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기독교 신학 사조

하나님아들 2015. 1. 13. 21:49

기독교 신학 사조

 

일반적으로 정통적인 기독교는 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거의 공식적인 선언들과 기독교 단체들의 신조에

의해 표현된 기독교의 형태를 말하는데 정통주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신약 성경을 가지고 시작하며 여러 교파로

갈려진 기독교들이 동의하는 정통적 입장의 주요 윤곽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활에 관해서이다. 이 부활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하였다.

부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증거이다.

또 이 부활은 예수의 영이 악의 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함축성이 많은 것이며, 예수의 영이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였다는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예수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율법과 은혜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와 바울은 그 당시 또는 지금까지 우리 가운데 있는 율법주의와 대치하였다.

대신에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 은혜는 단순한 하나님의 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우리를 공포와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세 번째는 예수의 인성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는 참 사람이며 참 신이다. 네 번째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은 세 인격이지만

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써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책임 있었던 분은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기에 중요한 것이다. 그밖에 우리는 원죄의 교리와 속죄론에 관한 부분을 들수가 있다.

정통주의는 여러 시련과 이단의 도전을 받으면서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데에 필요한 교리를 세우고 지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정통주의에 대한 위협은 세속적 사상의 도전과 교회 안의 사상의 진전의 두 가지의 요소가 있을 수 있겠다.

종교 개혁의 당시에는 문예 부흥이라고 하는 강력한 사상의 흐름이 있었는데 이 문예 부흥은 이성에 신념을 두기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계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아니하였다는데서 문제가 있다. 이어서 18세기에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정통주의에 큰 타격을 준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자연 과학을 일으키고 과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었던 그 시기에 종교는 과학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이며 신임을 잃게 만든다. Karl Marx는 보다 나은 지상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에서 종교를 방해물로 보았으며 현대의

심리학자 Freud는 종교가 세계관에 있어서 뒤떨어지며 과학과 진보의 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니이체는 아예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므로써 정통적 기독교에 타격을 준다.

또 정통주의를 위협한 교회안의 도전은 소위 분리파들이라고 불리우는 재 세례파, 조합 교회, 퀘이커교, 메노나이트등을

들수 있다. 이들은 생활실천을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의심을 갖었으며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빛에 있다고 주장하며 성서와 정통에 대해서 강력한 비평을 한다. 또 소시아니즘의 삼위일체 교리 거부,

 원죄의 교리 거부가 있다. 그밖에 자연신교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 변질이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성서 비평이 등장하는데

이 성서 비평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정확히 알고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론을 위해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이유를 찾으려는것에 있다는 것이 정통주의의 위협의 요소가 되었다. 그밖에 슐라이어마허, 릿츨등은 과학과

철학을 종교와 독립하는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기독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였다 .

 

근본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들 즉 그것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수없는 삭감할수 없는 최소한의 믿음을 말하는데 .

근본주의의 관심은 구원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독생자를 보내셨고 이것을 우리에게 은혜라고 말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는 고등비평에서 뷸수가 있다. 이에 비해 보수주의는 기독교안의 이성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의 비 이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합리적 신앙을 중요시 한다.

이 보수주의는 이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오히려 비 지성적이라고 말한다.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를 비 이성적이라고 불리우는 한 요소는 진화론을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에 근거한다.

 

자유주의와 신 자유주의

 

자유주의에 있는 두가지의 요소는 우리가 자유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성을 가지게 한다.

하나는 자유주의 자들이 도출해내는 상이한 결론에 이르게 하는 자유주의만의 방법이 있으며 이것은 사고 방식은

변할수 있으나 신앙의 본질만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하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는 권위에만 근거를 둔 종교적인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질문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하는데에 근본 취지가 있다.

근본주의가 내재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 초월신론을 강조하나 자유주의는 초월적 하나님보다는 내재적 하나님을 믿으며

이러한 견지에서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진리를 발견할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며 오히려 이 진화론은

하나님이 내재하신다는 것을 옹호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는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호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고등 비평을 통하여 성경속의 예수의 역활에 관하여도

구원자이신 예수보다는 인류의 윤리 선생이자 모범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세가지의 사상으로

날카롭게 분열되는데 그중이 첫째는 인본주의로 알려진 사람들이며 둘째는 종교의 경험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통적 기독교와 가까운 자유주의의 목사들이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인본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속에 있으면서 적응하기 힘들어하는데 이것은 신자유주의 사상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작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들 신 자유주의자들은 죄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수용하고 나서며 인본주의적인 유토피아의 건설의 희망은 환상이라고 결론지으며,

이러한 인류를 구원하기위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신 정통주의

 

역설로 들리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신 정통주의란 말은 신학의 발전 경향을 묘사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말이다.

이들은 자연신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계시 신학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평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중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은 인간 사고의 객체가 될수없으며 오히려 인간을 만나기위해 오신 주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며 인간의 전 생명을 위임하는 신앙의 도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고 믿었다. 참된 하나님은 생활속에서 살아있는 요소로 발견되며 인간은 절망의 상황을

인식할수 밖에 없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부르너는 하나님의 객관성과 인간의 주관성 사이에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고 갈등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사상의 체계를 비판한다

그리고 만남으로써의 진리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변증법적인 사고이며 성서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주관성은 성령으로 하나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는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로 자유로워

질수있으며 이것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Karl Barth

그의 중심사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신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종교와 신앙을 구별하기를 원한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것이다. 그는 성서위에서만 신학을 세우기에

몸바쳤으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은 구제받을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새 생명을 강조한다.

 

Reinhold Niebhur -미국의 신 정통주의 -

그가 사용하는 신화라는 말은 그의 사상의 단편을 이야기 해준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우리가 정확하게 이야기할수 없기 때문에 상징을 사용하여야 하는데 그 것이 속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형식으로도 적당하게 설명될수 없는 진리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상황에 대한 신화적인 진술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윤리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자유주의의 실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는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낙관론과 같이 절망 또한 그는 복음의 적으로 생각하였다.

 

Paul Tilich -자유주의와 신 정통주의의 경계-

그의 체계의 중심은 상관관계의 원리에 있다.

이러한 상관관계의 방법은 그가 사용하는 세가지의 용어들에서 분명하여 지는데 그것은 신율,타율,자율 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이다.

그는 인간의 밖에서 인간을 구속하는 종교적 세속적 모양의 법의 부과인 타율과 자기 주장, 자기 영혼의 주인이 되랴고 하는 자율 모두를

거부하고 신율을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근거를 둔 보다 높은 법인 동시에 인간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개신교의 원리는 생의 접경적 상황에 대한 기독교의 답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라는 것은 신뢰의 범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우리는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고 하며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케 할수 있는 능력 즉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Rudolf Bultman -급진적 보수주의-

비신화화라는 말은 그에 의해서 사용되어진 말이다. 그는 예수의 생활에 대해 역사적 진실성을 증명하려는 것은 노력으로

구원 받으려는것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참 역사의 개념을 등장시키고 복음서의 예수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신약 성서의 신화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며 우리는 신화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불트만은 신약의 사실성을 취급함에 있어서 그의 급진적인 접근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는 부활에 대해서 보수적인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불트만안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조화를 이룬다.

 

Dietrich Bonhoeffer -세속적인 기독교-

그의 사상중에 인상적인 문구는 당연히 값싼 은혜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값이 싼것처럼 여기고 중요시하지

아니하나 은혜는 자신을 그 댓가로 내어 놓아야 할만큼 비싼것이라는 사상이다.

아울러 교회의 일은 경건한 생활을 인도하는것 뿐만 아니라 생활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 자체는 인간을 종교에서 불러 내며 세상으로 뛰어들것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성서적인 하나님은 인간은

무신의 세상속에 뛰어들며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돌고 부르신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현대 신학의 방향과 결론

 

최근의 신학은 우리 시대의 현실과 직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신학의 흐름은 세속적 기독교라는 표어로 나타난다.

콕스의 “교회는 원래 기관이 아니며, 교회는 사람들이다 . 즉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일하기 위해 실천이 있는곳으로

갈 준비가 된사람들의 집합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알수 있다. 윌리암스는 기존 교회의 지역적 교구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교회는

사람들이 살수 있는 곳으로 갈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세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다른 신학적 그룹이 있는데 이 그룹은 사신 신학자들이다. 바하니안은 사이비적 신앙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하나님은 무시되어질수 있어도 죽음을 당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알티제르는 역사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 실지로 죽었으며 교회는 그를 다시 하늘로 올리려고 하는 기존의 기독교

사상은 거부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죽음이 성령의 운동을 구체화 시키셨고 이것은 또 계속적인 진보과정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밀튼은 하나님의 죽음은 한 사건이며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삶에 매력을 느끼고 다만 정의와

질서를 위해 예수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게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트링펠로는 이 세상에서 승리는 제한됨을 알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죽음이 패배되었음을 아는 기독교 낙관주의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섬기도록 세상속으로 부르것이며 그것들은 우리들 휘망의 근거라고 말한다.

부렌은 성서적인 말씀과 세속주의를 조화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나님이란 언어는 세속사람에게 뜻이 없으며

예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문제와 그의 전염적인 사랑의 현상을 알수 있으며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신학의 사상을 경험적인 언어로 묘사하려고 하였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였지만 중요한것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기까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학의 반대되는 입장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지닐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관용의 자세만이 창조적인 토의의 선행조건이 되며 신학하는 길이된다는 말이다.

 

 

출처 : http://blog.daum.net/yangsim3/1485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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