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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성경 이해를 돕는 몇 가지 원칙들

하나님아들 2020. 3. 14. 18:16

바른 성경 이해를 돕는 몇 가지 원칙들

 


 

 



성경 66권중 구약을 구성하는 39권의 책은 그리스도시대 이전에 유대인이 성경으로 인정한 것으로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였다. 구약의 원문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만이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 27권 중 21권은 그리스도가 죽은 뒤 사도들이 쓴 편지로 당대의 공용어중 하나인 헬라어로 기록됐다. 구약은 모세를 비롯한 약 30명의 성경 기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하였고, 신약은 약 10명의 기자가 기록했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은 다윗같은 국왕으로부터 정치가, 정부 관리, 군대의 장관, 제사장, 학자, 의사, 농부와 목자, 베드로같은 보통 어부출신들까지 각양 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성경의 신비는 66권의 성경이 시대와 저자와 양식이 다른데도 내용은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 성경의 원저자가 한 분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증거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의도나 고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성경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연대는, 구약이 기원전 1500년경부터 400년경까지 약 11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약은 기원후 50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약 5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기록된 때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까지는 약 1600년의 긴 기간이 걸렸다.


성경을 기록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2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치고 40여명의 저자와 3대륙의 기록 장소들을 사용하신 목적은 모든 세대와 모든 환경을 초월해서 적용되어질 초세대적(超世代的), 초지역적(超地域的)인 말씀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그동안 성경내의 수천가지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고, 장차 이루어질것이다 (32,500여 약속, 초림456번, 재림1518번 예언). 그러므로 온 세상의 책중의 성경만이 지상의 유일한 절대 진리임을 나타내신것이다.

 

성경의 번역은 B. C. 130년 애굽의 프톨레미 필라델푸스 왕(Ptolemy 2. Philadeaphus, 주전 284-247)때 왕실의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헬라어로 번역된 유대인들의 율법이 별로 없다는 보고를 하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후 유대인 12지파에서 6명씩의 랍비들이 대표로 선택되어 72명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두루마리 히브리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하게 했다. 이 최초의 번역 성경을 ‘70인경’이라고 부fms다. 아이러니(irony)한 것은 유대인 학자들이 정성을 다하여 번역을 해놓고 보니 이 70인경이 자기들과 원수 관계인 기독교인에게 좋은 번역 책이 되어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외경만 제외하고는 환영받는 책이 되었다. 그리고 A. D. 90년 얌니아 랍비 회의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선택한다. 70인 역의 언어와 메시지가 초기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준 것과 이를 통해 헬라 문화가 기독교 안에 들어오는 통로가 된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는데,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70인 역을 주로 사용했고, 그 결과로 그들의 구약 인용은 대부분이 70인 역에서 왔다. 결과적으로 70인경이 기독교 부흥에 크게 공헌하는 기독교인의 성경이 되고 말았으니 유대교 입장에서는 열불나고 기가 막힌 일인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이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 자기들이 번역한 구약의 70인경을 버리게 되었다. 신약은 A. D. 397년 카르타고 공회에서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채택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성경은 계속 각 종족의 언어들로 번역중인데 세계성서공회연합회(United Bible Societies, UBS)의 2011년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6,600 개이다. 그중 구약과 신약이 모두 번역된 언어는 500개 미만이고 쪽복음이라도 번역된 언어는 2527개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영적 계기판을 바로 보는데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이 원칙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Basic) 원칙이다. 이 기본원칙은 우리가 어떤 전자제품을 사면 따라 오는 사용 사용 설명서와 같다. 귀찮다고 사용설명서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작동하면 제품의 기능을 다 활용 못하거나 아예 망가뜨려 못쓰게 되는 경우가 있듯 재미없는 딱딱한 내용이지만 기본원칙이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읽으시면 유익하다. 기독교 이단들도 성경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기본원칙을 벗어나 곧 말씀을 벗어나(고전4:6) 교주의 말을 주장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자타칭 가짜 재림예수가 많이 나온것이다. 그래서 이단(異端)이란 정통(正統)과 끝이 다르다는 뜻이다.


1.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반응은 부차적이며 종속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떤 문제해결을 위해서 예를 들면 병 낫거나 혹은 삶이 잘 풀리기 위해 혹은 능력 받고 축복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요 구속주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며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이 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은 수용자인 우리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자인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성경을 맛보아 아는 것이다(시34:8). 체험하지 않는 성경지식은 당신을 넘어지게 하는 독이 될 수 도 있다. 이에 관해 한 예를들면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여기에서 헬라어 '안다'는 말은 '오이다'(οiδα)와 '기노스코'(γινώσκω)가 있다 '오이다'는 이성(理性)적인 이해의 의미이다. '기노스코는' 전인적인 경험과 영성으로 전존재를 다 안다는 의미의 말이다. 제가 뉴스를 통해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활동을 알지만(오이다) ‘기노스코’ 의미로는 그분과 나는 서로 모르는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다. '기노스코'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야다(Yadah)' 동사는 때로 부부간의 성적인 연합을 의미한다(창4:1). 따라서 부부간에 서로를 '안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이고 심리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여 전 인격으로 연합하고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개념이다.



즉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바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요, 불쌍한 자요, 살았으되 생명이 없는 자인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 곧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인 것이다. 죽어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이 영생의 시간이며,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부터 영생이 천국까지 출발되는 것이며 천국에서도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체험해서 영생얻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하는 삶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알아도 말짱 도루묵이다. 18세기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딤전1장 17절의 말씀을 읽던 중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말씀을 강렬하게 체험했고 이 체험은 조나단 에드워드 개인에게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개 교회 그리고 전 사회를 진정한 부흥의 불길과 거룩한 개혁으로 이끌어갔으며 사회 구석까지 이른바, 각성의 불길로 번졌고, 윤리적 차원에서도 성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한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 체험은 세상과 역사를 바꾸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 중심의 성경 이해는 종종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선택이나 수용에 좌우되는 것처럼 왜곡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며, 믿고 영광 돌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인간의 복과 보상, 대가를 먼저 생각하고 성경말씀에 접근하는 것은 운동선수가 먼저 열심히 훈련해서 실력 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시합후 받을 상금만 계산부터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생각인것이다. 과거에 왕의 명령을 어명(御命)이라고 했다. 어명이면 사약이라도 받아 먹고 죽어야했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쓴 일반 책과 달리 전지전능하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책이므로 하나님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야 한다(신31:9~13). 그러므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3:9) 사무엘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할것이다.

 


2.각권의 성경 저자의 집필 목적을 파악하여 이해


컵은 물이나 음료수를 담는데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그것으로 전화를 걸려고 하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보듯 성경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한 목적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딤후 3:15~17절에 전체 성경의 목적들을 명시하고 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목적을 정리하면 첫째는 성경을 통해 구원받고 둘째는 변화받아 셋째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심판받아 지옥갈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다(마16:26). 이상의 세가지 성경 목적은 성경의 3대 주제라 할 수 있는데 1)구원을 얻는 생명문제 1)구원받은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말씀대로 사는 문제 3)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사명문제이다. 이상의 3대 주제가 성경의 베이직(Basic)이다. 성경의 베이직을 놓치고 성경을 대하는 것은 알맹이를 놓치고 껍데기 붙잡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고 마치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성경의 베이직 곧 세 가지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 얻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증거하는 선교의 책이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롬16:25-26). 성경은 선교의 흐름을 통한 구속사이기에 선교의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제한받지 않고 누구나 하나님께 산제사드리는 예배자로 사는 것처럼 선교도 예배와 똑같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만인의 제사장으로 군사로 영적전투를 하며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러므로 선교를 몰라 선교하지 않는 성도와 교회는 아직까지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각 권의 성경마다 집필목적과 의도를 파악하고 누구를 대상으로 기록되었는지 바로 이해해야한다(요일5:13). 예를 들면 열왕기나 역대기는 얼핏 보면 중복된 내용이 많아 필요이상으로 역사서가 두꺼운 느낌을 갖게 하지만 역대기는 열왕기의 단순한 중복이 아니고 기술 관점(觀點)이 다른것이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선지자(先知者)적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제사장적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열왕기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성결로 인간의 죄악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반면 역대기는 이를 덮은 체 인간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구속하시는 선교사역을 이루어 오셨는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각 성경을 보는 관점을 알려드리고 핵심을 파악하도록 도와드릴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면서 결국 성경이 나를 연구하고 변화시키도록 말씀이 주인이 되도록 끊임없이 나를 부인하고 비워드려야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행동을 다스릴 모든 원리를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살전4:1-12; 5:12-22).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완전 무장을 할 수 있다(시19:7,8; 딤후3:16,17). 하나님 말씀 자체에 힘과 생명력이 있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 힘을 성경에서 얻어야한다.

 




3.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인내심으로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 말과 걸음마를 가르치듯 단순에서 복잡,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그 진리의 뜻이 넓혀가고 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계시인데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나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로 하나님의 전부의 계시를 한 시대, 한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점진적인 계시를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계시의 특성에는 내용의 통일성(統一性)과 계시 전달 형식과 방법에는 점진성(漸進性)이 있다. 마치 창세기라는 시발역(始發驛)으로부터 요한 계시록이라는 종착역(終着驛)까지 놓여있는 선로(線路)와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눌 수도 없고, 한 권이라도 떼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66권의 성경 전체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뼈대있는 신앙이 되어서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 분은 성경안의 모든 사건과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집행자시다. 그 분의 성품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각 권을 이해하는데 지름길이다.


왜냐하면 그 분의 성품과 뜻과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이다(약1:17). 구약 노아시대때 물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신약시대 현장에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그 예수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느껴지고 신약의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계시의 시간차 때문에 오는 것이다. 구약은 계시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눈에 보이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모형으로 보여주는 계시의 방법이 필요한 시대여서 우상 숭배하는 자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돌로 처 죽이는 것이다(레20:2).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장수, 건강, 부유, 자손 등으로(신28장) 사람 눈에 보이게 계시하셨지만 계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로는 즉 신약시대에는 부활하심으로 내세 존재를 분명히 계시하셨기에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바울처럼 처 자식 없고 핍박받고 순교당하는 것까지 영원한 축복과 면류관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딤후4:8). 그리고 계시의 대상은 모든 세대와 온 세상의 만민인것이다. 구약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회화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들이기에 형이상학적인 언어들로 많이 기록된 신약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 만약 구약이 아직도 신약보다 더 어렵게 느꼈다면 아직 성경을 제대로 파악 못한 연유이다.


성경을 처음 대하는 초신자들이 구약을 읽을 때 어려워하고 무슨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며 구약을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로 간주하여 멀리한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합쳐 한 권의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원래 언어가 필요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들이 알아 볼 수 있는 문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할 수 없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왕이되신 신정국가(神政國家)의 본이 되어 만방에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한 민족을 먼저 택하셨다(출19:5~6). 그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그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구약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으로 지었기에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인간과 대화하시며 그 분의 뜻을 계시하셨다. 성경의 주류(主流)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의 흐름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적, 예표적으로 내다보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인 동시에 성경의 중심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또 계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되신 메시야로서의 고난의 주도 보아야 하지만 우리를 날마다 승리케하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위대하신 능력의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메시야도 동시에 믿음으로 보아야한다. 구속(救贖)이 성경의 중요한 대 주제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주제는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구속도 포함되고 대계명 (The Great Commandment)과 대사명 (The Great Commission), 천사와 사탄에 대한 계획, 천년왕국에 대한 계획, 심판과 지옥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획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적으로 계시하기에 해석도 그분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한다.



구약은 율법을 통하여 만왕의 왕(KING OF KINGS)이 오셔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왕이 오신다 ” 라고 증거했고 신약은 복음으로 왕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소식 “왕이 오셨다”(마1:1) 그리고 "왕이 다시 오신다"(계22:20)며 초림사역(구원)에 근거하여 재림약속(완성)을 기다리며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한다. 왕의 명령인 대 사명을 준행하는 왕의 증인 되어 , 왕과 함께 선교하여 왕의 나라를 확장해야한다. 성경의 진리는 하나이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고 믿는 것처럼 구약은 메시아로 오실 주님의 그림자(예표)를 보고 믿었다. 구약의 성도들은 보지 못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요8:56) 우리도 보지 못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도마는 보고 믿었으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으니 도마보다 더 복된 자들이다(요20:29). 구약과 신약은 사람이 구분한 것이지 내용은 일관되어있다. 구약성도가 믿는 구세주 예수를 우리는 지금 믿고 있고, 그들이 대망한 재림의 주를 우리도 믿고 선교하면서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참: 유1:15-16,요8:56,시22-24편).

 


4.성경을 성경으로 이해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설계자로서 다양한 재료들로 성경이란 웅장한 건물을 지으셨다. 따라서 각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부분을 볼 때 다른 부분과의 연결 속에서 보아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성경 각 부분의 유기적 통일성은 신약과 구약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씨가 자라서 떡잎을 나고 줄기와 가지와 잎이 생긴 다음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구약 말씀은 전자 제품의 기술개발이 계속되면서 신기술이 개발되면 과거의 제품은 생산하지 않은 그런 발전이 아니라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진전인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하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발목잡고 발목이 코끼리 형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신체 각 부분이 한 몸을 이루듯 성경 각권이 모아져 한 성경을 이루기에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각 권을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면 해석되어야 할 본문을 어떻게 하면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할 것인가? 먼저 평행구조와 내용을 찾아야한다.

예를 들면 히7:20절의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서 없이 된 것이 아니니” 멜기세덱에 관한 이해는 그 평행구조의 창14장과 시 110:4 “여호와는 맹서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성경 구절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성경말씀을 성경의 다른 구절이 설명해줌으로써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해석자가 된다. 성경은 많은 주제에 대해 한 문장 이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때때로 성경은 한 주제에 대해 어느 부분에서는 간략히 다루며 또 다른 부분에서는 길게 다루기도 한다.


성경 전체의 맥락속에서 각 본문을 풀어야한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 안에 들어있다. 가령 마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라고 한 이 말을 생각할 때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2:16).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 해답은 성경 안에 있다. 요 6:39-40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마7:21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요 6:39~40에 보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 얻는 것" 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을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내용을 알아야 하고 전체의 맥을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한 국가의 모든 법의 정신과 기초가 헌법에 있고 헌법은 모든 다른 법의 상위(上位)에 있음과 같이 전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만의 영원한 자연적인 속성은 모든 성경 해석의 헌법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인간을 향한 선하신 동기임을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행하심은 항상 선하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원래부터 영원히 선하신 분이신 것이 전체 성경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한 성품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선악과를 두신 목적이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을지라도 그 분의 성품을 믿음으로 그 성품 안에서 우리는 자유하며 이해할수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부지런히 읽고 66권 전체에서 현현(顯現)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인격으로 만나야 한다. 또한 편식하면 우리 몸이 건강할 수 없듯이 성경을 편식하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성경에 연구되고 변화 받아야한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고전2:12~13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손수 선언하신 문맥의 원리를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을 설명하는데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성경으로써 성경을 설명하는 방식인 것이다. 성경의 조명은 성경 자체를 통하여 온다. 그것이 바로 문맥 원리의 원칙이고 가치인 것이다.

문맥에는 가까운 근접문맥(Immedite Context)과 먼 거리의 원접문맥(Remote Context)이 있다. 근접문맥은 가까이 접해있는 단어들과 문장들로 구성된 한 두개의 문단의 흐름이다. 흔하게 드는 예로 “GODISNOW-HERE” 를 말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문맥에 따라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다)도 될 수 있고 “God is nowhere”(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가 될 수 있다. 한 문장이 문맥의 차이로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갈리는 하늘과 땅 차이를 가져 오기도한다. 올바른 해석에 있어서 상하 문맥을 이해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문맥은 단순히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의미를 만들어 낸다. 원접문맥은 그보다 멀리 연결되는 문맥으로 책 전체나 한 저자의 여러 책들이나 제일 크게는 성경 전체의 흐름이다. 원접문맥을 파악하는 방법의 예를들면 빌립보서의 한 구절을 이해하려고하면 먼저 빌립보서의 저자인 바울이 어디에서(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썼는가를 생각하면서 전체의 대의를 파악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성경의 장, 절 구별은 사람이 한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성경의 장, 절 구별은 사람이 한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성경의 장, 절 구별은 사람이 한 것이다.


(참고: 장(章)의 분할은 (1189장) 주후1227년에 사망한 스테팬 랜든(Stephen Landon)의 업적이었고 절(節)의 분할은 (31,163절) 주후 1550년 로버트 스티븐스(Robert Stevens)에 의해 완성)

그러므로 장절을 넘어서 문맥의 원리로 문장의 상하를 잘 살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성경해석시 우선순위가 있는데 그것은 먼저 전체성경⇒각 권 성경 대의(大意)⇒각 장의 대의⇒각 절의 의미⇒각 단어의 뜻, 이 같은 순서를 지켜야한다.






5.문자적으로 이해

모든 언어는 크게 두가지 표현방식이 있는데 문자적 표현과 수사적 표현이 있다 . 언어의 표현 중에서 일차적인 표현이 문자적 표현이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나 글을 읽을 때 문자적인 해석으로 이해가 안 될 때까지 우리는 먼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다음 두 가지 원칙이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를 요구한다.

첫째, 인간의 언어 관습이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두 사람이 대화할 때 그 대화를 서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약속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한 사람이 “빵”을 말할 때 상대방도 먹는 빵으로 이해해야한다. 이럴 때 피차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그 진단 결과를 X- 사진 등 자료와 함께 분명히 보여주며 “폐암이니 빨리 입원하고 수술 준비를 하시오 ” 말했는데 듣는 자가 폐암을 폐암으로 알지 않고 수사적인 표현 ,즉 “감기기침을 강조하여 말했겠지’ 자기 임의대로 이해한다면 이 환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둘째, 성경의 목적이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계시인 성경을 인간에게 주신 이유는 인간이 그 계시를 읽고 이해해서 구원받고, 구원받은 후 변화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성경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수사적 표현도 신비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도 있다.

또한 성경의 예언은 성취의 시간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여러 가지 사건을 함께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예언이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에 유의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바벨론 포로, 주의 날과 연관된 사건들, 바벨론에서의 귀환, 이스라엘의 흩어짐과 회복 등이 시간과 장소 구별 없이 뒤엉켜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특히 많은 혼동을 야기시켰다. 오늘 우리가 볼 때에 2,000년 이상의 갭(GAP)이 있는 사건을 동시에 언급되어있다. 예를 들면 사61:1~2의 말씀을 주님께서 눅 4장 18절에서 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에서 인용하고 계신데 두 곳을 비교 분석해보면 주님께서는 이사야 61:2의 첫 부분에서 인용을 생략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2절의 첫 부분까지는 주님의 초림때 그리고 그 이하는 주님의 재림때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이사야 61:1이하에서는 시간차가 없이 함께 예언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2절 상반 절까지와 그 이하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음을 인정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으로 오심으로 폐하여질 내용이 있다(히10:9).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기”(고전 13:10) 때문이다. 영화 예고편은 본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광고용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 폐기처분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제사는 지금은 마땅히 폐하여야 할 예수님의 예고편과 같은데 오늘날도 유월절을 고집하는 류의 어리석은 이단도 적지 않다. 이와다르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 내용은 오늘날도 계속 지켜야할 계명이 있다(레19:18,마5:17).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내용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없다. 만약 없다면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신 주님께서 실수하셨다고 귀결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는것이다.

또한 구약의 결론은 오실 메시야의 예언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임하실 만왕의 왕과 똑같으신 성령님을 증거하고 있다(렘36:26~27,욜2:28~29).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시면 우리가 비로소 주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성결의 소극적인 개념은 죄를 범치 않는 것이고 적극적인 개념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성결의 명령은 모든 시대의 도덕률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의 예표가 아니고 영원한 도덕률의 규범이기에 신약의 성도들도 준수하여야 할 주의 명령이다(참고: 마22:34-40). 이러한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문자 그대로 받아드리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받고 성령님에 의해 살 때 성결한 삶, 곧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수 있게된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롬8:29)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제자의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마16:24).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후 약속대로(요16:7)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나가는 세계 선교 사역이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신약은 보여주고 있다.

 



6.성경 배경을 참고하여 이해

성경은 3개 대륙에 걸쳐 3개의 상이한 언어로 상이한 배경에서 약 1,500년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생활을 가능한 많이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바른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성경 당시(역사, 지리, 정치, 종교, 경제, 풍습, 문화등)로 돌아가야한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계(靈界)의 예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적 사람의 현장에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 배경을 연구한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성경 그 자체에서 실제적 증거를 얻는다. 예를 들면 고린도서는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반영한 바울의 서신이다. 우리는 고린도 전후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고린도 교회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고전1:6,12,2:1,6:1,6;7:1-24;8장,10장;11:13;12장-14장).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인류 역사의 기원을 기록함으로 이 창세기 역사적 배경위에서 인류의 역사는 시작된다. 즉 성경자체가 역사적 배경을 기초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자체에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표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관주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 자료를 얻는데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둘째는 역사, 지리, 문화, 사회 등을 다루는 신구약 성경 배경 역사서 성경사전이나 백과사전, 지리서 등을 통해 가능하다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첫째, 역사적 배경

말씀 뒤의 감추어진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성경을 더욱 완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의 배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헤롯 대제(B.C.37-4)가 그의 학정 말기에 너무 불안해서 처남을 처를 죽이고 두 아들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첫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가장 총해하고 신임하던 맏아들까지 죽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의 점성가들이 나타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을것이다. 헤롯 당시의 입장에 돌아가 보면 마태복음 2장의 내용이 실감나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둘째, 문화적 배경(사회, 정치, 풍습, 예술. 종교, 문학, 과학, 경제등)

예를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유대인 남자들은 성인이 된 만 13세부터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기도 시간을 꼭 지켜야만 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 그리고 낮 12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기도를 드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장애인을 고쳐 준 것도 오후 3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시각이었다. 유대인과 로마인은 시간 관념차이가 있었다. 복음서에서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으로 기록했고 기타 공관 복음서는 유대인식(일몰에서 익일 일몰까지)으로 기록한것이다. 로마식은 유대인식 시간대에 6시간을 더하면 맞다. 또한 유대교의 예배와 관습은 초대 기독교회에 기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자연환경의 배경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삼상 12:17). 사무엘은 밀 베는 때에 비가 내리기를 하나님께 아뢰겠다고 말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는 4월 중순에 10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밀 베는 수확은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까지였다. 따라서 사무엘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었다.

기본적인 신구약 성경 지도를 그릴 줄 알정도로 연습하면 성경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주의할 점은 배경연구나 참고는 어디까지나 성경 이해의 보조수단이지 성경 평가의 절대수단이 아니다. 만일 성경과 어긋날 때는 성경의 기준으로 배경사(背景史)를 비판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고 전파하는데 돕는 시녀와 종의 역할을 해야지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넷째, 언어적 배경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관용어나 성경원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언어의 차이를 살피는 것도 참고해야 한다. 예를 들면 헬라어에 사랑은 네 가지 종류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스톨게(storge)” 가족친지간, 동족 인연같은 혈육적 사랑이다. 둘째는 “에로스(eros)” 남녀 간에 좋아하는 육체적 사랑이다. 셋째는 “휠리아(phileo)” 우정적 사랑이다. 넷째는 “아가페(agape)” 무조건적인 천래적(天來的) 사랑이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배반한 베드로를 찾아 물으신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다. 베드로야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사랑은 아가페(Agape)입니다. 우리 한국어로는 모두 한 가지 사랑으로 번역되었지만 베드로는 말했다. 원어의 의미로는 “예,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Phileo) 합니다”.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털이 검은 개 한 마리를 사서 “검둥이” 이라고 이름 짓고 부르면 우리는 그 이름의 뜻을 곧바로 알지만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은 우리가 느끼는 언어의 뉘앙스(nuance)를 맛볼 수 없다. 성경이름으로 명명된 된 선지자들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대게 그 선지자의 일생을 대변하거나 그를 통한 그 선지자서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느낌으로 와 닿지 않은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의미이다. 미가서의 주제는 미가서7:18에서 말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선지자의 삶과 그 책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성경은 연대기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등)는 시가서대로 역사서는 역사서(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등) 대로 문학적 양식에 따라 분류된 경우가 주류를 이룹니다. 느헤미야서나 말라기서는 배열이 같이 있지 않아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거의 같은 시대에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역사서 그룹에 말라기서는 선지서 그룹으로 분류했기에 배열상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서도 분량에 따라 배열의 순위를 정하여 다니엘 이야기가 시기적으로 더 먼저 일어난 일인데 에스겔서가 분량이 많아 앞에 배치된 것이기에 각 성경 시기를 이해하는 것도 본문을 깊이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그래서 신구약 중간에 침묵시대라고 하는 중간사 공부도 신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7.특별한 내용은 특별 원칙으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이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실 때 일반 자연법칙을 사용하시지만 필요하신 때는 홍해를 가르시거나 태양을 멈추시던 것처럼 초자연적인 행사도 하신다. 언어를 해석하는데도 일반원칙을 주로 사용하지만 특별한 형태의 언어는 특별원칙을 적용하여야 한다. “당신은 나의 충전기다”. 라고 말할 때 문자적인 이해로는 안된다. 이것은 수사법을 사용한 특별한 내용으로 상대방이 말하는 자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준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표현법을 기초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반해석 원칙상 해석이 불가능할 때는 이차적으로 수사적(修辭的) 표현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 상응하는 특별 해석 원칙을 적용해야한다.

책을 읽을 때 “행간(行間)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행간이란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좀 더 포괄적으로 얘기한다면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있지는 아니하나 그 글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글이나 말속에는 단어나 문장만으로는 참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는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뜻을 전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너무 심오해서 일상적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에 성경안에도 비유법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수사적 표현은 깊고 어려운 진리를 생생하고 또렷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와 상상을 제시해 준다. 또한 각 표현법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약 200개 이상의 수사적 표현들이 있다. 그러므로 문자적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수사적 표현은 수사적으로 해석하여야 올바른 본뜻을 알게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자적 해석이 모순 또는 애매성을 가져오지 않는 한 단어들은 그들의 문자적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석의 기본법칙이다. 또한 모형(예표, 유형, 표상)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성경 진리의 예시(豫示)로 지정하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중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해설서라고 할 수가 있는데,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8:5). 또는 “비유”라고 말씀하면서“개혁(改革)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한다 . 그러므로 이러한 “모형, 그림자, 비유" 등을 해석할 때에 유의해야할 점은 구약의 모든 것을 예표로 삼아 알레고리칼(Allegorycal)하게 이해하는 과장 해석이나 억지해석을 피해야 하고 나타난 실체(實體),즉 밝히 드러난 복음의 빛을 통해 해석하고 이해해야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일반 책과 달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로마서 16장 25절에서 26절을 보면 복음과 선교는 감추어졌던 '비밀의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啓示;αποκαλυπσιζ)라는 말은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셔야만 보입니다(엡1:18). 간절히 기도하며 읽으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고 복음과 선교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의 예를 보면 사도로 부름받고 최고의 교사이신 예수님밑에서 3년간 동거동락을 하며 배웠어도, 성령충만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믿음을 갖고 하루에 3천명씩 회개시키는 능력많은 설교자였어도 선교를 모르다가 사도행전 11장에서 환상을 통해 시청각 교육으로 선교를 배우고 나서야 비로서 선교를 깨닫게 되었고 세계선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계시를 열어주지 않으시면 성령충만 받았다고 혹은 신학했다고 설교잘하는 목사라고 선교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해에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에게만 영적인 계시를 보여 주신다. 요한복음 15:14-15에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다.

그리고 고전3:1~2에는 바울이 말씀을 음식으로 비유하여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며 어린애들에게 먹이는 젖으로 그들을 대했다고 했다. 영적인 생명은 일생동안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들은 일생동안 영의 양식을 먹어야한다. 갓난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먹다가 나중에는 점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어린이도 하루 아침에 다 자라나 어른이 된 자가 없듯이 영적 생명도 하루아침에 주의 진리를 더 깨달을 필요없이 다 깨닫고 행하는 자가 없다. 이것은 주의 양의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말한다. 어릴 때 부모마음을 알지 못하다가 철들어서 부모 마음을 알고 나중에는 자신이 부모가 되어 진실로 부모의 마음을 잘 알게 되듯이 영적생명이 성장정도에 따라 주의 말씀이 깨달아진다. 하나님을 아는 분량이 장성한 자(엡4:13,고전13:11,12)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요하는 것이다. 히5:14에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고 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생명의 분량만큼 이해되고 순종가능하다. 주를 닮는 것은 일생의 거룩한 목표요, 추구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우리가 부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진리의 말씀을 청동거울을 보는 것처럼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바울도 고백했다(고전13:12). 그러므로 깨달아지지 않는 부분은 겸손히 주 앞에 내려놓고 그의 도움을 기다려야지 억지로 풀려다가는 잘못되는 것이다(벧후3:16). 억지로 풀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보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정직과 겸손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하는지 모른다. 주님이 언제(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다시 재림 하시는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성경이 가라 하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성경이해에 바른 태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므로 다윗처럼 기도가 필요하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