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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기억할 네 가지

하나님아들 2021. 9. 15. 23:51

 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기억할 네 가지

[출처] [퍼옴] 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기억할 네 가지 (한마음개혁교회) 

 

밴후저 교수님이 본인이 2015년에 쓰신 글 한편을 보내주셨습니다.

제목은 “Letter to an Aspiring Theologian”입니다. 참 좋아서 나누고 싶네요.

이 점은 내가 분명히 하고 싶네. 신학은 9시부터 5시까지 하면 되는 일도 아니고 단지 직업도 아니라네.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부르심이지. 이 부르심은 단지 학문적 소양이나 전문직 자격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네. 자네가 가져야 할 이미지는 트위드 재킷을 걸친 교수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제자들일세. 신학자가 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데로 온 지성과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따라간다는 것일세.

밴후저 교수님 본인은 옷도 잘 입으시고 신사적이십니다만 (스코틀랜드에서 8년 동안 교편을 잡으셨고 박사 학위는 캠브릿지에서 취득하셨고 아내 실비아도 프랑스 분이시라 유럽 감성 충만하십니다.) 항상 학생들이 교회를 향해 삼위 하나님을 향해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방향키를 툭툭 치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셔서 더 좋기도 하고요.

신학을 한다는 것

 

이 편지에서 교수님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내린 신학의 정의를 인용하시며 발판으로 삼아 논의를 이어가시네요.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이고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cite style="box-sizing: border-box; font-style: normal; color: rgb(108, 119, 129); font-size: 13px; margin-top: 1em; position: relative;">토마스 아퀴나스
</cite>

신학이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다는 사실은 어느덧 많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시고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일수록 처음에 고백했던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어디론가 희미해지고 밴후저 교수님이 자주 잘못된 사례라며 말씀하시는 포이어바흐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신이라고 여기는 오류이죠. 신학이 다른 모든 학문과 다른 이유는 기존 학문의 방법론과 출발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Theos(하나님) 보다 커서 logos(학문)를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신학의 저자이시면서 끝맺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신학 앞에 여러 관형어들이 붙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신학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만 그렇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치신 것과 그분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 힘써 사유하는 것일세.”

윌리엄 에임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에 관한 교리이다.” 여러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신학에 관해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신학은 단지 학교에서 공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그리고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경건을 연마하는 것이야.”

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기억할 네 가지

 

이어서 밴후저는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네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삼위일체적으로 생각하는 연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대상/주제(subject matter)이기 때문이죠.

자네는 언제나 어디서나 신학의 궁극적 대상/주제로서 삼위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활동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네. 성부는 성령을 통해 말씀(the Word)하신다네.

신학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해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 그러니 이 교부들의 금언을 새기게.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 (삼위일체의 외적 사역은 나뉘지 않는다).

둘째, 이 신학의 대상/주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저런 해석학적 현미경 아래 놓고 시험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으로 말씀하셨고 우리의 반응을 요구하시지. 그리고 그건 우리가 제일 위격과 제이 위격 안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해(cf. Martin Buber의 I-Thou). 성경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경전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을 전체 이야기의 부분으로 읽어야 하지. 성경은 단지 내러티브가 아니라 드라마야. 육화된 이야기란 말야. 거기서 오늘날의 독자들은 말하는 역할을 맡은 게라네.

셋째, 신학적 사유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되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읽어야 합니다.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수천년간 지속되어 온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 보편성/공교회성(Catholicity)은 잘 알려진 교회의 표지일 뿐 아니라 신학자의 특징이기도 해야해. 복음이 자네 사유의 중심이 되게 하되 보편 전통(catholic tradition)이 그 내용을 채우고 그 외연을 설정하게하도록 하게나. 복음적인 것(Evangelical)과 공교회적인 것(Catholic)은 협력자이지 라이벌이 아닐세.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성경을 읽을 때 체계적으로(systematically)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종합적인 체계로 조직될 수 있는 일련의 진리 집합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야. 그렇게 읽으면 우리가 보통 단단한(hard) 조직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하겠지. 하지만 나는 ‘부드러운’ 조직신학을 권하고 싶네. 진리를 하나 된 것으로(unity) 인지하되 기하학적 공리처럼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지. 그건 구속사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 만약 자네가 성경에 기초해서 교회가 선포하는 것들의 전체적인 일관성을 표현한다는 의미의 “조직” 신학을 추구한다면 (그 또한) 잘 하는 것이네. 삼위일체나 속죄와 같은 교리들은 이 이야기의 핵심 인물들을 파악하는 것이거나 핵심 사건의 의미를 정교화하는 것이거든.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네 가지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죽었든 살았든 한 신학자의 글들을 골라서 몽땅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시네요. 모든 것에 동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목표는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사유하는 신학이 필요합니다

 

글은 더 진행됩니다만 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 정도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학 오기 전에도 조금씩 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느꼈던 것이지만 와서 더 깊이 느낀 것은 바로 ‘사유함이 없는 신학은 말 그대로 사학(死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맞추는데 너무 혈안이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놀이터의 주요 구조물들과 외부 테두리는 제시될 수 있으니(이 자체가 격렬한 토론의 장이긴 하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형태로라도 제시될 수 있습니다) 신학자로서 그 놀이터 안에서 자유롭게 사유함으로 노는 법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신학을 사유(思惟)하지 않는다면, 놀이터를 사유(私有)하는 부유함에 마음은 뿌듯할 수는 있으나 정작 그 기구들이 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며 어떻게 노는지도 알지 못해 의미는커녕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방대한 전통을 가진 교단이나 신학교라는 데 취하여, 또는 굉장한 거물들을 배출한 신학이며 물샐 틈 없이 완벽해보이는 체계를 구축한 신학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사유하기를 포기한다면… 어느덧 부지중에 자기가 그렇게 비판하는 실용주의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적응이 아니라 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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