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스크랩]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재조명(再照明)

하나님아들 2018. 6. 8. 22:32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재조명(再照明)




이 종 성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시작하는 말

I. 포스트 모더니즘의 도전

1.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
2. 최근 신학의 공과(功過)
1) 정통주의 2) 자유주의 3) 근본주의 4) 신정통주의 5) 급진적 신학
3. 안착지를 찾지 못한 포스트모더니즘


II. 인신론(人神論)과 유일신론과 3위1체론

1. 인신론
2. 유일신론
3. 3위1체신론의 우월성
4. 3위1체신의 통치영역
5. 우리의 선택


III. 기독교와 붕괴된 포스트모더니즘

1. 3위1체신의 절대성
2. 포스트모더니즘의 붕괴
3. 3위1체신과 유일신의 대결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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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位一體論의 再照明

시작하는 말

현대 또는 21세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포스트(후기)라는 말과 모더니즘이라는 말의 합성어다. 이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대전제가 된다. 모더니즘이라는 말은 영.독어권에서 쓰여진 말로서 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라고 한다. 이 사상은 서양사에 있어서 계몽주의와 과학주의와 이성주의가 공동으로 기독교 문명의 전통과 신앙에 반대하는 운동으로서 발전되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인간의 힘으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살기 좋은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사실 모더니즘은 인류역사의 큰 공헌을 세웠다. 현대의 모든 과학의 발달과 우주공학과 인간복제의 의술과 수명연장과 정보산업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모더니즘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지성인들은 그러한 모더니즘에 위기가 왔으며, 모더니즘을 초월하여 새 문명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운동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에도 큰 도전이 되고 있으므로 차제에 우리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있어서도 3위1체론이 가능할지 검토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I. 포스트 모더니즘의 도전

1.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

유럽의 지성인들은 20세기 전반에 있었던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학살사건을 목격하고는 계몽시대 때부터 가졌던, 이성이 인류역사를 크게 발전시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사실 이성을 토대로 한 낙관주의는 19세기 말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많이 있었다. 1900년에 죽은 니체의 예언적 발언인 "신은 죽었다"고 한 말이라든가, 인류는 희망을 향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흑암을 향하고 있다고 한 하이덱거, 언어가 전달하려고 하는 그러한 객관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 Derrida, 건축에 표준적이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건축이 아니라 건축물에 그림이나 색을 칠하는 것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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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는 건축가들, 또는 문학작품을 통하여 그러한 세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순전히 가상(fiction)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고 한다(Donald Borthelme, Umberto Eco등의 말). Mark C. Taylor는 Princeton Seminary의 교수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을 신학에 적용하여 말했다 : There is no "objective truth" - "either God exists or God does not exist". There is simply a variety of religious texts, susceptible to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 "no right answer". 같은 맥락에서 R. Scharlemann은 더 강하게 말한다.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말로써 형성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G. Lindbeck이 크리스챤들이 3위1체를 말할 때 그러한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단지 신자들이 신에 대해서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Musser-Price : A New Handbook of Christian Theology, pp.372-4).
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적이고 성서적인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특히 3위1체신론은 한 가지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2. 최근 신학의 공과(功過)

여기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에 논의된 신학을 근대 또는 현대 신학이라고 하고 이 시기에 있었던 정통주의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와 신정통주의와 급진신학 등 다섯 가지 신학운동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정통주의
정통주의라는 말은 성서와 초대교회가 믿고 따르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사에 나타난 정통주의 운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초대교회는 정통교리를 말하기 전에 성서 안에서 말하는 바른 교훈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예수는 메시야다(막 8:29; 요 11:27), 예수는 주다(롬 10:9; 빌 2:11; 골 2:6),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행 8:37; 마 14:33), 또는 바른 말(딤전 6:3), 아름다운 것(딤후 1:13) 등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참고하여 초대교회는 예수를 믿되 바르게 믿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초대교회는 바른 믿음을 신조의 형식으로 발표했다. 그것이 곧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슈스 신조다. 이 신조를 따르는 것을 정통이라고 했다. 비슷한 사건이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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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영국교회가 작성한 Thrity Nine Articles(1571)과 스코틀랜드교회가 작성한 Scots Confession과 루터교회가 작성한 Formula of Concord(1577),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들과 장로교회가 작성한 Westminster Confession이 있다. 이 네 가지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들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표준으로 믿고 있다. 이 신조에 포함된 내용을 믿는 것이 곧 정통이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19세기까지 이 내용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2) 자유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이란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치고 지켜온 신앙과 신학에 대하여 해석과 평가의 자유를 주장하는 학문적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이미 데칼트나 흄이나 베이컨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성시대, 경험론시대, 과학시대, 계몽시대 등의 이름으로 17세기부터 유럽의 일반 학계와 신학계를 지배하던 흐름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많은 신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오던 진리 또는 교리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운동을 총칭하여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운동에 제일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쉴라이엘맛하였다(Christliche Glaube).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서의 영감설과 무오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하나의 종교문학으로 이해했으며, 기독교 교리중 초자연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인간이성과 체험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만의 가치를 인정하는 신학을 추진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의 절대성이나 예수의 기적적 탄생이나 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이적사건은 합리적으로 재해석했으며, 부활이나 천당이나 내세를 부인했다. 이러한 신학의 대표적 서적은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거기서 하르낙은 말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모든 인류는 형제와 같다. 이렇게 말하므로 기독교에서 모든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하고 합리적 교리만을 인정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을 주장했다. 이러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3) 근본주의(Fundamentalism)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이 19세기 말에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교회 안에서 대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주의 때문에 2000년 기독교 역사에 큰 위기가 왔다고 느낀 많은 보수계열의 신학자들, 주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에 속한 학자들이 근본주의(The Fundamentals)라는 소책자를 수백만부를 인쇄하여 무
료로 배부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Princeton 신학교의 교수였던 B.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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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field, 그리고 R. A. Torrey, Louis Meyer, Elmore Harris, Joseph Kyle, Charles Erdman, T. C. Herton, James Orr 등이다. 이 운동은 미국 안에 있는 교회 안에 교파를 초월한 많은 신학자들과 크리스챤 지식인들과 목회자들의 호응을 받아 자유주의 신학에 일대 도전을 시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도 주로 남침례교회와 구남장로교회와 구남감리교회 지역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다. 대표적인 신학교로서는 남침례회신학교들과 Fuller Seminary와 Evangelical Trinity Seminary와 Talbot Seminary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본신앙은, 성서의 무오성, 예수의 처녀탄생과 육체적 부활, 예수의 재림, 인간의 전적 타락, 이적사건의 역사성 등이다. 현재 근본주의는 미국교회 안에서 보수주의와 영성운동과 연합되어 큰 힘을 과시하고 있다.

4) 신정통주의
미국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을 때 유럽대륙에서도 신학계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전술한 것과 같이 자유주의 신학이 프로테스탄트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었을 때 스위스의 한 목회자였던 Karl Barth가 "로마서 강해"라는 책을 출판하므로 자유주의 신학의 지각이 파괴되고 새로운 정통신학운동이 대두했다. Barth, Gogarten, Thurnysen, Brunner, Nygren, Aulen 등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에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주장한다. 신의 절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주성과 성서의 신언성을 강조하는 것이 장점이라면, 성서를 문자주의로, 또는 율법적으로 이해하고, 야웨 하나님과 인류역사와의 거리를 극대화하고 하나님의 사랑보다 심판을 강조하고, 현세를 말씀으로 개혁하고 천국화 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내세만을 기다리는 것 등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양면성을 신언으로써 조화하고 신언으로써 인생과 사회와 역사를 개혁하려는 것이 곧 이들의 주요 목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 운동을 총칭하여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한다. 19세기 이전에 있었던 정통주의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들의 근본정신이었던 신본주의는 보수하려는 운동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5) 급진적 신학
기독교의 전통적 신학(자유주의와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은 제 2차 대전 후에 다방면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그러한 다양한 도전적 신학을 급진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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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 죽음의 신학이다. Altizer, Hamilton, van Buren 등 젊은 신학자들이 제 2차 대전 후의 세계 정세나 미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볼 때 의로우시고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터인데 이러한 부조리와 불의의 사태가 계속되는 것을 보아 그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거나 존재했다면 지금은 죽어 없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정치신학이다.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UN이 조직되어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해 보려고 했으나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국가간의 힘겨루기로 소위 냉전시대가 시작되면서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세계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을 느끼면서 신학도 정치적으로 연구되고 실천되고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다. Moltmann, Metz, Cobb, Bonino 등이 그러한 신념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3) Christian - Marxist Dialogue. 기독교와 Marxist는 대립되는 이념으로 적대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왔으나 인류사회의 복지적 증진을 위해서는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립보다 서로 대화하면서 세계평화와 증진을 위하여 먼저 대화를 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Niebuhr, Hromadka, Roger Garaudy, Paul Lehmann 등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4) 해방신학. 중남미의 젊은 카톨릭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남미의 교회와 시민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의의 세력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과 로마천주교회와 이 두 세력을 업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군부독제다. 위의 세 세력을 없이하고 참된 복음적 말씀에 근거하여 평안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off, Segundo, Gutierez, Alvez, Borino 등이 대표적 신학자다.
(5) 여성신학. 최근에 일어난 신학운동으로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으로 부각된 신학이 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본권을 남자들의 독재권에서 해방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서 남녀동등의 대원칙을 살려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성공회에서는 여성 성직자를 허락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다수는 여자 목사제도를 신설했다. 하나님의 부성(父性)이 아니라 모성(母性)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 과격파도 있으나 여성신학은 점차적으로 모든 기독교 계층에서 부동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R. Ruether, Chopp, Purvis, Fiorenza 등이 대표적 여성 신학자다.

3. 안착지를 찾지 못한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이 처음 희망했던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던 점을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적하고 비판한 것은 정당했다. 사실 17세기부터 모더니즘이 인류에게 약속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막연한 믿음대신에 이성에 의한 확실하고도 정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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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습득, 마술이나 요술에 의한 병의 치료대신에 실험을 통한 확실한 의료기술에 의한 치병, 속도기술을 발전시키므로 공간의 제약성을 극복하여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해 준 교통수단의 발달, 자연이 제공해 주던 물자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발전으로 풍부하고도 윤택한 현대인의 삶, 인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주는 우주과학의 발달 등은 확실히 인간에게 더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삶의 의의, 세상에 없어지지 않는 악과 불의, 권력남용에 의한 전쟁과 이에 따르는 비통, 빈부의 차이에 따르는 행.불행의 증폭,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미래에 대한 영원한 불안 등은 아무리 인지가 발달해도 풀지 못하는 과제이다. 이러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모더니즘을 대치하기 위하여 그러한 모더니즘을 부인하고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더 좋은 문명을 인류에게 제공해 주겠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 것은 건설이나 해결이나 향상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파괴와 혼돈과 불확실과 방향상실 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를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II. 인신론(人神論)과 유일신론과 3위1체론

1. 인신론

인류문명은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며 종교는 문명의 모체이며 그 문명은 신화에서 발아했으며 그 신화는 철학을 산출했다. 수많은 고대신화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의 많은 신명이 나타나며 그들 신 하나 하나가 다 인간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대문명의 고적지를 탐방하여 놀란 것은 인간들이 자기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여 특정 신을 섬기게 되었으나 그 신들의 모양이 하나같이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인간과는 다른 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 자신을 신격화하며 모시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희랍 신화권과 로마 신화권과 바벨론 신화권에서 그러한 현상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 고대인들은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인신(人神)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신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얻지 못했다. 그러한 신이 실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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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일신론

그런가 하면 유일신을 믿는 두 가지 종교가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다. 유대교는 야웨 신을 믿으며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믿는다. 이 두 신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명칭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된다. 동일한 신을 유대교에서는 엘.엘로힘이라고도 하고 야웨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라고 한다. 그리고 그 두 신의 속성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서로 자기들이 믿는 신이 유일하신 참 신이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 엘이나 알라나 다같이 절대신이 못되고 상대적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두 절대자는 자동적으로 두 상대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엘이나 알라를 절대자라고 한다면 그 신은 무지의 신, 실존하지 않는 신, 부정적 신(否定的 神)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인간은 절대적 신을 직접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무지의 신(無知의 神)을 알고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3. 3위1체신론

3위1체신론은 다신론과 인신론과 유일신론의 문제점을 다 해결해 주면서 가장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성부이신 야웨는 절대자, 영원자, 완전자이시다. 그는 창조자이시며, 역사와 우주의 지배자이시다. 그는 의와 자비와 사랑과 선이시다. 그는 대자적인 동시에 대타적이시다. 이것을 자존자라고 한다. 둘째,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가 같으며, 기타 속성도 같으시다. 다만 성부의 사역의 일환으로 성육신하여 인류구원의 사역을 맡았다. 그가 죽으셨다가 부활한 것은 그의 본체가 영원하시어서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이신 파라클레토스는 성부와 모든 면에 있어서 동일하시나 교회시대에 그리스도가 시작한 두 가지 일 즉 인류구원의 완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추진하신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을 보호하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3위1체적 존재양식을 택하여 우주를 주관하시고 역사를 지배하신다. 그러므로 이 3위1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 때까지 인간이 생각하고 믿어온 모든 다른 신은 참 신이 아니라 허수아비며 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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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신 아닌 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3위1체신만 참 신으로 믿어야 한다.

4. 3위1체 신의 통치영역

이 때까지 교회나 신학에서는 3위1체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지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고 인류역사를 지배하시고 역사의 끝날에 대심판을 통하여 역사를 완성시키고 성화된 모든 피조물과 영원토록 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 구미교회가 가르치고 생각하고 실천한 3위1체신의 통치사역은 백인들의 세계와 역사를 위주로 생각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marginal(변두리)로 생각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전체를 지으시고 그것을 지배하신다. 지구와 지구상에 있는 생물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전체의 모든 것을 사역의 대상으로 한다. 특히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백인과 흑인과 홍인과 황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같이 imago Dei에 의하여 지으심을 받은 동등한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계만민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교육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 자연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다같이 취급하신다. 이것을 통전적 섭리라고 할 수 있다.

5. 우리의 선택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는 문제는 우리가 믿어야 할 신은 야웨냐, 알라냐 그렇지 않으면 3위1체 하나님이냐라는 문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웨 하나님만 믿으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야웨 하나님을 직접 알지도 못하고 믿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믿는 그대로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신을 직접 믿을 수 없다. 상대자는 절대자를 직접 만나거나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알라신을 만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3위1체 신을 믿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요 사람이기 때문에(vere Deus vere homo) 그를 통해서 우리는 절대자이신 야웨 신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시켜 주는 분이 성령이다. 우리의 힘만으로 그리스도를 찾아갈 수 없다. 성령이 우리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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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이와 같이 3위1체신 자신이 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고 그에게로 인도하고 구원의 도리를 알게 하고 영생을 얻도록 사역하신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신은 3위1체신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III. 기독교와 붕괴된 포스트모더니즘

1. 3위1체신의 절대성

3위1체신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정리를 내리고 모든 신자들이 믿는 대로 그는 영원자이시고 완전하시고 우주만물을 지배하신다.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3위1체신의 통치권 안에서만 존재하고 활동한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정당한 주장이고 실제적으로 모든 존재가 체험하는 것이고 문명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유사이래로 세상 안에서 명멸한 모든 종교와 문명이 증명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사 40:7,8; 벧전 1:24). 이 말이 사실임을 우리는 중동지방의 폐허 속에서 그 증거를 무수히 목격할 수 있다. 아폴로 신도 비너스 신도 알테미스 신도 지금은 한 덩이의 바위로 변하여 땅 위에 버려져 있지만 3위1체 신은 로마에서 런던에서 뉴욕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그의 영광이 빛나고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붕괴

R. Webber라는 학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아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전되었다고 한다. 1950년부터 그 때까지 발전되었던 모더니즘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적 과학관과 철학관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1960) 전통적인 판단표준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소수자(minority)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다양한 생활관을 추구하는 복수주의(pluralism)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는 예술과 건축에 있어서 복고풍이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게 되었다. 1990년부터는 전통과 고전에 대한 개혁이 성행되게 되었다(R. E - Webber : Ancient, Future Faith, 1999, p.35). 이렇게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면서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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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것에 도전한다. 첫째, 가치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없으며 보편타당한 지식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 가치 밖에 없다. 둘째, 세상에는 선악이 투쟁하는 2원론 밖에 없다. 셋째, 보편타당하고 우주적 가치가 있는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넷째, 신화와 상상과 이야기와 상징만 있고 확실한 것은 없다. 그리고 보편적 진리는 없다. 이상과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개인적이고 단편적이고 개혁적이고 일시적이라고 하면서 보편적 진리나 우주적 통치자를 부인한다. 이 단계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가치를 구유한 working principle로서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때와 장소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문화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지배하는 우주적 원리로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극도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와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운동이다.

3. 3위 1체신의 승리

3위1체 신론이 기독교 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타당한 신론으로서 정착된 것은 450년경에 작성된 Athanasius 신조를 통해서였다. 그 신조에 의하면, "제 3조 : 카톨릭 신앙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한 분의 하나님과 통일안에 계시는 세 위격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제 4조 : 그렇다고 해서 페르소나를 혼동하거나 실체를 나누지는 않는다. 제 5조 : 페르소나에는 아버지의 페르소나와 아들의 페르소나와 성령의 페르소나가 따로 따로 있다. 제 10조 :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성령이 영원하시다. 제 11조 : 그러나 세 영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원만 있다. 제 17조 :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주요 아들이 주요 성령이 주다. 제 18조 : 그러나 세 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주만 있다. 제 27조 :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하면 삼위일체 안에서 통일이 통일안에서 삼위일체가 예배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타나슈스 신조의 중요한 부분의 일부다. 그 때까지 논쟁이 계속되던 3위1체론에 대한 논쟁이 이 아타나슈스 신조의 작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신조 안에는 인간의 수적 개념과 존재론적 구조와 시간적 길이와 도덕적 질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되었다. 다른 어떠한 신 개념도 이 3위1체론에 비교할만한 것은 없다. 다른 모든 신 개념은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온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3위1체신은 모든 신 위의 신이요 모든 진리위의 진리요 모든 선위의 선이요 모든 시간을 승화하는 영원이다. 모든 인조(manmade)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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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격퇴하고 만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의 신이다.

4. 3위1체신과 유일신의 대결

기독교 진영에는 3위1체신과 유일신을 혼돈하여 그 두 신이 동일한 신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신학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목회자들 가운데 그러한 경향이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다. 차제에 양자의 차이점을 밝히고자 한다.
유일신론은 두 가지 종교가 신봉하는 신이다. 유대교의 엘신과 이슬람교의 알라신이다. 이 두 종교는 그들이 절대자로 믿는 엘과 알라를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절대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엘과 알라를 다같이 절대자로 하지만 절대신이 둘이라면 그 신들은 절대신이 아니라 상대적 신이 된다. 절대자는 한 분만 있을 때 절대자이로되 둘 이상이 있으면 그 신은 절대신이 아니라 상대적 신이다. 또한 현재처럼 두 신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싸운다면 어느 한 쪽도 절대가 될 수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절대자는 상대자로부터 접근할 수 없을 정도의 먼 거리에 있으며 논리적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하다. 상대자 즉 신자들이 신자들 측에서 절대자와 대화를 하고 교신을 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면 그 말은 모순되는 말이다. 또 다시 인용한다면 Finitum non capax infiniti다.
이와는 달리 3위1체신은 신과 인간이 직접 교제하고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길이 트여 있다. 사람 즉 상대자가 하나님 즉 절대자에게 스스로 접근한다든가 대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즉 절대자와 동일한 본체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절대자이신 야웨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Finitum non capax infiniti가 Finitum capax infiniti가 된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하나님께 도달할 길이 없으나 3위1체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길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야웨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사역하신다. 여기에 3위1체신론의 절대적 가치와 절대적 중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엘과 이슬람교의 알라는 기독교의 3위1체 하나님께 종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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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그러므로 21세기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있어서 만민이 따라야 할 길은 3위1체신을 유일하고도 절대적 신으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브라만이나 석가나 단군이나 천조대신도 우리 3위1체 하나님께 굴복해야 한다. 인간의 상대적 자질을 통하여 개발된 자연과학도 첨단의학도 컴퓨터 사이언스도 정보기술도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신 3위1체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굴복하고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난 500년 동안 인지의 발달에 의하여 형성되고 작성된 모든 근대주의의 공적을 파괴하고 상대적 능력밖에 없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으로 새로운 문화 diagram을 만들어 21세기의 인류의 문화를 지배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3위1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지난 5000년 동안 인류는 자기들의 힘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결과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적한 것과 같이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무가치하다고 파기해 버린 그 쓰레기 더미 위에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을 세워 또 다시 별 가치가 없는 문화를 세우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3위1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서서 인류를 위한, 전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21세기야말로 3위1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위에 보편적 문명을 개발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해야 한다.

출처 : 행 복 충 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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