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본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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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본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사명 (북한을 중심으로) 미주밀알선교회 동계수련회 강석진 목사 - 목 차 - I.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한 역사의 과정 1.한.미조약의 체결로 인한 복음화의 여명기 2.한국선교의 정지작업을 한 가우쳐와 맥클레이 3.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4.갑신정변을 통한 의료선교의 시작 II. 한반도에 복음을 전해준 하나님의 사람들 1. Robert J.Thomas 2. John Ross 3. Underwood 4. 개별적으로 온 선교사들 III. 초대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활동 1. 일본 2. 시베리아 3. 만주 4. 몽고 5. 중국 IV. 북한 교회의 수난사와 성도의 신앙 1.해방 이후부터 한국동란까지의 교회수난 2.육.이오동란 이후의 북한의 지하교회 V. 현재의 북한의 종교정책과 그 움직임 VI. 북한 선교의 접근방안 1.북한의 국제사회의 유도와 참여 2.제삼국의 국경지역을 통한 우회접근 3.기업의 대북진출을 통한 접근 4.물자원조를 통한 접근 5.전파를 통한 선교 VII. 북한 선교의 시나리오 1.제 1 시나리오:남북 공존체제 하에서의 선교전략 2.제 2 시나리오:돌발적 붕괴로 인한 흡수통일 후의 선교전략 3.제 3 시나리오:현재의 남북간의 체제와 현실을 바탕으로한 선교전략 VIII.통일 이후의 북한교회의 선교 역활 1.지정학적으로 본 북한선교의 역활 2.이념의 체험을 통한 구공산권의 선교역활 IX.역사에 나타난 한민족의 대륙성과 세계선교 비젼과의 접목 1.역사로 본 한민족의 대륙진출 - 고구려 - 신라 - 백제 - 발해 2.21세기와 한국교회의 사명 -------------------------------------------------------------------------------- I.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한 역사의 과정 동방의 작은 나라인 한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뜻가운데 진행되었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의 틈바귀에서 쇄국정책을 통해 외국과는 관계를 거부하였으나, 일본,러시아,영국,미국 등이 힘에 의한 강압적인 자세로 조선을 굴복시키고,마침내 은둔의 나라인 한반도는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고 강대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게되었다.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는 결국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는 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어 복음의 주자들인 선교사들이 속속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우리보다 복음을 먼저 전해준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한반도에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고, 조선의 관리들이나 상인등이 중국과 일본을 출입하면서 복음을 전해듣게 되어 이들을 통한 복음의 전래도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의 이러한 주변 여건은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즉 선교를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또 국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불신,부패 등으로 불안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피폐해져 있어 삶 자체가 희망이 없는 암담한 가운데 있었을 뿐만아니라 이로인한 혹세무민의 미신행위가 모든 사람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마치 예수님의 초림 직전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과도 같았다. 그당시에는 선지자의 활동이 단절된 암흑기였고,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압제자들에 불과하였다. 그때 이스라엘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메시아를 대망하였듯이 우리나라의 그 당시 백성들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기대하는 암흑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우리의 역사상 가장 암흑기인 그 시대에 복음을 이 땅에 비추어 주셨던 것이다. 1. 한.미조약의 체결로 인한 복음화의 여명기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벗기게 된 계기는 1875년(고종1년)일본의 군함 운양호 사건이었다. 일본과의 조약은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조약을 뒤따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미국도 조선과 관계를 맺게된다. 미국과의 통상 조약은 1876년 한일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활동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되어 청나라가 조선 정부로 하여금 미국과 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제의 세력을 견제케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청나라의 원세계가 조선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 해안에 설치된 텐트안에서 우리측 대표 김홍집과 미국측 대표 슈펠트간에 역사적인 한, 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오래동안 피로 맺어진 혈맹의 유대 관계가 시작되게 되었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선교도 이것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올 시점에 한미조약이 체결된 것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미조약은 오래동안 조선이 중국의 부속국가로 중요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국의 재가를 얻어야만 하는 불명예를 씻어 버리고,세계 만방에 독립된 국가로서 나서게 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자,1883년 5월에 우리 나라에 와서 비준서를 교환하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서 서울에서 그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장부도 이에 대한 답례 사절단을 파송하게 되었는데, 민영익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대리공사에 홍영식을 그리고 수행원에 서광범,유길준 등을 임명하여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3년 7월 미국의 해군함정을 이용하여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저들은 기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워싱톤에 도착하여,미국대통령을 접견하고 12월에 귀국하였다. 2. 한국선교의 정지 작업을 한 가우쳐 박사와 맥클레이 미국에 간 사절된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위싱톤을 향해 갈 때 한국 선교 역사상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대학교의 설립자이며,감리교회의 목사인 가우쳐박사였다. 3일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그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183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편지를 써 보내어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선교자금 2천달러를 같이 송금하였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는 아직 한국에 선교를 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우쳐는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대표 맥클레인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내면서 "한국에 찾아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 후 선교사업에 착수하였으면 좋겠다고"하였다. 맥크레이는 곧 한국을 1884년 6월에 2주간 예정으로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다행히도 그는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때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김옥균을 찾아갔다. 그는 김옥균이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달라넌 청원서를 전달하여, 국왕의 허가를 부탁하였다. 며칠후 김옥균은 맥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께서 지난 밤에 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시고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이러한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이 회답을 받은 맥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하나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일본에 돌아온 후 즉시 그는 "우선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다는 것을 감추어 두지 아니하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은 시급한 요구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미국 북감리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첫발을 딛게 하여,1884년말에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아펜젤러목사가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선교의 과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미조약이 맺어졌고 민영익이 가우쳐 박사를 기차간에서 만났으며, 맥클레이가 한국에 와서 국왕에게 편지를 올려 윤허를 받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3.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 역시 한국의 선교사업에 대한 작업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그 해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으로 잡는 해가 되었다. 개신교의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다. 그는 1883년 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 의료선교사로 지원서를 보냈고,이것이 허락되어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선교지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그의 친구 의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에 알렌은 곧 뉴욕의 선교본부에 한국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공관들과 세관에서는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므로 본부가 허락한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4천년의 한국역사에 처음으로 개신교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하게 되어 마침내 개신교 선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미국 공사 푸트씨를 만났고, 바로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공개적인 선교활동은 금해져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길이기도 하였다. 푸트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했을 때도 푸트는 그를 공사관의 의사로 소개하였다. 알렌의 이와같은 입국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한국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이후로 일어나는 한국의 정변은 마침내 왕궁의 복음화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4.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을 통한 의료선교의 시작. 당시 조선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누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수구파의 거세를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시행할 우정국 건물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하는 피로연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때를 기해 개화파들이 수구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개화파들로 새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개방정치를 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12월 4일 저녁 피로연이 진행되는데 "불이야"하는 신호와 함께 잠복했던 자객들이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민비의 동생)이 전신에 칼을 맞고 혈관이 끊기는 생명이 위급해지는 상황에 처했을 때 미국공사 푸트와 세관고문 묄렌도프가 민영익을 응급 처치하고 함께 그를 묄렌도프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즉시 알렌에게 통지하여 급히 오도록 조치하였다. 알렌이 통지를 받고 오는 동안 벌써 어의를 포함한 한의사들 여러 명이 모여 치료를 해보려고 했으나, 끊겨진 몸을 한방의 의술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도착한 알렌은 환자의 위급함을 알고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자기가 이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자기에게 돌아올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치료는 극적인 효력을 나타내,민영익은 얼마되지 않아 완치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은 후에 알렌에게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그들은 당신이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사건은 알렌으로 하여금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왕실과 고위관리들,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알렌은 곧 고종의 시의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민영익을 구해준 대가로 국왕으로부터 참판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왕으로부터 막대한 상금을 받게 되어 그는 그돈으로 병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조정에 이에 대한 편지를 써서 제출하였다. 왕이나 관리들은 알렌의 뛰어난 의술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알고 있는 터여서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알렌의 청원을 순수히 받아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1885년 4월 14일에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개원한지 열흘쯤 지나 이름을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언더우드가 입국하게 되어 그 병원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직 외국인들이 선교활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는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은 한국선교를 확산시키는 근거지가 되었고, 한국의 복음화가 의료봉사와 교육을 통한 선교의 모델이 되었으며, 한국의 복음화 뿐만아니라, 근대화와 문명화를 이루게 하는 산실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II. 한반도에 복음을 전해준 하나님의 사람들 1. Robert J.Thomas 그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생으로서 1863년 목사안수를 받고 영국 런던선교회 장로교 선교사로서 중국으로 파송을 받고 중국에 와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되어 한국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불태우게 되었다. 1866년 7월 토마스선교사는 중국천진에 체류 중인 미국상선 제너랄셔만호가 한국에 상업차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때의 형편을 적어 보낸 것이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에 가슴 부풉니다... 런던선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인간의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약 일주일후,셔만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평양으로 향진하였다. 이때 평양의 문정관이 무역은 국법으로 금하는 것이므로 물러가 달라는 부탁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향진을 하자 화승포로 사격을 하기시작하였고 대동강물이 줄어들면서 배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집중적인 불의 공격을 받게되어 모든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하였고 토마스목사도 더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책 몇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처 나왔으나 조선병사인 박춘권에게 붙잡혔다. 그는 그의 칼에 죽임을 당하기 전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성경책 한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 이를 받지 않았다가 되돌아 갈 때 이것을 주워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교회에 영수가 되었다.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현을 하였다. 9월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성민 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 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아니라,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그가 죽어 묻혀 있다고 생각하는 쑥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1932년에는 토마스목사의 이름 첫자 모양인 "T"자로 예배당을 지어 토마스목사 기념 예배당으로 봉헌하였다. 그는 흑암중에 있던 땅에 한줄기의 빛의 사자로 왔으며, 황무한 조선반도에 한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평양을 거룩한 도성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날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하리라"(사49:8) 2. John Ross 목사(중국선교사) 1874년 산동지역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존로스는 한국을 복음화하려는 비젼을 가지고 지금의 중국요녕성 단동지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이응찬이라는 조선 청년을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해 첫 결실을 얻는다. 이후에 중국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위해 다섯명의 한국청년을 고용했는데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이 된다. 이 청년들의 도움으로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국말로 처음 번역되었고,1887년에는 로스전서라고 불리는 "신약성경 예수 셩교젼서"가 출판되었다. 처음 발간된 낱권 성서들은 로스목사의 조력자인 다섯 청년들을 통해 배부됐고 김종성이라는 청년은 자기 고향인 집안현의 안현에 가서 수백권의 성경을 판매하며 전도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84년 로스목사는 김종성의 간청을 받아 안현에 가서 만주와 북한의 접경지역에서 최초로 회심한 한국사람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로스목사의 조력자였던 서상륜,백홍준과 이성하는 계속적으로 발간되는 낱권 성경들을 배포하기 위해서 중국과의 국경지대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 땅을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성경 배포 루트를 살펴보면 세가지 통로가 있었다. 첫째로, 적은 분량이지만 만주를 통해 들어온 것과, 둘째로는 선편으로 로스목사가 보낸 6천권의 성경이 인천지역에서 세관업무를 보좌해 주던 독일인 묄렌도프의 도움으로 서상륜에게 전달된 것고, 세째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영국성서공회와 협력해 활동하던 일본인들을 통해 부산과 김해로 반입된 경우였다. 1884년 서상륜과 백홍준은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에 최초의 장로교회를 설립했고 이어서 1885년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소래에 초가 집 하나를 이용해 일명 소래교회를 세워 7명의 첫 세례자를 탄생시켰다. 3. Horace G.Underwood 선교사 안수를 받은 목사로서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선교사인 그는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당시에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올트만 목사가 방문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없느냐고 하면서 그곳에 죽어가는 영혼 1천3백만을 위해 일할 선교사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때 언더우드는 인도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을 때였다. 얼마후 아직 한국에 갈 선교사가 없어서 선교가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왜 네가 가지 못하느냐?"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후 북장로교회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공식임명하였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1884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하여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그곳에 미리 와있던 아펜젤라와 같이 1885년 4월 5일,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아펜젤라 목사는 그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사망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이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자마자 우선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그들을 모아다가 학교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술회한 바가 있다. 이곳이 나중에는 경신중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나아가서 지금의 연세대학교를 만들어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할 민족의 지도자들과 신학교를 통하여 많은 교역자를 배출하였다. 1887년에는 한국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그는 한국에 와서 성서번역 사업을 맨 먼저 실행한 선교사였다. 언더우드는 이미 번역된 것들이 중국어 단어로 가득 차있고,형편없는 인쇄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번역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펜젤러와 더불어 그들의 어학선생들의 도움으로 마가복음부터 번역을 시작하였다. 이 언더우드는 전도와 교육,구제,의료,성서번역등 누구보다도 다양하게 열정적으로 한국인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지금도 4대째를 이어 사역을 하고 있다. 4. 개별적으로 온 선교사들 한국에 와서 선교한 이들의 대다수는 대체로 교파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었지만,초창기에는 교파와 상관없이 와서 선교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치 군번 없는 무명용사와 같이 십자가 군병들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먼저 캐나다 토론토 YMCA가 1889년에 파송한 선교사로 Gale이었다. 그는 그해 12월에 내한하여 몇개월을 서울에서 머무르다가,북쪽으로 가서 선교거점을 확보해 보려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부산에 내려가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선교하였다. 그런 그는 생각을 달리해 토론토 대학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 북장로교회에 가입하여 선교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는 곧 서울로 되돌아아 서울에서 성서번역을 하면서 연동교회의 목사로서 일하였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하고 있을 때 역시 토론토 대학 YMCA가 의사 Hardie를 파송하여 부산에 있는 게일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게일이 부산을 떠나게 되자,그도 같이 서울에 올라와 그의 스승이었던 Avison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1898년에 토론토대학과 관계를 끊고 미국 남감리교회에 가입하였으므로,사실상 토론토대학의 한국선교 지원은 끝나게 되었다. 또 한 선교사는 독립 선교사로서 독특한 일을 행했던 펜윅이었다. 그는 캐나다인으로 침례교인이었다. 그는 정규교육도, 신학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해외선교를 독려하는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1889년 말에 한국에 왔다. 그는 서울에서 어학공부를 하다가 별로 진전이 없자. 한국인들 속에 살면서 직접 말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솔내로 내려가서 한옥 한 채와 땅을 사서 채소를 길러 먹고 한복을 입고 한식을 하면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현지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면서 선교를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쓰기를 "기독교 없이도 한국은 서양의 문화에 윤색되는 것은 덜 바람직한 일 이라고 민ㄷ는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문명만이 제일이라는 문화 제국주의적 환상에 빠진 사람이게 강한 제동을 건 것이다. 펜윅은 189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국순회전도단"(The Korean Itinerant Mission)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친구들로부터 후원회를 조직하여 1896년 그 대표로 다시 와서 함경도 원산에 정착하여 선교하면서 그는 외국인이 선교하는 것 보다도 현지인의 선교가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외국인에 대한 복음전파는 선발된 본국인 신자들이 가장 잘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유명한 선교이론가인 Rufus Anderson이 설파했던 "선교는 토착민을 훈련시켜 하라"고 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III.초대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활동(1902-1937)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그시대는 가난과 무지와 전염병과 국내외 정세적으로 혼란과 수난기에 허덕이는 때였다. 외국인들에 전해준 복음은 곧 한민족에게 한줄기의 생명의 빛이었으며,소망을 주는 생명수였다. 세계선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성공적인 선교의 효과는 초기의 한국쇼회의 전도와 해외선교로 이어져 신학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자생력을 갖추진 못한 상태에서도 뜨거운 열정으로 해외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당시 인적자원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실정이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선교행전과 같이 한국교회는 중국과 만주와 시베리아지역과 몽고와 일본등으로 해외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1902년도에 최초로 선교사를 해외로 보냄으로 초대한국교회의 선교는 시작되었었다. 그 당시 한국교회의 실정과 1세기가 지난 지금과 비교한다면 기적적인 성장을 한 것이나, 선교에 대한 열정과 그 활동은 상대적으로 오히려 미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해외선교의 열정적인 사명의식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 일본 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에 조직되면서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 7인중 1인인 한석진목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주로 유학생들을 상대로 선교 사업을 시작케 하였다. 그후 1911년에 장,감연합 선교회에서 주공삼 목사를 파견하고, 1925년에 임종순,오기선 목사를 각각 일본으로 파송했으며 1924년엔 장,감연합선교회가 오사카에 박연서목사를 파송했다. 1927년엔 자유주의 신학논쟁으로 카나다 선교회를 탈퇴한 주한 선교사 영재형목사가 일본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교포선교에 힘썼다. 1930년 이후부터 도쿄,오사카,고베,나고야,교토 등 대도시와 구주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한인 교회가 설립되기를 이르렀다. 2. 시베리아 선교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운이 기울어지자 북만 국경을 넘어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장을 찾아 이주하여 간 동포의 수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3회 장로회 노회는 시베리아 선교를 결의하고 1909년에 최관흘목사를 파송하여 2년내에 2개의 조직교회와 13개의 기도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1912년 대한감리회도 손정도 목사를 시베리아에 파송하여 장로교 선교 사업과 함께 연합선교에 힘쓰는 중 교세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되자, 러시아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두선교사는 체포되어 결국 투옥되는 박해를 겪게 되었다. 선교의 지속이라는 대명제 아래 최관흘 목사는 본국 교회의 양해도 얻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을 단행하고 말았다. 장로교 총회는 최목사의 개종을 계기로 그를 제적하여 버렸다. 손정도목사는 끝내 정교회 개종에 불응하여 시베리아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선교사업은 일시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후에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이 약화되면서 시베리아에 있는 신설교회들이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에 선교사 파송을 청원함으로써 장로교 총회는 수차에 걸쳐 현지를 시찰한 후 1918년에 김현찬목사를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휨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922년 교회당 34개,목사 5인,장로8인,소학교 6개,야학교 35개,주일학교 15개,등록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얻게되어 드디어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배형식목사를 파송하여 선교 사업이 다시 크게 재건되었다. 3. 만주선교 감리교회는 1920년에 양주삼목사의 시찰 후 만주선교를 결정하고 1921년에 정재덕,최수영,배형식목사를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24년엔 최성모,손정노,동석가,김응태목사를 추가로 파송하여 만주전역에 걸쳐 선교를 확정하였다. 장로교회는 1910년에 김진근목사를 처음으로 파송한후 1911년에 신천읍 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목사를 봉천에 파송했고,1912년엔 평북노회에서 최성주목사를 만주 여러 지방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만주선교의 발전도 눈부실 만큼 급속도여서 1920년에 남만노회가 설립되고 1921년엔 북만노회가 세워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4. 몽고선교 몽고지방에도 흩어진 교포들의 요청에 의하여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각각 선교에 착수하였다. 먼저 감리교회의 최성모목사가 1925년에 화홍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확장하여 나갔다. 10년후 1935년에 장로교 총회의 지시에 따라 의산 노회의 지원 아래 조보근목사가 몽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5. 중국선교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그 다음해에 김영훈,사병순,박태로 세 목사를 선교사로 중국산동 지방에 파송하였다. 산동성은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일반심리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선교 30년이 지난 1942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 36개,세례교인 1716명으로 증가하여 중국선교 사상 큰 기적을 낳았다. 1917년엔 방효원,홍승환 두 목사를 증판하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다시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목사를 1931년에는 김순효여선교사를 파송하였고,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그밖에 교포가 집결된 상해와 또 남경과 북경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의 요람적인 역활도 감당하였다. IV.북한 교회의 수난사와 성도의 신앙 1.해방이후부터 한국동란까지의 교회수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으나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조만식장로를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무시하고,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소련의 계획을 강압적으로 강행하였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소련군정이나 김일성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은 북한 땅의 교회였다. 신의주 제일교회,제이교회의 목사인 윤하영,한경직을 중심으로 1945년에 기독교 사회 민주당이 결성되었다. 결국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해 11월 16일 사회민주당 용암포지부 결성대회 때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일단의 청년들의 습격으로 유명한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이 북한도처에서 교회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북한 땅을 공산화하려는 소련군정의 음모에 투쟁하던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를 하거나 고난을 겪었다. 그당시 북한땅에는 10개 노히에 2천여개의 교회와 대략 30만의 교인이 있었다. 북한 교회는 5개노회를 연합하여 공산화를 목표로하는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인민위원회를 향하여 5개 항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범교회적 움직임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양면정책을 사용하였는데 강경책과 회유책이었다. 특히 교회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1946년 11월 28일 평양신학교 출신인 강양욱을 앞세워 조선기독교 연맹을 만들었다. 그 핵심 요지는,북한 땅을 공산화하는데 있어 적극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북한교회는 여기에 야합하여 공산화에 일조하든지 아니면 신앙양심을 지키어 순교를 택하든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많은 신앙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육이오동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북녙땅에 남아 있던 목사들과 장로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북한교회에서는 큰 부흥이 일어났다. 비록 목자없는 교회였지만 교회마다 사람들이 가득찼고, 조국의 장래에 대한 통곡 어린 간구와 회개의 기도, 성령의 위로가 충만하게 나타났다. 핍박이 심해지는 와중에 일부는 남쪽으로 피난을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교인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어느정도 신앙의 자유가 있었던 만주로 피신하였다.또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로 잠적하여 지금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있다. 육이오동란 중에 북녘땅의 3백만명의 피난민들이 남한땅에 정착하였으며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으로 남한 도처에 교회를 세웠다. 1950년도에 북한의 교인 중 소수의 성도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마다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2. 육.이오동란 이후의 북한의 지하교회 북한에는 현재 그 당국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봉수교회가 있고 그 이후 김일성이가 자신의 어머니 강반석과 함께 어린시절 교회에 다녔다는 칠골이라는 동네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하지만 이 교회들은 순수한 신앙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대외 전시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러나 지상으로 들어나지 않은 일명 지하교회는 비공식 통로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1950년 동란이 일어나던 그해에 김일성종합 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북한교회안에서의 부흥이 미국장로교회의 선교부 파송으로 활약하던 종군의사와 목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전쟁이후 1958년 평북 용천의 이관화목사 사건, 1959년 박천에서의 인민학교 여교사 체포와 그 이후 1966년 잔여 교인들의 색출사건,1968년 평남 온천군 운하리의 박목사 사건, 1974년 10월 함흥에서 적발된 김대용목사와 교인들 소탕사건,더욱이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기독교인들을 평박쑴섬에 수천명을 유배시킨 일과 최근에 신의주 자강도,함북,황해도 등지에서의 지하교회 적발사건들,등은 분명 지하교회가 살아 움직이며 성도들의 신앙이 조직을 이루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소개되는 기사는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는 어느 선교사의 방북시에 그곳의 지하교회 성도를 직접 접한 내용이다. "저는 북한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하여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 몇몇분의 소개를 거쳐 그들을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우리 자유진영의 성도들은 감히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실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각오로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의 광채를 가진 그들의 얼굴은 이미 이땅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양식이 없어도 산에 올라가거나 들에 나가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기도하고,낮에 12시가 되면 각자 일터에서 그리고 학습장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을 하늘을 바라다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식사후에도 기도한다고 했습니다.그들의 2세는 이제 청장년이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찬송가를 3백곡은 족히 알고 있다고 했으며,그것도 삼,사절까지 외우는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를 구할 수가 없기에 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도 물론 귀했습니다. 종이에 베껴서 많은 사람이 돌려 보아야 했으며 그나마 부모님이 순교를 각오하고 숨겨두셨던 옛날의 성경책은 너무 오래전의 것이라서 옛말이 많이 섞여 있어 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을 때 다른 식구들은 교대로 밖에서 보초를 서야한다고 합니다.저는 그들에게 남한의 교회들이 구국제단을 쌓고 열심으로 기도한다고 전하면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한 가정이 어려움에 처해 숙청을 당하게 되면,오,륙십리 먼길을 걸어 다른 사람에게 기도제목을 나누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남한의 성도들이 자기들을 맞아줄 것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곳의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하성도들은 한사람의 불신앙인이라도 들어서면 지하교회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과는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끼리 결혼을 하면서 선을 보는 것도 아니고 어느집 어느 성도의 가정 누구의 손주 손녀 정도로 소개할 뿐 그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가 불구자 일지라도, 맘에 들지 않더라도 결혼합니다. 그러니까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다 친척이고 사돈입니다. 믿는 성도들 가운데는 고급 당원들도 있고 정치가도 있고 또 기술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수도 많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한 지체인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배급품들을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당원이기에 사회혜택이 많습니다. 고급당원들이 단복이라고 하는 나이론추리닝은 아주 귀히여기는 옷으로서 자신이나 자식들에게 입히기 보다는 믿는 형제들에게 먼저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십일조를 모릅니다. 적게하면 십의 이조,그다음으로 십의 오조를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집 앞에 땅콩 심은것, 감자 등 이런 것들을 없는 사람에게 보내어 줍니다. 순교를 당한 한 성도의 아내는 어린 자식 다섯을 키우기 위하여 13년을 탄광에서 일하는 동안에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십일조를 통해 그 가족을 도왔으며 도움받은 그 아이들은 장성하여 십의 오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예배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성도들간에 이와같이 헌신적으로 서로 섬기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하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초대교회의 삶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기사내용은 1995년 2월 26일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부위원장 리종혁과 "해외 동포원호위원회"부위원장인 전경남이 미국을 방문하여 버지니아 Founders Inn에서 교민들과의 간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두레신문에서 지면으로 소개한 것이다. 기자질문:현재교포사회의 접촉이 주로 기독교 단체 혹은 종교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그만큼 북한에서의 종교활동이 활성화 되고 있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 리종혁단장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활성화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 중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은 육이오때 다 이남으로 갔고, 전쟁중에 다 파괴되었는데 우리가 뭐 교회부터 짓겠습니까? 당장 살집부터 짓고 했지 교회를 세욱 종교생활이 활성화하고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었지요. 최근에 와서는 국제적인 냉전이 종식됨으로서 여건이 달라지면서 지금까지 교인이던 것을 숨기던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몇년전부터 많이 늘은 것은 사실입니다."이 질문 중에서 나온 대답도중 평양의 봉수교회,칠골교회,천주교회 등의 교회 이름이 나오고..... 이어진 질문에 전경남부위원장의 대답이 계속된다. "아,우리는 그것 신봉하니까 우리는 종교는 안믿어도 주체사상을 절대적으로 믿고 우리는 교회를 안 가도 우리 사상을 통해서 거기서 우리는 확보한다. 그런 입장입니다. 옛날부터 교회를 믿었던 분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독실한 교인들은 또 가서 믿는기고 아,그렇지 않습니까? 아,그렇게 믿게 해당하게끔 종교를 세우면 되는기고, 제가 알기로는 교회는 없지마는 필요한 분들은 가정에서 회원들이 하는기고,뭐 이렇게 잘 이해해 주십시오. 공화국에서는 절대다수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체사상신봉자들입니다. 이렇게만 문제를 보면 해결될 것입니다. 다 자기 지식이 있으니까" 이들의 대담 내용 가운데 북한의 고위 당원이며 책임자인 그들의 입에서 지하교회, 혹은 비밀교회의 존재와 최근의 움직임을 그들 스스로가 증명해 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지난 5월 평양축전행사 때 참관하고 온 중국교포를 통해 어느 평양시민과의 짧은 전도 대화 가운데서도 그 주민이 가정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바가 있다고 들었었다. 북녘땅에는 분명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서 생명을 유지하며, 때가 되면 다시 그 잎과 열매를 맺듯이 북한의 교회는 분명 살아 숨쉬며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V. 현재의 북한의 종교정책과 그 움직임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폐쇠적이며 예측이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에 이러한 나라를 대상으로 선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88년도에 평양에 봉수교회를 세웠고 92년에 2번째로 칠골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이 두 교회는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또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 세운 것이아니라 대외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한 쇼윈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같이 외부인들에 보여지는 그 교회의 모습은 여러가지 부정적인 측면이 보여지고 있으나 저들은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저들은 조선기독교 연맹이라는 기독단체를 만들어 대외활동을 계속해 오면서 한국의 기독교 단체와 모임도 갖고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는 협의까지는 했으나, 그 이상의 구체적인 실제의 행사는 성사된 바 없다. 지금까지 저들은 순수한 종교의 정신과 신앙에 의한 모색과 실천이 없었음을 몇몇 사례에서도 증명된바 있다. 북측이 순수한 종교정책의 뜻이 있었다면 상호교회방문과 행사의 공동개최 등을 개최했을 것이다. 즉,남북대표자들 간의 회합은 몇번이었으나 일반 교인들간의 만남의 사례는 없었고 북측의 기독교대표들이나 인사들이 한국에 온바는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팔일오 기념예배를 갖자는 내용에는 정치성을 드러내고자한 저들의 의도 때문에 빈번히 무산된바도 있다. 북측의 교회 배후에는 권력의 신체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종교 활동은 사실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저들은 종종 쌍방간에 합의를 해놓고 일방적으로 취소도 하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저들이 자율에 의한 보폭은 짧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저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취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기대나 변화는 바라볼 수 없다 하겠다. 우리는 저들의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경수로 회담을 계기로 미국을 향한 다양한 시도를 취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해외동포위원회 부위원장인 전경남은 미국을 방문하여 그곳의 한인교회를 찾아와 주일 예배를 함께 드렸었다. 물론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교민들의 동정파악과 교회조직과의 유대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들은 또 북에 가족을 두고온 나이 많은 어느 노인인 가족을 찾아 달라면서 건내준 쪽지를 받아 찾아주겠다는 친절을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미국에는 한인들이 2백만 가까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북에 고향을 두고온 실향민 1세 2세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이 매우 많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는 교회를 방문한 것이며 가족 및 친지 방문이나 이들이 원하는 그 친지들의 생사를 확인해줌으로 한인교포들을 북측으로 이끌어 내려는 의도로 교회를 방문한 것이며, 이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만족시켜 줌으로 미국내에 새로운 친북세력 확장과 나아가서 제2의 조총련을 형성하려 할 것이다. 미국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북한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 교역자들과 평신도들 가운데는 실제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선교를 타진해 보기도하며 특히 봉수교회 방문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해 보았다.한국의 교회와 비교한다면 여러가지 유리한 점도 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인 수 밖에 없다 하겠다.물론 봉수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나, 그 물질이 순수하게 교회만을 위해서 쓰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북한의 칠골교회에서도 외국인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나아가서 평양뿐만 아니라 신의주 남포 개성 청진 등에서도 외부인들과 내국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그 순수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북한교회의 개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부터 나진선봉지역에 교회를 건축해달라는 요청이 방북기업인을 통해 있었으나 실시될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다 할지라도 그곳 현지 주민들의 교회가 아니며 그곳에 진출한 외국인들의 교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지역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지역이며 그곳에서 일할 근로자들도 외부에서 선발된 당성이 강하고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유입시켜 주거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외부인 특히 한국기업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이 예배드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교회를 건축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인들과 외국의 기업체들을 끌어 들이기 위한 주민조건은 충족하기 위한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교회뿐만 아니라 병원, 근로자들을 위한 탁아소등 문화시설을 제공함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주민 여건 조성을 선행함이 앞으로 북한선교를 하는데 효과적인 족매역활을 하게 할 것이다. VI. 북한 선교의 접근 방안 1.북한의 국제사회의 유도와 참여 북한은 이제 좋든 싫든 간에 변화무쌍한 국제사회라는 큰 축에 끼어 함께 돌아가게 될 것이며,그들 자신도 여러분야에 걸쳐 다양한 진출을 모색할 것이다. 예수, 스포츠,종교,학술,외교무대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국제사회에 선을 뵈며 참여할 것인데, 우리는 이점에 착안하여 북한선교를 위한 교두보 및 매개수단으로 삼아 저들에게 접근하여 교류하므로 서로가 참여의 명분과 실리를 함께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의 운동팀이 북한을 방문하여 친선경기를 갖거나 과학과 의료분야의 학술 회의를 기독단체를 통해 제 삼국이나 북한에서 개최하여 지구촌의 한 일원이라는 일체성을 심어 주어 국제무대에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하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성을 배재해야 되는 융통성도 가져야 할 것이다. 작년초에 미국 위싱턴에서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에 세계 각국 기독교 대표들이 모였을 때에 북한도 참여하여 남한 특파원과도 잠깐 인터뷰한 바가 있었다. 소문에는 그들이 빌리그래함 목사도 함께 참여한 가운데 클린턴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합이나 행사의 참여는 따뜻한 바람을 저들에게 불어 넣어 주는 것과 같다하겠다.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하기위해서는 이와같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유도함이 필요하겠다. 이러한 방법을 시도해야할 이유는 북한이 다른 나라와 같이 자유로운 직접 선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화적 매개수단을 써야하는 것이다. 이는 기드온의 군사들이 아멜렉 족속을 쳐부수기 위해 근접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의도와 실체를 감추기 위해 횃불을 항아리속에 감추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작전과 동일한 것이다. 2. 제삼국의 국경지역을 통한 우회접근 북한은 지리적으로 중국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약 7백킬로메타 이상의 긴 국경지역을 두고 있다. 압록강 지역으로는 신의주,수풍,만포,중강진,혜산이며,두만강으로는 무산, 회령,종성,온성,남양을 통해 중국과 교통하고 있으며 러시아와는 훈춘과 접경하고 있다. 특히 시베리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브스크,바이칼호가 있는 브라이튼공화국에는 많은 북한의 벌목공,농장노동자 등이 체류하고있다. 중국의 동북삼성(흑룡강성,길림성 요령성)에는 한국교포가 약 2백만명 이상이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북한에 친척을 두고 왕래할 뿐만아니라 북한의 주민도 중국에 있는 친지 방문을 위해 왕래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교포들을 통한 북한선교를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며 용이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이러한 방법을 통해 몇몇 선교회나 개인들이 은밀히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이러한 선교적 접근을 좀더 구체화하되 장기적인 안목으로 점진적인 확산이 필요하다. 실례로 황해도 어느시에 거주하는 어느 아주머니는 요령성 어느 시의 친척집에 왔다가 전도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돌아간 후 편지를 통해 이에 대한 회신을 아주 우회적으로 표현한 가운데 신앙을 갖고 있다는 고백을 한바있다. 또 어느 조선족 신앙인은 북한에 친지방문차 갔다가 친지에 예수를 믿도록 전도를 하고 오는 열성 전도인도있다. 또 더 대담한 경우는 성경책이나 라디오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낟. 결국 여러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질때 이슬비에도 옷이 젖는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의 비유와도 같은 것이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엔 북한의 노동자들이 벌목공이나 농장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진출해 있으나 이러한 집단에서 이탈하여 한국 선교사의 집이나,은밀한 처소에 은익하거나 노동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앞으로 북한선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청년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형제들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따뜻하게 포용하며,예수께로 인도함이 곧 북한선교의 첫 걸음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이탈자나 탈출자들은 모스크바나 북경대사관에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간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재국과 외교적인 문제로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경우 저들은 다 외면당하고 나라없는 백성처럼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떠돌며 위태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에게 그 현지에서라도 안전하게 피신시켜 주어야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살펴주어야 한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는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며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3. 기업의 대북진출을 통한 접근 남북의 경제교류는 최근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달히 진행되가고 있다. 94년도에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여러 형태로 약2억달러 이상을 수출하였고, 수입은 약 2천만달러로 예년에 비해 남북간의 교역량이 급성장하였다. 금년에 들어서 정부도 모기업체의 북한진출에 투자승인을 한 바가 있다. 그동안 한국의 기업체 대표들이 나진,선봉,남포공단등을 시찰한 바 있다. 이러한 활동은 돌변이 없는 한 확대될 것이다. 이러한 싱업인들 가운데는 기독인이 있으므로 이들이 기독교의 정신에 입각한 경제활동을 통해 신앙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도 간접선교이다. 좀더 적극적인 시도를 한다면 그 지역에 복지시설을 제공하여, 그 직장의 노동자들에게 복지시설을 제공하거나 복지기관을 기증하는 것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좋은 선교를 위한 투자 방안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공단 내에 근로자들을 위한 병원,탁아소,고아원,양로원 등 문화,복지시설을 제공함은 기독교 문화를 뿌리 내릴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제는 기독교실업인들이 대북진출을 통해 북한의 선교를 위해,북한의 동포들을 위해 장기적이고도 과감한 사회시설 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작이 통일을 구축하는 첫 삽질이라 생각한다. 4.물자원조를 통한 접근 북한은 현재 식량은 물론 석탄,석유,기타 경공업용품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있다. 이로인해 여러가지 사회적 기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탈북자들이나 외신기자들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북한의 참담한 폭로성 기사보다는 앞으로 적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에 더 관심과 힘을 모아야 될 줄 안다. 이번에 정부차원에서 북한에 쌀15만톤을 보내주었던 사실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정치적인 시각으로 볼때는 매우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성서적으로 보면 금년이 희년이라는데 통일을 위한 수로를 트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질적인 도움을 정부차원에만 의지하지 말고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효ㅚ와 단체들이 주도하여 민족애와 형제애를 가지고 쌀뿐만 아니라 의료품,생활용품등을 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민간차원에서 은밀하게 추진되어 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때 동포간의 사랑과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될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와 같이 분단되었던 독일의 경우,서독의 교회는 기독교의 지고한 사랑의 실천을 매우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오랫동안 지속함으로 통일의 밑거름이 되게한 사례를 교훈 삼아야 하겠다. 서독교회에 의한 동독교회의 지원은 규모와 수행방법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형제애를 바탕으로한 연대의식을 통한 특이한 방법으로 정치적,법률적 장애를 초월하여 실질적으로 이루워졌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동독교회단체,교회부속병원,양로원 및 기타 기관이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분단에 따른 고통을 실질적으로 완화할 수 있었다. 물질적인 혜택과 더불어 복음이 전파되어 무신론적인 사회에서 교회가 생존해가고 또한 그와 더불어 주민들의 실제 생활에 중요한 지원을 함으로써 동독내에서 통일을 향한 여건조성을 축적하게 하였다. 나아가서 물류지원은 동서독의 민족공동체 의식을 견고히 심어 주게되었다.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이 이와같이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함으로서 서로가 사랑의 공감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서독교회의 동독에 대한 이와같은 끊임없는 선교의 방법은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으며 그들은 통일의 열매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5. 전파를 통한 선교 방법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보화 시대속에 전파를 통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과 산업과 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정보를 공간과 시간에 제한없이 접하고 있다. 특히 선교에 있어서도 이와같은 과학문명의 수단을 통해 사람이 직접 들어갈 수 없는 지역에 시공을 초월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모른다. 북한은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아주 제한해 놓은 가운데 선별적으로 교류하므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파를 통한 북한선교의 방법은 가장 손쉬우며,그 효과를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문서선교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북한은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모든 인쇄물에 대해선 철저히 감시와 통제를 하므로 이 방법은 보편적이지는 못하다. 현재 모 선교회에는 매우 특수한 수단을 통해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3개의 기독교 방송국이 있어 심야 시간대를 통해 대북 선교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이 복음전파가 미치는 범위는 북한전역과 연해주와 중국,몽고,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까지 이르고 있다. 필자는 북한과 저 경하고 있는 여러 지역에서 그 수신상태를 확인한바가 있는데, 새벽 2시에 방송되는 아시아방송은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이로인해 중국의 여러 곳에 흩어사는 중국교포들은 이 방송을 매일 청취하고 있으며 이 방송을 통해 성경을 배우며 위로를 받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도하며 가르치기도 하는 것을 확인한 바있다. 이러한 현상이 중국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중국과 같이 마음놓고 라디오를 듣지는 못하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누구로부터 배울 수 없는 성경을 듣고 있으며,배우고 있고, 이 방송을 통해 저들의 신앙이 유지되며 자라고 있다. 이로 인해 지하조직이 혀엉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귀순한 어느 신앙인의 얘기에 의하면 라디오를 한대놓고 몇몇 사람들이 모이는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는 것이며,어느 경우에는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불치의 병이 치유되는 일도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중국의 처소교회에서도 있는 일이기도 하다. 북한의 지역에서는 라디오 한대가 한 교회와 교역자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의 분단된 가운데 공간적으로나 민족간에는 단절된 상태에 있으나 이 복음이 실린 전파는 평화의 메신저가 되고 있으며, 단절의 공동체를 이어주는 화목의 매개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하겠다. 우리가 저들을 향해 보내고 있는방송은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이남의 성도들의 사랑과 관심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줌으로 남북 성도간에 일체감과 유대성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강해설교는 성경을 배울 수 없는 그들에게는 매우 값진 기회로서 한 사람이 배움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진하며 가르칠 수 있게 하는 제자양육의 기능도 하며,성경학교의 기능도 발휘하고 있다. 가르치는 자가 없을 때 성경을 잘못 해석하므로 인한 폐단은 매우 큰것이다. 뿐만아니라 자생 이단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북한의 성도들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것이며,앞으로 통일 이후의 북녘의 복음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방송을 통한 선교는 북한의 성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목자로서의 길잡이를 하고 있다. VI. 북한선교의 시나리오 현재 북한은 어느 나라보다도 폐쇄적이며 예측이 어려울 뿐만아니라 접근자체가 차단된 상태에서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선교전략을 세워야 되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가상의 상황을 실정하여 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첫째 시나리오는 북한이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사회전반에 걸쳐 외부와 모든 분야에 걸쳐 변화가 있을 경우 종교분야도 개방이 이루어질 것이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북한의 체제가 정변 등으로 말미암아 큰 혼란이 야기되 흡수통일 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질 경우 한국의 교회들이 어떻게 수습하며 북한의 교회재건을 해야 되는지와 세째의 경우는 지금과 같은 현재의 이상태에서 북한의 교회와 교류를 통한 협력선교의 방법을 논하고자 한다. 1. 제 1시나리오:남북 공존체제 하에서의 선교전략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후 혁명 1세대들이 권력의 서열에서 사라진후 새로운 세대들로 자연스럽게 교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 김정일을 비롯한 신세대들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며 비교적 개방성향이 있는 인물들일 것이다. 김정일을 위시해 이들도 개방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끼겠으나 혁명 일세대들이 모든 분야에 포진되어 있었고 경직된 사회분위기가 이러한 사고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절대권력을 지닌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체제 목적이 남한의 적화통일에 매진되어 있으므로 인해 사회,경제 분야에 개방이라는 깃발을 올릴 수 없는 여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국면에 직면한 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개방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될 긴박한 사오항에 이르게 되었다. 북한은 아직 권력의 시인이 굳히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아직 단정은 내릴 수 업으나 김정일이나 또는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보건대 북한은 미국과 일본을 이용해 경제력과 외교분야에 있어 이 두나라와는 외교관계를 가질 것이며, 이들과의 교류는 곧 개방을 필연적으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북한은 이로인한 정치적,문화적인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안전장치도 강구할 것이다. 우리가 이기서 기대하는 분야는 종교정책에 있어 그 변신의 폭을 얼마나 넓힐 것인가이다. 북한 당국이 적어도 중국과 같은 정도의 정책을 실시한다면 그들은 분명 교회의 삼자정책을 실시하여 외부의 영향이나 간섭을 배제시키려 할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지금보다도 훨씬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북한선교가 매우 진일보될 여지를 갖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의 교회는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북한의 교회가 종교정책에 있어 외부와 교류를 자율적으로 실시하게 될 경우 그들은 북한의 대외창구를 단일화 하여 외부의 교회들이 무분별하게 난입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순한 단체가 북한의 주민들의 민심을 흩트려 논다든지,비윤리적인 이단들의 활동으로 사회가 혼란해 지는 것을 막아야 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일시에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북한을 선교할려고 많은 선교사들과 단체들이 북한진입에 무질서하게 활동한 경우 그 피해를 북한 주민들이 보며 교회 간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과당 경쟁을 할 경우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손상되어 오히려 전도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과 러시아선교에 있어 한국교회가 이 지역을 선교하는 데있어 큰 과오를 범한 점이 물질공세를 통한 선교활동이었다. 북한선교도 이와같은 방법을 쓰는 교회가 있게 된다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흐리지지 않으면 앞으로의 전도활동을 하는데 많은 애로를 적게 될 것이다. 북한의 교회와 남한의 교회가 공존체제 하에서 상대의 실체를 존중하며 그 교회 정책에 호응하므로 협력선교가 가능헤 질 뿐만아니라 남북의 교회가 하나가 되는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한국의 교회는 이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적어도 교파관에는 단일화 된 창구를 만듬이 첫 수순이 되어야 하며, 가장 바람직함은 한국기독교의 모든 교파가 협력체를 형성하여 북한교회 대표와 북한의 교회재건과 복음화를 위해 종합적인 게획을 함께 수립하며 사안에 따라 기능 분담을 모색해야 될 줄 안다. 2. 제2시나리오 :돌발적 붕괴로 인한 흡수통일후의 선교전략 북한은 자신들의 정권 수립이후 대내외적으로 가정곤경에 처해있다. 국내적으로는 권력정립과 피폐해질대로 망신창이가 된 경제의 문제,그 가운데 년간 2백 50만톤 이상 부족한 식량 해결,경제의 마이너스성장으로 인한 산업의 각 분야의 낙후와 이로인한 생산성저하, 노동계층의 생산의욕의 저하,에너지의 부족, 대외무역의 축소와 수지의 악화,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소외.대외경제원조의 단절 등, 이제 그들에게는 우방이 더이상 없느 상태이다. 북한주민들의 민심은 더욱 권력층으로부터 점점 이탈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물리적인 통제의 수단으로는 한계에 이른 위험스위에 처히앴다. 뿐만아니라 북한 전역이 매년 콜레라,디프테리,이질,결핵병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북한은 모든 분야에 사면초과 상태이다. 과연 이러한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그 장래는 퍽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만일 권력과 치안의 공백상태가 일시에 어떻 정변으로 야기된다면 내부에서는 내정형태의 유혈사태까지 갈수도 있으며, 일반 주민들은 안전지대를 찾기위해,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이해 중국의 국경선을 넘는 난민유출 상황과 동해와 서해 또는 휸전선지역으로 대량의 피난민들이 이동될 가능성도 충분히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최악의 상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차원에서 예방과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이땅에 피흘림이 없어야 하며 북녘의 모든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가운데 만반에 준비를 갖추어야한다. 이러한 노력은 정부차원 뿐만아니라 민간차원에서도 관심과 준비가 필요하며, 특히 북한의 선교를 추구하는 한국의 교회는 마땅히 이러한 일에 관심과 책임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만일의 불행한 사태를 수습하는 대응책 보다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 방지책을 세워 이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굶주린 맹수는 민가에 접근하여 사람에게 가축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적당한 먹이사슬을 만들어 주어 자생하도록 하는 것이 불행을 막는 것과 같이 사전 방지책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ㄹ제적으로 매우 혼란하고 위태로웠다. 이때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내에서 보수군부파들이 혁명을 일으켜 과거로 다시 공산국가로 회귀하면 국제사회가 위험한 상태로 가는 것을 사전에 막기위해 이 선진국들은 엄청난 규모의 원조를 실시하였고, 고르비와 옐친의 정권을 계속지지해 준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좋은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대북정책에 참고해야 될 줄 안다. 현재 국내에서는 북한동포들에게 식량과 의약품 등을 보내기 위한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국제 구호단체에서도 북한에 식량 등을 보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교포의 기독교인들이 북한에 병원설립과 교회건립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우 바람직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일에 여러 교회들이 힘을 모으면 더 큰 규모로 이러한 가운데 있는 우리동포들에게 좀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천만의 국내 성도들과 수십만의 해외성도들이 힘을 모은다면 2천3백만의 동포들에게 큰 위로가 되며 힘이 되며 민족간에 형제애와 동포애가 회복될 것이며,선교에 있어서는 터를 닦아 놓는 효과를 볼 것이다. 작금의 북한의 현실은 단순한 우려의 차원이 아닌 최악의 위기상태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북녘엔 1백년만의 대 수해를 당해 자체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으며, 집중폭우로 인해 경작지의 유실로 인한 내년의 식량사정 악화와 산업시설의 파괴와 전염병등의 악재들이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수습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구책으로 어렵고 외부의 도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북한당국도 유엔과 해외공관을 통해 도움을 청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미미할 뿐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일 뿐이다. 저들도 이러한 헌신을 충분힌 알고 있으나 경직된 체제와 남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경우 민심의 동요와 권력층 내에서의 강경파 등의 요인으로 공식적인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여야 하며,정부의 입장과 종교단체에서 도움을 줄 수만은 없는 난처한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이 입장과 종교단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침을 세웠으므로 이때에 한국의 교회들이 이에 적극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사람을 지나치는 사람은 살인방조죄를 짓는 것이다. 굶주림에 신음하는 이웃에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을 참다운 신앙인이 아니다. 지금의 북한의 현실을 볼 때 교회를 세우는 순서는 차선이다. 당장 죽어가는 이 돌발적인 붕괴로 인한 혼란과 비극을 방지함에 있어 한국의 교회들이 참여해야 되며 이일이 곧 북한선교의 길과 다리를 놓느 일인 것이다. 만일 불행하게도 북한이 자체붕괴됐을 경우 한국의 교회는 협의체를 통해 북한의 지역을 구분하여 교파또는 교단별로 담당시켜 나눔의 운동과 전도를 병행시킬때 북한의 선교는 자연스럽게 진전되며 현지인들과 지하교회의 조직체와 마찰이 없이 자연스럽게 협력선교가 될 것이다. 교회당을 세움에 있어서도 현지 기독교인의 의사를 우선하여 이 지역안배와 규모등을 결정해야 될 것이다. 남북교회의 관계는 종속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 나눔과 이해와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며 바탕이 되어야 한다. 3.제3의 시나리오: 현재의 남북간의 체제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선교전략 북한이 조선기독교 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평양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건립하므로 대외적으로는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고,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대외 선전용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북한의 기독교단체의 일부 인사는 국제적인 기독교의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인들과도 접촉한바가 있다. 한국의 일부 기독교 인사들은 저들의 초청을 받아 방북한 바도 있다. 북한선교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그들의 배경이 어떻든간에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이러한 접촉창구를 최대한 활용해야 될줄 안다. 현재로는 남북 쌍방이 여러가지 제약이 많은 가운데 해야하므로 그 결과에 대해 만족은 할 수 없는 현실이며 앞으로 어떻게 남북교회가 교류되며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종교정책에 있어 자율성이 없으며 운신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여러문제가 있기도 하다. 대북접촉시 한국의 교회가 단일화 된 창구가 없이 각 교회나 단체별로 처신하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있어 한국전체의 대표성이 문제가 되며, 전체 한국교회의 힘을 모으기가 어려운 실정이기도 하다.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우리부터가 단이로하된 창구와 지속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 일관성있게 추진해야만 모종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사와 기구의 대표성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일을 하는데 있어 선교기금이 단일화 된 창구가 만들어 질때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분오열된 지금의 교회의 모습으로는 북한선교로 인해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북측은 창구가 하나이나 남축은 다원화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교파와 교단간의 과잉경쟁으로 인해 저들에게 약점을 잡힐 수 있으며, 한국측으로는 물적,인적 낭비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근래에 대북진출을 위한 기업체들이 개별적으로 접촉하므로 인해 야기된 불미스러운 일로 정부 차원에서 여기에 대해 제제를 가하므로 접촉이 일시 중단된 사래를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히가 북한선교를 추진하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범하였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특히 우리는 한국의 실정법을 준수해야 하며,북측은 그들 나름대로의 제약 속에 처신해야 됨으로 서로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접촉을 해야했었다. 먼저 우리는 이점에 있어 선교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현실성이 없는 계획과 접촉은 금해야 된다. 예를 들어 평양에서의 대중집회를 건의 하나거나 남북교이들이 한데 모여 예배를 드리는 행사 등은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인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그들의 체제를 유지해야되는 제일의 과제이며,이러한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실체가 외부에 공개되거나 일반 기독교인들이 자유세계의 사람들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그 영향이 그들에게 미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지난번 평양축전행사도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개최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권의 건재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며 외국관광객을 통한 달러유치를 위한 행사였다. 지금으로서는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앞서 있을지라도 그들의 행보에 맞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열려진 북한교회의 창구는 일부분만 타율에 의해 열려진 것이며, 그 창구는 경우에 따라 언제든지 닫칠 수 있는 것이다. 즉,북한의 권력층이 변하지 않는한 또 그들이 교회에 자치권과 자율성을 부여해 주지 않는한 큰 기대는 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북한의 여러도시에 교회도 세우고 신학교도 세워 줌으로 선교를 하고자 하나 저들로서는 두려운 일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단순하고도 경직된 선교관에서 벗어나 문화적 매개체를 이용한 장기적인 선교전략을 세워야 된다고 본다. 북한의 당국과 주민들이 현재 가장 시급한 필요(Need)가 무엇인가를 착안하여 앞으로 복음화하는데 있어 주변여건 조성을 1단계 전략으로 생각함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병원, 탁아소, 기술학교(언어,컴퓨터,무역실무등)을 세워주며 그곳에 기독교인들이 강사 와 기술진들이 들어가 활동하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현실성이 제일 높다 하겠다. 현재 중국과 아랍권지역의 선교를 위해 이와같은 방법이 실시되고 있으며 그 효과를 부분적으로 보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때 이러한 방법이 훨씬 더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의 과거 서방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문명화와 근대화를 통해 선교하므로 결국 한국교회를 단시일에 크게 부흥시킨것을 우리 교회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에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것은 극히 일부이었으나 미션스쿨과 병원을 통해 그 문화적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워 복음화된 것이 교회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은 분명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할 것이며,이에 따라 저들은 종교분야에 있어서도 변신을 시도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경우, 북한의 교회는 한국의교회와 좀더 가까운 관계를 갖는 가운데 더욱 적극적인 제스처를 보여줄 것이고,이에대해 지혜롭게 대처해 나간다면 선교의 문은 더욱 열려질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변화 추세에 따라 저들에게 순수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저들을 위한 제안을 제시하며,변화를 유도하는 적극성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교회가 북한교회와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하면 북한선교의 주도권이 미국교회로 넘어 갈 수도 있음을 간과안된다. 그 이유로는 북한은 한국보다는 미국을 더 선호하며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또 다른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선교단체들도 북한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빌리그렘힘목사는 북한의 선교에 대해 이미 북측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선교계획을 갖고 있다. 또한 가지 증거는 95년도에 북한의 해외동포위원회 일행들이 미국교회 대표들을 만나서 성서보급 문제와 교회건립 문제를 이미 상의한 바 있다. 아울러 우리는 미국교회와도 근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과 협력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VIII.통일 이후의 북한교회의 선교 역활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 이북에는 2천 6백여 교효ㅚ가 있었으며,특히 평양시는 가장 많은 270교회로 모든 시가운데 가장 많은 교회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한국 최초에 신학교가 세워져 한국교회의 사역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이 나라를 복음화시키며,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등지로 나간 많은 선교사들도 이 학교를 통해 흩어져 나갔다. 이북의 중심 도시였던 평양시는 성령의 역사가 일으켜 한국의 복음화에 새로운 확립과 역사를 일으켰던 발원지이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평양시를 가로지르고 흐르고 있는 대동강은 한국에 최초로 성경이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전해졌으며,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최초의 성지가 된 도시기이도 하였다는 것이다. 평양을 가르쳐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할정도로 거룩한 도성이었다.그러했던 도시가 세게에서 가장 폐쇄된 도시며, 88년까지만 하더라도 교회가 전혀 없고 오직 김일성이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김일성의 이록이 성경을 대신했으며, 자신을 섬기도록하기 위해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앞에 절을 하게했으며,자신을 섬기도록하기 위해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앞에 절을 하게 했으며,그상을 청소할 때는 더운물로 닦아낼 정도로 우상의 상태가 극에 달하였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황무한 땅이었으며, 패역한 도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땅을 아주 버리신 것이 아니고,아주 잊으신 것이 아니고,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분명히 지난 날의 영화로움을 다시 입혀 주실 것이다. 마치 예루살렘도성에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성전이 재건되어 영화로운 도성이 되게 하심과 같이 역사하신 것이다. 북한은 교회사적으로 보나 지정학적 위치를 보나,약 반세기에 걸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체험과 일인 우상화의 뼈아픈 사회적 역사적 체험이 어느 나라의 선교사들 보다 많은 강점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북한지역의 교회들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미선교지를 복음화 시키실 것이다. 1. 지정학적 위치의 장점으로 본 북한교회의 선교 역할 이북지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압록강을 두고 중국과 접경하고 있고,북쪽으로는 중국과 접경하면서 두만강 하구쫓은 러시아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예를 들어 평양을 출발한 기차는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 철교를 지나 심양만 들어서면 만주지역의 가장 중심지인 이곳을 통해 중국의 남장지역과 내지역까지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다. 또 내몽고와 한민지역을 통한 시베리아의 여러 도시로 진출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만강 하구지역에 중국과 러시아와 북한이 서로 접하고 있는 훈춘이라는 국제개발 도시가 한창 건설중에 있다. 이 지역은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출발하는 러시아 횡단열차를 통해 여러 러시아 공화국의 여러 민족을 접할 수 있고 모스크바가 종차인 곳에 이르면 열차를 통한 동유럽으로 얼마든지 육로로 진출할 수 있다. 한반도의 지형이 아시아와 유럽의 큰 땅 덩어리의 제일 끝에 있으므로 해서 통일만 된다면 우리의 경제력과 선교의 역량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지리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 환태평양권 시대를 맞이한 이 지역의 국가들은 한반도를 거점으로한 아시아와 유럽지역으로의 육로운송을 구상하고 있다. 즉,새로운 실크로드의 꿈을 꾸고 있는데 문제는 북한의 육로를 통과해야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으나 북한이 개방을 하거나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이는 마치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닦아 놓고 새상을 장악하므로 사도들이 신변상에 어려움없이 개발된 길을 따라 소아시아와 유럽을 복음화시켜 놓은 것같이 이 시대에 한국의 교회를 통해 복음을 열방을 향해 비추게 하신 것이다. 2. 이념의 체험을 통한 구공산권의 선교역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중 늦게 공산화가 되었었다. 지구상에서 아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는 5개국에 지나지 않으나 그가운데서 가장 변하지 않는 나라로 남아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구공산권 국가들과 중국과,베트남도 이미 개방정책을 쓰므로 하루가 다르게 자본주의화와 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개방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개방이 되거나 민주화 된다면 어느나라보다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개방이 되거나 민주화 된다면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이념 문제에서나 경제사회면에서 빠른 변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북한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으며 국민들의 근면성이 매우 뛰어날 뿐만아니라 노동력이 매우 우수하다. 북한이 체제와 사회경제분야에 걸쳐 개방과 개혁을 실시한다면 한국과 일본 미국등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단시일에 엄청난 경제성장과 사회의 각분야에 발전을 할 것이며, 이에 따라 종교면에서는 남한교회의 영향에 의해 기독교도 폭발적인 추세로 성장할 것이다. 북한은 신앙적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지난날의 뜨거운 영성이 되살아 나리라 확신한다. 북한의 주민들과 기독교인들은 올바른 신앙과 신학만 정립이 되면 평신도로서의 선교사도 많이 배출될 것이고,신학교를 통해 유능한 목사와 선교사들이 양성될 것이다.인류학적으로 볼 때 북방사람들은 남방민족보다 외향적이며 근면하며 적극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선교사를 선발하여 양육한다면 이러한 자질이 충분히 발휘될 것이다. 북한에는 우리가 갖지 못하고 있는 많은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그것은 북한이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소련과 동유럽지역으로 많은 유학생들을 보내 여러 학문분야에 많은 인재를 키워놓았었다. 그들은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에 1천명,체코에 150명 헝가리에 120명 불가리아에 120명 폴란드에 120명,동독에 250명을 보내었고,중국에도 상당수의 학생들을 공부시켰다. 현재는 러시아와 중국에만 유학생들을 공부시키고 있으나 그 수는 알 수 없다. 이 학생들은 각 국에서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였고 그 문화도 어느정도 체험했으므로 우리도 근래에 와서 러시아와 동구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나 언어에 있어 제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미 북한에는 이러한 공산권에서 생활을 했던 많은 인재들이 준비되었고,문제는 저들에게 미션마인드를 주고 훈련하여 파송하는 것인데, 이일이 우리의 몫이라 본다. 다음으로는 북한의 주민들은 사회주의 모순과 병패를 직접 체험했으므로 사회주의자였던 나라들과 아직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 가장 저들을 이해할 수 있고,앞으로 가장 적합한 인적자원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이러한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고 하므로 그러한 나라와의 접근이 우리보다는 쉬울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난날의 이러한 체험과 지식을 이때를 위해 사용하실 것이다. X. 역사에 나타난 한민족의 대륙성과 세계선교 비젼과의 접목 1. 역사로 본 한민족의 대륙진출 - 고구려,신라,백제,발해 우리 나라의 고대사를 살펴보면 한민족은 결코 한반도에서만 세력을 유지했던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는 중국대륙과 북으로는 만주삼성과 연해주지역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 까지 영토를 갖고 있었으며 해상을 통한 중국과 일본에 문화와 행정구역을 두고 다스린 사실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최근들어 발해와 백제의 역사가 새롭게 연구되면서 새로운 평가와 사실을 조명해 주고 있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과거 우리 조상의 외향적 대륙성 기질을 계승하여 세계선교에 적용 발전시킨다면 새로운 세계선교의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반도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는 통일된 한국교회를 통한 세계선교는 이 시대에 우리의 역사적 사명임이 틀림없다 하겠다. 지금 한국은 분단된 상태에서도 경제선진국 대열에서 세계에서 10대 무역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으며, 정치분야에서도 착실한 민주화를 다져 나가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도 이러한 역량을 세계선교회를 위해 장,단기 전략을 세워 준비하여 추진한다면 세계를 향해 복음의 빛을 비추는 택함을 받은 백성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지향하고 있는 이즈음에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선교적 시각을 갖고 조명해 보는 것도 유익한 할 것이다. < 고구려> 고구려의 영토가 처음부터 그렇게 광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조그마한 나라로 출발하여 4세기 무렵부터 영토확장에 나서 미천왕대에 낙랑군에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요동평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세기 초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강대국의 틀을 다지고,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여 선왕의 업적을 공고히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이때 중국은 남북조로 나누어져 있었으며,중국과는 대등한 외교를 펼치고 멀리 몽고고원의 유연이나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는 한편 북방 유목세력과 남중국의 외교관계를 중개할 정도로 독자 인 외교망을 구축하였다. 고구려와 중국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대결하였었다. 그 대표적인 싸움이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이다. 특히 살수대첩에서 백만대군을 잃고 폐한뒤로 이를 만회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국의 당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 방면으로 공격해왔다. 최신 무기를 갖춘 30만 대군으로 60여일간,하루 6-7차례식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으로 중국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게 되었다.특히 안시성의 군민 모두가 힘을 합쳐 당을 물리친 것은 고구려인의 폐기와 외세의 침략에 대한 불굴의 저항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국내성을 천하사방의 중심지로 생각하였다. 즉 고구려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고구려에 신속되거나 신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왕은 천체의 아들이자 천하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당시 이들은 이러한 원대한 천하관이 광개토왕비에 잘 나타나고 있다.이 비문 속에서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의 광활한 대륙정복을 만천하의 백성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조치로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 발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의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 영토안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엔 말갈인,거란인들이 함께 살았으며 698년 고구려출신인 대조영은 당나라군과 일대접전을 벌인가운데 당군을 물리친후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진이라 명하였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 사실이 되고 요하지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어렵게 되자,705년 사신을 보내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이어 713년에는 발해의 고왕 대조영을 정식으로 발해군왕에 봉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조영은 계속하여 세력을 뻗쳐 지금의 할빈지역과 북동쪽의 연해지역 지금의 하바로브스크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남으로는 평양지역까지 차지하여 한반도 크기의 2배에 가까운 큰 나라를 이루었다. 이 발해국은 220년을 존속하였다. < 백제> 백제의 역사가 최근에 와서 재조명되면서 한 때 중국 본토로 진출하여 통치하였다는 사실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사료가 중국의 여러 사서를 통해 뒷받침해주고 있다. 여기에 대한 중국의 관련 기록들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송서"와 "양서"는 중국 남조의 송나라, 양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송서)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진평2군을 점거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양서) 이 두 기록은 종합해 보면 백제가 중국의 진(265-420)나라 때 요서지방(진평군)을 점령하고 통치기관으로 진평군 진평현(백제군)을 두었다는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지금의 산동성지역과 화복지역을 가리킨다. 또 다른 중국의 역사책"자치통감"에는 "앞서 부여는 녹산에 자리잡고 있다고 백제의 공격을 받아 부락이 쇠퇴하였다. 그래서 서쪽으로 연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는기록이 나온다. 부여는 만주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던 부여가 백제의 침략을 받았다면 백제 역시 만주지역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건대,백제가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는 두 기록을 증명해 주고 있다. 백제는 이와같이 북만주와 부여와 중국본토의 대륙까지도 해상을 통해 진출하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쪽의 일본에도 일찌기 문화를 전해주므로 동북아 문화발전에 공헌한바가 있었다. < 신라의 장보고> 한반도의 작음섬인 완도를 근거지로하여 9세기에 당나라와 신라,일본을 잇는 바다길을 장악하여 해상왕국을 건설한 인물이 장보고이다. 그는 산동성반도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고,산동반도에서 양자강 연안에까지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신라인들의 후견인 역활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국제무역을 장악하였다. 당시 당나라 동해안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였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초주의 신라인 거주지역을 신라방이라 하여 신라인 스스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들 중에는 연안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자들과 양주,소주,명주,등지에서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자들,그리고 당과 일본을 오가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보고는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아울러 이들의 지원을 받아 국제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장보고의 무역사절이 회역사,견당매물사 등으로 불린 것은 그의 무역활동이 순수하게 사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간 공식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는 장보고의 활동에 대해 청해진은 상업제국의 중심지였고, 장보고는 틀림없는 무역왕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일개 평민출신으로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서 중국댈ㄱ에 진출하여 국제무역을 하면서 동북아의 해상권을 통치한 외향적인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광개토왕이 동북아대륙을 지배했다면 장보고는 동북아 해상을 지배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21세기를 맞아 세계의 복음화를 꿈꾸는 우리들에게는 이와 같은 인물이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비젼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2.21세기와 한국교회의 사명 한국교회는 1980년대 후반 특히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선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어 바야흐로 선교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상황은 이제 서구 기독교의 시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기독교의 중력이 제3세계로 이전하고 있으며, 제3세계 기독교 가운데서 한국교회는 영적자원,물적자원, 인적자원을 확보한 나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선교는 국력도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과거에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투쟁과 인권시비로 인하여 비민주적인 국가라는 지탄도 받았다. 이것은 선교에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경제성장과 더불어 권위주의적인 유교문화권에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구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국가가 되었다. 일본을 제외한 홍콩,싱가폴,대만,한국 등 소위 아시아의 4용은 경제대국으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사회이다. 이들 나라들은 흔히들 개발독재,혹은 유교적 가부장의 정치문화가 지배하는 나라로 거론된다. 그러나 한국은 금번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완전한 서구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로 부상하고 있다. 현대 세계선교는 이제 서구 선교의 시대에서 서구와 비서구 선교가 협동해야 하거니와 양적으로는 비서구 선교가 날로 증대되고 있다. 현재 세계선교의 3분지 2는 미국교회가 담당하고 있으나, 미국교회도 이제 선교를 점차 축소하여 선교의 주도권을 제3세계 국가의 교회로 이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의 많은 선교신학자들과 선교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21세기에는 세계선교에 많은 책임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현재 세계선교의 서구대 비서구의 비율은 70대 30이지만 2000년도에는 50대 50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과거 개신교 선교역사를 고찰하면 19세기는 영국교회가,20세기는 미국교회가 세계신학과 선교를 주도하였다. 이제 21세기는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주도해야 한다. 물론 교회역사가 짧아 신학과 선교행정,훈련 자료 부족등이 문제가 되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충분한 인적자원과 우수한 인적자질은 충분한 가능성과 잠재력은 지니고 있다. 한국교회 성장에 대해 국내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고 선교 2세기를 맞이하여 모든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 연세대 총장이었던 박대선박사는 그의 "동방의 빛"이란 논설에서 "하나님께서 한국으로 하여금 제2의 선민의 책임을 수행시키기 위해 공산 침략으로부터 보호하시고 한국교회를 성장케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교회성장의 대가라고 불리는 Mcgavran박사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선교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은 실로 건실한 기독교국가로서 전 아시아의 등불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다."라고 강조하였으며 Nelson 박사도 "한국교회는 성장하여 그 영향력을 전 세게에 미치고 있다."라고 극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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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script type="text/javascript">//</xscript> 역사로 본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사명 [출처] 역사로 본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사명 |작성자 해월 정선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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