치 문제가 설명된다. 즉 바울은 3장 전반부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전파하도록 특별히 부름을 받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3장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선상에 서 있는 바울 자신의 중보자적 기도가 마치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시되는 예수님의 중보자적 기도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4) 교회의 하나됨과 새 사람

4장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과 그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에베소서 3장은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론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양한 지체가 있으나(다양성),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통일성)(1:22-23; 4:1 이하; 5:30) (고전 12장, 롬 12장 참조).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한 자이기 때문에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5) 새로운 삶

에베소서 후반부에 해당하는 5-6장은 교회의 구체적인 실제, 곧 무엇이 새사람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새 사람의 삶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훈계하기도 한다. 새 사람의 삶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곧 사랑의 삶을 사는 자다. 새 사람의 삶은 거룩한 삶이고, 성령 충만한 삶이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삶이고, 부모와 자녀, 자녀와 부모, 주인과 종, 종과 주인 상호간에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다. 또한 새 사람의 삶은 영적인 전투의 삶이다. 이처럼 5-6장은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 이루어 가는 교회인 전투적인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





2. 에베소서의 종말론

1) 머리말

에베소서의 종말론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질문은 에베소서의 종말론이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냐, 아니면 ‘미래 종말론’(future eschatology)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신약학자들 중 에베소서가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베소서의 종말론과 관련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사로 잡았던 ‘임박한 종말론’(the imminent eschatology)이 에베소서에서는 완전히 실현된 종말론으로 대체가 되어 버린 것인지, 혹은 임박한 종말론이 여전히 에베소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혹은 저자가 에베소서에서 미래적 종말론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특별히 미래 종말론보다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약학자들은 아직도 이 질문들과 관련해 여러 가지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를 바울의 저작이 아닌 익명의 바울 제자의 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E. K?semann은, 에베소서에서는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임박한 종말론-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감에 근거를 둔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이 소위 ‘초기 보편주의’(Fr?hkatholi-

zimus)로 완전히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K?semann은 바울의 진정한 서신들과 에베소서 사이에는 분명히 불연속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그것을 자신이 에베소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볼 수 없는 강력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Horacio Lona는 최근에 출판한 그의 저서 Die Eschatologie im Kolosser und Epheserbrief(골로새와 에베소서에 나나난 종말론)에서, 에베소서에 비록 실현된 종말론에 관한 강조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와 함께 여전히 미래적 종말론에 관한 강조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비록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에 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바울 서신들과 에베소서 사이에 있는 강한 연속선을 본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의 종말론은 본질적으로 바울적인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의 종말론 문제와 관련해 신약학계 내에 상반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에베소서의 종말론을 새롭게 조사해 볼 필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전반부에서는 에베소서의 종말론의 주된 강조점을 찾아 볼 것이고, 후반부에서는 에베소서가 쓰여진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 왜 저자가 에베소서에서 특별히 그와 같은 종말론을 강조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볼 것이다. 전자가 에베소서의 내용에 관한 연구라면, 후자는 저자의 의도에 관한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 글이 철저히 주경학적인 논문이기를 바라고,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필자가 에베소서 본문 그 자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에베소서의 저작권과 관련해 이 글은, 저자가 익명의 바울의 제자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해 사도 바울을 에베소서의 실질적 저자로 간주할 것이다.



2) 에베소서 종말론의 주요 시각

(1) 에베소서 종말론의 서곡(1:3-14)

에베소서 저자는 1:1-2에서 간략한 인사말을 전한 후 1:3-14의 긴 시적인 구절을 통해 에베소서의 서론을 제시한다. 우리가 이 서론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저자가 이 서론에서 그의 서신 전체를 통해 제시하려고 하는 주요 내용들을 미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축복의 기원’(Eulogy, or Berakhah)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서론 본문은 하나의 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성령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미 성취하신 구원 사역에 초점을 두고 있다. 문장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많은 관계 대명사절, 분사 및 부정사 구문절은 모두 문장 전체의 주어인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전체 문장을 총괄해서 하나님은 항상 모든 동사의 주어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어의 행동을 입는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외는 오직 7절 상반절에 있는 관계대명사 구절의 주어 ‘우리’와 13절 분사 구절의 주어 ‘우리’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거의 일관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동하시는 중보자로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구원의 축복을 그리스도인(우리)에게 전달하고 보증하시는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구문법적으로 설명하면 한 주절 아래에 ‘하나님+과거 동사+우리+그리스도(혹은 성령)’의 형식이 아래와 같이 최소한 10번 이상 나타난다 우리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문적(構文的) 특색을 살리기 위해 서론 본문의 핵심을 영어번역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3a)

who blessed (eujloghsa") us in Christ (3b)

chose (ejxelevxato) us in Christ (4)

destined (proorivsa") us through Jesus Christ (5a)

bestowed (ejjxarivtwsen) on us in the Beloved (6)

lavished (ejjperivsseusen) on us (8)

made known (gnorivsa") to us in Christ (9a)

set forth (proevqeto) in Christ (9b)

gathered up (ajnakefalaiwvsasqai) all things in him(10b)

called (ejjklhrwvqhmen) us in him (11a)

sealed (esfragivsqhte) us with the Holy Spirit (13b)



에베소서 저자는 왜 편지가 시작되는 서론에서 이와 같은 긴 문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해 이루신 다양한 사역들을 서술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서론은 편지 전체를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과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으며, 구조면에서 편지 전체와 어떤 연결을 갖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가?

필자는 이미 이 서론이 에베소서 전체의 전주곡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바 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저자는 이 특이한 서론에서 편지 전체를 통해 강조하려고 하는 여러 중요한 사상들을 미리 독자들에게 선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서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인 ‘그리스도 안에서’(ejjjn cristw'), ‘은혜’(cavvvvvri), ‘비밀’(musthvrion), ‘충만함’(plhrwvma), ‘경륜’(oijkonomion), ‘하늘에서’(ejn toi'" epiouranioi'"), ‘만유’(pavnta), ‘성령’(pneu'ma) 등은 사실상 에베소서 전체를 통해 계속 반복 발전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에베소서 주석가들 중 한 사람인 M. Barth는 “에베소서 1:3-14은 전 서신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핵심 단어와 주제들이 전체 서신의 내용들을 미리 보여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이 특이한 서론이 우리의 관심사인 에베소서의 종말론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서론을 에베소서 전체 서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실현된 종말론’의 서곡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에베소서 저자는, 위에서 제시한 도식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전 구원 역사를 표현할 때 한결같이 단순 과거 시제를 사용해 이미 성취된 성격을 강조한다. 이 서론 본문에는 여하한 미래 시제나, 임박한 세계 종말에 관한 기대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가 여기서 이러한 특이한 과거 시상들을 통해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으며, 그의 백성들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원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갈라디아서 3:8,9,13을 볼 때 에베소서 저자가 3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그 종말론적인 축복(창 12:13; 18:18)이 사실상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셋째, 에베소서 저자는 9절 상반절에서 ‘비밀’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졌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비밀’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지금 우리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목적을 가리킨다(3:3,9; 참조 골 1:26,27; 2:2; 4:3; 롬 16:28; 고전 2:1).

넷째, 10절 상반절에서 소개되는 시간의 ‘성숙’은, 이미 갈라디아서 4:4과 마가복음 1:15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역사 안에 위대한 종말론적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타나는 부정사 구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시키기 위함”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의 통일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키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참조 골 1:16,20).

마지막으로, 13절에 나오는 “너희는 약속된 그 성령으로 인쳐졌다”는 말은 에베소 교인들이 종말론적인 성령의 사역에 이미 참여했다는 것을 강조해 준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약속된 성령은 마지막 때에 오셔서(참조 요엘 2:28-32; 행 2:17; 갈 3:14) 구속의 날까지 성도들의 기업을 보증해 줄 그 종말론적인 성령(1:14 참조)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상의 다섯 가지 사실들은, 우리가 이 서론 본문에 관한 상세한 주석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론 본문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에베소서 저자는 이 서론 본문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독자들에게 일종의 전주곡처럼 들려주고, 그 후에 이 주제들을 전체 서신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필자가 에베소서 1:3-14을 ‘실현된 에베소서 종말론의 전주곡’(the prelude of the realized eschatology of Ephesians)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에베소서의 종말론의 하이라이트(2:4-10)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의 종말론의 특징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본문은 바로 ‘에베소서의 실현된 종말론의 대요’(the best summary of a realized eschatology in Ephesians)라고 불리우는 에베소서 2:4-10의 내용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바울의 ‘임박한 종말론’이 ‘실현된 종말론’으로 전환된 결정적인 증거로 내세우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바울 신학의 핵심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편이 옳은지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고 우선 본문 자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2:4-10의 본문 중 가장 중요한 구절은 4-6절인데, 이것을 영어 번역을 통해 구조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But God, who is rich in mercy (4a),

out of the great love with which he loved (hjgavphsen) us (4b)

even when we were dead through our trespasses (5a),

made us alive together (sunezwpoivhsen) with Christ (5b)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este seswsmevnoi) (5c)

and raised us up with (sunhvgeiren) Chirst (6a)

and seated us with (sunekavqisen) Christ (6b)



우리가 에베소서 서론(1:3-14)에서 살펴본 바와 똑같이,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은 늘 행동하시는 주체로 제시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나는 중보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우리, 너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의 수여자로 제시된다. 서론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사용된 과거 및 완료 시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서론 본문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점 하나가 이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되는데, 그것은 바로 저자가 ‘순’(sun)이라는 접두사로 시작되는 여러 동사들을 사용해-예를 들어, 5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하셨다”(sunezwpoivhsen), 6절 상반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부활하게 하셨다”(sunhvgeiren), 그리고 6절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하늘에 앉게 하셨다”(sunekaqi-

sen) 등-그리스도와 우리 그리스도인과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미 Lincoln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여기서 사실상 바울 서신에서 가장 발달된 형태의 ‘실현된 종말론’을 만나게 된다. 이 구절들 안에는 실현된 종말론의 극치를 보여 주는 3중적인 복합 단어 sunhvgeiren, sunekavqisen, sunezwpoivhsen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립보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등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더욱이 5절 상반절과 8절 상반절에 나타나는 이른바 구원의 완료된 상태를 강조하는 “너희는 구원받은 자”(este seswsmevnoi)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나타나는 동사 “구원하다”(swzein)라는 말은 주로 미래 시제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골로새서 저자도 sunezwpoivhsen과 sunhvgeiren 같은 말은 사용하지만(골 2:6,12,13; 3:1),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인 sunekavqisen, seswsmevnoi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저자가 이와 같은 독특한 말을 사용하는 의도는 어디 있는가? 우리가 5절과 8절에 두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나는 완료형 “너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다”(este seswsmevnoi)는 말이 다같이 과거형으로 나타나는 3중적인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다”라는 말의 요약으로 볼 때, 에베소서 저자는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완료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저자가 “너희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 때, 저자의 독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료된 구원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다시 제기되는 질문은 “너희가 성취된 구원에 이미 참여했다”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 말은 종말이 이미 왔고, 구원의 모든 종말론적인 양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완벽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이 말은 사실상 바울의 전기 서신들과 로마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구원의 미래적인 양상을 모두 거부하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린다면, 즉 이 구절들에 근거해 에베소서가 오직 실현된 종말론과 실현된 구원론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에베소서 4-6장에 나타나는 저자의 권면적인 교훈을 이해할 길이 없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고, 구원의 모든 축복이 주어졌고,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것도, 요구될 것도 없다면, 저자는 왜 4-6장에서 많은 명령법을 사용해 독자들의 결단을 요청하는가?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면, 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생활의 긴장감과 갈등을 가져야 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 필자는, 우리가 에베소서에 나타난 구원 이해에 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 구원 문제를 두 가지 전망, 이른바, ‘구속사적-종말론적 전망’(the redemptive historical-eschatological perspective)과 ‘실존적-종말론적 전망’(the existential-eschatological perspective)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전자는 그리스도 사건,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루신 단 한번의 ‘성취된 구원’(the once fulfilled salvation)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루어 가시는 구원’(the on-going salvation)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전자는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으로 불리울 수 있는 반면에, 후자는 교회를 통한 성령의 사역에 초점에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성령론적’ 혹은 ‘교회론적 종말론’으로 불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이미 실현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반면에 후자는 완성의 날까지 계속 실현되어 가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에 의해, 후자는 전자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구조면에서 볼 때 전자는 1-3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후자는 4-6장을 주도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전자를 후자로부터, 혹은 그 반대로 후자를 전자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전자는, 에베소서 2:9-10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처럼, 후자를 통해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본문은 후자보다 오히려 전자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문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소위 3중적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복합 단어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통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자와의 연합을 강조해 주는 전문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종말론적 사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신약학계에서 빌립보서 2:6-11, 골로새서 1:15-20, 딤전 3:10, 베드로전서 3:18, 히브리서 1:3 등과 함께 소위 ‘기독론적 찬송시’라고 불리어지는 에베소서 1:20-22의 구절을 통해 종말론적인 그리스도 사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God carried-but(ejnevrgeian)the power in Christ (20a)

raised(ejgeivra")him from death (20b)

seated(kaqivsa")him at his right hand in the heavenly places (20c)

??????

put(u;pevtaxen) all things under his feet (22a)

and made(e[dwken) him the head over all things for the church (22b).



여기에 사용된 모든 동사들, ejnevrgeian, ejgeivra", kaqivsa", u;pevta-

xen, e[{dwken의 시제는 한결같이 한번 일어난 사건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순과거로 되어 있는데, 에베소서 저자는 이러한 시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단 한번 일어난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의 의미,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 그의 영화로우심, 온 세상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이 사건이 본래 구약과 예수님 당대 유대 사상에서 세상 끝에 가서 이루어질 사건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앞당겨져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베소서 저자는 본문에서(2:4-10)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신 이 종말론적인 사건과 연합시키셨다고 말한다. 즉 1:20-22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그리스도 개인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일어난 사건으로,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도 이미 살았고, 부활했고, 하늘의 영역에 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이 연합의 성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미 알려져 있는 대로, 이 말은 단순히 에베소서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말이 아니고 전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중요한 신학적 용어다. 혹자는 이 말을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헬라의 신비종교의 제의 의식과 관련시켜 세례적 의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견해로는 에베소서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의 연합은 어디까지나 구속사적-종말론적 전망에서의 연합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은 에베소서 2:15과 4:22-24에서 제시되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가 바울이 로마서 5:12 이하와 고린도전서 15:22에서 제시하는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대조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즉 옛 사람과 새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는 각각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있어서 옛 시대(현 세상)와 새 시대(오는 세상)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서로 반위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에베소서 저자가 말하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 회심 전과 후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삶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런 대조를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로 해석하기 전에 먼저 구속사적-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회심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사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2:10,15). 따라서 옛 사람(아담)으로부터 새 사람(그리스도)에로의 변화는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 이미 일어났던 구속사적-종말론적 변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전환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결단 훨씬 이전에 구속사적-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해 새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이 서로 연합되어 있는 그 연대성 안에서 이미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이 전환은 일종의 ‘초개인적 의미’(a supra-individual significance)를 지닌다. 즉 우리의 본문 구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의 연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인 존재(새 사람, 혹은 새 피조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구속사적-종말론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가 보기에 에베소서 저자는 1-3장에서, 독자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 이와 같은 전환 혹은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권면적인 교훈을 다루는 4-6장에 가서는 교회론의 강조와 함께 실존론적-종말론적 전망에로 돌아간다. 4-6장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더 이상 옛 사람의 삶(예수 믿기 이전의 이방인의 삶)의 길을 따라 살지 말고, 새 사람의 삶, 즉 종말론적인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삶, 즉 새 사람에 합당한 새 삶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종말론적인 성령을 통해 계속해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어디까지나 미래에, 즉 다가오는 구속의 날(4:30)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에서 ‘미래적 종말론’이 ‘실현된 종말론’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종말론의 도식: ‘전에’와 ‘이제’와 ‘하늘에서’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에베소서 저자는 그 자신의 종말론을 표현하기 위해 두 종류의 종말론적 도식을 사용한다. 첫째는 ‘전에’(pote)와 ‘이제’(nu'n)라는 도식이며(2:2,3,11,12,13; 3:5,10; 5:7), 둘째는 ‘하늘에서’(ejntoi'" ejpi-

ouranivoi")라는 도식이다(1:3,20; 2:6; 3:10; 6:12). 이것은 바울이 그의 진정한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전형적인 유대적 종말론적 구조를 가리키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에베소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니라는 주장을 위한 결정적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도식은 에베소서에만이 아니라 골로새서를 비롯한 여러 진정한 바울 서신들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에베소서에서 이러한 도식을 너무 자주 사용하는 점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서신 전체에서 저자는 ‘전에’라는 말을 4번 사용하고(2:2,3,11; 5:8), ‘이제’라는 말을 4번 사용한다(2:2; 3:5,10; 5:8). 이 두 말이 서로 나란히 가장 아름답게 결합되어 있는 구절은 5:8이다: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h\\te gavr pote skovto", nu'n de; fw'" ejn kurivw). 한편 ‘하늘에서’라는 말은 모두 다섯번 나타난다(1:3,20; 2:6; 3:10; 6:12).

에베소서 저자가 이러한 도식을 사용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최근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도식에 근거해 지평적인 시간 개념은 에베소서에서 사실상 사라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H. Conzelmann은 “에베소서에서 공간적인 사상이 바울 사상의 일반적인 특징인 시간 개념을 거의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H. Merklein도 동일하게 “에베소서에서 대조는 더 이상 현재와 미래의 대조가 아니고 오히려 아래와 위의 대조다. 종말은 더 이상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위 구속사적 초점은 에베소서에서 제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에베소서에서 시간 반위개념이 공간 반위개념으로 대체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 볼 때, 에베소서에서 시간 개념을 제거하는 것은 에베소서 자체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위의 도식을 에베소서 전체의 종말론적인 구조는 물론 에베소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시간과 관련된 모든 본문들과 연관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에베소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에베소서에는 시간과 관련된 많은 구절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심지어 비평가들에 의해 진정한 바울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 서신들에게서 발견되는 시간적 종말론의 특성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동일한 숙어들도 있다.

첫째, 에베소서에는 바울의 종말론적 구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위 두 세대와 관련된 전문 용어인 ‘이 세대’(to;n aijw'na tou' kovsmoutouvto)라는 말이 두번 나타나고(2:2; 3:12), ‘오는 세대’(tw' aijw'ni mevllonti)라는 말도 두번 나타난다 (1:21; 2:7). 이뿐만 아니라 두 세대와 함께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러나 이제’(nuni; de)라는 말도 에베소서에 두번 나타난다(2:13; 5:7).

둘째,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과 함께 종말론적인 시간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성숙’(to plhwvma, 갈 4:4)이라는 말이 에베소서에서 중요한 신학적 용어가 되고 있다. A. Van Roon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에베소서에서 8번이나 사용되고 있는 명사형 ‘성숙’(plhwvma)(1:10,23; 3:19; 4:13) 혹은 동사형 ‘성숙하다’(plhrw) (1:23; 3:19; 4:10; 5:18)라는 단어로부터 시간적인 개념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에서는 진정한 바울 서신에서 강한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인 ‘비밀’(musthvrion, 롬 11:25; 16:28; 고전 2:1,7; 4:1; 13:2; 14:2; 15:51)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시간적인 의미를 지닌 문맥 중에서 사용되고 있다 (1:9; 3:3,4,9; 6:19).

그러므로 이상의 예만 살펴보더라도 우리는 에베소서의 종말론으로부터 현재나 미래의 시간적 개념을 제거할 수 있는 해석학적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아 있는 문제는 에베소서의 종말론 도식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공간적 개념이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에베소서 저자는 에베소서에서 이례적으로 ‘하늘에서’(ejn toi'" epiouranoi")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해(1:3,20; 2:6; 3:10; 6:12), 공간적인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이례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K?semann이나 Conzelmann 같은 학자들은 저자가 사용하는 ‘하늘에서’라는 술어로부터 에베소서에 미친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향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늘에서’라는 말이 에베소서에 영지주의적 영향이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라는 말은 다른 신약성경(특별히 마태복음)에서뿐만 아니라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 문헌 가운데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A.T. Lincoln은 그의 학위논문 Pradise Now and Not Yet에서 여러 가지 자료를 활용해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하늘에서’라는 용어가 영지주의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유대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훌륭하게 입증한 바 있다.

만일 우리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하늘에서’라는 말을 장소적 의미를 가진 말로 본다면, 에베소서에서 이 말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는 공간적인 양상은 과연 무엇인가? Lincoln과 Arnold는 에베소서 저자가 특별히 ‘하늘에서’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자기의 독자들에게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 적대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계시는 충만한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에베소서 독자들의 역사적 정황과 관련시켜 볼 때 이들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늘에서’라는 말이 거의 대부분 저자가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할 때 나타난다(참조 1:3,20; 2:6)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늘에서’라는 말이 저자의 종말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근거해 에베소서의 종말론의 도식은 진정한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시간적 개념을 배제하지 않은 채 저자의 실현된 종말론을 나란히 강조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마지막 남은 가장 중요한 문제, 곧 에베소서 저자가 왜 독자들에게 실현된 종말론을 특별히 강조하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실현된 종말론이 독자들의 역사적 정황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미래적 종말론의 양상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부록 - 에베소서에 나타난 미래적 종말론



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서에 나타난 저자의 ‘실현된 종말론’에 관한 강조를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에베소서로부터 미래적 종말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미래적 종말론이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에베소서에는 ‘실현된 종말론’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진정한 바울 서신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파루시아’에 관한 언급이나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에베소서가 진정한 바울 서신들에 나타나는 미래적 종말론에 관한 특징적인 술어들, 예를 들어, ‘주의 날’, ‘파루시아’, ‘미래적 부활’에 관한 언급 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는 에베소서에 간접적으로 그와 같은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보여 주는 여러 말들이-예를 들어, ‘구속의 날’(4:30; Cf. 1:30), ‘소망’(1:18; 2:12; 4:4), ‘유업’(1:14,18; 5:5), ‘약속’(1:13; 2:12; 3:6; 6:2) 등-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엄격하게 말해서, 이와 같은 말들에 근거해서 에베소서의 미래적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진정한 서신들, 특별히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에 강조되고 있는 미래적 종말론이 에베소서에는 사라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에베소서에서 미래적 종말론을 배제해 버린다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4-6장에 나타나는 엄중한 권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일 종말론의 모든 양상들이 다 실현되었다면, Lincoln이 잘 지적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서에서 미래적 종말론의 의미를 강하게 시사해 주는 용어들인 ‘성장함’(2:21; 4:13, 15-16), ‘건축됨’(2:20,22), ‘채움’(1:23; 3:19; 4:10; 5:18), ‘걸음’(2:2,10; 4:1,17; 5:2,8,15),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4:22) 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일 에베소서의 독자들이 이미 모두 하늘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우리는 이 서신의 다른 부분에서 저자가 그들이 여전히 현 세상에 살고 있으며 세상의 유혹과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악한 권세들이 이미 완전히 무장해제 당했다면, 에베소서의 결론인 6:10-20에 나타나는 악한 권세와 성도들과의 영적 싸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 부분은 묵시적 용어들-예를 들어, ‘이 현재의 어두움’(12), ‘악한 날’(13), ‘깨어라’(18) 등-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에베소서의 종말론이 실현된 종말론에 국한된다면, 강한 권면적 교훈은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결론은, 비록 에베소서가 그 서신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 실현된 종말론의 양상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의 종말론에는 또한 미래적 요소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에베소서 종말론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

1) 간략한 연구 역사

우리는 에베소서의 종말론의 주된 특징이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제기되는 질문은 에베소서의 저자가 실현된 종말론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왜 진정한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고 있는 ‘미래적 종말론’을 제쳐두고 ‘실현된 종말론’을 특별히 강조하는가? 에베소서에 나타나 있는 저자의 실현된 종말론에 관한 이례적인 강조와 관련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적지 않은 신약학자들-예를 들어, Bultmann, Conzelmann, K?semann, Pokorny 같은 학자들-은 바울의 ‘임박한 종말론’ 혹은 ‘유대 묵시론’이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실현된 종말론’으로 전환하게 된 주된 이유는 영지주의(Gnosticism)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K?semann은 더 나아가서 바울의 임박한 종말론이 실현된 종말론으로 완전히 대체된 근본 이유는 세계적인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제도화하기 위한 강한 교회론적 의식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K?semann은 에베소서에서는 바울의 기독론이 약화되고, 그 대신 교회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한편 N.A. Dahl과 F.F. Bruce는 에베소서에서 ‘실현된 종말론’이 특별히 강조되는 이유는 당시 개종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교훈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거의 유사하게 Lincoln도 그의 학위논문 Paradise Now and Not Yet에서 에베소서에서 공간적 개념에 대한 강조와 함께 실현된 종말론이 강조되는 이유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들이 처한 종교 혼합사상 배경(the religious syncretic background)과 관련해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Margaret MacDonald는 최근 저서 The Pauline Churches에서 K?semann의 주장을 확대 발전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바울 운동(the Pauline movement)이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된 이유는 바울의 영향권에 있었던 교회들이 사도의 부재중에 일어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Horacio Lona는 그의 책 Die Eschatology im Kolosser und Epheserbrief에서 에베소서 저자가 실현된 종말론을 특별히 강조한 주된 이유는 당시 그리스-로마 환경에서 외부적으로 몰아쳐 오는 ‘세상-염려’(Weltangst)에 직면하고 있었던 그의 독자들을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G.F. Wessels은 최근에 쓴 논문 “The Eschatology of Colossians and Ephesians”에서 에베소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통일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한편 Clinton Arnold는 그의 최근 저서 Ephesians: Power and Magic에서 Lona의 주장을 약간 확대 발전시켜 에베소서 저자가 공간적인 개념이 짙은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게 된 이유를 독자들이 처해 있었던 특수한 환경, 즉 당시 서방 소아시아에 풍미하고 있던 악마적 세력들의 위협에서 찾는다. Arnold에 따르면, 에베소서 저자는 특수한 종교 문화 현상의 위협 아래 있던 독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실현된 종말론을 특별히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에베소서의 강한 ‘실현된 종말론’의 강조와 관련해 최근의 신약 학계에서 제기된 몇몇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어느 주장이 옳고 혹은 그른지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이들 연구들이 한결같이 에베소서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실현된 종말론의 동기를 에베소서 독자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한 저자가 쓴 작품의 주된 동기를 저자 자신이나 독자들이 처해 있었던 역사적 환경에서 찾는 것은 옳은 자세라고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에베소서가 다음 세대의 바울 교회를 위해 바울 사상이나 신학의 소개서나 요약서로 쓰여졌다고 주장하면서 에베소서의 종말론을 지나치게 일반화시켰던 E.J. Goodspeed와 C.L. Mitton의 주장에 반대한다. 따라서 어느 학자들의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지니느냐는 것은 에베소서 저자나 독자들의 역사적 상황을 누가 가장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느냐에 좌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에베소서의 역사적 상황을 가장 잘 복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에베소서의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외적 증거보다 내적 증거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에베소서의 역사적 상황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적 증거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견해로는 에베소서 저자가 이례적으로 강조하는 실현된 종말론, 이른바 현재 완료된 구원의 양상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서 다음의 증거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기독론과 교회론의 강조; 둘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통일성에 관한 이례적인 강조(특히 4:1-16); 셋째, 하늘과 우주적 차원에 관한 강조; 넷째, ‘충만함’과 ‘비밀’에 관한 빈번한 언급; 다섯째, 그리스도인 가정에 관한 특별한 교훈;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는 영적 전투에 관한 저자의 이례적인 강조(6:10-20).

위에서 제시한 대부분의 내적 증거들이 에베소서의 역사적 정황을 재구성하는 문제와 관련해 앞에서 열거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각도에서 용의주도하게 연구된 바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아는 한 제일 마지막 부분(6:10-20)만큼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 온 것 같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에베소서 6:10-20에 나오는 영적 전투에 관한 권면이야말로 에베소서의 역사적 정황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에베소서의 역사적 정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물론 이 구절에 관한 상세한 주석을 하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될 것이다. 다만 이 구절 중 에베소서의 역사적 상황을 밝혀 주는 몇 가지 요소들만 살펴보도록 하자.



(2) 에베소서 6:10-20로부터 역사적 정황의 재구성

먼저 우리는 에베소서 6:10-20을, 흔히 주장되어 온 것처럼, 에베소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권면 부분(4-6장)의 결론으로서가 아니라, 사실상 에베소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 6:10-20은 에베소서의 의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이 전투 본문은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10-13절, 2) 14-18절, 3) 19-20. 첫째 부분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갑옷을 입고 원수들과 싸울 준비를 할 것을 촉구한다. 둘째 부분은 그들에게 전투를 하기 위한 무기들로 무장할 것을 촉구한다. 마지막 부분은 바울 자신을 현 세상에서 싸움에 임하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 병사의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갑옷을 입고 싸워야 할 원수가 누구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왜 에베소서 저자로 나타나는 바울이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 병사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저자와 독자들의 원수는 누구인가? 본문에서 저자는 그 원수를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원수는 11절에서는 ‘마귀의 궤계’(ta;" meqodeiva" tou' diabovlou)로, 12절에서는 ‘정사’(a;iajrcai)와 ‘권세’(a;i ejcousiai)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o;i kosmokavtorai tou' skoutos tovuto)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ta; pneumatika; th'" ponh-

riva" ejn toi'" ejpouranivoi")로, 그리고 16절에서는 ‘악한 자의 모든 화전’(pavnta ta; bevlh tou' ponhrou')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본문에 나타나는 원수를 영적 혹은 우주적 권세들과 관련시켜 이해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Robert A. Wild는 그의 최근 논문 “The Warrior and Prisoner: Some Reflection on Ephesians 6:10-20”에서 “에베소서 6:10-20에 나타나는 원수는 세상적 원수가 아니고 오히려 우주적 권세와 주관자다”라고 말한다. Wild와 마찬가지로 Arnold도 그의 Ephesians: Power and Magic: The Concept of Power in Ephesians in Light of Its Historical Setting에서 에베소서 6:10-20에 나타나는 전투는 악마적 권세들과의 영적 전투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표현들을 일괄적으로 악령적 혹은 우주적 의미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우리의 반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에베소서 1:10에 따르면(참조 골로새서 1:16,20),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것까지 정복해 통합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원수를 영적이며 우주적인 권세들에게 한정하는 것은 에베소서 저자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자신들을 대적하는 악령적 세력뿐만 아니라 지상적 세력과도 싸우는 일이 왜 부당한가?

둘째, 이 본문에 나타나는 ‘정사와 권세자들’을 우주적인 악령적 세력들로만 볼 수 없는 것은, 바울 자신이 로마서 13:1-3과 고린도전서 2:6-8에서 이 말들을 우주적, 악령적 의미로뿐만이 아니라, 현세적이며 인간적인 세력의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이 말들을 이미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의미로도 사용했다면, 우리가 본문에서 이 말을 그와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왜 부당한가?

셋째, 일종의 군사적 은유로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일곱 가지 무기, 즉 ‘진리’, ‘의’,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 등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악마적 세력들과 대적하기 위한 무기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적이며 인간적인 세력들과 대항해 싸우는 방어적인 무기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영적 태도를 뜻하는 이와 같은 무기들을 갖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들과 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넷째, 이 구절의 권세들을 순전히 악령적 세력들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주후 1세기 헬라-로마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세력들과 영적 세력들이 서로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희랍 신화에서는 신들이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the anthropomorphization of gods), 반면에 로마 세계에서는 지상적인 로마 황제들이 숭배의 대상자들로 신격화되었다. 더구나 에베소서 독자들의 생활 무대인 소아시아에서 Augustus, Tiberius, Claudius, Nero 같은 로마 황제들은 ‘신’, ‘새로운 제우스’, ‘구세주’ 등으로 신격화되어 예배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소위 악령적 해석은 당시 지상의 세력들에 의해 투옥되어 있는 바울 자신의 상황과도 상충된다. 만일 저자인 바울 자신의 역사적 삶의 정황과 독자들의 정황 사이에 연속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자신을 독자들이 닮아가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하겠는가?

그러므로, 위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의 결론은 에베소서 6:10-20에 나타나는 독자들의 원수들은 헬라-로마 종교 세계에 등장하는 악령적 세력일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그들의 실제적인 대리자들로 볼 수 있는 로마 황제들의 세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에베소서 독자들이 처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로마 황제들의 세력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그들의 정체성을 위협한 주된 원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에베소서 독자들은 그들의 정체성과 통일성을 위협하는 이러한 양면적 세력들과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세력으로 무장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에베소서 1:20-22과 6:12에 나타나는 권세자들과 주관자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Markus Barth와 의견을 같이한다:



바울의 단어들은 정치적 주관자들의 신격화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는 확실히 신적인 칭호를 지상적 주권자들에게 부여함으로써 동양적 사상과 관습들을 서구화시키는 헬라 사상에 정통한 것처럼 보인다. 에베소서 1:21에서 권세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술어들은 법률적, 재무적, 철학적 문헌들 가운데서 종종 정치적 주권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정사와 권세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들인 동시에 또한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 세계의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구조나 기관들을 가리킨다.



위의 논증이 정당하다면, 실제로 독자들이 그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그 원수들, 곧 악령적 세력들의 지상적인 대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상적 세력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가? 이것은 결국 에베소서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 하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서 저자를 바울의 이름으로 바울의 교회에 편지를 쓴 익명의 바울 후계자나 제자로 간주한다면, 에베소서 독자들의 원수는 아마도 1세기 말 스스로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자처하면서 제국 내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Domitian 황제(AD 81-96)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인 입장에 따라 에베소서 저자를 사도 바울로 본다면, 그 원수는 Nero 황제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Nero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바울도 Nero 황제 통치 시절에 투옥되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의 본문은 이 편지가, 마치 베드로전서의 경우에서처럼(특히 벧전 4:13-19를 보라), 구체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졌을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 서신에서 왜 바울 사도가 서신에서 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적어도 3번 이상 옥에 갇힌 죄수로 소개되고 있다(3:1; 4:1; 6:20). 바울은 로마 제국의 세력에 의해 그 자신이 옥에 갇힌 상태에 있어서면서도 ‘담대하게 말하는 용기’를 가리키는 ‘팔래시아’(parrhjsia)를 잃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로마 제국 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모델이 되고 있다. 마치 바울 자신이 로마 제국의 핍박 가운데서도 ‘팔래시아’를 잃지 않은 것처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어떠한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팔래시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우리의 역사적 정황 구성이 신뢰할 만 하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제기된 질문은 에베소서의 종말론이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과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비록 우리가 미래적 종말론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에베소서의 주된 종말론은 미래적 종말론이라기보다 오히려 실현된 종말론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성한 에베소서의 역사적 정황이 에베소서의 주된 강조점인 실현된 종말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제안한 대로 에베소서의 독자들이 로마 황제의 핍박 아래 있었다면, 확실히 그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가해지는 박해로 인한 위기와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위기와 두려움은 이 박해자들이 그리스-로마세계의 다양한 종교 사상이 가르쳐 주는 하늘의 세력들의 화신이나 대리자라는 사실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에베소서의 독자들은 배교 혹은 그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공동체의 존립이나 통일성의 와해라는 위험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 에베소서 저자는 에베소 교회를 강력하게 경신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이에 대한 근거를 하나님 중심 사상, 기독론, 종말론 및 교회론에서 찾았을 것이다. 즉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만유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취하신 위대한 구원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무장시키려 했을 것이다. 특별히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한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권세자들이나 제식의 영들로부터 오는 핍박의 위험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지상적, 천상적 악한 세력들로부터 해방시켰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에서 실현된 종말론이 특별히 강조된 것은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처해 있었던 역사적 정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에베소서가 하나의 조직적인 신학서라기보다 역사적 우연성을 지닌 상황적 서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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