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적 전통
- The Apostolic Tradition -
프랭크 비올라
이전에 토마스 F. 토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혁주의의 위대한 교회들은 각기 자신들이 자랑하는 전통들을 개발해 왔습니다. 오늘날 그 전통은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방법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형태와 방향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눈을 감은 자는 단지 그 전통이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고의 규범과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전통의 지배력에 포로가 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우리들 가운데 자유로운 경로를 가지고 있는지와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 묶이거나 갇혀있지는 않은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슬프게도 오늘날의 교회 구조가 실행과 방식으로 자라온 전통들의 화석화(化石化)를 보여주고 있으며, 자기정당화에 있어서 너무나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깨뜨려 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전통
실질적으로 기독교 교회의 모든 부분은 영적 선조들에 의해 전수받은 어떤 역사적 전통의 기초 위에 운영됩니다. 몇몇 교파에서 이들 전통은 자신들을 함께 붙드는 체제를 구성합니다. 전통은 신조, 신앙고백, 강령, 규범 등의 형식으로 교회의 목적을 정의합니다.
이러한 성향에 대응하여, 많은 신(新) 교파들(빈야드 등)은 “전통”이라는 단어를 느끼게 하는 어떠한 것도 혐오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어떠한 진부한 실행이나 의무적인 실행도 멀리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전통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저마다의 전통을 만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 두 가지 경향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곧 그들은 사람들이 만든 굳어진 교회 전통에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해준 신성한 전통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을 언급하는 다음의 구절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들,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너희에게 기억나게 하리라.”(고전 4:16-1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대로 그 규례들을 지키므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 11:2)
“논쟁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이러한 풍습이 없느니라.”(고전 11:16)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심이라.”(고전 14:33)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고, 또 너희가 우리를 본으로 삼은 것 같이 그렇게 걷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 3:17)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라.”(살후 2:15)
“이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하노니, 질서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로부터 떠나라.”(살후 3:6)
“우리를 어떻게 따라야 할지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살후 3:7)
“.....오직 우리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따르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9)
사도적 전통이 아닌 것
사도들의 전통은 사도들이 창안한 규정화되고 성문화된 형식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교회의 실행을 위한 상세한 편람도 아닙니다.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편람을 만들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러한 편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상 교회의 실행을 위한 세부 항목을 상세히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그러한 상세한 설명이 존재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성령님을 대신할 것입니다. 포도주 부대가 포도주를 볼품없게 할 것입니다. 교회는 부지중에 고대 유대주의의 현대판 복사판으로 빠져서 형식의 기계적 고수라는 율법주의적 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 의식(儀式), 전례(典禮)의 규정화된 형식으로 빈틈없이 규정을 지키고 외적으로 따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차가운 형식주의는 단지 사망을 낳을 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 생명을 질식시킬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살아있는 유기체에 의해 생기 넘치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체적인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이브가 나왔듯이, 교회의 근원은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2:21-23과 에베소서 5:23-32를 비교할 것.)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교회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교회가 조직 체계나 테크닉으로 변질되는 것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을 교회 질서 체계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마다 교회는 체제가 되고 주 예수님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교회의 실행은 반드시 살아계신 머리와 생생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만약 몸이 머리와 떨어지면 죽습니다. 달리 말하면, 몸의 생명은 머리에 있습니다. 머리로부터 분리된 몸은 시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나서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실행은 비록 그 양식이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규정된 양식을 형식적으로 고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어떤 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T. 오스틴 스팍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분을 계시하며, 모든 것에서 그분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능으로는 결코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연구, 탐구 또는 이성(理性)으로는 신약성경에서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령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다만 계속해서 성령님에 의해 그분을 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종이 양식(paper pattern)이 아닌 살아있는 양식이요, 질서요, 형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모든 목적과 길의 합(合)인 한 인격입니다........지상의 교회에서 모든 것은 성령님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양식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히 보이도록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우리를 외적인 형식에 기초한 죽은 정통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살아있는 머리로부터 몸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는 항상 규정된 영적 원칙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영적 원칙은 단순히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인 성향입니다. 하나님은 신성한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의 신성한 본성을 나타내는 어떤 성향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성향들이 성경에서 증거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원칙이라고 부릅니다. 사도적 전통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영적 원칙들(또는 신성한 성향들)입니다.
T. 오스틴 스팍스는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충만에 관한 하나님의 길과 법은 유기적 생명의 법입니다.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영적 존재이든, 생명은 신성한 질서 가운데 스스로 유기체를 낳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내부에서 유래함을 의미합니다. 기능, 질서, 열매는 이 내적 생명의 법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원칙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직화된 기독교는 이 질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조직화된 기독교의 모든 기존 체제를 파기하고 유기적 원칙에 전념하였습니다.
어떠한 질서도 세우지 않았으며, 어떠한 직분자나 사역자도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감독과 사역을 위하여 주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은사로 증명하고 임명하는 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일인 사역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감독자를 택하는데 있어서 결코 투표나 선택 제도를 사용하거나 어떤 인도자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역의 어떠한 부분에서도 위원회나 기관이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일들은 주로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유기체와 질서의 위치
교회가 유기체(organism)인 한 교회는 질서를 가집니다. 교회 안에 인도자직이 있는 것같이,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일 때마다, 어떤 질서나 형태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 형태는 자유롭거나 위압적일 수 있습니다. 성경적이거나 비성경적일 수 있습니다. 유익하거나 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는 항상 존재합니다. 이에 관하여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형태를 취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는 생명은 병든 것이며, 죽습니다. 스스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소멸합니다. 사람이든, 영적 존재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시종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는 필연적이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진리에 관한 적절한 예를 주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렬하게 책망하시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들의 랍비적 전통을 비난하시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그들이 외적으로는 단정하지만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비난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외적 형태에 얽매여 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우선권을 바꾸어 놓은 것에 관해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착취와 월권으로 가득 차 있도다....너희가 박하와 아니스와 커민의 십분의 일세는 바치면서도, 율법의 훨씬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 긍휼, 그리고 믿음을 빠뜨렸도다.”
여기서 주님은 이들 종교 지도자들이 내적 순결을 무시하고 외적 단정함 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꾸짖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외적인 문제의 중요성을 낮추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너희가 마땅히 이것도 행했어야 하고, 저것도 행치 않은 채 버려 두어서는 안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3:23). 따라서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를 내적인 영적 실재(유기체)에 두고 계십니다. 그러나 결코 외적인 표현(질서)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질서와 생명 - 형태와 기능 - 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A. W. 토저(Tozer)는 이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통찰력 있게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혀 조직을 가지려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결과는 혼란과 무질서입니다. 이들은 결코 사람을 도울 수 없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생명을 조직(organization)으로 대신합니다. 그리하여 산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죽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규칙과 규정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터무니없게 많은 규칙과 규정을 만듭니다. 그리하여 곧 교회 안에서 자발성이 질식당하고, 생명은 억눌림을 당합니다.”
현대 복음주의가 실패한 곳
많은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이 “명백하게 명령한” 것들만 구속력이 있다는 어리석은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 그 밖의 것들은 무시될 수 있습니다.
동일하게 초대 교회의 실행은 현실성이 없고 시대에 뒤진 낡은 것이지만 “원칙”만은 유의해야 한다는 개념도 문제가 됩니다. 이 개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켜서 영적 원칙들을 위반하는 인간이 고안한 많은 실행들을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직자제도, 일인 목회,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에서 한 사람이 설교하고 나머지는 듣는 방식의 섬김, 교파, 등은 모두 영적 원칙을 거스리는 것들입니다!
규범적인 사도의 명령은 현대교회에 대해 구속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규범적인 사도적 실행도 마찬가지로 구속력이 있습니다. 필자가 의미하는 규범적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 실행입니다. (1) 이 실행들은 모든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제정했습니다. (2) 이 실행들은 문화를 지향하기보다는 생명을 지향합니다. (3) 이 실행들은 숨겨진 영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실행은 단순히 기술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규범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러한 실행들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나타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때마다 이러한 실행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는 사도적 전통에 관한 기술로 넘칩니다. 성령에 의해 영감 받은 이들 서신서는 특정한 적용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영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이야기로 신학적 진리를 가르칩니다. 누가의 서신은 원칙과 실행을 함께 싣고 있습니다.
원칙과 실행은 바울의 서신서 전체에 걸쳐 서로 유기적으로 짜여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17에서 바울은 어떻게 “각처” “각 교회에서” 자기의 길을 가르쳤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교리와 의무 - 믿음과 행위 - 생명과 실행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도적 전통에 포함된 것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교회를 위한 규범적인 실행입니다. “말로나 우리의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라”와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그것들을 행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안내를 받기 위해서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전통과 가르침을 교차시킴
사도적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초세기 교회의 사건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많은 불이 켜진 다락방에서 모임을 가져야만 하며(행 20:8), 인도자들을 임명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야 하며(행 1:26),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야 합니다(행 10:9). 모든 초세기 믿는 이들이 그랬듯이 샌달을 신고 겉옷을 입고 말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적 전통을 지키는 것은 초대 교회의 체험에서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중요한 것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적 전통은 초세기 교회의 특정한 활동을 재현하는 것과 무시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 초세기 교회의 수많은 실행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 실행은 문화적으로 적합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 실행은 어느 정도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관련됩니다. 이들 실행은 성경적 신학에 뿌리를 깊이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실행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실재들을 실제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실행은 하나님의 목적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러셀 립톤(Russel Lipton)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마음을 채우고 내적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실행은 우리로 하여금 교리를 구현하고 교리를 증거로 변화시킵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진 수십 년 동안 실행들이 서서히 발전되어왔던데 반하여, 성경에서 신약의 실행을 최소화하거나 또는 적당히 피하고 우리의 것을 도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그러한 초대교회의 실행과 연관된 새로운 형태를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는 사도들의 교리뿐 아니라 사도들의 실행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도적 전통은 사도적 가르침을 구현합니다. 사도적 전통은 영적 실재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자유롭게 참여하는 교회 모임은 모든 믿는 이의 제사장 직분이라는 잘 세워진 교리에 견고한 기초를 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의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믿음의 공동체의 언약적 관계 위에 세워집니다.
교회의 모임은 교회가 친밀한 공동체라는 사실 위에 세워집니다. 그것은 서로 나누고 세우는데 참여하는 친밀하게 짜여진 확장된 가정입니다. 복수 감독과 의견의 일치에 의한 의사 결정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실제적인 역사에 기초합니다.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는 성직자직분은 영원한 목적을 표현하는 신성한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역교회의 성경적 기초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에 관한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보다 뛰어난 그밖의 초세기의 실행들이 있습니다. 사도적인 일꾼들이 순회하며 교회를 심고, 복음을 선포하고, 긍휼과 공의를 행하고, 새로운 회심자에게 침례를 베풀고, 사도적 일꾼을 훈련하고 지원하는 등이 몇 가지 예입니다.
요약하면, 사도들의 전통의 한 부분인 모든 원칙은 절대적으로 확고한 성경적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적 실행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을 나타냅니다. 교회의 기능과 형태는 성경 안에 있는 찬양을 받을 개념입니다.
교회의 형태는 항상 교회의 기능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형태가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형태가 생명을 보증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생명을 소유할 경우, 몸을 세우게 하는 형태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교회의 구조(권위적 구조를 포함한)는 반드시 ‘생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강(‘생명’)은 강바닥(구조)을 만듭니다. 우리는 강바닥(구조)을 만들어서 강(‘생명’)을 흐르게 할 수 없습니다. 먼저 강을 흐르게 하여, 강바닥을 만들어서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모임 안의 성령의 생명은 스스로 건물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약의 구조는 유연하며(생명으로 움직이며)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마 9:14-17). 교회의 기초 구조는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워지고 있는 건물을 점검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거스리는 건물을 세우시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낳는데 있어서 그분의 주권적인 길을 가지실 때,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경적인 양식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교회는 유기적으로 사도적 전통을 성취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성령님을 따르는 자(영적인 사람)들은 교회 질서에 관한 사도적 전통을 고수할 것입니다(고전 14:37).
슬프게도 사도들의 전통은 오늘날 대부분 무시되어 왔습니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사도적 전통은 인간의 전통이라는 산에 묻혀 왔습니다!
- Frank Viola 著 “Rethinking the Wineskin"에서 발췌 -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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