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묵시를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를
교회성장과 부흥의 표어로 사용할 수 있는가?
서 론
하박국 3장 2절의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말씀은 한국의 모든 교회가 교회성장의 표어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며 교회의 부흥을 말할 때 근거로 삼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씀을 현수막으로 만들어서 강단 벽이나 교회 외벽에 붙여 놓은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는 부흥의 의미가 과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의도하고 사용하는 교회성장과 신자들의 삶의 발전이라는 부흥의 의미인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일반적으로 부흥이란, 이 단어의 사전적 풀이인 “다시 일어나다, 회복되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되고 적용되고 있다. 즉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마음이 새롭게 되는 부흥이 일어나면 이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충성을 하게 되고, 전도가 잘 되고, 그로 인해서 교회도 부흥 성장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박국서 전체를 통해서 보여지는 부흥이란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부흥이라는 단어의 이런 해석과 적용은 성경의 어떤 한 부분만을 가지고, 그 내용을 말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문자적으로 풀이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해석을 통한 설교 곧 삶에의 적용이란, 성경의 어느 한 구절만을 따로 떼어내서 그 구절만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문맥을 통해서 상호연관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즉 그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그 책이나 성경 전체의 문맥과 의미에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해석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공부하는 신학도나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경해석의 A,B,C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의 현장에서는 이런 성경해석의 원칙이 무시되고 자의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즉 설교하는 본문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여 정신적 물질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서 사람들을 돌보고 교회를 돌보는 일에 바빠서,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할 시간이 없어서 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목회에서 제일 중요한 설교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되어야만 하는 설교를 위해서, 이제 다시 성경을 충분히 읽고 충분히 연구하고 충분히 해석할 시간을 내어 놓아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 소고는 하박국 선지자가 주님께 간구한 기도로서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쓰인 것인지를 하박국서 전체를 통해서 제시함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말씀을 오용하는데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본 론
1. 하박국서의 보편적인 설교의 예
1) 1번 설교
중략 - 특별히 우리는 하박국 3장 2절의 말씀을 붙잡고 올 한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했듯이, 우리도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동시에 우리의 표어는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외치고 나갈 때 큰 은혜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부흥을 소원하는 것입니까?
Ⅰ.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중략)
Ⅱ.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중략)
Ⅲ. 아름다운 열매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중략)
Ⅳ.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소원합니다.
(중략)
정리하겠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기도하며 나가고자 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부흥을 간절히 원하면서 기도하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부흥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게 하소서,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름다운 열매의 부흥이 일어나게 하소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합시다. 교회 모든 기관과 부서에 부흥이 일어나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 2번 설교
중략 - 부흥의 본질은 이처럼 '주의 일'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 사업이 잘되고 내 가정이 평안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기원하는 부흥의 목표가 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일'이 부흥이 되어야, 그 '주의 일'에 우리가 바치는 생명력과 활력이 넘쳐야 '주의 백성'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진짜 축복이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일'이 '나의 일'보다 훨씬 더 잘 되어야 하겠다는 기도가 진실하게 나와야만 우리 자신의 '모든 것'들 역시 자동적으로 부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고 계시는 '구속사의 큰 일'이 먼저 부흥하게 될 때에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개인 신자 역시 절로 잘 될 수밖에 없음을 꼭 기억하면서 바로 이 참된 부흥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며 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함께 힘을 합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이런 '주의 일'을 먼저 부흥시키고 또한 각자 개인적으로는 먼저 이 '구원의 확신' 안에서 만족하고 새 힘을 발휘함으로써, '이 수년 내에' 밖으로는 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안으로는 개인의 신앙생활의 축복을 통하여 함께 큰 부흥을 꼭 이루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설교의 문제점
1번 설교는 부흥이라는 단어의 전형적인 사전적 해석이다.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부흥을 말하고 있다. 굳이 부흥이란 말을 하박국서에서 끄집어내지 않고도 설교할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가 말하는 부흥이란 성경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는 성경적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설교의 내용은 굳이 하박국서에서 말하는 부흥이라는 성경적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속적 의미에서의 부흥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없이도 설교할 수 있는 비성경적 설교라는 것이다.
2번 설교는 하박국서 전체를 통해서 부흥의 의미를 바르게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과 하박국 선지자의 갈등을 잘 짚어내고 있다. “주의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설교 역시 중간에서 “주의 일”이 무엇인가를 당시 상황에 비추어서 설명해주지 않고 있다.
즉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고자 했던 주의 일과 그로 인한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가를 문맥을 통해서 제시하지 않고 막연하게 “구속사의 큰 일”로 도약해 버리고 만다. 진정으로 이 설교가 “구속사의 큰 일”을 말하려고 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밝혀야 했다. 따라서 이 설교의 결론 역시 사전적이고 세속적인 부흥의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
2. 하박국서의 내용
1) 시대적 배경
하박국서에 언급된 죄악의 모습과, 갈대아인들에 대한 표현은 여호야김 때와 매우 흡사하다. 이 책이 기록된 연대는 주전 605년-597년으로 추정된다. 주전 605년경에 바벨론은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두 번(주전 597년과 587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그때에 앗수르가 멸망하고 바벨론이 애굽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애굽이 유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의 유다 왕은 여호야김(주전 608-597년)이었다. 그 왕은 자기 동생(여호아하스)이 왕이 된 것을 시기하여 애굽 왕과 내통했다. 그는 애굽 왕과 손을 잡고 자기 동생을 제거한 후에 왕이 되어 애굽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그는 애굽에 낼 조공을 만들기 위해서 백성들을 늑탈했으며, 심술이 가득하여 예루살렘을 의인의 피로 채웠다. 정치 지도자들은 부정축재를 했고, 가난한 자들은 이로 인해 크게 고생하고 있었다. 그때에 하박국은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고, 그가 가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하나님께 물어보았으며, 하나님을 통해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2) 내용 구분
첫째 부분은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 이스라엘에게 가득한 죄를 참고 계시는 이유를 하박국이 묻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인을 들어 심판하시겠다고 대답하셨다(1:1-11).
둘째 부분은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다 악한 갈대아인을 들어 심판하시냐고 하박국이 묻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인 역시 그들의 다섯 가지 죄 때문에 심판당할 것이며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대답하셨다(1:12-2:20)
마지막 셋째 부분은 하박국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계시를 내리신 하나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이다(3:1-19)
하박국서는 1장부터 하박국과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3장 2절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대화의 내용을 잘 상고해야만 한다.
1장에서는 하박국 선지자가 먼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나라가, 가장 악독한 민족(1:6 갈대아 사람 =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짓밟혀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를 묻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적은 알고 보면 이스라엘이기도 하다"라는 사실을 통보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나 갈대아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그 이유는 갈대아로부터 공격받기 이전에 이스라엘 내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이다.(1장) 즉 하나님의 약속만을 신봉하는 자들의 뜻을 무참하게 무시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심판받을 날이 반드시 온다는 약속을 믿는 것을 오히려 무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서에 표현된 것과 같은 무서운 심판을 하실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확실히 살아계심을 보이는 심판의 증표가 분명히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갈대아에 붙임으로 해서, 이 심판의 일 가운데서 진정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 따로 존재함을 알려 주고 계시는 것이다.
3. 하박국서가 말하는 부흥
1) 다른 번역 성경
(표준 새 번역)
주님, 내가 주의 명성을 듣습니다.
주님, 주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랍니다.
주의 일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시대에도 알려 주십시오.
진노하시더라도,
잊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현대어 성경)
오, 주님
제가 방금 주님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계획하신 그 무서운 일들이
두려워 저는 떨립니다.
그 일을 너무 먼 미래에 하지 마시고
속히 이루어 주소서!
주께서 간섭하시는 모습을
저도 직접 체험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진노가 폭발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2) 3장 본문 해석
(1) 하박국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합 3:1-2) 1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선지자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생명을 구하고 그 생명을 누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는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라고 있다.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은 “주가 누구시며 주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하박국 선지자가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참된 자기 백성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이었다.
이처럼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었을 때 하박국 선지자의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의로운 백성이 아니었고, 따라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 당연한 백성들도 아니었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불의한 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께 대한 소문”이란 2장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주님의 묵시를 말한다.
(합 2:2-3)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묵시란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일으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1장). 이에 대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악한 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의로운 자를 심판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합 2: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
반드시 그렇게 심판을 하실 것이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이라고 하는 바벨론도 모두가 “힘이 제일”이라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면서 힘이 없는 약자들을 멸시하고 짓밟고 있었다.(1장)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힘을 제일로 여기고 힘을 숭상하고 그 힘을 소유하려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이고 당연하지만, 이런 세상 중에서도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사람들, 진짜 선민들은 “힘”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이런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온 천하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묵시를 받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곧 3장인 것이다.
(2) 하나님을 알게 된 선지자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의 내용은 심판의 소식을 들었기에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는 것이다. 무서운 심판의 소식이 임한다는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주의 일” 곧 “부흥”이 나타나는 것이 심판이기에 3절 끝에서 선지자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오늘 신자라고 하는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구속의 일들을 알게 되었으니 그 구속의 일이 성취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를 든 설교 2번에서는 이 사실을 설명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 사람들도 원하는 것이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부흥이 아닌가? 2번 설교는 이런 부흥에 “예수라는 이름”만 입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라면, 설교 2에서처럼 “구속사의 큰 일”을 아는 신자라면,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 부흥을 이루게 되는 주의 일로서의 심판의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판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사도 요한의 기도와 동일한 기도이다.
(계 22:20-21)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3) “주의 일”로서의 “부흥”은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면 부흥케 하시는 주의 일 곧 “심판”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주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그 심판의 무시무시함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이 부흥이란 의미가 오늘날 말하는 교회 성장이나 신자들의 삶의 번영 같은 것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인간들이 꿈꾸는 교회 성장이나 형통과 번영이라는 세속적 욕망을 부숴 버리고, 참된 부흥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주의 일”과 “부흥”이 무엇인가는 3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합 3:3-6) 3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5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 밑에서 나오도다 6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데만”은 에돔의 주요 거주지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며 “바란 산”은 에돔과 시내 산 사이의산이 많은 지역을 가리킨다. 즉 이 두 곳은 시내 산 주변에 있는 산들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처럼 그분의 영광과 위엄과 능력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고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온다는 표현은 전염병혹은 불과 같은 질병으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 때의 열 가지 재앙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반역할 때에 쏟아진 재앙들을 연상시킨다.
(합 3:7-12) 7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10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12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둘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구산”은 메소포타미아 왕이었던 “구산 리사다임”을 가리키며,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한 족속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고 괴롭혔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사사 옷니엘과 기드온에 의해 각각 진멸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 본문은 사사시대에 사사들의 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했지만, 사실은 사사들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사들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서 보이시는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8절 이하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표현들은, 구원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주님의 부흥을 나타내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이 본문의 표현이다.
과연 우리가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이런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 어떤 형통과 번영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본문이 표현하고 있는 주의 분노와 심판을 과연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주의 분노를 알게 된 사람이라면 그는 무엇을 구하게 되겠는가? 당연히 하박국 선지자처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는 간구를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 신자들은 주의 소문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의 묵시를 받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런 두려운 주님의 심판 앞에서 구할 것이라고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4) “주의 일”로서의 “심판과 구원”
(3:13-16) 13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14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16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런데 본문은 주의 구원을 받는 자들이 그 심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들은 주의 백성이며 주의 기름 받은 자들이다. “기름 받은 자”란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시고 그 권위를 인정하신 자를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는 것이다. 그리고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심으로 철저한 패망에 이르게 하신다.
결국 이는 궁극적으로 불의한 인간들의 죄를 그 바닥까지 드러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처럼 죄가 드러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는 자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하박국 선지자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하박국 선지자처럼 전인격이 떨게 되어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자들이다. 곧 회개의 모습이다. 이 모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 중에서도 남기신 참된 백성인 것이며, 이를 드러내는 것이 곧 “주의 일”로서의 진노와 심판 후에 오는 부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편적인 “부흥” 설교에서는 이런 주님 앞에서의 회개까지도 인간의 소원이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회개하면 그래서 심령이 부흥되면 지금까지 안 되던 일들이 다 잘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가 나의 형통과 번영에 있는 것이다. 1번 설교에서는 말씀의 부흥, 기도의 부흥, 열매의 부흥, 성령의 능력으로서의 부흥 등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왜 부흥을 말했는지를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의 일의 소식 곧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왜 부흥케 해달라고 간구했는지를 2번 설교에서 표현했듯이 “구속사의 큰 일”이라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구속사적으로 “주의 일”이란 곧 “십자가의 일”을 의미한다. 십자가로 말마암아 하나님께서 불의한 인간의 죄를 아들을 통하여 드러나게 하시는 일이다. 이 주의 일로 말미암아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불의한 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만이 살 길임을 알고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일로 인한 신자의 부흥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의 진정한 부흥이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선포됨으로써, 듣는 자들이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될 때에야 그리고 그 가운데서 불의한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에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주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모든 교회가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하여야 할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이를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인용해서 제시해 보기로 한다.
(벧후 3:10-13)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계 6:9-11)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계 22:20-21)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신약의 사도들이 표현했던 세상의 종말을 향한 간절한 간구의 모습들이야말로 주의 일로서의 부흥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구속사의 큰 일”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속히 임하기를, 다시 말하면 완성되기를 원하는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일이며 또한 신자들의 큰 일 아닌가?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이 사용하는 “주의 일”로서의 “부흥”을 간구하는 모습은 전혀 하박국 선지자가 간구하는 부흥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주의 일을 알고 그분 앞에서 떨며 회개하며 경배하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진정한 부흥이란 신자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5) 신자의 부흥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일을 수년 내에 이루어 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그 일을 부흥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 부흥의 소식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이 두려움에 하박국 선지자는 전 인격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께 질문했던 “어떻게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할 수 있는가?” 따위의 질문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를 때나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된 선지자는, 참 된 부흥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선지자는, 최후의 고백을 하고 있다.
(합 3:17-19)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이것이 주의 일로서의 참 된 부흥이 임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무엇이 기쁘고 즐거운 것인지를 이제 알게 된 것이다. 세상것들의 소유가 많게 되고 일이 잘 되어 가문이 형통하게 되는 것이 복이 아니고, 또한 가진 것이 없음으로 불통의 인생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저주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갈대아인들의 침략으로 인해서 비록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게 되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한 그 고백이 오늘 신자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사슴처럼 험한 산 높고 위험한 절벽길을 타고 다녀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이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 주의 백성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니 기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오늘 신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판과 구원이 속히 임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부흥을 갈구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결 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교회성장과 부흥의 표어로 합 3:2의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는 말씀을 근거하여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한, 즉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박국서 본문을 통하여 제시하였다.
물론 사람들은 신자의 심령이 부흥되고 그로 인해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1번 설교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세속적 생각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흥이란 양적으로 몇 배로 불어나는 물질적 부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에서 일어날 구속사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부흥은 “주님의 일”로서, 예시했던 설교 2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구속사의 큰 일”인 것이다. 오늘 교회 강단이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설교하고 있다면 아마도 이런 반론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부흥이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심판과 구원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하박국서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불의한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도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중에 있는 주님의 기름 받은 자들 곧 하나님의 자기백성들이 비로소 구원된다는 것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따라서 이 심판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의인이 고난을 겪고 악인이 형통하게 되는, 불합리한 현실 속에 서 있던 하박국 선지자가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중에서도 구원받은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게 된 것처럼,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 라는 고백과 간구가 오늘 신자들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박국은 하나님의 묵시를 통하여 구원하심이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이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잘 살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나의 능력과 힘으로 산다”라고 외치고 있을 때, 신자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외쳐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교회와 신자의 “참 된 부흥”의 모습이라고 본고는 결론을 맺는 것이다.
- 이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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