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깔뱅의 예정론과 인간론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김 은 자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칼빈의 예정론과 인간론을 중심으로-
지도 이 수 영 교수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1998년 12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김 은 자
김 은자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주심
부심
부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년 12월
목 차
Ⅰ. 서 론 1
Ⅱ. 예정론의 역사 2
1.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3
(1)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3
(2) 어거스틴의 은혜론 5
(3) 반 펠라기우스주의 8
2. 루터와 에라스무스 10
(1) 루터의 노예의지론 11
(2)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12
3. 깔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14
(1) 깔뱅의 예정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14
(2) 아르미니우스 주의 17
Ⅲ. 깔뱅의 예정론 20
1.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원한 선택 20
(1)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 20
(2) 예정과 예지 22
2. 이중예정 24
3. 선택과 부르심 27
4. 그리스도안에서의 선택 28
5. 성도의 견인 29
Ⅳ. 깔뱅의 신학적 인간이해 32
1. 피조물로서의 인간 32
(1) 창조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32
(2) 하나님 형상과 인간 창조 33
2. 죄인으로서의 인간 35
(1) 죄와 타락 35
(2) 타락과 본성의 부패 38
(3) 양심과 양심의 타락 41
3.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44
(1) 구원에 참여한 인간 44
(2) 구원과 본성 회복
(구원이 인간본성에 미친 영향-지성, 의지, 양심) 50
1) 영혼의 기능 회복 51
2) 양심의 회복 53
4. 성화 과정 속의 인간 54
(1) 내적 투쟁 ( 영과 육의 갈등) 54
(2) 의인과 성화 56
Ⅴ. 결 론...................................................................................................................62
참 고 문 헌 ................................................................................................66
Ⅰ. 서 론
교리사적인 측면에서 예정론은 언제나 논쟁의 불씨로 등장했는데, 그 주된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이 자유의지, 달리 말하면 죄와 구원의 문제이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갈등요소를 지닌 예정론은 오늘날의 신학사상에 있어서도 논쟁의 주안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깔뱅의 이중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값없이 주신 은혜에 근거한 것임은 성경의 예증들을 통해 알수 있는 바이다. 깔뱅도 예정론의 근거를 성서에서만 찾고자 하였다.
깔뱅의 예정론에 나타나는 구원관에는 그의 신학적인 인간이해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구원 앞에 무력한 존재임을 입증하는데 그는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은혜에 기인하며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을 거쳐 구원의 영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서 비롯됨을 말한다. 또한 깔뱅의 예정론이 시사하는바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다는 신앙의 확신은 신자의 지속적인 인내와 신앙의 성장을 촉구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본 논문은 깔뱅의 예정론과 인간론을 통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에 대한 사상을 조명해 보므로써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존재에 대한 성격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아울러 구원받은 인간이 성화의 삶을 지나며 가져야 할 의지적 책임성을 모색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감속에서 그 은혜에 응답하는 인간의 책임적 의지를 촉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Ⅱ장에서는 먼저 예정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칼뱅의 예정론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검토하였다. 하나님의 주권 적인 영원한 선택을 비롯하여 이중예정, 선택과 부르심, 그리스도안에서의 선택,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Ⅳ장에서는 깔뱅의 신학적 인간이해에 대한 내용이다. 피조물로서의 인간, 죄인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구원받은 인간과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Ⅴ장 결론에서는 요약정리와 함께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기인한 선택과 구원의 역사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책임적인 응답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예정론의 역사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신학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터전이 되어왔다. 동방의 교부들은 이교세력의 운명론적 경향과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에 맞서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주장하며 이성에 대해 낙관적인 경향이 짙었다. 반면 서방의 교부들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동. 서방교회의 차이점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논쟁화 되었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16세기의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17세기의 깔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곧 타락과 구원에 관한 문제의 핵심적 요소인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1.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1)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펠라기우스 신학은 마니교의 도덕적 결정론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다. 마니교는 선과 악의 원리가 영원한 원리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악한 본성은 결코 선해질 수 없으며 반대로 선한 본성도 결코 악해 질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해서 어거스틴도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일이 있다. 마니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펠라기우스도 반대 운동을 전개 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동일한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나, 어거스틴은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를 강하게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따르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했다.1)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과 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인 자유 의지가 부여되어 있는 것을 강조한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선과 악의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 의지의 남용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인간 본성의 연약성에 전가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 자신이 택할 문제이며, 잘못된 선택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의식의 주체인 아담과 하와에게 지워졌다.2)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아담의 자유의지나 그 후손의 자유의지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으며, 이러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본능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3) 따라서 그는 " 나는 말한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수 있다"고 선포한다.4)
펠라기우스는 모든 의를 이룰 수 있는 완전한 능력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구원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도움이라는 의미에서의 모든 "은혜"를 부정한다. 그가 말하는 본래적 은혜(혹은 창조의 은혜), 계시의 은혜, 용서의 은혜는 상대적인 것이다. 즉 펠라기우스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펠라기우스를 대변하여 맞서서 싸웠던 코일레스티우스의 이론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다음 9가지로 요약된다.5)
1.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인간으로 피조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안 짓고에 관계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2.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이며 전 인류를 손상 시키지는 않았다.
3.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
4. 그리스도 이전에도 죄 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5. 최초에 태어난 갓난아이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6. 전 인류는 아담의 타락과 죽음으로 인해 죽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서 부활되지 않는다.
7.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죄 없이도 살 수 있다.
8.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도 영생을 얻는다.
9. 세례를 받은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을 포기하지 않 으면 아무런 공로가 없으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2) 어거스틴의 은혜론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부인하는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갖는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향하도록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였다. 처음 인간 아담은 참된 자유를 누렸고 하나님이나 악을 선택하는 데 자유로왔다. 그러나 아담은 이 의지의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악을 선택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 결과로 아담뿐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왔고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면 타락한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실된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 이후에도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은 모든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은 죄가 있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상벌은 부당한 것이 될 것이다." 6)
심지어 그는 하나님을 탓해서 자기를 변명하려는 죄인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야고보서 1:13-15, 잠언 19:3, 집회서 15:11-17을 통하여 주장하고 있다.7)
이처럼 인간 안에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이 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참으로 선한 삶을 위해 충분하다는 펠라기우스들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인해서 그 자신이 타락되었으며 이러한 자유의지는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다.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왔으나 아담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는 능력의 은혜를 상실했으므로 이제는 다만 죄를 짓는 쪽으로만 자유로왔다. 결국 인간에겐 여전히 자유의지와 여러 선택의 가능성이 주어졌으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자신에게 열려 있는 여러 가능성도 결국 죄를 짓게 할 뿐이었다.
만일 자연인이 행하는 모든 일이 죄악 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죄악의 상태에서 구속받을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자연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은혜와 예정론에서 인간은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런 선행도 행할 수 없다고 보는 데서 출발한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에 굴레 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므로 진정한 의미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인간의 의지는 너무나도 뒤틀려 있기 때문에 오로지 죄를 짓는 데만 자유로울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적 상태에서 구원의 상태로 바뀌기 위해서는 은혜가 인간 안에 역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경건한 선행을 할 수 없다.8)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은혜가 일단 의지에게 주어지면 의지가 은혜를 배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은혜는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서 의지가 선을 향하도록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거스틴은 지금까지 견지해 온 자유의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가 쓴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은혜의 필연성에 관한 주제를 다시 전개시켰고 은혜의 필연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유의지는 옹호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9) 은혜는 의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서 의지를 증진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자극을 주셔서 의지 자체가 아무런 강요에 의하지 않고서도 선을 의지하게 만든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를 거스려서 구원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혼자서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과 더불어서 구원한다.10) 은혜가 의지를 움직이나 이것은 "부드러운 강요"로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일치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준다.11)
은혜는 곧 예정을 말하게 해준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공로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주권 적인 자유와 활동으로 결정하신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지성이나 전능성을 사색함으로써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구원론 적이고 실존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구원은 인간 공로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강조하려는 시도이다.12)
(3) 반 펠라기우스주의
어거스틴의 은혜교리를 그대로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움직임이 420년 경부터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일고 있었다. 431년의 에베소 회의에서 펠라기우스가 정죄를 당했지만, 어거스틴의 은혜론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어거스틴이 주장하던 절대적 예정론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반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겐 심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이 가져온 이러한 폐해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골(갈리아)지방에서 정통적 교회교리에서 벗어나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반대 운동은 크리소스톰의 친구이며 제자인 카시안이 주관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대했다. 특히 레랭의 뱅쌍은 반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새로운 입장에 서서 다시 한 세기 동안 계속되는 논쟁을 주도하였다.
수도사로서 자기들의 실상을 살펴볼 때 인간 심성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별히 정욕적 경향성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원죄관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인간 의지의 예속화, 은혜의 불가항력성, 절대적 예정의 교리에 대하여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교리와 서로 다름을 발견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13)
예정론은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을 피상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고, 전도열을 약화시키며, 숙명론적인 자포자기와 슬픔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 때문에 반론을 불러 일으켰다. 반 펠라기우스주의에 의하면, 예정은 하나님의 예지, 즉 예견된 신앙과 순종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일반적인 것이다.14)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타락 이후의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 의지의 능력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을 반대하는 한편,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관 즉 인간 의지는 완전하여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반대한다.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아담의 죄는 그 후손에게 유전병과 같이 전해진다. 인간 의지가 타락으로 약화되었으므로 스스로를 자유케 할 수는 없으나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인간은 이 의지의 자유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도움을 받아 구원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소유하고 있는 자유 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있다.15)
이와 같이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자유 의지의 완전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편 구원으로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반대한다. 은혜는 인간 의지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기의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카시안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균형 있게 조화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어거스틴의 공로라고 할 수 있는 "은혜만으로"라는 귀한 것을 잃게 되었다.
529년 오렌지회의에서 반 펠라기우스주의가 배격되었으나 어거스틴의 주장이 그대로 수용된 것도 아니다. 펠라기우스와 반 펠라기우스주의로 이어지는 논쟁을 통해 어거스틴의 과격한 주장들이 완화되었다. 오렌지회의를 통해 서방교회의 인간론으로 받아들여진 교리는 인간 의지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결정했다. 한편 멸망으로의 예정교리가 거절되고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도 채택되지 않았다.16)
2. 루터와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함으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드러내는 한편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루터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과 타락을 강조함으로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말하려 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두 사람의 주장 역시 교회의 평화와 인간의 구원을 염두에 둔 선한 것이었으나 인간의 책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인간은 타락 후에도 자기 책임 하에 도덕적 생활을 할만큼 자유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품성의 타락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을 만큼 의지의 자유를 상실했는가에 대한 자유의지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은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 있은 후 약 천 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일어난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논쟁이다.
(1) 루터의 노예의지론
루터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있게 되어 정죄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 타락한 의지를 가지고 출생함으로 죄를 짓고 정죄 받을 일을 행하는 외에 선한 선택을 할수 없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는 자연인의 의지는 사탄이 지배 영역 안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므로 인간의 의지에는 구원을 얻을 능력이 없다.17)
자유의지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 구태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의 소유와 재산에 관해서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또는 구원과 멸망에 관계된 일들에 있어서는 그는 전혀 자유 의지를 갖지 못하며, 사단의 뜻에 대해서 포로이며 노예이며 종이다.18) 우리가 성령의 작용 없이 이 세상의 신 아래 있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딤후2:26), 그의 포로가 되어 그의 의지에 따라 이끌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의지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기꺼이 그리고 원해서 의지의 본성에 따라 행한다. 그러나 만일 "그보다 큰 자"가 들어와 우리를 정복하고 우리를 자기의 전리품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그의 종이 되고 포로가 되어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원하고 행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사실상 둘 사이에 있는 짐승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위에 앉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간다. 시편에서 "나는 당신 앞에 있는 짐승이며 당신과 늘 함께 있습니다"(시73:22-23)라고 한 바와 같이, 만일 사탄이 그 위에 앉으면 그것은 사탄이 원하는 대로 원하고 간다. 그의 의지에는 어떤 기수에게로 달려 갈 것인지 혹은 무엇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능력이 없다.19)
(2)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인문학의 대가이며 종교 개혁 운동의 선구자인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약화시키는 도덕 폐기론이며, 루터의 이 같은 교리적 주장으로 기독교가 보일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생활이 부정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지의 자유를 주장했다.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루터의 주장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 공론이라고 반박하면서, 그는 인간의 의지가 약해졌지만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20) 아담이 불순종하고 타락함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자유 의지는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인간을 향해 선과 악을 그의 의지로 선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신명기30:19-20). 하나님의 명령은 선택과 자유 의지의 선용이 가능함을 전제로 한다(창세기4:6-7). 이러한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여전히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자유 의지와 구원에 관하여 두가지 극단적인 주장을 배격한다. 즉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구원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펠라기우스의 자력 구원설이나 루터가 주장하는 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의 의지란 죄를 짓는 데만 익숙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하는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반대한다. 에라스무스는 1524년 <자유 의지에 관한 설교>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루터의 주장에 반박을 시도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자유 의지를 정의하기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인간 의지의 능력이라고 한다. 21)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지만, 선행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없이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려는 이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22)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일차적 요소인 하나님의 은혜가 이차적 요소인 인간의 의지와 협력적으로 함께 역사 해야 한다는 에라스무스의 신인 협동설은 멜랑히톤의 지지를 받았다.
에라스무스나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구원에 선행 요소로 본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제일 원인으로 보고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구원의 제2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에 응답하고 협력할 수 있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무능력하고 죄의 노예 상태에 있으므로 구원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3. 깔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1) 깔뱅의 예정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자유 의지에 대하여 깔뱅은 어떤 뛰어난 신학자들과 공개적으로 토론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문제를 철저하게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가르침을 따랐다. 깔뱅은 그의 기독교 강요 2권 2,3,4,5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깔뱅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23) 사람이 타락으로 부패했을 때에 그것은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지 마지못해서 또는 강제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의 심정의 가장 간절한 욕구에 의한 것이지 힘의 강제로 인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정욕의 선동으로 한 것이지 외부로부터 강요를 받아서 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자원적 노예상태의 멍에를 멘 것이며, 자유로왔던 의지가 스스로 죄의 종이 된 것이다.24)
깔뱅은 자유 의지를 철저히 부정하며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을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25) 인간 구원에 있어서 깔뱅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주권적 선택과 완전한 인간의 무능력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였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자신들 안에서 어떠한 선택받을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 속에 있다는 구원의 가능성, 또는 부쩌가 말하는 "경건의 씨"를 부인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거룩하리라는 예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깔뱅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 곧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음을 주장한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반드시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의지는 설자리가 없다. 구원의 모든 역사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그의 일방적인 의도로서 이루어진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이 구원받도록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성자는 정한 때에 세상에 오셔서 구속하심으로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 주시고 성령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를 중생 시키고 그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이 모든 구원의 과정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26)
자유 의지와 은혜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그 분 원하는 대로 움직이시며,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측면으로 여겨지는 회개와 믿음도 사실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신자는 은혜와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먼저 의지를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의지를 시정하시고, 주님께로부터 난 선한 의지로 악한 의지를 바꿔 주신다. 은혜가 의지를 앞지른다는 점에 있어서,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그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혜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롤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은혜에 의하지 않고서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다.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혜에 의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27) 따라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깔뱅은 그의 예정에 입각한 구원론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을 확립시켜 주었다. 로마 천주 교회나 인문주의에 의해 고조되어 있던 인간 중심적 사고를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능력이 강조되어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설 것 같던 분위기를 일대 전환시켰다. 그러므로써 그는 구원은 오직 은혜로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신앙을 확고히 세워주었다.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도 크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 예정과 주권 강조는 인간의 의지나 성품이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일방적으로 멸망을 결정하는 전능하신 폭군으로 묘사되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지적과, 하나님께서 죄인의 멸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신다면 멸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게 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효과를 제한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삭감시키는 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2) 아르미니우스 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르미니우스가 베자를 비롯한 엄격한 예정론자 들에게 반기를 들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사실 아르미니우스는 본래 깔뱅주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28) 그는 1589년 인본주의의 전통에 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과 보다 관용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반 깔뱅주의자인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라는 요청을 받고 이 문제를 연구하였다. 쟁점은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정하신 후 그 뜻을 수행시키는 수단으로 타락을 허용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을 예지 허용하신 다음 구원받을 자를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시는가?"의 대립이었다. 연구 결과 아르미니우스는 깔뱅의 예정론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깔뱅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인간의 자유 의지설에 공감을 느끼고 원죄설을 완화시키는 등 인문주의적 경향을 갖게 되었다.29) 그가 죽은 후 그의 지지자들이 1610년 항변이라고 불리우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홀란드 국회에 제출하였다. 아르미니우스 신조라고 불리우는 5개조로 구성된 항의문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면서 칼뱅주의를 공박하였다. 그러나 이 항변 신조는 도르트 선언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깔뱅주의자들은 여기에 대항하는 5개조의 규정을 선포하였다. 이 두가지 5개조항을 비교해보면 깔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명확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30)
1.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라는 깔뱅주의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조건적인 예정을 말한다. 하나님은 예지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믿음을 가질 자들을 선택하시고 불신앙을 가질 자들을 유기하신다.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택자들만 구원하시려는 것이라는 깔뱅주의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된 속죄에 대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보편적 구속을 말한다. 대속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며 만인을 위해 계획되었고, 만인을 위하여 성취되었다. 대속은 어떤 사람의 구원을 현실화시키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그 결과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믿음에 의해서 결정된다.
3. 깔뱅주의가 인간의 전적 무능 혹은 전적 부패를 주장하는 데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능력을 인정한다. 인간은 신앙과 불신앙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진다. 완전 부패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에게 영적으로 선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타고나면서부터 주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정도 자신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며 그의 뜻을 행할 수 있다.31)
4. 깔뱅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이어서 인간이 거절할 수도, 거절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를 거부한다. 신적 행위는 진리를 통해 중재되며 따라서 신체적이고 강제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도덕적이고 설득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5. 깔뱅주의자들은 견인의 교리에 의해서 일단 선택된 사람은 다시 범죄할 수 없고 선택에서 이탈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따르면 믿는 자들도 비참한 죄 가운데 빠질 수 있고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이상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깔뱅주의의 극단적인 부분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을 주장하면서, 구원에 있어서의 소극적 의미에서의 신인협동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32)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느 영역까지 자유로운지에 대한 역사적인 논쟁들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예정론이 지닌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는 신학사에서 지속적으로 심화된 갈등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와 같은 신학적 논쟁들을 전제하면서 깔뱅의 예정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해 보므로써 그 안에 나타난 특히 구원과 관련된 인간 의지의 한계성을 짚어 보고자 한다.
깔뱅의 신학사상에 있어서 그의 예정교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이견이 많으나, 무엇보다도 깔뱅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에 따른 은총을 강조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의 예정교리를 조명해 보자.
Ⅲ. 깔뱅의 예정론
1.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원한 선택
(1)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
먼저 깔뱅은 복음을 설교할 때 모든 이가 동등하게 수용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현상으로 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게되므로써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나옴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이 선택은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하게 주는 게 아닌 선택과 유기라는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조명한다는 것이다.33) 깔뱅은 이어서 바울은 구원을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돌릴 때에라야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뜻이며 그가 빚지신 게 없으므로 보상하시는 것도 없다는 것을 증거 한다고 말한다.34)
이러한 예정교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겸손을 갖게 한다고 말하면서35)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은혜의 선택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변화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정하셨다고 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36)
깔뱅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택을 말하기 위해 이스라엘 공동체와 개인선택을 관련시켜 설명한다. 먼저 여러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신명기 32:8을 들어 말하면서 다른 민족을 버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택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명기7:7-8)
다음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선택에 이어 이스라엘의 개개인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한다. 이는 이삭을 택하고 이스마엘은 버리셨으며, 야곱은 택하고 에서는 유기 하신 것을 들 수 있다."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1:2-3; 로마서9:13) 이러한 개인의 선택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자유로우시므로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증명한다." 37)
깔뱅은 바울이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롬9:27 ; 사10:22-23 참조)을 말하며 많은 이들 중에서 다수가 제외되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를 언급한다. 그리하여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확고한 것은 아니며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한 것은 많은 이들 중에서 일부에게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이는 일종의 상징이었다"38) 라고 하면서 "예정하신 변할 수 없는 그 계획은 본질적으로는 영적 후손들에게만(갈4:28)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39) 라고 한다.
이상에서 본 바 깔뱅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계획에 따른 선택은 그의 값없이 베푸는 자비를 근거로 하였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2) 예정과 예지
예정(predestination)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갖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영원한 결정은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와는 구별하여야 한다고 깔뱅은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장래도 알고 감찰하시는 데 이것은 그의 섭리에 속한 것이며 구원에 관한 작정은 인간의 장래 행위를 미리 보시고 하는 게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0)
깔뱅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행의 공로를 미리 보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지예정을 거부하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5),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하노라"(골1:12)등의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도 이 지상에서 공로를 세우기전에 하나님께 선택되었으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선택의 거울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선택하셨음을 말한다.41) 이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엡1:4-5) 선택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기쁘심이 선택의 근거라 한다.42)
엡1:9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임을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요15:16)라고 하신 것은 선택이 주권적 은혜임을 입증하는 것이다.43)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그들이 나기 전부터 큰자가 어린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여(롬9:11-13참조) 선택이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것임을 말한다.44) 깔뱅은 또한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지만 성부와 함께 선택권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아울러 선택에 대한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을 제시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내게 주신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6:64) 45)
그는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하나님이 임의로 선택하여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의 본질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고 한다.46)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선택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며(엡1:6참조) 이것이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예정 하신것."(엡1:9)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속한다는 것이다.47)
그는 이어서 "외적인 전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오도록 부르심은 받지만 회개와 믿음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초청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에 대해 주장한다. 복음이 모든 이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지만 믿음의 선물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1:12)라고 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심의 보편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요1:13) 이라는 것은 선택의 특수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마13:5이하)에서도 마찬가지로,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초대를 의미하고 씨가 가시덤불 속에나 (마13:7), 돌밭에(마13:5)떨어지는 것, 즉 말씀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선택의 특수성에 해당한다.48)
이처럼 깔뱅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자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니며."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신앙을 얻는 게 아닌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2. 이중예정
깔뱅의 예정론은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함께 포함하기 때문에 이를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으로 말하기도 한다.
깔뱅은 선택만 있고 정죄는 없다는 주장을 반대하면서 선택된 자들에게 예정된 기업을 버림받은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버림받은 자는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도 뽑힐 것이니."(마5:1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다고 한다. 롬9:22-23에 나타난 멸망하도록 되어있는 진노의 그룻들과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는 긍휼의 그릇과의 대조도 마찬가지이다.49)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멸망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폭군의 변덕과도 같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깔뱅은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답한다.50) 아무런 허물도 없고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이신 하나님의 뜻 앞에서, 죽을 인생인 인간은 이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깔뱅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버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51)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표준으로 측량을 못하며, 인간의 지혜로 이해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감추인 뜻이(롬9:19-23; 롬11:33 참조)있다. 5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유를 알고자 하기보다는 순종과 경외로 대하여야 한다 53)고 그는 말한다.
깔뱅은 또한, 하나님이 인간이 죄에 빠지는 것도 예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첫사람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아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 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54)
그는 또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에서 악이 생기게 될 것을 미리 아셨으나 악한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치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자신 의 전능한 선하심의 일부임을 아신 하나님께서 ... 자유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며, 다음에 자신의 은혜의 복과 자신의 공의로운 결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보이시도록 하셨다.55)
그러나 뜻과 허락은 다르다는데 근거하여 멸망은 하나님의 허락이지 뜻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깔뱅은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허락만 있고 뜻하시지 않았는데 사람이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을 것인가를 원하고 확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 하나님의 뜻은 사물의 필연성."이라고 한다. 인간의 멸망도 허락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이었다는 것이다.56)
그렇지만 다른 한편, 멸망이 하나님의 예정에 속하나 그 원인과 기회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강조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 에 넘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자신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 주 님께로부터 받은 순결한 천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의 타락에 의해 모든 후손을 자기와 함께 멸망으로 끌어넣었다.57)
이처럼 인간의 타락도 하나님의 뜻, 그의 주권 속에서 일어나지만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깔뱅은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이 모순처럼 보이는 감추인 신비를 찾으려 해선 안되며, 불가능하고 합당치 않을 일에 대해 무지한 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일을 알고자 하는 지식욕은 정신이상이라고 지적한다.58)
깔뱅은 예정의 목적을 두가지로 말하는 데 그 중 하나는 인간의 교만을 꺽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며,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59) 또 다른 하나는 경건한 삶을 갖게 하는데 있다.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살전4:7),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살전4:4),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고저 하심이니라."(엡2:10). 이처럼 선택의 목적은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친다(엡1:4).
3. 선택과 부르심
깔뱅은 부르심이 선택의 증거라고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8:30). 이렇게 하신 까닭은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60) 또한 이 부르심과 선택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긍휼에 기인한다고 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 부르심, 곧 복음의 선포를 통해 성령은 장차 양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인쳐준다(롬8:15, 엡1:13-14, 고후1:22, 참조). 그러나 복음 선포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하지 못한다고 한다.61) 이는 곧 하나님의 선택된 자는 성령에 의해서 부르심에 효과적으로 응답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깔뱅은 이처럼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성령에 의한 조명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선포하시며(사65:1)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다. 62)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배척하는 자가 있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는 그의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부름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라고 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4:13 참조) 는 말씀은 이에 해당된다.63) 아울러 믿음은 부르심을 통한 성령의 역사이므로, 사람이 선택에 동의하여 하나님의 협력자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성령의 은혜는 인정하면서도 선택을 믿음에 의존시키는 오류는 삼가야 함을 말한다.64)
4. 그리스도안에서의 선택
깔뱅은 선택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비, 인자를 발견하려면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마3:17)고 말하면서 구원과 생명, 영생을 주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임을 언급한다.65)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엡1:4). 이는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택함을 받았으면 우리 선택의 보증이 우리 자신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분리된 하나님 안에서조차도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택을 비추어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말한다.66)
아울러 깔뱅은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친교는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계21:27참조) 확실한 증거가 됨을 말하면서, "우리는 그로 옷 입으며(롬13:14), 그에게까지 자라서(엡4:15), 그가 살아계시므로 우리도 살게 되도록 하신다" 이처럼 "저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5:24)는 말씀들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는 자들은 선택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성도의 견인
깔뱅은 선택은 불변이며 영속적인 구원이 확실함을 주장하면서 그러한 확신을 그리스도께서 주신다고 한다.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믿는 자들을 맡겨 영생을 얻도록 보호하게 하신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구원코자 하시는 모든 사람을 그의 보호 하에 두셨다고 한다.(요6:37, 17:6,12 참조) 6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끝까지 붙드신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22:14),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등의 말씀에서 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과도한 자신감을 갖지 말라고 권고함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자만하지 말라고 한다.(롬11:20참조) 그 까닭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찍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롬11:21-23참조)
그러나 깔뱅은 성도들의 견인을 강하게 주장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깔뱅은 신자들 중에서 중도에 떨어져 나가는 자들을 언급하면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2:19)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도 선택된 자와 같은 부르심의 표징은 있으나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한다. 선택된 자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그리스도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며 자신이 그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그들 중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는 것을 말한다(요3:16, 6:39참조) 68)
이처럼 깔뱅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선택된 자로 보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선택한 자들만이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부름 받아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깔뱅은 부르심에 대해 일반적 부름과 특수한 부름으로 나누고 후자만이 선택의 부름인 것으로 말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를 제시하며 깔뱅은 두가지 부름을 말한다. 즉, 일반적 부름은 외면적인 복음선포를 통해서 모든 이들을 부르시는 것을 말하며, 여기에는 사망과 정죄의 기회가 제시되는 자들도 포함된다. 다음은 특수한 부름으로 이는 개별적인 것이며 대개 신자들에게만 주신다. 이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신자들을 이끄신다. 그러나 간혹 어떤자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비추어 그도 참여하게 하지만 후에 그들의 배신으로 버린 바 되기도 한다.69)
깔뱅은 선택된 자의 견인을 주장하면서 이와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계획도 심판으로 수행하신다고 한다.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말씀을 듣는 능력을 빼앗고, 혹은 말씀선포를 통하여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킨다고 한다.70)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고자 하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씀 을 수수께끼에 싸서 보내심으로써 그들이 아무 유익을 얻지 못 하고 더 심한 우둔에 빠지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71)
그리고 이렇게 버림받은 자들은 그들의 사악함에 책임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결정하셨기 때문임을 강조하면서 그 까닭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한다.72)
이상에서 본 바 깔뱅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이중예정의 근본적인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안에 내재해 있음을 주장한다고 보겠다. 이는 곧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 준다. 이 점에 있어서 깔뱅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하나님의 은총과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그의 사상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깔뱅의 예정론에 나타난 구원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인간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는게 필요하다. 인간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그의 구원관을 또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깔뱅이 구원에 관련하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책임적 의지에 대하여 어떤 신학적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그가 이해하는 신학적인 인간 이해를 살펴보므로써 알아보고자 한다.
Ⅳ. 깔뱅의 신학적 인간이해
1.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창조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깔뱅의 인간론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창조된 본성, 타락한 본성, 그리고 회복된 본성이라는 생각을 가진다.73) 니이젤은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서 그 자체가 우주의 신비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깔뱅이 이해한다고 말하였다.74) 깔뱅은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이라고 말하며 인간을 모든 창조물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인간창조야 말로 다른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것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창조사건 전체에 최종목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고 그러한 인간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깔뱅은 타락 이전의 창조 상태의 인간은 우주의 중심으로서 다른 모든 피조물의 목적으로 지음받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와 행위에 대해서도 피력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소유한 모든 재능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75)
그러므로 깔뱅이 말하는 바 창조에 대한 인간이해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응답적 행위에 있으며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감사함으로 경배치 않으면 아무도 창조 교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하나님 형상과 인간 창조
깔뱅은 피조 세계에 있어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더불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간론의 중요 논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론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타락한 아담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부패하지 않은 인간 본성의 탁월함이라는 것이다.76)
아담이 부여받은 그 순전성(integrity)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올바른 이해력을 소유하였 고 모든 감각이 올바른 질서 속에 배열된 가운데 자신의 감정이 이성의 영역을 넘지 않도록 지켰으며 진심으로 자신의 탁월함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주신 각별한 은총 때문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77)
이어서 깔뱅은 하나님의 형상의 참된 속성은 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 안에서 규정되어야 함을 말한다. 즉 본래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의 빛과 마음의 곧음 그리고 모든 요소들의 완전성에서 나타났다고 추론한다는 것이다.78)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본래 빛나는 정신과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을 통해서 반영된 하나님 형상의 특징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바로 영혼이라고 깔뱅은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비추어 지는 거울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이야말로 그 안에서 충만히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 주는 거울'이라는 것이다.79)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는 방법은 깔뱅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영혼에서 그 탁월함이 방출됨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고 있는 거울'이라는 것이 깔뱅의 주장이다.80) 그러나 영혼 자체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외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이 아니라 영혼의 내면적 선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 가운데 비치기는 하지만 그것의 본래적 자리는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81)
그런데 깔뱅은 형상에 대해서 말할 때 '관계'의 측면을 제시한다. 즉 그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의 의미뿐 아니라 관계의 뜻도 갖고 있다고 이해한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그의 인간 본성을 결정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토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정지된 의미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해서 능동적인 응답에 따른 반응으로 규정한다.82)
이와 같은 사실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그것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거나 감사치 아니한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에 의존하여 선을 지각하고 선택하는 자유를 갖고 있었으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고 창조주와의 관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창조시에 수여된 탁월함을 유지할 수 없고 영혼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도 본래의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타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살펴 보므로써 인간의 본래적 기능중 상실한 것과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지를 규명해 보자.
2.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와 타락
깔뱅은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인간이 창조주에 대한 정상적인 관계를 버리고 그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죄이다"라고 말한다.83) 이 최초의 범죄를 깔뱅은 '원죄'라고 칭하며 그 결과로 인하여 인간 본성 전체에 손상이 파급된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모든 것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아서 한 부분도 죄가 없는 곳이 없고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죄로 여겨지는 것이다."84)
그러므로 원죄의 결과는 "단순한 의로움의 결여뿐만 아니라 악을 행사하는 적극적인 능력과 세력을 미치고 있는 것"85)으로 간주되며 이런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분리는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며 삶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 본성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은 치명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순결 무구한 부분도 인간에게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은 욕정의 과도한 충동과 정신이 맹목 그리고 심정의 무감각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깔뱅은 지적하기를 어거스틴은 '교만'이 모든 악의 원인의 시초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옳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야심에 이끌려 교만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본래의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86) 깔뱅은 어거스틴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이 죄의 원인이라고 확정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좀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자 한다.
깔뱅은 하와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것을 언급하면서 타락의 시작은 불순종에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담이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한 것은 사탄의 궤휼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불신이 타락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 아담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추구 하므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야심과 교만이 생겨났다고 한다.87) 직접 그의 말을 보자.
마침내 불신이 야욕에게 문을 열어주고 야욕은 완고한 불순종의 어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 심을 던져버리고 욕심이 이끄는 대로 그들 자신을 내맡기게 된 것이다. 88)
그러면 아담의 이와 같은 범죄가 그의 후손인 인류에게 끼친 영향은 어떠한 것인지 깔뱅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아담의 범죄는 그 한사람에게만 결과가 국한되지 않고 그 후손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도 죄의 오염과 변질된 상태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으로 주시고자 하셨던 은사들을 아담에게 위탁했으므로 아담이 그것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와 함께 잃어버린 것으로 규정한다.89) 따라서 죄의 유전현상은 생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바울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아담 안에서 보시고자 하였으며 구원과정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인류를 대하시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의 씨가 실제적으로 어떤 물질개념으로서 후손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깔뱅은 이러한 점에서 '죄의 전가'는 하나님의 섭리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같은 원죄는 필연적으로 실제적인 죄를 수반하게 되는데 그것은 타락이 우리를 현실적으로 죄의 노예로 구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90) 이같은 결과에 대해서 깔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후, 이 심판 -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지혜, 미덕, 거룩함, 의, 진리 등 과 같은 것 대신, 악질 전염병, 맹목, 허약, 허영, 불순, 불의 등 의 온 심판 - 을 자기 혼자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전 체까지 이 비참한 불행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91)
이러한 부패현상은 인간의 전사고와 의지 및 행동을 결정할 정도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인간의 본성, 특히 영혼의 구성 요소인 이성과 의지에 끼친 영향은 중대한 것이었다.
(2) 타락과 본성의 부패
깔뱅은 타락의 정도와 부패성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그 영향은 인간 본성의 전 부분에 파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런 손상이 특히 영혼과 관계될 때 그 기능과 능력에 대해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타락 후 영혼의 기능은 죄의 오염으로 마비되고 무능력해졌음을 깔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불멸의 본성이라는 탁월성에 따라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을 이성으로 선택하여 열심히 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이성을 심사숙고하는데 사용하지도 않고 그 마음을 그리로 향하 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물처럼 이성이나 숙고함이 없이 본성의 경향을 따른다.92)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악덕밖에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으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선을 추구하지 못한다. "속박상태에 놓여있는 의지는 심히 왜곡되었기 때문에 악과 불결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며 죄를 향한 필연성 외에는 움직일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93)
종종 어떤 이들은 보통 이상의 도덕적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참다운 선을 수행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본성으로 선을 갈망할 수도, 노력을 통해서 성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94) 그러므로 깔뱅은 "나는 선한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행동은 더욱 악한 것에로 떨어진다."95) 고 단언한다. 따라서 "성령의 충동 없이는 선을 열망할 수도 없는 것이 타락한 인간 본성의 상태"96) 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 완전히 말소된 것으로 단정하지는 않으며 이성과 의지의 잔여부분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 인간이 전도되고 타락한 본성 중에는 아직도 약간의 불꽃이 깜박이고 있어 인간에게 이해력을 제공하는 이성적 본질이 있음을 드러낸다."97) 라고 말한다. 이를 볼 때 깔뱅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그에 따른 본성의 부패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 하나님 형상의 잔여부분을 인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깔뱅은 이 두 가지 영역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 인식의 대상을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을 제시한다.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은사를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98)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두 가지가 있으며 천상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자연상태의 이성은 전혀 식별할 수 없는 맹목이지만, 지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죄로 인하여 영혼의 기능이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찬양할 만한 빛과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천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관한 것은 순결한 지식, 참된 의, 거룩함 및 하늘나라의 비밀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며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인간정신은 무지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면 지상적인 것에 관한 한, 즉 세상정치, 가정생활, 기계기술 및 문화, 과학, 예술 전반에 대해서는 아직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음이 주장되고 있다.99)
깔뱅은 또한 타락한 인간에게서 종교적 성향을 찾아볼 수 있음을 시인하며 이것에 의하여 신을 인식하고 경배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종교적 욕망과 행위(이방인의 우상숭배)가 표출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흔적을 남기고 있어 그것이 '종교의 씨'로서 마음속에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100)
그러나 인간에게 어느 정도 지성과 의지적 기능이 남아 있어 지상적인 것에 관해 능력을 수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구원문제와 관련될 때 그 이성은 완전히 맹목적이라는 것이 깔뱅의 명백한 주장이다. '종교의 씨'가 남아 있어 하나님을 향하는 경향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가장 악한 열매를 맺을 정도로 부패하여 결국 인간정신으로는 우상숭배와 각종 미신의 원천으로 전도될 뿐이다.101) 구원에 관해서 깔뱅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 인격 안에 의의 광선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시 창조되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고 역설한다.
(3) 양심과 양심의 타락
깔뱅은 양심을 "그 안에서 들려주는 자연법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록되고 동시에 새겨져 있는 법"으로 규정한다. 깔뱅은 양심의 기능을 언급하면서 신의 심판을 의식하는 정신적 자각으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책망과 고발의 기능을 말한다.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책임을 신의 섭리에 전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양심이 그 속에서 책망하기 때문이다."102)
양심은 선악을 분간하는 도덕적 인식과 선택의 동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부패된 성품에 아직 남아 있는 빛에 두 가지 주요한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씨가 부식되어 있으며 둘째 그들의 양심 가운데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이 심어져 있다."103) 이에 따르면 양심은 도덕적인 응답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도덕적 반응은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율법)과 만나게 될 때 그 상태와 기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보자. 양심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철저하게 정죄 되어 있으며 파열상태에서 율법의 강압으로 억눌려 신음하는 고통을 면치 못하게 된다.104) 이렇게 율법과 갈등하는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과 대면할 때 그에게만 유일한 피난처가 있음을 인간에게 깨닫게 하고 자신의 모든 선행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게 만들어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105) 결국 양심은 자연인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거자요 감독자로서 '내적 규범' 의 역할을 수행하며 율법과 직면할 때는 그것에 비추어진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케 하는 '인식의 통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인의 양심으로는 본성에 따른 자기 고발의 기능은 수행할 수 있어도 그 자체로는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처지와 문제를 정확히 해석할 수 없으며 또한 도덕적 자각을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할 능력은 결여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죄 아래 있는 인간으로서는 양심의 가책과 도덕적 인식으로 말미암아 더욱 암흑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정죄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양심의 평안과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깔뱅은 자연법에 대해서 "정의와 불의를 충분히 구별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무지로 인하여 자신의 악행을 핑계치 못하게 하는 양심적 이해라고 정의한다.106) 그는 양심과 자연법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양심이 본성적으로 마음속에 각인 되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곧 '내면적 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한다.107) 그래서 양심은 곧 자연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깔뱅이 자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그것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상태, 즉 타락전과 반대의 개념을 갖는다. 즉 자연적 이성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 은사는 중생으로 주어진 상태와는 전적으로 상반된 죄에 예속되어 있는 실체로 규정하고 있다.108) 따라서 깔뱅은 자연을 부패된 자연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자연'상태는 타락 이전의 창조된 선한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었지만, 부패 후에는 인간의 죄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깔뱅은 양심 그 자체로는 선악을 판별하는 데 있어서도 온전치 못하며 더욱이 그것의 추구는 자연인으로서 불가능하다고 한다. 자연법은 다만 행위의 올바른 기준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가르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109) 실정법에 관해서는 자연법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현행하는 어떤 법이나 제도일지라도, 심지어 교회법 조차도 양심의 고유한 영역이나 권위를 침해하거나 찬탈할 수 없다고 깔뱅은 말한다.110)
결론적으로 양심이나 자연법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각기 다른 존재양태로서, 타락후에 세계 속에 하나님의 창조의지와 질서를 계속적으로 깨닫게 함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규범의 일반적인 근거로 봉사하는 것이다. 양심이 인간 속에서 주관적으로 깨닫게 되는 내적규범이라면, 자연법은 인간 밖에서 보편적으로 주어진 규범이라고 할 수 잇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인간의 상태를 변화시키기에 무력하며 다만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기 고발적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의 양심으로는 혹은 자연법의 지각으로는 더욱 절망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복음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바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소외되어 있고 정죄 당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 본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처럼 정죄된 인간이 구원의 과정에서 어떻게 회복되며 그 결과로 주어지는 본성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3.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 아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경배할 수도 없으며 자력이나 본성으로 그에게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즉 신 자신이 오셔서 인간을 파멸과 전락한 상태로부터 끌어올리기까지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정죄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깔뱅은 이런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신적 위엄이 친히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진정 으로 절망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 리를 위하여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심이 될 필요가 있었 던 것이다.111)
이와 같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구원에 참여한 인간
깔뱅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으로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사역을 말하면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함께 중요한 문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 사역이 아무리 귀중한 것이어도 그 사실이 우리에게 적용되기까지는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깔뱅은 말하기를 주께서 타락한 죄인을 위하여 구원을 완성하셨다면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우리를 참여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밖에 있고 그로부터 떠나 있는 한 그가 아무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나 가치가 없는 것이다.112)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는 그가 친히 우리에게 오셔야 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지 않는 한 그의 소유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물론 신앙으로 인해 실현되지만, 사실은 성령의 비밀한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성령의 역사에 의해 향유하며 그런 점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끈' 이라고 이해하고 있다.113)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막연하게 인간 안에서 발생하거나 혹은 어떤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씀'을 매개로 하여 구속의 은총의 효과를 전달한다. 깔뱅은 바로 여기에서 '신앙'이 산출된다고 간파하고 그것은 곧 성령을 말씀을 조명할 때 발생된다고 한다. 이러한 신앙의 발생과정에 대하여 신앙은 곧 '하나님의 이중적 은혜'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앙을 산출하는 성령의 사역을 두 가지 면에서 지적하고 있는데 '이성을 조명'하는 것과 '마음을 강화'시켜 확증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정신은 매우 허망한 곳으로 기울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포착할 수 없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진리에 대해서 둔 감하고 맹목적이다. 따라서 성령이 비추어질 때까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성을 훨씬 능 가하는 것이다.114)
말씀은 깔뱅에게 있어서 신앙을 발생하고 유지시키는 첫 번째 기초가 된다. 신앙의 시작은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인쳐 주실 때까지는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그 순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 이성은 신앙이 발생되는 데 전혀 공헌할 수 없다고 깔뱅은 단언한다.115) 왜냐하면 신적인 것에 대해서나 영적 이해에 관해서 우리는 모든 기능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깔뱅은 신앙의 발생과정에서 두 가지 요인이 필연적으로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성경말씀을 통하지 않은 성령의 단독적인 사역만으로도 또한 성령의 역사를 배제한 성령의 지식만으로도 산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성령에 의해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발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116)
여기에서 '성령의 활동'과 성경말씀의 사용관계에 대해서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관계는 깔뱅의 성령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말씀과 성령의 인식론적 관계'에 대한 규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깔뱅에게 있어서 성령과 말씀은 확실히 상호적인 관계로 되어 있다. 즉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성령을 말씀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성령이 사람 안에서 신앙을 창조하며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그 믿음을 열게 하는 사역을 하기 전에는 아무 효력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외형적 말씀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고무되기까지는 홀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이같이 인간의 마음에 접촉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행위는 성령의 인도에 근거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 무용한 것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성령의 증거도 말씀 안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인간 심령에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말씀을 매개로 해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깔뱅의 주장인데 그것은 성령의 증거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기록된 계시를 초월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확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새롭고 듣지 못했던 계시를 조작하는 것이나 복음에서 말하는 교리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하는 똑같은 교리(혹은 계시)를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인증해 주는 것이다.117)
그러므로 이 두 가지 - 말씀과 성령- 는 깔뱅과 그의 추종자들이 애용하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상용구로서 사용될 정도로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곧 말씀과 성령은 공동협력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신지식을 획득하게 한다. 말씀은 인간에게 그들이 믿어야 할 대상을 설정해 주는 역할을 하며 성령은 인간 속에서 이 대상(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 준다. 이것은 각기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마음속에서 연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에게 외부적으로 주어진 객관적 계시라면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주관적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의 객관적 계시나 성령의 주관적 계시의 연합작용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고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객관적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제시되고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마음속에서 증거 함으로 확신시켜 주고 있다.118) 그러므로 성령이 마음을 확증시켜 주지 않는 한 이성의 조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양심의 확신을 가지고 파악되지 않는 한 그것은 견고하지 않다고 역설하고 있다.119) 성경 말씀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성령의 내적 설득 위에 세워질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줄 수 있으며, 만일 성령의 내적 설득에서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증명하는 일은 무익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신앙은 성령의 조명으로 비추어진 말씀을 통해서 이해한 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다.120) 깔뱅은 신앙의 지식은 이해보다는 확신 속에 있는 것이 명백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시켜주는 끈'이며 또한 '하늘 나라의 보고를 열어주는 열쇠이며 그의 조명은 우리 정신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신앙의 현상에 비추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성령의 역사가 회개현상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깔뱅은 말씀과 부딪친 인간은 처음에 율법의 저주를 경험한 후 곧 이어서 복음에로 인도되어 은혜를 깨닫고 그 말씀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에서 회개가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이는 확신과 그 결과는 신뢰로 이것은 신앙이 회개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나는 바로 신앙의 결과로서 따라오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회개는 신앙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설 교를 통해서 사죄가 제공될 때 죄인이 사탄의 권세, 죄의 멍에 및 악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로 옮겨간다. 그래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고는 과거의 죄악 된 삶으로부터 올바른 삶으로 이전될 수 없으며 회개를 실천하 는 일에 노력을 전적으로 기울일 수 없다.121)
회개란 우리 자신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것이다.122) 깔뱅은 우리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전향한다는 점에서 회개는 하나님을 순결하고 진심으로 경외할 때 일어난다고 명기하고 있다. 또한 회개는 외적 변형뿐 아니라 영혼 자체내의 변형을 암시하고 있다. 123) 즉 회심하는 것은 새로운 영과 새로운 마음의 창조를 의미하며 우리의 개심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연유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24) 회개는 또한 필히 중생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기형이 되고 거의 말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다시 회복시켜 주는 출처가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죄인에게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발생되는가를 조명해 보았다. 신앙은 말씀과 성령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이 양자관계는 깔뱅의 구원사상에서 '은혜의 수단'으로 이해되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어떻게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매개로 한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와 우리를 맺어주는 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성령은 이중적 기능 - 즉 이성을 조명하고 마음의 확증을 주는 - 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죄를 미워하고 그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회개가 발생하고 그것은 동일한 의미이지만 필히 중생으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는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진 구원이 회심한 인간 본성에 미친 영향과 그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2) 구원과 본성 회복
(구원이 인간본성에 미친 영향 - 지성, 의지, 양심)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발생되어진 대표적 현상은 하나님 형상의 상실로 귀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가 하나님 형상의 상실과 본성의 부패라면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역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깔뱅은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거나 중생 하여 새롭게 된 영혼의 부분을 성서적 표현을 영이라고 표현한다. 즉, 하나님 형상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은 인간 속의 무엇이든지 영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을 좇아 새로워진 '속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시작되며 그것은 몸과 영혼이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단언할 수 있다.125) 타락으로 인한 부패가 인간의 전 존재를 오염시킴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서의 회복 또한 인간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언급하고자 할 때 그것은 전체를 내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새로운 질서는 인간본성의 각 부분만이 아니라 상호간의 조화로운 협력(특히 이성과 의지)을 가져온다. 즉 인간의 영혼이 여러 부분들의 기능들이 상응하도록 조절되어 진다. 정신에서는 지성이 활기를 띠고 건실하여 그것의 동반자로 참여하며 모든 감각들은 이성의 지시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를 한다. 몸 안에서 이러한 내적 질서의 상호 일치가 생기는데 이것은 곧 창조 시에 인간이 가졌던 본래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영혼의 기능, 즉 지성과 의지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자.
1) 영혼의 기능 회복
깔뱅은 '인간의 지성은 스스로는 맹목적인 것이며 마음은 그들의 소명을 알 정도로 충분한 지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126) 따라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지상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패 투성이며 또한 부분적으로 선을 인식하며, 선을 추구하는 열망이 있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깔뱅은 그러한 지성의 맹목과 의지의 왜곡 내지는 변질된 상태에서 구원받은 자의 영혼 회복의 첫 단계는 이해력의 기능이 회복되는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지성의 기능회복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면서 깔뱅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눈먼 자의 눈을 보게 하신다고 하며 하늘의 교훈은 성령께서 그것을 깨닫도록 우리의 지성을 형성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무익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마음을 비춰주어야 맹목적이었던 인간의 지각력이 회복되어 분별력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성령의 빛을 받으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맛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성은 그 기능이 본성 자체로는 무능력하며 (특히 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오직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관계가 회복되며 지상에 속한 것에 대해서도 올바른 통찰력을 얻게 되기 때문에 특히 도덕적 혹은 윤리적 규범의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대단한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다.127) 다른 한편 의지의 회복에 대하여 깔뱅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의지가 회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부패와 타락이 교 정되어서 이제는 의의 참 규범을 향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의지가 인간 속에 창조되었음은 본래 의지가 아 주 새로운 성품을 그 속에 입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악하고 더러 워 졌기 때문이다.128)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임하면 타락한 본성의 악한 의지를 폐지하고 선한 의지로 대치시켜 준다. 의지의 갱신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선행에 있어서 자기의 주도적인 의지로 실현하려는 것은 부당하다.129)
깔뱅은 부패된 인간본성이 회복되는 과정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먼저 마음속에 정의로움에 대한 사랑, 갈망, 정열을 야기 시킴으로 시작하여 인내로 완성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어느 정도 선을 지향할 가능성을 은혜로 보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전적으로 별개의 것으로 새로워지지 않는 한 그 속에 선한 것이란 하나도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깔뱅은 '의지의 전적인 전향'이라고 말한다.130) 또한 선을 행하는 뜻과 그것을 수행할 능력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도 하시고 완성도 하신다고 말한다.131)
이상에서 본 바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지성은 새롭게 조명되고 의지는 전환되어 하늘의 것을 수용하는 신앙이 형성되며 선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 그 자체적 힘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말씀을 매개로 한 성령과의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만 계속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양심의 회복
양심은 그 자체만으로는 올바로 내적 기준- 법-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양심의 화평은 신앙의 열매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 평정을 갖도록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양심은 필연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가책으로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132)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평정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도저히 율법으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공포를 견딜 수가 없는데, 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신득의'의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 한 양심의 평강 이나 안정된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동시에 그는 양심의 평강의 출처를 성령의 확증이라고 말한다.133) 그러므로 양심은 복음을 통해서 용서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갖도록 해야 하며134) 이런 후에는 어떤 인간적 사슬로도 양심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멍에를 메우지 말아야 한다고 깔뱅은 말한다.135) 결국 양심의 회복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될 신자들이 율법의 죄책과 고통으로부터 복음과 성령의 확증을 통해서 평강을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획득함으로 본래적 기능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의식하며 의를 추구하며 살도록 그리스도인의 삶을 감독하는 것이다.
4. 성화 과정 속의 인간
(1) 내적 투쟁 ( 영과 육의 갈등)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중생' '양자' '의인' '새 피조물'등 다양한 개념적 용어로 기술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에 용납된 자들은 신앙을 통해서 기독교적 자유(죄로부터 해방)가 확보된다. 이 자유는 복음 적인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다른 한편 성화를 수반하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136) 이러한 회개와 성화는 믿는 자의 생애를 통해서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는데 이러한 성화의 측면에서 인간본성을 고찰할 때 우리는 영과 육이 한 인격 속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투쟁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성화는 이와 같은 투쟁을 근거로 해서만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은총으로 새롭게 된 신자일지라도 그들은 수없이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세례 받은 후에도 아직 죄의 흔적인 충동과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실패는 육체의 욕망이 영의 활동에 실제적으로 제동을 거는 곳에서 발생한다. 바울에 의하면 신자들은 선을 행하고자 힘쓰는 자신 안에서 그런 행위에 반대하는 또 다른 성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악한 성향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과 육에 관한 깔뱅의 견해를 보면 영이란 중생한 성도에게 형성된 새로운 성품으로서 성령으로 정결케 되며 부패한 본성을 새롭게 개조하여 신의 형상이 그 속에서 빛나는 영혼의 상태를 의미하며 주의 율법에 기쁨으로 순종하려는 성질을 가진 반면에 육은 인간의 선천적인 성품으로서 저급하고 세속적이어서 중생한 성도라 해도 '그 안에 타다 남은 죄의 부스러기로 말미암아 악한 충동을 일으키며'137)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며 율법을 반대하는 옛사람의 본성'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적 갈등과 투쟁에 대한 해결책은 육이 우리 안에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중생한 성도일지라도 자기의 자유의지로서는 악을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서만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영과 육의 싸움은 종국에는 영의 승리로 돌아간다고 깔뱅은 말한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 정욕을 유발하는 악한 충동과 죄의 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성도에게서는 이미 그 주도권을 상실 당했으며 천국에서는 완전히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138) 결국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세속적 욕망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생함이 교차하는 성화과정에서 지속적인 노력과 자기부정을 통해서 점진적인 완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
(2) 의인과 성화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뜻을 갖는다. 즉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 것과 우리는 그의 영을 통해서 살 때 그에 의하여 통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139)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로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존재, 즉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며, 그의 영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실제 생활의 변화, 즉 성화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깔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죄의 용서와 성화 혹은 의인과 중생을 동일한 의미로 취급한다.140) 그에게 있어서 성화와 의인은 신앙의 이중열매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과 성화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강한 연결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칭의가 순수하다면 그것이 외적으로 효력 있는 성화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깔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것은 어떻게 된다는 말 인가?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화해시킬 수 있는 유 일한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성화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것에 의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의로움과 지혜와 성화와 그리고 구원으로써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지혜 로 계몽시킨 자를 구원하며 구원한 자를 의롭다하며 의로운 자 를 성화 시킨다.141)
그러나 한편 의인과 성화를 그것이 갖고 있는 특성으로 보아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화는 칭의에 근거한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변화이다. 칭의가 인간에게 덧입혀 지는 순간 그에게는 성화의 삶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깔뱅에 의하면 '의인'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로 간주되고 그 의 때문에 용납된 자임을 의미한다.142)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신앙이 시작되는 순간 발생하며 회개보다 선행하여 회개를 일으킨다.
주를 믿음으로 의로와 진다는 말은 인간이 성취한 어떤 의를 조 건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포착하고 이 의를 옷 입음으로 하나님 존전 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처럼 나타나는 것이다.143)
이 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을 은혜로서 용납하시고 그 죄를 용서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인은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144) 다시 말해서 의인은 우리의 선행을 조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앙이 인간에 의해 적극적으로 행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칭의에 전혀 수동적이며 전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로서,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이며 어떤 인간적 능력이나 업적 등과는 무관하게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그만큼 우리 자신의 무죄함을 확증하실 뿐 아니라 의의 전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 그 결과로 자신들로서는 의롭지 않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다.145)
깔뱅은 신자들의 의는 신앙적 의로서 성도일지라도 여전히 그 의는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146) 선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지 그것이 의인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147)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만한 그것을 촉구할 만한 것이라곤 전혀 없으며, 그가 먼저 값없는 사랑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148)
이제는 '성화'의 삶에 관하여 살펴보자. 깔뱅에게 있어서 성화와 칭의는 비록 구별이 되었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칭의는 실제로 의로움의 원인인 반면에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위해서 행하는 계속적인 투쟁과정으로 이해한다.
타락한 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은 신자는 그의 실제 생활 속에서 필연적으로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 다음 실제적으로 의로워져야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질적인 변화를 계속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한 칭의가 이루어진 후에도 신자들의 삶은 어차피 죄와 무관하게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자들도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에 싸여 있는 한 어차피 죄인이며 아직도 많은 사악한 것이 존재하여 중생한 신자들을 범죄 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 데 회개와 영 육간의 내면적인 투쟁을 통해서 실현 해가는 성화를 깔뱅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과 외적 삶이 보다 더욱 순종하게 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은 어느 한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미미한 진보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육 적 부패를 씻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전 생애를 통하여 죄와 싸우며 성결하게 되어야 하는데 회개하는 경주과정을 지정하여 일생토록 수련케 하시는 것이다.149)
이와 같은 성화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는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개혁의 작업인 것이다. 이것은 곧 성령이 인간을 계속적으로 다시 만드는 것으로서 궁극적 목적은 거룩함으로 이끄는 점차적 과정을 내포하는 작업이다.150)
요셉 리챠드는 깔뱅의 의인과 성화의 교리를 말하면서 영적 생활 안에서의 성령의 역동적인 작용을 새롭게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하늘의 그리스도와 그와 결합한 모든 자 사이에의 친화력이며 그리스도와 인간사이에 있는 살아있는 결합력"151) 으로 이해한다.
성령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그와 영혼과 몸과 영이 하나가 되게 하는 축복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이 연결의 친화력은 그와 우리 를 결합시키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통로이다.152)
이렇게 볼 때 성령은 단순히 유지하는 힘이 아니다. 충만하며 성화된 삶에 필수적인 사물들의 근원 바로 그것이라고 요셉 리챠드는 말한다. 또한 깔뱅 에게 있어서 성화의 과정을 걷는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와 그 영향 아래에서 존재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신자는 비록 그 가르침과 훈련이 우리의 부패된 본성과는 소원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의해 규율이 준수되며 말씀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하는 영 안에서 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깔뱅은 여기에서 율법의 제3의 사용을 제시한다.
율법의 첫째 용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 자신의 불의함을 책망하고 정죄함으로 비참함을 인식하여 절망으로 떨어지게 한다.153) 율법의 둘째 용도는 믿지 않는 자에게 율법의 두려운 선교를 통해서 그 형벌의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 죄를 억제하도록 하는데 사용된다.154) 깔뱅 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율법의 셋째 용도이다. 이것은 율법의 본래 목적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을 갖는데, 성령이 그들 마음속에 살아서 다스리고 있는 신자들에게 복종할 기독교적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화의 삶을 이끌어 가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날마다 더 철저하게 익혀가며 그 것을 납득하여 확신케 하는데 최선의 기구가 되도록 한다. 그들 은 이것을 통해서 더욱 순전한 지식에로 나아가며 육체의 태만 을 극복하여 더욱 선명한 삶에로 전진하게 된다.155)
이와 같이 깔뱅에게 있어서 성화의 삶이란 아직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투쟁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회개와 말씀의 권고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품격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전진해 가는 과정이다. 아무도 자신의 삶에서 완전을 이룩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완전을 우리 앞에 목표로 설정하고 열심히 추구하고 열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156) 실제로 이것은 전 생애를 걸쳐 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 드디어 육신의 연약함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가운데 영접되는 날에 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성화의 삶은 이러한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하신 승리를 확신하며 말씀을 통한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육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덧입어 가는 성도의 거룩한 여정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깔뱅이 인간 자유의지의 무력성을 말하는 근거는 피조된 인간의 전적타락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안에서 선택되어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인간도, 자신의 온전한 자유 의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선을 향한 의지가 발현되어 구원의 지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Ⅴ. 결 론
깔뱅은 그의 예정론 에서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영원전의 선택으로 이중예정을 그 선하신 뜻에 의거해 결정하셨다고 말한다.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한, 오직 하나님이 은혜에 의한 것으로 예지에 근거한 예정이 아님을 주장한다.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은, 만사의 필연이자 가장 높은 의의 법칙인 하나님의 비밀한 뜻에 의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권을 강력히 천명한다. 또한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의 선택임을 강조하면서, 선택된 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성도의 견인을 주장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중도에 타락한 자는 본래 선택된 자가 아니라고 하여,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에 따른 인간의 노예의지를 주장하였다. 깔뱅은 이러한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그의 자비를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함이며 신자들의 거룩한 삶을 지향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깔뱅의 이중 예정론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제반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기는 그의 입장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전 포괄적이고 강권적인 섭리를 믿는 깔뱅의 신앙의 강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는 예정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성서적 근거를 예증으로 삼는데 주력함을 보았다. 이는 그가 성서를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바른 성서관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안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선택의 확신을 구해선 안 된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선택교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하여금 자신이 선택된 것인지 유기 된 것인지에 대해 더 걱정할 가능성을 없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확실성은 동시에 선택의 확실성이며, 반대로 선택의 확실성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깔뱅의 이중 예정론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가도록 이끄는 근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깔뱅의 예정론에 나타난 구원관을 좀더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연결성을 갖는 깔뱅의 신학적 인간이해를 조명해 보았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깔뱅은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다른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말한다. 그러나 범죄 이후 그 결과 인간은 철저히 부패되었으며 그 손상의 정도는 치명적이어서 인간 안에는 선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으며 어거스틴의 주장에 동조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범하는 일밖에 없다는 죄의 필연성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의 기능인 지성은 자력으로 선을 식별할 수 없으며 의지 또한 무력해져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하여 자연인으로서는 결코 선해지거나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도록 인간존재 전체가 철저히 죄로 오염되어 있다고 본다.
윤리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타락한 인간본성 자체로는 결코 도덕적이거나 선한 이상을 성취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되어졌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라고 해서 영혼, 즉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 완전히 말소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부패된 인간본성 내에 약간의 하나님 형상의 불꽃이 남아 있어서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인간 속에 심어진 종교의 씨는 도덕적으로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종교성과 신 의식을 간직하게 하여 이것이 양심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양심도 선에 대한 적극적인 기능은 수행치 못하고 다만 하나님 앞에서의 죄에 대한 심판의식을 갖게 하는 최소한의 작용을 할뿐이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있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하나님의 은총과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데에는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에 대한 그의 사상에 기인한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 후 본성이 철저한 부패로 인해서 영혼이 주요기능인 지성과 의지는 마비되어 더 이상 천상 적인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없으며 의지 또한 바른 판단력을 박탈당하였다. 양심은 자기 고발로 인해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지성은 하나님을 알 수도, 경배할 수도 없게 되었으며, 의지 또한 왜곡되어져서 자신의 힘으로 옳은 것을 향하여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신앙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이성을 조명하고 마음에 확증을 주심으로 갖게된다.
신앙인은 '의인'을 얻게 되며, 중생함으로 의인된 성도들은 계속적으로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의 길을 향해 가도록 하나님께 인도 받아야 한다. 성화는 아직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투쟁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회개와 말씀의 권고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품격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전진해 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인간에게 여전히 잔재하는 죄의 본성이 있지만 성령 안에서 죄로부터 해방된 의지를 가지고 죄의 예속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깔뱅에게 있어서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역할이나 가져야 할 자격이 필요 없다. 심지어 성령이 이성을 조명하는 것도 인간의 의지적인 작용이 아닌 성령의 비밀한 내적 역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구원을 위한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 수단으로서 간주될 뿐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인간이 갖고 있는 조건과는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적인 은총에 의해서 선택되고 구원받으며 성령의 도움으로 끝까지 성화의 삶을 수반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의한 선택과 구원의 감격 앞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은혜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갖는 존재인 것이다.
아울러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성화는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성도의 삶이지만, 구원의 최우선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라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죄와 구원의 문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신학적 갈등의 표출은 이 문제가 갖는 중요성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이 주권이 실제적으로 구체화되는 경우에서는 이를 부정하는 주장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 선행되지 않는 인간의 의지는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는 오류를 가져오며, 이는 곧 인간우위의 인본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인간을 선택과 유기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된 자의 구원을 이루시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의 삶을 이어가도록 성령으로 역사 하시는 이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 적인 사역이며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임을 인식해야 될 줄로 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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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논 문
조종남. " 알미니우스주의의 교회의 신조". 『풀빛목회』. 제 32권, 1983.
1)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Ⅱ)』,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출판국, 1990) p.45.
2) 헨리 디이슨, 『조직신학강론』, 권혁봉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5),
p. 145.
3) J.L. 니이브저, 『기독교 교리사』, 서남동 역 (서울: 기독교 교리사, 1972) p. 227.
4) 벤자민 B. 워필드, 『구원의 계획』, 모수환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서울, 1991, p. 31.
5) 어거스틴, "원죄에 관하여 11"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p. 47 재인용.
6) Enchiridion. ⅩⅩⅩ. Fred Bertheld, Free Will and Theodicy in Augustine:An Exposition and Critique, Religious Studies. Vol. 17 (De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 528 재인용
7)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김종흡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 169
8)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Ⅱ)』, op, cit. p 65.
9) St. Augustine, Admonition and Grace. Trans by John c. Murray. The Fathers of the Church Series. Vol. 2. Washington: The Catholic Univ. of America Press. 1988 pp 239-240.
10) 어거스틴, 『은혜와 자유 의지에 관하여』 17. (NPNF, Ist Series, 5: 458)
11) Ibid., 5.
12)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Ⅱ)』, op. cit, p. 66.
13) 베른하르드 로제, 『기독교 교리의 역사』, 차종순 역(서울:목양사, 1986), pp. 180-181
14) 니이브, 『기독교 교리사』, 서남동 역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72) p 236.
15) 베른하르드, 로제 『기독교 교리의 역사』, op, cit. p. 181
16) 니이브, 『기독교 교리사』, p. 239
17) Heiko A. Obermand, Luther, Man between God and the Devil (New York : Yale Univ. Press, 1982), pp. 212-213
18) 휴 T. 커어, 『루터신학개요』, 김영한 편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1), p. 137.
19) E. Gordon Rupp, philip S. Watson Luther and Erasmus : Free will and Salvation, p.140.
20) Ibid., p. 9.
21) Ernst F. Winter, ed. tr., Erasmus-Luther: Discourse,
(Frederick Ungar Publishing Co., 1961), p. 20.
22) 이장식, 『기독교 사상사(제2권)』,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23) 깔뱅, 『기독교 강요』, 이종성외 3인 공역.(서울:생명의 말씀사. 1988) Ⅱ, iii, 5
24) Ibid., Ⅱ, iii, 5
25) Ibid., Ⅱ, iii,10
26) 김하진, 『주제별 깔뱅주의』, (서울: 한국문서선교회) p. 33.
27) 깔뱅, 『기독교강요』, op. cit. p. 513.
28) J. L. New, O. W. Heick,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서남동 역
『기독교 신학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p 37.
29) 조종남 알미니우스주의의 교회의 신조" 『풀빛목회』, 제 32권 (1983, 6). p.20.
30) David N. Steele, Curtis C. Thomas,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김남 식 역, 『깔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서울:정음출판사, 1982), pp. 17-23.
31) L. Berkhof, A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김진홍, 김정덕 공역,
『기독교 교리사』, 서울:세종문화사, 1975 p. 161.
32) J.L.니이브. O. W. Heick.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서 남동 역,
『기독교 신학사』, op. cit., p. 50.
33)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John T. McNeil, (Philadelp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로고스 번역위원, 『칼빈 기독교강요』, 로고스출판사, 1987. Ⅲ, ⅩⅩ I, 1. 이하부터는 Inst.로 표기 한다.
34) Ibid.
35) Ibid.
36) Inst., Ⅲ, xx i,7.
37) Inst., Ⅲ, x x I, 6.
38) Inst., Ⅲ, x x I, 7.
39) Ibid.
40) Inst., Ⅲ, x x I, 5.
41) Inst., Ⅲ, x x ii, 1.
42) Ibid.
43) Inst., Ⅲ, x x ii, 3.
44) Inst., Ⅲ, x x ii, 4.
45) Inst., Ⅲ, x x ii, 7. 그외에도 요17:6, 17:9 13:18 10:28 참조
46) Ibid.
47) Inst., Ⅲ, x x ii, 3.
48) Inst., Ⅲ, x x ii, 10.
49) Inst., Ⅲ, x x iii, 1.
50) Inst., Ⅲ, x x iii, 2.
51) Inst., Ⅲ, x x iii, 3.
52) Inst., Ⅲ, x x iii, 4.
53) Inst., Ⅲ, x x iii, 5.
54) Inst., Ⅲ, x x iii, 7.
55) Ibid.
56) Inst., Ⅲ, x x iii, 8.
57) Ibid.
58) Ibid.
59) Inst., Ⅲ, x x iii, 12.
60) Inst., Ⅲ, x x iv, 1.
61) Inst., Ⅲ, x x iv, 1.
62) Inst., Ⅲ, x x iv, 2.
63) Ibid
64) Inst., Ⅲ, x x iv, 3.
65) Inst., Ⅲ, x x iv, 5.
66) Ibid.
67) Inst., Ⅲ, x x iv, 6.
68) Inst., Ⅲ, x x iv, 7.
69) Inst., Ⅲ, x x iv, 8.
70) Inst., Ⅲ, x x iv, 12.
71) Inst., Ⅲ, x x iv, 13.
72) Inst., Ⅲ, x x iv, 14.
73) Brian A. Gerrich, "하나님의 선하신 거울- 칼빈의 인간론에 나타난 중심비 유" , in reading in Calvin Theology, ed. Donald K. Mckim, 한국칼빈연 구원역, 칼빈의 신학논문, (서울:기독교 문화협회, 1986), p.161.
74) Wie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이종성역, 『칼빈의 신학』,
(서울: 기독서회, 1979).
75) Inst., Ⅱ, I, 3.
76) T.F.Torrance, Calvins Doctine of Man, p. 35
77) Inst., Ⅰ. x v. 3.
78) Inst., I, x v. 4.
79) Inst., Ⅰ. x v. 3.
80) T.F.Torrance, op. cit., p. 53.
81) Inst., Ⅰ. x v. 3.
82) T.F. Torrance, op. cit., p. 64.
83) Inst. Ⅱ. i. 14.
84) Inst. Ⅱ. i. 8.
85) Inst. Ⅱ. ii. 14.
86) Inst., Ⅱ, i, 4.
87) Ibid.
88) Ibid.
89) Inst., Ⅱ. i. 7.
90) W. Niesel, 이 종성역, 『신학적 인간학』, p. 51.
91) Inst., Ⅱ. i. 5.
92) Inst. Ⅱ. ii. 26.
93) Inst. Ⅱ. iii. 5.
94) Inst. Ⅱ. ⅳ. 2.
95) Inst. Ⅱ. ii. 23.
96) Inst. Ⅱ. ii. 26.
97) Inst. Ⅱ. ii. 21.
98) Inst. Ⅱ. ii. 13.
99) Inst. Ⅱ. ii. 13-17.
100) Inst. Ⅰ. ⅳ. 4.
101) Inst. Ⅱ. ii. 19.
102) Inst. Ⅱ. ⅹⅶ. 6.
103) Inst. Ⅰ. iii. 1.
104) Inst. Ⅲ. x iii. 4.
105) Inst. Ⅲ. x ii. 4.
106) Inst. Ⅱ. ii. 22.
107) Edward A.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p. 57.
108) Ibid., p. 66.
109) Inst. Ⅱ. ii. 22.
110) Inst. Ⅳ. x. 1.
111) Inst. Ⅱ. x ii. 1.
112) Inst. Ⅲ. I. 1.
113) Inst. Ⅲ. ii. 33.
114) Inst. Ⅲ. x iii. 3.
115) Edward A. Dowey, op. cit. p. 177.
116) William Park Armstrang, ed. Calvin and Reformation, 한국칼빈주의 연구 원역, 『칼빈주의 신학사상』, "칼빈의 신지식 교리에 관하여" by B. B. Warfield (서울:기독교문화협회, 1986), p. 179.
117) B. B. Warfield, op. cit., p. 187.
118) Inst. Ⅲ. ii. 33.
119) Inst. Ⅰ. ⅷ. 13.
120) Inst. Ⅱ. ii. 6.
121)이 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 p. 429.
122) Inst. Ⅱ. iii. 5.
123) Inst. Ⅲ. iii. 6.
124) Inst. Ⅲ. iii. 9.
125) T. F. Torrance, op. cit., p. 54.
126) Inst. Ⅱ. ii. 12.
127) Inst. Ⅲ. iii. 10.
128) Inst. Ⅱ. ii. 15.
129) Inst. Ⅱ. iii. 9.
130) Inst. Ⅱ. iii. 6.
131) Inst. Ⅱ. iii. 9.
132) Inst. Ⅲ. ii. 16.
133) Inst. Ⅲ. x iii. 5.
134) Inst. Ⅲ. ⅳ. 27.
135) Inst. Ⅲ. ⅳ. 12.
136) 이 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 p. 426.
137) Inst. Ⅲ. iii. 10.
138) Inst. Ⅲ. iii. 10.
139) W. Niesel, op. cit. p. 125.
140) Ibid, p. 124.
141) Inst. Ⅲ. ⅹⅵ. 1.
142) Inst. Ⅲ. ii. 3.
143) 이형기, op. cit. p. 427.
144) Inst. Ⅲ. ii. 2.
145) Inst. Ⅲ. ii. 3.
146) Inst. Ⅲ. ⅹⅳ. 2.
147) Inst. Ⅲ. x v. 3.
148) Inst. Ⅲ. ⅹⅳ. 5.
149) Inst. Ⅲ. iii. 9.
150) Joseph Richard,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p. 148.
151) Ibid., p. 153.
152) Inst. Ⅳ. ⅹⅶ. 12.
153) Inst. Ⅱ. vii. 6.
154) Inst. Ⅱ. ⅶ. 10.
155) Inst. Ⅱ. ⅶ.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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