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 방법 해석! 분해!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 /에드리언 로저스

하나님아들 2021. 1. 22. 09:35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 /에드리언 로저스

 

 

 

차 례


1. 하나님께서 사시는 곳은 어디인가?


2. 초자연적인 자연성과 자연적인 초자연성


3. 결코 홀로 있지 않다


4. 영광이 집을 가득 채울 때


5. 초자연적인가, 피상적인가?


6. 내주 하시는가, 아니면 막고 있는가?


7. 영광스러운 강물과 같이


8. 당신의 집을 깨끗이하라


9. 당신의 문을 단속하라


10. 강도의 굴혈이 아닌 기도의 집


11. 믿음의 황금 열쇠


12. 복된 확신


13. 하나님의 집은 호텔이 아니다


<저자 소개>


애드리언 로저스는 테네시 주 멤피스의 벨레뷰 침례 교회(교인 24,000명)담임 목사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큰 개신교 교단인 남침례 총회의 의장으로 세 번 선출되었다. 그는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전도 집회들에서 설교하였고 북미 지역에서 개최된 여러 집회에서 주 연사로 참석하여 50여만 명에 이르는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 또한 러브 워스 파인딩 미니스트리(Love Worth Finding Ministries)라는 전국적인 배급망을 갖춘 텔레비전, 라디오 사역 단체의 설립자이자 총재이다. 저서로는 Gods Way to Health, Wealth and Wisdom(건강, 부, 지혜에 이르는 하나님의 방법)과 Mastering Your Emotions(당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가 있다.


송준인은 서울 대학교 영어학과를 졸업하고 현대 고등학교 종교 주임과 홍성교회 교육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기독교 윤리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역서로는 「리차드 포스터의 기도」, 「성서대백과」, 「공해」등이 있다.


  1 장 하나님께서 사시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유익을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진리를 처음으로 드러내신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성소를 짓기 위하여 헌물을 가져오게 하라고 하셨다. 그 성소는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기 위함”이었다(출25:8). 이 성소는 나중에 성전 안에 영구적인 것으로 마련되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과 만나 가르치시고, 예배를 받으시고, 죄를 속해 주시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성막이나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건물은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날마다 상기시켜 주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 속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었다. 성경 신학자이자 교수인 고(故) 메릴 엉거(Merrill Unger)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막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상징이었다.”

 

 

하나님을 위한 집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을 설계하실 때 성막에 있었던 것과 똑같이 세 개의 주요 부분으로 설계하셨다. 우리는 성전의 삼중 구조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이 시대에 있어서 그의 성전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솔로몬의 대성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성전의 첫 번째 부분인 바깥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고 또 방문할 수 있었다. 외적인 예배가 행해졌던 곳이 바로 이 곳 바깥뜰이었다. 다음으로는 그 곳에서 더 들어가서 성소가 있다. 이곳은 제한된 구역으로 단지 제사장들만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성소가 있다. 이곳은 가장 안쪽에 있던 부분으로 대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출입이 엄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으며,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씩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언약궤의 속죄소(혹은 시은좌)를 덮었던 그룹들 사이에서 그분의 거룩한 영광 중에 거하셨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세 개의 방으로 된 집


세 개의 방으로 된 이 집은 정확한 모본을 따라 지어졌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위한 애초의 설계를 매우 정확히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처럼 성전 건축에 정확성을 기하는 이유는 성막과 성전이 중요한 실물 교육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다소나마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을 이처럼 세 지역으로 나누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알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존재로 한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하는 서로 구별되는 삼위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한 분뿐이신 이 참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독특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실로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고, 또 예증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단지 계시에 의해서만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40:25).

 

 

왕의 처소인 인간


성삼위의 진리는 분명히 믿음의 신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본질을 상기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의 본질을 뜻하는 삼중적인 표현은 데살로니가전서 5:23에 나와 있다. 거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집인 성전의 형상을 빌어 바로 우리가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영과 혼과 몸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영과 혼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둘은 상호 독립해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연히 구별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물질적인 세계와 바르게 관련을 맺으면 건강하게 된다. 또 그의 혼을 가지고 정신적인 세계와 바른 관계를 가지면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의 영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와 바르게 관련을 맺으면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세 가지 실재, 즉 건강과 행복과 거룩함을 모두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겉사람과 물질적인 세계


몸은 성경이 ‘겉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고후4:16). 인간의 몸은 구약의 성전으로 말하면 바깥 부분에 해당한다. 성전의 바깥 뜰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몸도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했다(롬12:1). 몸도 하나님의 지으신 바요, 거룩한 성전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며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

 

 

속사람과 정신적인 세계


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혼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프쉬케(psyche)’ 이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혼이 본질적으로 지(mind), 정(emotion), 의(will)의 활동을 아주 조심스럽게 예증하거나 열거하고 있다. 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혼은 또한 우리의 본질 중에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관련지어 주는 부분이다. 나의 혼은 ‘땅 위의 장막 집’에 거하는 진정한 나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당신의 눈에 진정으로 보이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곧 몸이다.

 

 

가장 깊은 내면의 사람과 영적인 세계


우리는 하나님의 좌우에 날선 검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의 독특함은 영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물에게도 분명히 몸이 있다. 그리고 동물에게도 혼이 깃든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이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2:7). 이 ‘생기’가 인간의 영이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숨(breath)’과 ‘영(spirit)’은 서로 바꾸어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적인 본질을 갖고 태어났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경배할 줄 아는 영광스러운 능력을 부여받았다. 동물들은 결코 기도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성령의 기름 부음과 함께 역사하는 방법


“사람의 영혼(spirit)은 여호와의 등불(candle)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20:27). 인간의 영의 등불에 공급되는 기름은 바로 성령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영혼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조명을 받게 된다. 성전 안의 가장 깊숙한 방인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 인간의 성전에서 가장 깊숙한 방인 영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그의 모든 충만함으로 내주 하시는 장소가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굴복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마음(혼)에 평안을 얻으며, 우리의 영에 내주 하시는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된다. 그러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것은 구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 그것은 성화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당신을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당신을 이 땅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당신의 목적지를 바꾸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준다. 전자는 천국을 당신의 집으로 만들어 주고, 후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업장으로 만들어 준다. - 얀 토마스(Ian Thomas) -

 

 

 

 


  2 장


초자연적인 자연성과 자연적인 초자연성


성과 속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만 나서면 곧 일상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작은 습관’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성스러운 생활과 속된 생활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어디에선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그 시간이 끝나면 곧 그것을 벗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당 줄로 달려간다. 성령의 전인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하나님의 집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한 시간 60분을, 하루 24시간을, 일 년 365일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성과 속의 구별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3:16-17에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졼’이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졼’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하 특히 17절 말씀을 주목해 보라. ‘무엇을 하든지’라는 헐으로모든 것을 의미한다. 고 또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거기에는 모든 생활이 다 포함된다. 또한 이 권면의 적용 범위을 하든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모든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소위 세속적인 삶의 영역들까지도 성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인


만일 우리가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승인하실 수 있는 일들만을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인하시고 인정하시는 것만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써 넣을 수 없는 일은 해서도 안되고 말해서도 안된다.

 

 

율법은 아이들을 위한 것


율법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미숙한 아이들일수록 부모가 다음과 같은 더 많은 규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냥 가지고 놀지 말아라”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오너라.” 그러나 성숙한 아이에게는 이런 규제가 필요 없다. 수년 간 자기 일에 대한 책임을 져 온 아이들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알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가 길게 나열되어 있는 목록표를 받을 필요가 없다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규제는 덜 필요한 것이다. 한 번은 아버지로서 내게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아들 녀석과 나는 그 전에 한 번도 특별히 얘기해 본 적이 없는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규제도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빠, 저는 아빠가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대로 했을 뿐이에요, 저는 아빠가 인정해 주실 줄 알았어요” 그는 내 성품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다 높은 차원의 생활이다.

 

 

예수님의 권위


체중이 70킬로그램인 경찰관이 바퀴가 18개나 달린 트럭 앞에 서서 손을 들고 법률에 의거하여 그 트럭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때 경찰관은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트럭은 그 이름이나 권위 때문에 멈추어 선다. 그 경찰은 분명 육체적인 힘으로 트럭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니다. 그 경찰이 착용한 배지와 제복은 그가 대표하는 정부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권위가 사탄을 능가하는 것은 우리가 사탄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사탄보다 강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힘과 권위의 차이를 주목하라. 경찰이 트럭을 멈추게 한 것은 힘이 아니라 권위를 가지고 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힘을 가지고 사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갈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갈채와 명예를 위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나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드려져야 한다. 이것은 바로 베드로의 목표였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바울도 똑같은 소원을 피력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예수님께 갈채를 보내는 삶은 예수님의 승인을 받아 예수님의 권위로 살아가는 삶뿐이다. 성령으로 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3 장


결코 홀로 있지 않다


주 예수께서 내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에 나를 만나 주신 데 대하여 나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비록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부모님께 상당한 마음의 고통을 안겨 드렸음에 틀림없다. 나의 가족은 선하고 근면했으며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자동차와 가구 사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나는 매도 맞으면서 자랐는데 아버지께서는 매를 드실 때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버지께서 가장 총애하는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자녀들보다 이런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는 인생에서 부모님의 모범과 훈육 그 이상의 어떤 것을 필요로 하였다. 플로리다 주의 웨스팜 비치에 있는 고향에서, 어느 날 전형적인 부흥회가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날 자신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제단 앞으로 걸어 나가셨다. 그때 나도 아버지를 따라 앞으로 나갔는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영원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나는 죽은 자였으나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밖으로 나가셨을 때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되기 이전에 먼저 나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죽음은 아담의 경험 속에 가장 잘 예시되어 있다. 아담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한 확실하고 즉각적인 결과는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정녕 죽었는가?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계속해서 수백 년을 더 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담은 정말로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담은 범죄한 즉시 영적으로 죽었다. 영적인 죽음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한 바로 그날, 비록 두 발로 땅에 서 있기는 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었다. 그때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집에는 거하시지 않는다. 아담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 죄와 사망의 정죄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나가시자 그의 생명도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나가자 그 빛도 나갔다. 아담은 범죄한 즉시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혼이 “점진적으로” 죽게 된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갖고 있는 본능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인간에게 보내셨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동물들에게는 본능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성령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담의 영은 하나님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담은 더 이상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자연인이 된 것이다. 즉 죄로 인해 그는 혼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연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자연인의 지성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의 감성은 “나는 그것을 하고 싶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그의 의지는 “좋아, 내가 할게”라고 말한다.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야만 그들이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진정한 생명의 원천에서 잘려 나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육체적으로도 죽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들어오실 때


이제 구원의 좋은 면을 살펴보자. 아담의 영은 즉시 죽었다.


그리고 혼은 점진적으로 죽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육체도 죽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의 영은 즉시 의로워지고, 혼은 점진적으로 성화되며, 몸 역시 궁극적으로 영화된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새로운 인류,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들의 맏아들로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셨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죄 문제를 처리하기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한 번 더 인간에게 내주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죄의 장벽을 제거하고자 돌아가셨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가셨기 때문에 그 죄 문제가 완전히 처리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깨끗해진 우리 몸의 전으로 자유로이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죄의 장벽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즉시 의로워질 뿐 아니라 우리의 혼도 점진적으로 성화될 수 있다. 명심할 것은 칭의가 즉각적인 반면에, 성화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그러나 언젠가 그 과정은 끝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그러므로 부활 때에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과거 : 나는 영적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다.


현재 : 나의 혼이 성화되고 있으며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다.


미래 : 나의 몸이 영화될 것이며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4 장


영광이 집을 가득 채울 때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 충만한 삶을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함은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해 예비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이유


나는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데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종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5: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안이나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불순종은 연약함이 아니라 사악함인 것이다.


의무


바울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책임은 엄청나게 많다.


예배의 삶에 대한 의무들을 보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우리의 예배 생활을 기쁨과 그리스도의 실재로 이어져야 한다.


결혼 생활의 의무를 보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엡5:22). 오늘날과 같은 철저한 남녀 동권 주의 시대에는 복종적인 아내의 역할이 배나 어려워졌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복종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복종이 열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이다. 여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할 일을 마음껏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에 자유를 찾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내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남편에게 요구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주목하라. 아내의 모형은 교회요, 남편의 모형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떻게 썩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가 있겠는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직장 생활의 의무를 살펴보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이제 우리의 전쟁 생활의 의무를 살펴보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그리스도인은 전쟁 상태에 있다. 우리의 싸움은 최후까지 사악한 원수와 싸우는 싸움이며 아무런 제약이 없는 무한정한 싸움이다.


기회


성령 충만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그것이 곧 우리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6-17).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한다. 그 이유는 “멸망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죽어 가는 자들을 보살피기 위함이며, 그들에게 능력의 구원자 예수님을 전하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성령 충만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성령 충만한 삶의 필요 조건


성령께서는 분명히 힘과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의 인격이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개념은 그릇에 어떤 물질이 가득 채워진다든가, 어떤 기계에 힘이 과도하게 가해진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인격이 완전히 차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과 섞일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힘을 공급받고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다.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제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세 가지 필요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성령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이 있어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사업 생활과 사회 생활, 사고의 영역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셔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성전의 모든 영역을 마땅히 소유하셔야 하고 또 접근하기를 원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둘째, 성령에 의한 지속적인 다스림이다. 에베소서 5:18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함을 입으라” 이 성령 충만한 삶의 문제는 일회적인 일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굴복시킬 때 중대한 하나의 고비가 되는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고비가 되는 사건 뒤에는 진보가 뒤따른다. 성령님의 다스림은 우리가 성령님께 굴복할 때 날마다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끊임없는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사랑하는 성령님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그분은 술과 같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이 술에 완전히 굴복하여 술에 전적으로 좌우되듯이, 우리가 성령님께 완전히 굴복할 때 비로소 성령님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좌우하시게 된다.


셋째, 의식적으로 성령님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거하시기 위해 오실 때 그분은 신적인 인격으로서 오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밖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넣어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면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랑과 인내와 그 밖의 모든 것을 갖게 된다. 즉 우리는 성령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결과


예배의 태도 :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찬양의 영이 있게 될 것이다. 영으로 주님께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의무이자 복된 특권이다. 우리의 찬양의 수단으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노래집이었다. ‘찬미’와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신령한 노래들’은 마음속에서 흘러 넘치는 즐겁고 자발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회중의 예배든 개인의 예배든 간에 성령 충만한 예배는 마음속에서 기쁨으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며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의 태도 : 주변 환경과 관련하여 성령 충만한 삶의 결과는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종종 투덜거리며 미워하길 잘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감사하라는 이 명령에 대해서 만일 주님이 ‘항상’ 그리고 ‘범사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상처나 질병이나 재정적인 파탄이나 마음이 끊어질 것 같은 실망이 찾아올 때 감사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사한다고 해서 우리가 감사드리는 모든 내용들을 반드시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시다는 우리의 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화해의 태도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령 충만한 삶의 결과는 화해의 정신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세상의 관계 속에서 복종이란, 한 대등한 사람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다른 대등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기꺼이 사랑으로 낮추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종이란 아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성령님으로 당신에게 충만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님께 당신의 집에 있는 모든 방의 열쇠를 내어 드림으로 성령님 자신이 충만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다.

 

 

 


  5 장


초자연적인가, 피상적인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을 자연적인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다. 우리의 의도상 그들을 세 부류의 집 또는 거처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바울이 세 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 중에 우리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통찰력으로 무장이 되어야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위한 집을 지을 때 알맞은 영적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행함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첫째로 자연적인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그는 자연 세계 속에 태어났다. 그는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나 자연 출생을 통해 많은 훌륭한 성향들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적인 사람은 중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가 자연적인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모든 사람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아담의 본성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영혼 속에 하나님 없이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같이 죽었고 부패했고 어두워졌다.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고전2:14). 여기에 ‘받는다’는 말은 집에 손님을 맞이하듯이 맞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사람은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환영하는 것이 없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진심으로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 굴복하지도 않는다. 사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바울은 영적인 일들에 대한 자연적인 사람의 인식 부족을 확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자연적인 사람은 또한 물질 세계에 묶여 있는 존재들이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동물이 추구하는 것들과 똑같은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중생의 기적도 없이 자기 만족과 물질주의적인 생활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행함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범주의 인간은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 곧 초자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영접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다. 죄 사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구원이란 우리의 죽은 영혼 속에 주님의 생명과 빛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둘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배운다.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들에 대한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받는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셋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5-16).


영적인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얻는가? 영적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제도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 그는 바로 성령을 통해서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별한다.

 

 

부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을 행함


바울이 말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남아 있다. 이 사람은 한때 영적이었으나 지금은 육신적, 혹은 육체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불구가 된 사람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육신적인 사람은 불구일 뿐만 아니라 의존적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바울은 말하기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젖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영적인 사람이 온갖 재료가 곁들여진 맛있는 영적 스테이크를 앉아서 먹고 있는 동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젖과 유아용 음식물과 사탕무 이상의 것은 결코 먹지 못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을 먹여 줄 사람까지도 필요로 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또한 서로 분열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3). 고린도 교회는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서 사소한 말다툼에 휘말리곤 했었다. 그들에게는 ‘좋아하는 설교자’ 증후군이 있었다. 일부는 바울의 진영에 서서 “바울은 정말 위대한 신학자입니다”라고 말했고, 또 일부는 베드로 진영에 서서 “베드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얘기한답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볼로 편에 서서 “그런 웅변을 들어본 적이 있소?”라고 묻곤 했다. 이런 다 큰 아이들에게 바울이 해주는 말이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으신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마땅히 나아가야 할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6 장


내주 하시는가, 아니면 막고 있는가?


당혹스런 자질들


보통 사람들이 강력한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솔직히 몇 가지 당혹스런 자질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과연 그런 자질들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미련한’ 것들이다.


둘째는 ‘약한’ 것들이다. 이 말은 신체적인 연약함을 의미하며 심지어 불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당신은 몸이 허약하고 병약한가? 그렇다면 기뻐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그리고 그 몸을 통해서 위대한 일들을 이루기를 기뻐하신다.


셋째는 ‘천한’ 것들이다. 이 말은 족보도 없이 태생이 천박하고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또한 ‘멸시받는’ 것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또한 경멸과 조소를 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멸시하는가? 그리고 당신이 결코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멋진 일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말로 사용하실 때 그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끝으로, ‘없는’ 것들이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심지어 멸시조차 당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멸시 당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시기를 기뻐하시는 보통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제 자기 백성을 쓰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밝혀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능하신 계획


첫째,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나 고귀한 자나 모두 부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만 세상의 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둘째, 바울은 냉담함이나 게으름이나 평범함을 장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평균적인 지능 지수를 가진 설교자나 교사라면 당신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셋째, 바울이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모든 문제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들에 특별한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하신 약한 것들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들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빌리 선데이(Billy Sunday)가 생각나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다. 동시대에 여러 가지 면에서 그와 짝을 이룰 만한 인물을 찾는다면 빌리 그레이엄일 것이다. 선데이는 분명히 지성인으로 분류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전에 야구 선수 생활을 했고 고등학교밖에는 나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저속한 말을 사용했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강단에서의 그의 익살스러운 몸짓은 그 시대의 세련된 교인들의 체면을 손상시킬 정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로 빌리 선데이 같은 사람을 선택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빌리 선데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문자 그대로 수십만 명이 그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왔다.


하나님의 고상한 천한 것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을 만큼 천한 사람을 원하신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기억하그를 통하는 더할 나위 없이 비천하고 천한 사람이었다. 기드온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모든 족속 중에서 므낫세가 가장 못하고, 므낫세의 모든 집안 중에서 기드온의 집안이 가장 보잘것 없<사람이자신의 집안 모든 아이 중에서 자신이 가장 못난 사람이라 하였다. 이야기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군대의 규모를 단지 300명으로 줄이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무명의 장군과 보잘것없는 군대를 택하셔서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천한 것들을 계속해서 선택해 오셨다. 어린 목동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도 받는 예상밖의 십대 소년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승리를 얻었을 때,장 못하고, 은 이스라엘에 는 더할를 기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하당신은 는 더할를영광을 얻<시기 위하여 도 받는 것들을 사용하 믿음을 가지고 할일를 알겠는가?


그가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우리의 삶에 세 가지 사실을 적용해 보자.


첫째, 우리의 교만에 대한 책망이 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교만의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때에만 우리를 계속해서 사용하신다.


둘째, 우리의 능력에 대한 헤아림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실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지 말라.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살아 계시고, 온전히 계시며, 사시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사랑과 제 힘과 제 지혜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것들을 신뢰하라.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특별한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셋째, 우리의 찬양에는 반응이 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31절).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계획인가! 그의 광대한 우주를 가득 채우실 만큼 크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속에 거하실 만큼 작기도 하시다. 나는 하나님의 전이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신다. 할렐루야!

 

 

  7 장


영광스러운 강물과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 속에서 소성케 하는 강물과 축복의 강물이 흘러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흘러 넘치는 그 강물을 묘사하신 것이다. 에스겔은 그것을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 두 가지 그림이 아름답게 서로 어울린다. 성전이 구약에서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장소였던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우리의 영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깊은 영적 축복과 삶을 영원히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물은 영원히 그를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물이었다(요4:14).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컵을 채우기 위해 모임이나 세미나를 갖거나 주말에 수양회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 넘치는 강물이 있다면 그런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이 본 강은 비천한 원천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 강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왔다(1절). 그것은 낮은 곳에서 시작한 것을 말한다. 진정한 신앙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릴 때 시작된다. 다음으로 그 강은 거룩한 원천을 갖고 있었다. 그 강은 제단을 흘러 지나갔다. 모든 성전에는 제단이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들인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제단을 흘러 지나가지 않는 신앙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제단은 희생과 씻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 씻음을 위하여 예수님의 보혈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소생케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뿐이다. 제단을 비껴 가면서도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성전에서 흘러내린 그 강은 또한 뜨거운 원천을 갖고 있었다. 에스겔은 그 강이 성전 동문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동문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문이다. 또한 그 강은 제단 남쪽에서 흘러내렸다. 그쪽은 늘 해가 비취는 곳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따사로움을 얼마나 잘 묘사한 그림인가? 우리의 차갑고 냉랭한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데워질 필요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냉랭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성케 하는 능력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뚜렷한 경로


에스겔이 강을 따라 이끌려 가고 있을 때,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 나와 작은 물방울을 일으키며 흐르던 조그만 시내가 마침내는 커져서 폭포가 되어 산기슭으로 흘러내리게 되었다. 그 물이 이제는 점점 그 경로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 강은 아무런 지류도 없이 그렇게 커졌기 때문에 분명히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화시키는 역사가 있다. 발목 깊이의 물은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무릎 깊이의 물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허리까지 찬 물은 성령 안에서 강건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수영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은 성령의 강력한 소성케 하는 힘을 말할 수 있는데, 그 힘은 우리가 그 힘에 완전히 압도당할 때 그 힘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들어올려 휩쓸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에스겔의 환상에 의하면, 그 강은 절망적인 곳으로 흐른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겔47:8).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얼마나 절망스런 일이 많은가? 절망은 무일푼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들은 동구권과 구소련에서의 공산주의 붕괴가 세계를 전쟁의 위협에서 건져내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선도할 것이라고 생각여 흘러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 수 있들이 절망 상태에 있 수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혼을 소생시키는 영광스런 강물이 이와 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 필요가 있다. t충만함에 적시울 필요가 있 수 있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대학생들이요, 많은 문 절망안고 있 수 업가들이며, 자기가 처해 있 수절망스런 환경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주부들이다. 오, 이러한 사랑과 권능 충만함으로당신과 나와 같은 성전에서 과 한 절망적인 얻을로 흘러와 친다 한얼마나 좋겠는가? 의하면,은 또한 메마른 곳으로 흐른다.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광야로 내려가서.” 에스겔은 아라바로 흘러갔다고 절망은 무일런데 아라바는 곧 유대 광야절망절망은 무이 광야는 히 압도당할 때 을 필요로 하할 뉔 대고 열매 없는 도 영가리킨은 무이 뉔 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충삶힘에 만 있 수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부 사람들 충삶힘에 도 존재망은 무대부분의업가들이며,은 메마른 헌신 충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열매 없는 마른과 황폐한 복음 전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은 무일런 사람은 생명 충만수에 젖어 새롭게 변화되고 헌신 삶을 살필요가 있다. 가들하면 그의 광야와 같은 삶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 강물은 죽음의 곳으로 흐른다. “이 물이…바다에 이르리니” 에스겔이 말하고 있는 바다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해를 말한다. 사해는 증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기만 하지 주지는 않기 때문에 소금의 농도가 매우 짙다. 보통 바닷물보다 염분이 25% 이상이나 많다. 그리고 마그네슘 브롬으로 인해 유기체가 살지 못한다. 사해의 물은 납 성분이 많고 유독하다. 이와 같은 죽음의 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기심으로 인해 사망과 심판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치유의 강물에 적시울 필요가 있다.

 

 

능력의 강수


강물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천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에스겔이 본 그 강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에 그 곳이 바로 그 강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강물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 또한 물이 흐르는 곳에서 나무가 자랄 것이다라는 말을 주목하라.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7절). 이러한 생명을 주는 물이 흐르는 곳에 죽음의 황량한 사막 대신 생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물이 흐르는 곳에 물고기가 번성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9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의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나 적은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그물이 텅 빈 이유는 그 모든 계획과 홍보와 장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체된 바다와 오염된 못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고 소성케 하는 강물이 흘러 넘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의 수확이 있을 것인가! 다음으로 물이 흐르는 곳에 과실이 맺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12절) 언제나 푸르른 성도들의 늘어진 가지 위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즙이 많은 이 과일들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우리가 이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강이 우리 몸의 성전에서 흘러나올 때뿐이다. 마지막으로, 물이 흐르는 곳에 건강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 자라난 실과 나무의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선지자가 기록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불명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성케 하는 강물이 충만한 힘으로 흐르는 곳에는 연약한 성도와 빈혈증을 가진 성도가 영적인 생명력과 건강을 얻어 진동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성전된 당신의 몸에서 과연 소성케 하는 강물이 흘러나오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나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더욱 목마르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평화는


영광스런 강물과 같고, 그 밝고 밝은 평화는 늘 승리하고 또 승리하네.


온전하심에도 날마다 더욱 충만히 흘러 넘치고


온전하심에도 언제나 더욱 깊이 차고 넘치네.


- 프란시스 하버걸(Frances R. Havergal) -

 

 

 


  8 장


당신의 집을 깨끗이 하라


만일 성령께서 당신의 몸, 곧 그의 성전에 머물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그 전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당신의 영적인 집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 가운데 하나는 죄를 범했을 때 더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윗은 국왕으로서 호화로운 삶을 살았고, 대리석 욕조에서 몸을 씻었으며, 비단 담요를 깔고 잠을 잤고, 제왕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범죄했을 때 그는 더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씻기시고 나를 깨끗이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죄 때문에 영적인 집안 청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성도와 죄인의 차이는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이라도 죄를 지을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다만 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성도는 죄에 미끄러져 들어가지만 죄를 혐오한다. 그러나 죄인은 죄 가운데 뛰어들어 그것을 즐긴다.

 

 

그리스도인의 죄의 결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1:3-4).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우리는 분명히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게 된다. 다윗의 회개의 기도를 상기해 보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소서”(시51:12).


만일 당신이 타락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으면 그 기쁨을 한 번 시험해 보라.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르다. 행복은 일어나는 일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생긴 우연한 일이 좋은 일이면 우리는 행복해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기쁨은 우연한 일이나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예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행복은 온도계와 같다. 그것은 상황을 기록한다. 반면에 기쁨은 자동 온도 조절 장치와 같다. 그것은 상황을 조절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7:4). 당신의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죄이다.

 

 

그리스도인의 죄의 은폐


한 가지의 속이는 곧 다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둘수록 그 속이려 하고 숨기려 하는 특성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거짓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타인에게 거짓말하기.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냉담해지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은 가식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된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가 늘 그러했던 것만큼 자기를 영적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얼굴에서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나중에 그 영광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모세는 여전히 그 베일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그 베일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거짓말하기.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빨리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쉽게 합리화된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데 곧 실수라든가, 판단 착오라든가, 전염성 기능 부전이라든가,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으로 돌리게 된다.

 

 

하나님께 거짓말하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 하나님의 영이 우리가 범죄한 사실을 말할 때 우리가 그것을 부인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거짓말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죄를 숨기는 일에 이력이 난 사람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자각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그의 전의 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아버지께서 빛으로 그를 충만히 채우시게 한다. 그 빛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빛을 무서워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어린이보다 더 어리석다. 지금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지대에서 밝은 햇빛으로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 점을 명심하라.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과 사탄의 고소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사탄의 본성은 고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도를 고소하시지 않는다. 다만 깨닫게 하실 뿐이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가?


첫째, 합법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고백하지 않은 죄와 깨끗해지지 않은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에 나아가 용서받은 죄는 이미 잊혀진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새삼스럽게 이미 용서받은 죄를 꺼내어 계속해서 그것으로 우리를 고소하기를 좋아한다. 당신이 과거의 무용담을 계속해서 듣고 싶어하는 한, 마귀는 언제까지나 그것을 당신에게 되풀이하려 할 것이다.


둘째,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만일 사탄이 당신의 씻음 받은 죄를 고소할 수 없다면, 그는 틀림없이 가상의 죄를 가지고 당신을 고소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진찰하는 의사와도 같다.


만일 우리 삶 속에 어떤 죄가 있으면 그 아픈 곳에 손가락을 얹고 눌러 보신다. 그 곳이 문제가 있는 곳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병적인 내적 성찰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죄를 찾아내느라고 한 번에 조금씩 우리 자신을 분해해 볼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 마음을 빛을 향해 활짝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분의 일을 하실 것이다. 만일 성령께서 죄를 구체적으로 거명해서 깨닫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아마 마귀가 당신을 고소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끝으로, 구속(救贖)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사탄은 당신을 정죄하기 위해서 고소하지만, 성령께서는 당신을 깨끗게 하시기 위해 죄를 지적하신다. 마귀의 고소는 절망으로 인도하지만, 성령의 깨닫게 하심은 고백과 씻음과 승리로 인도한다.

 

 

죄의 고백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19). 진정한 깨달음이 있으면 진정한 고백이 있어야만 한다. ‘고백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동의하다’, 혹은 ‘똑같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죄의 고백은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남김없이 고백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나는 죄의 목록을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죄를 낱낱이 고백한 다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승리와 절대적인 죄 씻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리고 그 목록을 찢어 버린다. 그런 다음 그것을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조심스럽게 버린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끝으로 확신을 갖고 고백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이 지은 모든 죄값이 이미 갈보리에서 다 치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값을 치르셨다(요일2:2). 분명히 거기에는 당신이 저지른 가장 나쁜 죄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죄가 다 해당된다.


갈보리로 인하여


우리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 당신의 삶 속에 있는 모든 얼룩과 오점과 흠과 더러움과 결점이 눈보다 더 희게 씻겨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시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다 할 수 없다. 심지어 당사자인 당신도 하나님의 사하심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잘못을 범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삶의 똑같은 영역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잘못을 벌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금 용서를 구하러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솔직하게 자백했다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똑같은 잘못을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셨든지 간에 다시금 용서해 주신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여러 번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마치 당신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처음 나올 때와 똑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전의 모든 것을 다 잊으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기억지 아니하시고 그 죄로 인해 우리를 더 이상 나쁘게 여기지 않으신다. 용서는 전염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죄를 다시는 영원히 거론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이 당신의 것이 될 때, 비로소 당신이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까지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다시는 그것을 거론하지 않게 된다.

 

 

   9 장


당신의 문을 단속하라


당신의 마음은 소중한 트로피와 같아서 그것을 쟁탈하기 위해 격렬한 싸움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마음을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성채나 요새에 비유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3-5).


인간의 마음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전쟁터와 같다. 강력한 군대가 당신의 마음의 요새를 빼앗기 위해 당신의 성전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원하시기 때문에 또한 당신의 마음도 원하신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값으로 산 바 되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못하신다면 당신의 전(殿)도 주장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사탄의 욕망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1:3). 사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사고 생활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고 생활까지도 붙잡고 제어하고 부패시키기를 원하다. 게다가 사탄은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통제소인 마음을 제일 먼저 빼앗는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부끄럽게 하고 마음의 고통과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탄의 도구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고후2:11). 바울은 사탄에게서 어둠의 베일을 벗겨 버리고 그 수단들을 밝혀 냈다. 그 수단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사탄이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영적으로 어두워진 마음은 영적인 진리를 볼 수도 없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둘째, 사탄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부패시킨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당신의 마음의 요새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 자동적으로 면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부패한 마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성도들이 도처에 있다. 마음속의 차가운 의심으로 인해 소망의 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순결하지 못한 불순한 그림들이 마음의 벽과 복도에 걸려 있다. 마치 모래가 기계를 부식시켜 못쓰게 만들 듯이 근심과 걱정으로 건강이 쇠약해져 간다. 속임수와 거짓 교리들로 인해 성도들의 믿음과 증거가 무력화된다. 이것이 바로 부패한 마음이 초래하는 비극인 것이다.

 

 

안전 장치가 없는 문


사탄은 안전 장치가 없는 문을 통해 들어온다. 중국의 만리 장성도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 문지기를 매수하기만 하면 적군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사탄이 드나드는 안전 장치가 없는 문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뒤틀어진 마음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와 마음속에 숨겨진 죄는 사탄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사탄의 출입구는 고백하지 않은 죄이며, 이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분노이다. 이것이 결국에는 더러운 둥지가 되어서 여기에서 사탄은 흉악한 생각을 품으며, 이 요새에서 의심의 불화살을 쏘아댄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사탄의 법적인 터전이 되며 사탄이 그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게 한다. 고백하지 않은 죄를 마음속에 감추어 둠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사탄에게 자기 집에 들어와 누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둘째는 소극적인 마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탄에게 열어 놓고 있는 또 하나의 문은 적극적으로 통제하거나 지키지 않고 방치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적극적으로 지켜져야 하며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거나 소극적으로 홀대해서는 안된다. 솔로몬이 이 점에 대해 지혜롭게 경고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 문을 사탄에게 기꺼이 열어 놓는 것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의 기법이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 안이나 밖에 있는 영적인 힘과 접촉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러한 힘에 당신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영접하라.” 물론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하면 영적인 힘과 접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의 세력과의 접촉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형제여, 당신의 의식적인 마음을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게 넘겨주지 말라. 열심을 다해 그것을 지키라. 강신술, 최면술, 요가, 채널링 및 다른 뉴에이지 형태의 거짓 영성들은 단지 잠그지 않은 문이요, 열려진 창문에 불과하다. 그것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놓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오락도 때로는 소극적인 태도를 유발시킬 수 있다. ‘즐겁게 하다(amuse)’ 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면 재미있다. ‘Muse’라는 말은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정 접두어 ‘a’를 붙이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재미있게 즐기고 있을 때 사실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어느 편에 속한 것도 아니고 다만 방치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은 상황극들로, 죄를 과장해서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아무런 해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마귀는 일단 당신이 죄를 우습게 여기면 더 이상 당신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명상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태세를 단단히 갖추어야 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셋째는 오염된 마음이다. 마약이나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 안전 장치가 없는 세 번째 문이다. 사탄은 그 문을 통해서 살그머니 들어와 우리의 사고 생활을 부패시킨다. 성경은 마술에 대해서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그 말 자체는 헬라어인 ‘파르마케이아(pharmakeia)’를 번역한 것으로 이 말에서 ‘약학(pharmacy)’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은 약물로 마술을 거는 사람이란 뜻이다. 약물 남용은 일종의 일시적인 정신 이상 증세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도록 문을 열어 놓는 행위이다.

 

 

사탄의 패배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잘못 사용했을지라도 소망을 줄 수 있는 좋은 소식이 내게 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후서 10:3-5에 나온다. 나는 이미 사탄의 공격을 당해 본 성도들에게 그 마음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는 세 가지 강력한 무기를 말해 주고 싶다.


첫째, 뒤틀린 마음에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만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끝에 나오는 지상 명령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다섯 교회가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회개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이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음의 변화’라는 뜻이다. 뒤틀린 마음을 처리하는 데는 그것을 바꾸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회개는 언제나 자백으로 이끌고, 자백은 청결로 이끌며, 청결은 사탄이 차지한 자리를 없애 버리게 된다(엡4:27).


둘째, 소극적인 마음에는 대항이 있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왜 대항해야 할까? 그것은 사탄이 어떤 것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싸움이 없이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먼저 옳은 것을 행하라. 그리고 죄에 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라. 모든 죄를 고백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이 빼앗겼던 모든 요새를 다시 탈환했음을 확신하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사탄을 꾸짖어 주시도록 기도하라(유1:9). 사탄에게는 이제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음을 명심하라. 틀림없이 사탄은 도망칠 것이다.


셋째, 오염된 마음에는 갱신이 있어야 한다. 손상되고 왜곡된 마음은 변화될 수 있다. 새로운 사고 방식이 세워질 수 있고 또 마땅히 세워져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당신이 회개하고 대적한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또한 이 일은 당신이 마음의 초점을 바꿀 때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매일 아침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당신의 영혼을 씻으라. 그리고 가장 먼저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흠뻑 적시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당신의 날을 하나님께 위탁하라. 그러면 이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는 증거가 드러날 것이다.

 

 

 


  10 장


강도의 굴혈이 아닌 기도의 집


우리는 성령의 전으로서 기도의 집이 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마음에 기도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대두되었던 때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였다. 그때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성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셨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주셨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전을 깨끗하게 잘 유지하고 싶으면, 승리하는 기도의 비결과 훈련을 결사적으로 배워야 한다. 기도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적인 방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맺어주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아니 비극 그 이상이다.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12:33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할 때가 많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기도의 모본을 살펴볼 때에 우리의 위대한 선생이신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한다.

 

 

기도는 인격이다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목해 보라. 생명력 있는 기도는 공허한 말의 반복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진리를 동시에 깨닫게 된다.


첫째, 효과 있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그런 권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에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8:44)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기도에는 목적이 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곧바로 기도에는 한 가지 주요한 목적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지키는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질 때에만 응답을 받는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비결은 성경을 알아서 그 진리로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이요, 기도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셔서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실 것이다(롬8:26-27). 성경은 이것을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 이라고 부른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기도하도록 도와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의 마음을 통해 생각하시고, 우리의 가슴을 통해 느끼시며, 우리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의 눈을 통해 우시며, 우리의 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신다.

 


기도는 양식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분명히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다. 비록 이기적인 기도를 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나는 예수님께서 단지 우리의 양식만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본래 의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그분께 구하라는 것이다.


기도는 용서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능력 있는 기도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매일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의 기도 중 많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에 간구만 있을 뿐 고백과 회개가 없기 때문이다.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기도는 보호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사탄은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그는 이미 당신의 생애를 파괴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파멸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그는 오늘 당신의 발을 빠뜨릴 구덩이를 이미 파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사탄은 지옥의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당신을 겨냥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 당신의 보호는 기도를 통해 공급된다. 악과 유혹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예방약의 구실을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망각한다.


기도는 찬양이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찬양의 어조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을 주목하라. 그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하며,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믿음의 최상의 표현은 바로 찬양이다.


찬양은 바로 우리 내면의 믿음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간구이다. 그러나 찬양이 없는 간구는 불신앙이다. 또 간구가 없는 찬양도 외람된 것이다. 우리가 간구와 찬양을 함께 묶을 때 그것이 바로 능력이다.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찬양할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간구는 “제발”이라고 말하고, 찬양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찬양 속에 거하신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신다. 당신의 전을 기도의 집과 찬양의 집으로 만들 때 당신은 승리를 얻을 것이다.

 

 

 


  11 장


믿음의 황금 열쇠


이 장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소위 ‘믿음의 황금 열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그 열쇠는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로 열어 줄 뿐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 천국 창고의 문을 열어 준다. 믿음은 우리 집의 열쇠인 동시에 하나님의 창고 열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모든 복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복의 척도는 우리의 감정이나 친구들이나 명성이나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취의 척도는 언제나 믿음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아마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묘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믿음이란 적극적인 사고도 아니며, 육감을 따르는 것이나 낙관적인 감정도 아니다. 또한 최선의 것을 희망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그것들이 성경적인 믿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믿음은 실상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substance)’이란 말은 ‘견고한 터전’을 의미한다. 영어의 ‘substance’라는 말은 우리가 디디고 설 수 있는 발 밑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계란 껍질이나 젤리 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단한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믿음은 증거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이 말은, 믿음이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라는 뜻이다. 증거란 보이지 않는 실재에 대한 입증이다. 믿는다는 것은 적극적인 사고가 아니다. 만일 믿음에 아무런 대상이 없다면 “믿음만을 가지라”는 말은 어리석은 충고가 될 것이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뜻 속에 이미 있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믿음의 역동성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힘이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인해 전능자의 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6은 우리에게 믿음의 강력한 힘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에는 우리가 고찰해 보아야 할 세 가지 주요한 사상이 있다.


믿음의 결여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없는 것, 즉 불신앙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불신앙은 악하고 사악한 죄이다. 실제로 이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것은 죄의 근원이다. 불신앙은 다른 모든 죄가 싹트는 죄의 모체이며,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죄이다. 불신앙의 죄는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무서운 죄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말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요일5:10). 이 얼마나 옳은 말씀인가!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 불신앙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면 믿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다른 누구를 불쾌하게 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면 우리가 다른 누구를 기쁘게 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실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우리에게 자신을 증거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까?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을 증거 하시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둘둘 말아서 자신의 위엄과 능력과 영광을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을 알리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땅 위에 단 한 명의 불신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면 우리의 믿음이 불필요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자백할 것이다. 그러나 무섭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끝으로, 히브리서 11:6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능하심을 보여 주고 싶어하신다. 믿음은 우리의 필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충족시키는 열쇠이다.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첫째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둘째는, 성령 충만함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박게 하려 함이니라”(갈3:14).


셋째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넷째는, 사탄을 이기는 것이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6“16).


다섯째는, 기도 응답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천국의 어떤 장면을 상상해 본 이야기가 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버지여, 땅 위에 복을 구하는 어떤 사람이 있나이다. 아버지의 기쁘신 뜻은 어떠하니이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그가 그의 믿음을 어디에 담아 올려 보냈느냐?” 천사들이 대답했다. “그가 손가락에 끼는 골무에 담아 올려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그 골무에 복을 가득 채워 그에게 돌려보내라. 믿음대로 될 것이다.”


다시 천사들이 와서 아뢰었다. “아버지여, 다른 사람이 아버지께 또 복을 구하고 있나이다.” 다시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그 사람은 어디에 그의 믿음을 담아 올려 보냈느냐?” 천사들이 대답했다. “그가 커다란 통에 담아서 올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미소를 띠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통에 복을 가득 담아 그에게 돌려보내라. 역시 믿음대로 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물을 주신다.


믿음의 성장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사람들이 믿음으로 이룩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이 말씀은 우리가 원형 경기장에서 영적인 운동 선수로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동안 믿음의 영웅들이 지금 하늘의 특별 관람석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이다. 위의 구절 속에는 역동적인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해 주는 몇 가지 규칙이 들어 있다.


첫째, 당신의 감성과 지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흠뻑 적시라.


1절에 나오는 “이러므로”라는 말을 주목하라. 이 말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을 지칭한다. 이 경우에는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지칭하고 있는데, 이 히브리서 11장은 전체가 믿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구약의 거의 대부분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 요점은 성경이 곧 당신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둘째, 모든 죄를 회개하라. 1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운동 선수가 무거운 짐이나 넘어지기 쉬운 것을 들고 달리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얽매이기 쉬운’ 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교묘하게 둘러싸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바로 우리를 교묘하게 둘러싸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경주에서 넘어지게 만든다. 불신앙은 악한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아마 고백하지 않은 죄가 당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평강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을 같은 순서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당신이 믿음을 갖기가 어렵다면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가 언제나 먼저 온다. 믿음과 죄는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사용하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경주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신앙 이상의 것이다. 믿음이란 다리가 달린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겨자씨에 있어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것이 비록 작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소중히 보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 더욱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씨의 숫자는 하나님 외에는 알 사람이 없다는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지금 당신에게 있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에 옮겨 보라. 당신이 활용하는 만큼 성장할 것이다. 곧 심는 대로 거둘 것이다.


넷째, 예수님을 바라 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히브리서 12:2은 말씀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거기에 뒤따르는 결과가 바로 믿음이다. ‘바라본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을 ‘아포라오(aphorao)’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일정한 목표를 보기 위해 다른 것에서 시선을 돌린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과 사탄과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예수님만을 바라 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신다. 지금 당장 그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당신의 마음에 가득 채우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바라 보라.


  12 장


복 된 확 신


구원받는다는 것, 곧 죄 사함 받은 기쁨을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수십명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이라는 것이다. 확신의 결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문제이다. 확신 없이 살아가는 것은 주차 브레이크를 걸어 놓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사도 요한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희망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단지 생각할 수 있다거나, 추측할 수 있다거나, 희구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성경의 모든 책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신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결해야 할 영원의 문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모른다거나 당신의 미래와 영원한 운명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을 선결해 놓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당신이 영원이라는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당신의 운명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받고서 의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의심이 좋은 것인가? 아니다. 통증이 육체에 고통을 주듯이 의심은 영혼에 해악을 끼친다. 통증은 하나의 경고요, 어딘가가 탈이 났다는 신호이다. 당신에게 의심이 있다면 설사 당신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 할지라도, 그러한 의심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때때로 의심을 품을 수 있다. 한 번은 한 여자가 무디에게 와서 자기는 이십오 년 전 구원을 받은 이래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때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럽군요.” 무디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당신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애드리언 목사님, 제가 결혼한 지 이십오 년이 되었는데 배우자와 한 번도 말다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결혼했는지 의심스럽군요.” 내 말이 배우자와 말다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당신이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라면 일부러 의심에 찬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당신이 의심을 제거하고 구원의 확실성과 확신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 애드리언 로저스가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말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구원받은 것을 정말로 안다. 그리고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현재의 믿음


만일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싶다면, 예수님께 대한 현재의, 바로 ‘지금 당장’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핵심이 되는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요한일서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성경에서 ‘믿는다(believe)’ 는 말과 ‘의탁한다(commit)’는 말이 같은 말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2:23-24에서 볼 수 있다. 거기 보면 성경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라 단지 기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당신도 알다시피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당신이 믿는 것은 예수님에 관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나의 믿음의 근거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믿음에 확고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틀림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나의 믿음의 대상이 신뢰할 만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 요한은 우리의 믿음의 훌륭한 기초와 근거로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역사


우리는 이 위대한 확신을 요한일서 5: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경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하고 있다(요19:33-34). 우리는 피로 구원을 받고 물로 거룩해진다. 성막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데, 구약 시대에 그 곳에 들어가서 사람이 첫 번째로 대하는 것은 놋제단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놋제단 위에서 피의 제사가 이루어졌다.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손을 씻었던 대야가 있었다. 따라서 먼저 피가 있었고 그 다음에 물이 있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피와 성결의 물로 임하셨다고 말씀한다. 그의 피는 우리를 사하시고 성결의 물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이다. 모든 확신이 바로 이 사실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성령의 증거


요한일서 5:6-8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바꾸어 말하면, 성령이 그 물과 그 피를 취하여 우리 마음에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9절의 논증을 주목해 보자.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즉 그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역사를 주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역사를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성령을 주셨다. 요한일서 5:9의 ‘만일(if)’이라는 말은 ‘…이므로’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어서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으므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인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조종사에 대한 항공사의 증거를 믿는다. 나는 조종사의 자격증을 보자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 항공사가 그 조종사에 대한 자격 심사를 이미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비행기에 올라탈 뿐이고 두 번 다시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요한의 논증은 우리에게 이미 그리스도의 역사가 있고 성령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사람들의 증거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내게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 줄 아는가? 그것은 당신이 믿고자 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를 선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리를 전해 주시는 분은 성령 한 분뿐이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모든 설교를 기도로 적신다.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무엇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다. 요한일서 5:10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증거하신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성령께서는 나에게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진리라는 사실을 내게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이 내 안에서 증거하신다. 나는 내 안에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 성령의 증거는 어떤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장 주변이 뜨거워진다거나 속눈썹 주변이 축축해지는 어떤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보다도 더 깊은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얕은 부분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깊은 역사를 우리의 가장 천박한 부분에서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으로 내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내게 속삭이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이 내 믿음의 세 번째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이다(요일5:10). 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이며,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하는 말씀이다. 12절 말씀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다시 13절 말씀으로 데려간다. 13절 말씀은 우리의 영적 출생 증명서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 믿음의 근거가 있고, 우리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낱 속기 쉬운 바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그는 물과 피로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입증하고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역사, 성령의 증거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


내게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첫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현재의 믿음이 있어야 하고, 둘째, 나의 믿음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인해 내가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영어 단어의 ‘believe’ 는 ‘by’와 ‘live’라는 두 단어에서 나왔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계명의 검증


이것은 당신의 집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의 집, 곧 당신의 전은 새로운 관리하에 놓여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3-6).”


요한은 당신의 행동이 당신의 말과 일치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며 구원받았다는 것이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언제나 지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요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을 찾아 무익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자 함이라는 사실이다. 그 모든 비밀은 ‘지킨다(keep)’는 말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의 삶의 소원과 목표와 지침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명이 되어야만 한다. 당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다(약2:22-26).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나 이제는 죄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당신의 마음의 소원이 아니라면, 당신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해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형제 사랑의 시험


우리의 행동의 열매를 판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금석은 형제 사랑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내가 구원받으면 내 형제에게 잘해 주고 싶고 내 형제와 함께 있고 싶어진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예,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교회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천국에서도 그들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집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 집의 사랑이시라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신다. 계명들을 지키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우리가 지닌 믿음의 증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것들은 필요 조건이 아니라 증거들이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일부분이다. 만일 그것들이 없다면 당신은 잃은 자이거나 심각하게 타락한 자이고, 확신을 가질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과연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진정한 의심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래도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당신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깨어진 관계일 수도 있고, 복구되지 않으면 안되는 깨어진 계명일 수도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내주하실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된 확신을 주시길 기도한다.

 

 

 


  13 장


하나님의 집은 호텔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진리를 밝혀 주셨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의 마음속에 오시면 아예 거주하시려고 오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여기서 ‘함께 있는다’ 는 말은 ‘계속하다’ ‘거주하다’ ‘견디다’ ‘남아 있다’ ‘서 있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정착하셨다는 뜻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주 하심을 가리켜 믿는 자들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힘과 기쁨을 주는 진리이며,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에 대한 연구를 결론짓는 데 있어 이보다 더 나은 근거는 없다. 하나님의 내주하심,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단순히 구원받은 것을 공언하는 사람들의 안전 보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 구원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공언하는 자들이 많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고, 행동하고, 말하지만 결코 구원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겉으로만 공언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힘주어 경고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는데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일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왜 결단코 잃어버린 영혼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놀라운 이유를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성령의 인내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우리 속에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신가?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이루시는 이가 누구인가? 그분은 물론 성령이시다. 이 구절은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을 성령께서 마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일을 시작했다가 끝마치지 못하는 것은 전능자의 특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끝마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그 명단에서 우리 이름을 지워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라. 먼저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으로 우리의 죄를 보여 주시고 죄책을 깨닫게 해주신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로 회개케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우리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요3:8). 그리고 성령임은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면서 또 회개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다.


제사의 완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온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구약 시대에는 속죄의 제사가 드려질 때 그 제사는 결코 온전하거나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제사들은 앞으로 올 온전한 제사의 그림자요, 예표에 불과했다. 그 모든 제사가 한 일은 사람들의 죄가 일 년 동안 더 굴러가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의 부요하시고 귀하신 피를 흘리셨을 때 모든 죄의 값이 남김없이 완전히 지불되었다. 그리고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구원받은 자들의 위치


우리가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 구절은 우리의 위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준다. 이 말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한 부분임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노아가 방주 안에 있었던 것을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벧전3:18-22).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방주가 “안팎으로 역청이 칠해졌기”(창6:14) 때문이었다. 역청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다른 곳에서 ‘구속’이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그 구속의 은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께서는 밖에 있는 물을 막으셨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자기와 함께 안에 있던 노아의 출입도 막으셨다. 방주가 안전한 만큼 노아도 안전했다. 그것은 그가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이 가라앉지 않으면 우리도 가라앉지 않는다.


성도의 예정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아신 바 되었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분의 위대하고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내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비행기 위에서의 나의 행동은 다소간에 내가 직접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예정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 비행기는 어떤 도시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들이 언제나 예정된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옥의 권세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구원의 현재 시제


영생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생명을 의미한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다시 말하면 끝이 없는 생명이 있다. 영생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그가 믿을 때 시작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10년 동안 그리스도인이었다가 버려지게 된다면, 그가 가진 것은 고작 ‘10년의 생명’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가졌든지 그것을 일단 잃어버리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그가 지금 갖고 있는 생명은 ‘영원한’ 것임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주님의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안전을 누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귀하신 우리 주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다.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은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구속이었다. 그분이 고통 속에서 피를 쏟으며 돌아가실 때에 그분의 상처난 입술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요19:30). 바로 그 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말했던 온전한 제사이다. 그러나 주님의 완성된 사역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역도 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셔서 항상 간구하신다(히7:25). 그분이 어떻게 중보하시고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는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위대한 대제사장적인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분이 자기 자신의 사람들 곧 성도들, 거듭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결코 드리시지 않는다. 이 말은 곧 그가 위하여 기도한 그들이 안전하게 보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 우리에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제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시간의 터널을 꿰뚫어 보시고 당신과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17:20). 우리는 비록 약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보장인가?


하나님의 주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데도 사랑하는 자녀를 죽음이나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은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부모로서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종종 마음에 있는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어떠한 잘못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다


내가 약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의 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소인의 면전에 완벽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달리시고 찔리신 손이다.


어떠한 원수도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다


로마서 8장은 ‘정죄함이 없다’로 시작해서 ‘끊을 수 없다’로 끝이 난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우리 마음속에 이주해 오셔서 내주하신다. 하나님께서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 또한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당신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붙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을 들어 보라. 괄호 안에 있는 말 대신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사랑하는 독자여, 이것이 바로 지금과 영원히 당신에게 있어야 할 구원의 보장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