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스크랩] 빌립보서 연구

하나님아들 2014. 3. 25. 17:56

 

 

 

 

빌립보서 연구

 

빌립보서 개관

 

1. 빌립보 교회

 

16:12-40에 의하면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다. 빌립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왕이 그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다. 주전 42년 이후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데살로니가와 함께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아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고 따라서 바울의 선교에 대한 유대인의 방해도 없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빌립보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처음으로 빌립보에서 전도하여 믿게 된 사람은 두아디라 성 출신 자주 장사인 루디아라는 여성과 그의 가족이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이 "나와 함께 힘 쓰던 저 부녀들"(4:3)이라고 부른 바울의 여성 동역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빌립보에서의 첫 번째 바울의 체재 기간은 그리 길지 못하였으며, 그가 전도한 사람은 루디아의 가족 외에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빌립보서에는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클레멘트와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타난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계속하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빌립보 교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물질적으로 바울의 선교 활동을 도왔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가이사랴에 억류되었다가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 빌립보 교회를 두 번 내지 세 번 더 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바울이 세운 교회 중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었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으며, 그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는 뜨거운 애정을 나타내기까지 하였다.

 

2. 저작 연대와 장소

 

일반적으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본 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린다. 빌립보서가 감옥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어떤 감옥인지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바울은 빌립보(16:23), 예루살렘(21:33), 가이사랴(23:25), 로마(28:16)의 감옥에 투옥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빌립보와 예루살렘 감옥에서는 불과 하루내지 이틀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기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편 고후6:5, 11:23,24에 근거하여 바울이 에베소에도 감금되었으며 여기서 한두 편의 서신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적으로 빌립보서의 저작 장소에 관하여 로마 기록설, 가이사랴 기록설, 에베소 기록설로 견해가 나누어진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의 전통적 입장은 로마 기록설을 따르고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했다고 간주한다면 그 시기는 대략 주후 61년경이 된다.

 

3. 저작 경위와 목적

 

바울과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던 빌립보 교회는 옥중에서 고통당하는 바울을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 금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를 대표로 보냈다(2:25 4:14,18). 그러나 오히려 바울을 시중들려고 온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위하여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 보내게 되었다.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 준 사랑과 후의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편지 가운데 바울은 그 동안 빌립보 교회로부터 들려온 문제들에 대하여 권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두 여인의 다툼으로 야기된 분란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를 이룰 것을 부탁한 것이며, 또한 빌립보 교인들을 미혹하는 행악자들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에 대한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본 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신과 기쁨으로 인하여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사랑과 감사를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고 싶어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서 자기 대신에 가장 신뢰하는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위하여 영적 사역을 감당케 하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4. 기록 장소

 

빌립보서는 바울서신 중에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일반적으로 옥중서신이라 불리워진다. 바울은 본 서신이 기록될 당시 투옥되어 있었으나 그 장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본 서신이 기록된 장소에 대해서는 네 가지의 견해가 있다.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전통적인 입장

가이사랴에서 기록되었다는 견해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는 설

혼합된 가설로서 네 서신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 즉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에베소서는 가이사랴에서 기록되었으나 빌립보서는 로마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 서신은 에베소에서 쓰여지고 빌립보서는 로마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네 서신(옥중서신) 전체가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 이유는 로마와 빌립보간의 거리는 에베소와 빌립보간의 거리보다 더 먼 것이었다. 그리고 빌1:13에서 '시위대', 즉 로마의 황제에게 할당된 로마 군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심문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으로 보아 그는 로마에서 가이사에게 심문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0).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금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곳에서는 그 사건의 최종적인 판결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전15:2에 근거하여 에베소를 기록 장소로 제안하기도 하나 그 구절에서 투옥되었다는 분명한 언급이 없다.

 

5. 본 서의 특징

 

바울의 개인적 신앙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본 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서신 전체에서 '기뻐하다'는 동사를 9, '기쁨'이라는 명사를 5번 사용하고 있으며, 4장에서만 '기뻐하다'는 말을 6번 쓰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서 넘쳐나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재차 반복하여 권면한다. 3:12-16에서 바울은 그의 신앙 자세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푯대로 하여 위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하여 전심으로 달려가는 그의 간절한 소망과 열정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삶의 경험을 통하여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만족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깨달았다. 즉 비천함을 당할 때나 풍부함을 누릴 때나 외적 환경에 좌우됨이 없이 그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체험을 얻었던 것이다. 본 서신은 바울의 개인적 간증을 통한 권면이라는 뚜렷한 특성을 띠고 있다.

 

[연구1] 그리스도의 생명(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이 감옥에 매여 있음으로 해서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상황에 대한 설명과 격려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음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 성도의 교재(1:1-11)

이 서신의 서두는 전형적인 바울서신의 서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수신자와 발신자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또 감사와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디모데를 발신자에게 포함한 이유는 무엇인가? '감독'이란 의미는 카톨릭과 감리교에서 말하는 감독의 의미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의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간구는 무엇인가? 여기에 나타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1) 바울의 감사와 간구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부터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에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와 오랜 교제를 가져온 디모데에 대한 언급은 빌립보 교회가 이 편지를 읽을 때 더 친근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공동 발신임에도 불구하고 '내가'라는 일인칭 주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바울 홀로 쓴 것이다. 단지 디모데는 소식을 전한 사자에 불과하다. 종이란 노예를 의미한다. 즉 철저히 그리스도에 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충성의 표현이다. 감독이란 의미는 오늘날 가톨릭과 감리교에서 말하는 감독의 의미와는 다르다. 만약 교회 직계가 발전되어 생긴 '감독'의 의미라고 본다면 이 편지는 몇몇 학자의 주장대로 바울이 쓴 편지가 아니라 후대에 바울의 이름을 빌어 쓴 위조 편지이다. 이 편지가 바울이 쓴 편지임에 틀림없을진대, 그 때는 아직 교회의 제도가 발달되지 못하였으므로 감독이라는 직분은 집사와는 구별되나 목사, 장로의 역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울의 감사와 간구를 보면 선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바울은 감사와 간구를 보면 선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바울은 목자가 양을 품듯이 간구하여 감사하며(1:3,4,8) 복음으로 인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1:7), 빌립보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장하기를 간구하고 있다.

 

2) 바울의 서신 내용

그리스도인의 서신 왕래는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특히 어렵고 힘든 떄일수록 그 의미는 크다. 비록 현대 사회가 편지 외에 의사를 전할 수 있는 매개물이 많다 하더라도 편지는 아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바울의 서신이 서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감사하는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겠다.

 

2. 오직 복음을 위하여(1:12-26)

비록 바울이 확신에 차 기쁨으로 이 편지를 썼다 하더라도 그는 옥에 갇힌 자이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은 복음의 사역과 바울의 신변에 대해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어떠한가?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변증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 바울은 진정 무엇으로 기뻐하는가?

 

1) 복음의 진보

이 모든 상황의 목적을 '복음의 진보'로 보고 있다. 사실 빌립보 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다 죄수의 몸이 된 바울의 형편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고 또 자신들도 같은 형편에 처할까 두려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시위대, 즉 간수들과 병정들 더 나아가서 법정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것으로 만족해 하고 있으며, 또한 로마의 성도들은 성도대로 고난을 받으나 꿋꿋한 바울의 모습에 큰 용기를 얻어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1:14). 또 다른 차원의 복음의 진보로 첫째, 착한 뜻으로 전파하는 이들로 순수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투기와 분쟁으로 전파하는 이들로 핸드릭슨(W.Hendriksen)은 명예, 존경의 높은 지위를 탐하는 그리스도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바울은 복음의 진보만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은 구원을 얻게 된다(1:25). 이를 통해 양무리들이 지도자를 위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이 감옥에서 갇힌 바 되어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위 3가지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자신은 죽든지 살든지 간에 다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을 알았으나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염려하였다. 빨리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으나 한편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아직 영적으로 미약하였기 때문에 살아 있어야 할 당위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2) 양 떼를 위한 기도

바울의 믿음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지만 믿음 가운데 꿋꿋하였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어려움도 이겨내지 못하고 짜증을 낸다. 더욱이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바울은 목자로서의 예정을 양 떼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양 떼들이 기도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3. 빌립보 교인들을 격려(1:27-30)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는 무슨 의미인가?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한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1:28의 대적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같은 싸움'은 무엇인가?

 

1) 함께하라

'생활하라'의 의미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로마의 시민으로서 또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또 바울은 공동의 적을 대항하여 복음을 위하여 함께 싸울 것을 독려하고 있다(1:27). 대적자들이란 빌립보의 경우 유대인들이 드물었으므로 유대인들의 대적자가 아닐 수도 있고 오히려 로마 정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유대인, 이방인 등 모든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2). '같은 싸움'이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과 핍박으로 빌립보 교인들도 이미 같은 종류의 고난을 받고 있었으므로 바울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2) 복음으로 인한 고난

그리스도 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아도 참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빌고 감옥에 매여 있는 자였지만 그의 삶 전체는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오직 복음의 진보만을 생각하는 바울은 자신의 대적자들조차도 복음의 진보에 도움이 된다면 오히려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연구2] 성도의 생활태도(2)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하여 명령하고 있다. 복음 안에서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겸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나 영광을 얻으셨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을 적고 있다.

 

1. 한마음 한사랑으로(2:1-5)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하나될 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어떤 근거에서 하나될 것을 권면하는가? 어떠한 때 바울의 기쁨은 충만한가? 무엇이 하나됨을 막고 방해하는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하는가?

 

1) 하나되기 위한 근거

하나되기 위한 근거는 첫째, 2:1에 나온대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은 필수이며 권면이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는 사랑에 바탕을 둔 위로이며, 셋째는 성령에 바탕을 둔 교제 그리고 넷째로는 긍휼과 자비가 하나되기 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위의 네 가지를 바탕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빌2:1-4의 모든 동사 형태는 빌2:4"기쁨을 충만케 하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의 4가지 조건의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가 되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교회가 하나될 때 바울의 기쁨이 충만케 된다. 그리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방해거리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툼과 허영이다. 이 뜻을 영어성경에서는 이기적인 야심과 헛된 자연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의 방해거리이다. 하나됨을 도와주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하나되며 이러할 때 바울의 기쁨은 충만하여진다.

 

2)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13). 사도 요한도 임종하기 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렇게 서로 하나되어 사랑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그만큼 제자들 사이에 하나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사랑으로 하나되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바울의 명령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명령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누구신가?(2:6-11)

 

바울은 낮아짐의 모범을 그리스도로 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겸손하신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독론을 담고 있다. 어떤 기독론을 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어떤 형태로 이 기독론에서 나타나는가? 그리스도의 지위는 어떠한가? 이 기독론의 문장 구성은 어떠한가?

 

1)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모두 이 기독론에 나타난다. 신성에 대해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즉 그리스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리스도는 스스로 겸비하여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겸비와 영광을 동시에 갖추셨다. 그의 겸비함은 '종의 형체'(2:7)에서 나타나며, 그의 가장 겸비함은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의 명령은 먼저 하나님이 그를 높인다(2:9). 그리고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피로 물들은 무릎을 꿇게 되고(2:10), 모든 입들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2:11). 이 기독론의 목적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이 기독론적인 시를 썼다기보다는 이미 당시에 전해 내려오는 성례전에서 사용된 찬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울에 의해 손질이 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2) 바울의 기독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은 기독론을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런 겸비함이 각 교회와 각 교인들에에 필요할 것이다. 이러할 때 그리스도가 미천함으로 얻었던 영광을 우리 교회와 교인도 얻을 것이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기독론은 교회가 점점 양적으로 성장하고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외형과 교인수에 집착하는 오늘날 한국의 우리들을 위함일 것이다.

 

3. 바울의 기쁨(2:12-30)

 

바울은 또다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권면은 무엇인가? 여기에도 어떤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계속해서 기쁨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디모데에게 향한 바울의 뜻은 무엇이며,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자인가?

 

1) 주 안에서의 기쁨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온전히 구원에 이르도록 명하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행함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중생 후에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2:15). 성화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될 것이다. 즉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중생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 또한 바울은 주 안에서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빌2:17에서는 비록 순교한다 하더라도 기뻐하겠다는 바울의 기쁨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함께한 동역자로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연결해 주며 믿음의 본을 보여 주는 참다운 바울의 동역자요 아들이다(딤전1:2). 에바브로디도 또한 바울과 고난을 함께한 자였다.

 

2) 복음에 동참

한 번 믿으면 구원이 저절로 주어진다는 것은 착각이다. 믿는 자에게는 성결의 삶이 뒤따르고 또 뒤따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 또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아 오늘날 우리도 복음에 동참해야 하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의 겸비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고 그의 영광은 우리가 받을 상급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는 하나되어야 하고 삶을 통해 서로에게 모범을 보이고 분사해야 한다. 바울의 이 편지는 교회가 서로 하나되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결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바울의 명령이 담긴 것이다.

 

 

[연구3] 이단들에 대한 경고(3)

눈물로써 세운 빌립보 교회에 복음의 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적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혀 있지는 않으나 바울은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유대교화하려는 율법주의자들과, 스스로 교만하여 반역에 이르는 자들이었고 자기 욕심에 배를 채우려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과 잘못된 가르침에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반박하며 빌립보 교회의 온전함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

 

1. 바울의 믿음(3:1-11)

 

바울은 서신을 끝맺으려 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을 유대교화하려는 자들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바울의 반복적인 가르침은 왜 중요한가? 죄악을 행하는 자들, 손할례당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바울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 자랑거리를 바울은 어떻게 여기며 바울의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우선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며 격려하고 있다. 이 격려는 고난받는 교회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바울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로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을 유태교로 개종시키려는 유대인들을 ',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 이라며 3번씩이나 반복 강조하여 역으로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비하면 배설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면 먼저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을 버려야 하며,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고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2) 복음만 전파하라

바울이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잇는 것은 바로 기독교의 유대교화에 대한 경고이다. 현대에는 이런 위험이 사실상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종족, 문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유대인 이상으로 교만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근대 유럽의 선교사들은 복음보다는 서구 만화를 제3세계에 전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또 우리도 개발이 덜 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일부 민족들에게는 민족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 이런 민족우월주의, 개인 우월주의를 버리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2. 푯대를 향하여(3:12-16)

 

이 부분은 빌립보 교회의 또 다른 문제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유대교화하려는 자들 외에 또 다른 종류의 빌립보 교회 내의 적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변증을 바울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완전주의자인가? 그리고 바울의 푯대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를 좇아라

그닐카(J.Gnika)에 따르면 빌립보 교회 내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며 도덕적으로 방종한 무리들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 자신은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고 온전히 이루지도 않았다고 역으로 반박한다. 2:12의 바울의 논증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다메색 도상에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 이것을 염두에 둔 바울은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좇아간다. 이는 결코 조급함과 불안의 표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완전을 향해 나가 완전을 이룬 자는 아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2:15)을 바울은 조롱의 의미로 불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 내의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더 과격하게 책망하지 않는다(2:16). 왜냐하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칫 방종으로 빠지기 쉬우므로 또 바울이 가르친 대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의 푯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위해 계속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2) 성결의 삶

간혹 교회 내에 스스로 '믿음의 도'에 이른 것처럼 행동하며 다른 이들의 믿음을 경히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 완전에 이른다는 사상이 얼마나 위험스러운가를 알고 있다. 성결을 주장한 웨슬리도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의미하였지 인간 의지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하지 않았다. 또 그 완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라고 설교하고 있다.

 

3. 우리의 시민권(3:17-2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몇 가지를 더 당부하고 있다. 본받으려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십자가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바울은 왜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하늘에 있는 시민권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지금과 같은 기독교인의 윤리적 규범이 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의 삼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즉 그들은 도덕률 페기론자들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매우 대조적인 삶과 가치 속에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심판받아 멸망에 이를 자들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 땅의 쾌락이 아니라 저 하늘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임을 명심하자.

 

2) 소망이 하늘에 있음

세상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참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이후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혼란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가가 하늘이 시민권이요, 하늘의 영광이라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다.

 

 

[연구4] 바울의 마지막 권면(4)

본 장은 바울이 빌립보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바울의 개인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권면을 담고 있고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온 물질적 도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의 목자적인 사랑을 읽어 내려갈 수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오히러 빌립보 교회들을 품으며 애정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바울의 동역자(4:1-3)

 

빌립보에 보낸 바울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이 부분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메시지와 위로 그리고 격려가 담겨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바울의 특별한 부탁은 무엇인가? 복음의 동역자들을 돕는 것이 왜 중요한가?

 

1) 복음의 동역자

'그러므로'라는 의미는 앞장의 복음의 대적자들(유대주의자와 완전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계를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는 그는 빌립보 교인에 대한 애정을 사랑, 사모, 기쁨, 면류관, 사랑 이들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함께 주안에서 서라고 당부하고 있다. 즉 우리의 의지할바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클레멘트에 대하여 신약에 언급된 것으로 알 수 있다. 클레멘트라는 이름은 당시에 매우 흔한 이름이며, 초대 로마 교부와 빌립보에서 언급한 클레멘트는 다른 인물일 것이다. 바울은 이들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특별히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순두게와 유오디아는 여성이다. 복음을 위하여 힘 쓴 그들을 바울은 부탁하고 있다. 그들의 상급은 생명체에 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생명책에 그 이름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하나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이름이 적혀 있음이 분명하다.

 

2) 여성의 역할

순두게와 유오디아는 여성이다. 그들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형편을 살펴볼 때 교회 내의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지도자는 목사님이시지만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여집사, 여전도사님들이 없다면 목회가 불가능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내게 배우라(4:4-9)

 

바울은 새 삶의 실제적인 부분에 대하여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의 모습을 다른 이에게 나타내야 하는가?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을 본받는 삶

빌립보서에는 계속해서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갇힌 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잇는 그들에게 바울은 역설적으로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간구하고 있다. 모든 걸 주께 맡기고 기도할 때, 주께서 채워주시고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지켜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선한 것을 생각하고 추구해야 한다(2:8). 그리고 이러한 삶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 주셨고 그 예수님을 본받아 사도들이 행하였다. 그 사도 중에 한 사람인 바울도 보여 주었다. 4:9의 바울의 명령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연상케 한다(28:20). 비록 쓰인 어휘는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바울은 자신이 몸소 실천하여 또다시 자신의 충성된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딤후2:2)

 

2)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

우리 삶의 중심은 항상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며 간구할 수 있다. 또 무엇이든지 선한 것을 추구할 수 있고 평강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가르친 것을 사도들이 행하고 가르쳤고, 그 수의 제자들은 또 행하고 가르쳐 오늘에 이르게까지 하였다.

 

3. 바울의 자족(4:10-23)

 

이 부분은 빌리보서의 종결 부분이다. 그런데 또다시 바울은 기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감옥 안에서 바울의 경제적인 형편은 어떠하였으며, 바울은 어떻게 물질적인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는가?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어떠한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어떻게 돕는가? 또 바울은 어떻게 복을 비는가?

 

1) 물질로 바울을 협력

본문에서는 바울의 목자적인 모습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그가 물질을 받은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보내어 바울을 돕고자 한 빌립보 교인들의 생각이 다시 싹이 남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바울은 언제나 양 떼들 편에서 보았다. 그리고 양 떼들이 자신을 걱정해 준것에 대하여 목자로서 기쁨을 누린 것이다. 바울은 결코 외적인 물질적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능력의 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4:10-13).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시초부터 항상 함께한 교회였다. 늘 물질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도운 충성스런 교회였다(4:10). 바울은 물질적인 도움보다 도움을 준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인 풍성함에 더 만족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목자로서 축복을 잊지 않는다(4:19).

 

2) 복음전도자를 물질로 협력

물질로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에서 목사가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해 준다면 성도들은 목회자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구약의 레위 지파와 12지파의 관계의 연장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드리는 물질은 '월급'이 아니라 향기로운 제물에 해당된다.

 

분명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빌립보 교회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빌립보 교인들을 격려하였고 순두게와 유오디아를 천거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 가르쳤고 물질적인 자족을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빌립보 교인들을 축복하였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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