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1. 교회개혁의 이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곳의 대학교회의 문 앞에 95개항의 논제(Die 95 Thesen)를 내건 사건은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열 계획이었지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인 변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95개항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가 아니라 식자들만이 알 수 있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10월 31일, 그 날을 하나의 분명한 시발점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교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헤겔은 그의 책 「역사철학강의」에서 종교개혁을 "중세기 끝에 여명을 띄우고 솟아나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어두운 중세를 퇴각시키고 근세의 새벽을 밝히는 시대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표현으로 교회개혁운동을 정신사적으로 정리해준다. 사실 루터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의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15세기의 후스(John Hus, 1373-1415)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했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415년 화형을 당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후스가 마지막으로 한 말 "그대들이 지금은 작은 새를 불사르지만 이제 100년 후에는 큰 황새가 날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는 예언적인 선언이 있은 지 꼭 102년 만에 루터는 유럽의 역사 한 가운데로 인도되었다.
루터 자신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거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10월 31일의 95개조 사건은 루터 자신도 예견하지 못했던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 변혁을 가져오고 말았다. 개혁의 때는 성숙되었으므로 교회개혁은 역사의 필연적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물줄기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도덕적 부패와 타락, 국가주의(Nationalism)의 대두, 인문주의의 발흥, 그리고 중세교회의 이론적 뒷받침이었던 스콜라 철학의 붕괴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교회개혁은 이루어져야만 했고 루터는 이 개혁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루터는 교회를 새롭게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종들었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랑케(Ranke)는 그의 「교회개혁의 역사」에서 루터의 출연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으므로 "그의 마땅히 이 세상에 오지 아니하면 안되었다."(Luther musste kommen)라고 했다. 결국 루터의 95개조를 통한 파문은 불과 한 달이 못되어 민중의 묵시적 동의를 얻으면서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티르나겔(T.S.Tiernagel)의「교회개혁시대」(The Reformation Era)에 의하면 16세기 당시 독일의 신분계층은 귀족이 10%, 성직자가 5% 그리고 민중이라 할 농민, 노동자 등 피지배층이 85%였다고 한다. 후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85%이상을 차지하는 민중들은 역사의 변혁을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교회개혁의 일조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개혁운동은 기독교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일대 변혁적 사건이 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고 불리는 마이네케(F. Meinecke)는 서구 역사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정신적 혁명으로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역사주의(Historismus)와 교회개혁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교회개혁을 '더 레포매이션'(The Reformation)이라고 말한다.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은 보통명사이며 추상명사이지만 그 앞에 정관사(the)를 붙여 쓰면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은 개혁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교회개혁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이나 종교생활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서구의 역사와 문명 전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오해가 있어 왔다.
첫 번째 오해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이다.
우리는 16세기 개혁운동을 흔히 '종교개혁'(宗敎改革)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제도와 신학에 대한 개혁운동이었으므로 사실은 교회개혁(敎會改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영어의 'The Reformation'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하였으며, 우리는 일본을 통해 서양사학을 배웠으므로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인물은 호주선교사였던 왕길지(Gelson Engel, 王吉志)였는데 그는 종교개혁사를 '교회갱생사'(敎會更生史)라고 불렀다. 이런 점들은 고려해 볼 때 '교회개혁'이라는 표현이 '종교개혁'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해는 개혁을 단순히 교리적인 개혁운동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사실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은 교리적인 개혁(Reform)만이 아니라 영적 부흥운동(Revival) 혹은 영적 쇄신 운동의 성격이 있다. 교회개혁운동이 상당한 박해 속에서도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적 삶에 동력을 주는 영적 부흥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개혁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은 당시 교회의 교리적 탈선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개혁이 영적 쇄신운동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념화 혹은 이데올로기화되기 쉽고, 반대로 영적부흥운동이 건전한 교리적 기초를 지니지 못하면 신비주의적 혹은 주관주의적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16세기 개혁은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오해는 개신교회는 16세기에 천주교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모교회(Mother Church)라고 생각하고, 신교는 분열된 교회라고 보고 있다. 이런 인식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트 신학, 혹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겨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개혁운동은 원시교회의 신앙전통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지, 교회전통과 단절된 어떤 새로운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복음주의 신학을 새로운 신학(New Theology)이라 하고 개신교회를 새로운 교회(New Church)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적 기독교와의 관련성, 곧 역사적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새로운' 어떤 것이라고 지목했던 것은 프로테스탄트운동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현실성만 부각시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단의 특징은 역사성은 없고 현실성만 있다.
말하자면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운동은 사도적 기독교와 관련성 없는 이단운동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개신교의 복음주의 신학 혹은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창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이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단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의 교권 체제하에서 가려져 있었을 따름이다. 중세 교권체제 하에서도 면면히 이어온 복음주의 신앙은 16세기에 와서 다시 부흥한 것이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성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비가 많이 오면 물은 지표면으로 흐르지만 가뭄이 심하면 물이 땅속으로 흐르는 것처럼, 가톨릭교회의 조직적인 탄압 하에서도 개혁신앙은 미미하나마 유지, 계승, 발전되어 오다가 16세기에 다시 부흥한 것이다.
교회개혁에 대한 네 번째 오해는 개혁을 오직 16세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다.
즉 교회개혁은 오늘의 현실과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개혁은 과거적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의미를 주는 계승된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개혁자들 특히 베자(Theodore Beza)는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지만 사람들로 구성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고, 항상 부패,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부단한 자기개혁을 시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정신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이 시작된 지 4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교회개혁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교회개혁의 의의
그러면 교회개혁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보여준 의미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교회개혁이란 원시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개혁이란 그리스도 교회의 본래적인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떠나 이탈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떠나 본래적 기독교 혹은 사도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성례적적인 제도(Sacramental system)와 공적(功績)사상 등 교회적 율법주의(Ecclesiastical legalism)와 비복음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근본의 기독교 혹은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개혁에서 어거스틴의 은총의 신학과 함께 사도 바울의 이신득의(以信得義)교리의 부흥을 보게 된다.
교리적(신학적) 개혁(Reform)으로서의 교회개혁
종교개혁의 의의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개혁의 첫째 구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개혁자들은 로마교황의 권위나 모든 세속적 전총에 항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웠다. 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부패의 근본적 원인을 성경에 대한 무지로 보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조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선시될 때 교회개혁은 불가능하게 되며 성경의 절대권위는 종속적 권위로 전락하고 만다.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개혁의 토대이자 출발점이었다. 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는 '오직 성경'의 원리와 오랫동안 교회에 만연되어 왔던 문자적(文字的), 혹은 여자적(如字的, Literal) 해석이나 우의적(寓意的), 혹은 풍유적(Allegorical)해석 그리고 경건주의적(신비주의적) 해석의 약점을 극복하고 역사적-문법적-신학적 성경해석 원리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는 주장이다.
16세기 개혁이 가져온 또 하나의 커다란 신학적 성취는 구원관에 있어서 복음주의적 체계이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 혹은 행위(works)나 공로(merits)에 의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였다. 신앙의인(信仰義認)의 교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은총을 통해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인(義認)교리는 개혁운동의 근간이다. 이 신학은 교회 내에 오랫동안 있어 왔던 소위 '신인협동설'(神人協同設)을 극복하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였다. '오직 믿음'과 함께 '오직 은혜'(Sola Gratia)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며 양자는 다 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알미니안들의 주장처럼 받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교회개혁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성취는 '만인 사제직'(Universal priesthood of believers)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한 중세적 교권체제에 대한 거부이며 가톨릭의 사제주의(Sacerdotalism)를 개혁한 것이다. 교회개혁의 큰 의의는, 신부(성직자)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신자(평신도)의 영혼을 책임지고 신자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사제주의(司祭主義)의 그릇된 가르침을 극복한 것이다. 칼빈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가톨릭의 사제주의를 개혁하고 모든 사람은-그가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지나치게 구분하고 성직자를 평신도보다 우월한 특권층으로 보려는 사고는 로마 가톨릭적이다.
로마 가톨릭은 7성례를 동반한 사제주의로 교권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개혁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사랑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마리아도, 성자도, 교황(신부)도 중보자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만인사제직의 발견이다.
영적 부흥운동(Revival)으로서의 개혁
교회개혁은 은혜의 교리를 재발견하고 사도적 교회로의 회복을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진 오랜 역사의 침체에서 벗어나 영적 부흥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캠브릿지 대학의 피터 뉴만 브룩스(Peter Newman Brooks)교수는 "교회개혁의 본질적으로 목회적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즉 개혁활동은 의식과 제도의 강보에 쌓여 냉랭한 스콜라주의적 이성으로 오도된 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당시의 백성들에게 영적 소생의 빛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의 저술과 성경강해, 성경주해와 설교는 다 목회적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영적 부흥에 대한 갈망이었고 이 영적 갈망은 교회개혁운동의 내적 동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철학으로 무장된 제도화된 교회와 의식적 종교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부흥을 희구했던 바 이 갈망은 개혁을 통해 구체화되어 갔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부흥 없는 개혁은 공허한 것이며, 교회적 개혁 없는 부흥은 무의미하다. 진리에 대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재검토 없이, 그리고 진리에 복종할 각오 없이는 영적 부흥은 있을 수 없다. 교회사상에 있어서 부흥운동은 항상 시대적 제약성과 한계성 그리고 보편적 원리가 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약점을 지니지만 16세기 개혁은 신약교회의 부흥운동과 가장 가까운 영적 부흥이었다.
16세기 개혁에 있어서 교리적 요소가 영적 부흥의 측면보다 더욱 분명하게 부각됐던 이유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의식이 성경에서 지나치게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과 예배의식, 교회적 생활에 있어서 성경적 원리들이 재 규명, 재 진술되는 일이 보다 시급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교회개혁은 독일에서는 루터를 통해 시작되었지만 스위스에서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쯔빙글리(U. Zwingli, 1484~1531)에 의해서,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불어 사용지역에서는 칼빈(J. Calvin, 1509~1564)에 의해 추진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개혁자들에 의해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개혁운동이 주류(主流)이며 정통이라고 한다면, 재세례파(Anabaptists), 신령파(Spiritualists), 복음주의적 합리론자(Evangelical Rationalists)들은 비주류 혹은 잠류(潛流)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윌리암스(G. H. Williams)는 전자를 관료적 혹은 행정적(Magisterial) 개혁이라고 하고, 후자를 급진적(Radical)개혁이라고 명명하였다.
3.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때가 찬 경륜
1400년대를 마감하고 1500년대가 시작되는 한 시대의 변혁기에 유럽에서는 실로 엄청난 정신적 변화가 조용한 혁명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정치질서나 문화현상, 세계관뿐만 아니라 교회중심의 구조(ecclesiastical structure)는 새로운 개편을 요청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던 중세문화가 붕괴되고 서구문명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6세기에는 이전 시대와는 선명하게 구별되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이 유럽의 들판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지식을 매개로 한 것으로써 이 변화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은 콜룸부스(Columbus), 바스코 다 가마(Vasco de Gama), 그리고 코페니쿠스(Copernicus)였다.
콜롬부스는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구라파 중심의 세계질서에 충격을 주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와서 1498년 인도와 중국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관의 변화를 주기에 충분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폴란드인으로서 교회법학자이자 의사였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設)은 천동설 중심의 우주관에 매여 있던 중세의 마당에 떨어진 폭탄이었다. 천체의 움직임과 지동설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단순히 물리학자의 발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업과 무역, 도시화와 새로운 사회계급(bourgeoisie)의 대두, 그리고 사상적 혁명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가져왔다. 니콜라우스 카자누스(Nikolaus Casanus, 1401~1464)와 야콥 뵈메(Jacob Böhme)같은 학자들의 자유로운 학리(學理)이론 역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16세기 초, 유럽의 언덕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인 사건들은 후론하게 될 교회 내외의 변화의 동인들과 더불어, 소위 '중세'(the middle ages)라고 불리는 장구한 교황 중심의 질서를 서부 유럽의 서편으로 퇴각시키는 역사의 동력이 되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종교개혁은 우선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었다. '때가 차매'(갈 4:4) 그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교회개혁의 때가 충만했을 때 루터의 역사의 한복판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당시 루터는 작센지방의 작은 도시였던 비텐베르크의 무명의 교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은 겨우 2천명의 인구를 가진 한적한 지방 도시로서 루터 자신의 표현대로 '문명세계의 끝'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루터는 교회개혁을 의도하거나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시대의 변혁을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첫 인물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터가 제기한 '95개의 항의'는 한 달이 못되어 유럽의 주요 도시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비견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점들은 교회개혁이 바로 그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개혁의 때가 성숙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개혁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의 필연이었다.
역사에 있어서 모든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고백할 때 교회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시대 시대마다 신실한 사역자들을 세우시고 일해 오신 하나님께서는 16세기에도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개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이었다.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개혁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 교회개혁의 원인에 대한 토론은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미 불크하르트(Jocob Burckhardt)가 말한 바처럼 그 어떤 설명으로도 개혁의 원인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중세교회의 부패
종교개혁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개혁을 가능케 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중세교회의 부패였다. 특히 중세 후기의 교회는 세속권력과의 야합,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크게 속화되어 있었고 성직자들의 영적, 도덕적 부패는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오도된 신학과 교리적 탈선, 불의한 제도와 이교(異敎) 의식 등 교회의 타락과 종교생활의 폐해는 심각했으므로 개혁은 불가피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주교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혁운동기의 초기 교황이었던 아드리아누스 6세(Adrianus Ⅵ, 1522~1523)는 신성 로마제국의 뉘른베르크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체스코 치에레가띠(Francesco Chieregati)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루터 이단으로 교회가 받은 어려움의 책임은 성직자들,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라고 시인하였다.
소위 '돈 만드는 천재'(financial genius)로 알려진 교황 요한 22세(John ⅩⅩⅡ, 1316~1334)는 각종의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돈을 모았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가 창안한 징세제도는 교회질서를 극도로 문란하게 했고 교황청의 사치를 가중시켰다. 교황 비오 2세(Pius Ⅱ, 1458~1464)나 이노센티우스 8세(Innocentius Ⅷ, 1484~1492) 등은 도덕적으로 방종하여 사생아까지 두어 세인의 지탄을 받았던 교황이었다. 교회개혁 직전의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6세(Alexander Ⅵ, 1492~1503)의 타락은 그 이전의 교황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된다. 그는 당시 교회의 관행과 규율을 무시하고 방종한 생을 살았던 악명 높은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몇 사람의 정부와 3남 1녀의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후에 7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 그는 1492년에 교황이 되었는데, 이때도 그는 경쟁자들을 금품으로 매수하였다. 그의 폭식, 음란은 극에 달하였고 일단 파티를 열면 녹초가 되기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으므로 역사가는 그의 ‘살인적 파티’(lethal dinner parties)를 유명한 일화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들도 ‘천재적인 난봉꾼들’(Virtuosen des verbrechens)로 알려져 있다. 플로렌스에서 교황청의 부패와 통박하고 교회개혁을 주장했던 도미니칸 수도사 사바나롤라(Savanarola)를 처형한 것도 알렉산더 6세였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콘스탄츠 교구의 경우 연간 1500명에 이르는 사제(신부)들의 사생아가 태어났다는 기록만 보아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더욱 더 가관이었던 것은 당시 교회는 사생아를 둔 성직자들에게 취첩과 아이 양육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세금(concubinagefee)을 물게 하여 성직자들의 비행을 묵과하는 동시에 부를 축적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루터가 95조개를 게재할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Leo Ⅹ, 1513~1521)는 사냥과 오락을 즐겼던 인물로서 매우 세속적인 교황이었다. 그는 교회 내에 여러 개혁의 요구, 곧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로이힐린(J. Reuchlin, 1455~1522), 훗텐(Ulrich von Hutten, 1488~1523)의 개혁 요구를 묵살하고 교황권을 남용했을 뿐만 아니라 면죄부를 발행, 판매케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발달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니콜라스 5세(Nicholas Ⅴ, 1447~1455)에서 레오 10세에 이르는 10명의 교황을 르네상스 교황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이름 그대로 르네상스시대의 영향을 받았던 자들로서 교회의 재산과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족벌체제화한 과오를 범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영적, 도덕적 지도자라기보다는 불의한 세속군주였다.
교리적 탈선
교회개혁의 원인에 대하여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교회의 부패를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다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는 교회의 신학적 혹은 교리적 탈선(doctrinal deviation)이었다. 특히 구원관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이탈하였다. 이 교리적 탈선은 교회생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예컨대 교직자들이 여러 직책을 맡고 그 수입과 성직록(聖職錄)을 독점하였던 소위 ‘겸직제도’나,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성당)에 있을 수 없으므로 겸직제도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던 ‘부재직임제도’(不在職任制度, absenteeism)등과 같은 제도는 교리적 탈선의 결과였다.
당시 교회에 편만해 잇던 각종 미신과 잡다한 이교적 풍습 또한 교리적 탈선을 예증하고 있다. 루이스 스피츠(Lewis Spitz)에 의하면 교회의 각종 신조들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가 시행하는 미사나 예배의식은 이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 시대의 신학적 혼란은 새로운 신학운동, 곧 비아 모더르나(via Moderna)라고 불리는 윌리암 옥캄(William of Occam, 1300~1349)을 따르는 유명론자들(唯名論者, nominalists)과 비아 안티꾸아(via Antiqua)라고 지칭되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ns Aquinas, 1224~1274)를 따르는 실재론자들(實在論者, realists)간의 대립으로 더욱 가중되었다. 신앙과 이성을 융합하려는 토마스의 합리주의적 신학은 13세기 이래 교회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서부터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이성주의(理性主義), 곧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최고의 기능이라는 견해에 대립하여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던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1308)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스코투스는 토마스의 이성(理性)에 대한 의지(意志)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견해는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들은 후에 신앙과 이성을 완전히 분리해 높음으로써 합리주의적 스콜라 사상의 기초를 붕괴시켰다.
실재론자인 토마스는 실재론적 철학에 근거하여 신학과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였는데, 개체(個體, individuals)는 우주적 실재(宇宙的 實在, Universals)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교회나 국가는 다수 개체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보다 우선하는 보편적 실재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한 옥캄은 장구한 세월 동안 교회의 이념적 기초였던 토마스의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에 반기를 들고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며 보편은 이름뿐이라고 하여 소위 유명론(nominalism)을 주장하였다. 당시 교회는 토마스의 철학에 근거하여 개체보다 우선하는 보편의 실재를 믿는 보편교회를 주장해 왔으나 옥캄과 그 추종자들은 보편은 시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당시 교회 곧 전 구라파를 포용하는 거대한 조직체는 이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중세교회의 붕괴에 기여하였다.
루터는 옥캄의 유명론을 따랐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20~1485)의 저서를 통해 비아 모더르나 신학을 공부하였다. 비록 그는 옥캄의 개인주의적 유명론 철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보편은 이름뿐이며, 실재하는 것은 개체라고 주장했던 옥캄의 신학(via moderna)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프란짼(A. Franzen)과 돌란(J. Dolan)은 「교회사요론」(A Concise History of the Church)에서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사상은 옥캄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정도다.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대두와 교회체제의 붕괴
교회개혁의 역사적, 혹은 정치적 배경으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민족국가 (nation state)들이 교황청과 제국 하에서 이룩된 서부 유럽의 통합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하나의 국제적인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국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교회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대두는 중세의 보편적 교회중심체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중세 말에 이르러 국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점차로 발달하게 되자 영국, 프랑스, 에스파니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인종, 언어,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는 민족적 연대감을 기초로 왕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이러한 양상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대두를 촉진시켜 주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였는데 그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ip IV)와 교황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의 대립을 들 수 있다.
필립 4세가 전쟁비용 확보를 위해 교회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자 교황은 1296년(Clericis Laics)과 1302년(Unam Sanctam)교서를 발표하고 교황의 허가 없는 징세를 금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위협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필립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이것은 국가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의회가 필립왕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황권은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프랑스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305년 교황에 취임한 끌레멘스 5세(Clemens V, 1305~1314)는 프랑스 출신으로서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때로부터 1377년까지 70년간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것은 교황이 프랑스왕의 통제 하에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 기간동안의 일곱 명의 교황, 곧 끌레멘스 5세, 요한 22세(John XXII, 1316~1334), 베네딕또 12세(Benendictus XII, 1334~1342),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1362~1370),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 1370~1378)는 다 프랑스인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하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단테(Dante, 1266~1321)와 인문주의자 페트라카(Francesco Petraca, 1304~1374)는 아비뇽 교황들을 프랑스왕의 포로라고 하면서 “교황의 바벨론포로”라고 비꼬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교황권의 퇴보와 중세 질서의 붕괴의 한 원인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감으로써 아비뇽시대는 끝났으나 그의 사후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후임 교황선출이 지연되다가 1378년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 1378~1389)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누스가 추기경들과 불화를 빚게 되자 프랑스와 에스파니아 추기경들은 교황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프랑스왕의 사촌인 제네바 대주교 로베르(Robert) 추기경을 다시 교황으로 선출(끌레멘스 7세, 1378~1394)하였고, 그가 아비뇽에서 취임하게 되자 교황청은 분열되었다. 이때로부터 1417년까지 40년을 ‘교황청의 대분열기’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에 교황의 권위가 극도로 실추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1409년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열린 공의회는 당시 로마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 1406~1415)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또 13세(Benedictus XIII, 1394~1422)의 퇴임을 전제로 하고 알렉산더 5세(Alexander V, 1409~1419)를 선출하였으나 곧 사망하므로 다시 요한 23세(John XXIII, 1410~1419)를 선출하였는데 앞의 두 교황이 퇴임을 거부하므로 결국 교황은 세 사람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와중에서 교회는 극도로 분열되었고 세 교황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여 반대자들을 서로 파문함으로써 당시 교회는 대부분 파문 상태에 있었다.
이상과 같은 민족주의의 대두 등 정치적 상황은 극도의 혼란과 분열 가운데 실추된 교황권과 더불어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고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회개혁의 배경이 되었던 또 한 가지 요인으로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흔히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새로운 문화운동은 1350년 북부 이태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5~16세기 영국, 에스파니아,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 구라파 전역으로 확산된 운동인데 중세적 인간관과는 달리 인간성을 고양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인본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불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한마디로 ‘인간의 발견’(discovery of man)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때의 르네상스운동을 다른 인문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Renaissance Humanism)라고 일컫는다. 이 운동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고전문학, 곧 희랍, 로마문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이들은 1세기의 라틴어체, 곧 키케로(Cicero)의 라틴어를 복구하려고 했다. 인문주의는 고전어 연구를 촉진시켰고 고전어 연구는 성경원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문헌학(Philology)을 발전시켰다. 이 점은 교회개혁을 예비하는 값진 봉사를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였다. 그는 문헌비평학을 도입하여 오랜 세기동안 교황권을 지원해 주는 자료로 사용되었던 소위 ‘콘스탄틴 기증서(Donation of Constantine)'가 콘스탄틴 황제 당시에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 8세기에 조작된 위조문서임을 고증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고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적씩 고백한 문서라는 루피누스(Rufinus)의 설명이 허구임을 규명하였다.
특히 발라는 어거스틴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읽혀지는 어거스틴의 작품 중 40%정도는 후대의 첨삭으로 변조되어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중세는 ‘역사적 관점’(Historical Perspective)을 갖지 못했다. 문헌학 자체가 ‘역사적' 학문임을 생각해 볼 때 르네상스 운동은 새로운 과학적 방법인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원천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는 바 ad fontes, 곧 ‘원천에로의 복귀’(Back to the source)는 인문주의 운동의 중요한 이념이었다.
결국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연구 뿐만 아니라 교회개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문주의가 중세교회와 스콜라신학을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역사 비평적인 문헌학 연구는 교황권과 스콜라신학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종교개혁을 위한 예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 이들이 교황과 교직자들의 부도덕과 사치를 비판하고 풍자한 일은 개혁의 대중적 동의를 가능케 했다. 이 당시 인구의 90%가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보고를 참고해 볼 때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에 앞서 개혁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쯔빙글리를 비롯한 당시 개혁자들도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 경제적 배경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 또한 교회개혁의 원인이었다. 경제적 상황은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고 사회 구조와 경제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교회개혁을 이끌어간 중요한 원인이었다.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12-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고 15세기말엽에는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하였다. 또 종래의 중세 봉건 제도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던 교회는 기득권 곧 기존의 계급체제 및 행정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500년대의 유럽 인구는 6천 5백만 내지 8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약 60명이상의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대주교 등 교회지도자들이 지배계급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매우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앞서 티르나겔에 의하면 15세기 말엽에는 적어도 85%이상의 백성들이 피지배계급으로 심각한 경제적 빈곤 가운데 있었다.
스피츠에 의하면 단시 유럽 토지의 3분의 1은 교회의 소유이거나 교회의 통제아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산물 중에서 70-80%를 지대(地代)와 세금, 헌금 등으로 영주나 교회에 바쳐야 했으므로 농민들의 생활상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1524년 폭발된 농민전쟁 때 루터의 동정을 구하기 위해 루터에게 제출한 12개 신조(1525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루터는 부(소유)는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핍절된 이웃을 위해 분배되지 않은 제물은 ‘소유의 본질’(nature of possesion)을 상실한 것으로 규정하고 설교했으나, 이기적인 악적 자본가들의 고리대금업은 그치지 않았고 소유하지 못한 계층을 더욱 깊은 가난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교회 또한 물질적 탐욕에 깊이 젖어 있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배금사상, 곧 황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사상에서 면죄부까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형편에서 설교가 존 게일러 (Johannes Geiler von Kaysersburg, 1445-1510)는 “성직자들의 영혼을 낚는 어부 대신 영지를 낚는 어부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했다. 어떤 사회든지 소수의 지배계층이나 특권층은 보수적 경향을 지니지만 피지배계층은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농민들과 노동자 등 대부분의 백성들은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 요구는 개혁 운동의 확산에 소위 민중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교회개혁은 독일의 남부 지역보다 더 후진적이고 가난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서 더욱 큰 호응을 받았던 점은 이상과 같은 사회,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적 갈망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이 개혁의 원인이 되었고 개혁을 이끌어간 힘으로 작용했지만 구라파 전역에 범람하는 물처럼 흘러 들어간 영적인 갈망만큼 강렬한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특히 14세기 이후 중세는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빈번한 기근, 유럽 인구의 5분의 2가량의 생명을 앗아간 14세기 중엽(1347-48)의 흑사병, 1453년에 이르러 끝이 난 영국과 프랑스간의 100년 전쟁, 후스 전쟁(1419-1435)과 장미 전쟁(1455-1485),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회교도들의 계속적인 위협 등과 같은 정치적 불안은 경제적 빈곤과 함께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는 도덕적, 영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새로운 영적 운동을 갈망하고 있었다. 세속화된 교권 체계나 냉냉한 스콜라주의, 의식적 종교는 영적 기갈을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 소위 ‘마술적인 경건’(margical piety)이라고 불리는 성자숭배, 성물 혹은 성자들의 유품 숭배, 성지 순례 등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었다. 이런 오도된 경건은 정당한 의미에서 영적 기갈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종교적 열정은 뜨거웠으나 이것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영적 계도력은 상실되어 있었고, 프랑스 교회사가인 델루메오(Delumeiax)의 말처럼 성직자의 수는 많았으나 성직자의 질적 수준은 한없이 낮았다.
14세기에 나타난 신비주의 운동 혹은 신비 신학은 일면 종교적 갈망의 표현이었다. 교권적 체제를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추구했던 이 일련의 신앙 운동은 교회개혁의 의미가 있었다.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등에 의해 기원된 신비주의는 독일, 특히 라인강 지역에서 크게 전파되었고 후에 프랑스, 네덜란드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신령한 영적 생활을 갈망하던 노력은 네덜란드에서 헤에르트 흐루테(Geert Groote, 1340-1384)에 의해 ‘오늘의 헌신’(Devotio Moderna)운동으로 나타났고 후일 ‘공동생활 형제단’(Fratres communis vitae)으로 발전되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활동은 바로 영적 갈망의 표현들이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유럽에서는 새롭고도 참된 종교적 부흥을 고대하였으나 당시 교회는 이 범람하는 요구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따라서 영적 갈망은 개혁의 원인이 되었고 개혁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유럽의 들판에 영적 가뭄으로 인한 기갈이 심화되고 있을 때 교회개혁이라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유럽의 대지를 촉촉히 적셔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개혁자들은 그 이전시대부터 미미하게나마 계속되어 오던 교회개혁의 의지들을 유산으로 하여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 부름에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상규/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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