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적인 설교의 접근방식 /설교의 리얼리즘[캠벨 몰감] 캠벨 몰간(1863~1945)은 영국과 미국에서 노스필드 사경회의 강사로 봉직하였다. 1916~1929년까지는 순회 설교자로서 봉사하였다. 그 기간동안에 많은 설교 자들과 목회자들은 캠벨 몰간의 글을 통해서 설교 준비에 도움을 얻었음을 인정 할 것이다. 몰간은 캠브릿지의 췌샨트 대학 학장으로 있던 1920년대 초기 설교에 대하여 많은 강론을 하였다. 그 강론들은 설교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 책에 수록된 강론 가운데 네 편을 소개한다면 설교의 본질적인 요점들, 설교 본문 선택, 중심 메시지, 설교의 서론과 결론등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내용은 설교의 본 질적인 요점들에서 뽑은 것인데, 설교의 본질에서 설교의 접근방식으로의 전환을 도와준다.
기독교 사역자에게 가장좋은 사역은 설교 사역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무시한 채 사소한 천 가지의 문제거리에 매어달리는 위 험천만한 시대입니다. 그 중요한 한 가지는 설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진리를 전달해 주는 언어활동을 가리키는 어휘들을 다 모아 보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물론 제가 말하는 것은 헬라 원문으로 된 신약성경입니 다). 여덟 개에서 열 개의 헬라어 어휘가 있는데, 단어마다 설교하는 일의 어떤 국면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그 어휘 가운데 최상의 어휘가 둘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서 언제나 그 어휘가 명백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어휘들 은 모두 가치있는 어휘들이지만 부수적인 어휘들입니다. 두 어휘란 '유앙겔리조'와 '케루소'인데 , 이것들은 우리 설교의 가장 중요한 국면을 지시하며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신약의 이상을 보여주는 어휘들입니다.
유앙겔리조는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영어에는 "preach the Gospel"이며 문자 그대로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서 영어의 "evangel", "evangelist", "evangelistic"이라는 어휘가 파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 어휘는 헬라어의 번역이 아니라, 헬라어에서 전이된 어휘입니다. 만일 설교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그것에는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은혜를 다 함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설교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바로 이 어휘를 통해서 두 요점이 전제되고 있습니다.좋은 소식을 사람 들에게 선포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와 슬픔과 비참이 거기에 함축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은혜 의 전체적인 사실, 곧 하나님의 엄청난 계시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합니다. 좋 은 소식을 선포하는 설교는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은 그 필요에 대해 은혜를 전하는 메신저들입니다. 케루소란 단어는 매우 흥미있는 어휘로서, 왕좌에서의 선포를 의미합니다. 그 말은 통치자를 대신하여 메신저가 무엇인가를 전달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하면 두가지 개념, 즉 권위적인 왕좌와, 메신저가 명을 받아 전할 명령을 다시 주목해야 합니다. 이 두 개념들을 매우 간단하게 함께 모아 생각하여 보십시오. 설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수백 가지의 여러 요점들과 다양한 국면들과 많은 다양한 어조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통일된 사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일은 하나님 보좌의 권위로 인간의 필요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듣는 자들에게 선언된 것에 복종할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한때 어느 교역자 모임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설교하는 일이 설교자와 군중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그 는 많은 대중들 앞에서 그들이 복종할 것을 강압적으로 주장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설교자의 소명이 바뀐 것입니다. 저는 참 놀랐습니다 만일 설교하는 일이 샐패하였거나 실패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설교자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말을 하면서 반드시 자기가 무너뜨리려는 요새가 바로 인간 의지의 요새임을 늘 기억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여러 감정의 노선을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노선을 따라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추적하는 궁극적인 표적은 의지입니다. 설교하는 일이 지성의 영역에서 단순하게 토론하는 것이거나, 또는 이러한 식으로 말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라고 한다거나 감정의 영역에서 어리석음을 떠는 것이라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아래로 인간의 의지를 몰아 복종시킬 수 있을 때만 그 설교가 성공적입니다. 설교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작고 사소한 문제거리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왕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강제적인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본래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행6:4).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집사를 세우게 된 연유입니다. 지금 집사들이 어떠한 사람이든지 당시의 집사들은 그러한 차원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직임을 세우는 원리를 주목해보십시오. 그들의 임무는 대단한 사역인 성찬을 거들어서, 말씀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고 기도로 준비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언어 사용의 무미건조함을 깊이 인식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설교자가 된다면 대번에 그 일이 엄청난 일임을 인식할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몇년 전에 프레저(Frazer)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시대가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고 선지자다. 지금 이 시대는 선지자를 받을 준비를 하고있다. 우리는 오늘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세상이 알았던 그 어느 때보다 더 엄청난 때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를 밝히는 신학적 논쟁의 불행이 사람들을 만족시 킬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약적인류의 설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위대한 은혜의 메시지, 그것도 자기들은 하나님 의 보좌를 대변하고 그 보좌에 복종하라는 요구를 당당하게 할 수 있음을 인식한 사람들이 전하는 은혜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설교 내용의 본질적인 요점들과, 그 요점들을 설교화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사항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진수적인 사항들은 진리, 명료성, 열정입니다. 저는 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학 강의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론을 다른 사람들에게 한 적은 많이 있 습니다. 설교학에 대한 강론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설교학 강론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 나오는 설교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의 위대한 설교 행위를 탐구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한 편의 설교 내용의 진수들을 몇 단어로 모아 표현 해 보라면, 진리와 명료성과 열정이라는 세 단어로 약축시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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