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스크랩] 그리스도교적인 유신론으로서의 삼위일체론 이해

하나님아들 2018. 6. 8. 22:34

그리스도교적인 유신론으로서의 삼위일체론 이해

오 영 석 (한국신학대학교 총장)

 

 



I. 서론 : 삼위일체론 재론의 의미

그리스도교 신학은 시대의 질문과 도전에 직면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학문적인 봉사를 한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려면 학문적 신학의 안내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학문적 신학은 성서 안에서 다양한 색채들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 상충되게 보이는 듯한 계시 증언들의 내용과 배경들을 바르게 분석하고, 그것들을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과 역사적인 교회의 해석과 전통을 참조하여 새롭게 조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가 그때 그때 증언하고 대답해야 할 신앙의 근거와 내용을 제시하고, 시대의 질문들에 대하여 새롭게 답변할 준비를 한다. 신학은 이 점에서 성서의 내용과 의미를 현재의 상황으로 옮겨오는 해석학적인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옛 사상과 내용을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한다.

II. 삼위일체의 뿌리

1. 구원의 경험에 근거한 삼위일체 신앙고백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그 근거와 출발점과 그 대상을 자신을 주(主)로서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갖는다. 그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계시이다. 삼위일체론은 계시를 일어난 사건에서 해석하는 과제를 수행한다. 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확신한 초대교회의 신앙경험과 인식에서 이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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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신학자 보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교 교리의 뿌리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신비롭게 만나는 경험이 있다. 초대 교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예배한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운명과 성령의 사건에서 초월적인 구원의 하나님을 세 가지 독특한 방식으로 체험했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 가지 다른, 그러나 상관적인 계시의 행동에서 그 자신과 일치한다. 초대 교인들은 그들이 특이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구원의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을 세 상호 관련된 방식으로, 즉 그리스도론적으로, 성령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약의 유일신론적인 하나님의 견해는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떠나서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만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고백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달한다. 그 고백은 한 참된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의의 근원은 자신을 주로서 세 번 달리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 행동에 있다. 그것은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처럼 사변적인 신학의 산물도,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처럼 예수의 자의식이나 교회가 느끼는 공동체 정신의 산물도 아니다.
신약의 증언에서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작용에서 하나님과 성령이, 성령의 작용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함께 나타나고, 함께 관계하며, 함께 참여하여 현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의는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에서 자신을 주로서 계시한 창조자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존재와 구원의 행동의 상호관계, 상호침투, 상호작용에 대한 신앙의 경험과 인식을 압축하여 표현한 공적인 형식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합리적이거나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직관적인 깨달음과 중심에서 확인되고 경험된 점이라는 것이다. 만일에 삼위일체의 교의가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과 만남과 경험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무효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거듭 새롭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일에 삼위일체 교의가 신플라톤적인 철학이나 스토익 철학의 중심 개념인 로고스에 대한 사변적인 산물 혹은 동양적인 신비종교의 산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회의 신학적인 노작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하나이며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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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논리적인 진술과 엄격한 개념으로만 표현할 수 없고, 인류와 전피조물을 위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행동을 노래와 춤과 연극과 시와 찬양으로 표현한다. 삼위일체 교의는 이 내용을 가장 간단한 개념으로써 표현하여 초대교회부터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수많은 잘못된 그리스도론적이고 성령론적인 표상들과 과오와 맞서, 성서가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순수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 삼위일체 교의의 형성과정

1)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독특한 이해 방식이었던 삼위일체 교리는 형성기에서부터 지금까지 논란되었고 의혹에 싸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단 한 분인가 아니면 삼위일체인가?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 문제는 신앙생활과 윤리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교리는 신학자들의 사변일 뿐, 교회의 신앙생활과 윤리적인 관련성은 없는가? 그렇다면 그 교리는 실제적인 중요성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독단적으로 복종만 강조하므로, 이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가? 그 교리를 어떻게 바르게 해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오늘의 해석학의 신학, 정치신학, 과정신학의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신학이 되기 위하여 그 교리가 배제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적인 신관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의는 신성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질성을 의문시하는 위험한 이단과 대결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사이의 동질성을 확고히 보전한다. 또한 아버지, 아들과 성령은 세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임을 단언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처음부터 홀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며, 성부, 성자, 성령은 깨질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구원의 역사를 함께 이룬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성서의 전체 내용을 가장 잘 해석한 것이다.
이 삼위일체 뿌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주로서 세 번 달리 역사적으로 계시한 존재 양식들과 그의 구원의 신비에 대한 경험에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적 구속론의 신학적인 전제가 된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신뢰하는 신앙생활의 내적인 구조와 일치한다. 초대교회는 이단의 위협 아래서 삼위일체론을 형성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대상과 내용을 인식하고 보존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이단은 교회사에서 거듭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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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성부, 성자와 성령의 세 인격 안에서 신적인 동질성과 일치성과 한 참된 하나님임을 표현한다. 그리고 한 하나님이 포기될 수 없는 인격의 구별성에서 자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한 것과, 셋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 안에서 셋인 하나님의 상호관계성을 표현한다. 성서 안에 없는 이 교의는 하나님이 자신을 주로서 계시하는 성서의 텍스트를 주석한 교회의 신학적 반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엄격한 유일신론(Monotheismus)은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위협하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엄격한 사고는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엄격한 유일신론은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 없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성서의 텍스트를 주석한 삼위일체론 교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본질적인 일치를 주장하고, 그리스도를 신적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을 그리스도적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없이 파악될 수 없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없이 이해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어떻게 계시되었는가를 안다. 그밖에 하나님에 관한 논의는 임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신론과 그리스도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하나님은 예수의 말과 행동과 주장을 어떻게 확증하였는가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지할 것은 삼위일체에서 셋이라는 개념이 하나님 안에서 상호관계를 지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독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활동한다는 점이다. 세 인격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 관계성이 하나님의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관계들의 신비를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일차적인 신성의 특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지아누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azianus)는 말한다. "나는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그 하나됨을 상상할 수 없다. 곧바로 하나됨을 상기하지 않고선 삼위를 분별할 수 없다."
이 점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론을 문제시한 아리안주의(Arianismus)의 이단설,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us)의 이단설, 칼빈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한 세르베투스(M. Servetus, 1557)의 반삼위일체론, 소치니파(F. Sozzini, 1539-1604)와 유니테리안파(Unitarians), 19세기에 등장한 역사적 예수운동과 관련된 자유주의 신학사조들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삼위일체 교의의 정당성을 재확인하여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2) 종속적인 그리스도론을 주장한 아리우스(Arius)의 논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하나님 개념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한다. 그에게서 하나님은 단순한 가장 높은 실체이다. 이 실체는 나누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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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단일성으로 인하여 모든 존재의 근거를 형성한다. 그것은 많은 것들의 원칙이요 척도이며, 다른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다른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 한 분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에 진술될 수도 철저히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사귐을 이루기 위하여 중간 존재의 중재가 필요하다. 아리우스는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따라서 "아들"이라 부르고, 철학적 개념에 따라서 "로고스"라고 부른다. 이 아들은 창조의 처음 태어난 자이지만 아버지의 독생자로 이해될 수 없다. 모든 창조의 처음 태어난 자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이성이 나타났다.
이러한 로고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만이 아니다. 그는 반신 반인간의 존재였다. 그는 신적이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의 모범이 되는 피조물이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이 있기 전에 창조되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신적인 영광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
아리우스에게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였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은 한 분뿐임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본질적인 하나됨은 배제된다. 이로써 예수는 자신을 한 분 하나님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모범적인 삶을 산다. 예수가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본질이 아니므로,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완전하고 충만한 사귐은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중재자 그리스도는 반신이고 반인간인 신비적인 중간 존재론으로 변형되었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통한 유일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르낙이 비판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창조된"하나님, 혹은 "반신적인"존재로 변형시킨 것이다. 아리우스가 하나님의 신성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반신 반인간의 존재로 변형한 것은 신약성서의 근본적인 증언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제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신화적 요소가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어 순수한 유일신앙은 신적 인간과 반인간적 신을 믿는 다신교로 전락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안주의는 이단으로 배격되고,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완전한 단일성의 교리가 관철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 참 하나님이요, 태어났으나 창조되지 않았고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다."
칼 바르트는 아리우스의 종속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자신을 성부,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역사에서 "주"로서 계시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삼위일체론은 자신을 이렇게 삼중적인 독특한 방식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계시의 주체에 대해서 대답한다. 성서에서 아버지, 아들, 영은 같은 본질이고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론의 내용이다. 성서에서 증언되는 계시의 주체는 그 존재와 행동이 어떻든 간에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주이고 한 하나님이다. 성부는 아들과 영과의 구별에서 아들과 영과 같은 하나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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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구별되는 계시의 행동과 존재의 양태에서 같은 하나님이며 성령도 그러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계시하고 그의 사랑을 전달함에서 같은 하나님이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동일한, 유일한, 참 하나님이다. 여기에 어떤 반신이 없고 밑으로 내려간 하나님도 위로 올라간 하나님도 없다. 모두는 동일한 같은 주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금요일에, 부활절 아침에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자신을 특징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고 한계를 갖는 반신 반인간적인 존재라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당신(Du)으로서 만날 수 없으며, 그를 지배하고 처분할 수 있는 피조물로 전락시킨다. 아리우스적인 종속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주체성을 인간의 주체성으로 편입시켜 그리스도의 "주권"을 폐기시킨다. 그것은 계시의 부정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의 닫힌 세계 안에서 당신(Du)도 "주"도 없이 홀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리우스의 종속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한, 참된 하나님이 독자적인 세 인격들 안에서 자신을 주 하나님으로서 계시한 삼위일체론의 교의가 형성된 것이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폐기될 수 없는 세 고유한 존재 양식에서와 상호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같은 하나님이다. 성자는 성부의 동일한 영원한 신성에서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이다. 성령도 같은 영원한 신성에서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인격이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시에 신성을 갖는다. 이것이 사벨리안주의와 반대되는 삼위일체의 내용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동일본질이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면, 참된 한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 즉 하나님의 하나됨(Einheit)은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하나님의 신성은 단자론적(單子論的)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근본에서 그리스도론적으로, 성령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양태론적 군주론의 유일신론(Monotheismus)의 문제점
- 사벨리우스(Sabellius)
니케아 회의 이전에 서방지역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삼위일체론의 기초 형태를 형성한 터툴리안(195년경 입교)은 영지주의와 마르시온(Marcion)에 반대하여 한 하나님 안에 창조자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됨(Einheit)을 강조하면서 세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한 유일한 본질이다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한 분이지만, 홀로 계시지 않는다. 그는 창조자로서 구속주로서 보혜사 성령으로서 자신을 계시했다. 이로써 그는 삼위일체론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몰트만은 터툴리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 분 하나님은 수적인 혹은 단자적인(monadisch, 單子的) 단일성(Einheit, 單一性)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미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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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단일성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분되지만(distincti) 분리되지(divisi)않고, 구별되지만(discreti) 분리되지(separati)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적인 단일성에서 구별되고 그 구별성에서 하나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을 보낸다. 이 성령은 신의 본질의 하나됨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결합되어 있다. 신성에서 구별된 하나됨을 설명하기 위하여 터툴리안은 태양-빛-반사, 수원-시내-하천과 같은 상징으로 설명한다.
이로써 터툴리안은 한 동일한 질료의 구별할 수 있는 개성들을 서술하려 한 것이다. 이 주장은 역동적인 군주론(Dynamistic Monarchianism)과 대조되는 이론이다. 역동적 군주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은 단순한 능력, 혹은 힘일 뿐이다. 그러한 힘들은 그리스도의 성격의 탁월성과 관련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로고스적 힘을 충만하게 받은 인간이었다. 위에서 온 신적 지혜가 예수 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거주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예수는 성령의 감동과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과 확고하게 긴밀한 연합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구속자의 자격을 확보하고 하나님과 일치하게 된 것이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을 단일한 실체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인 하나님은 세 가지 상이한 양태, 혹은 형태로 자기를 계시하다. 한 하나님은 계시와 구원의 전달의 역사에서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 창조자로 나타난 것은 아버지요, 구원자로 나타난 것은 아들이며, 생명의 선사자로 나타난 것은 성령이다. 그러나 이 셋은 세 실재가 아니라, 한 인격에 의하여 행해진 세 역할을 가리킨다. 이들 삼자는 모두 하나이며 동일한 인격이다. 이것은 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세 역할을 수행한 것에 비교된다. 태양은 빛과 열과 둥근 형체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한 태양이 있듯이,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이름을 지니지만 오직 한 인격이 있을 뿐이다.
사벨리우스에게서 하나님은 세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 구원의 활동을 한 단일한 실체, 한 인격이었다. 창조자로 나타난 아버지의 얼굴은 율법을 준 후, 다시 본래의 상태로 환원하였고, 그것은 화육을 통하여 아들로서 나타났으나, 승천함으로써 절대적인 원실체로 돌아가, 마침내 성령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의 성화를 확보한 후, 다시 구별을 모르는 단일한 실체로 되돌아가 영원토록 거기에 거한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은 나뉠 수 없는 한 실체이며 동일한 인격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과 동일한 행동의 주체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 안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은 영지주의의 늪 속으로, 그의 신성은 말할 것도 없이 직접적으로 한 신성으로 사라진다. 성령도 독자적인 인격을 지니지 못하고 선재적인 존재를 지닐 수 없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동일한 하나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아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지상적인 현현이고, 성령은 성부의 숨은 신적인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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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군주론이다. 그의 양태론적 군주론은 주로서 자신을 계시하는 성자와 성령의 뚜렷이 구별되는 세 인격의 차이를 간과한 과오를 범한 것이다. 동일한 영원한 신의 본질에서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로서, 성자는 성부의 아들로서 존재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다. 이 신적인 인격들은 세 교유한 내적인 상호 관계들 안에서 존속한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독자적인 구별되는 삼중적인 계시에서 우리를 향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들과 그 인격들은 독특하고 서로 혼동될 수 없이 구별된다. 어떤 인격도 다른 인격들 속으로 흡수될 수 없는 구별성을 지닌다. 이 구별 속에서 하나님은 상호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함께 역사하며 우리와 만난다. 이 구별성을 간과하면 우리와 만나는 그리스도의 주체성은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부르는 그리스도 주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관계할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정이다.
사벨리우스는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절대적으로 한 인격으로 동일시하고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후대의 그리스도론에서 사용된 동일본질(homoousios)의 개념을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되었다.

III. 삼위일체 교의의 형성과 그 의미

1. 삼위일체 교의의 확립

삼위일체 교의는 콘스탄티노플의 회의에서(381년) 사실상 완성되었다. 여기엔 아타나시우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373년경)가 아리우스의 양태론적 군주론의 유일신론에 반대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을 확립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 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수원(水源)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아들은 태초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였다. 수원과 시냇물은 그 형태가 둘이고 이름이 둘이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같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아버지도 아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고 같은 영원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아들은 그 기원과 본질에서 피조물과는 다른 상이한 본질이지만(heteroousis), 아버지와는 동일본질(homoousios)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질'이고 인격에서만 아버지와 구별된다면, 아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서 출생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본질을 주장하기 위하여 한 본질을 표현하는 "homoousios"(wesens-eins)라는 개념을 본질의 같음을 표현하는 개념 "homoiousios"(wesen-gleich)보다 선호하여 그 개념을 관철시켰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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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신적인 본질에 아들이 참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행동하고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성자는 성부와 영원한 동일본질이며 인격에서만 성부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진정한 삼위일체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이로써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론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들과 아버지의 동질이라는 근거 위에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집행, 죄의 용서, 부활이 소망을 지닌 구원론적인 성격을 세웠다. 그는 세례 예식문에서 살펴볼 때, 성령이 피조물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하나님 안에 다른 어떤 본질을 지닌 것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삼위일체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성령을 아들에게 종속된 피조물이거나 어떤 신적인 힘과 천사와 같이 보는 견해와 맞서 성령은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동질이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분 하나님이 삼중의 인격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이로써 자신을 계시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인격체가 동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캅파도키아 학자들의 논리는 삼위일체론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325년 '니케아 신조'에는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성령론이 "우리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진술로 진일보하여 나타났다. 그러다가 362년 아타나시우스가 주관한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성령론이 삼위일체론적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인격"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의는 동방 교회를 대표한 요한(754년경)과 서방 교회를 대표한 어거스틴(430년경)에 의해서 확정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한 실체인 동시에 성부, 성자와 성령의 세 인격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부는 신성의 원천으로서 출생되지 않은 자이고, 성자는 출생된 자이며, 성령은 나오는 자라고 했다. 이들의 관계는 결코 혼합됨이 없이 상호충만과 상호침투의 관계이다. 요한은 종속설을 거부했지만 성부를 신성의 근원으로 보았기에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의 흔적이 엿보이고, 성령론의 이해에서 후기에 동서 교회의 논점이 된 필리오케(filioque)의 길을 열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는 근원적인 관계에서 동시에 영원한 한 하나님이며 유일한 신적인 하나됨에서 셋이라고 주장한 것은 삼위일체론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삼위일체는 실체, 본질, 능력, 의지에서 한 하나님이다고 말했다. 삼위일체의 각 인격은 완전한 신적인 실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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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서로 동일하며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동일본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성자와 성령이 보냄받은 것은 그들이 성부보다 열등하거나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서 세 인격은 동등하고 어느 인격도 다른 인격보다 크거나 작지 않다.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세 존재 양식이 있기에 그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 세 인격 사이에는 상호의존의 관계가 있다.
어거스틴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각 인격을 신의 본질 안에 있는 상관적 삼위일체론적 구별이라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한다. "주 우리 하나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주님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여! 한 분 하나님이신 당신! 성삼위일체여! 내가 한 분이신 당신의 영감으로 이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을 삼위이신 당신이 받아 주소서. 그 속에 나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거든 한 분이며 삼위이신 당신이 그것을 간과해 주소서."

2. 삼위일체론의 의미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성부, 성자와 성령은 한 동일한 본질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동일한 본질이라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과 영광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상호관련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존재하는 세 인격 혹은 세 실재가 뚜렷이 구별되고 차이가 있다. 그 인격들의 구별과 질서는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각 인격은 다른 인격 속으로, 상호관계 속으로 해소될 수 없는 독자성을 지닌다.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는 하나님은 상호관계 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하며, 분명히 구별되는 존재의 양식들 안에서 한 하나님이다. 참된 한 하나님 자신이 세 번 다른 양식에서 자신을 계시한 인격들은 독자적이고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 신성의 본질과 영광에서 세 인격은 동일하고 일치된다. 신성의 동일본질안에서(consubstantialismus) 해소될 수 없는 독자적인 인격들의 구분성은 그리스도교적인 삼위일체론의 본질에 속한다. 세 인격들이 본질에서 한 분이라는 것은 신의 존재의 하나됨(일치)을 단언하면서, 신의 존재의 분열을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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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이 셋이라는 것은 신의 존재와 행동에서 분리와 독존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상호 관련성과 상호침투를 뜻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표현한 것처럼 "저 최고의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는 셋과 함께 있고 어떤 둘도 하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안에서 영원하다. 그래서 한 분은 모두 안에서, 모두는 한 분 안에서, 모두는 모두 안에서, 모두는 한 분에서 존재한다."
삼위일체 교의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의 신적 본질이 세 인격 안에"(unitas in trinitate)와 "세 인격이 한 동질의 신적 본질 안"(trinitas in unitate)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서에서 증언되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지하려면 역사적인 교회에서 사용된 개념과는 다른 역동적인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신적인 구원과 활동을 토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 속에서, 상호관계와 침투 속에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한 유일한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을 고백하고 두 진술을 하나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인 삼위일체 교의는 하나님이 한 동일한 본질 안에서 세 인격이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중 어느 인격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적시한다. 이것이 구원의 활동 속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와 관계는 어거스틴 이래로 삼위일체적인 관계의 일치로 이해되었다. 삼위일체적인 인격들의 관계는 그 인격들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끈과 기반에서만 영으로 존재한다. 삼위일체는 단지 상호 관계에서만 존재하므로 다른 인격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의 하나됨을 찬양하지만 성부, 성자와 성령의 역사적인 활동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들과 속성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 하나님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구별을 인정하면서 찬양된다. 그 구별은 역사적으로 계시된 신적인 계시 양식과 행동들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상대 안에서, 서로 위함에서 서로 함께 있음에서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사귐과 영원한 침투 속에서 존속한다. 헤겔이 지시한 것처럼 인격성의 참됨은 타자 속으로 침투하고, 침투됨으로써 획득될 수 있으며, 인격의 본질은 나와 만나는 다른 인격에 대한 헌신에서 존재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관계성은 상호적인 자아 헌신의 일치로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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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의는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을 수여하시는 살아 계신 창조자 하나님, 화해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존재 양식과 구원의 활동의 신비를 표현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의 단일성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관계 속에 있는 사귐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 안에서 다른 종교나 철학적인 사변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삼위일체 교의는 구원론에서도 중심적인 주제이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하여 계시되고 인식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시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화해의 사건을 성취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우리는 참된 하나님과 사귈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의 사건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와 화해와 성화'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업적에 성서적인 계시의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을 해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에 알맞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도 타당하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과의 사귐에도 해당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개방하는 계시 사건에서 우리와 관계할 때, 그는 본질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으로서 자신을 알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고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인지하도록 조명한다. 성령은 계시의 말씀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심화시킨다. 이것은 성령이 성부와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가능하다. 이러한 관련성에서 에벨링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써 성령으로써 일어났고 현재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며 피조물의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관계하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과 관계한다."따라서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영광과 능력을 지니지 않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를 참 하나님과 성자에게 연합시킬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역사는 빗나가고 말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존재는 성자와 성령의 내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존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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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을 떠나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교의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직결된다.

IV. 결론

만일에 역사적인 교회가 삼위일체 교의를 확립하지 못했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내용과 대상은 삼신론(三神論)으로 전락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웅으로 숭배하든지, 그를 반신과 반인간으로 믿든지, 혹은 제 2의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종교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벨링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를 하나로 요약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적인 계시의 내용인 삼위일체에서 선포의 내용을 얻고 그 방향을 결정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바로 살아 계신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므로 삼위일체의 범위 안에 있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내용이 아닐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 안에서 한 분, 유일한 영원한 하나님을 필연적으로 고백한다."
이로써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삼위일체의 인격의 총계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삼위일체의 삶의 분리할 수 없는 관계성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일치도 창조자 하나님,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상이한 신앙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종합한 것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리할 수 없는 삶의 관계성과 계시 사건에서 발견된다. 바르게 인식되고 믿어지는 곳에 신앙의 이 3차원들이 근원에서 밀접하게 상호 관련된다. 그것이 유일한 신앙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존재하므로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동일한 한 신성 안에서 세 인격들의 사귐이며,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나와 너"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의 상대이며, 영원한 "나와 우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러한 존재양식은 교의학에서 "내재적인 삼위일체 혹은 내적-신적인 삼위일체"로서 표현되었다. 이 내재적인 삼위일체의 존재 양식은 경륜사적인-구속사적인 삼위일체의 근거와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에서 자신을 창조자와 화해자, 성령으로 계시하기 전에 영원 전부터 영원한 내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존재하셨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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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적인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사와 구원사에서, 즉 창조와 화해와 성령의 새로운 창조 사건에서 드러난다. 동시에 하나님은 역사적인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한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삼위일체 활동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일치된다. 경륜사적인 삼위일체론은 이 점을 주목해야 그 과제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 내재적인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사적인 삼위일체이며 그 역도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 안에 없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했다. 밖으로 향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업적은 내재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그러므로 내재적인 삼위일체와 본질적인 삼위일체, 경륜사적인 삼위일체 간의 역동적이고 본질적인 관련성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은 근원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서로를 향하여, 서로 안에서, 서로 함께 존재하고 활동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고 우리를 부르고 만난다. 그러므로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바르트가 천명한 것처럼 근원적인 관계 안에서 존재하도록 창조된 존재, 즉 함께 있는 존재(Mitsein)로서 창조된 것이다. 너와 우리와 함께 공존하지 않은 인간성은 비인간성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의 상대자로 창조된 인간성과는 무관하다. 인간성은 이 공존의 현실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문제의 해명이 바르트의 신학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형상론을 삼위일체의 관련에서 천명하고 동시에 인간의 공존 인간성(Mitmenschlichkeit)을 삼위일체론적인 형상론에서 해명한 그의 인간학에 적중된 평가일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해소될 수 없는 인격의 주체로서 근원적으로 깨질 수 없는 상관 관계 안에서 상호 침투하면서 일하고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을 따라서 이웃을 위한 깊은 상호성과 존중과 사랑과 이해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상호의 내적인 관계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과 공동체에서 반영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현실성을 실감할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성례전적인 공동체로, 포괄적이며 따스한 사랑 안에서 신적인 사귐의 살아 있는 신앙고백의 공동체로 부름받고 있다. 깊은 상호성과 관계된 공동체만이, 정의와 평화와 전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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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보전을 위해서 그 자신을 투신하는 공동체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공동체이다.
동방의 신학자들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각 인격은 신적인 삶의 순환 속에서 다른 인격들과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함께 내적으로 얽혀서 존재하고 행동한다고 하여 삼위일체 교의를 상호관계(perichoresis)라고 규정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와 무용의 안무 기술법을 위한 말과의 유사성을 인지하는 신학자들은, 신의 생활의 이 내적인, 역동적인 상호관계와 그 힘찬 운동을 신의 춤에 비교한다. 신이 생명은 셋이 창조적인 사랑 안에서 평등한 상대로서 서로를 위하여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여기서 진정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면서 너와 내가 '함께 있음'(Mitsein)이 실현된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삶은 체념, 나태, 현상 유지에 머무르지 않고, 탐욕과 불의로 무너져가는 우리의 공동체를 서로를 위하여 상호 작용 속에서 갱신하며 생명, 정의, 평화의 공동체로 부활시키도록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각자는 모두 안에서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각자 안에서 각자를 위하여, 모두는 모두 안에서 모두를 위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여기에 인간의 공동체를 위한 삼위일체 교의의 영감과 촉구가 있고 종속되고 변두리로 밀려난 인간들과 사회구조의 개혁을 위한 예언자적인 도전이 있다. 너무나 오랫 동안 삼위일체 교의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오해와 피상적인 인식으로 무시되었다. 이제 평화, 정의, 생명의 공동체의 부활과 함께 삼위일체 교의가 다시 노래부르며 춤추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출처 : 행 복 충 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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