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스크랩] 갈라디아서

하나님아들 2014. 3. 25. 17:57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개관

 

1. 배경 상황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를 개최하도록 한 일련의 초대교회 사건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초반부(1-7)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만 전파되고 있다. 그후 예루살렘 안에서의 박해로 인해 많은 복음 전도자들은 선교 영역을 이방 지역으로 넓혀가게 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교도의 상태에서 직접 개종했거나 혹은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후 시리아안디옥은 많은 희랍인들을 영입하게 되었다. 갑자기 불어난 이방인들의 신앙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는 급기야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년 동안 안디옥에서 주로 희랍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안디옥의 이방인 대량 유입은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신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이방인들이 초대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의 수를 압도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일년 동안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의 후원으로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1차 선교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이방인 개종자의 수는 엄청나게 불어났다(13,14).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던 일단의 유대인 신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시리아 안디옥으로 가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15:1)고 강론하게 되었다. 이것이 급속히 퍼져 나가자 바울은 회람 서신을 통해 경계의 신호를 보내게 되었다.

 

 

2. 내용

 

율법을 준수하는데 대한 논쟁으로부터 나온 두 번째 기록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야고보서가 윤리적 자유로 인한 방탕과 방종의 모습을 경고하는 유대인 신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라면 이에 반해서 갈라디아서는 윤리적 절제의 자세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이거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영적 해방의 대헌장이라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13,14)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당시의 역사적 평론의 책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패에 대한 항의였다. 율법으로 보다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 핵심적 진리가 유대인들의 율법 강조에 의해 혼미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자유로운 삶에 멍에를 씌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단호히 경고하고 있다. 이 책의 어조는 도전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불쾌감에서 오는 분노가 아닌 영적 원리로 인한 것이었다.

 

3. 야고보서와의 관계

 

야고보서와 갈라디아서는 비록 실제로는 상호 보완적이지만 처음부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독교 교리의 두 가지 양상을 예시하고 있다. 야고보서에는 그리스도의 윤리에 대한 원고한 주장과 믿음은 그 열매로 증명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는 바울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개인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즉 그는 "그가 그 창조물 중에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좋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갈라디아서는 윤리적 행동을 창출해 내는 복음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야고보 보다 윤리적인 면을 경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기독교의 이 두 가지 양상은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4. 갈라디아서 교회에 대한 이론

 

바울은 이 서신을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게"(1:2) 보내고 있다.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이곳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터키 중앙북편을 지칭하며 또 다른 곳은 터키 남부를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해석이 옳은가를 놓고 논쟁하기보다는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 때 세운 교회들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즉 갈라디아 교회는 터키의 네 도시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도시들의 이름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이다(13,14). 이 입장을 확증해 주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4:14에서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했다고 말한다. '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사자'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번역은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생긴 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희랍 신화 속에 한 전설이 있었다. 그 내용은 쓰스(제우스)와 그의 사자 헤메(헤르메스)가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쓰스와 헤메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 중 어느 가난한 부부만 그들을 환대하였고, 쓰스와 헤메는 나중에 그 행위에 대하여 크게 보답하였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루스드라 사람들은 쓰스와 헤메가 각각 바나바와 바울이 몸을 입고 재림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도 그런 것이 그들은 루스드라인들이 보는 앞에서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에 가서 바울은 "내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6:17)고 고백한다. 그는 루스드라의 독자들에게 제1차 선교 여행중 그 도시를 떠나기 전에 그에게 생겼던 일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 같다.

 

 

 

 

5. 갈라디아서의 특이성

 

갈라디아서의 서두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서신이 독특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울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사도 바울은에 있는 교회에게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내가 감사하노라",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몇 가지 차이점들을 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도된 바울은'이라는 시작말 앞에 권위에 관한 설명이 돌연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어떤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직접 온 것임을 분명히 밝히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바울은 갈1:4에서 복음을 간략히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복음의 진리와 순수성 역시 도전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바울에게는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 서신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말을 생략하고 있다. 그는 "내가 감사하노니"라는 말 대신에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1:6)를 사용하고 있다.

 

 

[연구1] 사도직의 권위와 변론(1-2)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그런데 독버섯과 같은 '유대주의'가 잠식하여 복음을 변질시키고 기독교를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 자격에 의심을 가하였으며, 바울이 전한 복음에 다른 율법적인 행위를 첨가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정당성을 예수그리스도를 기초로 변론하고 있다.

 

1. 사도 바울의 권위(1:1-10)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얻게 된 복된 소식이다. 이 메시지는 바울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런데 갈라디아로부터 온 편지는 이 복음이 위태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생략하고 바로 변론을 적어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그의 염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적들의 모습은?

 

1) 바울의 사도직과 거짓 선생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근거를 신적 권위에 두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 제자나 사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그분으로부터 직분을 임명받았다(9:1-8 고전9:1). 그는 그의 사도직이 사람의 선택이나 승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신적 임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한 것은 단지 자신의 사도직 박탈이 아니라 성도들이 떠나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지도자나 교회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1:3,6,15 2:9,21 5:4)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적들에 대한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거짓 선생들은 복음에 어떤 행위를 덧붙이려 한다. 그러나 인간 사역에 대한 시금석은 어떤 행위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성이다(8:20 딤전4; 요일4:1-6).

 

2)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많은 고난이 뒤따를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 거짓 선생들의 중상모략도 그를 좌절시킬 수 없었다. 만일 바울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면 그는 복음을 사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메시지를 전파할 때 사람들의 욕구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복음전파자 바울(1:11-24)

 

바울은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자신의 과거지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삶에서 이젠 변화된 후에 사명자로서의 삶을 증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다메섹 후에 바울은 어떤 가치관의 변화를 갖게 되었는가? 그리고 바울이 변화 후에 아라비아로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 바울의 변화

바울은 처음에 유대주의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수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메섹 변화 후에는 그들에게 말씀을 수여하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이 체험은 바울의 신앙과 삶에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신관, 성서관, 구원관 및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가르침에 의한 각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돌변이었다. 이런 변화를 체험한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그 목적은 야만인을 전도하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정립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2) 영적 교제의 필요성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바울로 하여금 이전의 삶과 가치관을 포기하거나 변경하게 만들었다. 율법주의의 우월성과 모세의 모든 유전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도 그분 앞에서 나의 우월주의적 가치관을 버리고 있는가? 이런 포기가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의 참된 영적 교제를 통한 그분의 뜻을 바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신칭의(2)

 

본 장에서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는 계속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전한 이신칭의 복음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인정하였음을 증거로 제시한다(2:1-10). 그리고 유대주의의 수장격인 베드로를 책망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증거한다(2:11-14).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예로 들은 이유는? 그리고 베드로에 대한 책망의 의미는? 이런 증거 후에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요약하고 있는가?

 

1) 복음의 변호

예루살렘은 원래 율법주의를 기초로 했던 유대교의 총 본산지였다. 그런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이신칭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이신칭의가 참된 복음임을 강력히 증거하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야고보, 베드로, 요한 이들 세 명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성을 증거한다. 그리고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2:11-14). 그 때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 사도가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왜냐하면 이방 기독 신자들과 이미 함께 먹고 있던 베드로가 갑자기 그들로부터 물러나서 그 자신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할례당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2:12).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가 율법적 행위에 실패한 것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에(10:34-48) 비추어 이신칭의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율법에 의한 의는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게 된다(10:3).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일치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참된 의에 이르는 길은 자신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칭의는 오로지 믿음에 의한 것으로 세례나 어떤 특정한 방법이나 어떤 종파적·사회적 조건을 부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2)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다"(고후5:17).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이 단지 역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와 연합함으로 그 안에 그의 백성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이전의 악하고 추한 모습은 깨끗하게 씻음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났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는 가능한 유순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 진리가 위험해지면 우리는 그 복음의 정당성을 강하게 변증해야 한다. 현대교회 안에도 말 많은 소수의 단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이 진리를 반대할 때 그들을 반격하는 일을 망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연구2]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론(3-4)

사도 바울은 복음을 본격적으로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인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아니라 못박히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선언이다. 이런 예수의 대속적 은혜는 언제까지나 생생하고도 정당하게 적응되는 것이다.

 

1. 율법과 그리스도(3)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세 가지 요소로 복음을 변호한다. 첫째는 갈라디아 교회의 경험과 구약성경의 경우들을 증거로 믿음으로만 외롭게 됨을 설명한다(3:1-14). 둘째는 율법과 언약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3:15-22), 셋째는 율법의 기승을 설명하면서 믿음과 연관시켜 변호한다(3:23-29). 그러면 갈라디아와 같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무엇이며, 율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가?

 

1) 믿음인가? 행위인가?

유대주의 거짓 선생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3:3)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자손임을 역설하고 있다(3:6-9). 그래서 바울은 창12:3(22:17 3:28)의 인용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는 육체의 계통이 아닌 영적인 후사임을 말하고 있다(3:7,9). 특히 창22:17'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그의 자손들이 넘쳐나리라는 약속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3:16). 그리고 이 약속의 땅의 축복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기업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준행 불능성을 통해 복음이 더욱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율법은 몽학 선생으로 우리의 행위들을 지적해 줌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든다.

 

2) 자유하는 신앙

우리는 '율법 아래''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만일 우리가 율법 아래로 돌아가려 한다면 우리의 삶은 율법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몽학 선생의 정죄와 훈계를 받고 있는 한 자유하는 신앙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루빨리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2. 종과 자녀(4:1-11)

 

이제 바울은 앞 장의 설명을 토대로 하여 율법에 거하는 모습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된 우리의 신분은 어떠하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인가?

 

1) 변화된 신분

바울은 율법을 초등 학문으로도 묘사하고 있다. 초등 학문은 stoiceia(스토이케이아), '원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초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래 거하는 사람들은 유년 또는 미성숙한 상속자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 맡겨져 있으며, 그들의 상속자가 인격과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이들은 사실상 주인의 신분이지만 자유가 없다. 그들은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4:2) 이 굴레에 묶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인하여 성숙된 아들의 신분을 갖게 하셨다.

 

2) 하나님의 자녀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갖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더욱이 그의 죽음은 속량뿐만 아니라 입양의 효력도 있다. 그리고 자녀된 증거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셨다(8:15,16 4:6).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다시 미성숙한 상태, 즉 율법 아래 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신분(4:12-31)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를 대조하면서 언약의 자녀들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어떤 지식의 변론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애정과 열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풍유를 통해 바울이 말하는 언약의 백성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 백성이 당하는 핍박과 축복은 무엇인가?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 언약의 자녀와 목회자 바울

4:22부터 시작하는 풍유에는 영적인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두 여인은 두 계약으로 율법에 근거한 모세의 계약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인 것이다. 이들은 원래 상반된 관계가 아니며 모세의 계약인 율법은 새 언약의 복음을 안내하는 인도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의 의지와 공로대로 뜻을 성취하려 하던 하갈과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에 매여 더 발전적인 새 언약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약 백성은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같이 새 언약을 받아들임으로 되어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약속의 자녀들은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핍박과 조롱을 받았듯이 세상의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망 가운데 거하는 이들은 멀지 않아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모든 영광 가운데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2) 목회자의 신분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목회자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다스리면서 군림하는 왕의 신분이 아니다. 우리 교인들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의 관계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 이라고 부른다(4:12,28,31 6:1,18). 또한 그들을 '나의 자녀들' 이라고 칭하고 있다(4:19).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구성원 사이에 가족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는 복음에 합당한 말씀을 전할 때에만 그 권위, 즉 하나님의 전권 대사의 권위를 갖음을 늘 인식해야 한다.

 

구약의 약속의 진정한 성취는 영적인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마엘의 종교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없이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 위해 구축된 종교이다. 그러나 이삭의 종교는 은혜의 신앙이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연구3] 복음과 윤리(5-6)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주체됨을 고백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자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자유는 무책임한 방종과는 구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종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자유이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5:1-15)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절제 없는 행동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 수고하던 율법 준수의 굴레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율법의 노예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면 율법의 노예로부터의 자유는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그리고 이 율법을 어떻게 정죄하는가? 그리고 율법을 대신하는 진정한 구원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 사랑의 믿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은 율법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즉 율법을 준행하므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투쟁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3:13). 그리고 할례나 어떤 율법적 행위를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잃는 것이며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이다(2:26-29 2:11).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누리게 될 삶 역시 어떤 일을 추구하고 완성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5:6). 다만 믿음을 좇아 그것을 기다릴 뿐이다. 마지막 하늘에서의 영화도 맨처음 칭의와 같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사이다.

 

2) 종으로서의 자유

바울의 '자유'의 선포는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법적이고 감정적인 행위가 득세하는 현실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서두에서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용서와 화해하는 자녀 됨의 변화에서 느끼게 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육체의 탐닉을 위한 자유가 아니며, 이웃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며 율법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이웃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자유이다.

 

2. 성령을 좇는 삶(5:16-26)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믿는 성도들도 자유를 남용하는 것을 절제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간에 갈등을 유발시키게 된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실제로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 그리스도인의 승리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성령을 따라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2:20 5:24 6:6). 이것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겨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고집과 자의적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즉 회개를 통해 옛 삶을 전적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좇아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는 삶이다. 이런 삶의 결실을 바울은 9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즉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고, 충성, 온유, 절제는 개인의 신실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개별적이지 않고 연합적이다.

 

2) 영성 훈련

우리는 매일 아침 성령을 좇아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하루를 마치는 저녁에 실패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성령은 "영적인 일에 전념하라.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한다(8:6 4:8 3:1,2). 이것은 우리의 전 영역-가족, 직장, 친구,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하루의 순간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 성경의 묵상, 사랑의 실천, 교제와 예배라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성령께 복종시키는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3. 그리스도인의 윤리(6:1-18)

 

갈라디아서 6장은 믿는 자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그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삶 가운데 하나가 믿는 자들 상호간의 관계이다. 특히 성령의 열매를 종합하는 사랑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13:34 15:12). 그러면 이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러면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가? 특히 믿는 자들의 관계 소에서 목회자와 교인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1) 상호 관계의 중요성

6:2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편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홀로 지고 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은 그짐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자신이 성숙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인 삶이 아니라 금욕적인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짐진 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55:22 11:28). 이처럼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시는 방법가운데 하나는 인간적 유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후7:56).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6:10). 특히 이런 관계성은 목회자와 교인들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목회자와 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세워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여 성도를 양육하고 성도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여야 한다.

 

2) 심는 자의 삶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심는 것과 거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회중들의 마음에 심어야 하며, 성도들은 선한 생각과 행동을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의 생애 속에 심어야 한다. 이들이 심은 씨앗은 비록 토양은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분쟁과 시기로 공동체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종의 자세로 사랑을 비롯한 성령의 열매 맺는 삶으로 공동체 구성원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나의 변화된 모습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랑하는 자세가 아닌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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