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치유!!! 신유!!!

[스크랩] 질병과 치유에 대한 이해

하나님아들 2019. 2. 4. 15:33

질병과 치유에 대한 이해                                    


A. 질병에 대한 이해

 

1. 질병의 개념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생활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병으로 보는데, 실은 육체적 이외에 정신적, 영적으로도 정상적이지 못한 기능의 장애가 있으면 역시 병에 걸린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건강하다고 하면 영과 육의 생명활동이 아주 정상적인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뜻하나, 질병은 이와 반대로 최저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질병의 개념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1) 신체적 측면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건강상태로 부터의 이탈이고 구체적으로는 특수한 증후, 증상을 수반하는 비정상적인 생의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생리적 상태에서 병리적 상태로 타락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즉 타락되어서 몸의 정상기능을 감당할 수 없어서 비생동적이고 비활동적으로 된 상태이다.

 

2) 정신적 측면에서는 질병의 개념을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 즉 평온이 깨어진 상태이다. 이명수는 "질병이란 평안함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 평안함이 결여되었다 함은 정신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써 불안, 근심, 공포, 분개, 분노, 증오, 시기, 적개심, 죄책감, 질투, 절망, 불행감, 억압감 등에 휘말리어 적절한 감정을 조절하고 표현하지 못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말한다.

 

3) 영적인 측면에서는 질병의 개념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분리된 상태, 즉 영이 죽은 상태를 말한다(창2:17). 이는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악령의 지배로 인해 정욕대로 살아가는 상태인 것이다. 

 

4) 사회적인 측면에서 질병의 개념을 "대인관계에 있어서나 자연환경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무질서와 불의, 불신이 싹트는 사회의 상태" 라고 하며 이러한 사회의 병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결핍으로 온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질병이란 인간 구성 요소인 영, 정신, 몸의 부조화, 또는 분열을 일으킨 상태이며 자아와 인간, 인간과 환경, 인간과 신 사이에 부조화, 부조리, 분열, 또는 소외를 일으킨 상태" 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육체적으로는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요, 정신적으로는 마음에 평안이 없는 상태요,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고 사회적으로는 상호간의 부조화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2. 질병의 원인 

  

1) 일반적 원인 

일반적으로 질병이란 여러가지 증후와 증상을 가지고 나타나며 그 발병의 원인 또한 다양하다. 폴 튜니어(Paul Tournier)는 질병의 원인을 삶의 자세, 그릇된 식이요법, 폭주, 과로, 문란한 성생활, 도덕적 가책등이 수년간 쌓여서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활력을 상실할 때 나타나는 것이며 인간의 죄성과 타락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게리 콜린스(Gery R Collins)는 질병원인을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병을 전염시키는 식물이나 동물과의 접촉, 영양이 적은 음식물, 운동이나 체력관리의 부족, 상처, 유전적 결함, 해로운 물질(마취제나 독약 같은 것)의 섭취, 신체기관의 노쇠나 약화, 아주 뜨겁거나 차가운 것과의 접촉 등으로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는 질병 자체는 악이며, 저주라고 보았다. 질병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며 질병은 구속되지 못한 인간 상황에 내려진 저주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그리고 질병은 병든 관계에서 살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오랄 로버츠(Oral Robert)는 질병의 원인을 인간의 조직체들이 정상상태에서 부조화상태, 무질서상태로 되어 고장이 난 것이라고 보았다. 여러 학자들이 이야기한 이러한 질병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삶의 잘못으로 오는 원인이다. 육체적 질병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질서의 파괴와 잘못된 삶의 방법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종하지 않고 배반하기 때문에 질병이 걸리게 된다고 본다.

둘째는 평형파괴로 오는 원인을 들 수 있다. 물리적 요인은 영적 요소에 원인이 될 수 있고 영적 요소가 물리적 요소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심적요인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유기체내에 각 요소는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요소가 영향을 받으면 그것이 다른 요소에 양향을 미치게 되므로 바로 그러한 순간에 균형이 깨어지고 평형상태가 파괴되어 질병을 가져오게 된다고 본다.

세째로 죄악으로부터 온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타락했고 영적인 단절과 더불어 정신적이고 육적인 질병이 죄로부터 온다고 본다. 죄로 인해 결국 전체적인 질병이 왔다는 것이다.

네째로 공동체 안의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므로 인해 질병이 온다는 환경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2) 성서적 기원 

질병은 육체의 건강이 상실된 것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성서는 정신적, 심리적인 원인과 육체적인 원인 외에도 질병을 죄와 사탄과의 관련성과 하나님의 섭리로 넓은 의미로 보고 있다. 성서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로 죄의 결과로 말하고 있다(신28:20-22,대하26:19,막2:5). 투르나이젠은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배반하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게 된다고 보았다 김 윤은 인간의 병과 고통, 신체의 상처와 악기능, 마음의 불안, 질투, 미움, 무가치함, 걱정, 두려움등의 감정, 영성과 도덕성에 있어서의 무질서와 왜곡 소외, 착취, 분열, 투쟁, 전쟁 등이 있는데 이러한 질병들은 죄의 결과라고 했다. 스테픈 힐(Steppen Hill)도 병의 원인을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병이 생겼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저주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성서에도 보면 알 수 있듯이 민수기 12장에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하다 병에 걸렸고 죄를 품었다가 질병에 걸린 자가 성경속에 많이 나타난다(대상16:22, 롬13:1-2,행9:1-8,고전11:29-32). 특히 민수기 12장과 민21:1-9,신28장에는 하나님께 죄를 지음으로 병이 발생케 됨을 볼 수가 있다.

둘째로 질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섭리로 오는 경우다. 욥의 병은 본인의 죄와 무관하게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찾아온 질병이다.

세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질병이 오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유의 기적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요9:1-3,11:15).

네째로 인간의 부주위로 온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고 하다라도 인간의 부주의로 인하여 질병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건강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딤후2:22).


이상에서 제일차적 원인은 영적 요인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인 죄로부터 비롯된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에덴동산에 질병이 없었는데 사탄으로 인한 죄라는 통로를 통해서 질병이 오게 되었고 오늘날도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질병이 있는 것이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도 죄를 지으므로 나타난 결과로 본다. 그러나 질병의 원인에 죄로 말미암아 오지 않는 경우는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약5:11),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고후12:7-8) 찾아오는 경우 등이 있다.


  

B. 치유에 대한 이해

  

1. 치유에 대한 어원적 고찰 

  

1) 히브리어 

구약에서 명사로 치료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두개가 있는데 아룩하(arukhah)와 말페(marpe) 이다. 아룩하는 예레미야 8장 22절, 30장 17절, 33장 6절에 사용되고 있는데 이런 단어의 뜻은 '건강을 회복하다'는 의미에서 치료, 고침, 회복, 원상복구, 완쾌, 간척, 권리회복, 승소, 병이 차차 나아감, 회복기의 뜻이 있으며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인 의미로 '온전함'의 뜻이 있다.

말페는 예례미아 14:19, 역대하21:18에서 '치료, 고침'으로 사용되고 있고 원기회복이라는 뜻이 있는데 잠언4:22에는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와 12장 18절의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가 바로 그런 예이다. 말페 (marpe)의 본래 의미는 '치료(법), 즉 문자적으로 '약',혹은 (추상명사)'치료', 상징적으로 '구출, 평온, 치유, 완쾌, 치료, 구제법, 교정법, 건강, 건전, 건강상태, 위생, 평정, 부드러움, 온화함, 냉정, 침착' 등의 의미가 있다.

또 구약성서에서 동사로서의 치유하는 의미의 단어는 할람(halram), 라파(rapha) 그리고 명사 아룩하(arukhah)와 함께 삼마(samah)가 사용되고 있다. 할람은 '회복케 하다'로 이사야 38장16절에 사용되고 있는 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견고하게 묶다', 함축적 의미로 '뚱뚱하게 되다'. 또 상징적으로 '꿈꾸다, 꿈에 생각하다, 몽상하다, 강하게 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때에 따라서 '강하게 만들다, 힘세게 하다, 치료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삼마는 이사야58:8에 '치료하다'로 사용되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 상징적 의미는 '싹이 트다,(열매를)맺다, 산출하다, 자라다, 나오다, 솟아나다, 솟아나오게 하다, 자식이 생기다' 등의 의미가 있다.동사 단어중 라파가 가장 많이 성서에서 사용되어지는데 이것을 세분해 보면 '상처를 고치다, 치료하다(창22:17, 욥5:18), 하나님이 치료하다,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다(대하7:15, 시30:3), 수선되다(렘19:1), 위로하다(렘8:11, 겔34:4), 치료받다(레13:37, 사54:5), 자신이 고침받게 하다'(왕하8:29) 등이다.

  

2)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는 병고침이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가르키는 일반적인 단어에 특수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단어들은 (데라퓨우오), (휘기아이노), (소조), 복합어인 (디아소조)등이 있는데 이 단어들이 기본적인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동사형으로 제시된 네 단어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이아오마이) : 병을 고치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희랍어 용법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의학적인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에서 그러한 단어들 처럼, 그 단어는 도덕적인 상처나 질병의 치료에까지 그 용법이 확장될 수 있었다. 실제로 희랍어만을 생각할 경우에 이 단어는 이고적인 용법에서 특수하게 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죄 그 자체는 질병으로 알려진 또하나의 별개의 독특한 조건(육체적 또는 정신적)을 유발시키는 하나의 분리된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질병으로 파악된다.

(데라퓨오) : 영어 단어의 Therapy의 어원이 되는 단어로 의료적 처치나 치유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흔한 단어이다. 원래의 의미는 신들을 섬기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종류의 돌봄이나 섬김을 제공하는 것이다. 차용에 의해서 이 단어는 치료하다, 회복시키다, 병을 고치다를 의미 한다.

(휘기아이노) : 좋은 건강상태에 있다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건강의 여러 히게이아의 이름에서 기원하였으며, 영어 단어 hygiene는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는 몸이나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일들의 건강한 또는 건전한 상태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희랍의 의료용어에서 기본적인 단어이다.

(소조) : 보존하다, 상하지 않게 지키다, 구제하다, 죽음으로부터 구언하다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고전 희랍어에서 의료적인 의미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미들로 사용된다. 치료의 의미를, 한 사람을 질병이나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전달해 주었다. 희랍의 개념 가운데서는 몸을 구원하는 것이 중도에 전 존재의 구원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의미상으로 완전한 구원의 개념과 연결된다. 신학적인 용어인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말이 유래한다.

복합어인 (디아소조) : 위험을 뚫고 안전하게 가져오다, 또는 위험을 헤치고 보존하다를 의미하며, 의미나 용법에 있어서 유사하다. 이런 단어들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와 후대의 사람들의 사역에서 치료가 발생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용된다.

  

2. 치유의 의미 

  

성서에서는 치유는 구속적인 은혜와 그 은혜의 표현이다. 엘륜는 "치유란 언제나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이다."라고 말했다. 치유는 인간의 본래적 원형적 회복으로서 원초적 상태로의 구조적 회복이 아니라 더욱 발전된 상태로의 성장적 회복이다. 그러므로 치유란 단순하게 어떤 질병의 제거나 질병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 한차원의 높은 단계로 상승한다는 것은 치유를 단순하게 신체적 영역에다가 국한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치유목회에 대하여 연구하여 온 버나드 마틴(Bernard Martin)는 치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치유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인격의 완전한 성숙을 저해하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속막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선교에 종사해 온 버스커크(Buskirk)는 "치유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자연적인 치유의 능력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에벨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치유란 인간성을 회복시켜 다시금 하나님께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게 함으로써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결교회에서 일컫는 신유(Divine Healing)도 치유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 중에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 땡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은 것을 가리킴이니 이 은사는 우리 육신을 안전케 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모든 신자에게 이적이 따를 것을 언명하였으니(막16:17-18) 병낫기 위하여 기도한다든지 안수하는 일은 당연한 특권이다. 그러나 신유를 믿는다 하여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호칭은 다르지만 모든 치유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투약이나 휴식, 도는 의사나 심리요법이 치유의 원천은 아니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그러므로 유일하고도 독자적인 치유방법은 없으며, 모든 정당한 방법들은 동원될 수 있다고 본다. 금도 하나님은 무수한 방법들을 통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전인적인 측면에서 존 윔버(John Wimber)와 케빈스프링거(Kevin Springer)는 치유의 영역을 다섯가지로 구분하였다.


1) 영의 치유(healing of the spirit)는 죄 때문에 병든 영혼을 치유함을 말한다.

2) 과거에 입은 마음의 상처의 치유(healing of the effects of past hurts)는 흔히 "내적치유"(inner healing)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과거에 손상된 감정이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기억 그 자체는 치유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 입은 마음의 상처나 감정의 억압으로부터 오는 후유증들 - 죄책감, 수치감, 좌절감 등 - 은 치유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내적치유는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저해하고 있는 정신생활의 영역들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적용하는 것이다.

3)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의 치유(healing of the demonized and mentel illness)이다. 어떤 사람의 존재와 삶 속에서 귀신이 활동하거나 악한 영에 의한 외부적인 영향이든, 혹은 내적인 감정상의 혼란이든 간에, 이들은 모두 질병을 야기할 수 있으며 치유를 필요로 한다.

4)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healing of the body)는 사고 등으로 인해 손상된 신체 부위, 또는 병균의 감염으로 인한 질병 따위를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또한 신경성 대장염이나 근육수축성 두통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것 같으나 본인에게는 심각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질병들의 치유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치유는 질병상태를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5) 죽어가는 사람, 또는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치유(healing of the dying and the dead)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굳센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 그리고 드문 경우이기는 하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을 말한다(요11:44,행9:40).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려고 한다. 그것은 "그 은혜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엡2:8-9)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나타난 허물 때문에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 목회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 죽음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고전15:2) 희망으로서의 부활이 있고, 죽음은 모든 인간에 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목회자는 그가 죽음을 기쁨으로 순응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목회자는 말을 잘 듣고 위로와 용기라는 선물을 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사실과 천국의 확신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또 죽은 후 남아있는 친구나 친척들에 대한 사역으로 이어져야 한다. 죽은 사람의 친지들은 그 사람 생전에 자기들이 잘 못한 일이나 소홀이 했던 일들로 인한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목회자의 치유사역이라 볼 수 있다.

이명수는 하나 더 첨가하여 사회적 측면에서의 치유를 "사랑과 진리와 정의로 자유와 평화가 실현되며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건강한 사람들이 진리 안에 자유하고 질서와 조화를 이룬 온전한 사회적 건강을 이루게 되는 것" 으로 보았다.

 

질병의 개념과 원인을 일반적 요인과 성서적 측면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요인 등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치유도 역시 질병의 원인에 맞게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볼 수 있었고, 각 부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 상태에서 치유가 되어야 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치유를 하는데 전제조건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창1:26)라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치유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치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최상의 정상적인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인간의 전인적인 건강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치유는 인간의 완전하고도 건강한 삶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치유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존재로 성숙해 가는 일을 가능케 해 준다.


 

C. 치유사역의 성서적 고찰

 

1. 구약성서에서의 치유 


구약성서에는 치유사역이 많지는 않으나 그 내용을 살펴 구분하여 보면 하나님이 직접 하신 경우도 있고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여 치유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곧 예방의 가르침과 또 하나는 질병을 낫게하는 방법이다.

 

1) 예방적 측면 

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셨다. 모세를 통하여 장티프스, 이질, 콜레라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배설물 처리를 그의 백성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신23:12-13). 제사장들을 통하여 문둥병, 매독, 흑사병을 살피고 그러한 환자를 격리 수용하여 개인적인 접촉을 금지하게 하는 일을 종사하게 하였는데(레13:4) 이것은 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로서 남아가 출산하면 반드시 할례의식을 하였다(창17:10). 이것이 부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본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술에 관하여 경고하며 술취함이 많은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잠23:19-21). 술은 정신질환과 내장의 손상은 말할 것 없고, 많은 사고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모세와 같은 지도자나 특정한 사람들을 통하여 건강을 위한 예방법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질병을 예방하는 조건에 두가지의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출20:8; 레25장).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면 ......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며"(신7:12-16), 

"나의 모든 명령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할찐대 ......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레26:14-16)

말씀을 지키면서 자기를 관리(self-care)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생에 관한 법(출29:14), 청결에 관한 법(출15장), 격리에 관한 법(민5:1-14), 식이요법에 관한법(레11장), 절제에 관한 법(민6장)등을 통해 자신을 잘 관리하므로 질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든 질병을 미리 예방케 하는 말씀순종과 자기관리를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2) 치유적 측면 

초의 치유라는 낱말이 사용되기는 (창20:17-18) 찾아볼 수가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치유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하시든가 아니면 택하신 지도자들이나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을 통하여 진행되어 졌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어 숲속에 숨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신한 인간을 그 숨은 곳으로 부터 잡아 낸 것이 아니고 그를 찾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게 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가 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 되었던 관계를 하나님이 다시 찾아옴으로서 해결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치유이며 치유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창2-3장).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셔서 질병을 치유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여종이 치유 받았고(창20:17-18), 모세의 기도로 미리암의 문둥병이 치료되었고(민12:1-15), 아론의 기도로 이스라엘의 염병이 그쳤다(민16:41-50). 엘리야의 기도로 죽은 아이가 살아났으며(왕상17:17-24), 욥의 기도로 악창이 치료되었으며(욥42:10), 히스기야의 기도로 그의 생명이 연장되었다(왕하20:5).

그 외에도 제사장인 비느하스가 간음한 자의 배를 꿰뚫어서 죽이니 이스라엘 자손의 염병이 치유되었고(민25:6-9), 사울왕이 악신에 시달리며 괴로워 할 때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연주하였을 때 치유케 된 것이다(삼상16:14-23).

구약성서의 치유사건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다. 치유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구약성서에서의 치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하심이 나타나 있는 뚜렷한 징표였던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사랑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반드시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을 통하여 기적과 치유의 사역을 했고 여기에서 치유이적들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표적들이요 부르심에 대한 신임장이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제사장이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아울러 치유목회에도 깊은 관여를 하였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도 목회자들이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병자들을 돌보며 위로해야 하는 근거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2. 신약성서에서의 치유 

  

1) 예수님의 치유사역 

켈시(Morton T. Kelsey)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복음서 내용의 5분의 1정도의 분량이 예수의 치유사역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4복음서의 3,781절중 468절을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기술하는데 사용하였다. 추가해서 165절이 영원한 생명을 다루고 31개의 일반적인 언급이 치유를 포함한 이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비중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 기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의 치유사역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에서 뚜렷하게 두드러진 부분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단지 치유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보여주어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복음전파 사역을 하였다(눅11:20).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본을 이어받아 당연히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a. 예수님의 인간이해 

인간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첫째로 예수는 인간을 피조물 중에 가장 소중한 존재로 보았다(창1:26).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얼마나 인간을 중요시하셨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의 지상사역의 촛점은 사람이었다. 마가복음 5:1-13의 일화를 보면 거라사 지방에서 고랑과 쇠사슬에 묶인체로 공동묘지에 버려져 스스로 제 몸을 상케하던 한 귀신들린 청년의 야기가 있다. 예수께서는 이 청년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거의 2,000마리의 돼지를 희생시키면서 한 인간의 인격성을 회복시켜 주셨다. 또 안식일이지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심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종교적 계율보다는 지체의 기능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 훨씬 더 소중하고 값진 일임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는 선한 목자(요10:10)로서 한마리의 양을 찾기위해 해매는 모습과 그 양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귀히 여기시어 개인의 가치를 온 천하와 비교하시면서 생명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이다. 이들 모두를 천하보다 더 값진 생명의 존엄성(막8:36)을 지닌 인격의 주체로 보셨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을 '전인'으로 보았다. 육체와 영혼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격체로 인간을 이해하였던 것이다(마9:2, 마9:22, 막8:2). 예수님은 치유사역에서도 육체에 국한시키거나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치유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말씀하심으로 병의 근원을 죄에 기원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세째로 예수님은 인간을 고통당하는 존재로 이해하셨다(마11:28-29). 인간이야말로 죄와 질병, 죽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존재이며 이 짐 때문에 어쩔수 없이 괴로워하고 고통당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셨다. 예수의 긍극적인 목표는 바로 인간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를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대속자로(사53:5-6, 마8:16-17)예언하였고 주님도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선포의 내용 속에서 인간을 고통당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증거이다. 박봉랑도 "인간은 죄의 포로 속에 있는 인간" 이라는 말로 기독교의 인간관을 소개하면서 "인간은 계속 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이고 그 죄속에서 질병과 죽움과 공포가 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예수의 인간이해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귀중히 여기셨고, 전인적인 치유에 관심을 두어 인간들의 죄와 질병과 고통의 짐에서 구원하여 참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결국 이런 인간 이해가 밑바탕이 된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b. 예수님의 치유동기

예수께서는 인간을 귀한 존재로 뿐만 아니라 전인적이며 고통당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인간들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인 각가지의 질병으로 허덕이고 있는 인간을 치유하신 동기를 알아보면

첫째, 메시야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야 대망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구절에 따르면, 그가 병자를 치유하실 것이라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아마 가장 중요하게 가장 잘 알려진 메시야에 관한 구절은 이사야 53장 4-5절일 것이다. 그 본문은 메시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누가에 따르면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친히 인용하셨고(눅4:18-19), 그 날 "이루어졌다고"고 그가 말씀하신 이사야 61장 1-2절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께서 오셨다는 표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제시하였다.

둘째, 율법의 올바른 적용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줌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심한 반감을 사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은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로 지켜지고 있으므로 올바른 안식의 개념을 실천키 위하여 치유의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

세째,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서 행하셨다. 나면서 소경된 자에 대한 기사(요9:1-41)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소경을 치유해 주셨다. 예수는 이 일을 통해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보여주므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하셨다.

네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었다. 복음서는 이것을 마태복음9장 36절과 14장 14절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낫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 어거스틴(Augusiane)은 능력의 요소를 동정심과 나란히 두었다.

다섯째,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전승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이 전승은 예수께서 단순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산적된 증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요5:19, 21) 병자를 치유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섯째,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과 악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그 결박을 풀어서 그의 백성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원하기에 이런 치유사역을 하셨다. 이런 치유사역이 악에 대한 승리라고 본다면 이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는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다(마12:28, 눅11:20).

  

c. 치유방법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방법은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첫째, 손을 내밀어 안수하거나 만지심으로 치유하셨다. 

(마8:1-4)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데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하셨고 (눅13:13) 귀신들려 18년간이나 꼬부라져 펴지 못한 여인에게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고 하였다. 

접촉의 방법은 그 반대의 입장도 있었는데 동일한 능력으로 치유가 나타났다. 

(마14:36) "무리들이 예수의 옷가에 라도 손을 대개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사람은 다 나음을 얻었다"고 하였다. 또한 열두해의 혈루증 여인(마5:25-34)의 치유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예수께서 직접 접촉하고나 환자편에서 접촉하는 것을 시도하거나 같은 기적이 일어났고 사도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행3:1-11).

 

둘째, 말씀과 명령으로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환자와의 전혀 접촉이 없었어도 그의 말씀으로 모든 병이 깨끗하여지기도 하였다. (마8:13) 백부장의 하인이 심한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환자를 접촉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치유케 하신 사실이다. 또한 말씀과 명령은 악령 추방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나사로를 살릴 때(요11:43)와 열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눅17:14),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막5:8),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치유할 때(요4:50) 사용하셨다. 이와같이 예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권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세째, 침과 진흙을 사용한 방법이다. 

예수의 치유 기사중에서 침을 사용하거나 진흙을 섞어서 사용하였던 것에 관한 세가지 기사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침은 치유의 수단으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을 직접적인 치유의 기능을 지닌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신의 인격과 권능의 매개체로 사용하셨다. 마가복음에서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에 대한 치유의 기사가 있는데 예수는 그 사람의 양 귀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으시고 에바다 - 열리라 - 라고 말씀하셨다. (막8:23) 예수는 소경을 치유해 주실 때 이와 동일한 행동을 취하셨다. (요9:6-7) 침을 진흙에 섞어서 소경의 눈에 문지르고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다. 이러한 치료방법이 과연 과학적인 효능이 있는지 논할바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의학적인 치료의 방법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신유는 의학적인 방법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치유의 원천은 하나님이지만, 그 치유는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네째, 기도로서 고치셨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요11:41-44).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딸에 대한 치유는 그 여인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한 것이었다(마15:25).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때마다 자유롭게 치유받았으며 이 여인의 경우에는 그녀 자신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다. 예수께서 귀신 축출에서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마9:29)고 하셨다.

 

다섯째, 사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다. 

예수의 치유에 있어 당사자의 믿음이 유력한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들의 여러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옷에 손을 댐으로 혈루병을 치유받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막5:34). 그리고 그는 두 명의 소경들을 치유해 주실때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9:29). 또한 간질병에 걸린 소년의 아버지에게 질병치유에 있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어 그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어 치유받았다(막9:23-24).

 

여섯째, 대화를 통해 고치셨다.

 예수는 대화하실 때 그 사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파헤치시고 근접하여 치유하기도 하셨다. (요4:3-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가장 평범한 대화로 시작하여 그 여자의 심층에 깊은 갈등의 문제에 접하고 결국은 심한 혼돈의 감정을 정돈하여 주면서 자애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발견케 하여 주셨고 삶의 새로운 진로를 열어 치유케 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예수 치유방법은 어떤때는 초월적인 방법과 의학적인 양면성을 곁들여 치유했음을 본다. 영적인 병과 현대 의학이 해결할 수 없는 불치의 질환이나 만성적인 병도 말씀, 안수, 기도, 믿음, 침과 흙, 대화를 통한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하셨다.

  

2) 사도들의 치유사역 

예수님은 그에게 오는 병자들을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같은 일을 하도록 위임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이길 수 있는 권능과 병고치는 특권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게 하려고 그들을 보내며 ...... 제자들은 나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병을 고쳐 주었다"(눅9:1-2, 6)

치유사역은 12제자들이 병을 고치는 권세를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다. 사도행전에 펼쳐지는 초대교회의 역사에는 치유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기사와 표적이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고 사도들은 병자를 고치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병의 치유는 처음부터 교회의 특징 중 하나였다.

 

a. 베드로

사도행전의 기사에서는 제자들이 주께로부터 부여받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역사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베드로에 의하여 행하여진 치유의 이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행3:6-7).

사도행전 5장 14-16절에도 보면 베드로에 의하여 위대한 성령의 치유능력이 나타났음을 잘 묘사해 준다. 사도행전 9장 33-35절에 보면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야를 8년간의 중풍병에서 낫게 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3장 7절에서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강조하고 반신불수 앉은 뱅이를 일으킨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베드로는 죽었던 다비다를 살 릴 때에도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행9:40) 온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하는 자세이었다. 이와같이 성령에 의한 치유의 능력으로 베드로는 초대교회 때 치유사역을 하였던 제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b. 바울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나니아의 기도에 의해 병 낫는 체험을 하였던 사람이다(행9:15-19). 이런 체험을 가진 바울도 베드로처럼 치유사역을 하였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고 앉은뱅이 된 자를 보고 "큰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일어서라 하니" (행14:10) 그 사람이 뛰어 걷는 역사가 일어났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행한 치유목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서도 바울의 치유목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졌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며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대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라더라"(행28:8-9).

사도행전 가운데 사도들의 치유사역은 누누히 강조되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8장 5-8절에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전할 때 말씀을 듣고 표적을 체험하면서 더러운 귀신이 물러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많이 일어나는 치유사역을 제하면 거의가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 의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언제나 사도들은 치유사역을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었으며 자기들은 능력을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게서 동일한 자세를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행20:9-12,28:7-8). 바울의 경우에서도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큰 효험을 나타내 보이나(행9:12) 능력은 주님께 있으며 이런 매체물은 치유를 나타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초대교회 치유사역에 관한 사실을 통해 몇가지 결론을 얻을수 있다. 


첫째, 치유는 초대교회의 일상적인 사역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에수의 치유사역을 이어받은 것이었으며, 그분의 대전도명령 - 가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치유하라는 - 을 옮기는 일이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의 권능을 받아 행하였다. 


둘째, 초대교회는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언했다. 치유는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곤 했다(행3:6, 16; 19:11-13).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에는 언제나 성령이 임하셨으며, 사람들에게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줌은 물론 집단적인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의 계기가 되곤 했다(행2:43, 46-47; 3:8; 4:21; 5:14; 8:6-8). 세째,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극적으로 증거하는 일이기도 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곤 했다. 따라서 그들의 적들조차도 예수를 주님으로 경배하는 새로운 연적인 운동의 거센 물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c. 치유의 방법 

(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치유하신다. 그런데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여러가지 이므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치유에는 성경에 나온 치유방법과 일반적인 치유의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스탠리 죤스(E.Stanley Jones)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치유방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① 하나님께서는 외과의사들을 통해 치유하신다. 

의학의 역사에는 수술을 통해 치유된 사례가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② 하나님께서는 내과의사를 통해 치유하신다. 

현대 의학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다양한 치료법을 속속 계발해 내고 있다. 그러나 치료법들은 현명하게 사용되어야 하며, 결코 과용되거나 오용되어서는 안된다.

 

③ 하나님께서는 심리적인 암시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스스로 병들었다고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암시해 주는 사람은 실제로 병들 수 있다. 한편,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또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암시를 주는 사람은 치료과정이 신속히 진행될 것이다. 병든 사람의 건설적인 정신적. 정서적. 영적인 자세가 육체적 .심리적인인 치유방법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무수히 많다.

 

④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진정한 치유의 환경은 병든 사람의 내부에 조성되는 것이므로 외적인 환경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환경에 따라 병든 사람의 건강이 영향을 받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⑤ 하나님은 인간의 내부에서 병을 유발하는 요인들 - 두려움, 고독,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 허무감, 원한, 죄책감 등 - 로부터 자유롭게 하심으로 치유하신다.

 

⑥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에 직접 성령으로 역사하심으로서 치유하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고 했다. 인간의 세포나 조직에도 하나님의 영이 치유의 손길로 역사하실 수 있다.

 

⑦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처방-몸의 부활-으로 치유하신다. 

어떤 병들은 우리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 그 치유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시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던 사람들의 치유를 연기함으로써 '영원한 치유'를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결국은 치유해 주신다. 한편, 그분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참아낼 만큼만의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구원의 때까지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결국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며, 치유의 능력은 오직 그분께 속한 것이다. 투약(投藥)이나 휴식, 또는 의사나 심리요법이 치유의 원천은 아니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은 한 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치유든 일반적인 치유든 모든 치유의 원천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D. 성서적 치유

 

1) 기도를 통한 치유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치어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되어 풍요한 생명의 흐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력이 기도자를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들어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기도는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고, 진심으로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하여 언급은 없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깊은 동정심과 권위를 가지고 기도했다.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치유는 대체로 즉석에서 일어나곤 했으나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마가복음 8장 22-26절에 예수께서 한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두 번씩이나 기도하셔야 했다. 그 사람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좀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이에 그 사람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이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다시 그 눈에 손을 대시자 그는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25절).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치유의 역사가 행하여질 때에는 어떠한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결코 조바심 해서는 안되며, 참을성있게 계속하여야 할것이다.

 

맥너트(Francis MacNutt)도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내가 발견한 사실들 가운데 가장 특기할만한 것 가운데 하나는, 짦은 기도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젖어들어가는 기도", 즉 짧게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가 우리들이 추구하는 치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러번에 걸쳐 나는 짧은 기도를 통해 완전히 치유된 사람들의 수와 상태 및 호전된 사람들의 수를 확인함으로써 기도의 효과에 대하여 검토한바 있다. 나는 짧은 기도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육체적인 효과 "이는 항상 영적인 효과를 수반한다"를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질병이 발생하였을 때, 현대의학으로 정확한 원인과 치료방법을 모르면 기도함으로 치유받는 방법이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5:15). 응답받을 수 있는 올바른 기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하셨다(요15:7, 요일5:4, 약4:2-3, 마7:7-8).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병고침을 위하여 치료를 구하는 기도는 항상 허락되어 있으나 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보장은 없다. 주님은 모든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신다. 'No의 응답 또한 우리에게 계획된 바를 소상히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의 응답인 것이다. 몸의 건강에 우선하는 더 지고한 목적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치유를 위한 기도의 방법으로는 개인적으로, 즉 일대일로 기도할 수 있으며, 몇사람이 그룹을 만들거나 동료들이 환자를 위해서 서로서로 기도할 수 있으며, 설교와 찬양을 병행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이 고려될 수 있다. 특히 이중에서 팀을 이루어 모임을 계속 진행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방법을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 생각한다.

  

2) 안수를 통한 치유 

 

성경에는 안수의 사례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보통 안수라 하면 머리에 손을 얹거나 특별한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한 방식으로 본다. 병든 자에게 치료자가 손을 얹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울 때,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할 때(창48:14), 예수께서 아이들을 축복 할 때(마19:15), 또한 대제사장의 축복기도(마9:22),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축복하셨다.(눅24:50) 예수는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하여(눅4:40),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기 위하여(막1:41)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아나니아가 바울의 눈을 뜨게 할 때(행9:12-17). 일곱집사를 임명하기 위하여(행6:6) 행해졌다. 바울서신은 주로 임명의 수단으로 언급된다(딤전4:14, 5:22).

 

맥너트는 "안수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진 기도" 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말씀의 치유 외에도 접촉만으로도 치유하셨다(마14:35-36). 뉴욕대학에서는 간호원들이 안수할 대 환자들의 회복능력이 증진된다고 하였다.이상에서 볼 때 성경에서의 안수는 축복과 사명과 치유와 확신과 임명을 위하여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안수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너지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다. 즉 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흐르도록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3) 믿음을 통한 치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터너(Turner)는 치유와 관련해서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첫째,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고하는 능력이나 사랑하는 능력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다.

 

둘째, 믿음은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은 보는 것을 통하여 살지만 시각을 넘어선 삶의 영역도 있다. 그것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통찰력을 필요하다. 그것이 믿음이다.

 

세째,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최상의 선물인 은혜를 사람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주기를 꺼려하지 않으시나 사람은 때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것을 주실 수 있으며, 기꺼이 주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고자 손을 내미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받아 들이게 해 준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힐트너(Hiltner)는 "신도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그것에 주의하면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보다도 더욱 큰 힘으로 그의 곁에서 싸워 주셨고, 현재, 싸우고 계시며, 앞으로 싸워 주실 것을 믿을 때, 영적, 육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나게 된다."고 말했다. 

(마13:58) "저희가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 하시니라" 

믿음 없이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예수의 목회사역을 말하고 있다.

 

프란시스 맥넡(Francis MacNutt)은 우리가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할 믿음의 본질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나의 믿음은 내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라고 말했다.

믿음을 통해 영적인 병과 육적인 병이 동시에 치유 받았고(마8:2, 마8:10, 마9:18, 막5:22, 막7:24-30, 눅7:36-50, 요4:46-54) 또한 영적인 병도 믿음으로 치유받은 사실을 볼 수 있다(행 8:26-39,행16:14). 그러므로 믿음은 전적 신뢰이며, 의사에게 몸을 맡기듯이 확신하는 것이고, 인식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기꺼이 주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의 손을 내밀고 신뢰할 때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

  

4) 예배를 통한 치유 

 

"예배"라는 말에은 "가치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 돌린다"라는 뜻이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예배 의식 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 터너 -

성도의 교재를 통해 외로움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깨달을 때 과거의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되며, 하나님 말씀이 선포될 때 새로운 희망이 싹터 슬픔이 치유되고, 용서 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 될 때 실망한 영혼이 치유된다. 하나님은 인생의 사소한 일 조차도 처리해 주실 만큼 위대함을 깨달을 때 근심이 치유되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가 인식할 때 자기 비하가 치유되고, 예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때 돈에 대한 강박관념이 치유된다.

터너는 예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그의 사랑과 지혜와 권능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몰두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할 수록 더욱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치유를 베푸실 조건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함께 모여 어떤 사람이 치유되리라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에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나가는 것이며 모든 조건이 채워지면 치유가 일어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나갈 때 이러한 예배 안에서는 쉽게 하나가 되고 그러한 곳에서는 치유가 많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

터너는 예배를 통한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5단계가 있다고 했다.

 

1) 육신을 편안히 하고 긴장을 푼다.

2)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한다.

3) 두려움, 분노, 근심, 죄의식에서 자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4) 자신의 원하는 것을 형상화 한다.

5)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한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세가 준비 될 때 치유는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성찬예식을 통해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혈관에 수혈되고 그의 살이 나의 근육에 에너지 근원이 되는 확신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할 때 뜨거움을 느끼며,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신비적 연합(Mystical Reconciliation)이 일어난다. 즉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하나님이 나를 향하고 계심을 통해 치유되며, 죄의식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선포를 통해 마음 뿐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까지 치유되고, 주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것을 확신할 때 자신이 부적합 하다는데서 치유되며, 가장 비참함을 맛보신 주님을 통해 슬픔에 젖은 사람이 치유되고, 주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믿을 때 고독과 외로움에 빠진 사람이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배시에 목회자의 일방적이고 단독적인 예배 행위로만 끝나버리고 참여한 회중들과의 감정적 영적 일체감을 가질 수 없다면, 즉 회중의 감동이 없이 다시 말하면 케뮤니케이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치유의 효과는 그 만큼 축소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확인 할 때 그만큼 치유의 효과도 크다고 본다. 사람은 예배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그의 사랑과 그의 지혜와 권능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열어 놓고 깨끗함과 치유의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5) 고백을 통한 치유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발견하고, 나에게서 죄를 거두어 가시도록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내어 놓는다는 사실을 본질로 삼는다.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은 죄의 고백이다. 죄의 고백은 고백자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에 치유의 한 핵심이다. 성경은 사죄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은혜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인 행위이며 모든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는 첩경인 것을 가르치고 있다(요일1:9, 히8:12, 사44:22, 슥3:4). 또한 "죄를 서로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병나음을 얻으라고 했다(약5:6).

 

리챠드 메이유(Richard Mayhue)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죄를 서로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죄의 무모한 불모의 삶을 살지않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회개하며,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병으로 징게하셔야만 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뚜나이젠은 "우리가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예배에 참석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으며 그때에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죄의 속박과 사슬에서 해방된 나의 삶속으로 꿰뚫고 들어오게 된다"고 했다. 시편기자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으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시32:3-4)고 고백을 하고 있다. 죄를 품고 있을 때는 뼈가 쇠하고 주의 손이 누름을 느끼며 답답한 상태이었으나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이르기를 허물을 여호와게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를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죄를 사하였나이다"(시32:5-7)

 

그러므로 고백을 거부하는 한 죄에 갇힌 삶을 살아 갈수 밖에 없다. 죄의 힘으로는 인간을 죄의 결박에서 건져낼 수 없다. 죄는 본래 숨어 있기를 좋아하며, 폭로되기를 싫어한다. 만약 죄가 노출되고, 고백되며, 뉘우치게 되면 죄의 운명은 끝난다. 

결국 죄를 고백함으로서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고백과 용서는 죄로 인하여 닥치는 심신의 모든 억압에서 풀어줄 뿐만 아니라 깨닫지 못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 모든 억압과 무거운 짐에서 용서와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6) 은사를 통한 치유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정의하기를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에게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특별한 속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하도록 된 것이다." 치유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이다(고전12:1-1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인간의 방법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중개자로 봉사하는 역량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신유의 은사는 기적의 은사의 한 특수한 표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 은사가 따로 따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은사들을 분리한다. 신유의 은사에는 모든 종류의 인간 질병들이 다 포함되지만 그것은 인간의 특정 질병 하나하나와의 관계를 말한다. (고전12:28) "신유(healing)의 은사들(gifts)"이라는 복수형의 말로 되어 있다. 이 복수형의 말은 각종 질병들에 대한 많은 종류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유의 은사를 육체적인 질병들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신유의 은사는 정신적인 병, 정서적인 병, 영적인 병을 고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애그니스 샌포드(Agnes Sanford)는 특히 "기억력을 회복시키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루드 카터 스테플린턴(Ruth Carter Stapleton)은 영적인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신유의 은사에는 많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신유의 은사는 어떤 사람에게 병을 물리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고치시기를 원하실 때에 그 사람을 통하여 역사를 나타내는 것 이다. 그러기에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다.

신유은사는 의사나 간호원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약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은 디모데가 병으로 고생할 때 포도주를 쓰도록 권했다(딤전5:23). 그러므로 의학의 방법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은혜의 사건이다.

 


그러나 의학의 치유와 신유의 역사로 인한 치유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의술에 의한 치유나 신유에 의한 치유에서도 모두 죽었다. 그러므로 신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오늘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곳이면 신유의 역사는 일어날 수 있다. 신유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신유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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