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스크랩] 천국 시민권의 지상적 의미(빌립보서)

하나님아들 2014. 3. 25. 18:57

 

 

 

 

        천국 시민권의 지상적 의미(빌립보서)

 

                김회권(숭실대 기독교학과)

 

 

초청의 글

 

부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님들을 소생시켜 주시길 빕니다.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숭실동산에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돌봄과 다스림이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번 봄학기에 제 4회 숭실신앙강좌를 열려고 합니다. 바울의 빌립보서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영생, 지성과 영성, 그리고 종말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급속하게 세속화되면서 기독교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사태가 빈번한 현실에서 복음의 원음을 재생하여 듣는 일은 더욱 더 시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기복주의, 배금주의, 성공주의가 복음으로 위장되어 교회강단을 지배하는 오늘날, 성경을 자세히 공부하여 복음의 원음을 들으려는 노력은 자아쇄신과 교회갱신, 더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속시키려는 사회선교를 위해 가장 긴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빌립보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천국시민권을 자랑하는 서신으로서 이 지상의 권력욕과 탐욕과 독점, 배를 신으로 섬기는 물신숭배문화를 초극하는 천국시민권 자랑신학을 내세웁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일치와 연합, 겸손과 지상적 자랑을 초극하는 천국복음 자랑,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승귀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확고한 신앙, 종말론적인 기대안에서 이뤄지는 나눔과 베품의 삶으로 특징지워집니다.

5월 10일

빌립보서 1장 로마제국 시민권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시민권을 자랑하는 사도 바울

주제: 교회란 무엇인가? 천국시민권자의 지상 행동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5월 17일

빌립보서 2장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 왜 십자가에서 처형된 나사렛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가? 하늘과 땅의 대권을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세상 통치의 참 증거는 무엇인가?

5월 24일

빌립보서 3장 하늘의 상을 향해 정진하는 사도 바울, 그리고 숭실인들

주제: 그리스도인의 영적 출생지, 다메섹 도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생에 걸친 영적 정진과 성숙은 가능한가?

5월 31일

빌립보서 4장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희망에 찬 그리스도인들

주제: 지상에서 바친 교회를 향한 헌신의 의미는 무엇인가? 종말은 오는가?

 

 

 

빌립보서의 얼개와 흐름

 

Ⅰ. 1:1-11. 편지 소개

A. 1:1-2 발신자 소개와 수신자 소개

B. 1:3-8 감사와 감사의 이유

C. 1:9-11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사도의 중보기도

Ⅱ.1:12-16 바울 자신의 최신 근황 소개

A.1:12-18a 바울 자신의 옥중 생활과 그것의 신앙적인 해석

B. 1:18b-26 다가오는 위기

Ⅲ.1:27:2:18 천국시민의 삶-겸손, 일치, 궁극적 승귀

A.1:27-30 굳게 서라

B.2:1-4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의 삶

C.2:5-11 그리스도의 마음-겸비, 자신을 무화(無化)시키는 진리에 대한 절대순종, 자유, 승귀(exaltation)(행전 2:22-36).

D.2:12-18 우리의 필수적인 반응

Ⅳ.2:19-30 천국시민의 생생한 예

A.2:19-24 디모데-바울의 영적 아들

B.2:25-30 에바브로디도-바울의 동료 군사.

Ⅴ.3:1-4:1 그리스도인의 삶-세상 사랑과 영광을 초극하는 천국시민권 자랑

A.3:1-11 신뢰의 참다운 근거

B.3:12-4:1 계속 정진하라

Ⅵ.4:2-23 결론-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올수록 관대해지는 성도의 삶

A.4:2-9 다양한 권면들

B.4:10-20 개인적인 감사

C.4:21-23 결론

 

 

빌립보의 역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 대 브루투스와 카시오스의 권력투쟁의 중심지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대사인 Paquius Rufus은 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의 승전을 기념으로 빌립보를 군사식민지로 규정한다. 한편 빌립보는 이 전쟁을 마친 퇴역군인들의 정착지로 선택된 도시이기도 한다(주전 42년 경). 악티움 해전(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후 주전 30년경에는 안토니의 군사들, 즉 퇴역군인들이 다시 한 번 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 (로마 식민지)신분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와의 긴말한 관계를 자랑스러워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로마시민임을 자랑하였다(로마법 준수, 로마 동전, 로마 관습). 데살로니가에 파견된 로마 총독의 간섭에서 자유로웠다. 로마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이 도시의 기풍이었다.

 

빌립보 교회의 역사

빌립보 교회의 기원은 행전 16장에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 먼저 경건한 개종자 리디아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주 장사)(행전 16:11-15); (2) 주인을 위해 점을 치는 소녀의 축사 이야기 (16:16-18). 바울은 이 소녀를 지배하는 악령을 쫓아냄으로서 어둠의 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입증하였다 (3) 지진에 의하여 옥문이 열리자 죄수들이 도망친 줄 알고 자결하려던 한 간수장과 가족의 개종 이야기 (16:27-34). 귀신들렸던 그 여인을 비롯하여(막달라 마리아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 사도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였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여인도 모종의 지도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세 사람이 초기 빌립보 교회의 중심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외에 빌립보 서신에 언급된 지도자들은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리고 글레멘트 등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름들은 이들이 모두 이방인이었음을 가리킨다. 행전 20장 1-2절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마케도니아 지방을 들러 많은 격려를 주었다고 진술한다. 이 마케도니아 지방 순회 중에 빌립보를 방문하였을 것이다. 그는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케도니아로 먼저 보내 자신의 방문을 미리 준비시켰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물질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빌 4:15) 또 다른 경우에는 헌금을 보냈다(고후 11:9).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건설되었고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따라 이름지어졌다. 일종의 군사 요충지로서 황제 직할도시였다. 로마시민권자들이 사는 도시였다.

 

빌립보서를 쓰는 계기

에바브로디오의 편에 보내준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인 선물을 받고서 쓴 편지다(4:18). 2:25을 보면 빌립보 교회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감옥 중에 있는 바울의 수종을 들며 그의 필요를 돌보아 줄 것을 위탁한 것처럼 보인다. 바울을 섬기는 동안 그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다(2:27). 바울 사도는 그의 목숨을 살려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의 질병이 얼마나 위중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빌립보 사람들은 그의 병세의 위중함을 알고 그들은 그에게 그들의 관심과 사랑이 담긴 기도 편지를 보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사모하는지를 감지하고 그를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바로 이 결정이 바울로 하여금 빌립보서를 쓰게 만든 주요한 계기라고 볼 수 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와 격려가 본 서신의 작성 계기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행전 28:30에 따르면 바울은 아마도 2년 동안의 투옥 끝에 이 서신을 작성했을 것이다(60/62년 경).

 

빌립보서의 저자 사도 바울은 누구인가?

바울은 신약 성경을 통틀어서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회의 탄생과 세계적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다. 신약 성경의 거의 반 정도가 사도 바울의 저작들이다. 그는 유대인들만의 경계 속에 갇혀 있는 구약 성경의 복음을 전 세계 만민을 위한 복음으로 발전시켰던 인물이다. 그는 전 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완성의 구도 하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로마제국이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듯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복속되며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가, 남자와 여자, 야만인과 문명인의 경계가, 종(노예)과 주인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날이 올 것을 믿었던 사람이다. 그는 세계 역사의 완성을 향해 치닫는 성령의 역사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세계를 향하여 성령의 유영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의 물결에 자신을 내맡긴 채 도시문명과 제국의 구조와 체제 속에 잊혀진 개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집으로 초청하였다. 그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체제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공무원을, 주부들을, 끝없는 흥미와 소일거리를 찾던 enterainment-seeking(쾌락추구적) 도시사람들을 대면하였다. 그는 뇌물을 바라는 총독과 권력의 자리에서 오만한 기득권을 휘두르는 냉혈한 같은 지도자들을 대면하였다. 땀흘리는 노동의 현장에서 생업의 수고로움을 아는 자들의 한 가운데서 서 있었다. 그는 여행자였고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담화자요 논증자였다. 그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세계를 친히 경험한 자요, 가장 가까운 동역자와 갈등하며 사람을 잃어본 자였고, 배신의 쓰라림을 경험한 자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릇된 신념으로 자신의 인생을 과속 질주하던 청년이었다.

우리가 바울 자신의 친서들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의 가르침과 복음적인 열정이 놀라울 만큼 예수와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바울 친서는 13개 서신들 중 적어도 일곱 개는 바울 친저성 인정). 바울의 친서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 대부분의 서신들은 주후 50년대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바울의 생애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충돌이다(행전 9:1-16; 22:3-21; 26:4-18). 그 충돌 사건이 바울을 변화시켰다. 다메섹 도상의 충돌 이전에는 예수 운동의 열혈 박해자였다. 그 후 그는 예수 운동의 중심적 옹호자로 바뀌어 졌다. 이 삶 전체를 뒤바꾼 사건을 35년경에 이뤄졌다.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사울은 이 때 고위 당국자들의 전권을 위임받아 예수의 추종자들(the people of the Way-"도의 백성들” : “그 길”(The Way)이라고 불리는 신생 종파들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다. 다메섹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에 그 때 그는 찬란한 빛과 충돌하여 떨어지고 동시에 한 음성을 듣는다. 그는 비전(vision)을 경험하였다. 초월적인 현실, 보다 더 지배적인 현실, 현상 너머에 있으되 현상 질서를 주장하는 영적인 실재와 충돌하였다. 현실의 이면을 보았다. 맹목의 질주가 이뤄지는 그의 삶의 이면에 보다 더 중요한 규정력을 행사하는 real reality와 맞부딪친 것이다. 여행하는 다른 사람들은 그 경험을 하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바울 자신의 추락과 영적인 실재와의 충돌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인 것이다. 그 사건은 과학적으로 입증가능하며 신문기자에 의하여 사실적으로 카메라에 포착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리를 들었으나 빛(부활하신 그리스도)을 보지 못했거나(9장), 혹은 빛을 보았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22장).

그 다메섹 광채와의 충돌 사건은 시력(시각, 관점)을 앗아갔다. 그는 오로지 다메섹에 들어가 그에게 행할 일을 가르칠 사람들을 만나라는 음성만을 들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직가 거리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나타나 다메섹으로 곧 들어올 바울을 찾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용될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일러주었다. 아나니아는 3일 동안 장님 상태로 있던 사울에게 안수하였다. 안수와 교육을 통하여 바울은 성령 충만을 경험하였다. 하나님 자신은 사람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충만케 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성령 충만케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에 우리 인간의 자리를 친히 만드신다. 아나니아의 손에(안수) 의하여 바울은 새로운 시력을 얻고 성령충만을 경험한다(오순절 성령강림은 120문도의 기도를 통하여).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를 통하여 바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져 시력이 회복되었다. 바울은 육신의 시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영적인 시야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례를 받고 그는 사도의 삶을 시작하였다.

 

다메섹 이전의 삶

이방인의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시간이었다. 언어적, 교육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바울은 이중언어사용자(bilingual)였다. 그는 도시문명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제국 철학인 스토아 철학의 사해동포주의 이념에 젖어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였다. 길리기아 지방의 주도인 다소(“no mean city"- 상업과 교육의 중심지-밀레토스 학파의 본거지)에서 경건한 유대인 부모의 가정에서 태어날 바울은 자신의 고향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 시대 때부터 융성하기 시작하여 (주전 31-14년) 바울 당시 소아시아 전체에서 다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와 필적할 만한 학문과 철학의 도시였다. 번영과 사치의 도시이기도 하였다. 그의 서신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의 사상은 구름 속에서 뒤덮인 고봉준령처럼 뻗쳐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때때로 그의 글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헬라철학과 교양에도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랍비교육을 통하여 성경과 기타 믿음의 전통에 해박하였다. 그는 자유자재로 구약성경을 인용하거나 암시한다. 그는 다메섹 이전의 삶을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찬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였다. 그는 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다.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서는 그는 자신을 가리켜 바리새인이라고 불렀다. 토라에 대한 엄격한 준수,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성결과 거룩을 일상생활 전체로 확장시키려는 강경한 도덕주의자였다(주홍글씨, 식민지 시대의 메사츄세트).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감히 주장할 정도였다. 그 당시 경건한 바리새인들처럼(랍비), 자신의 생업을 가지고 있었다. 장말 제조업이었다. 그것은 몇 가지 가벼운 도구들(모루, 칼, 바늘)을 가지고 다니는 이동이 자유로운 직업이었다. 그는 어디서나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진정한 자비량 선교사였다.

 

다메섹 이후의 삶

바울은 유대인 신비가였다(특히 보좌신비주의자-바리새인들의 신학적 전통 중 하나로 하나님 보좌옆에 있는 작은 보좌를 보았다는 신비가들의 경험-다니엘서적 환상). 신비가는 하나님을 단지 믿는데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친밀히 알고 교제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보았다고 만났다고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고백한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은 그를 이런 신비가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도록 한다(고후 12장 1절). 바울은 영혼의 육체 이탈을 경험한다. 낙원 혹은 셋재 하늘로 여행을 간다. 비전들(묵시들)과 계시들을 많이 경험하였다. 바울의 신비 경험 중 압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조우사건이다. 고전 15장에서 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그리스도께서 나타 주었던) 사람들이 나열되고 바울 자신은 마지막에 포함된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자신 안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시다.” 고후 3:8과 빌립보 3장 21절에서 비슷한 영적 변화를 이야기한다.

 

예수의 사도요 선교사

바울의 선교 사역은 2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대부분을 소아시아와 그리이스에서 보냈다. 바울은 거의 10,000마일 정도의 여행을 다녔다. 걸어서 혹은 배를 이용하였다. 순회 전도자로서 그는 생활비를 스스로 벌면서 일하러 다녔으며 이따금씩 그가 창립한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가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약 3년 동안을 아라비아에서 보냈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비아 지역은 요르단 지역(당시의 나바티안 왕국)을 의미하였다(김세윤의 논문, “ ”). 그는 40연대를 소아시아와 갈라디아서 지방을 답파하면서 전도여행을 다녔다. 주후 50년 경에 그는 소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선교여행을 떠난다. 그리이스의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고 남쪽에서는 고린도를 거점으로 선교지역을 확장하였다. 50년대 내내 바울은 소아시아와 그리이스를 반복적으로 순회하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견고케 하였다. 소아시아에서는 에베소를 거점 도시로 하여 왕성한 선교의 역사를 감당하였다. 이 50년대에 바울의 서신들의 대부분이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고후 11장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그리스도인 대적자들의 비판을 의식하고 길고 세세한 사도적 선교사의 삶을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후 11:23-28). 고린도 후서는 그가 4년간 투옥되었던 감옥생활이 시작되기 전에 쓰여졌을 것이다. 50년대 말경에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이방신자들의 헌금을 거두어 돌아온다. 예루살렘 체류 도중에 그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소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하여 체포된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약 2년간 투옥된다. 60년경에 그는 로마 황제에게 직소하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된다. 그는 로마에서 다시 이년 동안 비교적 자유로운 미결수의 신분으로 2년간 억류생활을 경험한다.

 

바울이 개척하고 창설한 신앙 공동체들

바울은 거리의 모퉁이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의미의 거리의 복음 전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하나의 거점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거점 도시, 중심인문, 회당 중심). 한 새로운 도시에 입성하면 그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갔다(이 점이 유대인들의 격분을 샀다). 그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고 혹은 논증하고) 거기에 참석중인 개종자 이방인들 혹은 개종 대기자(마 23:8)들 즉 할례받기 직전의 이방인들(God-fearers,"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율법의 완성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맏아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복음을 증거한다. 이 하나님 경외자들은 (행전 10:2; 13:6,26; 17:4,17; 16:14; 18:7)유대교에 설득되었지만 할례를 받을 정도로 완전히 개종하지는 않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찾아 일대일 혹은 소모임 대화 형식을 통하여 개종자로 얻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는 숫적 규모면에서 매우 적은 숫자였다. 주추 60년경에 로마 제국 전 영토 내에는 오직 약 2000명 정도의 신자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유대 본코에 약 1000명 정도, 다른 제국의 영토 내에 약 1000명 정도였으리라 본다(행전 3000명 회개 사건과의 조화). 따라거 대부분의 이방인 교회들은 가정 교회의 형식들로 모였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의 거점이 확보된 이후에 다른 지역으로 사역을 확장한다. 그는 대체로 공동체 단위(team approach)로 사역한다. 바울은 흩어져 있던 믿음의 공동체들과 교통하기 위하여 서신들을 썼다. 그것들은 회람되거나 공적으로 낭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 교회들 사이에서 권위 있는 문서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을 것이다(베드로 후서- 바울 형제의 글은 더러는 어려운 것들이 있으므로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 것을 경계). 바울의 서신들은 그가 창설한 교회 공동체들과 바울 사이에 오고간 “특별한 맥락 속에 이뤄진 대화들”이다. 이 대화들은 실제 오고간 대화들의 절반 정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바울을 왕왕 그의 편지들 속에서 신약 성경에 보존되지 않은 서신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를 제외하고는 바울 서신들을 바울의 신학사상이나 메시지의 체계적 요약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바울 서신의 의제들은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들에 의하여 제기된 것들 이었다(예. 여자의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다메섹 이후의 삶

 

바울의 핵심 메시지들(주장들)

1. 예수는 주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바울의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라는 선포로 바뀐다(하나님 나라는 주와 그리스도인 예수의 우편보좌 통치를 통해 구현된디!!)

부활하신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왕이시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예수의 왕되심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부활과 영생을 믿었다. 그는 특히 마지막 날 만인의 부활을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의 부활의 첫 시작이다. 예수의 왕적 통치가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 백성들을 끌어 모으시는 왕적인 통치의 첫 시작이다. 예수를 주(主)라고 지칭하는 회수가 예수를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회수보다 훨씬 많다. 예수의 부활과 그의 우주적인 왕권은 빌립보서 2:6-11에서 잘 기록되어 있다. 자기를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한 예수를 하나님께서 높이셨다. 여기서 3층천 구조로 된 우주관이 엿보인다. 여기서 주라는 고백은 정치적 신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참칭하던 주는 힘을 잃게 된다. 다른 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주기철 목사의 고백).

2. 그리스도 안에서-성령을 파송하고, 보내주심으로서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압도적 통치. 은혜 안에서 이뤄지는 설복과 감화감동이 하나님 나라의 원동력이다!!

이 표현은 165번 사용된다. 이 표현은 아담 안에서 사는 삶과 대조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아담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의 분리와 적대적인 소외의 종결을 의미하고 역동적인 화해와 친밀감의 회복을 의미한다. 관계성의 차원을 말한다. 바울 신학에서는 죄와 죽음은 단지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것들은 “권세들”이며 주권을 행사하는 “주권적 실재들”이다. 죄는 자유의지에 의하여 짓는다는 말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바울에 의하면 아담 안에서의 삶은 죄의 권세 혹은 지배력 아래 좌우되는 삶이다(로마서 7장 25절 이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아담 안에서의 삶의 반대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다. 죄와 죽음, 율법의 위협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현존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과의 화해를 믿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창조가 이뤄진다(life according to flesh to life according to the Spirit).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이 말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결코 강력한 도덕적 의지와 결단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다. 그러면 어떻게 아담적인 삶을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율법의 기계적인 요구와 위협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 속에서 율법의 도덕적 요구를 능히 성취하면서 사는 삶이다. 또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내안에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전주곡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세례는 옛 사람(옛 삶의 방식)의 죽음과 새로운 삶에로의 접목을 의미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은 “산 제물”의 삶이다. 여기서 제물은 죽음을 전제한다.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 자기를 비우고 낮추심의 절정이며 죽기까지 드린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절정이다. 그런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높이신다. 바울은 도덕적 자율주의나 혹은 도덕적 타율주의도 아닌 하나님적인 신율주의를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신 복종이요 자기 비움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정태적인 심리적 정신적인 영역이 아니라 우리의 전 실존이 규정되는 공간이다. 그리스도 안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닮은 새 피조물이 조형되는 공간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예수의 강력한 은총과 새 창조의 사역에 내맡겨진 공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 창조는 사회적인 함축을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인간성은 기존의 인습적인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인 경계들을 허물어뜨리고 부정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회적인 위계질서나 계층적 계급적인 구분이 무너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주자의 경계가 무너진다. 주님의 성만찬 식탁에서는 모든 경계들과 차별들이 사라진다(고후 11:17-34).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유기체)를 분변치 목하고 참여하는 성만찬을 책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평등주의적인 공동체 정신을 훼손하는 왜곡된 성만찬 의식을 공격하는 것이다.

 

3.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

바울의 이신칭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주어진 선물을 강조한다. 의롭게 되는 것, 구원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채움받는 경험이다. 구원과 칭의는 하나님의 통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필요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구원절대주의, 구원궁극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바울 신학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정통계승자요 사도인 것이다.

 

새롭게 번역해 본 빌립보서(능동/수동형 분사구문에 유의한 번역)

1장 1. 그리스도의 몸종(둘로이=douloi, δοῦλος, “bondservant”)들인 바울과 디모데가 빌립보에 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2 은총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화가 여러분께 있기를 3 나는 여러분들을 기억할 때 내 하나님께 감사하며 4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간구할 때마다, 5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하여 나는 항상 기쁨으로 간구하며 6 아울러 나는 여러분들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는 바로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7 내가 여러분들 모두에 대하여 이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사슬에 묶여 감옥에 있을 때나 법정에서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대나 언제든지 여러분들 모두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아 누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8 내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창자(심장)로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모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나의 증인이십니다. 9 나는 여러분들의 사랑이 충분한 지식과 모든 영적인 지각 면에서 점점 더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10-11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그리스도의 날에 정결하고 흠이 없이 나타나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식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열매로 가득 차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12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나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 상황이 복음 전파를 촉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13 온 시위대(경호병 부대)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실상은 단지 물리적인 감옥 안에 속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박된 자인 것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14 그 결과 대다수의 형제들이 주안에서 내가 쇠사슬에 매여 감옥생활을 하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전보다도 훨씬 더 대담하게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5 실로 어떤 사람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선의로 그렇게 합니다. 16 이 후자의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옹호하기 위하여 법정에 세워진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 17 전자의 사람들은 경쟁심과 나의 속박의 고통을 증가시키려는 순전치 못한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18 그러면 어떻습니까? 위선적인 동기에서건 순전한 동기에서건 어떤 경우에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이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또한 계속 기뻐할 것입니다. 19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의 기도들(간구)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공급하심을 통하여 이런 상황이 나에게 석방(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20 나는 결코 낭패를 당하지 않으며 (수치를 당하거나)언제나처럼 심지어 지금도 내가 죽으나 사나 내 몸에서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기대와 소망에 의하여) 나는 석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1 나에게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나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22 이 육체를 가진 채 사는 것은 이것은 나에게 노동의 수고를 맺는 도구자로 몸을 유지하는 셈이 되겠지요. 나는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두 선택 사이에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육신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것이 내게 훨씬 더 좋습니다. 24 육신을 입고 계속 살아 있는 것, 이것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훨씬 더 필요한 일입니다. 25 하지만 나는 내가 육신을 덧입고 계속 더 살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영적 진보와 신앙 안에서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계속 여러분들과 함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26 즉 내가 여러분들에게 남아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여러분의 기쁨이 다시 한번 가득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27 가서 여러분들을 직접 얼굴로 보나 멀리서 여러분들에 대한 소식을 들으나 여러분이 한 마음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 안에서 동일한 정신으로 서서 생활하되 여러분들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하여 조금도 기죽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들을 대적하는 이것은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멸망의 증거요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내 속에서 보았고 지금 듣고 있는 그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해

바울의 복음전파는 빌리 그래함식의 일회성 집회성 행사가 아니라 일생에 걸친 목회적 책임적 사역이었다. 그것은 일생에 걸친 애프터서비스적인 영적 관리요 성장 프로그램의 관철이었다. 큰 것과 대규모 목회에 집착하는 오늘날의 목회자들의 기준으로 보면 바울이 성공적인 목회자가 아닐 수도 있다. 일생 동안 약 25년간의 사역활동을 통하여 8개 지역의 약 500명 정도에 대한 목양적 책임을 수행하였다. 그는 해산하는 수고를 감수해 가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천국 시민권자답게 살도록 권고하고 권면하며 지도하였다. 성경 말씀이 본문이라면 그의 생애 자체는 하나의 본문 해설이었다.

1. 그리스도의 몸종(둘로이=douloi)들인 바울과 디모데가 빌립보에 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2 은총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화가 여러분께 있기를

이것은 전형적인 헬라식 서신 문안의 인사말이다. 여기에 평화의 근원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과 은총이 평화 외에 추가된 것은 바울 자신의 특별한 첨가물이다. 수신인은 그리스도 안에(뿌리가 대지 안에 있듯이) 있는 빌립보 거주 성도들이다. 거룩한 자들이다.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객관적인 표지와 문화, 삶의 양식 등으로 전체로부터, 그러나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separated from the whole and separated unto the whole). 여기서 노예, 종 즉 둘로이는 헬라적인 의미의 몸종임과 동시에 구약적인 의미의 영예로운 자기정체성 이해의 표현이기도 하다(사 43:10; 수 14:7; 시 Ps 89:3; 참조. 삼하 7:5, 8; 왕하 10:10).

3 나는 여러분들을 기억할 때 내 하나님께 감사하며 4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간구할 때마다, 5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4:10-19; 특히 4:15-16. 복음전파하는 바울을 재정지원)는 사실을 인하여 나는 항상 기쁨으로 간구하며 6 아울러 나는 여러분들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는 바로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7 내가 여러분들 모두에 대하여 이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사슬에 묶여 감옥에 있을 때나 법정에서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대나 언제든지 여러분들 모두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아 누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8 내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창자(심장)로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모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나의 증인이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과 빌립보 교우들간의 아름다운 사역의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살전 2:2에서 빌립보에서 당한 곤경을 간략하게 언급).

9 나는 여러분들의 사랑이 충분한 지식과 모든 영적인 지각면에서 점점 더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10-11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그리스도의 날에 정결하고 흠이 없이 나타나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식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열매로 가득 차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12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나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 상황이 복음 전파를 촉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13 온 시위대(경호병 부대)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실상은 단지 물리적인 감옥 안에 속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박된 자인 것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14 그 결과 대다수의 형제들이 주안에서 내가 쇠사슬에 매여 감옥생활을 하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전보다도 훨씬 더 대담하게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5 실로 어떤 사람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선의로 그렇게 합니다. 16 이 후자의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옹호하기 위하여 법정에 세워진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 17 전자의 사람들은 경쟁심과 나의 속박의 고통을 증가시키려는 순전치 못한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18 그러면 어떻습니까? 위선적인 동기에서건 순전한 동기에서건 어떤 경우에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이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또한 계속 기뻐할 것입니다.

19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의 기도들(간구)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공급하심을 통하여 이런 상황이 나에게 석방(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20 나는 결코 낭패를 당하지 않으며 (수치를 당하거나)언제나처럼 심지어 지금도 내가 죽으나 사나 내 몸에서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기대와 소망에 의하여) 나는 석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1 나에게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나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22 이 육체를 가진 채 사는 것은 이것은 나에게 노동의 수고를 맺는 도구자로 몸을 유지하는 셈이 되겠지요. 나는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두 선택 사이에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육신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것이 내게 훨씬 더 좋습니다. 24 육신을 입고 계속 살아 있는 것, 이것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훨씬 더 필요한 일입니다. 25 하지만 나는 내가 육신을 덧입고 계속 더 살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영적 진보와 신앙 안에서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계속 여러분들과 함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26 즉 내가 여러분들에게 남아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여러분의 기쁨이 다시 한번 가득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27 가서 여러분들을 직접 얼굴로 보나 멀리서 여러분들에 대한 소식을 들으나 여러분이 한 마음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 안에서 동일한 정신으로 서서 생활하되 여러분들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하여 조금도 기죽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폴리튜에스the)을 사십시오. 여러분들을 대적하는 이것은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멸망의 증거요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내 속에서 보았고 지금 듣고 있는 그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삶을 살지 못하면 즉 천국소속을 확실하게 공포하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을 맛볼 기회도 적도 오히려 세상 세력에 의하여 기가 죽게 된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바울 서신의 초기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살후 1:5에 의하면 복음에 합당한 삶은 복음에 의하여 해방된 사람의 품은 품격의 자유를 누리를 삶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종이 될만큼 자유롭게 된 삶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또한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천국을 향유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정욕과 매력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고난이다. 마치 예수님과 사도들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듯이 데살로니가 교인,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이 속한 혈육공동체로부터 단절되고 배척받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고난은 우리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참여하기에,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에) 적합한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살후 1:11에 의하면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십니다.” 환난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순도는 검증을 거친다. 살후 2:1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유혹을 보내셔서 신자의 영적 순도와 진실도를 검증하신다. 심지어 어설픈 신자들은 거짓을 믿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 펼쳐진 현란한 거짓 이적과 기사가 신자의 양심을 후린다. 기독교인의 구원은 엄청난 대가를 치룬 후 얻은 구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심으로 서서 대적자를 감당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믿음을 지킨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감투정신을 본받지 아니할 수 없다(바울의 적대자들의 중상모략은 롬 3:8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27-28절에 대한 상세한 주석(천국시민권 신학의 핵심구절)

바울의 사도직은 “순종하는 삶”이라는 윤리적 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롬 1:5; 6장; 15장). 바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의 책임은 단순히 복음의 교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나 복음의 기본 교리를 급히 설교하여 이방인들을 개종시킨 뒤 다음 선교지로 서둘러 이동하는 순회 선교사가 아니라 이방의 성도들이 악한 불순종의 삶을 버리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도록 변화시키는 목회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이방인들을 우상숭배의 삶에서 돌아서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만들고 이렇게 순종하는 이방인들을 모아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 가는 목회자로서의 역할이 바울이 받은 사도적 사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복음전파자”로서의 소명과 “삶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복음에 합당하게 살도록 촉진시키는 목회자)으로서의 책임이 동일한 사명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적 책임은 그 근본에 있어 순종하는 백성들을 만드는 윤리적 책임이었다. 바울의 “복음 선포”가 단순히 복음을 “설교하는”행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순종하는 삶에로 이끌기 위해 행하는 온갖 사역을 다 망라하는 포괄적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복음 선포”

바울이 거듭 밝히는 대로, 바울이 사도로서 가진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롬 1:15; 15:20 고전 1:17; 9:16,18; 15:1-2; 고후 10:16; 11:7; 갈 1:8-9,11,16,23; 4:13; 엡 2:17; 3:8; 살전 3:6). 말할 것도 없이 그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 더욱 분명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 속에 계시하신 것이 바로 “그의 아들”이었고 (갈 1:12),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선포하도록 사명을 받았다 (갈 1:16; cf. 1:1). 그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밝히는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하며 교회를 세울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다(고전 2:2).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에서도 그의 사역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밝히 드러내는 것이었다”(3:1).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도됨”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바울의 말을 오늘 우리들이 하듯 “복음의 기본적인 교리를 전달한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바울의 말을 오늘 우리들이 하듯 “복음의 기본적인 교리를 전달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바울의 사도적 책임은 매우 단순해 보인다. 마치 빌리 그래함이 세계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주께 돌아올 것을 권고하는 것처럼, 바울 역시 로마 제국의 동반부 곳곳을 누비며 “예수는 주이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다녔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바울 역시 바로 이런 “일정이 바쁜 순회 설교자”의 모습에 가깝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바울을 세계선교의 비전에 이끌려 보다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땀을 흘리는 순회 선교사로 생각하고 있다. 바울의 사도적 복음사역을 일종의 순회 전도로 생각하는 데는 “복음전파”가 빌리 그래함의 집회와 같이 단기적인 가르침을 통해 전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것은 바울이 맡은 바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일종의 “교리의 체계”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신다는 신학적 내용을 말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복음은 우선 “지적으로”전달되어야 할 교리적 내용이며 이것을 “마음으로 믿도록”, 곡 “심리적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을 보통 “바울의 신학”으로 이해하고 그의 신학적 가르침을 해석하는 데 대부분의 관심을 쏟는 학계의 경향이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을 하나의 신학적 사상으로, 바울의 복음 전파를 일종의 순회전도로 생각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제사 언어로 그려 보여주는 바 목회자요 삶의 인도자로서의 사도상과는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방인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바울의 증거가 빈말이 아니라면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바 “복음 전파”는 결코 복음이라 불리는 신학적 명제를 외치고 다니는 순회 전도자의 사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가 전파하는 바 “복음”은 결코 단순한 “신학적 사상”으로 치부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이런 “신학자” 혹은 “설교자” 등의 그림은 바울을 부분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받은 사도적 소명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기의 궁극적 책임이 올바른 “신학”에 있다거나 복음을 잘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결론: 주 예수를 믿으라(사도행전 16:16-34)

사도 바울의 일생에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못박혀 죽은 예수(저주받아 죽은)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로 등극하신 사건입니다(행전 2장 36절; 9장). 그에게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왕되심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 전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부활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그는 특히 마지막날 만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바리새인 바울에게 마지막 날(인류역사의 종착지)이 도래한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제 인간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스카톤, 텔로스=목적지)이 이뤄지는 사건임을 깨달았습니다. 종말은 단지 역사/시간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시점을 가리킵니다. 요엘서 2;22-25에 의하면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지는 사건이 종말이 도래한 증거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뿐만 나이라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인류 역사의 종말이 도래하였음을 널리 선포한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왕의 다스림을 시작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우리 밖에서 일어난 객관적이며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낸 성령의 내적 증거에 힘입어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의 시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보내어 주심은 당신의 나라를 가득 채울 백성들을 끌어 모으시는 왕적인 통치의 첫 시작입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 나라를 채울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됩니까? 예수를 주(主)라고 사람들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예수님이 보낸 성령의 역사에 우리 양심과 삶은 포획되고 우리의 전 존재는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로 복속됩니다(기쁨, 평강, 사랑, 희망, 온유 등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바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主)라는 선언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그의 우주적인 왕권은 빌립보서 2:6-11에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굴욕적인 죽음의 자리까지 내어주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한 예수를 하나님께서 높이신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로마황제 외에는 주라는 칭호를 가질 수 없다고 규정하는 로마황제의 통치근간을 뒤흔드는 행동입니다. 예수=주(主)라는 고백은 다른 거짓 주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치적 대항주장입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로마제국의 병사들이 전쟁을 기피하여 로마제국의 군사력이 현저하게 쇠락하였습니다. 로마병사들이 로마제국의 황제 대신 나사렛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였더니 로마제국의 전쟁에너지가 급격하게 감소된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 자신을 주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절과 경배를 요구하던 거짓 주들은 힘을 잃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와 본회퍼에게 일본 천황과 히틀러는 각각 거짓 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주들의 명령과 위협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참 주가 나타나면 거짓 주들은 영락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거짓 주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 청빈과 자기희생의 정신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로 선포되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유럽 첫 선교지 빌립보는 로마황제의 직할 식민지로서 로마황제의 주권에 충성스럽게 복종하던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황제의 주권을 무력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항주권을 만납니다. 주 예수의 이름 권세는 먼저 귀신들린 영혼을 해방시키고 그녀를 이용하여 점성술 사업을 번창하게 운영하던 기업가를 파산시킵니다. 귀신에게는 주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명령이요 무장해제입니다. 예수 이름은 마술적인 힘 이상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이런 권능을 발휘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입니다(16-18절). 예수 이름 권세에 굴복하여 한 가련한 소녀의 인생을 사냥하던 악령은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현장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소녀의 회복과 치료는 점술업자의 사업의 파산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사업가는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주 예수 이름 권세를 실감합니다. 밤중에 두 사람이 기도하고 찬송하는 도중에 그들을 결박하였던 쇠사슬이 풀어지고 감옥문터가 진동하더니 옥문이 활짝 열려 버렸습니다. 빌립보 감옥 간수는 자다가 깨어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알고 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이 달려가 제지하였습니다. 이 무서운 광경을 본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초청합니다. 로마황제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죽어버리려고 한 하급 공무원을 살려낸 것은 다른 임금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초청은 한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경험한 사람에게 가슴에 와 닿는 초청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창립 일꾼이 된 간수는 이처럼 거짓 된 주가 다스리는 세계에서 파산과 대실패를 맛본 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가장이 주 예수를 믿으면 가정 전체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의 기본 교리를 급히 설교하여 이방인들을 개종시킨 뒤 다음 선교지로 서둘러 이동하는 순회 선교사가 아니라 이방 성도들이 불순종의 삶을 버리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도록 변화시키는 일(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움; 제물을 제단에 바치는 사역)에 몰두하였습니다. 이것을 예수를 주라고 선포하는 바울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 귀신이 축출됩니다. 단기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을 당할 수 있지만 주 예수 이름 권세는 영혼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권세입니다. 주 예수를 고백하면 한 세계에 맛본 파산과 실패를 능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이름 권세를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이 시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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