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스크랩] 칼빈 신학의 삼위일체론적 구조

하나님아들 2017. 12. 2. 22:20


 

칼빈 신학의 삼위일체론적 구조

 

칼빈은 이렇게 잘 정리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강요'의 뼈대로 삼았다. 물론 더 정확하고 바르게 표현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사역이 이 저작의 구조로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세례 명령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도신경을 그의 신학의 틀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80장으로 구성되었고, 기본 뼈대는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는 3 구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으니, 사도신경에 근거한 엄격한 삼위일체론적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초판(1536)에서부터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로 4분하여 해설하였다. 이것이 3(1543)에서는 4장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고립된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했다. 1559년 판에 칼빈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구조 변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전의 노고를 탓하지 않으나, 작품이 지금 제시된 순서대로 배열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 , 고대교회의 교의인 삼위일체론이 중세의 신학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혁교리 곁에 있는 또 다른 신앙 항목으로 고립되어 있는 한, 종교개혁은 완성될 수 없었다.


이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새로운 교리의 고안일 따름이라는 로마교의 공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론과 기독론이 객관적 교의가 되고, 이신칭의는 주관적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는 위험이 있었다. 바로 이 문제를 칼빈은 이렇게 풀었다: 새로운 고백은 옛 신앙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요 신뢰인 이 믿음이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성부의 말씀인 성자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긴다. 이로써 삼위 교리가 설교에서 구체화된다. 만약 이런 성령론이 개신교회의 발견이라면, 개신교회의 믿음론(신앙론)에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교의가 초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개신교회의 교의라는 이신칭의와 선택론 역시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이를 그는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 해설’(Expositio Symboli)의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단번에 풀어버렸다. 외견상 이는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하나, 사도신경의 뼈대로 삼위 하나님을 그 사역에서 고백하는 형태를 취했고, 이신칭의의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 신앙의 새로운 이해에 해당될 뿐임을 밝히 보였다.

 

이처럼 기독교강요 전면에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른 삼위일체론이 깔려있다. 설교와 주석에 기초한 개혁파의 교회적 신학이 중세의 사변을 뛰어 넘고서 고대 교회의 교의와 악수를 한 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의 구체적 항목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흠 잡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신론을 삼위일체론으로 취급하였고(1), 그렇게 함으로 삼위일체론이 교의학 전체 구조에서 고립되는 구습을 극복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신학자 칼빈

 

칼빈은 서방의 일반적 전통, 즉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의 관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의 문제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바로 성경의 증거를 따라서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성경에 경륜적으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들을 살피면서, 삼위들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수많은 비성경적인 변증을 가하는 전통을 벗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위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성부와 동등이라는 관점에서 증거한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 유일한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종속설적인 흔적이 묻혀있을 수 있다. 그러면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젠틸(Gentile)식으로 성부를 신성의 수여자로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신성의 본질이 아니라 질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I,xiii,26).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와 동시에 성자와 성령도 지칭한다. 그렇지만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원천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전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쓰임을 말한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천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천은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원천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에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을 말한다.”(I,xiii,20) 그러므로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 또는 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I,xiii,19,20,24).

 

그러므로 칼빈은 실재(subsistentia)와 본질(essentia)을 구분한다. 실재는 관계성 속의 존재이고, 본질은 자체로서의 존재이다. 실재는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구별적 관계일 수는 없고, ‘실재로 존재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실재는 유명론적인 칭호이지 않고, 실재한다.

 

이점에서 칼빈이 동방의 전통 중에서 위를 존재 방식으로 보는 입장을 탈피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즉 그는 성부를 신성의 촛점으로 보지만, 성부의 위격을 신성의 통일체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은 성부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재 사상이다.

 

칼빈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는 인간적인 유비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키프리안(Cyprian)이 말한 감독제도의 동등성을 예로 든다. “감독 제도는 하나이며, 개개 감독에 의해 전체적으로 그 각 부분이 유지된다는 말 중의 전체적으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즉 본질은 성부와 성자께 전적이고 전체적으로’(in solidum) 공통적이다(I,xiii,23). 즉 삼위는 비공유적 속성에는 동참하지 않지만, 신성에는 동참한다. 그리고 비공유적인 속성들은 삼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실재하는 상호 관계로 서로 연합시킨다. 공재에 관한 이해가 위를 개별적인 단자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해를 불식시킨다.

 

이런 공재 이해에 근거하여서 성부의 주권(μοναρχια)를 말할 수 있다. 성부가 성부인 것은 성자와 성령과의 실재적인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물론 성부가 하나님이기에 그는 성부일 수 있다. 성부를 신성 수여자로 오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말은 삼위의 공재에 의한 협동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 있다. 신성은 성부, 성자, 성령께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성부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일 뿐이다. 본질은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아주 성경적이며,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교회사에도 찾기 힘든 삼위일체론임을 밝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앙이며 경건이며 이것이 또한 신학이기 때문에,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식을 그는 추구하였다. 성경과 설교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성경에서 당신을 삼위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 의도를 잘 파악하고, 설교 또한 삼위 하나님을 잘 소개하는 설교가 정착되어야 되겠다.

 

 

이상의 삼위일체 교리가 보다 교회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그 설명이 표현되어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승구는 사도신경 강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강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해를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은 신약에서도 명백히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후 6:15-16).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선언 속에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신 분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가장 현저하게 계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에게 하나의 인격(person)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인격이 한 사람, 즉 한 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신성이 세 위격(three persons, three hypostasis)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본질(ousia, essentia)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person)은 셋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독특한 존재를 계시하시자 사람들은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섬겨 왔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그 분과 자신을 그의 독특하신 아들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난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까요?

 

교회가 처음 이 난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잘못된 이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이제 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삼신론적 이단).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명확한 증거, 즉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견해이고 아주 명확한 형태의 삼신론을 교회 안에서 찾기는 좀 힘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에 근접하는 오해로, 성부 하나님만을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성자와 성령은 좀 못한 하나님, 2의 하나님이나, 3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이런 이해도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이단적인 생각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그것은 아리우스(Arius)와 그를 추종하던 이들(Arians)의 생각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영원에서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는 성자가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한 하나님, 선을 선택하여 불변성을 얻고 신성에 이른 존재이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에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7 성령의 지위는 더 격하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따로 계시되, 성부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부차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심과 심지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잘못된 사상도 있습니다. 소위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으로만 보았고, 양태론(modalism)으로 알려진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세 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이고, 그가 성령인데,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의 수난이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성부수난설, patripassianism),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뚜렷이 구별되어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또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들 (예수님의 수세, 변화산 사건 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지니더라도 그런 경향에로 나아가는 모든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듯이 말을 한 일이 있고, 오리겐(Origen)은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여 소위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은 과거의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부에 비해서 성자와 성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인간되심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그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이를 완전히 감취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대의 경향이나, 성령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말을 하는 풍조나 성령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언사와 행동이 위에서 말한 첫번째 오해와 연관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면서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세 양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예를 들어서, 물질의 삼태(三態)에 따라서 물이 수증기, , 얼음으로 될 수 있으나 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든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지위와 관계로 [아버지, 남편, 교사 등] 설명하든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오해와 관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유비되지 않으시는 아주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셔서 그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신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각 위간에는 종속적인 면이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 계시하실 때 아버지, 아들의 용어를 써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계시를 따라서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고, 또 이 용어들이 지시하는 관계성과 성경의 표현에 근거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고(generate),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지시며(is generated),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proceed, spiratio, 15: 26)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해서 신약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인식할 수 있지만, 이 삼위의 관계는 구약에도 있던 것이고 때때로 비록 그림자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사가 있는 계시도 있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있어 온 관계입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때때로 본체론적 삼위일체,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 경륜 가운데서 드러내신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경륜과 계시 가운데서 드러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섬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계속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