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목사, 실로암 교회, 본지 편집고문
1. 서론
교회의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 본다, 하나는 교회 내적 기능으로서 예배와 교제이다.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된 가장 본질적 의미는 거기서 나타나야만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향한 외적 기능으로써 복음전파의 사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교회와 세상의 분리상태를 전제한 상태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우리시대 많은 교회들이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려 애쓴다. 사람들이 선교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선교는 시대적 유행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 시대에 속한 교회가 선교의 정의를 정하려 해서는 안되며 교회의 전통이 선교에 관한 의미를 독점적으로 해석하려 해서도 안된다. 선교는 우리시대에 창의적으로 개발된 개념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요구되어 건전한 교회들이 참여했던 바이며 앞선 교회들이 본을 보인 내용들이다.
선교와 선교학은 신학에서 결코 독립적이지 않으며 항상 교회의 다른 신학 분야들과 조화되는 위치에 놓여있어야 한다. 즉 성경신학, 교의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맥락과 온전한 일치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선택 및 예정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 보다 인간의 믿음을 더 중시한 알미니안 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은 전반적으로 알미니안적 신학사고를 크게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선택 및 예정교리가 복음전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소멸시키거나 감소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잘못된 사고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모든 것을 성경말씀의 교훈에 본질적인 근거를 둔다. 즉 인간들의 경험이나 종교적 상상력에 그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경험을 포함한다. 즉 선교는 본질상 일차적으로 역사상의 교회에서 발생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개념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지상의 각 교회들이 선교에 관한 모든 내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 증거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명령하고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복음을 증거해야 할 교회의 사명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예정 및 선택 교리와 교회에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에 관한 내용들을 성경본문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전체적인 주제의 전개를 위해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미리 살펴본 후 복음전파에 대한 성경의 몇몇 구체적인 명령들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현대적 적용을 기술함으로써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2.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기초
1) 예정 및 선택교리
(1) 성경적 배경
개혁주의 선교신학에 있어서 예정 및 선택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가르침 위에서 교회의 선교사역이 주님의 뜻 가운데서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자기 백성을 선택해 두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미리 택하셨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창세전에 미리 택하셨으므로 이 세계뿐 아니라 아직 죄가 생성되기 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나라를 위한 백성을 조성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과 어떤 타협이나 대화도 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의 선택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자기 백성을 선택해 두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들의 어떤 종교적인 활동이 하나님의 구원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는 성경 말씀의 모든 말씀들은 이러한 의미 가운데서 해석되고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음’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이다. 멸망받을 인간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은 이차적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원래의 영화로운 세계가 망가뜨려졌으나 하나님께서는 재창조를 통해 다시금 완전한 영화의 세계를 회복하시고자 뜻하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이야기 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특권을 말한다.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기 백성을 예정하셨다’는 의미 속에는 그 예정이 하나님의 기쁨 즉 하나님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 라는 개념이 동시에 함의되어 있다. 그것은 죄로 얼룩진 인간들이 준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그 감격에 겸손하게 참여할 따름이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말하고 있다.
(2)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는 예정과 선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그 점을 인정한다면 개혁주의 선교신학 역시 그와 동일한 신학적 배경을 가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정과 선택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과 교리를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개혁주의적 선교신학이라 말 할수 없을 것이다. 사도교회를 상속받은 건전한 초대교회 교부들이나 어거스틴, 칼빈 등이 말씀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바 신학적 입장들을 우리는 소중히 여긴다. 그 후 역사적 교회들을 통해 확인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상속되고 있는 선교의 목적인 구원에 관련된 개혁주의적 입장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선교’에 관한 별항이 들어있지 않다. 지금도 많은 경우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표준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은, 제1부 교리표준 <1. 신앙고백>에 포함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를 첨가한 문서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 첨가된 이 조항은 원리적 측면에서 앞의 전통적 신앙고백서에 조화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현대 개혁주의 선교 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을 전반적으로 잘 고찰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 제1항에서는 “하나님은 ‘은혜계약 안에서’, ......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거저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장에는 전체적으로 ‘모든 인간’을 뜻하는 문구들이 되풀이하여 등장하고 있다. 제1항에는 ‘모든 멸망한 인류’, ‘모든 사람’, 제2항에는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 제3항에는 ‘모든 사람’, 제4항에는 ‘모든 민족’ 등이 나타난다. 여기에 언급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요 온 인류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신 교단이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5장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앞의,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와 제10장,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하여’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동일한 신앙고백서에서 서로 배치되는 항목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35장 제1항의 모든 멸망할 인류와 ‘모든 사람’ 앞에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제2항에서도 ‘모든 사람’ 앞에 ‘복음 안에서’라는 말과 ‘진실로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제3항에서도 ‘복음을 듣는’ 이라는 수식어가 ‘모든 사람’ 앞에 붙어 있다. 그리고 제4항에서의 ‘모든 민족’은 all nations가 아니라 every nation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종족을 초월한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이 앞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조회되는 고백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인을 다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예정과 부르심을 통해 주를 믿는 성도들만 부르고 계시며 그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그의 궁극적 심판도 실제적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한 제한적 구원에 관해서는 대소교리문답에서도 그대로 명시되어 있다.
②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복음전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요리문답 제54문에서 거룩한 공회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관한 문항에서 ‘인류가운데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부르시고 계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영생에의 참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함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83문에서는 교회의 문을 여는 천국열쇠의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84문에서는 복음의 선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게 되지만, 불신자와 위선자들에게는 천국문이 닫히게 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 사이에는 복음의 선포 즉 선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구분되어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③ 벨직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특히 벨직 신앙고백서 제16장 [영원한 선택]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에 대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무력함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원한 선택만이 구원이 있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같은 16장에 나타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영원한 구원의 기초가 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위 문구에서 ‘모든 사람’이란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이며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밝히고 있는 바, 인간의 구원이 인간들의 여하한 활동에 달려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 있음에 대해서는 현대 교회와 선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선교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④ 도르트 신경
도르트 종교회의(the Great Reformed Synod of Dortrecht, 1618-1619)는, 알미니안 주의가 생겨나고 그 사상이 퍼져나감에 따라 개혁교회가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됨으로 인해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된 교회의 회의이다. 도르트 신경은 첫째교리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제7장에서 18장 사이에 언급된 분명한 선택교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도르트 신경 첫째교리인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의 말미에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이라는 별항에서 선택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변증하고 있다. 특히 제1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배격하고 있다. 그리고 제3절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무런 효력이 없게되어 인간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바 은혜로써 주신 칭의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될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⑤ 12신조
우리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초창기에 12신조를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장로교는 1907년 12신조를 채택하여 지금까지 교회가 고백해야 할 신앙의 표준으로 삼아오고 있는 것이다. 12신조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자기 백성을 미리 선택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9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셨음”과 “그 기쁘신 뜻대로 저희를 미리 작정하셨음”에 대하여 고백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에베소서 1:4,5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용이며, 전통적 개혁교회의 신학적 고백들과 일치한다. 현재 사용중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도 12신조를 수록함으로써 그 헌법적 효력이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
2) 복음전파에 대한 성경의 명령들
(1) 마태복음 28:18-20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의 한 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외적으로 행해야할 중요한 사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내게 주셨으니”(18) 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이 모든 권세의 주인임을 말씀하신다. 즉 주님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의 주권자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달리 말하자면 주님 한분 이외에는 진정한 권세자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전반적으로 기독론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권세는 오로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다. 복음전파의 출발은 ‘나’ 곧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한 권세를 기초로 하여 주님께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들에게 명령하고 계신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 상속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와 조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하늘과 땅의 권세’가 곧 선교의 본질적 기초가 된다. 권세를 소유하신 주님, 곧 ‘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 오로지 주님께만 속한 것은 그가 유일한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19절의 “너희”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 곧 사도들을 직접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들을 의미하며 본질적 개념에서 교회이다. 여기서 ‘너희’라는 말이 모든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즉 ‘너희’는 ‘each one of you’라는 각각의 개별적인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구성된 하나의 집단인 ‘you’ 곧 교회(교회의 기초인 사도들)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속받는 주체는 하나님을 믿는 개별 성도가 아니라 공동체적 교회이다. 그 교회가 주님의 생명을 상속받은 지상의 진정한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19) 라는 구절은 만인구원설을 지칭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못한다. 여기서 ‘모든 족속으로’라고 한 말은 구원이 그 동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범주를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주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이점을 제거하고 그들을 차별 없이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를 삼는 주체는 각 개별 성도들이 아니라 보편적 공교회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뜻에 따라 ‘하나의 교회’를 세웠으며 성격이 다양한 여러 교회들을 세우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주체는 보편적 공교회이며 새로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은 보편교회에 속한 주님의 자녀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즉 성도들 각 개인이 선교를 통해 자기 제자를 삼는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에 속한 교회의 제자를 삼아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19) 라는 말씀에서는, 세례를 베푸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에 가입하게 되는 절차나 과정의 본질적 기초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세례를 베푸는 자들의 특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세례를 베푸는 주체 역시 교회이다. 주님께서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은 ‘너희 각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도 교회의 하나됨을 보게 된다. 세례를 통한 교회의 확장이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역시 하나의 보편교회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내용이 상이한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의 개별적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온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통치와 주권 아래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개인의 능력이나 권한으로 세례를 준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는 세례를 베풀 때 독립적 위치를 고수하는 개 교회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며 교파나 교단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 없다. 장로교 헌법의 정신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교회의 교사인 목사가 언약에 따라 교회 앞에서 세례를 베풀고 보편교회에 속한 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자로 선포한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0)는 말씀에서 교회가 본질적으로 행해야할 일을 보여주고 계신다. 여기서 강조될 부분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기초가 될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그의 많은 가르침들을 보게 된다.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들을 보게 되며 하나님 나라의 실상들을 많은 비유의 말씀이나 이적들을 통해 보게 된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르침을 후대의 교회들에게 상속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분부하신 구체적인 내용들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벗어난 내용을 교회에 입교한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없으며 말씀이 요구하는 것 이외의 어떤 행위도 요구할 수 없다. 오로지 기록된 말씀에 따라 가르치며 그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즉 어느 누구도 세상에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가르칠 수도 없고 지키도록 요구할 수도 없다. 권세를 가진 주님께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있어서 엄격한 제한적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분부하신 것 이외의 것을 가르치게 되면 그것은 범법 행위가 된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고 교훈한 것은 마태복음의 말씀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역시 불변적 상속을 요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고 약속하셨다.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 지체이자 몸인 교회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다. 진정한 교회라면 머리와 분리될 수 없으며 그의 뜻에만 순종해야 한다. 또한 이 말씀에서 보여지는 바는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상당한 위험이 따르리라는 점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까지 자기 백성과 함께 할 것이니 낙담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보호 아래 존재하게 되며 그의 도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구속사적인 전체적 의미를 깨달아야만 된다. 마태복음 28:18-20은 기독론에서 출발하여 교회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하늘과 땅의 권세를 홀로 받으신 주님께서 사도들 위에 세워질 교회에게 요청하신 말씀인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절대 주권자는 주님이시며 교회는 그의 신실한 순종자로서 자세를 가질 것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위 말씀에 나타나는 가르침은 특정시대 특정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교에 관심을 가진 일부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은 더욱 아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몸된 보편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교를 비롯한 특정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인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본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선교사역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교인들 보다 이 말씀을 더 많이 인용하며 자신과 특별히 연관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향해 공적으로 주어진 이 말씀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 선교사역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직접 주신 대상인 ‘제자들’ 곧 교회의 기초적 공동체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사도교회 제자들의 공통체에 속해 있으며 제자들을 통해 진리에 대한 모든 교훈들을 상속받고 있다.
(2) 사도행전1:6-8
부활하신 후 40일 간 활동하시던 주님께서는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과 대화하시면서 성령의 인해 생겨날 지상의 교회가 마땅히 해야할 사명을 말씀하셨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6-8).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니이까”(6) 라는 말이 나온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때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심이 서로 다른데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아직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며 ‘지금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인가’ 묻는 것은 현재적이며 정치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이방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사악한 유대인 집권자들을 물리칠 때가 지금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로마제국과 유대인 집권자들이 예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고한 예수님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모함하여 비참한 십자가 사형에 처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이 옳지 않음을 지적하시면서 더욱 높은데 뜻을 두도록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관심은 지상에서의 정치적 승리나 특정 종교집단에 대한 승리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지향하시고 있던 바는 자기 백성을 불러모아 영화로운 영원한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에 대해 질문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권한”(7)에 속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아버지의 권한’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한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 이외에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권한을 가진 자가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들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어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으며 다른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관여나 간섭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홀로 뜻하신 바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노력을 통해 주님의 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인간이 적극적으로 도울수는 없다. 그것은 도리어 아버지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인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될 것”(8)이라 말씀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신다’는 의미는 구속사 및 교회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성령이 너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임하게 되면’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순절이 이르러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임하시게 되면’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너희’는 의미상 제자들의 집합체로서 ‘너희’이며 곧 오시게 될 오순절 성령을 통해 드러나게 될 교회의 기초가 되는 제자들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즉 ‘너희 각 개인’(each one of you)에 치중하는 의미가 아니라 ‘집단적 의미인 너희’(you)인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완전한 희생제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 이르러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면 교회의 기초인 ‘너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역시 너희 각 개인의 판단이나 열성에 의해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 아니라는 강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성령이 임하실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의 순전한 계획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너희’ 또한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에 주어진 권능과 개인에게 주어지는 권능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권능은 원칙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즉 교회에 대한 위임이다. 교회의 권위가 놀라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위임받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권능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을 위해 사용될 수 없으며 교회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따름이다.
주님께서는 복음이 온 세계에 증거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8) 증거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이 말은 넓고 광범위한 영역을 나타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택하신 모든 이방민족에 까지 그 범위가 개방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벽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높은 담을 이해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었던 이방인들을 차별없이 부르시는 계획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8)고 말씀하신다. ‘증인’이란 법적인 용어이다. 법적인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났을 때 한쪽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한 상대에 대해서는 원수가 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이다. 사도행전 3:15에서 사도들은 교회를 해하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말한다. 이는 사도들이 예수를 죽인 자들을 목격했다는 증거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고발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교회가 ‘증인이 된다’는 말이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포교적 의미가 아니라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세상을 고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고발의 말을 듣고 찔려 회개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악함에 빠져 더욱 분개해 했던 자들이 동시에 등장하게 된다.
사도행전 1:6-8의 말씀은 전체로 보아 교회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이 말씀은 각 사도들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교훈이 아니라 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사도회에 주신 말씀이다. 즉 이 말씀을 처음 받은 사도들은 제각기 개인의 입장에서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바 된 교회의 기초인 공적인 개념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위 본문에 나타나는 가르침은 특정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교에 관심을 가진 일부 성도들에게 특별히 주신 말씀은 더욱 아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몸된 보편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교를 비롯한 특정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인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본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선교사역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교인들 보다 이 말씀을 더 많이 즐겨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말씀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 보편교회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선교사역에 올바르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직접 주신 대상인 ‘제자들’의 의미이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온전한 교회들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모체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 역시 제자들에게 속해 있으며 제자들을 통해 진리에 대한 모든 교훈들을 상속받고 있는 것이다.
(3) 로마서10:13-15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복음이 어떻게 증거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본문의 가장 앞에 나오는 “누구든지”(13)는 ‘아무나’ 라는 말이 아니다. 즉 구원의 복음이 무작정 개방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단어에서 보여주는 바는 구원 즉 복음이 유대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음과 모든 신분을 파괴하는 보편성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14절의 “저희” 라는 말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이방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교회 가운데로 불림을 받은 자들이다. 즉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주님의 교회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저희’는 점차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온 세계를 향해 복음이 선포됨으로써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보편교회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 말씀 가운데 “전파하는 자”(14)란 곧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다. 그리고 “보냄을 받은 자”(15)만이 전파하는 자가될 수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자의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개별적인 결단에 따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교회의 요청에 의한 공적인 일이다. 보낸 자로부터 위임받은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 전파하는 자의 임무요 사명이다. 문맥상 그를 보낸 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15절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에서 ‘좋은 소식’이란 물론 주님의 복음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낭만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복음의 선포는 귀로 그 말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것은 아니다. 그 ‘좋은 소식’은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는 복된 소식일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심판의 소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주의 일군들이지만, 그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자들에게는 복음이 될 것이며 다른 어떤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소식이 될 것이다.
로마서에 기록된 이 말씀은 복음이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대인의 범주를 벗어나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진 복음의 보편성을 일컫고 있다. 그렇지만 구원이 개별적 결단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의 소식이 택한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자기 백성들을 사용하신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1:21에서 인간들을 통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다.
위 로마서10:13-15의 말씀은, 이사야서 52:7에 기록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은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라는 말씀의 상속이며 성취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는 마땅히 이 본문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아 주님께서 요구하신 선교적 명령에 겸손한 자세로 순종해야 한다.
3. 개혁주의 선교학의 현대적 적용
마태복음 28:18-20에서 나타나는 ‘너희’는 곧 나중에 확장되는 ‘보편교회’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므로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들은 머리이신 한 분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는 기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된 어떤 교회도 독립적일 수 없다. 역사시대의 모든 참된 교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시대의 참된 교회들 역시 사도 교회에 굳건히 연결되어 붙어 있어야 한다. 건전한 참된 교회라면 그리스도와 사도교회로부터 단절된 독립된 상태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횡적인 측면에서도 모든 건전한 지교회들은 보편교회에 상호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기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라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사적 종적관계와 현실적 횡적 관계에서 보편교회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교회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선교는 원리적으로 보편교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할 몫이다. 보편교회에 예속된 지교회들은 보편교회의 사명에 따라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지교회가 보편교회의 전체적 사명과 복음전파의 원리에서 배치되는 자기판단이나 행위를 한다면 잘못이다.
따라서 선교의 주체는 개별 선교사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선교단체나 선교기관이 독립된 선교의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선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 교회는 개별적인 교회를 넘어서서 이미 앞에서 밝힌 바 보편교회를 의미하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할 각 지교회들은 말씀을 중심으로 한 보편교회에 견고하게 붙어있는 교회여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따라 자의적으로 가르치거나 말씀을 벗어난 독창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위임한 내용에 대해 순종할 따름이다. 이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이며 경직된 종속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의 기본적 임무(mission)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와 교회의 관계는 항상 명료하게 확인되어야 한다. 물론 각 선교사는 지 교회의 잘못된 지시나 요구를 듣지 않을 권한과 의무를 가지게 되지만 진정한 보편교회의 요구와 의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성숙한 선교사는 교회의 올바른 의사에 순종하게된다. 그 진행과정에서 선교사가 소속교회에 성실한 보고와 더불어 기도제목을 나누어야 하며 그를 통해 복음전파 사역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전체교회의 사역이 되는 것이다.
사도교회 시대부터 선교단체와 같은 para-church의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다양한 선교 단체들과 같은 para-church가 있는 것은 시대적 특징이라 할만하다. 그러므로 교회밖의 기독교 단체들은 순전하게 교회를 위한 기관이어야 하며 편의적 임의단체일 뿐 복음을 담은 필수적 기관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 선교단체들은 원리상 교회의 감독을 받으며 언제든지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할 경우 해체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결코 해체될 수 없는 상시적 기관이라면 선교단체는 끊임없는 조직과 해체, 해체와 재조직을 되풀이하는 목적기관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선교의 특색 중 하나는 선교에 있어서 선교단체가 교회를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선교단체는 교회의 선교를 보조하는 역할을 감당할 따름이다. 즉 선교단체가 주도하여 각 교회들을 선교에 참여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요청에 의해 교회의 일을 보조하는 선교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선교단체가 교회의 감독을 벗어나 독자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지교회를 우선적으로 한정지어 일컫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지칭하고 있는 교회란 노회나 교단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평신도 선교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신학적 검증이 따라야 한다. 평신도 선교사란 목사 선교사와 대비되는 말로써 그 배경에는 누구든지 복음만 증거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낭만적 선교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필자는 여기서 누구든지 복음만 증거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확장’이란 좀더 원리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복음의 전달’이라는 용어가 개별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교회의 확장’이라는 용어는 좀도 공적이며 전체적인 개념을 내포한 용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파는 개별적 혹은 자의적 결단에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사도교회로부터 시작되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공교회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원칙적으로 목사 즉 교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른바 평신도 선교사들은 교회와 교사의 관할 아래서 선교활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선교는 보편교회의 지속적이며 공적인 사역으로서 결코 일시적이거나 상황적이지 않다. 주님의 요구에 따라 지속적으로 순종해야만 하는 공적인 사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복음전파사역의 이행 여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라는 의미 속에 이미 그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는 개인이 판단하고 열심을 내어 행할 일이 아니라 교회의 사역이다. 위에서 언급한바 전체 보편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명령을 보편교회에 속한 지역 교회 혹은 지교회로서 그 임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선교사역도 개별교회의 공적이나 공로가 될 수 없다. 우리시대에 이르러 선교를 개인의 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이나 개 교회의 독자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은 매우 위험하다.
4. 결론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근간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인 고백문서들이다. 선교에 관한 신학적 원리와 방법은 열성적인 소수의 교인들의 종교적 아이디어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된 것이 아니다. 즉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에는 있지 않았던 선교적 개념이 근대 혹은 우리 시대에 들어와 발생하여 더욱 활발해 진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시대나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복음전파의 과정이나 방법이 상이하게 적용되어 나타나기도 했을 따름이다. 현대 선교신학이나 선교활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이해는 명확해야 한다. 성경의 교훈이나 요구를 넘어서는 판단과 활동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일 것이며 항상 교회를 통해 점검되어야만 한다.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기초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기초한다. 예정과 선택의 교리가 결코 복음전차에 대한 열정을 위축시키거나 감소케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운명주의 혹은 숙명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운명주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소극적으로 만들거나 무책임한 자세를 가지게 하며 적극적인 성실한 삶을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선택교리에 대한 참된 이해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써 이방세계를 향한 진리의 선포에 대한 관심을 더욱 드높이게 된다.
현대 선교신학이 다른 신학분야로부터 예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한 경향이나 어느 정도 분리된 형태를 띠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선교학은 성경의 구체적인 교훈과 역사적 신조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은 하나의 울타리 안에 편향됨이 없이 상호 협력과 간섭 가운데 동시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교실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교신학은 선교적 실제와 현상들에 대해 끊임없는 선한 감독을 해야 하며 성경적 조언을 주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나아가 선교가 교회의 특별한 프로그램일 수 없다. 즉 선교가 교회성장을 위한 보조적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든지 시대적 유행에 따른 교회의 활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마땅히 참여해야 할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단지 참여하는 형태나 방법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이나 현실적 정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 보일 수 있을 따름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들과 칼빈의 신학사상 및 역사상의 개혁주의 신학 전통들에서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는 바 예정과 선택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개혁주의 선교신학은 역사적 보편교회의 신학원리를 소중하게 받아들인다.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절대화하며 역사적 신실한 교회들이 고백했던 올바른 신조들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문화적 변화나 요구에 따라 선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지 않는다. 현대선교신학에서 간과되고 있는 바 그 점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과 보편교회의 신조들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금 확인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선교신학이 다양한 현대 선교 신학적 주장들과 다른 점은 바로 그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현대 선교신학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 교회들에서 일반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바 선교학은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신학적 정립이 잘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자칫 잘못하면 알미니안 주의를 답습하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우리가 지향하는 바 개혁주의 선교신학 이론이 올바르게 정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가운데 있었던 건실한 신앙고백들의 교훈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공교회적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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