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스크랩] 한국 개신교의 약사

하나님아들 2018. 7. 13. 21:35

한국 개신교의 약사

 

 

  기독교는 1세기초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동방의 라데스티나에서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이후 3백여년간 끈질기게 박해를 받아 왔던 기독교는 312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325년 니카이아(Nicaea) 종교회의에서 '만민이 믿을 공평한 종교로 선포되고 380년부터 로마제국의 국교 승인까지 받자 교회조직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작된 원시 기독교회는 전교회를 로마, 콘스탄티노플 등 5대교구로 분리하고 로마황제가 교회의 수장이 되어 神政政治를 하게 되었으나 로마제국이 395년에 동서 제국으로 분열되면서 교회 또한 동서로 갈라지고 말았다. 통합 노력을 수차례 걸쳐 시도한 동서교회의 일치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11세기에 이르러 양 교회가 서로 독자적 노선을 취함으로써 기독교는 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로 완전히 나누어져 버렸다.

 

기독교의 신교는 15세기 로마가톨릭협회가 정치, 사회, 문화, 사상 및 신학 등에서 통제력을 잃게 됨으로써 16세기에 이르러 원시 기독교시대의 신약성서의 신앙과 교권 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직접적인 이유로는 면죄부(免罪符), 즉 속죄권의  발행으로 인해 1517년 루터(M. Luther)가 95조의 신앙 고백과 반박문 발표를 통해 종교 개혁에 앞장서 나갈 것을 자청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많은 교회가 가담했는데 이를 프로테스탄트협회(Protestant Churchs)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독일제국의 종교정책에 맞서 불복한 까닭에 악명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이 종교 정책은, 스위스의 즈잉글리(Zwinggli)와 칼빈(J. Calvin)에 의하여 개혁파 교회는 민주주의교회가 형성되고 영국에서는 감독주의를 취하는 감리교(監理敎)와 회중주의 (會衆主義)를 취하는 회중교가 발생하여 각국에 전파되었다.


  이 기독교, 즉 改新敎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816년의 일로서 영국 함장 홀(Basil Hall)에 의해 황해도 백령도와 청도(靑島)에 한문성경이 전해짐으로써 비롯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1832년 동인도회사 소속의 로오트·엘·히스트라는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었던 화란선교사 구츠라프(Gutzlaff)에 의해 전도된 것이 효시였다. 그는 중국 전도의 개척자였으며 최초로 일본성경 요한복음을 번역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충청도 홍천 고대도(古大島)와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40일간에 걸쳐 머물다 돌아갔는데, 어부들의 협조를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65년에 런던선교회 소속 웨일즈인 로버트·토마스(R. J. Thomas) 목사가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와 선교활동 중 순교한 일이 있었다. 이어 1873년에 스코틀랜드인 죠 로스(J, Ross) 선교사와 죤 메킨타이어(J. Macintyre) 선교사가 전도를 위해 李應贊, 徐相崙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에서 신약성서를 한글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한편 루미스 (Loomis) 목사가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의 협조하에 성서를 간행함으로써 선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바뀌어 개방의 물꼬를 틔우자 1882년 한·미수호조약과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이수정은 미국교회에다 선교사의 파견 요청을 했고 1884년에는 한문에 토를 달았다고 하여 붙여진 『현토한한신약성서(縣吐漢韓新約聖書)』의 간행, 이듬해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간행하는 등 활약이 매우 컸다.


  1884년 일본 주재 미 감리교 소속 메클레이(Macliay) 목사가 서울에 와서 고종으로부터 의료, 교육사업의 승낙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1884년에 長老敎의 알렌(H.H.Alen)과 1885년 미국북 장로교의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미국북 監理敎 의 아꿴셀러(H. G. Apenzeller), 스크랜튼(W B. Scranton) 등이 입국하여 소규모 병원을 경영하면서 전도에도 열을 올렸다.


  그후 벙커(D. A. Bunker) 목사가 입국하여 육영 및 의료사업에 일조를 하기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는 서울에 예수교학당과 배재학당을 세워 최초로 현대식 교육의 문을 열었다. 1886년에는 스크랜튼 부인이 우리나라 초유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이어 숭실학당, 연희전문 등 교육기관을 세워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1886년 언더우드 목사가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고 그 이틀 후에는 아펜셀러 목사가 감리교 정동교회를 설립하고 이어 평양을 중심으로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87년에는 호주의 장로교회 소속 데이비스(G. H. Davis) 선교사가, 1888년에는 오링거, 죤스 목사 등 10여명이 대거 입국하여 선교 활동에 더욱 진력해 나갔다.
  또한 1890년에는 영국 성공회의 코오프(J. Corfe) 주교가 내한했으며, 1896년에는 미국 감리교의 캄벨(J. p. Cambell) 부인이, 1904년에는 미국 安息敎會가, 1907년에는 聖潔敎會 등 신교의 여러 교파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이와 더불어 1890년에 미국성공회가 인천과 서울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을 비롯하여 1890년에는 浸禮敎가 강화도에서, 1891년부터 오스트레일리어 장로회가 경상도에서, 1892년부터는 미국 남장로회가 전라도에서 선교 활동에 열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1896년부터는 미국 남감리교가 尹致昊와 합류하여 경기, 강원도에서, 1898년에 들어와서는 캐나다 장로회가 함경도에서, 1904년에는 聖潔敎가 서울과 평안도에서, 1908년부터는 救世軍이 서울에서 기반을 두고 선교 활동과 병행하여 교육, 의료, 사회봉사 분야에서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한편 개신교는 1892년 최초의 전도자 白鴻俊이 기독교가 국가에서 금지되었던 때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성서를 휴대하여 전도한 죄목으로 1894년 만주 봉천 감옥에서 옥사함으로써 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천주교처럼 많은 박해없이 비교적 순조로운 전도를 할 수 있었다. 

  
  이후 1906년에 성서를 번역하여 처음으로 公認聖書를 출판하는 일방, 독립협회의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등 지식인 등이 교인으로 활약했으며 이상재가 YMCA를 창설하여 한국교회의 기틀을 닦았다. 우리나라 초기에 성공회를 제외한 나머지 선교 사업에 가담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장로교, 감리교 양파에 속하였는데, 1893년에 들어서는 미국, 캐나다, 호주의 선교사들이 宣敎公認會를 조직하여 단일 장로교로 출발했다(이후 장로교 공의회로 개칭 ).


  그러다가 1907년 최초의 장로회인 대한예수교 장로회를 창설하면서 모페트(Moffertt)목사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10년에 장로회 신경(信經)을 채택하였다.
  이때 장로회 세례교인은 1만8천61명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감리교회도 1893년 남북감리회 선교사들이 단합하여 조선감리회를 창설하고 1897년부터는 지방회를 조직해 나갔다.

 

 감리회는 전도보다 교육과 의료 사업에 비중을 두는 바람에 세례교인은 장로교보다 적은 5천7백명이었지만 전반적 신교의 교세는 확대 일로로 나갔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그들의 국교인 神道를 식민지 지배의 방책으로 삼아 수용하기를 강요하는 일방 타종교를 탄압해 나갔다. 이른바 1910년 海西敎會 總會事件과 1911년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기독교 지도자 7백여명을 투옥, 감금하면서 숱한 박해를 가함에 따라, 신도수는 크게 줄기도 했다.


  그러던 중 대한 장로회 공정회는 1912년 조선에 수교장로회를 창설하고 이어 부흥회를 만주 산동에서까지 개최함으로써 1천7백여명의 세례교인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인 1919년 3·1만세운동은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항일투쟁을 가열시켜 나간것이다. 기독교 측에서는 초교파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李昇薰, 李甲成이 민족 대표로 참여하고 전국 교회가 이에 호응하였다.

 

이에 일제는 독립운동을 빌미로 경기도 화성의 堤岩里 교회에 30여명의 교인을 가두고 방화 학살한 사건을 자행한 것을 비롯해, 전국에서 2천여 교인을 무참히 학살하고 수많은 교인을 투옥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기독교계는 이러한 만행에 분연히 맞서겠다는 결의로 피해 진상을 해외에 폭로하고 당국에 공식 항의하는 등 정의로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일제는 대륙침략에 앞서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른바 皇民化 정책을 펴게 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1930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교회가 겪은 수난은 극에 달했고 이로 말미암아 200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명의 교인들이 감금당하는가 하면 순교자가 50여명에 이르렀다. 1942년에 들어서 외국 선교사 전원이 추방당하고 1943년에는 성결교회와 안식교회를 폐쇄시켜 버렸다.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 하여 강제로 통합시키는 세기말적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8·15해방이 되면서 조선교단은 즉각 해산되고 교파별로 교회를 재건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다 6·25사변 이후 구미 제국의 기독교 기성종파와 신흥 종파가 자유의 물결을 타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바람에 종파수는 물론 교회수가 하루가 다르게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와 반대로 장로교를 비롯한 기성종파들은 각 교단에서 교인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분파가 계속되었고 기독교계의 신흥종파들도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6·25의 비극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바람에 남한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했다.
  1955년까지 남한교회는 6·25 당시에 비하여 약 2배의 증가율을 보였는데, 1960년대에도 계속 성장하여 1950년과 1969년의 교세를 비교하면 교인은 132만4천825명에서 290만478명으로, 교직자는 2천962명에서 5천673명으로, 교회는 6천391개소에서 1만1천509개소로 증가하였다.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을 통하여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구호 아래 새로운 도덕적 질서와 가치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모색함으로써, 한국 현대사를 올곧게 이끄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60년대 후반부터는 1930년대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주기철 목사가 제창한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이 신학적 관심으로 제기됨으로써 교파간에 대화의 광장이 마련되어 타 종교와의 접촉도 자연히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실로 1966년에는 초동교회에서 신·구교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 예배를 거행하였고 1971년 부활절에는 신·구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신약성서가 성서공회에 의해 출판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가혹한 정치적 현실로 인해 교회가 구속의 현장도 되었지만 예언자적 터전으로서 민중운동이 일어난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1984년 9월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단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발전 교회로 손꼽히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대대적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의 신교는 13교파에서 75교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세는 1989년 현재 교회당 2만9천820개에 교역자수는 5만5천989명이며, 신도수는 1천3십만2천318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펌]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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