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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5. 8. 27. 11:36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

2007년 6월 25일 오후 5:12공개조회수 119 0

아카데미 목회자과 1학년 리포트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

Ⅰ. 루터의 이신칭의
1.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원리로서의 칭의
1) 루터에게 있어 칭의는 유일하고 굳건한 바위의 위치(locus)에 있다. 이 교리가 상실된다면 전체 진리에 대한 이해 역시 몰락하게 될 것이다. 즉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원리이다. 가톨릭이 칭의의 교리를 인정하지만, 이는 가톨릭적 다양함의 틀에 덧붙여진 것뿐이다. 그 내면에는 칭의라는 교리 외에 다른 신앙의 정의들도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조건 하에서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2) 기독교적 가르침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칭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관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는 특별한 교리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고와 행위들의 모든 점들을 평가하는 비판적 범주로서, 이것을 근거로 교회가 복음의 교회인지, 이름만의 교회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3) 그러므로 칭의는 복음의 문제에 관한 전형적 집중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전체 성경의 이해를 위한 성경해석의 열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리가 되셨고, 의가 되셨고, 구원이 되셨고, 속죄가 되셨다.(고전 1:30)

2. 역설 - 하나님의 의롭게 되심
1) 루터의 시편 강해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면 인간은 단지 자신의 편에서 의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2) 인간의 믿음은 자신을 거스르는 것이며,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주장하거나 높이거나 의롭다 하지 않고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한다. 이러한 교환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므로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게 되면서 곧바로 나타난다. 이러한 결정으로 인간은 인간의 재판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재판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그는” 그가 가진 유일한 법을 “의롭게 한다”.

3. Nos extra nos
그리스도의 의로움 - iustitia aliena(낯선 의)
1)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공의는 없다. 어떤 경우든 인간에 바탕을 둔 의로움은 인간을 원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루터의 논점은 도덕적으로 변화되는 신앙인의 삶의 변화와 내적으로 어떻게 관련이 되어있느냐는 식의 불합리한 공격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삶의 알파와 오메가이고 계속 그렇다는 놓고 벌이는 끝없는 전쟁이다.
2) 만일 의롭게 되기 위한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간과한다면, 행위의 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다. 어떤 더욱 엄격한 사람들이 “더욱 엄격한” 행위를 실현한다 할지라도, 행위는 여전히 행위일 뿐이다. 인간의 의는 그리스도를 “무익한” 존재로 만든다.
3)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 밖에 있고(Nos extra nos) 우리에겐 낯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로는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믿음 곧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통해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믿음은 그리스도 자신을 붙잡을 수 있다.


4. 죄인인 동시에 의인(peccator et iustus)
1) semper peccator, semper penitens, semper iustus(항상 죄인, 항상 참회자, 항상 의인)의 역설적 표현은, 옛사람은 완전에 이를 수 없고, 오히려 죽어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은 삶의 교정을 요구하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교정은 단지 위선자만 만들어 낼 뿐이기 때문이다. 유일하며 복음적으로 합법적이고 효과적인 교정은 성령의 사역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 실현되는 교정이다. 인간의 상태를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인 실체와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동일한 상태를 복음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본다면 마주치는 실제는 전적으로 의로운 존재이게 된다.
2) 루터의 칭의론의 기초는 기독론이며,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는 표현이 루터 신학이 가지는 엄격한 기독론적 관계의 조명에서만 옳게 이해될 수 있다.
3)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인간은 이미 실질적으로 의롭게 된 자들로, 하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로움에 대한 창조자이자 보증이 되시는 그런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5. 믿어지는 칭의
1) 믿음이라는 것이 일(공로)이고, 이러한 공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칭의를 보장해 주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믿음에서 나오는”이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그것으로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근거가 아니다. 칭의는 믿음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이 특별한 의로움이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숨겨져”있으며, 현재적 시간이 지속되는 한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칭의는 단지 믿어질 수 있을 뿐이다.
2) sola fide라는 표현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문장은 인간이 “믿기 때문에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것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이 말은 그가 믿는 그분을 통하여 라는 뜻이다. 믿음은 기독론적 근거가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3)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믿음이나 윤리적 행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은 아무 가치도 없고, 우리의 밖에서 오는 extra nos의 실재만이 가치가 있으므로 복음은 인간이 믿도록 부름 받고 있는 그분에 관해서만 선포되고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6. 칭의와 행위
1) 인간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고, 이미 의롭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거룩함은 칭의의 결과이다. 칭의는 최종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이것은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이다.
2) 복음은 자신을 향하여 몰두하는 것으로부터 방향을 돌려놓아 생각에서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자신의 행동들을 하나님 사역의 궤적 위에다 놓게 된다. 행위가 없다면 그것은 또한 믿음이 없다는 명확한 표시가 된다. 행위가 없고, 윤리가 없으며, 좀 더 급진적인 것, 총체적 현실 상황과 상관없이 홀로 되어진 행위까지도 포함해서, 이런 것들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다.
3) 윤리는 의의 열매로 행해져야 하지, 의가 윤리의 결과물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의롭게 된 자로서 우리가 거꾸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가 비록 불의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의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러므로 인간은 행동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인간은 믿음으로 율법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4)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가 우리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만든다거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욕적인 주장이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자기의 하나님, 창조자, 생성자라는 것이나 또는 인간이 자신이 만든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모욕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다.

Ⅱ. 칼빈의 이신칭의
1. 동시에 이루어지는 믿음, 칭의, 구원
1) 칼빈의 신학적 출발점은 sola fide라는 칭의에 대한 재발견과 모든 종류의 오해와 반대로부터 이 칭의를 지켜내야 하는 이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복음의 내용들이 가진 총체를, 성숙하고도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시각에서 보고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칼빈주의 교리에서 불변하는 핵심적 요소는 믿음만을 고집하는 것도, 또는 행위나 칭의나 구원의 어떤 것 하나만이 핵심적 요소라고 고집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2)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세운다면, 성령이 그리스도 사건을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그냥 따라오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삶의 지배자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이 된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어떤 선물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3) 구원과 칭의에 관한 교리들은 칼빈이 볼 때,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 실재의 발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의로움과 구원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재이며, 그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 성령께서 인간 안 에 실재하시는 이 새로운 존재는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즉 믿음을 가능하게 하므로, 바로 들음의 그 순간에 칭의 뿐 아니라, 구원까지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조각내어 찢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의와 구원 두 가지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둘을 그 분 안에서 합해서 하나로 받아들인다.

2. Sola Christus
1)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를 소유할 수가 없다. 주 예수는 자기 자신을 주지 않은 채 그의 은혜를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 둘을 함께 나타나도록 하지, 하나만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바는 행위 없이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명제가 사실이라는 것인 동시에, 그러나 이렇게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 곧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가 되시며 또 구원 역시 그 안에 포함되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라는 사실이다.
2) 칼빈은 인간과 그리스도의 연합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현재화의 조건이자 본질로 보고 있다. 기독론에 집중하는 그의 생각은 은혜, 복, 칭의, 구원, 거듭난 같은 복음의 동기들을 그 자체로 개념적 요소들로 추적해 가는 것을 막고 있다. 이러한 동인들이 그리스도와 분리되어진다면 이것들이 가지는 기독교적 의미들은 없어지게 되고, 종교적, 윤리적으로 독자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들만의 의미와 진리를 갖게 되는 경우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을 때뿐이다. 그리스도가 이들의 내용물인 것이다.

2. 하나님 중심의 칭의 - 기독론의 바탕 위에서
1) “의롭게 하는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이는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바 되신 분은 그리스도라는 칼빈주의의 칭의교리에 대한 총체적 요약이다. 바르트는 말한다. “개혁된 신앙고백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뿐 아니라 이러한 칭의를 이루어 내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 칼빈은 인간이 지나치게 인간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신학적이지 못할뿐 아니라, 건강하지도 못한 자의식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신만의 영혼의 복”에 몰두하려는 노력의 경지를 극복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소명은 더 이상 세상의 도식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만들어” 가며 인정되고 깨달아 알게 된 주를 위해 살고 죽은 것을 말한다.
3) 칭의와 관련해서,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없다”고 한다면 칭의교리가 가진 “하나님 중심적 경향”이 칼빈파 신학에서는 단지 전적으로 “기준이 되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이것이 칭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복음주의 신학들이나 분파들에서 또 복음적 신앙고백을 가진 다른 분파들에서는 칼빈파와 똑같은 엄격함으로 발전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P. Althaus)
4) 하나님 중심의 경향은 이 경향이 기독론 방향에 집중되어 있을 때만 복음적으로 합법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교리로서, 인간의 삶의 조건과 기쁨 그리고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지위가 마지막 자리로 밀려나 있어서, 우리 안에서(in novis) 보다는 우리 밖에서(extra nos)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고, 또 우리의 구원보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4. 성령론
1)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근거로 나오는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인간에게서 실제화 된다. 성령은 “화해의 근원자”로, 인간과 하나님을 서로 화해하도록 하는 존재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전체로, 단지 칭의를 낳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실질적 삶을 변화시키는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선물한다.
2) 칭의와 구원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의롭게 하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없고, 반대로 구원받는 자를 의롭게 하지 않는 경우도 없다. 칭의와 구원이 하나라는 이러한 기독론적 근거에 상응하는 것이 그리스도는 그 분의 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성령론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말은 항상 그분의 새롭게 하는 영과 함께 한다는 말이 된다.
3) 칭의에 대한 표현이 “부분적으로는 은혜로, 부분적으로는 행위로”가 아니다. 믿음 앞에 선 인간을 위해서 또 믿음 안에 있는 인간을 통해서 유효한 단 하나의 복음적 표현은 단지 Sola Gratia로, 이는 인간의 삶이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 있을 때를 말한다.
4)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칭의란 기독교적 삶의 첫 접촉점일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외적 표현에서 이 삶을 근거 짓고 규정하는 지속적 근본 동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칭의가 가지는 교리상의 위치는, 또한 칭의의 특징이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에서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칭의는 결코 복음의 내용에서 고립된 요소, 주도적 요소를 도와주는 부가적 요소일 수가 없다.
5) 죄에 사로잡힌 인간이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므로 발생하는 하나 됨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들어오게 되고, 그 안에서 성령은 거듭남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그의 주를 바꾸게 된다. 그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는 죄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그 자리에서 떨려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림을 넘겨받게 된다.
죄가 더 이상 우리 속에 살지 않는다(롬 7:20)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왕좌의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그의 다스림이 붕괴되었다는 말이다(롬 6:12).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더 이상 우리를 종으로 삼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소유한다는 말이 아니라, 다스림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거듭나게 되는 사람이 가지는 상황이다.

5. 칭의의 목적
1) 칭의의 목적은 소위 인간의 구원 또 인간의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선, 하나님의 주권을 알리고 영광스럽게 하며,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의를 세상에 세우기 위해, 또 이를 위한 싸움의 목적으로 세워진 존재로 되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2) 인간이 의롭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 자신에게, 자신의 것으로, 인간적 삶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의 사회에서 드러나 세워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는 자에게 맡겨진 일인 증인으로서 헌신은-이 헌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통일되지 못한 기준을 사용한다거나 일관되지 못하고 상호 연관되지 못한 방식으로 다루어서 자신의 자의적 선택이나 시대 풍조를 따라 행하는 방식으로는 이 헌신을 옳게 할 수가 없다.
3) 칼빈주의 윤리가 다른 역사적 상황들을 통해서 항상 능동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있고, 이 역동성은 칭의와 구원에 대한 단일화 된 이해와 또 칭의와 구원을 공통적으로 기독론과 연결시키고 있는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증명된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원칙상 믿음과 행위를 구별한다거나 이론과 실제를 구별해서는 안 된다.
4) 칼빈주의 관점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양자택일이나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믿음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와 그 분의 의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것이고, 그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리와 교리 역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 이 상 -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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