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시대에서의 설교
김운용 교수(장신대학교,기독교예전/설교학)
들어가는 말: 터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
2001년 9월 11일 오전,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이요, 미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뉴욕 맨하탄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범들의 공격을 받아 불길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생생히 비쳐졌다. 납치된 비행기에 의해 테러 공격을 받는지 약 한시간 후 높이 417m, 110층의 위용을 자랑하던 쌍둥이 빌딩 두 채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세계 경제 수도"로 자처했던 거대한 성채와 같은 건물의 무너짐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많은 변화를 예견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외치고, 세계경찰을 자인하던 초강대국이 예기치 못한 테러로 비틀거리는 것을 목도한 국제 사회는 21세기 외교안보 환경이 지난 세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전쟁의 양상도 달라졌는데, 이전의 전쟁은 상대가 분명했으나 21세기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으로 그 형태가 바뀌었음을 인식케 했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은"이번 테러공격은 대통령과 국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각을 바꾸게 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도 익숙했던 시대의 틀이 무너지면서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되고 있음을 예고하는 흐름이 있다. 익숙했던 토대가 무너져 내리고, 다른 토대를 세우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지만 오늘의 시대 정신과 문화 사회적인 토대는 마치 미국의 경제 심장부가 갑자기 무너져 내림과 같이, 심각하고 엄청나게 무너져 내리는 시대 속에 서 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다이어저니즈 앨린(Diogenes Allen)은 오늘의 시대의 지적인 문화(intellectual culture)가 주요한 전환점에 서있음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대한 지적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중세시대가 끝나고 근대(modern)세계로 전환될 때보다 더 큰 혁명이다. 근대 세계의 기초가 무너지면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기간 동안에 안출 되어 근대의 사고방식(modern mentality)의 기초가 되었던 원리들이 이제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쩌면 무너져 내림의 증상은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근본적인 토대가 거부당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낡은 것은 무너뜨리고 새로운 터를 구축하려고 하였는데, 이제는 토대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 간다. 이러한 20세기 중반부터 거대한 흐름으로 생성, 전개되고 있는 이러한 반 토대적인 경향을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처음에 이것은 건축, 예술, 문학 분야의 한 흐름으로 이해되던 것이 이제는 "오늘날 문화 전체의 성격을 규정짓는 지시어"로 자리 매김을 해가고 있다.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가치와 시대 정신을 지배했던 터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대두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의 사역 전체에 있어서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별히 계몽주의 이후 합리성과 이성적인 특성에 근거한 형태를 유지해온 기독교의 설교에는 거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대 진리 혹은 권위를 해체하고 이성주의에 근거한 합리성의 터를 무너뜨리려는 경향은 과학적 합리주의를 내세운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를 거부한다. 그래서 스탠리 그랜츠는 모던 시대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로의 전환에 대해언급하면서, 이러한 전환은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거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토대가 버려지고 있는 이 시대에 유일하고 배타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어떻게 본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과거에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 진리와 거짓에 대해 논쟁했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은 도덕성과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데,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길만이 옳은 길이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 오늘의 설교자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가?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믿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토대가 무너지는 시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을 통해서 계속되어온 설교 사역은 결단코 중단될 수 없는 사역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징조"를 알고, 어떻게 지혜로울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비판적 반성은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 마음에 전해질 복음의 윤곽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여하여야 하고 씨름해야 하는데, 기독교 신앙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하면 가장 분명하게 전달 할 수 있을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할 설교자들은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 글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의 설교 사역에 대한 설교 신학적인 이해를 갖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고찰함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살펴 볼 것이며,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가장 도전이 되고 있는 설교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고찰과 함께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 설교사역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 이후 나타난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시대정신이요, 문화적인 현상(cultural phenomenon)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주로 예술가들이나 건축가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적인 관점이었던 모더니즘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는 문화 전반에 걸쳐 확대되었고, 1980년대에는 문예 사조나 철학사상을 뛰어넘어서 대중 문화에까지 깊이 침투되었다. 이제 포스트모던 경향은 "선택 가능한 하나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 흐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전제한 말이며, 과학과 기술문명, 이성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를 떠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는 의미를 가진다.
본래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는 "후기-" 혹은 "탈-"의 뜻을 가진 말이며, 이것이 모더니즘과 연결될 때, 후기 근대주의 혹은 탈 근대주의라는 뜻이 된다. 후기라는 말로 규정하면 연속성을 내포하는 반면, 탈이라는 말로 규정하면 이것은 단절과 비판, 극복이라는 주제가 강조된다. 이것은 두 가지로 다 해석이 가능하며, 실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고, 사실 이러한 의미를 따라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탈" 또는 "반대"의 의미가 더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문제에 대한 반성과 해답을 촉구하며, 모더니즘 시대 동안에 "누적된 병적인 요소들이 초래한 문제와 위기에 대한 반발과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세계관과 그것에 통합되어 나타난 계몽주의에 반동으로서 시작되었고, 언제나 포스트모던은 모던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의 내용과 주장(agenda)을 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모던 사고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근대 이전의 시대 신화와 신학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근대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과학을 문화의 토대로 삼았던 과학과 이성의 시대였다. 근대의 세계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서구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는 근대의 정신세계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대체적으로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을 지배했던 사상 풍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정신과 17세기 과학의 혁명적인 발달을 한데 묶어 근대세계를 출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중세를 지배하였던 교권(敎權)으로 벗어나 인간 이성의 우위를 발견하게 해 주었던 것이 바로 계몽주의와 르네상스였다. 르네상스는 근대 사고방식의 기초를 놓았지만 근대성(modernity)의 상부구조는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렌츠는 평가하기를 "르네상스가 근대성의 할머니였다면 계몽주의는 그것을 낳은 친 어머니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을 힘입어 변화를 주도한 것은 역시 17-18세기의 과학자들이었으며, 이제 고대로부터 중세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과학의 원리들이 대부분 폐기되거나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중세의 세계관으로부터 철저하게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에는 신의 계시, 혹은 교권이 진리를 판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었다면 계몽주의 영향과 함께 진리의 판정기준이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인 합리성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성의 능력과 가능성에 의존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믿으려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계몽주의는 어떤 시대적인 역사적 의미보다는 지적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 이성에 우위를 두는 지적인식의 변화로서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성은 이성에 신뢰성을 두고, 그것을 활용하여 세계를 파악하려 하였으며, 개인을 인식하는 주체로 삼았다. 여기에서 이성 중심의 문화와 사고가 형성되게 되었으며, 합리성과 개인을 중심으로 한 세계 가치관이 형성되게 된다. 이성과 합리성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 문명은 이제 중세의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주체가 되게 되었으며, 인류의 미래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근대에서 이성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삶의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했다. 이성에 대한 신뢰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 형태들이 근대 사회 속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사회를 과학적, 기술적, 이성적 진리의 노정을 따라 재건하겠다고 나서는 움직임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산업화 시대"(industrial age)를 구가하는 움직임들이었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한 마르크스주의 고안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가장 야심적으로 뻗어 나갔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계몽주의의 이상을 사회주의 체제를 통해 러시아에서 펼쳐간다. 이렇게 모더니즘의 비전은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입각한 유토피아"였으며, 과학의 기초 위에 기술이 서고, 그 위에 경제 발전이 추구된다는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유토피아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더니즘의 가정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물론 근대성과 함께 많은 사회적인 발전과 과학과 기술 문명이 이룩한 이기를 통해 인간 삶은 한결 풍요를 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성이 이룩한 과학 기술문명의 결과를 히로시마에서 보았고, 이성을 중심 하여 세워진 사회 체제였던 유럽에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을 통해 피폐해진 인간의 실존을 보게 된 것이다. 산업사회가 이룩한 지구 환경은 극심한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등의 결실로 나타났고, 가장 이상적인 노동자의 천국이 되어야 할 러시아는 인류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압제와 획일성은 결국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의 깃발을 내리고 말았다. 계몽주의이래 형성된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성은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성은 학문의 전당에서 점점 퇴위를 당하게 되었다. 사고의 기본 범주들이 변화를 겪으면서 이제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세계관과 계몽주의 프로젝트, 근대의 기술 과학의 이상, 그리고 근대주의가 수립했던 철학적인 가설들에 대한 반작용 혹은 거부 현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근대성(modernity)이 수립했던 문명의 열매들, 즉 과학기술, 사회 통제, 합리적 계획화에 대한 반발로서 형성되는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철학적인 일련의 흐름이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강한 반대와 공격의 소리를 높이는데, 그들은 근대주의자들이 인간의 이성과 지식에 지나친 신뢰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들은 근대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인간의 보편성과 진리와 가치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해 공격한다. 이러한 공격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으로는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그리고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등을 들 수 있다. 푸코는 그의 삶에서나 사상에 있어서 전형적인 포스트모던학자였다. 그는 종종 문화 역사학자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그는 "지식의 고고학자"로 불려지기를 좋아했다. 그는 전형적인 니체의 추종자였으며, 계승자였다. 그는 살았던 삶의 방식에서나 글을 쓰는 방식에서 근대의 세계관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나타냈다. 그는 자율적인 인식의 주체인 자아를 거부하였고, 인간의 보편성을 문제 삼았다. 푸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려한 철학자였다면 데리다는 가장 엄격한 학자였다. "푸코가 20세기의 충실한 제자였다면 데리다는 가장 중요한 포스트모던 재해석자였다." 데리다는 주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해체를 부르짖는데, 철학은 순수한 것이며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탐구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관념을 해체하고자 했다. 즉 어떤 지식의 존재론적 근거, 그 지식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지닐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그가 해체하려고 하였던 것은 근대 문화의 근간이 되는 계층적인 대립구조였다. 가령 이성과 감성, 논리와 수사, 말과 글, 과학과 비과학, 흑과 백, 남자와 여자, 이단과 정통, 정상과 비정상, 사실과 허구와 같은 대립구조가 그것이다. 즉 이항 대립의 해체를 시도한다.
로티는 미국인으로서 실용주의적 유토피아를 주장하는데, 그는 미국의 실용주의 전통에 서서 그의 이론들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서 존 듀이의 실용주의를 통해 신실용주의의 노선을 걷는데, 그의 주장의 중심에는 진리의 본질에 대해 특별한 이해를 시도한다.
신학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따르거나 이러한 시대정신을 신학에 반영하는 흐름들이 나타났는데, 막 테일러(Mark C. Tylor)와 같이 반(反)신학(a/theology)을 주장하는 해체주의적인 포스트모던 신학(de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의 경향이 있는가 하면, 데이빗 그리핀(David R. Griffin)과 같은 학자가 주도하는 보다 건설적인 경향으로 나아가는 건설적 혹은 수정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or revisionary postmodern theology), 조오지 린벡(George Linbeck)과 예일학파 중심으로 주장되고 있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은 건설적인 포스트모던신학의 흐름이 있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지식이란 발견되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식의 진위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용도와 그에 대한 결과적 효용을 훨씬 중요한 개념으로 본다. 여기에서 영원하고 보편 타당한 거대한 지식 체계, 즉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 보다는 당장 특정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실용적 정보 취득과 활용이 앎의 목표요 목적인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지식의 위상은 흔들리고, 정보화로 파편화된 세상에서 보편적인 진리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포스트모던 상황은 이와 같이 "보편 타당한 지식체계 또는 진리의 틀이 소멸된 것이 문화적 특징"이다. 어느 누구도 인류를 하나로 묶는 공통적인 메타내러티브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대신 작은 담론들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소위 다원주의가 나오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철학 운동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 현상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 경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 경향 가운데 서있는 문화 창출자들은 삶의 양식이나 가치관, 그들의 문화 표현에 있어서 기존의 권위나 보편적인 기준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권위의 표준과 중심의 상실은 다원성과 다양성의 추구"로 표출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문화는 세계화의 결과로 등장하는 다중문화와 "파편화와 지역화(localization)"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결과로서 포스트모던 사회는 권위 체계가 무너진 대중사회가 된다. 고전적 문화 개념이 쇠퇴하고, 문화의 가치 기준이 다원화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사라지면서 집단의 정신에서 나온 대중문화가 강력한 주도하는 시대가 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건축도 판이한 다름을 추구한다. 모던 시대에 건축의 목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각 건축물들은 서로 통일성을 가지며, 효율성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모던 건축이 추구한 단일한 가치 대신에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통일성 대신에 불일치를 드러내고 표현하려고 한다. 즉 기능 위주였던 모던 건축과는 달리 포스트모던 건축은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은 예술 세계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예술의 순수성 추구하는 단일가치를 추구하던 근대 예술에 비해 포스트모던 예술은 표현양식의 다양화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즉 통일된 단일양식 추구를 거부하고, 다양한 양식의 콜라주이며, 퓨전 예술 형태를 겨냥한다. 여기에서는 예술 창작자보다는 예술 수용자의 입장이 더 고려된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세계관의 결정주의를 깨뜨리고 나와 과학적인 근대주의를 넘어서려는 일종의 지적, 문화 사회적인 운동이다. 이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건축, 신학,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일종의 지적이며 문화 사회적인 현상이다. 메타내러티브(거대 담론 혹은 절대 정신)가 거부되고 이질성과 다양성이 강조되며, 근대주의가 표방하였던 인간 이성의 합리성, 과학의 신뢰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해 해체, 혹은 넘어서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근대성(modernity)을 통해 이룩된 것들을 붕괴 혹은 해체시키려는 지적, 문화적 운동이다.
설교 사역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독교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놓는 위협적인 도전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고,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기독교의 초자연성에 큰 도전이 되었던 근대주의의 실패는 초자연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세속적인 비판들이 그 힘을 잃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한 측면도 있겠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계몽주의 실패에 대응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계몽주의 이후 합리성과 명제적인 논리를 그 중심 틀로 하는 기존의 기독교의 설교는 그 틀에 있어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독교 설교의 기본 에토스에 관점에서 볼 때도 절대 진리는 해체되고 다원주의가 논의되며, 의지가 지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성은 정서에 자리를 내어주고, 상대주의가 도덕성을 대체해 가는 포스트모던 문화 사회적인 경향은 본질적으로 도전으로 다가온다. 포스트모던 상황이 기독교의 설교에 위협으로 다가오는 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설교 사역에 위협으로 다가오는 점들을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해체주의이다. 해체주의의 선구자는 철학자 니체였다. 그는 신 죽음을 외치면서 그는 절대정신의 종언과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성의 죽음을 선언한다. 즉 근대주의 사상의 기초인 이성을 통한 진리의 접근에 대해 해체를 주장한다. 니체의 충실한 제자였던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자인 자끄 데리다 역시 근대주의 전통과 주장들을 파괴하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의 관념을 철거하고, 지금까지 지배해 왔던 문화 사회적인 통념들을 거부하기 위해 "해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근대성이 철학적 기초로 삼고 있는 모든 것과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파괴한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신념은 붕괴하고, 보편적인 합의 자체를 해체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성격인데, 리요타르는 이것의 내용을 메타내러티브를 위축시키고(obsolescence) 혹은 불신하는 것(incredulity)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해체주의를 기본 골격으로 삼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의 설교의 근본적인 에토스와 내용과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 진리 혹은 메타내러티브의 해체, 혹은 위축 및 불신을 강조하는 경향은 기독교의 설교의 토대를 흔들어 놓는 것과 같다. 마치 아방가르드의 주장과 같이 "파괴하는 것이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기존의 모든 체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전복 세력의 이미지를 갖는 포스트모던 경향은 공통적 토대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설교의 토대를 흔들어 놓고 무기력하게 할 수밖에 없다.
다원주의.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모두가 자신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다. 세계화의 영향과 함께 다양성은 중요한 덕목이 되었으며, 예전에는 누구나 존중하고 그에 의해 삶이 조성되던 법칙들은 사라지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제껏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절대적인 것들이 무너진 시대가 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다원성이 공인되고 이성주의에 입각해 문화와 사회를 획일화하는 세계관이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해체 작업을 시도하며 그 결과로 말미암은 다원성에 대한 강조한다. 객관성을 토대로 하여 통일성의 기초를 마련했던 철학과 과학이 흔들림으로 인해 대두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철학이나 학문적인 흐름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문화 이데올로기도 다원주의적인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데, 정형이나 믿음의 체계는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는 사회적으로는 주변에 있던 것이 중심으로 이동하며,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던 중심과 서열이 무너지고 주변부가 중심으로 진입하는 현상이 삶의 각 영역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의 반영에는 종교관에도 나타난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들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믿게 한다. 즉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것은 모두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월터 앤더슨은 설명하기를 이러한 다원주의 경향은 세상은 "단일한 상징적인 세계가 아니고 여러 현실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세계"라고 이해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이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다양한 언어들이 삶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통일성이나 객관성을 외면하고 무조건적인 다원성만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상대주의가 형성되어 절대 진리에 대해서는 편견과 독선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기독교의 설교사역에 있어 커다란 도전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감성문화. 이성을 중심으로 한 합리성이 기초가 되어 발달한 근대의 문화들은 이제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가면서 감성중심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감성문화는 이성이나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느낌"과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논지는 감성문화에서는 고루한 주장이며, 느낌으로 존재하는 문화이다. 모던 사회에서는 IQ가 강조되었으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EQ가 중요시된다. 이성 중심의 교육을 벗어나 감성을 중요시하는 교육체계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감성문화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광고산업이다. 감성문화를 고려한 광고에서 상품에 대한 정보나 논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 기재들을 동원하여 감성과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광고 기재들을 더 중요시한다. 기존 광고의 서술구조를 해체하여 수용자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해석에 끌어들이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미지를 모호하게 열거하거나 무엇을 광고하는지 잘 알지 못할 정도로 파편화한 것도 있다. 즉 객관적이고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서술 구조를 해체하고 열린 메시지를 소비자의 해석에 맡기는 방식이다. 또한 물건의 용도나 품질을 선전하기 보다 분위기를 조성해 구매 충동을 일으키는 감성적 광고도 있고, 제품과는 관계없는 모델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성역 없이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문화 사회적인 흐름과 함께 현대설교학에서도 이미지와 감성, 상상력 등을 적극 활용하는 설교 기재들이 논의되고 있지만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이성과 합리성, 논리의 전달과 논증을 중심으로 한 설교 기재들은 고루하고 비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정보화 시대. 정보화 시대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리요타르는 정보화야말로 포스트모던 세계의 첫째 조건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정보와 시대는 지금까지 사회의 토대역할을 해 온 지식체계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이다. 컴퓨터와 같은 매체의 발달로 인간의 인식체계를 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평의 확대가 지성 세계의 틀을 파괴하고 보편가치로 인정되던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달라지게 했다. 정보화는 인간에게 가상 현실을 제공하며 시간과 공간의 틀에 의존하던 근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갖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따르면 모든 현실은 가상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개별적이고 작은 세계를 투사하는 헬멧을 쓰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경험하고 그 속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세계는 다른 사람의 세계와 똑같지 않다.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만든 현실을 받아들인다. 가상 현실 기술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처럼 사실상 큰 규모의 비개인적 사회제도들이 그 환상, 즉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객관적 세계를 프로그램화한다.
우리가 환상의 세계에 열광하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는 수동적이며 프로그래머들의 손아래 있다.
또한 정보화는 다원화를 부추긴다. 리요따르가 주장한 것처럼 정보화는 메타내러티브를 해체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정보의 공유가 가능하게 하여 다원화의 사회가 되게 한다. 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배하는 메타내러티브의 불신과 해체는 다원주의 혹은 상대주의로 귀결되게 한다.
이렇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때 포스트모던 상황은 설교 사역에 있어서 본질과 토대를 흔들어 놓을 만한 강력한 지진과 같이 와 닿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는 그 나름대로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가능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월터 브루그만이 지적한 대로, 문화적인 범주의 급속한 변환의 결과로 야기된 전혀 새로운 해석학적인 상황에 진입해 있으며, 지적 상황은 과거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 인식과 함께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논의와 함께 이러한 문화의 새로운 모드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흐름들은 믿음의 해석과 전파에 걸림돌로 다가오고 있는데,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의식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를 위한 중요 이슈
이렇게 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 상황과 정서 구조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를 위한 중요한 이슈들을 제시해 준다. 물론 이러한 이슈들은 서로 얽혀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분리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특성들은 탐구해 가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이슈들을 서로 분리해서 고찰하려고 한다.
권위(Authority).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권위를 포함하여 절대적인 가치, 혹은 보편적인 사실을 거부 혹은 해체하려고 한다. 해체와 관련하여 설교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어떤 점에서 설교는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말씀의 권세뿐만 아니라 설교자들의 권세까지 덧입혀 주셨다(막 16).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서의 설교의 권위를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설교에서 주시는 말씀과 비전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근대주의 이전에는 성경의 권위, 교회 전통과 성직자의 권위가 전제되었다. 즉 적절하게만 해석된다면 전통 그 자체가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의무는 전통을 설명해주고(to explain), 그것이 어떻게 오늘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to show) 것이다. 교회의 전통 위에 선 성직자인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할 때 그것은 말씀과 교리와 가르침의 정당성(validity)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근대주의 시대에는 실증적인 방법이 권위의 준거가 되었다. 회중들은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서 분명한 논리와 데이터를 통해 증명되듯 전해지면 그것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경험적 방법과 논리적 타당성이 권위의 근본적인 원천이 되었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내용은 아무리 전통적으로 받아들여 온 것이라 할지라도 거부당하게 되었다. 권위는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설교는 기독교의 전통(성경의 말씀)이 근대성과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논증을 통해 청중들에게 인지시킬 때 권위가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에토스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에드워드 팔리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권위의 집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고 표현한다.
포스트모던 설교자는 권위 자체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어떻게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인지를 강구해야 한다. 프래드 크래독은 권위의 재해석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그의 책제목을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으로 정한다. 오늘의 설교자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 약속의 말씀을 제시해 줄 수 있을 때 권위적으로 말하는 것이 된다. 이 약속의 말씀은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이룩되는데, 이것은 복음과 전통, 현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전통과 오늘의 경험들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통과 오늘의 경험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대화적인 자세이다. 이 대화는 전통과 경험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이 경험은 설교자와 회중들, 그리고 이 세상의 경험이다. 여기에서 대화적인 설교라 함은 설교의 형태는 설교자 혼자서 행하는 독백일 수밖에 없으나 그 내용은 대화적 내용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던 설교자는 그 말씀이 옳으며 진실하며,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강제적이라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진리 (Truth). 설교자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진리를 해체 혹은 부인한다. 여기에서는 다만 절대성은 무너지고 오직 다양성만 존재할 뿐이다.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 자체가 거부되며,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는 객관적인 진리는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설교를 진리의 전달로 볼 때 설교는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설교에 있어서 다원성과 상대성과 관련하여 볼 때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로 구분한 뉴비긴의 설명은 유용하다. 그에 의하면 문화와 종교는 깊이 관련되어 있고, 어떤 점에서 종교도 문화의 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문화는 다문화적일 수도 있고,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공통된 문화를 공유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문화적인 다원주의는 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 안에서 다양한 문화와 생활방식은 가능하며, 인간의 삶을 오히려 풍요하게 해주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종교적인 믿음은 어떤 것은 옳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다원주의의 주장인데, 그러나 "사실"이라는 영역에서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다름"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전통이 진리 자체로 여겼던 중세시대와는 달리 모던 시대에는 진리는 실재(reality)와 드러남(appearance)이 상응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혹은 인식과 경험의 상응이다. 즉 그 내용이 경험을 통해 확인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가지며, 객관성과 보편성을 가질 때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적인 진리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진리는 이제 더 이상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파편화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설교자는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들을 추구해야 하며, 진리의 경험이란 언제나 특수하며, 상황적인 것임을 인식하며 설교해야 한다.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여야 한다. 즉 독단주의는 배격하되 확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던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요구되는 자산은 "개방성"이다. 설교자는 전통, 경험, 진리에 대한 해석은 언제든지 비전의 새로운 각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현재의 주장이 얼마든지 작아질 수도 있고, 재조정될 수도 있으며, 개조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개방적이어야 한다.
인식(Knowledge). 모던 세계에서는 객관성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명제를 통해 전달될 때 그 메시지를 잘 인식하였다. 인식한다는 것은 사실적인 내용에 숙달되어 있는 지식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느낌이나 직관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신뢰할 만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던 시대의 설교는 의식할 수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전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인식은 어떤 사실에 대해 소유하는 것보다 더 광범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인식은 느낌, 직관, 딱딱한 데이터, 그리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엮어 가는 총체적인 구조(full fabric)로 인식한다. 어느 경우에는 산술적인 정확성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많은 인식은 무언의 요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보다 온전한 인식의 영역에서 청중들이 하나님과 복음을 인식해 가도록 해야 한다. 이전의 청중들이 주로 이성을 자극하는 좌뇌적인 인식체계를 가졌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주로 감성과 느낌을 중시하는 우뇌적인 인식체계에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상상력과 이미지, 이야기와 감성을 터치하는 언어가 포스트모던 설교자들에게는 중요한 매체가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 설교자들은 인간 경험의 이해에 있어서 총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강화 모드(Mode of Discourse). 모던 시대에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 주로 과학적이고, 명제적이며, 논증적인 언어가 사용된 강화 형태를 가졌다. 모던 시대 이전의 설교자들이 주로 신비적인 언어만을 사용했다면 그러므로 기독교의 대표적인 강화인 설교 역시 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지게 되었으며, 논증적이고 분석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세계는 인간의 이해와 표현이 다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명제적인 언어가 어떤 임무―교리 전달이나 교육 등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있어서―를 위해서는 환영받을 수 있으나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인 스피치보다는 신화나 시적인 표현이 보다 깊은 실재를 깨닫게 하는데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야기나 메타포는 인간 이해의 총체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도구가 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명제나 논증의 형태보다는 이야기나 메타포, 이미지와 상상력을 보다 중요한 강화 모드로 여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로날드 앨린은 포스트모던 설교를 위한 기재로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언어"(tensive language)를 제시하며, 월터 브루그만은 "시적인 언어"(poetic language)를 제안한다. 이러한 언어는 삶의 과정의 한 부분인 긴장을 구현하는 특징을 갖는데, 말하는 내용을 성취하는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러한 언어로 구성된 스피치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언어의 내용에 적절한 긴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설교자는 회중들의 지적, 정적, 의지적인 전체적인 영역에 있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던 설교자는 명제적인 언어도 때론 필요한 모드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으나―그것이 가지는 가치와 가능성, 한계를 정확히 알고― 설교를 하나님과 세계, 교회 등에 대한 정보를 게시하는 "게시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경험과 사건으로 인식해야 한다. 실로 설교는 회중들이 설교의 지각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복음의 관점에서 삶을 발견하게 해주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
나가는 말: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
복음의 선포인 기독교의 설교는 사회적인 행동(social act)이며,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밀하게 사회적인 변화와 관련이 지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삶의 자리를 무시한다면 기독교의 설교 사역은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효과성(effectiveness)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오지 헌스버거(George Hunsberger)는 복음(gospel)과 교회(church), 문화(culture) 사이에 존재하는 "세 축으로 이루어진 관계성의 패턴"에 대해 요긴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명하기를 복음의 축과 문화와의 축은 회심과 만남의 축이며, 문화와 교회의 선교적인 대화의 축이고, 복음과 교회의 축은 상호 호혜적인 축을 형성한다. 복음은 문화 안에서 "도전적인 관련성"을 가지며, 교회와는 "해석학적 궤도"를 가진다. 반면 문화는 복음과 관련하여서 급진적인 불연속성을 취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독립을 추구한다. 또한 교회는 주어진 전통에 고착되는 경향을 가지며, 다양한 문화와는 대화의 자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세상(문화) 가운데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하려 함에 있어서 단순히 복음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행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복음이 교회와 문화의 축과 함께 동시적으로 대화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로서의 문화와 사회는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만약 적절히 고려되지 못할 때 설교 사역은 자연히 무기력해지고 둔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설교자가 성경본문으로부터 어떻게 설교를 작성하느냐는 교회가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한 관계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늘의 세계의 특수성과 믿음의 신비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 그 시대를 분간하며 메시지를 선포하는 신학자(theologian)로 부름 받은 존재이다. 이와 같이 설교를 행한다는 것은 설교자들을 신비하면서도 당혹하게 만드는 삶과 믿음의 세계 한복판에 위치하게 한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 존재의 본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의 본질,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인간의 책임의 본질을 분간하고 선포하려 하면서 그 상황 속에서 신학 하는 신학자(local theologian)들이다.
조지 바아나(George Barna)는 오늘의 시대 변화와 관련하여 목회 사역에 대한 중요한 경고를 전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지난 수세기에 걸쳐 직면하여 싸워 온 상황들 중에 가장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문화 사회적, 지적인 시대 상황의 변화와 함께 우리는 설교 사역에 대해 전반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모던 시대에서 사용되었던 설교의 기재는 더 이상 효과적이 되지 못함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시대상황에 적합한 기재들이 보완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개신교의 설교는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형성된 철저히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영향과 정신사조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복음 전도나 설교는 늘 근대성(modernity)의 기재를 통해서 행해졌다. 마치 정확한 논리적인 방법론이나 실재에 대해 경험적인 접근을 한다든지, 상식적인 사실성(commonsense realism)에 근거한 방법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주로 기독교 신앙의 사실성을 강조하였고,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자연히 여기에서는 이성을 늘 우위에 두었고, 과학을 절대 신뢰하였고, 그것이 기준이 되는 문화 속에서의 설교도 늘 증명하고 논증하는 형식이 널리 사용되었다. 언제나 설교는 이성적이고 추론적인 변증(rational apologetic)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어떤 진리에 대해 그것을 증명하려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 과학의 발달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이성이 설명해 주는 바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면서 설교의 방법 역시 이러한 이성적인 논증과 논리에 신빙성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계몽주의 이후 합리성에 근거하여 형성된 기독교의 설교의 틀도 명제적이고, 논증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오늘의 시대적인 변화에 맞추어 볼 때, 무기력해질 수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를 포스트모던 사회로 단정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어느 사회나 모던 이전, 모던, 포스트모던의 경향은 공존하며, 서구가 300년 동안 경험했던 모더니티를 지난 40여년 동안 짧은 기간 경험하였다. 미처 모던 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에 포스트모던의 파도에 휩싸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과거와는 전혀 새롭게, 그리고 복합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를 설명할 때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보다 적절한 용어는 없다. 우리 사회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화 사회적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사회 상황의 변화와 함께 북미의 설교학계는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경향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의존하던 의식과 방식이 효과적이 못하는 문화 사회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설교 사역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시대의 설교 사역은 많은 부분이 그 시대의 설교자들이 어떻게 그 사역을 이해하고 감당하려고 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리 와야트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설교를 "싸우는 경기로서의 설교"(agonistic preaching)를 주창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상황에 적합한 방법을 따라 투쟁하고 싸우듯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려는 몸부림하는 설교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의 토대를 흔들어 놓는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설교할 것인지 몸부림이 없는 설교는 교회를 잠재우고, 텅빈 회중석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새천년의 벽두에 서서 새로운 시대를 사는 자세를 언급한 이어령의 주장은 오늘을 사는 설교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은 열려있는 것도 닫혀있는 것도 아닙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늘 닫혀있고/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늘 열려있습니다." (2003.11.13.김운용교수 홈페이지)
포스트 모더니즘과 설교
김창훈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오늘날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한다. 실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생활에 침투했고, 때로는 무분별할 정도로 빈번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더 이상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부 지식인들만 향유하는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황이 설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본고는 오늘날의 설교 상황(context)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설교학적 접근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I.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알아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첫 번째 특징은 ‘상대주의’이다. 근대는 거대담론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윤리, 종교, 예술, 철학, 건축, 문학, 삶의 방식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치 또는 규범)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에는 비정상적이고 죄악시 되었던 동성애, 성 전환 등이 이제는 단지 삶의 방식, 성향 또는 기호의 차이 정도로 여겨진다. 종교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모더니스트들이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각도로 공격하였다면, 포스트모던니스트들은 기독교가 구원을 주는 유일한 진리가 아니고 단지 하나의 종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특징은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절대적 진리와 규범을 부인하는 상대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객관적 과학주의를 반대하고 문학, 예술, 문화, 철학 등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며 문화적 삶도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관용과 여유가 최고의 덕목이며,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전파하고 강요하는 것은 무식과 교만과 독선으로 간주된다.
세 번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감성주의’이다. 근대는 합리적 이성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성보다 감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모든 영역에서 감정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성경과 교리의 기초 위에서 신앙을 세워가기보다는, 체험이나 신비 또는 느낌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예배와 찬양과 기도에 있어서도 감정적인 부분이 우선시 된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의 특징은 ‘혼합주의’이다. 근대는 절대적 가치와 상위 가치가 인정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탈 장르화 현상이 두드러져서 독특한 장르의식이 해체되고 이질적인 장르들이 혼합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는 ‘유니섹스’(unisex), 그리고 팝과 오페라의 만남인 ‘팝페라(popera)’, 사실(fact)와 허구(fiction)를 결합한 ‘팩션(faction)’ 등의 신조어는 모두 혼합주의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서도 혼합주의적 현상이 나타난다. 오늘날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와 이교화(異敎化)는 대표적인 혼합주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원리가 교회에 그대로 수용되어지고,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디어져서 다른 종교와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II. 포스트모더니즘과 새 설교학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문화적 상황과 함께 설교학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설교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논리와 설득이 강조되는 명제 중심의 전통적인 설교(이러한 접근은 다분히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의 대안으로 소위 ‘새 설교학(New Homiletics)’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지난 30여 년 동안 새 설교학은 설교학계에 엄청난 도전과 변화를 주었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과 보조를 함께 하며 발전한 새 설교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먼저는 청중에 대한 관심과 고려이다. 새 설교학에서 전통적인 설교와 관련하여 제기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설교에 있어 청중의 역할과 청중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통적인 설교는 청중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청중도 고려되었으나 역동적인 참여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설득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새 설교학에서 청중은 설교의 준비와 전개와 전달에 있어서 우선적인 관심과 고려의 대상이 된다.
새 설교학의 두 번째 특징은 설교에 있어서 귀납적인 접근에 대한 강조이다. 전통적인 설교는 대개 요점과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그 후에 그 요점과 결론을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설득하거나 논리적인 설명을 보충하는 연역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새 설교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사용된 연역적 방법은 권위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청중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진단하면서, 함께 결론을 만들어가거나 결론을 열어놓는 귀납적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특징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story-telling 또는 retelling-story) 또는 ‘이야기 형식’(story-style)의 강조이다. 새 설교학 학자들은 설교의 사명은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는 것인데,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진리를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삶의 내용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이상 새 설교학의 대표적인 주장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새 설교학의 우선적인 관심은 한 마디로 ‘효과적인(또는 지루하지 않고 흥미를 주는) 전달’이라고 할 수 있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청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분명하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귀납적 접근이 필요하며,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이며 감동적으로 진리의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새 설교학은 위에서 언급한 상대주의, 다원주의, 감성주의 그리고 혼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포스트모던 시대와 설교
위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등장하게 된 새 설교학의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새 설교학은 설교에 있어서 커다란 지각 변동을 가져왔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많은 교훈과 도전을 주었다. 그러한 공헌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새 설교학이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몇 가지를 놓치고 있고, 일방적이고 편협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서 바람직한 설교를 위해 설교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①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 설교학의 중요한 특징은 청중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과 고려이다. 물론 청중은 설교의 내용과 구성을 위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설교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청중이 아니라)께 인정받는 것이어야 하고(고전 4:1-4), 설교자의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뜻(청중이 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때때로 청중이 원하지 않더라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돌 맞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②성령의 역사하심에 온전히 의존하라.
효과적인 전달은 새 설교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그들은 좀 더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접근을 위해서 청중을 고려하고 귀납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야기 형식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새 설교학의 제안들이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 어느 정도 유익한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이다. 청중을 고려한 새로운 접근 방식 자체가 반드시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들은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한 바울의 고백을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③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요구된다.
필자의 판단으로, 새 설교학에 있어서 특히 이야기(식) 설교에 있어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문제는 본문을 피상적으로 접근하거나 본문의 의미를 왜곡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 설교학이 하나님의 바른 뜻(“What”)의 전달보다는 흥미 있고 효과적인 전달 방법(“How”)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야기(식)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는 경우를 훨씬 더 빈번하게 볼 수 있다. 필자는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금도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본문을 충실히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
④ 복음의 기본 진리(또는 교리)를 자주 그리고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필자는 새 설교학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정체성의 약화라고 생각한다. 새 설교학은 삶의 변화를 위한 효과적인 전달에 우선적 관심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와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소홀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감성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설교는 단지 삶의 변화만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지만, 삶의 변화는 설교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기독교인보다도 훨씬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비 기독교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복음의 기본 진리나 교리에 대한 가르침 없이 삶에 대한 강조에 치우치게 되면 순간적인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신앙 안에서 삶의 진정한 변화는 기독교의 바른 진리와 교리의 기초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IV. 글을 맺으면서
포스트모던의 시기는 설교에 있어서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이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또는 설교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위대한 설교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셨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능력 있는 설교를 위해서 시대의 상황과 청중은 분명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본문에 충실한 메시지를 전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 때 주의 은혜로 설교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것이고, 그 때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을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神學指南 2006年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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