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치유!!! 신유!!!

[스크랩] 질병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

하나님아들 2019. 2. 4. 15:35

질병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

 

 

1. 고린도후서 5장 15절

 

“15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한글킹]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영생을 얻은 자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 즉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질병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이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주님과의 연합이라고 해도 좋고 주님과의 동행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게든 설명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영의 실재와 교제하고 영의 음성을 들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분으로부터 직접 듣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질병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는 여기에 있다. 성령님의 은사, 하나님의 능력은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은사를 받기를 바란다면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경험하면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질병의 치유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면 건강한 몸으로 세상에 돌아가서 하나님을 모르고 다시 살아가게 되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신유 사역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시키지 않으면 결국, 건강한 몸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라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질병의 치유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건강하게 살라고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자들을 구원하러 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질병이 치유되는 것은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크고 작은 병들이 나음을 입는 현장이 곧 구원의 표적이 나타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귀신이 떠나가는 현장 또한 구원의 표적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 때 주어지는 은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인가?

 

2. 요한복음 5장 19절

 

“19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은 할 수 있나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한글킹]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오직 순종의 삶이었고 성부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다. 그 원리가 요한복음 5장 19절이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아들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다.”고 고백하신다. 이 내용 속에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방법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이 들어있다. 이 속에 축사와 신유의 원리가 들어있다. 믿는 자의 표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의 답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리가 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본다.

 

2-1.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예수님은 어떤 것도 스스로 계획한 것이 없으셨다. 스스로 하는 것이 없으셨다는 것은 스스로 말씀하신 것도 없고 스스로 행하신 것도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인가, 아니면 나의 계획인가? 내 생각에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는 일인가?

 

그렇다면, 스스로 말하는 것과 스스로 행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자기의 영광을 구할 때 스스로 말한다고 지적한다.(요 7:18, 각주참조) 스스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계획하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소이所以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일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그 중심에만 서 있으면 된다. 믿는 자의 표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스스로 나타낼 수 없는 능력임을 안다면 질병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가 이 속에 있다는 것도 알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대변하여야 한다.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한글킹]

 

본문의 내용을 보라.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있고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빌립에게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하셨던 일상의 대화도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신다.

 

•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 (행 5:36, 각주참조)

•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 말라. (롬 1:22, 각주참조

• 스스로 선생이라 칭하지 말라. (벧후 2:1, 각주참조)

• 스스로 속이지 말라. (갈 6:7, 각주참조)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들이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 15:5) [한글킹]

 

하나님의 자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열매를 굵게 만들려고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열매를 맺는 것은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에게 달려 있다. 농부는 하나님이시다.(요 15:1, 각주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2-2.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은 할 수 있나니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각주참조)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은 하실 수 있다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원리가 발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도와주는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일을 인간에게 부탁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할 일은 없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이 원리를 따를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3.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한해서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뿐, 그 일의 완성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그렇다면, 이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3. 에베소서 4장 21절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 과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 그에 의해 배웠을진대”(엡 4:21) [한글킹]

 

주님을 위해서 사는 방법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동행하는 방법은 영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영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막막하겠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에게서(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듣고 배웠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배웠다고 진술한다.(갈 1:11~12, 각주참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즉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영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동물에게 배워서는 안 되듯이,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또한 인간으로부터 배워서는 안 되고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워야 한다는 것이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어떻게 영으로부터 배울까?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방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도 없고 이 방법으로 배워서 가르친 사람도 없다. 이 방법으로 인도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대면시키고 스스로 알게 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게 만든 리더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영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 황당하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실존하시고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경의 인물들의 삶이다.

 

•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이 노아의 눈에 보였는가? 아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을 때 눈에 보였는가? 아니다.

• 모세가 출애굽을 하였을 때 하나님이 보였는가? 아니다.

•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를 할 때 하나님이 눈에 보였는가? 아니다.

•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을 때 하나님이 보였는가? 아니다.

•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눈에 보였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그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을까? 노아는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산꼭대기에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을까? 노아가 조선공학자도 아니고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폭풍에 좌초되지 않는 배를 만들었을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전, 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방신을 섬기던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을 만드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대표적인 인물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에서 부르셔서 출애굽을 명령하실 때 하나님과 그 많은 대화를 하면서 밀고 당기며 입씨름을 하는데, 그때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셨는가? 아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았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한다.

 

엘리야는 어떻게 하였고, 다윗은 어떻게 하였는가? 다윗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질문하였고 하나님은 답하셨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나에게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눈에 하나님이 보였는가? 안 보였다. 단지 하늘에서 빛과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되었다고 고백한다. 주님과 대화하며 그 모든 영적인 진리들을 배운 것이다.

 

지금 우리 눈에 하나님이 보이는가? 안 보인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왜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들리는가? 왜 책 속의 이야기로 들리는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 과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 그에 의해 배웠을 진대”라는 바울의 외침이 왜 우리에게는 와 닿지 않는 것인가? 영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성경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왜 이단 사설처럼 느껴질까? 영이신 하나님과의 동행은 영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외침에 왜 한숨만 나오고 막막할까? 지금까지의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니라 거짓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영의 실재와는 전혀 무관한, 학문적인 지식으로만 아는 이론적인 생활을 신앙생활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은 옳다. 영으로부터 배우는 방법이 있고 그 방법으로 배우면 영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고 살아가게 된다. 성경의 내용이 더 이상 생소한 기록이 아니라 내 생활에서 일어나는 기록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사역의 현장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기도로 질병을 치유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말한다.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한다는 등,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는 등,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는 방법들은 의미가 없는 사족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질병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 속에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분이 살아계셔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로써 표적이 나타나고 질병이 치유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은사를 받는다고 돌아다니는 것도 헛된 일이고, 은사를 받기 위한 비책이 있다는 것도 헛소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회복시리즈 05. 믿는 자의 표적 중에서... 박찬빈 著]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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