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학의 중보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0. 생애
토마스는 이태리 남부의 아퀴노라는 마을 근처에서 1225년경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를 5살 때 근처의 한 분도회 수도원에 봉헌하여 초등교육을 받게 했다. 뛰어난 지적인 성숙을 보였던 토마스는 이미 14세에 인근 나폴리 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서는 많은 대학에서 금지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자신의 학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될 이 철학자를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접할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토마스에게는 나폴리에서 더욱 중요한 만남이 일어났다. 당시 그곳에는 새로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들의 청빈한 생활,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열정 등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의 총장의 뜻을 따라 당시 신학의 중심지인 파리대학으로 길을 떠나자, 그가 교회의 고위성직자가 되기를 원하던 가족들은 도중에 그를 납치하여 약 1년간 감금하였다. 그동안 가족들은 혼자있던 토마스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들여보내어 유혹하거나 위협하는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토마스의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많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자신의 결정을 확고하게 밝힘으로써,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도미니코회에 정식으로 입회했다.
드디어 그는 1245년 가을에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大알베르투스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알베르투스는 당시 ‘보편박사’라고 지칭될 만큼 박학했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세계로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토마스는 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하며, 그로부터 놀랄 정도의 개방적인 정신을 물려받았다.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알베르투스는 몸집이 크고 말이 적었기 때문에 붙게된 그의 별명 ‘벙어리 황소’라는 말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을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지만, 그가 앞으로 가르치게 될 때, 그 울음소리는 전 세계에 울려퍼질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영감에 찬 예언은 바로 실현되었다.
토마스는 그후 파리대학에서 규정보다 젊은 나이로 강의를 시작했고, 1257년에는 사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우정 관계를 유지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보나벤투라와 같이 교수단에 받아들여졌다. 당시 전 유럽의 청년 학생들이 모여든 파리 대학에서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1259년 토마스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 9년동안 여러 교황청 소속 학원과 수도원에서 강의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4년에 성체축일을 제정하고 이를 위한 전례기도 편찬을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위탁했다. 편찬을 마치고 난 후에, 보나벤투라가 먼저 토마스의 기도를 한 번 읽어보고서는 그만 그 완벽함에 놀라 자기의 것을 태워버렸으므로 토마스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는 1269년부터 1272년까지 다시 파리 대학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 활동은 절정에 이른다. 이 시기에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통한 주석자임을 자처하던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벌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했다. 그후 이탈리아에 머물며 수도회 학교들과 나폴리 대학에서 강의했다. 토마스는 교황에 의해 리용공의회에 초청되어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한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서거했다.
그는 1323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879년에는 그의 사상이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영원한 아버지』에 의해 가톨릭교회의 공식 학설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이 토마스는 14세에 대학에 입학한 이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학문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재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그는 대학이나 교회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항상 초빙을 받았다. 이런 떠돌이 생활이 학자인 그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떠한 조건 아래서도 연구와 저술에 정진한 나머지, 짧은 생애에도 놀랄 만큼 많은 저작들을 남길 수가 있었다.
1. 철학과 신학의 구별
{토마스가 신학과 철학을 정식으로 명백히 구별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사실이다.
{지식과 신앙 즉 철학과 신학의 영역은 토마스에 의하여 서로의 한계가 분명하게 정해졌다.
토마스는 신으로부터의 은총의 빛(lumen gratiae)과 인간 본성의 이성의 빛을 구분하여 양자가 각각 자기의 분야와 그 한계 중에서의 각기의 권한을 갖도록 했다.
철학(과 기타 인문과학)의 영역 | 신학의 영역 |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뢰하기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알게된 원리들을 사용. (물론 하느님의 자연적인 협력을 따르지만) 인간의 추리의 성과로서 결론을 내린다. | 은총의 빛 신학자는 그의 이성을 확실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원리들을 권위나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인다. 그런 것을 계시된 것으로서 용납하기 때문. |
신의 존재와 그 세계창조 및 세계 내 제법칙과 사실은 철학의 대상 (그러나 ) |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안고 있는 본래의 신비, 즉 삼위일체설, 육화, 부활, 최종 심판과 같은 최고 진리, 초자연적 진리는 철학적 탐구 영역에 속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은총에 빛에 의해서만 계시될 것으로 본다 |
하나의 정돈된 현실영역이 존재하며 우리는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토마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 오직 신적 계시의 내용으로 삼고서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 되는 것이다. |
철학자는 경험계에서 출발하여 이성에 의해서 신을 논의하지만 그것은 피조물에 의거해서 신을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다. | 예컨대 삼위일체 같은 교의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서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인 하나의 계시된 전제이지 철학적 논증의 결론은 아니다. |
철학자는 피조물로부터 신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 신학자는 우선 신이 그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준대로의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기에 신학에서의 자연적인 방법은 신 자신으로부터 피조물로 진행하는 것 |
철학자가 이해하는 원리들은 오로지 이성에만 의거한 것이고, 그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들도 물론 계시된 것이 아니고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이해된 것이라는 점이다. | 신학자가 받아들이는 원리들을 계시된 것이고, 그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들도 계시된 것이거나 또는 계시된 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인데 반하여, |
토마스가 자기 자신의 체계를 수립함에 있어서 용감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했다는 것은, 개혁반대주의자의 행동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그는 {눈 앞에 주어진 도구를 이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사상에 더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코플88,414>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대한 의견이 전면적으로 일치하지 않을지 모르나, 당시 상황과 그가 입수할 수 있는 당시의 역사적인 자료의 빈약함에서 본다면, 그가 그때까지의 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훌륭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였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신학에 있어서 그는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의 철학을 수단으로 채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와는 관계없는 방법으로 신학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규정하고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가 있었다.<코플88,415>}
2. 피조물의 존재원리
{토마스의 본래적인 사고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밝혀진다. 그리고 그의 형이상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문제점․철학적인 근본태도 등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과 나란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의 사상도 있기 때문에, 토마스에게서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힐쉬554>}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존재원리들:
{토마스는 존재를 더욱더 해명하기 위해 질료와 형상, 인과(관계)와 목적(관계)이라는 개념들로 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의 실체의 원리를 이어 받는다. 그 밖에 또 플라톤적․아우구스티누스적인 사고로부터 원형이라는 개념도 이어받는다.
질료형상론
{우리는 변화 밑에 깔린 기체라는 개념을 그 자체에서 고려한다면 어느 일정한 실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면 규정하거나 혹은 특성을 부여하는 요소라는 다른 하나의 개념에 이르게 된다.
제1질료 | 실체적 형상 |
실질적 변화의 미규정적 실체 | 실체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인 바이게 하고 그것을 그 특수한 종류 속에 들게 하고 그런 것으로 규정하는 것. |
순전한 가능태 | 물체의 제1현실태 |
물질들의 형상들일 수 있는 모든 형상들에 대한 가능태로 있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형상없이 순전한 가능태인 것이다. | 그 물체를 특수한 종류 속에 들게하고 그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 |
'어떤 무엇도 아니며 어떠한 분량이나 성질도 지니지 않으며 존재를 규정하는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Met 7,2) |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물질적 실체의 구성원리로서 질료형상론을 받아들였다. 그는 제1 질료를 순전한 가능태로서 실체적 형상은 물체의 제1현실태로서 정의한다.
순전한 가능태로서의 제1질료는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토마스는 구체적인 실체, 즉 질료와 형상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합성체만이 물질적인 세계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형상
형상이란, 질료를 일정한 존재에 제한시키는 것(Phys 4,1,1) <힐쉬571>
토마스가 여기서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느끼면서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제일실체는 질료를 내포하는 것이며, 또 단순히 형상 속에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상만이 그 양식에 있어서 실체가 생기게 되는 원인(suo modo sola forma est causa)이라고 말하고 있다.(De ente 2)
"형상이란 사물이 모상으로서 신에게 관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이념을 동일시함으로써(I,84,1 & 5) 토마스에게는 실제로 형상이 ‘본질적으로 앞선 것’을 뜻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플라톤주의가 그의 형이상학의 핵심부에 스며있게 된다.
개별화의 원리: 질료
토마스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개별물은 각기 질료와 형상과의 결합에서 성립한다. 그 경우 형상은 다수의 개별물에 공통된 보편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므로 개별물로 하여금 개별물이 되게 하는 것은 질료인 것이다. 즉 질료가 개별화의 원리인 것이다.2)
토마스가 개별화의 원리를 질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질료가 형상과의 합일에서 받아들이는 분량적 규정에 대한 불가결한 요건을 지닌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코플88,420>
물질적 실체에 한정된 질료 형상적 합성
토마스는 {물질적 실체에서 볼수 있는 질료 형상적 합성을 유형의 세계에 한정. <코플88,422>
우리는 무생명적인 실체의 형상에서 시작하여 식물적인 형상, 동물적인 비이성적인 감각적 형상, 인간의 이성혼을 거쳐서 무한하고 순수한 현실태인 하느님에게까지 올라가는 형상들의 질서나 위계를 볼 수 있다.
그 계열의 정점에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순일성이 있고, 물질 세계의 정상에는 일부는 정신적이고 일부는 유형적인 인간 존재가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완전히 정신적이면서도 신성의 절대적인 순일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자가 존재해야만 한다. (De spirit. creat. 1,5)
천사들의 각이한 '계층'을 구별 <코플88,423>
천사들이 순수하게 비물질적이 아니면 안 된다.
천사들에게는 존재의 구별이 천사들의 우연성과 그리고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충분하게 보증한다고 주장함.
하나의 종에 속하는 천사의 다수성이 부정.
토마스는 질료는 개별화의 원리라는 것을 주장하는 한편 천사들에 있어서의 질료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에 하나의 종 안에서의 천사들의 다수성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태와 현실태
토마스도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게 한 생각에 찬동하고 있다. 이 두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Phys I,1,9 & 14)
가능태란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능태도 존재다. < 힐쉬573>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종류의 존재다. 이 가능태는 아직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가능태는 아직도 형성될 수 있는 바의 것이며, 작용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그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되나, 그러기 전에는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실태는 현실이요, 현실로 된 것이다.
그래서 현실태는 가능태의 완성이요, 그런 한에 있어서는 가능태의 선(bonum)이다. 이렇게 완성된 존재는 제일현실태라 불리며, 이 존재자의 작용하는 존재(agere)는 제이현실태이다.
현실태는 항상 가능태에 앞서는 것인데, 특히 개념․시간․본성 및 목적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근본적인 공리가 주어진다.
이 공리가 토마스의 형이상학 전체를 떠받치고 있으며, 존재가 신 안에 그 발단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내는 최고의 업적을 낳게 한다.
신은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며, 순수현실태(actus purus)다.
다른 편에는 절대적인 가능태가 있다. 이 두 가지(순수현실태와 절대적인 가능태) 사이에는 전체적인 존재가, 가능성과 현실성이 혼합된 것으로서, 또 무라는 극한에서 무한히 완전한 것의 극한에 이르기 까지의 것들이 계속해서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으로써 끼여 있다.
이러한 존재는 창조된 존재이며, 신이 이런 존재의 시작이며, 그리고 좌우간 존재가 있는 이상, 그것은 창조된 존재임에 틀림없다.
본질과 존재
{창조된 존재와 창조되지 않은 존재의 구별은 스콜라철학에서 기본적인 것인데, 토마스는 이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가 아니라, 아비첸나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런데 아비첸나의 학설은 본질과 존재를 구별한다.
{“존재라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실체가 하나의 존재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것이다."(CG II,54)
존재는 본질에 대해서 흡사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있다.
형상은 본질의 영역에서 규정하거나 완성하지만, 그 본질을 현실화하는 것은 존재이다.
“질료와 형상의 합성체가 아닌 지적 실체(여기서의 형상은 자립하는 실체이다)에 있어서 형상은 본질이나, 존재는 그 형상을 존재하게 하는 현실태이다. 따라서 그 실체에는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 즉 실체와 존재의 합성만이 있다.
그러나 질료와 형상의 합성 실체에는 현실태와 가능태의 이중적인 합성이 있다.
첫째는 실체 그 자체에 있어서의 합성으로서 이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며,
둘째는 그렇게 이미 합성되어 있는 실체 자체와 존재의 합성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질료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며, 본질도 아니고 본질의 일부도 아니다. 이를테면 존재는 본질을 있게 하거나 존재를 가지게 하는 현실태이다." (CG II,54)
"'존재'는 어떤 현실태이다. 왜냐하면 한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능태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태에 있기 때문이다." (CG I,22)
토마스는 오직 하느님에게 있어서만 본질과 존재가 동일하다고 주장.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은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정신적인 실체들은 순수한 형상이며, 따라서 토마스에 의하면, 천사들은 서로 종적으로 구별되지, 수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에게도 본질과 존재의 합성은 있다.
“이 정신적인 실체들은 질료가 없는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현실태여야 할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고, 가능태와 뒤섞여 있다.”(CG 5)
하느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분유하며', 받아들이는 그것은 받아들여지는 그것과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I,3,4; CG I,22 참조)
존재는 현실태이며 이로 인해 본질은 존재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존재는 본질을 규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현실태로서의 존재는 가능태로서의 본질에 의해서 한정됨으로써 일정한 본질의 존재가 된다. (Pot 7,2,ad 9)
존재없는 어떠한 본질도 없고, 본질없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
이 두 개의 구성원리는 객관적으로 다를지라도 존재는 더욱 근본적인 원리이다. 창조된 존재는 가능태의 현실(태)이므로, 가능태는 존재를 떠나서는 아무런 현실성도 지니지 않는다. 존재는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것"이며 "모든 완전성의 완전성"(Pot 7,2,ad 9)이다.
이리하여 토마스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의 중심에 어떤 불안정성이나 우연성 또는 비필연성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바로 유한한 존재의 근원인 유일의 존재자, 즉 본질과 존재의 합성의 창시자가 있다는 것과, 그 자신은 본질과 존재로 합성될 수 없으나 자신의 본질로서의 존재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즉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코플88,429>
{본질과 존재의 이론에 관해서는 사상사적으로 세 가지의 사실을 확정할 수 있다.<힐쉬575>
1. 현실태․가능태의 학설을 이어받은 일
2. 아리스토텔레스에 동화된 용어를 사용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관여사상을 되살리는 것(CG II,52)
3. 사고와 존재의 분리를 드러내는 것(현대적)
이런 생각에는 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학파 및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하는 비플라톤적인 새로운 실재개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실체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합성실체(자연적 실체) | 단순실체(정신적 실체) | 신 |
형상과 질료로 합성된 실체 | 질료없이 형상만으로 있는 실체, 즉 본질만의 실체 | 신은 현존과 본질이 완전히 일치하여 분리되지 않는 실체 |
신이외의 실체에 있어서는 존재와 본질은 구분된다. 특히 단순실체의 경우에 이 구분은 뚜렷하다. 단순실체는 본질만이며 현존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본질은 보편적 형상이고 현존<존재>는 현실성(actualitas)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마스는 보편의 문제에 있어서 보편이 개별자 속에 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자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보편자는 신의 정신 속에 그 관념으로 존재하고, 개별자 속에 그 본질로서 존재하고 우리의 사유 속에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철교126>}
3. 신 존재의 증명
토마스는 이 세계의 매우 가까운 측면에 관해서 성찰함으로써 <후험적으로> 신의 존재에 관한 충분한 증명이 얻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이 성찰 자체는 어려우며, 그는 이 어려움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는 누구라도 형이상학적인 성찰을 할 수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 성찰의 기초가 되는 경험적인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가까운 것이다.
유한한 여러 사물과 그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경험적인 사실을 발견해 나갈 필요는 없다.
형이상학자가 신을 발견하는 것은, 탐험가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섬이나 꽃을 갑자기 발견하는 방법으로써가 아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연구나 탐험보다도 오히려 주시와 성찰이다.
그러면 아퀴나스가 신의 존재를 잠재적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사실들이란 무엇일까?
논증의 이해
첫째이며 더 명백한 길은 運動變化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1)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2-A)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진다. (omne autem quod movetur ab alio movetur)
사실 어떤 것도 그것을 향해 움직여지는 것에 대해 可能態에(in potentia) 있지 않는 한 움직여 질 수 없다.
움직여 주는 것은 그것이 現實態에 있는 한 움직여 준다.
(2-A-1) = 즉 움직인다는 것(movere)은 어떤 것을 可能態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가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2-A-2) 그런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 가는 것은 현실태에 있는 어떤 有에 의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 그러나 같은 것이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현실태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2-A-3)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2-A)]
(2-Ba)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2-Bb)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2-B+) 그 이유는, [만일 움직이는 것의 무한한 소급이 인정된다면] 어떤 첫 움직이는 자(aliquod primum movens)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다른 움직여 주는 자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도 움직여지지 않는 어떤 第一動者(aliquod primum movens)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둘째 길은 能動因(causa efficiens)의 이유에서다.
능동인의 질서 및 계열에서 시작
{여기서 우리는 능동인의 존재에서 신인 제1원인의 존재를 귀결해낼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 논증은 다음의 우연유에서의 논증과 더불어 '우주론적 증명'(argumentum cosmologicum)이라고 한다.}
{두 번째 논증은 첫 번째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움직이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 여기서는 능동인이라는 좁은 개념이 사용된다. 토마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능동인으로부터 출발한다.
(1) 사실 우리는 이 感覺界에 능동인들의 질서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수 많은 능동인의 질서를 경험한다. <정의채81,113>
예컨대 내가 방망이로 공을 친다면 공은 움직인다. 이때 공은 방망이에 의해 움직이고 방망이는 내 손에 의해, 내 손은 내 팔에 의해 그리고 내 팔은 내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또 아들은 (그 존재에 있어서) 아버지한테서 있게 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서 등등의 능동인의 질서가 있다.}
(2-A) 그런데 이런 세계에서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능동인으로 발견되지도 않으며 또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능동인일 수 없다라는 부정적으로 확정된 사실로부터 (소위 인과율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세계안에 있는 사물들은 능동인에 종속되어있다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2-B) 그런데 능동인들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할 수는 없다.
{이 부분에서는 능동인을 무한 소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무한히 소급되는 능동인들의 계열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어떤 한 능동인에 종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셋째 길은 可能과 必然에서(ex possibili et necessario) 취해진 것이다.
{마이모니데스가 아비첸나로부터 계승하여 발전시켰던 세번째의 증명}
어떤 존재자는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에서 출발.
우연유적인 것 (contigens) | 필연적인 것(necessarium) |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 |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즉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다른 것에 의해 충족한 것(heterosufficiens) |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충족) |
분유적 유(ens per participationem) | 본질에 의한 유(ens per essentiam) |
다른 것에서 유래되는 존재 혹은 타자의존유 (ens ab alio) | 자체유(ens per se) |
존재와 비존재가 전혀 무관한(indifferens) 것 | 비존재에 단적으로 반대된다. |
피조물의 속성 | 신만의 속성 |
생성소멸하는 유, 그 작용에 있어서 작용할 수도 안할 수도 있는 불확정적인 것 이런 작용은 외적 원인에 의해 장애를 받을 수 있는 것. |
지금 있는 것과 달리는 있을 수 없는 것. 존재양식에 있어서 불변이며 확정적인 것 그 본성상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소멸될 수 없으며 그 작용에 있어서도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장애를 받을 수 없도록 확정적인 것. |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자들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1) 즉 우리는 사물세계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를 비롯하여 무기물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변화, 즉 생성 소멸함을 수없이 경험한다.
즉 우리는 이 세계에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有를 만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는 有는 우연유(ens contingens)이다.}
<대전제/소전제>는 이 가능적이고 생성, 소멸하는 것을 또 다시 가능적이지 않고 필연적인 원인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가능적인 것이] 또 다시 가능적인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모든 유가 가능한 것 뿐일 수는 없고"로 끝나고, 귀납적으로 모든 경험가능한 가능한 것이 포함되는 가능성으로부터 끌어내는 논증에서 배제하고 있다.
(2) <소전제/대전제>는 다시 조건적으로 필요한 원인들과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원인들 사이의 상충을 보여주고 조건적으로 가능한 한 원인으로 무한 소급해 가는 것을 (첫번째와 두번째 증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배제한다.
(3) 따라서 우리는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必然性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넷째 길: 완전성의 제 단계에서의 논증 (단계론적(climacologicum) 논증, 또는 통일성(henologicum)의 논증)
{넷째 증명은 사물들에게 다양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속성들, 즉 선함, 참됨, 고상함등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속성들을 양이나 질의 범주에 속하면서 단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속성들, 예를 들면 더 길거나 짧음, 더 진하거나 흐린 빨강 등과 같은 것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 증명에서는 존재자의 모든 범주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는"), 그러나 다양한 정도로 발견되는 그러한 초월적인 속성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1) <대전제>는 선함과 착함과 같은 (초월적)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이 최고도로 있는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다. 이것과의 멀거나 가까운 것에 따라서 그 속성들이 지니는 단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최고의 것은 바로 그 속성들이 최고로 높은 단계로 그것에 속하는 존재자이고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존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 <소전제>는 그 최고도의 것이 자기에게 연관을 맺고 있는 속성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측면에서 그 사물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3) 결론은 소전제에서 언급된 그 최고도의 것이 세상 사물들의 최고의 존재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 증명은 이제까지의 다른 증명들과 마찬가지로 귀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증은 이제까지처럼 매개 가능한 원인들 쉽게 보충할 수도 있을텐데 을 통해서 첫째 원인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전제에서는 즉시 사물들이 최고의 존재자와 맺고 있는 관련을 밝히고 있고, 그 다음 단계 소전제에서는 이 최고의 존재자가 첫 번째 존재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다섯째 길: 우주의 질서에서의 논증.
다섯째 길은 사물들의 통치에서(ex gubernatione rerum) 취해진다.
(1)사실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自然物들이 가장 좋은 것(optimum)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1')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意圖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2)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3)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이성적 존재가 있다.
(3')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토마스의 "다섯 가지 길"의 공통적인 논증 구조
{기본 구조는 귀납적인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전제들>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정한 본성을 지니 사물들 R1,R2,R3 운동, 우연성(생성, 소멸), 완전성의 많고 적음, 자연적인 목적성 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근접원인들 CA1, CA2, CA3 등과 연결시킨다.
<소전제>들은 이러한 원인들이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고 "제1"의 본래적인 원인에 대해서 選言적인 대당관계에 놓여있는 "제2"원인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이 제2원인들이 무한히 <계속되는 계열>로 연장 될 수 없다는 논증이 삽입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에는 결국 제1원인이 제거되게 되고 이에 따라서 다른 모든 것들도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제2원인들은 제1원인의 힘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고, 자신은 제1원인의 결과로서 드러내며, 귀납적인 논증의 틀에서 매개사로 나타나다.
결론은 세상사물들과 제1원인의 필연적인 관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러한 제1원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세상사물 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물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물들이 종속되어 있는 제1원인도 또한 존재해야만 한다.
II R --- ca
ꌼ [ca1,2,3 무한으로의 소급]
I ca --- ꍔ
ꍄ CA
III R --- CA
다섯가지 길에 대한 평가
{토마스는 이 다섯 증명들 중에서 제일 첫째 것을 보다 더 명백한 방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정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기본적인 증명은 실제적으로 셋째 증명 즉 셋째 방도인 우연성으로부터 한 증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럴 것이 첫째 증명에 있어서는 우연성으로부터의 논증이 운동과 변화라는 특수한 사실에 적용된 것이고,
▷ 둘째 증명에서는 인과성의 질서 즉 인과적 산출에 적용된 것이고,
▷ 넷째 증명에서는 완전성의 정도에 적용된 것이고,
▷ 그리고 다섯째 증명에서는 궁극적 목적성에, 즉 우주적 질서를 달성하는 마당의 무기적 대상들의 협동에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우연성 자체로부터의 논증은 모든 사물이 그것의 충족이유 즉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이유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변화나 운동은 그 충족이유를 부동의 원동자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그리고 제2차적인 원인들과 결과들의 계열은 그 충족이유를 아무런 원인도 안가진 원인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고,
▷ 제한된 완전성은 그 충족이유를 절대적인 완전성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끝으로 자연 속의 궁극목적과 질서는 그 충족이유를 한 예지, 즉 설계자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Coplestone 1962, 345~6)
여기에 다섯 가지 충족이유에 해당하는 '부동의 원동자' '무원인의 원인' 즉 '제1원인', '절대적 완전성'을 지닌 '최고완전자', '예지적 설계자'인 '최고지성'은 우연유의 충족이유인 '필연유' 즉 '필연적 존재'와 동일한 것이니 이런 것은 바로 유일한 신을 여러모로 밝히는 '다섯 가지 길' 즉 다섯 가지 방도인 것이다.
4. 유비 개념과 하느님에 대한 진술
유비가 특별히 중요한 곳은 신학에서이다.
신을 세계에다 관계지우고, 신이 인식할 수 없는 바의 것이 아니라는 것, 더욱이 범신론적인 방법으로 신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이 유비이다.
이러한 것들이 유비문제가 거기에 속해 있는 일반적인 철학적, 체계적인 관련이다.}
역사적인 발전
{그런데 토마스에 있어서는 유비라고 불리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유비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은 동의(어)와 이어(어) 및 유비를 함께 묶어, 항상 이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여의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유비라는 말에다 다른 뜻을 부여했다. 즉 그는 그 뜻을 수학에서 받아들여, 이 뜻을 가지고서 법률적인 평등이라는 이상을 기초지으려 했다.
[수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정의론에서 사용한 기하학적인 <서로 비슷함>(相似性)이라는 개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여기서는 유비란 두 가지의 개념들의 관계와 다른 두 가지의 개념들의 관계 사이에서 성립되는 동등(평등), <힐쉬83,564>
즉 눈의 육체에 대한 관계는 이성의 영혼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하는 그런 동등을 뜻하게 되었다. 이런 형식을 나타내는 가장 간단한 형식은 6 : 3 = 4 : 2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네 개의 항으로 이룩된 유비는 <비례적 유비>(Proportionalitaetsanalogie)라고 불리며, 대개의 경우 유비라 하면, 바로 이 <비례적 유비>만을 뜻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낡은 플라톤의 닮음의 유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닮음의 유비는 같은 한 가지의 것에 관한 진술(Pros-hen-Aussage) 밑에 감춰져 있다.
이런 진술은 서로 연관지워져 있는 多義性이라고도 할 수가 있으나, 命名的 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이 명명적인 진술이라는 명목하에, 존재의 유비를 다루고 있다.}
{존재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Ar-Met 4,2,1003a33)<힐쉬83,237>
그런데 본래적, 근원적인 뜻으로, 존재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건강한이라는 개념을 한 가지의 예로 든다. 우리는 한 가지의 신체적인 상태를 건강하다고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따. 그러나 또 건강의 징표에 불과한 얼굴빛도 건강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약이나, 건강을 지켜주는 음식도 건강한(몸에 이로운) 것이라고 한다. 이 때 건강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 말이 완전히 다른 뜻으로 사용되지도 않고 類比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에는 본래적인 源뜻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으며, 이것들은 우리들이 신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뜻이다. (Ar-Met IV,2: XI,3)
존재의 개념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 존재의 개념도 유비적인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들이 신에 관해서, 세계에 관해서, 신체에 관해서, 그리고 속성에 관해서 표명하는 존재는 우리들이 인간과 동물을 동일한 뜻으로 생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같은 말이 꼭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또 내가 <먹는 과일과 교통수단으로 타고 다니는 것을 다 같이 배>라고 할 때 처럼, 같은 단어가 완전히 다른 뜻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 존재라는 말은 유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一義性과 多義性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런 <서술/빈사>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類比라 하지 않고 관계지워진 다의성이라고 불릴 법한 어떤 것을 고려한, 또는 그런 어떤 것에 의한(pros hen, aph henos)서술이라고 한다. }
이런 것들은 모두 닮음의 유비요, 관여의 사상이다.
모든 隱喩, 비유 및 상징 등은 이런 종류의 유비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에 의하면 신에 관한 어떤 것은 피조물들로부터 알 수 있는데, 그 기초는 피조물들이 신의 창조의 결과로서 다만 불충분하게나마 신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Q: 그렇지만 만일 개념들이 우리가 경험한 피조물들에 유래하고 그 위에 신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일의적인 의미에서나 다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니,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인가? 혹은 어떠한 타협이 있는 것인가?
A: 토마스의 답변은 개념들이 유비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신과 피조물들을 존재라고 서술할 때엔 우리는 존재를 맨처음으로 신에게 즉 스스로 존재(현존)하는 자존적인 존재로서의 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돌린다. 다음에 2차적으로 신에 의존하는 것으로서인 피조물에 속하는 것으로 말한다.
유비적 서술은 일의적 서술과 다의적 서술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유비적 서술에서는 서술적인 빈사가 신과 피조물에게 적용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같은 의미에서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또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사한 의미에서인 동시에 유사하지 않은 의미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이같은 동시적인 유사성과 차이성의 개념이 유비에서 기본적인 것이다.
긍정적 방식(via affirmativa)
토마스는 신중하게 앞서 말한 부정적 방식만을 단순하게 고집하지 않고, 긍정적 방식도 인정한다.
그러므로 신적인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적극적인 내용을 갖는 것이다.
5. 인간관
신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적 이원론을 따르는 인간관은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비로소 극복되기에 이른다. 그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전적인 단일성을 지닌다는 성서의 관점을 그리스의 철학적 개념과 범주로 정리했다. 이 작업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을 계승하여 변형시킴으로써 착수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의 불완전한 실체가 함께 협동해서 비로소 인간이라는 단일의 완전 실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아니고 육체와 함께 할 때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활동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지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통해 사유하고 배우며, 사물을 관찰하는 지각 행위는 영혼이나 육체의 한 측면에 제한되지 않고 육체를 통해서 영혼이, 영혼을 통해서 육체가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나름대로의 고유한 도구들을 가지고 비로소 자신의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듯이, 영혼도 각자 고유의 육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 즉 사유 능력을 영혼과 구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정신을 수용하면서도 그리스적 이원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성서의 히브리적 관점과 상응하는 인간관을 피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이 육체의 유일한 형상’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두 개의 실재로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전체적 영혼 실재이며, 영혼은 육체를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적 형상인 이성적 영혼이 현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만 이성 작용들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을 유지하고 감각 기능을 수행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 복수라고 가정하게 된다면 인간의 통일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토마스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이란 부자연한 어떤 것일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통일되어 있음은 영혼이 그 본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필요하다. 그에게서 영혼은 엄격하게 육체와 연관되어 있어서, 육체 없는 영혼은 몸에서 떨어진 손과 같다고 진술되고 있다.
따라서 토마스에게서 육체는 영혼과 대조적으로, 즉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의 현존 조건으로, 육체 없이는 영혼은 인격체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의 감옥이 아니요, 영혼의 방해물이나 단순한 도구도 아니다. 또한 인간의 육체성은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벌이나 죄의 결과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은 완전한 실체이며, 육체는 우연적으로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 이것은 잘못된 것이기에, 영혼이 육체와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은 영혼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성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영혼론』)
그리고 인간 정신은 육체를 통하는 과정을 거쳐서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선을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는 ‘죽음 이후’, 즉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이후의 사태에 대한 묘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은 죽은 뒤에도 존속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이런 상태를 더 완전한 상태나 영혼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본성적으로 육체의 형상이기 때문에, 육체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있는 영혼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며 엄밀한 뜻으로 인격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있는 것보다는 합쳐져 있는 것이 더 낫다. 이렇게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은 마지막 날에 ‘육체의 부활’의 필요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때 모든 영혼은 다시 자기 몸과 합쳐지게 되고, ‘결합체(compositum)’로서 구원 또는 영벌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육체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영혼의 본성에 반대된다. 그러므로 본성에 반대되는 것은 모두 항구적일 수 없다. 영혼이 언제까지나 육체에서 떨어져 있다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언제까지나 존재를 계속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다시 육체와 합쳐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이것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의 뜻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불사성(不死性)은 육체가 언젠가는 부활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반이교도대전』)
인간이 ‘영혼’만으로 자신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성 역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통하여 인간 완성 과정에서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토마스는 주장한다. 이렇게 토마스는 그리스도 교회의 ‘육체 부활’ 신앙을 통해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생명 원리로 규정했고, 이로써 이원론적 인간관을 극복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은 그리스도 교회의 공적 교리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 교회는 인간을 물질적 육체와 정신적 영혼이라는 두 개의 구성 원리로 이루어진 합일체로서 가르치고 있다. 즉, 이 두 개의 존재 원리들로부터 하나의 완전한 인간 존재가 생성되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해 정립된 성서의 통합적인 인간관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플라톤적 이원론은 서구의 문화적 유산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아마도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이 더욱 쉽게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위해 토마스가 제시한 바와 같이 육체의 긍정적인 면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6. 윤리학
{“토마스가 윤리의 영역에서만큼, 그 체계화하는 재능을 빛나게 발휘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M. 바움가르트너). <힐쉬596>
토마스는 윤리학에서 특별히 풍부한 자료들을 손질할 수 있었다.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사상 중에서 그가 이용하지 않은 것은 거의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콜라학자의 윤리학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M. 비트만)
{토마스는 윤리적 행위의 전제로서 '의지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근저에는 다분히 결정론적 요소가 깔려있다. <철교 128>
또한 개별적 덕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 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4主德을 받아들이면서도 여기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3가지의 그리스도교적 윤리를 첨가하였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성이란 곧 인간의 본성과 같은 것이어서, 그 무엇이든 간에 이성에 위배되는 것은 역시 인간 본성에도 위배되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선이란 이성이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스스로의 완성을 기하며 또한 하위급에 속하는 욕구충족심을 이성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서 啓導되도록 하는데 있다.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하면 선한 인간이란 훌륭한 인식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기보다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인간사를 놓고 보면, 특히 철학자로서는 인식의 가치를 윤리적 행위보다 높이 평가하지만, 초월의 세계, 특히 신의 경우를 감안한다면 사랑이 인식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행복주의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는 인간의 행위만이 자유의 행위, 즉 인간으로서의 인간, 이성적인 자유의 존재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행위는 인간의 의지에서 생겨나며, 그리고 이 의지의 대상은 선이다.
{특수한 목적 즉 선은 특수한 인간의 행위가 수행되는 그 달성을 위하여 인간의 의지를 충분히 완성하고 만족시키지 않고 또 시킬 수 없다. < 85/272>
왜냐하면 인간적 의지는 보편적 선을 향하여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보편적 선의 달성에 있어서만 그의 만족을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 구체적으로 그 보편적인 선이란 무엇인가?
{재물 속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재물은 단순히 목적에 대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편적 선은 필연적으로 궁극목적이기에 그 자체가 그보다 더한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감각적인 쾌락에 있을 수 없다.
이 쾌락은 다만 육체를 만족시킬뿐 전인간을 완성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있을 수 없다.
권력은 전인간을 완성하지 못하고 더구나 권력은 남용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의지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도 못한다. 그런데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선이 나쁘거나 값어치 없는 목적을 위해서 악용되거나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변적 과학의 연구 속에도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확실히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적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 유래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열망하는데, 이것은 형이상학에 의해서 획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사람이 추구하는 선이 사변적 과학의 연구에 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불완전한 것이었다. < 85/273>
그런데 토마스의 경우에는 완전한 행복 즉 궁극적 목적은 어떠한 피조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 단지 스스로가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 안에서만 찾아지는 것이다. <코플88,510>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이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에서 얻어질 수 있는 불완전한 행복> 이외의 어떠한 다른 행복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의 윤리학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던 반면에, 성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완전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지 않고는 연구를 앞으로 진전시키는 일이 없었다.
비록 하느님 이외의 선은 행복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지복(beantitude)의 안녕(bene esse)에 이바지 한다.(I-II, 4 참조)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을 지라도, 윤리학에 내세와 하느님의 직관을 도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
하느님의 직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진리를 들여다 보고 사유를 사유하는 것을 인간의 최고의 복락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토마스도 “행복의 본질은 지성의 활동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성을 통해서만 우리들의 삶의 최고의 목표가 달성되기 때문이며, 그 밖에도 지성이 인간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I-II,3,4&5) <힐쉬601>
여기에 토마스의 주지주의가 드러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행복이 이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교신자인 토마스는 이 행복을 저세상에까지 끌고 들어간다.}
지복은 주로 현세(불완전한 자연적 지복) 또는 내세(완전한 자연적 지복)에서 얻어질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인 인식과 사랑에 있다. < 코플88,511>
{여기서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발언을 하고 있다.<힐쉬601>
행복을 진리의 관조와 동일시하는 점에서는, 행복은 사랑 속에서 완성된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배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가 신을 직관하는 것을 완전한 기쁨(delectatio)이라고 할 때에는,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것이 느껴진다.
이 기쁨이 일종의 부차적인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I-II,4,1), 여하튼 그렇게 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향락(frui)이 다시 받아들여지게 된다. (I-II,4,3)
이렇게 해서 토마스의 도덕은 행복주의로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목적관념!), 행복주의로 끝난다. 그러나 그의 도덕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만큼 행복주의는 아니다.
즉 그의 도덕에서 주관적인 경향이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모든 원리들이 다 선천적이며 객관적이다.}
자연법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및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윤리법칙’이라는 사상과 용어 속에서 살았으며, 이 자연법을 토마스는 “이성적인 피조물 측에서 신의 법칙에 관여하는 것”(I-II,91,2)이라고 정의한다.
도덕률은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성적이며 자연적이다. 따라서 도덕율은 비록 이성에 의해서 언명되고 명령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본성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연법(lex naturalis)'이다. <코플88,519>
인간 생활에 편리한 규정들은 직접 자연법에 속하지는 않을지라도 神法과 人定法에 의해서 반포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연법에 '추가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변화가 자연법에 속해 있는 무엇의 제거를 의미한다면, 자연법은 변화될 수 없다.(I-II,94,5)
특수한 경우 자연법의 이차적인 규정이 변화할 수 있다고 토마스가 인정하는 것은 규정자체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스콜라학자들이 부르고 있는 '<질료/실질>의 변화'(mutatio materiae)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禁令 자체가 변화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행위의 상황이 이제는 금령에 해당되지 않을 만큼 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은 신법에 근거하는 실정법에 의해서 마땅히 확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I-II,95,6; 99,2,ad 2)
{자연적․원리적인 가치의식을 표현하는 다른 말은 스콜라학도들, 특히 대학의 사무총장 필립이 많이 다뤘던 ‘신테레시스(synteresis=도덕률의 최고 원리를 준수하는 것, habitus principiorum의 별명) 및 신비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영혼의 불꽃(scintilla animae, 신테레시스와 더불어 ‘양심’이라는 뜻을 갖는다)' 등이다. <힐쉬599>
여러 원리들이 구체적인 경우들에 적용될 때에는 신테레시스가 양심(ratio recta)으로 된다. 철학적으로 볼 땐, 양심이란 항상 윤리적인 선천주의였었다.3)
자연법의 내용이 십계명과 일치한다고 보는 토마스가, 이 윤리법칙의 내용을 ... 계시를 봄으로써, 발견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영원법과 하느님에게 근거하는 도덕
# 이성에 의해서 반포된 자연법은 하등의 초월적인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코플88,521>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느님은 목적인이기는 했지만, 제1작용인도 아니고 최고의 범형인도 아니었다. (창조자도 아니었고 섭리를 주재하는 신도 아니었다.)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이에 대한 증명은 윤리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예지는 인간의 행위를 그 목적으로 질서지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행위를 목적 달성으로 향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의 예지가 영원법을 구성하고 있다.
하느님은 영원하고 하느님이 지니는 인간의 이데아도 영원하므로, 이 영원법의 반포는 비록 '피조물의 측면에서는(ex parte creaturae)' 영원하지 않을 지라도 '하느님의 측면에서는(ex parte creaturae)' 영원한 것이다.(I-II,9,1; 93,1)
하느님 가운데 있는 이 영원법은 자연법의 원천이며, 이 자연법은 영원법의 분유(참여)인 것이다.
자연법이 영원법에 근거한다는 것은 자연법이 자의적이고 독단적이 아니라는 것
즉 자연법은 지금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 말하자면 영원법은 본래 하느님의 의지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인간 본성의 범형적인 이데아를 생각하는 하느님의 이성에 근거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원법은 신율적인 도덕인데, 이것이 타율적이 아니라는 것은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가 타율적이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플라톤이 윤리의 여러 법칙들을 신과 닮았다는 개념 밑에 둘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토마스도 윤리학에서는, 이성적인 피조물의 운동을 신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사람은 영원한 축복의 목적에로 운명지어져 있고, 그 축복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한도를 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법과 인간법 외에 사람은 또 신의 힘으로 주어진 법에 의해서 그의 목적에로 인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
{구체적․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자유의 단계, 환경의 영향, 동기와 동기지워진 것, 욕구와 향락, 의도, 심정과 동의, 수단과 방법의 선택, 실행과 성취, 의지의 훈련과 통어 및 윤리적인 행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 등등에 관해서는 토마스는 I-II,6~48까지의 인격적인 행위에 관한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다. <힐쉬600>
이 부분은 구체적인 윤리생활에 관해, 철저한 심리학적 분석과 교육학적 분석을 하고 있으며, 특별히 격정(Affekte)에 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I-II,22이하)}
통합적인 윤리관
인간이 참된 도덕적 인간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위에서 제시된 다양한 기준 중에서 하나 만을 만족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윤리적인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주관적인 기준인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 배경이나 성장 이후의 환경에 따라 왜곡된 형태의 양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왜곡된 양심의 대표적인 형태로는 ‘완고한 양심’과 ‘이완된 양심’을 들 수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어렸을 때부터 집단생활의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통제되었던 사람은 조그만 실수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됨으로써 많은 상황에서 부자유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나름대로 설정한 규칙을 타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들의 무관심 속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자랐거나, 사회의 기본적인 규칙마저도 무시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윤리적으로 마땅히 지탄을 받아야할 행위를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왜곡된 형태의 양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양심에 따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지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책임도 지고 있는 것이다.
개별 행동의 결정에서만이 아니라 올바른 양심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객관적인 선의 기준들이다. 위에서 제시된 바, 인간의 이성적인 본성에 맞도록 행위해야 하는 목적론적인 선,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의무론적인 선, 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 가치론적인 선 등은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선에 대한 강조가 구체적인 삶의 다양성이 무시된 획일적인 법칙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 현대에 들어와서 각광을 받았던 ‘상황 윤리’나 ‘실존 윤리’가 올바로 지적했듯이 개개인이 지닌 인격적 독자성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을 성숙시켜 주는 윤리적 행위란 단순한 일반 법칙의 적용이 아니라, 각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객관적인 선의 기준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주관적인 기준인 자신의 양심 안에서 신중하게 결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윤리적인 판단이 지속적으로 옳게 내려질 때, 각 개인은 ‘덕’이 있는 인간,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숙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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