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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적 조직신학 - 제6부 교회론 : 교회의 본질, 속성, 참교회, 조직, 성례

하나님아들 2015. 1. 24. 21:18

성경적 조직신학 - 제6부 교회론 : 교회의 본질, 속성, 참교회, 조직, 성례

 

제6부: 교회론





교회론(Ecclesiology)은 교회와 은혜의 수단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교회론에 중요한 성경책들은 에베소서(교회의 본질, 속성들), 고린도전서(교회의 문제들, 성례),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유다서(이단 배격), 사도행전(교회의 사명인 전도), 고린도후서(사도직, 목사직),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목사, 장로, 집사의 자격과 임무) 등이다.







교회론의 주요 주제들







1. 교회의 본질



2. 교회의 속성



3. 참 교회의 표



4. 교회의 권세와 임무



5. 교회의 조직과 정치



6. 성례(聖禮)









1. 교회의 본질





'교회'(敎會)라는 우리 말은 '교(敎)를 믿는 자들의 모임(會)'이라는 뜻일 것이다. '교회'라는 영어 처치 church나 독일어 키르헤 kirche는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인 헬라어 퀴리아케 ՊՕՑՉՁՊظ에서 나왔다고 한다.



'교회'라는 구약의 용어는 카할과 에다 인데, 이 말들의 차이는 없는 것 같고 흩어져 살고 있든지 모여 있든지 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 말은 '회중'(congregation) 혹은 '총회'(assembly)로 번역된다. 카할은 구약에서 123회 사용되었으며 동사 카할 은 '모으다, 소집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출애굽기 12:6에서는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으며('회중'), 신명기 5:22에서는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아래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다('총회'). 에다는 구약에서 149회 사용되었으며 그 어원 야아드는 '약속하여 모인다'는 뜻이다. 한글 성경에는 주로 '회중'으로 번역되었다(출 12:3).



'교회'라는 말은 신약에서 에클레시아 ִՊՊՋՇՓԿՁ이며 11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 칼레오 ՊՁՋԽՙ는 '부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구약의 카할과 에다와 같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낸 무리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때로는 세속적 모임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9:39에서는 '민회'로, 19:41에서는 단순히 '모임'으로 번역되어 있다.






'성도의 교통'



교회란 무어라고 정의될 수 있는가? 교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변증가들, 예를 들어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교회를 단순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중세 시대는 교회의 외적 조직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교회관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며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곳에 참 교회가 있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떠난 외적 조직의 계승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교회에 대해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게 진술하였다.



벨직 신앙고백(1516년) 27조, "(하나의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의 구원을 기대하고, 그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거룩케 되고 인침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거룩한 회중이요 모임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17장,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 모으신 신실한 자들의 무리이다. . . .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교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1, 2절, "무형적(無形的)인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또 모여질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요 충만이다," "복음 아래서 역시 공동적 혹은 세계적인 유형적(有形的) 교회는 전에 율법 아래서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일반적 가능성이 없다."



개혁신학은 한마디로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이라고 정의하였다. '교통'이라는 말은 '연합과 교제'를 의미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들과 활동들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외적 조직을 의미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회라는 말이 성경에 사용된 예들을 살펴보면서 이 사실을 확인해보자.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제일 처음 '교회'라는 말이 나온 곳이다. 주께서는 교회의 건립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자신의 중요한 사역임을 증거하셨다. '내 교회'라는 말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를 가리켰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사본).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 곳인데, 이 말은 특별한 뜻을 가졌다기보다 단순히 예수 믿고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받았던 3천 명의 신입교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교회가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킴을 나타낸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전통사본).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이 구절들은 교회가 단순히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킴을 보인다. 사실, 사도 시대의 교회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특별한 명칭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특별한 예배당도 없었다.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고린도전서 16:19, ". . .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골로새서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빌레몬서 1, 2, ". . . 동역자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이 구절들이 증거하듯이, 사도 시대의 교회는 흔히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인 무리를 가리켰다.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의 본질을 잘 보인다. 교회는 어느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인 모임을 가리켰다. 그것은 어떤 외적 조직체가 아니었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본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모든 성도는 다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가족이며 집이다.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 에베소서 2:20, 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또 본문은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가 될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교회가 건립되고 거룩하고 온전케 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시는 것도 "성도를 온전케 하며 . .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2). 하나님의 목적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다(엡 5:27). 하나님의 뜻은 성도 개개인이 거룩하고 흠 없는 온전한 자로 나타나는 것이요 그들의 연합체인 교회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도들은 에베소서 1:4-14이 증거하는 대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들의 수는 온 세상에 충만케 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본질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에 있다. 여러분은 교회의 참 회원인가?







무형적 교회와 유형적 교회





교회는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교회를 무형적 교회와 유형적 교회로 구분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땅 위의 교회들의 불완전함을 생각할 때 이러한 구분은 더욱 필요하다.



우선, 참 교회는 무형적(無形的) 교회로 이해된다. 그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 즉 이미 구원받았고 또 지금 구원받고 있고 또 장차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는 오직 그들로만 구성되며 그들의 수는 충만할 것이다.



참 교회를 무형적 교회로 이해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이미 천국 간 자들이나 장차 구원을 얻을 자들이나 아니 현재라도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또 우리는 현실적으로 현재의 교회 속에서도 구원받은 참 신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거짓 신자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교회는 단지 무형적 교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유형적(有形的) 교회이다. 교회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되며 그들로 구성된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이다. 특히 교회는 공동적 신앙고백과 예배, 성례, 그리고 외적 조직 등에서 그 유형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유형적 교회의 한 특징은 그 회중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세상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 교회 속에는 종종 위선자들이나 가룟 유다 같은 이들이 섞여 있다.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의 교회의 모습에서나, 또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 및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과 그 이후 교회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는 여러 가지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고 참 교인답지 않은 자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참 교회답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 왔다.





교회의 건립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 건설 중에 있다. 에베소서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께서 교회에 목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2).



그러나 교회가 단순히 한 조직체가 아니므로, 교회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교회의 건립이 단순히 예배당 건축이나 교인수의 증가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예배당 건축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예배당은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해서 건축하는 것뿐이다. 교인수나 헌금 액수 등도 비록 복음의 결실을 측정하는 요소들이 될 수 있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교회 건립은 오직 영적 건립이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결신자들을 얻고 그들을 성경 말씀으로 성실히 가르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 건립에 있어서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 영혼의 영적 성장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들, 즉 세례교인 혹은 입교인을 신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지교회 목사와 당회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성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기본적 의무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흐려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부패는 부분적으로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불성실하였기 때문에 왔다. 신명기 23:2, 3,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 . .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신명기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또 교회에 직분이나 회의 등의 조직은 비록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천주교회는 교황과 주교 회의를 중심한 소위 '가르치는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조직을 떠나서는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외적 조직이란 본질적이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탈된 조직은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럽다.



또한, 교회에서 성경적, 역사적 바른 교훈의 계승은 외적 조직의 계승과 비교할 수 없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수되어 온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옛신앙을 믿고 고백하고 전파해야 한다. 교회에서 바른 교훈의 계승이 없는 단순한 조직의 계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교회 혹은 교단이 아무리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전혀 무의미하며 참 교회의 계승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회들이 평양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삼열 박사나 총회신학교의 기둥과 같았던 박형룡 박사의 바른 신앙을 지키고 전수하지 못한다면, 그 전통과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교회에서 바른 신학의 교육과 전수(傳授)는 생명같이 중요하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체계적 바른 지식이며 역사적 개혁신학은 성경적으로 바른 신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혁신학을 바르게 연구하고 파악하며 또 후대에게 성실히 가르치고 전달해야 한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참 교회 건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






천주교회의 교회관





교회 역사상, 2세기 후반부터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분파들과 이단들에 대항하여 교회의 외형적 일치와 주교(主敎, 한 교구를 맡은 성직자)의 역할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다. 주후 3세기, 터툴리안의 제자요 카르타고의 주교이었던 키프리안(Cyprian, 258년경에 사망)은 처음으로 감독교회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이 교회에 대해 가진 생각은 다음과 같다: ① 주교(bishop, 혹은 감독)는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② 주교는 교회의 기초요 주인이다(마 16:18). 따라서 교인이 교회에 가입하거나 나가는 일은 주교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③ 주교는 제사장이며, 그가 집행하는 예배는 제사이다. ④ 주교들의 연합체인 주교회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이다. ⑤ 주교들은 모두 동등하다. 아직 로마 주교의 우월권은 주장되지 않았다. ⑥ 주교에게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교에게 대항하는 자는 교회의 교제를 상실하고 따라서 구원을 상실한다. ⑦ 참된 교인들은 교회에게 복종하고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교회 밖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여기에 유형적 일체성에 의한 전세계적 교회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것은 천주교회적 오류의 씨앗이다.



주후 4, 5세기, 어거스틴(Augustine, 354-430년)은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보면서도, 키프리안의 감독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교회관은 그의 구원관과 일치하지 않았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도들의 교통이라는 교회의 본질보다 교직 제도와 같은 외적 조직을 점점 강조하였다. 이것은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교직 제도에 대한 강조는 마침내 교황 제도로 발전되었다. 주교직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대도시 총대주교(Patriarch)의 직으로 발전되고, 주후 533년 비쟌틴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 주교의 수위성(首位性)을 인정하고, 607년 로마 주교 보니페이스 3세는 역사상 최초로 자신을 '세계적 주교'(Universal Bishop)라고 불렀다. 이것이 교황 제도의 시작이었다.



천주교회의 교회관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종교개혁 이후에 작성되었으나, 중세 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트렌트 요리문답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교회는 "하나의 무형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의 유형적 머리인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의 후계자를 가진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신실한 자들의 단체"라고 했다. 16세기 말 천주교회의 탁월한 변호자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동일한 기독교 신앙의 고백과 동일한 성례들의 사용에 의하여 연합되고, 합법적 목사들과 첫째로 지구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로마 교황의 치리 하에 있는 모든 무리들"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천주교회에 의하면, 교황을 우두머리로 한 교회의 외적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천주교회는 또 '가르치는 교회'와 '듣고 배우는 교회'를 구별하며, 전자를 더 중시하고 교회의 유일성, 보편성, 사도성, 무오성 등의 속성들을 그것에 돌린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은혜와 복들을 나누어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자기들의 교회는 독점적으로 구원의 기관이며 구원의 중보자이다.



한편, 11세기에 분리되었던 동방의 헬라 정교회는 천주교회와 같이 외적 조직을 중시하나, 교황 제도를 인정치 않고 그 대신 교회의 주교단과 대회들에 무오적 권위를 둔다. 그들에 의하면, 권위의 궁극적 원천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의 공통적, 불변적 마음'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교회만 지상에서 참된 유일한 교회라고 본다.



교황 중심의 성직 조직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보는 천주교회의 교회관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교회의 조직은 필요하며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교회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더욱이, 교회의 목사나 회의나 전통이 성경 교훈에서 이탈하였을 경우, 그것은 결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참 교회는 어떤 인물이나 회의나 전통에 있지 않다. 참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있다. 그 외의 것들은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성경의 바른 교훈에 일치할 때만 존중될 수 있고 또 존중되어야 할 뿐인 것이다.








2. 교회의 속성







주후 381년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세계적,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성경이 증거하는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을 잘 드러낸다.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세계적이다.






하나됨(일체성, unity)





교회의 첫번째 속성은 하나됨이다. 교회는 하나이다. 전세계에 많은 교회들과 교단들과 교파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로 구성된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세계에 오직 하나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한 교회에 속한다. 벨직 신앙고백 27조는 "이 교회는 세상 처음부터 있었고 세상 끝까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1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





교회는 인류 창조 때로부터 있었다. 물론 그 구성원과 예배 방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에 있어서 교회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시대적 독특성을 가진다. 구약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성막 혹은 성전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구성되었으나, 신약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나라 사람들로 구성된다. 구약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통해 예표(豫表)되었으나, 신약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교회가 아니고 동질적(同質的)인 한 교회이다.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가 동질적인 한 교회라는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 교회들에게는 동일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 '회중'이나 '총회'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할과 에다는 헬라어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바로 그 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 원리가 모든 시대에 같다.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만 죄씻음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비록 구약 시대에 도덕법이 강조되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 등 의식법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셋째로, 두 시대에 교인들의 신분과 특권이 같다. 마태복음 8:11,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하나됨의 성격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은 영적 차원, 교리적 차원, 유형적(有形的) 차원,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영적인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엡 1:23; 고전 12:27)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비록 세상에서 그들이 나뉘어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나뉠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로,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교리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교리(敎理)는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즉 바른 교리 안에서 하나이다. 디도서 1:4,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 ՊՏՉՍ׃ ՐԿՓՔՉՒ)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교회의 하나됨은 바른 교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공동적 이해와 고백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11, 20-21에서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성도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되심과 같은 종류의 하나됨이며 그것은 진리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됨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3-6에서 성도들의 하나됨의 근거로서 성령과 소망과 주와 믿음과 세례와 하나님 등 여섯 가지가 각각 하나임을 들었는데, 이것은 성도들의 하나됨이 교리적임을 잘 증거한다.



그러므로 B. B. 워필드는 말하기를, "신약의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였다"고 했고, 마틴 로이드 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교회들은 인간의 무지와 오해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같은 이해와 신앙고백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교파가 생긴 주요 이유이지만, 적어도 복음적 개신교단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기본적 진리들에 있어서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교회들은 그 정도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같은 이해와 신앙고백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외적으로도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분열과 파당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파당에 대해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라고 지적하였다(고전 1:13). 또 그는 에베소 교회에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고(엡 4:3),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육체의 죄악된 일들이라고 열거했다(갈 5:19-21). 우리는 교회들의 유형적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교회의 유형적 하나됨은 연합 예배와 신앙고백, 성도들의 교제, 복음 전파를 위한 협력, 그리고 조직체적 연합 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함(성결성, holiness)





교회의 두 번째 속성은 거룩함이다. 교회는 거룩하다. 에베소서 5:26, 27,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법적인 면에서와 실제적인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법적으로 교회는 이미 거룩하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진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헤기아스메노이스 ֿgՉՁՓՌԽՍՏՉՒ)(원문 직역)."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gՉՁՓՌԽՍՏՉ, 완료수동태분사)." 이것이 칭의(稱義)의 진리에 담긴 은혜이다.



그러나 교회는 실제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다(엡 1:22, 23). 몸은 머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또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성전은 거룩하며 거룩해야 한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아가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해 순결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한마디로, 교회는 주를 사랑하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거룩한 교회이어야 한다.



교회는 우선 교리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들을 교회에 위탁하셨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딤전 3:15) 이 진리를 보수(保守)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리적으로 매우 부패되어 있다. 역사적 대교단들의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심지어 천주교회보다도 더, 복음진리에서 이탈한 이단적이고 배교적인 사상이다. R. B. 카이퍼는 말하기를,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대교단들과 그 밖의 많은 작은 교단들이 신학적 자유주의의 침해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초자연적 중생(重生)이 구원의 본질임을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자유주의 신학은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 기존하는 역사적 교회들 속에, 특히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 속에 들어와 신학생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교회는 윤리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윤리적으로도 매우 부패되어 있다. 교권주의와 명예심으로 인한 교회들의 분열, 교인들의 세속주의적 생활과 돈 사랑, 술과 담배, 영화와 춤 등의 무절제한 허용, 특히 근래에 낙태, 동성애, 안락사(安樂死) 등의 허용과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용납, 현대기독교음악(CCM), 열린 예배 등이 물밀듯이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속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참된 교회들은 이러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배격해야 한다.



지상의 교회는 흔히 전투하는 교회로 표현된다. 세상에 있는 교회 곧 성도들은 마귀와 악령들과 싸움을 한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다. 에베소서 6:10-13,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선한 싸움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승리한 교회라고 불리운다. 그들은 지금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히브리서 4:10,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 . .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브리서 12:22, 23, "하늘의 예루살렘,"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교회는 땅 위에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






세계적임(catholicity)





교회의 세 번째 속성은 세계적임이다. 교회는 세계적이다. 교회의 세계적 속성은 하나님의 교회가 전 세계에 퍼져 있고 각 족속,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의 수가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을 말한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충만한 수의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 11:25, 26,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라는 구절의 '공회'(公會, the catholic church)는 이 세계적 교회를 의미한다. 천주교회가 자신을 '카톨릭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비록 그것이 부당한 적용이지만 이런 의미에서이다. 하나님의 참 교회는 세계적이다. 교회의 이러한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를 생각하는 우리의 시야를 좀더 넓게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좀더 포용적이게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적 모습을 가지지는 않았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묘사하며 그것은 작은 형태로부터 세계적인 형태로 성장할 것을 암시하였다. 교회는 "적은 무리"(눅 12:32)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과 같이 세상에 뿌려지고 시작되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곡식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그물 비유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사람들은 중생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간다(요 3:5). 마태복음 12:28,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20, 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므로 중생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그들이 또한 교회를 구성하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요한계시록 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그러나 세계적 교회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이 미래적 단계를 소망한다. 영광의 천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초자연적 방식으로 올 것이다. 마태복음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빌립보서 3:20, "우리의 시민권[나라]은 하늘에 있는지라."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베드로후서 1:10, 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을 기억하며 참된 교회를 건립해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 유형적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또 교회는 교리적, 윤리적 거룩함을 힘써 지켜야 한다. 또 교회는 세계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특히, 교회는 하나됨을 위해 거룩함을 버려서는 안 되고, 또 거룩함을 위해 하나됨을 쉽게 버려서도 안 된다. 이것은 물론 실제적으로 참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충성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됨과 거룩함을 둘 다 성실히 지키고자 힘쓸 때, 교회는 참교회다워질 것이다.







3. 참 교회의 표







그리스도인은 참된 교회에 속하여 주님을 섬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고, 그 순결성의 정도도 다양하여 그 중에는 비교적 순결한 교회들도 있으나 심히 불순결한 교회들도 있다. 어떤 교회의 순결성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 즉 참된 교회를 분별할 기준은 무엇일까? 참 교회의 표는 무엇이겠는가?



우선 분명한 것은, 참된 교회의 기준이 외적인 것들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크기나 교인의 수 혹은 예배당의 규모가 참된 교회의 표는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 참된 교회의 표라면, 세계에서 교세가 가장 큰 천주교회는 가장 참된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종교 개혁자들은 강조하기를, 참된 교회는 대다수가 문제를 결정하듯이 그것의 크기나 사람 수에 의해 구별되기 불능하다. 구약과 신약의 전교회 역사는 큰 교회라는 관념을 정죄한다. . . . 교회가 세계에서 자라서 커지고 왕성함에 따라 통상으로 배교하며 부패하여지고, 참된 교회는 흔히 육체와 세상의 표준에 따라 약하고 멸시받는 소수로 된다"라고 하였다.






세 가지 표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를 3가지로 말해 왔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



둘째, 성례들의 바른 시행;



셋째, 권징의 성실한 실행.



이 중에서도 첫번째 표가 가장 중요하다.



참된 교회의 첫번째 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이다. 앞에서 생각한 대로, 교회의 본질은 성도들의 교통이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표현되기도 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3:11,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리운다(딤전 3:15).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인 교회에게 당신의 진리를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이 진리를 보수(保守)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해야 할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기초 그리고 교회의 임무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는 참된 교회의 표이며, 이것은 가장 중요하다. 어떤 교회의 순결성의 정도는,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바르게 전파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킨 교회들, 예를 들어, 천주교회,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회, 안식교회 등은 참 교회일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는 교회들도 분명히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리고 있다.



참된 교회의 두 번째 표는 성례들의 바른 시행이다. 세례와 성찬의 성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유형적(有形的) 표현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성례들의 바른 시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의 바른 선포요 성경적 복음 신앙의 바른 고백인 것이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11:27-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례들을 성경적 의미대로 바르게 시행하지 않고 미신적이게 하거나 그것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교회는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릴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모독적이고 매우 미신적인 미사를 고집하는 천주교회는 이런 점에서 참된 교회일 수 없다.



참된 교회의 세 번째 표는 권징의 바른 실행이다. 권징(discipline)이라는 말은 첫째 성도들의 생활 훈련과 둘째 권징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신앙은 생활과 일치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은 마땅히 책망을 받고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실한 신앙 훈련과 권징은 참된 교회의 표이며, 권징을 폐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를 상실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고, 그 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권징에 대해 밝히 가르친다. 마태복음 18:15-18,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고린도전서 5:6, 11-13,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2세기의 몬타누스파, 3세기의 노바시안파, 4세기의 도나투스파 등은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참 교회의 표가 교인들의 성결성이라고 보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것은 옳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경의 교훈을 넘어서는 치우친 견해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몬타누스파는 사람이 세례받은 후에 범하는 큰 죄는 순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알려지며, 노바시안파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대박해 때에 변절했던 자들을 받지 않다가 후에 재세례를 베풀고 받았다고 하며, 도나투스파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의 박해 때에 동일한 경향을 보였고 엄격한 교회 권징과 순결한 교인 자격과 목사의 자격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현대교회문제







오늘날 교회들 안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은 한마디로 이단적인데, 이 신학이 오늘날 기독교의 대교단들과 신학교들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① 성경의 신빙성, 신적 권위, 무오(無誤), ②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형벌, ③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및 처녀 탄생, ④ 그의 기적들, ⑤ 그의 형벌적 대속(代贖), ⑥ 그의 부활의 확실성, ⑦ 그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 사상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며 명백히 사탄에게서 나온 이단 사상이다.



기독교는 불변적 진리들 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기독교의 바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 14,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7, 10, 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 .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현대교회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연합주의 혹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이다. 연합주의는 세계의 모든 교회들의 연합을 추구한다. 연합주의의 문제점은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계 안에 존재하는 각종 신학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용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에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물들어 있으므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곧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을 포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연합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며 궁극적으로 천주교회와의 연합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교회라고 증거했고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천주교회는 그 근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천주교회와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매우 배신적인 행위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심지어 이방 종교들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적 기관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부정하며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타종교와 이념과의 대화 분과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가 그 대표적 예이다.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출판한 그의 책 성경과 타종교인들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참된 교회는 일체성(unity)과 성결성(purity)을 둘 다 성실히 지켜야 한다. 거룩함이 없는 하나는 참된 하나가 아니며, 하나가 되지 못한 거룩함은 참된 거룩이 아니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교회들의 문제와 갈등이 있다. 성결성을 빙자한 교회들의 부정당한 분열과 분파주의도 명백히 잘못이지만, 오늘날 교회들의 보다 큰 문제는 잘못된 연합주의의 문제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포용주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교회의 하나됨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더욱이, 주께서는 교회에게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배격하고 거기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 .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R. B. 카이퍼는 교회가 외적으로만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고 내적으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포용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의의(意義) 있는 교리적 논쟁에서 중간 노선을 취하는 평화주의(平和主義)는 많은 교회를 폐허로 만들었다. . . . 오늘날 교회의 타락상은 얼마나 슬픈가? 교리적 무관심의 암(癌)은 교회의 생명력을 좀먹는다. 교회 합동을 위한 강한 요구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과도한 치중은 이 암종(癌腫)을 점점 더 악화시킨다.



현대교회의 심각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이다. 신복음주의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주장하지만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 혹은 교제 단절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즉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용하고 그들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단순히 복음주의라고 자주 불리운다.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므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을 마땅히 배격하고 그들과 분리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하고 협력하는 태도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순종이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뿐만 아니라, 성경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자들로부터의 교제도 단절하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와 신복음주의로부터의 분리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이 입장을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라고 부른다.



즉 근본주의는 (1) 성경적 근본 교리들의 보수와 (2)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성별)라는 두 요소를 가지며, 이것은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





현대교회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교회들은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 성실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는 동시에 악을 행하는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즉 분리(分離, separation)를 가르친다.



성경은 성도들이 어떤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분리하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이 교제치 말고 분리하라고 가르치는 대상은 네 부류의 사람들이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고린도후서 6:14-16,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여기에서 교제란 물론 교회적 교제 즉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에게 전도의 대상이지, 영적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이단자들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 18,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교리]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기독교 역사상 천주교회는 큰 이단이며, 19세기에 나타난 각종 이단 종파들과, 특히 20세기에 교회들을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은 가장 심각한 이단이다.



천주교회의 이단성은 분명하다. 천주교회는 성경의 유일한 절대권위성을 넘어서서 교황의 무오한 권위를 주장한다.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 승천, 중보사역을 주장하고 그에게 중보자와 보혜사 등의 칭호를 돌리고 그에게 기도한다. 또 천주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명백히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천주교회는 미사를 그리스도의 계속적 속죄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적어도 이런 점들에서 천주교회는 명백히 비성경적 이단이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빙성, 신적 권위, 무오성(無誤性),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형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및 처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형벌적 대속(代贖), 그의 부활의 확실성, 그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이단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참된 교회들은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드러난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교회가 성도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드러난 일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적절한 권징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넷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순종치 않는 형제들과도 교제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치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오늘날의 신복음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비록 복음 진리를 믿는 형제들일지라도, 고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있고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자들이다.


성도들은 왜 이런 대상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분리해야 하는가?



첫째로, 성도들은 교회의 본질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교회는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생각할 때 바른 교훈과 그것에 대한 순종은 교회의 기본적 요소이다. 여기에 성도들 간의 교제의 선, 그리고 교회와 세상 간의 경계선이 있다.



둘째로, 성도들은 교회의 거룩함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드러난 오류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악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분리가 필요하다. 교리적 악이든지 윤리적 악이든지 악은 누룩처럼 퍼져나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전 5:6; 갈 5:9). 디모데후서 2:17,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그러므로 악한 자들과 교제를 끊고 분리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점점 더 부패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는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선 교회 안에서 권징의 단계들, 즉 권계(勸戒, 권면과 책망)와 일시적 수찬 정지(성찬에 참여함을 일시적으로 금지함)와 제명 출교(교회에서 내어쫓음) 등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권징의 원리와 동일하다.



오늘날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으로써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배교적이게 되고 있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만일 지교회 혹은 지교단이 자유주의화되거나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한다면,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그 교회의 갱신을 위해 합법적 방법을 사용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의 갱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예를 들어 교회의 지도층의 다수가 배교적이거나 배교를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신실한 종들은 그 교회 혹은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 개혁 때와 같이 지교회 혹은 교단이 전체적으로 부패하고 배교적일 때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그 교회 혹은 교단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부득이한 상황에서, 혹은 교회적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그것과 싸우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들은 자신의 신앙의 절개와 순수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 24, 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또 오늘날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를 포용하는 신복음주의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보수적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연합 전도집회, 연합 성찬식, 및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 발행 등의 연합적 사업 혹은 활동들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는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급한 단절과 분리는 교회의 일체성을 저버리며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표와 영광을 손상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제를 끊을 때 매우 신중히 처신해야 하며, 또 그때에도 성도들은 항상 겸손과 사랑의 덕을 간직해야 한다. 자신을 남보다 높게 생각하는 교만이나 형제에 대한 미움은 악에 대한 타협보다 결코 작은 죄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4. 교회의 권세와 임무





교회의 권세





주께서는 교회에 세 가지 권세 혹은 권위를 주셨다.




교훈권





첫째는 가르치는 권세 즉 교훈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보수(保守)하는 권세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권세는 교회에 계승되었다.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하고 보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변호하였다. 빌립보서 1:7,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바가 됨이라." 디모데전서 3:15, "이 집[교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보수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 권세에 근거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교리 체계 즉 신학을 정립하며 신조나 신앙고백서 등을 작성한다. 교회의 밝은 미래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성실히 연구하고 보수하고 전파하는 데 있다.






치리권





둘째는 다스리는 권세 즉 치리권(治理權)이다. 이것은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권세이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질서 있게 운영되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린도전서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바르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교회가 헌법과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은 이 권세에 근거한 것이다.



또 주께서는 교회가 거룩함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교리적 혹은 윤리적 오류에 떨어진 자들에게 권징을 행사한다. 고린도전서 5:2, 13,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그러므로 교회가 정당하게 시행한 권징은 효력을 가진다.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권징의 원리는 구약에서도 밝히 나타나 있다. 구약율법 중 재판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사회법으로서 오늘날 세속국가에 직접 적용될 수 없으나, 그 원리가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교회는 간음하는 자들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신명기 13장은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면서,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확인했을 경우 그를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 . . 용서 없이"(8, 9절) 죽임으로 너희 중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5절). 또 어느 한 성읍이 이단이나 거짓 신비주의에 미혹되었을 때는 그것을 확인하면 그 성읍을 다 진멸하라고 하였다(12-15절). 이것은 오늘날 제명 출교에 해당된다.



권징의 목적은 네 가지다.



첫째는 범죄자를 회개시키기 위함이고,

둘째는 악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셋째는 주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넷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3). 권징의 방식은 세 단계이다.



첫째는 권계(勸戒, admonition, 권면과 책망)이고,

둘째는 일시적 수찬 정지(受餐停止--성찬에 참여함을 일시적으로 금지함)이고,

셋째는 제명 출교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4).



권징은 매우 중요하다. 권징은 주께서 교회에 명령하신 것이므로, 교회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성실히 권징하지 않는다면 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권징을 행하지 않은 교회들을 책망하셨다. 요한계시록 2:14, 20,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칼빈은 말하기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교회의 영혼이듯이, 권징은 그 힘줄의 역할을 하며, 그것을 통해 몸의 지체들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며 단합한다. 그러므로, 권징을 제거하거나 그것의 회복을 방해하려 하는 모든 자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적으로 하든지 무지해서 하든지 간에, 참으로 교회의 궁극적 와해(瓦解)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였다(기독교강요, 4. 12. 1).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는 주의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에서 권징을 폐하신 말씀이 아니고, 전체 교회의 완전 정화가 심판의 날까지 보류된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밝히 계시하신 바대로, 각 교회나 교단은 자체의 정화(淨化)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봉사권





셋째로, 주께서는 교회에 서로를 섬기는 권세, 즉 봉사권을 주셨다. 이것은 교회가 자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병자들을 위로하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교회의 권위는 섬기는 권위이다. 섬기는 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일부분이었다. 마태복음 4:23,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에 대해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20:25-28,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5:35-36, 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섬기는 일에 힘썼다.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6:1, "매일 구제에." 로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야고보서 5:14, 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베드로전서 4:9, 10,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교회의 임무





교회 즉 교인들의 모임인 단체로서의 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성경은 교회의 임무를 세 가지로 계시한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요, 둘째는 그 자체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요, 셋째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배





교회의 첫번째 임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지극히 기본적인 임무이며 따라서 교회의 기본적 임무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성도들에게서 찬송과 감사와 영광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적 태도이다. 예배가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예배에서의 찬송이나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공예배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단체적 경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예배 의식은 결코 회중을 즐겁게 하거나 회중의 기호(嗜好)에 맞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설교까지도, 먼저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회중들은 진지하게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하며, 그 다음에 회중들의 구원과 성장과 유익을 생각할 것이다.



예배의 방식에 있어서, 예배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유일한 중보자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의 속죄 사역과 십자가의 공로와 의(義)를 의지함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와 행위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하고 기도해야 한다.



예배는 또한 예수께서 요한복음 4:2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령(혹은 심령)과 진정(혹은 진리)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물론 주일날의 공예배가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지만, 신약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이나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결코 외형적이거나 의식적(儀式的)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부패된 마음은 종교를 내용이나 진심이 없이 의식화(儀式化)하고 형식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



예배는 또한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려져야 한다. 그것이 전통적인 예배 모범의 정신이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요즈음 일부 교회들에서는 '열린 예배'라고 하여서 교회의 전통적 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대형 자막에 비쳐지는 그림들),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록이나 랩 스타일)의 복음 성가와 밴드, 혹은 심지어 청바지 형태의 예배 복장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질서 있고 아름답고 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고전 14:33). 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교훈했다(빌 1:9, 10).



예배의 요소들에 관해, 신약 교회의 예배는 구약시대의 제사에 비해 매우 자유로우며, 찬송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헌금 등의 순서를 가진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詩)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초대 교회는 '매주일 첫날' 곧 일요일에 공적 집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빌립보서 4:18,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신약 교회의 예배와 구약 교회의 제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약의 예배가 구약 제사의 대치물은 아니다. 구약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 것이고, 부수적으로 성도들의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교훈적 의미가 있었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의 헌신의 삶 전체가 제사이므로 교회에서의 공적인 예배도 그런 의미에서는 제사이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가 독특한 의미를 가졌듯이, 신약 성도들의 예배가 제사라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즉 예배만이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찬송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 자체를 제사라고 계시한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 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영적 건립





교회의 두 번째 임무는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 자신을 영적으로 건립하고 성장시키는 것, 즉 건덕(建德, edification)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기 자신 즉 교인들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3). 이 명칭은 교회가 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인다. 몸이 자라듯이 교회도 자라간다. 에베소서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또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이 명칭은 교회가 지금 건축 중에 있다는 사실도 나타낸다. 에베소서 2:21, 22,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교회의 영적 건립의 이 임무 때문에, 주께서는 이를 위해 교회에 목사들을 주셨고 어느 정도의 조직을 주셨다. 에베소서 4:11-13, "그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임무는 특히 교회의 교훈권과 관계된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런 임무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교회는 이 임무를 위해 또한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구제에도 힘쓴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 . .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요한복음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도행전 2:44-45,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 . . 나눠주고." 고린도후서 8:8, "너희는 . . . 이 은혜[성도를 섬기는 일]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전도





교회의 세 번째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특별한 임무 곧 사명(使命, mission)이다. 세계 만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이것이 선교(宣敎, mission)이다. 선교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며 그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죄인들의 영혼의 구원 즉 그들의 영생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죽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또 그는 승천(昇天)하시기 전 그의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부탁하셨다. 마태복음 28:19, 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 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교회는 그 어떤 일들보다도 전도(傳道)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힘을 합하여 세계 복음화(福音化)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 전도자들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그들을 불러 모집하고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물질과 기도로 후원해야 한다. 마태복음 9:37, 38,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에베소서 4:11, "그가 . . .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주셨으니." 디도서 1:3, "이 전도는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8:3,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빌립보서 4:14-18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자체를 위한 영적 건립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전도의 임무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 우선 자주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회 정치적 활동들은 아님







사회 정치적 활동들이 교회의 사명인가 하는 문제는 근래에 자유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의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과 죤 스타트 같은 어떤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다. 그들은 교회가 사회 정치적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총체적 선교 개념'(the holistic concept of mission)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총체적 선교 개념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사회 참여나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할 일이지만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님의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사회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런 일들에 관심이 없는 말씀과 태도와 행동을 하셨다. 누가복음 12:13, 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더욱이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자신의 사명과 임무가 죄인을 구원하는 일, 즉 전도의 일임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 .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永生)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물론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그의 병고침은 그의 긍휼과 능력의 당연한 표현이요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이었으며, 그의 사역에 있어서 부수적이고 제한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병을 고치려고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또 많은 경우 병고침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의 주위에서 그를 믿었던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빈번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8:2, 3, 4, 10, 13; 10:21, 22, 28, 29).



둘째로, 초대 교회의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초대 교회는 주께로부터 사회 정치 활동에 대한 명령을 받지 않았고, 그런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사도들이 주 예수께 받은 것은 오직 전도에 대한 명령이었고 그들은 그 명령에 순종했고 그 일을 위해 힘썼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서들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에서 분명하다.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5은 진술하기를,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국가의 일과 교회의 일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교회는 교회의 본연의 임무들에 충실해야 하며 국가의 일들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 국가나 위정자들에 대해, 성경은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세금을 내며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2:1, 2; 롬 13:1-7; 벧전 2:13, 14).



사회 개선이나 정치 개혁의 일들은 필요하고 선한 일들이지만, 그것들은 교회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일들이 아니고, 성도 개개인이 그의 직업에서와 그의 시민으로서의 의무 수행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즉 사회 참여나 정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일이지, 성도들의 모임 즉 단체인 교회의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학교가 아닌 유치원이나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설립과 경영 등의 일반교육적 활동들이나,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양노원의 설립과 경영 등의 자선사업적 활동들이나, 각종 교양강좌나 음악이나 미술 등의 문화적, 예술적 활동들은 성도 개인의 일들은 될 수 있어도, 단체인 교회의 임무나 사명은 될 수 없다. 교회는 그런 일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일들에 재능과 관심을 가진 교인들로 이사회나 위원회를 구성하여 계획하고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5. 교회의 조직과 정치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성도 상호 간에도 연합되어 있는 유기체적 몸과 같지만, 그것은 또한 외형적으로 하나의 조직체이다. 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의 직분자들이 있고 각 부서와 기관과 구역 등의 조직들이 있다. 또한 개체 교회 외에도 노회와 총회 등의 큰 회의들이 있다.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자만 필요한 요소이다.





성경은 초대 교회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예를 들면, 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마 28:19),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위한 자격 규정(딤전 3장), 교회 집회의 순서들(고전 14:26), 성찬의 규례(고전 11:23-26), 헌금의 규례(고전 16:1, 2), 권징(고전 5장), 과부들의 등록과 관리(딤전 5:9), 교회에 시행되고 있는 규례(고전 11:16), 질서의 필요성(고전 14:40) 등의 말씀들이 그러하다.








세 종류의 정치 형태들





교회 역사상 교회 정치에 있어서 세 종류의 형태들이 있었다. 첫번째는 감독정치(Episcopalism)이다. 감독정치는 교회가 주교들 혹은 감독들, bishops)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의하면, 주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교인들을 감독하며 그들에게만 교회 치리(治理)의 권한이 있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없다. 주교는 여러 교회들을 관할하고 치리하며 또 성직 임명권을 가진다. 영국교회(성공회)와 감독교회가 이런 정치 형태를 취하며, 천주교회의 교황제도는 감독정치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두 번째는 회중정치(Congregationalism)이다. 회중정치는 교회가 교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의하면, 목사는 지교회의 한 회원에 불과하며, 교인들 위에 감독의 권위를 가지는 사람들이 따로 없다. 또 지교회는 개체성과 독립성을 가지며 그것을 간섭하는 노회나 총회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협의체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정치 형태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장로정치(Presbyterianism)이다. 장로정치는 감독정치와 회중정치의 장단점을 성경적으로 보완한 형태로서, 교회가 교인들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들, 즉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방식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의정치(代議政治)이다. 이 방식에서는 일반 교인들의 권한과 목사의 권한이 둘다 동등하게 존중된다. 우리는 이 정치 형태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본다.



성경은 일반 교인들의 제사장적 권한을 증거한다. 감독정치는 이 점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사도들이 증거하는 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또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인들 스스로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것이 성경이 보이는 모범이었다. 사도행전 6:5, 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택하다'는 원어(케이로토네오)는 '손을 내밀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교인들이 손을 들어 장로들을 뽑았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러나 성경은 또한 목사 혹은 장로들의 직무와 권위를 증거한다.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감독자들'이며 교인들은 그들이 돌보며 먹여야 할 하나님의 양떼이다. 요한복음 21:15-17, "내 어린양을 먹이라 . . . 내 양을 치라 . . . 내 양을 먹이라."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대로 일반 교인들의 제사장적 권한과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의 직무와 권위를 고려할 때 장로정치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판단된다.






장로정치의 기본 원리들





장로정치의 기본 원리들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교회의 권세의 원천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엡 1:22). 교회 안의 그 누구도 교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리고 그의 말씀과 그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둘째는, 주께서 교회의 권세를 교인들 전체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존귀한 특권을 가짐을 증거한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또한 권징의 권세도 교회 자체 즉 회중[교인들]에 주어졌다.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므로 지교회에서 세례 교인들의 전체회의인 공동의회는 가장 중요하다. 또 그렇기 때문에 지교회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나 전입 교인들을 받아들일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셋째는, 교회의 권세가 교인들이 뽑은 대표자들에 의해 행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원리이다. 주께서는 교인들이 그들의 대표자들을 직분자들로 세우게 하심으로써 교회를 다스리고 섬기게 하셨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인들 스스로에 의해 선택된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직분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위탁받는 것이므로, 교회는 성경에 교훈된 자격 조건을 따라 그들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고 장립하여야 하며, 일반 교인들은 장립된 감독자들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넷째는, 교회의 권세가 지교회에서부터 전체 교회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장로정치는 지교회의 치리회인 당회를 중요시하며, 치리권은 지교회에서부터 노회와 총회 등을 통하여 전체 교회들로 점점 넓게 확장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의 참된 교제와 협력을 나누게 되고 또 어떤 지교회가 탈선하지 않도록 상호 감시하고 견제하게 되기도 한다. 장로교회에서 당회장이나 노회장이나 총회장은 단지 회의를 인도하는 의장 즉 사회자의 성격을 가지지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또 도시의 큰 교회들의 목사나 장로와 시골의 작은 교회들의 목사나 장로의 권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장로정치에 대조하여, 감독정치는 전체 교회를 지교회보다 더 중시하며 또 총회에서 지교회에 무엇을 명령하는 하향적(下向的) 성격이 있다.






치리회들





장로정치에서의 치리회들로는, 지교회에는 공동의회와 당회가 있다. 공동의회는 권징 아래 있지 않는 세례교인들로 구성되며 지교회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 당회는 담임목사와 시무 장로들로 구성되며 지교회의 기본적 치리회이다. 이것들 외에, 한 지역의 여러 지교회들의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노회와, 보다 넓은 지역에서 여러 노회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대회와, 한 나라 안의 교회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총회 등 소위 '확대회의들'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노회와 총회의 예를 발견한다. 디모데전서 4:14, "장로의 회에서."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회의.



지교회의 당회의 권한은 확대회의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견제된다. 그러나 장로정치에서 확대회의들은 지교회를 무조건 지배할 수 없고 또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실상, 노회나 총회 등을 '상회'라는 부르는 것은 감독주의적 맛이 있다. 총회가 노회에, 혹은 노회가 당회에, 일방적으로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장로교회적이지 않고 감독교회적이다.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노회나 대회나 총회가 지교회에 대하여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부과할 수 있다는 관념은 본질적으로 로마 카돌릭적이다"라고 하였다(박형룡, 150쪽).






교회의 직분







창설직





신약교회의 창설 시기에 있었으나 그 후 사라졌던 직분들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등 세 가지이었다. 이것들을 창설직이라고 부른다.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 세 가지 창설직들 중 가장 중요한 직분은 사도이었다. '사도'라는 말(아포스톨로스)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뜻이지만, 신약에서는 특히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 사용된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행전 1: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단지 예외적으로, 신약 원어 성경에서 사도행전 14:4, 14에 바나바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사도의 자격과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도는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자이었다. 마가복음 3:13- 14,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둘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직접 본 자이었다. 사도행전 1:21, 22,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고린도전서 9:1,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셋째, 사도는 예수께서 친히 기적 행할 능력을 주신 자이었다. 마가복음 3:14, 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1)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참음 중에]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두 번째 창설직은 선지자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직분이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사도행전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세 번째 창설직은 복음전도자이었다. 이것도 신약교회 창설시기에 있었던 특별한 직분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디모데와 디도 같은 자들이 그러하며, 이들은 일반적 목사나 장로의 직분과 구별된다. 디모데후서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사도행전 21:8, "일곱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







항존직





창설직과 달리, 사도 시대 이후 주님 재림 때까지 신약교회에 항상 있어야 할 직분들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이다. 이것을 항존직이라고 부른다.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행전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빌립보서 1:1,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목사





목사(牧師, pastor, minister, reverend)는 넓게는 감독 혹은 장로 안에 포함되며, 교사 혹은 '가르치는 장로'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1, "목사와 교사."2)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목사의 임무는

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고

② 교인들을 살피며 인도하는 직분이다. 이것은 지교회의 담임목사가 가지는 임무이다.



당회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치리장로들과 함께 교인들을 살피며 감독하며 인도한다. 설교는 목사에게 맡겨진 전문적 일이며 따라서 목사만 신학교육을 받지만, 행정은 치리장로들과 함께 행하는 일이다. 또 담임목사는 목회를 도울 부목사와 전도사 등의 조력자들을 둘 수 있다. 부목사나 전도사 등 목회 조력자들은 교인들의 초청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담임목사의 초청과 당회의 승인으로 오기 때문에, 교회의 치리권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담임목사의 목회를 돕는 자들이다.



목사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1-7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장로의 자격 요건이기도 하며, 모든 성도의 성화의 목표이기도 하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자,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부부생활의 순결성을 지키는 자.



"절제하며"--술, 시간, 돈, 오락, 힘 등을 절제하는 자.



"근신하며"--무분별하지 않고 침착하고 조심성 있는 자.



"아담하며"--행실이 단정하고 존경할 만한 자.



"나그네를 대접하며"--인정이 있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자.



"가르치기를 잘하며"--성경을 바르게 배워 진리에 정통한 자.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술에 중독이 걸리지 않은 자.



"구타하지 아니하며"--성격이 거칠어 남을 때리지 않는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전통본문)--물질 생활에 바른 자.



"오직 관용하며"--편협하지 않고, 이해심과 인내심을 가진 자.



"다투지 아니하며"--이해심과 인내심이 있어 다투지 않은 자.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하나님만 바라며 돈을 사랑치 않는 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신앙 단련을 받아 겸손해진 자.



"외인(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



목사의 권위는 단순히 직분의 권위가 아니고, 그가 전하는 바른 말씀과 그가 보이는 인격적 모범의 권위이다. 성경의 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사가 권위가 있고, 그 가르친 말씀대로 살며 모범을 보이는 목사가 권위가 있다. 바른 말씀과 인격적 모범이 없이 목사직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것은 옛날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과 같고 거기에서 종종 인간적 횡포도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악하며 가증스러운 일이다.



신약의 목사는 하나님과 교인들 중간에 있는 제사장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신약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며, 모든 신자의 헌신과 순종의 삶이 하나님께 대한 제사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물론 목사도 제사장이며 목회도 제사이다. 로마서 15:16,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그러나 목사나 목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와 그들의 삶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 성직자들을 '사제'(priest)라고 불러 평신도와 구별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오늘날 어떤 성직자나 성직계급이 사도직을 계승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천주교회와 영국교회와 감독교회는 일반 신부보다 한 단계 높은 성직자인 주교 혹은 감독(bishop)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신약은 단순히 장로와 감독이 동일한 직분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 20:17, 2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 . .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직분이라는 점에서, 목사가 사도적 기능을 이어받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는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제한된다.



목사가 준비할 바는 개인적 성경 통독과 연구, 기도, 가정예배, 독서, 신학교육 등을 통한 교리적 지식과 확신, 그리고 윤리적 인격과 인품이다.



먼저, 목사는 교리적으로



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진리를 바르게 파악하고 확신하여(고전 1:22, 23; 2:1, 2) 율법주의나 윤리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② 건전한 전통적 개혁신학의 체계를 파악하고 확신하여야 하며,



③ 현대교회의 배교와 타협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하는 바른 입장과 노선을 정립해야 한다. 덧붙여, 성령론, 종말론, 여성신학 등에 대해서도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목사는 또한 윤리적으로 다음 몇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① 목사는 물질 문제에 대해 깨끗해야 한다. 목사가 의식주 등을 위해 생활비를 받는 것은 성경적이다. 마태복음 10:10,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고린도전서 9:11, 13-14,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 . .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5:17, 18,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목사는 사도 바울의 모범을 기억하며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 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목사는 헌금의 집계와 지출과 관리에 직접 관여하지 말고 신실한 집사들을 세워 그 일을 맡겨 처리하며 당회로 감독케 하고, 또 거리끼는 도움을 받지 말고, 또 물질 때문에 잘못된 일들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② 목사는 여성도들에 대해 깨끗해야 한다. 목사가 결혼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은 독신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디모데전서 3:2, (감독의 자격 요건들 중)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목사는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의 자녀들을 돌아보고 자기의 가정부터 가르치고 아름답게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는 특히 여성도들에게 너무 친절하고 친근하게 대함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목사는 심방이나 상담 등 목회의 부분들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③ 목사는 그를 돕는 조력자들 즉 부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목회와 행정의 제반 사항과 건물 비품 관리의 일들까지 지시하고 점검하는 위치에 있고 그런 일들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성실히 행해야 하겠으나 항상 겸손과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행해야 한다. 교회의 부교역자들과 직원들도 담임목사의 사역에 유익이 되게 처신해야 한다.



목회를 위해 다음 몇 가지 점들은 참고할 만하다.



① 설교 준비는 철저히 하고, 자기 생각을 전하지 말고, 성경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매시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실패치 않고 전하되 교리와 윤리에 균형을 가질 것,



② 예배 인도는 잘 준비해서 하되, 사회는 꼭 필요한 말만 간략히 하고, 찬송들은 미리 기도하며 선택하고, 예배 전이나 후의 반주는 조용하고 경건하게 할 것,



③ 마이크 볼륨을 너무 크지 않게 하고 전자오르간 소리를 너무 크고 울리지 않게 하고 성가대원의 얼굴 표정을 기쁘게 할 것,



④ 교인수나 헌금액수나 건물의 규모 등 외적 건립에 마음을 쓰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성장 등 내적 건립에 마음을 쓸 것,



⑤ 부서들과 회들을 철저하게 감독 관리하고 교회 행정도 짜임새 있게 할 것.



⑥ 장로와 집사 등의 제직들은 서서히 신중히 세우고 너무 많지 않게 할 것,



⑦ 세례 문답 혹은 전입교인 문답을 성실히 하여 교인수를 충실히 늘여 갈 것,



⑧ 전도인들을 모으고 훈련시키되 기본적 성경 구절들을 암송시키고 복음의 요지를 확인시키고 전도 방법을 연구하고 실습시켜 교회 주위를 가가호호 전도하게 할 것,



⑨ 주보는 없애든지 검소하게 하고, 교회안내서를 준비하여 초청의 말씀, 복음의 요지, 교회의 기본 신조, 교회 연혁, 목회자 소개, 집회 소개, 위치 약도, 연락처 등을 기재할 것,



⑩ 예배당의 외적 치장을 극소화하고, 예배당 내부 혹은 외부의 호화로운 장식, 값비싼 음향 장치나 오르간의 설치 등을 삼갈 것이나 예배의 경건한 분위기를 위해 강단 뒤 휘장 색깔을 연한 벽돌색이나 옅은 하늘색이나 군청색 등으로 하며 또 천장의 조명장치을 회중의 눈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할 것 등.





장로



장로(長老, elder, presbyter)는 목사와 함께 교회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직분이며 보통 치리장로라고 부른다. 사도행전 20:17, 2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 . .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1, 2,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 .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성경에서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직분이다. 그것은 교인들을 돌보는 직분 곧 목회(牧會) 혹은 목양(牧羊)의 직분이다.



장로교회에서 치리장로는 회중을 대표하며 그 권한이 목사와 동등하다. 단지 설교의 직무는 목사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목회에 전념하는 자는 목사이므로, 목사는 목회의 주도적 역할과 책임을 가지며 치리장로들은 목회에 협력적 역할을 한다. 따라서 목회란 목사가 장로들의 협력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리장로들은 목사의 목회에 제동(制動)장치가 아니고 윤활유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비성경적 교훈이나 행정을 할 때에는 치리장로들이 그것을 제어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



장로의 자격은 목사의 자격과 동일하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3:2-7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한마디로,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신앙인격자로서 교인들의 본이 되고 교인들을 잘 인도할 만한 교양과 덕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지교회에서 치리장로의 수는 보통 2명 이상이어야 바람직하다. 이것은 목사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한 부작용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주후 140-180년경의 사도적 규범들(Apostolic Canons)이라는 책에는, "교인들은 목사 외에 적어도 2명의 장로들을 지명해야 한다. 모든 교회는 적어도 3명의 집사들을 가져야 한다"고 쓰여 있다.







집사





집사(執事, deacon)는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직분이다. 헌금의 수금, 정리, 계획, 지출 등 교회의 살림살이와 특히 구제의 일을 행한다. 사도행전 6:2, 3,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물론, 이러한 일들은 당회 즉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과 지도 아래 행해져야 할 것이다.



집사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8-13에 기록되어 있다.



① 단정하고,

②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③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④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하며,

⑥ 한 아내의 남편이며,

⑦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



덧붙여서, 여자들, 즉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은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문제





오늘날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세속사회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는, 첫째로 신구약 성경에 여선지자 등의 여성 사역자의 예들이 있다는 점, 둘째로 갈라디아서 3:28에 남녀 평등의 원리가 있다는 점, 셋째로 세속사회도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데 하물며 교회가 시대의 조류를 역행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점, 넷째로 교회 내의 여성들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반론들에 대하여 그러한 생각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변칙적으로 허용하신 것과 교회에 정식으로 주신 규범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결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치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는 디모데전서 2:11-14과 고린도전서 14:34-37은 여자 목사직과 여자 장로직을 금하는 다섯 가지의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2:11-14,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말씀은 여자의 가르치는 일 즉 목사직과 다스리는 일 즉 장로직을 분명히 금하고 있다.



이렇게 금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자는 창조될 때 남자의 '돕는 배필' 즉 협력자(helper)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있다.



둘째는 범죄에 대한 징벌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로 시작되었다. 아담은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먹으므로 범죄하였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여자는 인류의 타락에 일차적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여자는 또다시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제약을 당한다는 뜻이 있다. 이 두 이유들은 어떤 시대적, 환경적 요인들이 아니고, 역사적, 불변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혹은 '너희 아내들')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이 말씀도 여자들이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율법의 말씀 때문이다. 34절,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 어떤 율법을 가르치는가? 예를 들면, 창세기 2: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둘째로 그것은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37절,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베드로전서 3:1, 5-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 . .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사도들의 교훈은 곧 주의 교훈이다. 신구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는 책이다.



셋째로 그것은 교회의 보편적 규율이기 때문이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오늘날 파괴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모든 교회는 이 성경적 교훈과 원리에 대해 이의(異議)를 말하지 않았다.



위에 인용된 두 성경 구절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교훈을 옛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에 제약을 받은 사도의 인간적인 발언이나 사상으로 보는 것은, 거기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글인 신약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큰 잘못이며 죄악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박형룡 박사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금하는 것은 2천년 전의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하였다(145-148쪽).



남녀 평등과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앞에서 인용된 두 성경 구절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들은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남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복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또한 신약의 만인 제사장의 진리도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녀 역할의 차등과 구별을 가르치는 말씀들과 충돌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신약시대의 복음사역에 여자들의 역할이 컸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가복음 8:2, 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예수님과 12제자들]를 섬기더라." 로마서 16장에는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등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한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는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자녀들을 해산함으로써 그 낮은 지위가 회복된다. 훌륭한 남자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임시직





한국 교회는 필요에 따라 위의 세 가지 직분 외에 몇 가지의 직분들을 더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치리권에 따라 행한 것으로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임시직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서 교회가 자체의 유익을 위해 임의로 혹은 임시적으로 설치한 직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로, 전도사는 담임목사의 조력자이다. 지교회는 그 필요와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담임목사의 추천과, 당회와 제직회의 승인으로 전도사들을 세우거나 청빙한다. 전도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담임목사의 목회 사역을 돕는다.



둘째로, 권사는 여성도들 가운데서 목사와 당회의 지도 아래 병환자와 궁핍한 자와 환난 당한 자와 시험 중에 있는 자 등을 심방하여 위로하며 권면하는 직분이다. 한국교회는 비교적 여성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직분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권사는 흠 없이 여러 해 신앙 생활을 한 자로서 그의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고 생활이 모범되고 건전한 판단력과 주위의 좋은 평판을 가진 자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남녀 서리집사는 임시로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는 직분으로서 그 임기는 1년이다. 한국교회에만 독특한 이 직분은 본래 집사직을 위한 예비 과정이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할 것이요." 또 한국의 초대교회에 남성도가 많지 않아서 부득이 여자 서리집사도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서리집사가 정식 집사로 인식되고 안수집사는 한 단계 높은 직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나 서리집사의 수가 일반 교인들에 비해 많은 것은 잘못된 인본주의적 풍조라고 생각된다. 시험에 들까봐 시행치 못하고 있으나, 서리집사 제도는 없애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본다. 모두가 동의하면 없애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직분에로의 부르심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2:4, 5,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어떻게 성도를 부르셔서 어떤 직분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어떤 직분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을 부르실 때 옛날처럼 음성으로(출 3:4; 삼상 3:4-10; 마 4:19; 행 9:4; 13:2)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내면적 부르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직분을 위해 헌신하려는 간절한 소원을 주신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모데전서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직분을 위한 재능과 은사를 주신다. 로마서 12:6-8,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 . .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3) 하나님께서는 그 직분을 위해 그의 길을 여시고 인도하신다. 이런 깨달음과 경험은 주로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추천과 요청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성도을 어떤 직분에 부르시는 것은 외적으로는 교회 즉 성도들의 요청과 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가 청하지 않고 찬성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어떤 직분에 임직될 수 없을 것이다. 또 교회는 어떤 이를 어떤 직분에 세울 때 그에게 안수를 베푼다. 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공식적 표와 증거이다. 그는 안수를 통해 그 직분을 위해 구별된다. 사도행전 6:5, 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 .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13:2, 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 시대의 안수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수반했던 것 같다. 사도행전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디모데전서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그러나 오늘날 안수는 일반적으로 직분의 구별을 상징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직분의 성격





교회의 모든 직분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고 봉사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이다. 마태복음 20:26, 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11, 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교회에서 더 중요한 직분을 가지는 자는 겸손히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가장 중요한 표이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성숙한 신자는 겸손하다.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은 다 그러해야 할 것이다.



1)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들과 알렉산드리아 사본(A), 옛 라틴어역, 옛 수리아어역 등에 있음.



2) 투스 데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하나의 정관사 뒤에 두 개의 단어가 나올 때 문법적으로 한 부류를 가리킨다.











6. 성례(聖禮)









은혜의 수단들







은혜의 수단들 혹은 방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사랑과 능력을 베푸시기 위해 정하신 일반적 수단들을 가리키며 이 수단들은 교회를 통해 사용된다. 그 수단들은 주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소요리문답 88문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택들을 전달하시는 일반적 외적 수단들은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들과 기도인데, 그 모두가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효력이 있다."






은혜의 수단들에 대한 여러 견해들







은혜의 수단들의 역할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수단들로 제시하나 성례를 더 강조하며, 더 나아가 교회 자체를 은혜의 중요한 수단으로 주장한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성례들 안에 객관적으로 내재(內在)하며, 성례는 '집행된 행위에 의해'(ex opere operato)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둘째로, 루터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례들보다 강조하며, 성례들이 가견적 말씀으로서 말씀을 떠나서는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그 수단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들 자체가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로, 신비주의는 은혜의 외적 수단들이 자연 세계에 속하므로 어떤 영적 효력과 결실들을 낳지 못한다고 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외적 수단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을 완전히 혹은 상당히 무시한다.



넷째로, 이성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을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의 도구들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의 도덕적 설득을 위한 도구 정도로 본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학은 은혜의 수단들 자체에 하나님의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고 본다. 은혜의 수단들은 미신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되지만, 귀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은혜의 수단들은 특히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화의 수단들이다. 쉐드나 댑니는 이것들을 '성화의 수단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수단들을 존중히 여기며 사모함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첫번째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 말씀과 그것에 근거한 설교를 의미한다.






성경 자체의 증거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은 성경 자체가 많이 증거한다. 시편 1:2, 3,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9:7, 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행전 17:11, 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로마서 1: 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전통본문)."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며 이 둘이 다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구약은 율법을 강조하고 신약은 복음을 강조하며, 그 둘 다 사람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사용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로마서 3: 20-22, "이제는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나 구약 속에도 의식법을 통해 은혜의 복음이 증거되고 있고 신약 속에도 은혜의 복음과 더불어 도덕적 율법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은 복음이 없는 율법뿐이요 신약은 율법 없는 복음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복음 아래서 율법 즉 도덕법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① 율법은 세속 사회를 위하여 죄를 억제하고 의를 조장한다.



② 율법은 구원 사역을 위하여 죄인의 죄를 깨우치며 그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율법도 은혜의 수단이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③ 율법은 성도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해 준다. 다시 말해, 율법 즉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칙이 된다. 이 세 번째 역할은 은혜와 성화의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중요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율법과 성도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성도는 언약적 관계에 있어서, 즉 칭의의 조건으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의무에 있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는 여전히 율법을 지킬 의무 아래 있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 .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로마서 7:12, 14,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단지 도덕적이라고 보며 말씀을 통한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을 부정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의 도덕적 영향력이 불충분하고 성령의 보충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불필요하다고 보며, 신자 속에 있는 내적인 말씀 혹은 내적인 빛, 즉 성령의 직접적 활동만을 강조한다(신비주의자들).



그러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과 함께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효력을 가진다고 본다. 성경은 말씀의 능력을 증거하는 동시에,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를 증거한다.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베드로전서 1:23,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경적 설교의 중요성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일차적 수단이므로, 성경적 설교는 복음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영혼의 구원과 및 성화와 성장은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목사는 특히 다음 몇 가지 점들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① 설교자는 무엇보다 성경 연구와 기도와 함께 설교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② 설교는 항상 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

③ 설교자는 빈번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④ 설교자는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균형있게 강조해야 한다.

⑤ 설교자는 교리와 윤리(생활 교훈)를 균형있게 강조해야 한다.

⑥ 설교자는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⑦ 설교자는 남의 설교를 베껴서 설교해서는 안 된다.








성례(聖禮)







두 번째의 은혜의 수단은 성례들(聖禮, sacraments)이다. 성례들에 대한 교리적 진술들은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1, "성례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시들과 확인물들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들을 나타내며,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유익을 확증하며;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나머지 세상 사람들과 사이에 유형적 차이점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엄숙히 서약하게 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92문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인데, 거기에서 감각적 표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혜택들이 표시되며 신자들에게 확인되고 적용된다." 한마디로, 성례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들과 확인물들이다.








말씀과의 관계







성례는 말씀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죄 씻음이 성례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성례는) 유형적(有形的) 말씀들이다." 그 둘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내용으로 가진다. 그러나 말씀은 적어도 성인들에게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나, 성례는 그렇지 않다. 성례는, 비록 그리스도의 명령이므로 모든 신자들에게 의무적이지만, 구원에 절대필수적이지는 않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성례는 단지 언약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






두 가지뿐





신약은 오직 두 가지의 성례들만을 가르친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이다. 이 두 가지는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에서 각각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졌던 규례들이다. 골로새서 2:11, 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마태복음 26:19,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고린도전서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천주교회에서는 7가지 성례들을 말하지만, 세례와 성찬 외에 어느 것도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제정되지 않았고, 또한 신품과 혼배는 성경에 언급된 규례이지만 은혜언약의 상징인 성례에 포함될 수 없다.






성례의 정당성, 효력, 집례자의 자격





성례들의 정당성은 바른 재료와 바른 형식과 바른 의도에 있다. 예를 들어, 세례에서 바른 재료는 물이요, 바른 형식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요, 바른 의도는 세례주는 자의 편에서는 세례받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인도하려는 마음이요 세례받는 자의 편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성례의 효력은 객관적으로 성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달려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3, "올바르게 사용되는 성례들 안에서 혹은 그것들에 의해서 표시되는 은혜는 그것들 안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집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활동과 성례 제정의 말씀에 달려 있는데; 그 말씀은, 그것의 사용을 인가하는 명령과 함께, 그것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에 대한 은혜의 약속을 포함한다."



성례 집례자의 자격에 관하여는, 성례들이 복음 진리의 엄숙한 유형적 제시이므로 말씀의 전파와 수호의 책임을 합법적으로 맡은 사역자들에 의해서만 집행되어야 합당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4, "(세례와 성찬) 그 어느 것도 합법적으로 임직된 말씀의 사역자 외에 누구에 의해서도 거행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상 교회는 일반적으로 분파주의자들의 세례를 인정하였고 개신교회들은 천주교회의 세례를 인정하였다.









기도





세 번째의 은혜의 수단은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영적 은혜들을 받을 수 있다.








기도의 대상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우리는 보통 성부 하나님께 기도드리지만(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삼위 하나님께 다 기도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누가복음 23:42, "예수께 가로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사도행전 7:59, 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고린도후서 12:8, "이것이[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내용들





기도의 내용들은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 간구 등이다. 소요리문답 98, "기도는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그의 뜻에 맞는 것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그에게 아뢰는 것이다." 구약 시편의 많은 시들(특히 95편 이후)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찬송은 곧 기도요 기도의 주요한 부분은 찬송과 감사이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죄의 고백도 기도이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물론, 기도는 간구의 내용을 포함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먼저 영적인 것부터 기도하고 그 후에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또한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후에 남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6:9-13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주요 내용들을 깨닫게 해준다.



① "주의[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② "주의[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천국 뿐만 아니라, 현재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나라, 즉 교회를 가르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스런 천국이 오기를 간구하는 뜻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어 택한 백성들이 다 주께로 돌아오는 것, 다시 말해 참된 교회의 설립과 확장을 간구하는 뜻인 것이다. 이것은 전도를 위한, 그리고 전도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에베소서 6:19; 골로새서 4:3; 데살로니가후서 3:1에도 동일한 말씀들이 있다.



③ "주의[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全)포괄적이다. 나 개인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사회와 국가, 온 세계의 문제들을 포함한다. 또한 정신적, 영적 문제들 뿐만 아니라, 물질적, 육신적 문제들까지 포함한다. 이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사람의 범죄와 불순종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었으나, 하나님은 그것들까지도 그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삼으셨다.



④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의 육신의 양식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이 말씀은 혹 우리의 영혼의 양식 곧 우리가 날마다 공급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는 뜻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시험에 떨어져 범죄치 않기를 기도하고 혹시 악에 떨어졌다면 거기로부터 건짐 받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도의 시간과 장소







기도의 시간에 관하여는, 우리가 어떤 일정한 고정된 시간에만 기도할 것이 아니고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로마서 12:12, "기도에 항상 힘쓰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물론, 공적 기도회들, 즉 수요기도회나 새벽기도회는 유익하다.



한국교회의 전통인 새벽기도회에 관하여는 장단점이 없지 않다. 장점은 기도 생활에 힘쓴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각자의 생활 리듬이 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부득이한 이유로 늦게 자기 때문에 새벽 4시 혹은 4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지키는 데도 장점이 많다. 새벽기도회에서는 말씀을 간단히 전하고 각자 기도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도들은 성경을 더 많이 배우고 날마다 기도하게 되고 교역자들도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연구하게 될 것이다. 서양의 경건한 사람들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기도의 장소는 예배당이나 어느 기도원에 국한시킬 수 없다. 기도원은 유익하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또한 신약 교회의 예배당은 교회의 공적 집회 장소의 의미가 우선이다. 구약의 성전의 개념은 부차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성전의 건립을 명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꼭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다. 어디서든지 조용한 장소가 있으면 그 곳이 곧 나의 기도의 골방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광야, 빈 들]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기도의 방법





성경은 기도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함이라." 우리의 의(義)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무엇을 간구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유다서 20, "성령으로 기도하며."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셋째로, 우리는 겸손히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눅 18:9-14). 우리는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항상 인정하면서 겸손히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11). 또 주께서는 밤에 친구에게 찾아와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강청한 한 사람의 이야기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고 인내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눅 11:5-8; 18:1-8). 마지막으로, 기도의 소리에 관하여는 우리가 조금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묵상으로 기도하는 것은 졸음이나 잡념의 침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적 집회시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의 유익





기도의 유익은 실로 크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인격의 성화를 이룬다. 기도는 또한 주를 믿고 따르며 그를 섬기는 힘을 공급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이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인 것이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시 62:11). 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능으로 이룰 수 없고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이룰 수 있다(슥 4:6).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기도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11:13,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윌리암 윌버포스, "지금까지 나는 개인적인 기도, 묵상, 혹은 성경 읽기의 종교적 훈련을 위해 너무도 적은 시간을 습관적으로만 배당하여 둔 것같이 생각된다. 그 결과로서 나의 영혼은 말라빠지고 냉냉해지고 따라서 굳어지고 말았다." 리차드 뉴톤,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은 말씀에 합당치 않는 기도 생활의 퇴보에 있다.



" 촬스 스펄젼, "세상과의 접촉은 자주 우리의 경건에 더러움을 가져온다. 우리는 멀리 낙원에 가서야 더러움 없는 순결을 볼 것이다.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은혜로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많이 홀로 있어야 한다." "밀실의 기도가 봉사 생활에 주는 큰 복은 글로 표시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성령께로 온 힘이다." 이 엠 바운즈, "밀실은 설교자에게 참된 교사요 학교이다. 사상은 기도를 통해 광채가 나고 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도 중에 생겨난다. 중심에서 나오는 한 시간의 기도는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결과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설교를 하기 위한 성령의 힘은 기도, 즉 시간을 들인 기도에서만 얻어진다. . . . 쉬지 않는 기도가 없이는 이 성령의 힘은 결코 설교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세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시고 제정하신 성례이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러므로 이 규례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5, "이 규례를 멸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은 큰 죄이다."






세례의 의미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4문답, "세례는 성례인데, 이 의식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됨과 은혜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또 주의 것이 된다는 우리의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세례는 신자의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이것은 세례의 기본적 의미이다. 사도행전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사도행전 22:16,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에베소서 5:26,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물은 씻음 곧 죄씻음을 상징한다.



둘째로, 세례는 신자와 그리스도의 영적, 신비적 연합을 상징하며 확증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사도행전 8:16, "주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세례를 받으니." 사도행전 19:5도 동일함. '안으로'(ՅדՒ 에이스)라는 말은 연합의 의미를 가진다.



셋째로, 세례는 신자가 은혜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은혜언약의 혜택들이란 중생, 영적 부활, 영생, 양자됨 등을 가리킨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ՅדՒ 에이스,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ՅדՒ 에이스)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ՅדՒ 에이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넷째로, 세례는 신자가 주의 백성이 된다는 공적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유형교회의 회원이 되는 기본적 절차이다. 세례교인만이 교회의 정회원이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도행전 2:38,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세례의 방식





세례의 정당한 방식은 무엇인가? 교회 역사상 일반적으로 인정된 세례의 방식들은 세례받는 자의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혹은 그를 물 속에 담그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물에 담그는 것(침수 浸水, immersion)만 세례의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① '세례준다'는 원어(ՂՁՐՔזՆՙ 밥티죠)가 '물에 담근다'는 의미이며,

② 물 속에 담그는 것(침수)만 세례의 근본적 의미인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례의 방식을 명확히 지시하지 않는다. 더욱이, 다음 네 가지의 사실들은 침수만을 고집하는 침례교회의 입장이 정당하지 않음을 증거한다:



첫째로, 신약의 '세례준다'는 헬라어(밥티죠)는 일차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 '깨끗케 한다,' '씻는다' 등의 뜻도 가진다. 신약에서 예를 들면, 마가복음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밥티죠,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 .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식탁들을 씻음이러라(밥티죠)." 히브리서 9:10, "여러 가지 씻는 것(ՂՁՐՔՉՓՌՏזՒ 밥티스모이스, washings)."



둘째로, 신약에서 세례의 예들은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음을 증거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이것은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에 내려가셨음을 증명할 뿐이다. 사도행전 8:38, 39,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또한, 오순절에 3천 명이 받았던 세례(행 2:41)나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이 밤에 받았던 세례(행 16:33)는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적다.



덧붙여, 초대교회의 관습에 관하여도, 세례가 반드시 물에 담그는 방식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에드워드 로빈손은 말하기를, "아직 보전된 어떤 세례용 돌항아리는 너무 작아서 세례 지원자의 몸 전체를 담글 수 없다. 또 실상 매우 믿을 만하고 상당히 오래된 몇 개의 기념 유물들은 물을 붓는 세례들을 보여 주는데, 예를 들면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의 경우 등이 그렇다"라고 하였다.



셋째로, 세례의 의미는 반드시 물에 담그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례의 기본적 의미는 죄씻음이며, 그것은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도 충분히 표현된다. 구약은 피나 물을 뿌림으로 죄를 깨끗게 함을 풍부하게 증거한다. 레위기 1:5,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여기에 '뿌린다'는 히브리어(자라크)는 '듬뿍, 풍부하게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 70인역은 '붓다'(프로스케오)라고 번역하였다. 레위기 4: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나자아) 것이며."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자라크) 너희로 정결케 하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세례에 내포된 의미이기는 하지만, 부수적 의미이다.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 12에 언급된 죽음과 부활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과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골로새서 2:11,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세례 자체가 그 상징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로, 복음의 보편적 성격은 '물에 담그는 것만 정당하다'는 주장에 반대된다. 예를 들어, 심각한 병자들, 사막 지방, 추운 지방의 경우들에 세례 대상자들을 물 속에 담그는 것은 부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물을 뿌리거나 물을 붓거나 물 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들이 다 정당하다고 본다. 세례에서 물이라는 상징물이 중요하지, 물의 양(量)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의 대상--유아세례의 정당성



세례의 대상에 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독특하게 유아세례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는



① 유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고,

②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확한 명령이나 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은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입장이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순종하는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주고 그들만 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비록 성경에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명확한 지시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유아세례가 정당한 첫번째 이유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나타났는데, 그 표는 할례이었다. 거기에서 유아들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였다. 창세기 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영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신약 아래서도 유효하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 아래서 유아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후 그들을 언약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신약 아래서도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 결코 성도의 가정에 있는 이방인일 수 없다. 성도들의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이와 같이, 은혜언약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 유아세례의 근거이다. 구약에서 유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면, 신약에서도 그러하다. 사실, 신약은 구약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히 나타난 시대이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둘째로, 성도의 유아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태도는 유아세례가 정당함을 지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천국백성으로 여기셨다. 마가복음 10:13-16,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 .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누가복음 18:15, 16, "사람들이 . . .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또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불렀고, 교인으로 간주하여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7:14, "이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원문 직역).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셋째로,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 구원의 약속과 가정 세례의 예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지지한다. 사도행전 2:38,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고(12-15절), 빌립보 간수와 그 권속도 다 세례를 받았다(32-34절).



넷째로, 신약교회의 역사는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유아세례는 신약교회의 매우 초기로부터 시행되어 왔던 보편적, 전통적 의식이며 종교개혁시기에 재세례파가 반대하기까지는 반대되지 않았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증거하기를, 사도 시대에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고 하는데, 이런 풍습이 하나님의 섭리로 신약교회에 이어졌음이 틀림 없다.



폴리갑(69-155년경)은 86세에 순교할 때 자신이 86년 간 그리스도의 종이었다고 말하였다(폴리갑의 서신, 9). 순교자 저스틴(100-165년경)은, 그의 당시 60세나 70세의 그리스도인 남녀들 중에 "유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이었던" 자들이 있었다고 말하였다(변호, 1. 15).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중생하는 모든 연령의 사람, 즉 영아들과 유아들과 소년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하였다(이단 반박, 2. 39). 오리겐(185-254년경)은 말하기를, "유아세례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확정된 풍습이다"라고 하였다(레위기 설교, 8. 4; 로마서 주석, 5. 9).



카르타고 회의(253년경)는 유아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유아들이 제8일 이전에 세례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토의하였고 그렇게 결정하였다. 처음 4세기 동안 오직 두 명의 교부들만 유아세례의 연기를 주장하였는데, 터툴리안은 이방인 부모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세례에 관해 말한 것이고,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는 3살 될 때까지 연기할 것을 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 다 그들의 견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Jeremias, p. 98).



어거스틴(354-430년)은 말하기를, "유아세례의 교리가 교회회의들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나 전세계교회가 일반적으로 실행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교리는 아마 사도들의 권위로 확정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아세례에 대한 반론들





역사상, 유아세례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이 있었다.



첫번째 반론은 신약에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혹은 명백한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 명령만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반대할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언약의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신 이후 그들을 제외시키신 일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신약에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유아세례를 반대하거나 제외한 예도 없다. 신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선교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도들의 선교의 활동 외에는 많은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언급된 가정 세례의 예들은 당시의 유대교의 풍습을 볼 때 유아세례를 포함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아세례에 대한 세 번째 반론은 세례의 조건은 신앙고백이며 유아는 신앙을 고백할 수 없으므로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러나 이 말씀은 성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며 유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또 침례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신자의 유아들이 아직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다 구원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가정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요 지옥갈 자들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유아들은 언약의 원리에 따라 세례를 받아야 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네 번째 반론은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의 근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두 세례의 근거는 다르지 않다. 모든 세례의 근거는 '은혜언약'이다. 단지 차이점은, 성인은 신앙고백을 통하여 은혜언약 안에 들어 오지만, 유아는 출생을 통하여 은혜언약 안에 들어 온다는 사실뿐이다.



유아세례에 대한 다섯 번째 반론은 유아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세례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 참여는 분별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뿐이다. 고린도전서 11:27-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유아세례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유아세례 받은 자들의 생활이 해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의 잘못이 유아세례가 옳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유아세례교인들의 해이함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더욱 힘써 일깨우고 가르쳐야 할 문제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즉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인격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성찬





성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고린도전서 11: 23-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원문 직역).






성찬의 의미





성찬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찬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표시한다.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의 떡은 그의 살을, 포도즙은 그의 피를 상징한다.



둘째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에 참여함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0:16은 성찬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소요리문답 96,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 . . 신앙으로 그의 몸과 피에, 그리고 그의 모든 은혜들에 참여하여 영적으로 양육되고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된다." 요한복음 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더욱이, 고린도전서 11:27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받으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세째로, 성찬은 성도 상호 간의 연합과 교제를 표시하고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찬의 재료와 대상





성찬의 재료들로는 초대교회에서는 보통 식사의 빵이 사용되었으나, 천주교회나 루터교회에서는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 사용되었다. 개혁교회는 초대교회의 풍습을 따랐다. 포도즙은 발효되지 않은 것이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26:29, "포도나무에서 난 것"(막 14:25; 눅 22:18).



성찬의 대상들은 예수 그릿도께 대한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유아들은 주의 몸을 분별할 수 있는 연령이 될 때까지 제외된다. 범죄자나 권징 아래 있는 자 등 흠과 결함이 있는 신자들도 제외된다. 고린도전서 11:27-3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臨在)에 대한 여러 견해들







성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臨在, 함께하심, presence)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마태복음 26:26, 28, "이것이 내 몸이니라. . . . 이것은 나의 피니라." 이 말씀은 문자적 의미인가, 아니면 상징적 의미인가?





초대 교부들 중에는,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했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 어거스틴은 성찬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지만, 떡과 포도즙의 실체들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 후 천주교회는 떡과 포도즙의 실체들이 미사 때에 신부의 선언으로 그것들의 특질을 가진 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소위 '화체'(化體, Transubstantiation)를 주장하였다(화체설). 이 견해는 9세기 초에 제안되고 1215년 제4 라테란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종교개혁 때에는 개신교회 안에 세 가지 견해가 있었다.







첫째로, 루터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 곁에, 그리고 그것들 밑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함께 있다는 소위 '공재'(共在, Consubstantiation)를 주장하였다(공재설). 이것은 루터교회의 견해가 되었다. 루터교회는 이 견해를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편재성(遍在性)과 함께 주장하였다. 성찬론에 있어서, 루터는 강하게 즈빙글리의 견해를 거부하였다.



둘째로, 즈빙글리는 떡과 포도즙이 단지 상징물 혹은 기념물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졌다(상징설). 이것은 개신교회의 일부의 견해가 되었다.



셋째로, 칼빈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소위 '영적 임재'를 주장하였다(영적 임재설). 이것은 개혁교회의 표준적 견해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7, "이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은, 그것의 유형적 재료들에 외적으로 참여할 때, 믿음에 의해 내적으로,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그러나 육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 아니고,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의 모든 은택들을 받으며 먹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비록 그 때 그 빵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과 함께, 혹은 그것들 아래, 육체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있지 않지만; 그 재료들 자체가 그들의 외적 감각들에 그러한 것처럼, 그 규례에서 신자들의 신앙에 실제적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있다."



성경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주의 몸과 피라고 불렀고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죄로 간주하였다. 고린도전서 11:27, 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출처 : 기독교상담실한국기독교상담교육원
글쓴이 : 아카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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