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 여러교파!!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 패턴과 특징들

하나님아들 2021. 10. 17. 23:58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 패턴과 특징들
 
 
정성구 박사
 
1.서론

 
종교 개혁자 칼빈은 목회자요 설교자였다. 칼빈의 설교는 강해 설교이며, 그것도 연속강해 설교이다. 우리가 칼빈을 말할때 지나치리 만큼 그를 교의학자로 또는 주석가로 연구하기 때문에, 목회자요 설교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비교적 강조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칼빈은 신구약 성경 거의 모두를 설교했으며, 당시 그의 설교집은 영어나 화란어 등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칼빈의 설교를 연구해 보면, 종교 개혁이 실제로는 강단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말씀 운동에 기초한 것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소론에서는칼빈의 설교 방법들과 특성들' 만을 특별히 다루어보고자 한다.

 
2.본론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두드러진 교리를 붙들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신전(神前)의식은 그의 목회 생활, 특히 설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¹ 즉 칼빈에게 있어서는 신학과 생활이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는 조직적인 사람인 동시에, 설교자로서, 결국 설교를 통하여 제네바 시 (Genevecity)를 새롭게 만든 사람이다. 설교 학자들이 칼빈을 가리켜서 말한 '말씀의 종으로서의 칼빈 (Calvijn als Bedienaar Des Woords)이란 표현은 적절하다고 본다.²

칼빈의 신학서 어디서든지, 항상 인간을 하나심의 면전에 세우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입장은 칼빈의 설교 가운데도 너무나 명백히 나타나 있다. 칼빈은 어느 설교든지간에 5분정도이면 이런 사상이 나타난다고 한다.³ 그의 성경 본문해석 어디든지,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⁴칼빈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결정적이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설교 중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확신 없이는 교회당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칼빈의 설교가 끊임없이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경건의 삶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것 세가지 정도를 지적해보면, 첫째, 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그 곳임을 분명히 가르쳤다. 이런 강조는 그의 설교에서 계속 설명되고 발전되고 논증되었다. 둘째,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rhetorical) 도구를 사용하였다. 셋째,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을 가지고 그의 청중의 편에 서서 계속 일깨워주었다. 즉 이런 끊임없는 노력은 교리를 취급하는 성경 구절을 설명할 때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는 성경구절을 설명할 때 항상 인간이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실감 있게 설교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선 인관을 말하게 될 때, 이 말은 어떤 장소와 위치를 말함이 아니고 그 방법이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칼빈의 설교가 어떤 주된 교리 설교나 윤리적인 설교든지 간에 청중이 하나심의 면전에서 책임 있게 설 수 있도록 일깨워준다.5

 

1)설교 방법
그러면 칼빈의 설교 방법을 간단히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칼빈은 강해 설교가인 동시에 즉석 설교가였다. 그는 노트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칼빈의 설교준비는 종교개혁 동역자들의 책을 읽는 일이며, 초대 교부들을 포함한 스콜라 철학자들, 그리고 자기와 다른 학문적 입장을 표방하는 자들의 주해서를 깊이 있게 탐독하는 일이었다. 그 외에 그의 탁월한 성경 원어와 라틴어 지식, 그리고 놀라운 성경 지식이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는 간단히 어떤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성한 성경 지식과 원어 지식, 그리고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당시의 청중들에게 올바르게 적용하려는 데에 있었다.6

 

칼빈이 당시의 설교가들에게 권고했던 설교 준비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설교 준비가 너무 체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교는 미리 작성된 설교문을 준비해서 단어들을 암송하는 것으로 속박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설교란 성령님의 영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행해져야 된다고 굳게 믿었다. 칼빈의 설교관은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임을 우선적으로 굳게 가진다. 한편 설교는 성령께서 설교자와 듣는 자에게 동시에 작용할때 구속의 효과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7 칼빈에 있어서 설교와 성례는 기록된 말씀에 의존하여 성령님의 은혜의 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의 방법은 외부적인 환경을 잘 채용할 뿐 아니라 근본적인 교리를 바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살아계신 말씀으로부터 와야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말씀을 외치는 그 순간, 성령에 붙들린 바 유연한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칼빈은 설교 본문을 선택할때, 교회력에 있는 대로 따르지 아니했다. 그는 강해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의 일반적인 방법은 성경전체를 차레로 설교하는 것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교회의 절기 때는 변경하기도했다.

 

2)설교 구조
이어서 칼빈의 설교 구조를 보기로 하겠다. 종교 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분야들이 많이 있었지만, 설교 분야에 대해서는 고대 교회의 관례와 교리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스콜라적인 표준설교와 비교해보면 개혁자들의 설교는 ‘주제 설교’ (topical sermon)라기보다는 ‘강해 설교’ (expository sermon)였다. 그리고 틀에 매인 설교가 아니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설교였다. 또 개혁자들의 설교는 종합적이라기보다는 분해적이었으며, 논리적이고 난해한 설교가 아니라 평범한 표현으로 진리를 말하는 설교였다.그리고리고 수사적 (rhetoric) 정확성보다는 회화적인 방법을 택한 설교였다.

 

칼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빈의 설교는 더 단순했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의 설교는 다른 신학적 작품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있었다. 칼빈은 강해 설교를 할때 연속적인 문장을 각 절씩, 혹은 각 구절씩 설명과 주를 달면서 본문을 대하곤 했다. 칼빈은 늘 원문대로 설교하면서도 성경 각 권과 각 장의 중요성을 철저히 고려했다. 그의 강해 설교 원리는 언제든지 성경은 성경으로 강해되고 해설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9 강해 설교자로서의 칼빈은 실제로 설교를 전개해갈 때 본문 자체의 구조 외에는 특별한 구조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는 정연한 윤곽과 조직으로만 빠지기 쉬운 어떤 구성이 없다. 이처림 칼빈이 특별한 조직으로서 설교를 구성하지 않은 것은 그가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볼수 있다. 칼빈의 입장은 미리 정해진 사상의 배열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문으로 택한 말씀은 미리 정하는 것이 올다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한번도 어떤 주제를 미리 내걸고 거기에 맞추어서 설교하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설교는 처음부터 설교자의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제목을 향해서 가는 제목 설교와는 퍽 달랐다. 이렇게 볼때 칼빈은 최대의 강해 설교자요, 순수한 강해 설교자라 할 수 있다.

 

칼빈의 설교를 잘 관찰해보면 그 설교들은 모두 하나의 덩어리라고 할수 있다. 칼빈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이것은 교리 설교이며 저것은 강해 설교다” 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도, 구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은 칼빈이 교리나 실제를 무시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성경 전체를 설교할 때 교리와실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칼빈에게 있어서는 ‘강해’ 나 ‘적용’의 구분이 없었다. 그 이유는 강해는 적용의 씨줄과 날줄이고. 적용은 강해의 옷과 같았기 때문이다.10 그에게는 교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신앙 생활의 조화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칼빈의 설교는 개혁파 설교의 모델을 제시했고, 그의 강해 설교는 바로 ‘오직 말씀만’(Scriptura Sola)으로 하며, 하나님의 '말씀전부’(Scriptura Tota)를 증거한 것이다."

 

3) 설교 스타일
칼빈의 설교의 스타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의 설교 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선명하다. 그의 설교는 매혹적이리 만큼 명백하다. 또한 그의 설교는 잘 이해되도록 짜여졌다. 번역가인 닉슨(Leroy Nixon)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책머리에, 칼빈의 설교는 그 설교의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 큰 소리로 읽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설교들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귀로 전해질 때 그 내용이 가장 마음에 잘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설교 스타일의 가장 큰 특성은 그의 설교의 진지함과 솔직함과 함께 명확함과 단순함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당시의 다른 개혁자들의 설교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당시의 설교자들은 아직도 화려함과 모호함을 자랑하는 중세 시대의 특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학문적이며 기교적인 방법을 그의 설교에 도입하지 않았으며, 가능한한 모호한 단어 사용을 피하였다. 칼빈의 설교에서 그의 문장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활기있는 단어들로 빛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주목받을 만한 예화를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이끌어낸 것들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표현의 면에서 충분한 효과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간결하게 전했다.

 

칼빈은 청중들에게 그들이 듣고, 하나님앞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중요성에 대해 좀 더 날카롭게 깨닫게 하기 위한 표현(exposition)뿐만 아니라 묘사(서술, description)와 예증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칼빈이 사용한 언어들이 성경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설교할 때 사용하는 궤변이나 이른바 설교를 윤택하게 한다는 노력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설교언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꾸미려고 하지 않고 다만 회중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설교 스타일에 있어 장식적이거나 기교적인 것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즉 칼빈의 설교 방식은 한마디로 ‘단순성, 명쾌함, 힘찬’ 하나님의 말씀의 사용이 그의 특성이라고 할수있다. "

 

4) 교회의 무질서에 대해서
칼빈은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핑계 속에서 해야할 바를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큰 부잣집을 방문하는 중에 부엌에 가서 쓸데없거나 하찮은 그릇을 보았다 하자. 혹시 그것이 쓰레기통이라면, 그것은 이 집의 청결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그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그 그릇을 보고, ‘이 집에는 다시 들어오지 않겠다’ 고 말한다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14

칼빈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신자들이 평가하는 것에도 이것을 적용시킨다.
“하니님의 교회에서 무질서(disorder)를 본다고 해서 완전히 망했다고 또는 예수님도 더 이상 어찌할 수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한다. 오히려 교회의 아름다움을 추락시키는 그런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비열함 속에서도 섭리하셔서 마귀나 악한사람이라도 그를 찬양케 하는,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인내하자.”15

 

5)벌레에 비유되는 인간
칼빈이 흔한 비유나 직유를 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칼빈은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을 ‘벌레'나 ‘해충’ 혹은 또 다른 특별한 종류의 곤충으로 비유한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벌레처럼, 죄와 마귀에게 지배당하는 지구상의 헛된 존재임을알게 된다.16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데, 지구상의 이 벌레 같은 우리가 새 율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치 하나님이 충분히 지혜롭지 못한 것처럼….”17

 

6) 훈계에 관해서
칼빈은 수사법과 묘사(exposition)를 쓸 뿐 아니라 청중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을 깨우치기 위한 ‘훈계’ 도 사용한다. 칼빈은 훈계를 경고나 타이르는 목적으로 쓰기도 하며, 때로는 성경의 위로를주려고, 또는 삶에서의 행동 방향을 지시해주기 위해 사용한다. 마태복음 27장 11-26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경고한다.
“말씀으로 배우자. 하나님이 입증하시는 열심을 갖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참 지식으로 무장하고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학자처럼 대담하지 못하다면‥‥ 단지 사탄과 논쟁만 벌이다가 말것이다.18

또한 훈계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위로를 주기 위해 쓰인다. 사도행전 1장 9-11절에 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외친다.
“그가 다시 오셔서 우리를 모아 그와 연합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은, 우리가 위로 받을 구절이다. 이 구절은 사도들을 위한 말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비록 그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은,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으며, 우리 머리를 들게 하셔서 우리 앞에 일어날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19

 7)교회의 불신과 거역에 대하여
칼빈은 교회의 불신과 거역에 대해 경고하면서 믿음과 순종을위해 훈계를 사용함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9-11절에 관한 아래 설교의 예문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전형적 형식이다. 여기서 그가 얼마나 적절하며 꼭 들어맞는 훈계를 하는지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심판주로만 이해하는 것도 그럴 만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주시려 할 때 쉽사리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웃어, 지난 수요일 이 자리에서 조롱하며, 불만족해 하며 ‥‥ 무가치하게 되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반항하며, 이곳에 와서 그들의 불경건과 뻔뻔스러움으로 괴물과 같은 첫을 한다 ‥‥ 이제 그들은 누구를 조롱할까? 그들이 거절한 그분이리라. 그러나 그는 오시리라. 그는 하늘에 올라가시어 그를 조롱하는 사악한 조소자에게 참으시지만은 아니하신다. 그는 모든 조롱을 기록할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 자신은 겸손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20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경고, 믿음과 순종에 대한 훈계적인 유형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믿음과 순종의 행위에 특별한 유형으로 청중을 훈계한다. 욥기 31장 16-23절에 관해서 신자들이 구제에 대해 교회를 권면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더 자비로와지자. 어떤이가 ‘더 많이 줄지니라’ 는 말로 율법을 부과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그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을 때에도 완전히 다 갚은 것은 아님을 알자."21

 8)감탄법과 수사법의 사용
칼빈은 청중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느끼게 하고, 좋은점과 헛된 점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감탄법을 쓴다. 이사야 53장 12절에 관해 말할 때 칼빈은 감탄법과 수사법을 사용했다.
“기도할 때 천국에 있는 천사와 같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큰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친밀하게 되는 겸손을 나타내시어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며, 내가 너희의 대변자가 되리라' 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기뻐서 황홀케 되지 않겠는가?”23

이와 같은 것이 욥기 22장 1-8절에 관한 설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그의 무한한 광대하심을 이해하고, 그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둘 만큼, 그리고 걱정하실 만큼 겸손하다는 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진실로 감동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처럼 선하심에 감탄하지 않겠는가?”23
감탄법은 칼빈의 설교에서 비난과 연관지어 때때로 쓰인다. 디모데후서 2장 16-18절의 설교에서 칼빈은후메네오와 빌레도가 바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믿음의 가장 핵심인 부활을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천한 무지에 이를 수 있었다니 ‥‥ 그것이 어찌 가능한가?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남용하는 조소자와 책하는 자에게 어떻게 갚으시는지 보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의 자리에 던지셔서, 다시는 그들이 가르치지 못하게 하셨다.”24

9) 목사와 청중의 임무
또 칼빈은 설교 가운데 ‘우리, 우리의’ 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는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이 목회자를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v.d.Vegt25,Bie-sterveld"). 칼빈은 조소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불신에 대해서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보통 ‘그’ 또는 ‘그들’ 이라는 3인칭을 사용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경고하며, ‘구하며’ (seeking), ‘공감’(sympathetic)하는' 이들에게는 위로하였다. 칼빈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임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는 칼빈이 불신, 위선을 경고하며 믿음 갖기를 훈계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칼빈은 청중과 그들 사이에 늘 '우리'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설교자 칼빈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사람들 앞에 서 있음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청중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욥기 33장 1-7절에 관한 설교에서 목사와 청중의 임무를 보여주는 구별(distinction)과 동일시 (identification)의 방법이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교훈인데‥‥ 이 세상에는 완고함이 있기 마련이고, 높은 지위는 하나님께 복종함을 싫어하고 ‥‥ 늘 하나님을 대적하는 뿔을 내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잊을때‥‥ 우리는 굽힐줄 모르는 정절을 지녀야 하며 ‥‥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로 임명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또한 모든사람은 일반적인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의 거만함 때문에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 때, 하나님 앞에 분노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또 우리의 아픈 곳을 건드릴 때 화를 내는 무정함은 없어야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늘 그의 평안을 유지시켜주시리라는 어리석고 주제넘은 생각은 버리도록 하자."27

설교의 대상이 그 자신과 청중이 되어야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설교자가 교회에서 그들의 특별한 위치에 동의할 뿐 아니라, 설교하는 입장에서 자신과 듣는 이들에게 공통되는 복음의 도전과 훈계에 응답하며, 설교자와 청중이 같은 입장에서 함께 회개와 믿음과 복종의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 얼굴에 나타내는 계시라는 것을 칼빈이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절대 주권에 관하여
청중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칼빈이 쓴 여러가지 수사학적 방법과 교리와 생활의 문제를 제시한 방법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누군가가 하나님 , 인간. 구원의 교리에 대한 청중의 종교적 반응에 ‘실행’ 이라는 말을 포함한다면, 칼빈의 교리 및 학설은 '실행' 에 있어 직접적인 증요성을 가짐을 알 수 있다. 또 '실행' 이라는 것이 교리를 확실히 깨닫는 것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설교와 윤리적 설교에 대한 구별은 가능케 된다. 여기서는 교리적이냐, 윤리적이냐 하는 칼빈의 설교에 관한 것만 생각하겠다. 칼빈의 교리와 설교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도 스스로 계시며, 그의 행함이나 계시에 있어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절대적 주권자이다.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가운데 나타나는 주권적 광대하심은 욥기 22장 1-8절에 관한 칼빈의 설교에 잘 나타나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를 더 잘 섬기기 위해 받는 수고가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얼핏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이것을 모른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뭔가 부족해서 우리로부터 무슨 이익을 취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이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늘이거나 줄이지 못할뿐 아니라, 모든 선함이 샘솟는 그의 지혜는 너무도 커서 무엇을 빌리지도 않으며, 인간이 그에게 바치는 것은 전혀 그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하나님과 어떤 방법으로든지 논쟁한다는 것은 더욱더 있을수 없는 일이다."28
하나님의 스스로 만족함, 즉 자족성에 대한 표현에서 칼빈은 청중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이 광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봉사하기를 요구하신다. 피조물이 채워줄 그의 요구가 없다면, 왜 하나님은 이 일을 원하는가? 칼빈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넘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구원의 방편과 더불어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기신다.”29

우리로부터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하심은 ‘매우 드물고 특이한 사랑’의 표시이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낮게 내려오셔서 그 자신을 죽여 씩어가는 인간의 위치에 두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형제에게 하는 것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의무와 짐을 지셨다. 우리 입장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보았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인자하심에 감탄과 놀람을 어찌 금할수 있겠는가?"30

청중은 자족하시나 스스로 복종하는 주권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며, 설교자에 의해 그의 자발적인 선함으로 관대한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라고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할 수 있는. 또는 말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한 학문적 구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봉사하기를 요구하며 우리를 가까이 끌 때.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며 자족하시는 이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주권적 자족함과 주권적 선함이 개인에게 나타나서 청중들이 하나님을찬양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적 광대하심(Sovereign Majesty)에 거하심으로, 인간이 그의 모든길은 알아낼 수 없다. 그의 주권을 드러내는 모든 표현들 가운데, 우리는 그의 뜻을 드러내는 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칼빈은 사도행전 1장 6-8절에서, 아버지가 감추신 주권을 드러내시는 시간과 계절에 대해 제자들에게 한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교훈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알게 하지 않으실 때,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하여 ‘왜’ 라고 묻는 이가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가”라고묻는다. 칼빈은 이에 대해 대답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런 사악한 호기심이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드셨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 하는 비난할 만한 호기심은, 하나님의 사업이 우리에게 선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일에 대항해서 우리 자신을 치켜 세우고 맞서게 하는 데 뻔뻔스러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그 일로만 만족해야한다. 그것을 생각하는 데 우리 모든 삶을 다 써버리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없으므로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에 각자 순종하며, 아버지가 감춰 놓으신 일, 즉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묻지 말아야한다.”31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어떤 이는 택하고 어떤 이는 버리시는가’ 하는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스스로가 드러내심에 응답하여 청중들이 이 진리를 고수하기를 요구하시며, 그의 청중을 택하고 버리시는 주권에 대해 칼빈이 강조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3-5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리실까?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음을, 그리고택함 받은자라도 그 동료보다 더 사랑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우리는 안다 ‥‥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첫 머리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하는 이를 택하셨다. 우리는 왜 이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셨는지는 모른다.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공의로 행하졌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 가운데 우리가 분명히 증명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그냥 받아들이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면서 첫된 이성의 잔상 아래에서 우리를 방황으로 이끄는 그런 사람 때문에 고통 당하지 말자.”32

칼빈은 주권적 하나님은 언제나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욥기 9장 1-6절에 관한 설교 가운데 아래의 인용은, 설교자 칼빈이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해 긍정할 뿐만 아니라, 항상 옳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스스로 겸허하게 행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정당하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악하고 방종한 이에게 벌주시고, 그런 나라에 복수하시며 보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해하고 전염성있는 악취와 같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법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항상 옳다고 여기는 고차원적 사고에 이르러야 한다."33

칼빈은 이 학설을 계속 적용시키다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이 계시 앞에서 갑자기 멈춘다.
“나는 우리가 이 두가지 사항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로 다스림을 아는 것과 인간은 그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과 논쟁이나 토른을 해서는 안되며,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은 하나님께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자 자신을 살펴보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비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후 우리가 그에게 얼마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기 위해 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정죄와 벌에 대해 알아야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눈 앞에서 다른 사람을 징계하여 우리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런 예를, 우리에게 들이닥칠 하나님의 존재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를 훈육함에 사용하자.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징벌로 우리는 이익을 얻었으니까…"34

11) 인간학
인간학에 대한 취급에서, 이 교리에 대한 설교적 표현의 목적은, 청중들이 성경 가운데 계시된 하니님의 ‘얼굴’을 대한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때로 ‘하나님 앞’의 설교에서, 자기 생각으로 인간에 대해 장황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그에 앞선 설교에서 명백히 다루지 않은 용어를 소개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인간의 본래 지위와 상태에 대한 광범위한 숙고가 없었던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둔 이유라고 하했다. 인간의 본래 상태는 '인간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에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로 죄인이 겪는 무서운 곤경을 지적하는데 도움이 된다. 요한복음 1장 1-5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의 모든 창조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낼 때, 말하자면,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에 나타난 그를 생각한다함은, 말하자면, 뒤에서 희미하게나마 그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에서 하나님이 보인다고는 하나,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다리나 손이나 잔등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가운데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완전하게 생각(상상)하기 위해서는 얼굴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상천하에서 알려지기 원하는 모습에 대해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35

칼빈은 “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둠이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는 요한의 말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그는 마치 '나의 작은자여.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지금 보는 것처럼 손상당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어디서나 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 끈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이 남긴 어떤 광채나 그 빛의 강렬한 발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36
칼빈은 인간은 아직도 ‘창조의 본래 모습의 남은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사악하고 타락한 속에서도 하나님 형상(Image of God)의 영상이 있음을 본다. 이것은 우리가 더욱 변명할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 만큼, 그들의 죄는 더욱깊어지고 두배로 가중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부패했음에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담에게 주었던 은총의 섬광을 여전히 보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37

칼빈은 때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나 인간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잔상을찾아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태복음 27장 11-26절의 설교에서. ‘하나님’ 이라는 이름에 대한 빌라도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공공연히 경멸하는 이들의 조롱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빌라도의 두려움은 결국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 우리는 또한 인간이 가진 두려움을 본다. 이것은 그들의 눈 앞을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금방 꺼져버리는 섬광 같은 것이라 하겠다."38

그러나 아직 이교도적인 특성도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God's sight)에 영원한 가치를 갖지 못하고 크리스천이라 내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한다. 이것이 ‘인간다움’ (humaneness)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고통 당하는 혹독함을 없애 버리지는 못하지만,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이교도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감정이 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교도에게는 비록 그들이 악하고, 그들에게는 복수라는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원수가 너무 고통을 당해, 그들의 손으로 더 이상 해를 끼칠 필요가 없을때, 그 생각은 덜어질 것이다.”39

칼빈은 이교도의 이 자연적 경향을, 그 자신의 시대에 그들의 적이 말할 수 없이 박해받는 것을 보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오히려 삼키려는 잔인성과 비교한다.40 그외에 칼빈은 이 말에서 ‘humaneness’ 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교도들은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우리는 세낸 사람에게. 삯꾼이라는 말처럼 종이라는 말을 써야겠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말이다. 그때에 살았던 불신자들은 비록 그가 종에게 합당하다고 여긴 일을 할특귄이 허락되기는 했지만, 이것을 ‘humaneness’ 라고 여겼을까?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법을 부과시켰을까? 우리가 적어도 그런 생각조차 못 가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친 우리에게 어떤 핑계가 있을까?”41
이러므로 이교도의 ‘인간다움’ 은 히나님이 그들 안에 죄를 제한시켰다는 것을 드러낼 목적으로 인용된 것이 아니고, 크리스천이라 내세우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더욱 완전히 복종하게 하려고 인용되었다.

12) 타락자의 반역성
인간의 타락은 그 자체가 반역(rebellion)이라 되풀이되어 밝혀진다. 하나님은 징계의 방법을 통해 인간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욥기 5장 17-18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타락한 이들에 대해 하나넘이 일하시는 방법을 주시하자. 그는 징계하심으로 그들이 회개하기를 권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말한 벌이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며, 그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은총을 모든이에게 다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강퍅함을 녹이시지 않는다면, 바로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인간이란 그들이 매 맞는다고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 사실 인간의 죄악이 너무도 완고하며 지독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면 벌할수록 그들의 불경함을 더욱 드러내어, 자신을 더욱 고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한다.”42

하나님의 반역은 타락한 이들에게도 합당하게 드러난다.
“악한 자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악에서 악으로 치닫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분명한 거역의 반응을 보일 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입이 막히는 것이다."41

그러나 칼빈이 타락자의 반역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곤경을 고소하려 함이 아니다. 불신자와는 반대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생각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울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손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겸손하자‥‥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자녀들에게만 주는 특권인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징계를 당할 때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오히려 더욱 싫어하고, 그 앞에서 한숨 쉬고 짜증내므로 그의 자비를 분노로 바꾸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느낄 때 그것은 그가 성령님으로 우리 마음에 써 놓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키워주기에는 너무도 높은 차원의 지혜이기에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함(free goodness)으로 나오는 성령님이 먼저 우리가 고집하던 그 저주받을 강퍅함과 완고함을 녹이셔야 한다.”44

13) 선택의 교리
칼빈은 선택의 교리가 교회에서 공공연히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고, 다른 이들은 택하지 않았다. 용납과 거절이 포함되는 선택의 원리는 복음의 실제성을 가지려면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구원에 대해 생각할때 ‘우리가 택함받았나’ 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복음에서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약속을 받게 하셨으니,이는 그가 온 맘을 열어 보이셔서 우리가 택함 받았음을45 알게 하신다. 선택이란 봉한 편지와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믿음으로 그에게 갈 때 하나님이 친히 그 내용을 증거해 주심으로 우리는 편지를 읽을 수 있다."4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안내자라면, 우리는 그를 의지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택한 모든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받도록 하는 가치를 그 안에 지님을 알게 되니,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와 한 몸이 된 것만으로 충분하다.47 그리스도 안의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표이다. 그가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음에 따라 우리는 영원한 택함으로 인도된다."48
그러나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분명한 자기 계시 앞에 그들이 설 때 선택된 유기(遣棄)의 교리(doctrine of reprobation)를 어떻게 포함할 수 있을까? 칼빈은 유기의 교리는 방만함에만 적용된다고 말한다.

14) 그리스도의 복종에 관하여
하나님은 택함을 위해 대속자 역할을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타락한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다. 구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그 유익을 어떻게 해야 얻을수 있는가? 우리는 칼빈 설교의 중요한 주제의 일부분만을 여기서 고찰해볼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죄인의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완성되었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복종에 관해 능동적, 수동적인 구별을 보이는 반면,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 두면을 나눌 수 없는한 단위로 여겼다. 이사야 53장 7-8절에 관한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고소 앞에서 묵묵했던 사실에 대해 주석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도 그리스도가 을법에 나타난 모든 것을 완전케 하였음을 알리라. 양(lamb)이라는 표현은 특히 그리스도에게 합당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지자가 말한것을 이해했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 모든 죄를 없애고, 양과 같이 희생이 되어 피를 흘리므로 우리 죄는 씻기우고 사함을 받으리라."49

칼빈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때, 이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지적한다. 우리가 범한 죄로 고소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리스도가 순종적 침묵을 지켰다는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구 하나님은 그에게 십자가의 쓰라림을 주셨지만, 그는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셨다. 그의 순종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50

이 진리는 하나님 앞에 선 신자들에게 더욱 유용하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의 손아래에서 잠잠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대속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침묵을 잘 연결시킨다. 이 관계는 우리를 위해 말 없이 고난 당하셨던 그가, 이제는 아버지께 우리의 중보자, 즉 옹흐자가 되셨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침묵을 지켰고. 그 침묵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와 반역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였기에, 우리를 위해 우리의 중보자로서 입을 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가 입을 열어 중재하실 때에야 우리가 범한 죄는 치료되는것이다.

 

15)연합에 관하여
택함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유익을 나누는 것이며, 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함을 깨닫는 것이다.이 연합을 이해하는 것은 성육신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 우리는죄와 비참으로 가득 찼으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셨다.51 성육신을 통해 그리스도와 우리는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되었고, 우리가 그와 하나되었음이 칼빈 설교에 잘 나타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연합되고,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은 욥기 19장 17-25절에 관한 설교의 아래 인용에서 분명히 보인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형상을 닮으려다 너무 많이 손상 당하지(offend) 않게 하려고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 말이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 가득 채워져야했다."52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도 하나되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와 일치시켜 신자들에게 큰 변화를 일으켰다. 복음은 모든 신자들이 승천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했음을 약속하셨다. 그가 비록 높이 계시지만 그는 한몸이 된 그의 지체와 함께 하신다. 그리스도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우리는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가 그의 지체와 영원한 우정으로 연결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진리를 던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형제 됨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응답해 주실줄 굳게 믿고 하나님을 담대히 부를 수 있는 것이다.53 우리는 그와 개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가졌으나, 복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완전히 동참할 것이라 약속한다.

우리가 그와 연합함을 확신케 하신 것은, 설교 가운데 복음의 교통하는 말씀에 참여하는 성찬식을 통해서이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세례가 우리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세례에 대해 가질 중요한것은, 첫째는 우리가 옛 아담을 벗어서 새로워짐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성결케 했을 때 우리의 오명은 씻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의 요점이다.54

16) 전도와 기도
또한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의 크리스천의 실행’ 을 진지하게 가르쳐준다. 사도행전 2장 18-21절에 관한설교에서, 이웃을 복음으로 교육하려는 우리의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라고 칼빈은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친 그 교리를 이웃에게 전함으로 우리의 자비를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사도를 통해 확장하신 진리의 발판은 전세계에 퍼졌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만 위해 받을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파하기 위해’ 받았다. 칼빈은 덧붙인다.“모두가 다 가르칠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 이웃을 충분히 권할 능력이 있다.”55

우리는 그를 전함으로써만 이웃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를 위해 또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서 멀리 떨어진 듯한 이들’을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 위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선한 뜻을 보여 주었듯이 그들에게도 보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때까지 인내로서 기다리도록 기도하자."56

칼빈 설교의 끝 부분에 기도에 대한 강조가 반복된다. 회중이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들을 나열한뒤 그는이렇게 덧붙인다. “그(He)는 우리에게 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에게 이 은총을 허락하셨다.”57
청중이 성경에 선포된 하나님의 뜻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도움을 주도록 칼빈의 교리적, 윤리적 설교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이 인용될 수 있다.

 

17) 신학적 특성
그 다음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일관된 신학적(神學的)특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칼빈은 논리적인 사람이고, 조리 있는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의 기본 구조는 그가 「기독교 강요」 첫 판을 써냈던 25세 때부터 마지막 개정판을 냈던 50세까지 변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사상의 일관성은 그의 신학 논문, 편지, 주석, 그리고 그의 설교 가운데 한결같이 나타난다.

칼빈의 설교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칠저한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칼빈의 설교의 사상은 그의 ‘하나님 중심 사상’과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그 주축으로 한다. 칼빈 신학의 ‘하나님 면전'(Coram Deo)의 사상은 그의 설교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칼빈의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58 그래서 크로밍가 교수는 칼빈의 설교에 대해서 언급할때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인간(Man Before God’s Face in Calvin's Preach-ing)을 강조했다.59 그리고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 이란 통괄적인 명칭으로 신성을 강조한다
 

루터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강해(a Christ-Centered exposition of every passage of Scripture)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알기 쉽게 삼위일체이신 구세주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삼위일체 중의 어느 위(位)를 특별히 강조할 때 생기는 위험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위(位)란 용어를 꺼려하고 오히려 본체(substance)란 용어를 택한 이유이다.60 위대한 종교 개혁가 칼빈은 교회 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체제와 또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 철학도 논박했다. 또한 그는 삼위일체 중에서 제2위 또는 제3위와 같은 어느 한 위만을 특별히 강조하는 일단의 종파들 사이에 만연된 사조를 논박한다. 칼빈의 설교에서 볼수 있는 것은, 논증적인 구절들을 늘 명백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61 칼빈은 성령 중심의 신학만 강조하게 되면 운명론적 주관주의(Subjectivism)로 향하는 첫 단계가 되기 쉽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본주의로 조금씩 다가가는 처사라고 경고했다62 이 두사실은 칼빈의 설교의 줄기며, 꽃이며, 뿌리이다. 이것을 볼 때 칼빈의 설교의 입장과 현대 설교에서 나타난 이론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설교가들은 대부분 삼위 일체 하나님을 각 위(位)별로 독립적으로 분산시켜서 언급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런 경향은 설교에서 뿐 아니라 목회 기도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이고 함축성이 풍부한 명칭으로 삼위일체를 동시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ity)인 신학적인 틀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63 뿐만 아니라 칼빈 설교의 신학적 특징 중의 하나는 역시 '하나님의 섭리' 에 대한 강조이다. 특히 칼빈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조점은 욥기의 강해 설교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섭리에 대한 강조라든지 선택에 대한 강조점도 역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절 대 주권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교자로서의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교리를 성도의 위로로서 사용하였던 것이다.64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추상적인 것으로 보여지지 않았으며, 교의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 에 대한 강조는 바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와 연관지어져 있다. 칼빈의 설교에서 주권적 은혜는 선택의 계속적인 강조와 더불어 모든 설교의 주제였다. 칼빈의 설교는 그것이 단순히 신학의 일부분이거나 성경의 한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구원의 성도들의 삶 전체를 다루며,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서의 설교였다.65

 

3.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상에서 강해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모습과 그의 설교 방법을 개괄적이나마 살펴본 셈이다. 사실 우리는 칼빈의 다른 신학 작품도 그러하지만 그의 방대한 설교를 모두 읽을 수는 없다. 더욱이 칼빈의 저작 전집(Calvini Opera Omnia)에 포함된 방대한 라틴어 설교집들은 퍽 난해한 것들이다. 66 다만 우리는 영어로 번역된 극히 일부분의 칼빈의 설교집과 칼빈 연구의 2차 자료를 이용해서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살펴본 셈이다. 하여튼 서론에서도 살펴보았거니와 신학자로서, 교회 개혁자로서의 칼빈의이미지가 너무 부각된 나머지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강단의 사람이었고 전무후무한 강해 설교자였다. 그가 이룩한 종교 개혁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구원의 복음, 위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개혁 교회가 개혁 교회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설교의 현장에서인 것이다. 그의 설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설교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개혁 교회로서의 바른 모습을 찾는 1차적인 작업은 개혁자 칼빈이 이루어놓았던 강해 설교의 방법을 다시 재발견하는데 있다고 본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적 신학을 정립했다고 하나, 설교의 현장은 그것과 무관한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칼빈이 말한대로, 우리가 강단에 오르는 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의 비전과 환상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67 이제 칼빈이 깨달았던 단순한 복음, 순수한 복음증거의 도구로 쓰여질 우리들은, 4세기 전의 개혁자 칼빈의 설교 철학과 그 방법에 다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주(註)
1. johannes Calvin, Preeken, Het Gepredikte Woord, Vertald door Ds. J. Douma en DS.W.H.V.d. Vegt, Deel I(T.Wever N.V.Franeker),p.1
2 P.Biesterveld, CaIvin als Bedienaar des Woords,(Kampen:J.H Bos.1897). Biesterveld는 화란의 캄펜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었다. 이 책은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학문적으로 다룬 고전적인 책이다.
3. C.G. Kromminga, Man before God's Gace in Calvin's Preaching.
4 E.Muhlhaupt, Die predigt Calvins, ihre geschichte, ihre From, Und ihre religiosen grundgedanken, pp. 24-38.
또한 R.S.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82-83,94.
5 Kromminga,op.cit.,p.6. 대개 영문으로 번역된 칼빈의 설교들은 다음과 같다.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와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 from Job(trans, L. Hinon), Sermon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Christ(trans.T.H.L.Parder)등과 같이 Corpus Reformatorum 또는 Calvini Opera 에서 부분적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칼빈신학연구회편, “칼빈 서거 400주년 기념 논문집, PP.113에 Wilhelm Niesel의 글” 최근에 발행된 칼빈 설교집의 ‘신학적 내용’ 을 참고할것.
6. John Calvin, Sermons from job, Introduction by Harold Dedkker, p. xlii.
7. Ibid.p.xiv. "the Sermon becomes redemtively effective only when the Holy Spirit is operative in both the preacher and the hearers."
8. ibid.
9. Ibid. p. xvii. "… Scripture must be interpreted with Scripture."
10. Ibid, p. xxiii. 참조 Harold Dekker, 'Calvin's Sermons' ; Their structure and style, Calvin Forum, May(1951),p.205.
11.T.Hoekstra, Gereformeerde Homiletiek(Wageningen,1926),pp. l62f.
12 L.Nixon ed.,J. Calvin's Sermon from Job. Introduction by H. Dekker(Baker,1952),p.xxiv
13.Ibid.p.xxvii. 칼빈의 설교의 서두에서는 "우리는 어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아침에 보았습니다” 등의 말을 했으며, 마감할때는 “요약컨대,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의미한 바를 지금 깨닫습니다. 나머지는 내일까지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칼빈에게는 대지 구분, 변화, 그리고 설교학적 기술같은 것은 없었다. 문단을 구분하는 말은 대략 이렇게 넘어간다. 즉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번째 사항입니다" 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구절로부터 결론지어야 할요점입니다'라고 말하고 다음 강해로 넘어가곤 했다. L. Nixon, John Calvin, Expository Preacher(Eerdmans, 1950)
14.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p.146.
15. Ibid,p.147.
16. Parker, Sermon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Christ.p.32
17.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p.72.
18.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by L. Nison, p. 127.
19. Ibid., p.240.
20.Ibid.,pp.241f.
21. Sermons from Job, trans. by L. Nixon 화

'종교 개혁 !! 여러교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시대 개혁의 선구자 위클리프의 개혁적 교회론 1  (0) 2021.12.27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0) 2021.11.14
존 녹스  (0) 2021.10.09
브래드 포드  (0) 2021.10.09
잔느 귀용  (0) 2021.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