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투의 세 영역 1 /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 1 부 영적 전투의 영역 : 마음
여러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의 이름이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란 뜻이 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되기 위해 싸움을 배워야 할 첫 접전지는 마음이란 영적 전투 영역, 곧 "해골의 곳"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사고의 삶이 차지하는 영역은 사탄이 우리의 삶을 공격하기 위한 상륙거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는 해골의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의 영이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제 1 장 사탄의 영토 : 어두움의 왕국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귀가 땅에 있는가 또는 지옥에 있는가 기독교인 안에도 거하는가 또는 세상에만 있는가로 논쟁을 벌입니다. 사실인즉 마귀는 흑암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 흑암이 있는 곳마다 마귀는 있을 것입니다.
영적 싸움을 위한 준비
"영적 싸움"이란 용어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체험에 있어서 반드시 반갑다고 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을 소개합니다. 악한 영들을 맞아 싸운다는 생각은 무언가 불안하게 하는 개념이며 이는 특히 우리가 예수님께 왔을 때 잃어버린 양들이었지 용사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가운데는 실제로 영적 싸움을 한번도 걸어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사실은 마귀가 이미 우리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사탄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안녕을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유다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했습니다.(유다서 6절) 사탄이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영원한 심판 아래 두셨는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무저갱 또는 흑암의 결박이라고 부릅니다. 마귀와 그와 함께 한 타락한 천사들은 어두움 속에 거하도록 추방당했습니다. 이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지역들 다른말로 가시 광선이 없는 지역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뜻하는 바 영원한 흑암이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의 흑암이며 이것이 결국 문자 그대로의 흑암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원인은 단순히 빛이 없다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바로 빛이 되시는 그분이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탄을 그 속에 가두어 둔 이 흑암이 인간의 외부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흑암의 영토 혹은 권세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골 1:13) 우리가 빛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우리는 어두움의 함정에 빠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용납함으로써 어두움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사탄의 공격앞에 우리 자신을 무력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 있는 곳마다 영적 어두움이 있으며 귀신이 활동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경고하시기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하셨습니다.(눅 11:35) 여러분 속에 한 빛이 있으니 곧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잠 20:27) 여러분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조명을 받아 "여호와의 등불"이 되어 여러분의 속을 살핍니다. 참으로 성령충만한 기독교인에게는 시로 거룩한 광채가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죄를 품고 있을 때 여러분 속에 있는 빛은 어두움 속에 있게 됩니다. 사탄은 어두움이 지배하는 곳에 들어가 거할 합법적인 권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귀는 어두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독교인의 마음에 아직도 존재하는 어두움마저도 드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작기
사탄이 인간 본성의 육적인 면에 들어가는 예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사리 보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정확하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 그의 행동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베드로의 부인을 두려움이 드러난 것이라고 간단히 결론 내릴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성이 두려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왔던 무리들을 상대로 칼을 뽑았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두려움이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을 부인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사탄에 의해 유도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사탄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베드로의 심령속에 있는 어두움의 영역에 드나 들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사탄은 베드로를 넘어뜨렸습니까? 유월절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 중의 하나가 자기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성경은 아래와 같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눅 22:23)
아주 어둡고 우울한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몸서리치는 순간에 우리가 읽는 성경은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눅22:24) 그들은 충격과 실망의 자세에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크냐는 논쟁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베드로! 물위를 걸은 자, 사도들 중에 가장 담대하고 가장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그가 다른 사도들을 눌렀을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 중에 높이 돋보인 것이 그를 우월감에 쌓이도록 했고 사탄이 이를 부채질하여 자만과 오만한 자세로 이끌어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교만으로 높아진 베드로는 넘어지게끔 된 것입니다.
교만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따르면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교만은 사탄을 타락시킨 원인이며 또 교만은 사탄이 베드로를 넘어지도록 하는데 쓴 바로 똑같은 어두움입니다. 루시퍼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종교적인 교만과 질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잘 알았습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죽일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주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나서야 베드로 사도를 공격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귀가 허락을 요구했고 또 이를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사탄이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는데 사용한 덫줄은 베드로 자신의 교만의 죄입니다. 싸움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어두움 속에 숨기고 있는 영역들이 우리가 앞으로 패배를 당할 영역들임을 인정하십시다. 종종 우리가 부딪치는 싸움은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을 찾아내어 회개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려면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우리의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첫 행동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우리를 피해 달아날 것입니다.(약 4:7)
베드로와 우리 자신에게 좋은 소식은 사탄이 성도들을 멸망케 하도록 결코 허락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이 허락 받은 것은 성도들을 밀알처럼 까부르는 것에 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속에는 밀알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같은 형의 공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을 통해 허용된 것이며 그 결과는 교만의 마음을 씻어버리고 우리의 삶을 보다 더 겸손하고 보다 더 솔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다고 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껍질 같은 겉사람의 본성은 새로 피조된 사람의 밀알같은 본성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 겨나 껍질은 둘 다 필요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생의 모진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우리를 참으로 쓰실 수 있게 되기 전에 우리는 껍질을 깨는 탈곡의 때를 지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졌던 껍질의 본성은 주제넘은 것과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잘한 일들 때문에 그는 야심에 차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이 깨지지 않은 자에게는 그것이 누구일지라도 그의 나라를 결코 맡기실 수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흑암 자체의 무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베드로를 공격하겠다고 허락을 구했을 때 예수님은 실재로 까부를 수는 있어도 그를 멸망시키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노린 싸움은 지독했지만 정확히 미리 재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속에 있는 어두움의 영역들에 관해 무지했으며 이같은 무지로 인해 그는 공격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 네 속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아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에 무지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실 때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마귀의 역사를 허무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심령을 유지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개가 필요한 곳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호하려는 본능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 캄캄한 골방으로부터 작은 변호사가 불쑥 나서며 내가 맡은 이 피고는 별로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시시한 소리를 잠잠케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변호인은 여러분이 죽는 날까지 여러분을 감싸려 할 것입니다. 또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며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결코 직시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여러분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주 예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여러분을 참으로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은채 우리는 영적 전투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야고보서 4장 6절은 말씀합니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대적하신다는 뜻) 이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면 그런데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히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7절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 대체로 그 자체가 영적 싸움의 승리를 보여주는 기념탑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회개, 겸손 그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는데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막연하게 순복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개인이 싸우는 전투에서 정확하고 구체적인 영역을 주님께 순복하여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귀의 능력을 대적하게 되는 때 이는 분명코 예수님께 순복한 심령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책 전체에 거듭해서 나오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차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이 원칙을 알며 이를 깨닫고 또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원칙은 이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완성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이 규정은 영적 싸움의 모든 면에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응답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참으로 사탄은 여러분의 연약한 곳을 공격하도록 허락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성품까지도 덧입기 시작할 때 적은 물러갈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을 망치려고 짜놓은 상황들이 이제 여러분을 온전케 하도록 역사하고 있다면 여러분을 공격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결과는 오순절 후 하나님께서 그를 쓰셔서한 앉은뱅이를 고치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겸손하게 된 새 베드로가 모여든 군중에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교만과 마귀를 이긴 베드로의 승리는 그의 입술에서 나간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심령속에 이루어진 예수의 성품으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었으며 베드로 안에 있던 교만의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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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투의 세 영역 2 /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 2 장 하나님의 백성의 요새 : 겸손
사탄은 덕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겸손 앞에 기겁을 합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을 보면 등골이 오싹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무릎을 꿇을 때 그의 머리털은 곤두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하나님께 영혼을 바쳐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온유한 자 앞에서 떨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때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던 영역들에 이제는 주님이 서 계시며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기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는 상대가 참으로 누구인가?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마귀를 향해서 “흙을 먹을지니라”고 심판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너는 흙이니”하신 말씀도 기억해 보십시오(창 3:14-19). 우리의 육적 성품, 곧 타고난 모든 것의 본질은 흙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서로 연결된 내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은 “흙”이라는 우리의 땅에 속한 육적 성품을 먹고 삽니다. 사탄의 만찬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놓지 않고 있는 것들이 올라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억누르는 어려움들의 직접적인 근원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본질상 육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한 면인 우리의 육적 본성이 언제나 마귀의 목표가 되리라는 사실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이 같은 육적인 영역들이 우리의 기도를 서서히 막히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삶에 힘을 빼어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통로를 바로 사탄에게 열어줍니다.
자기가 의롭다는 과장된 기분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정직하게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어떤 분이 계신지를 압니다. 그러나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또한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복할 때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온전한 은혜의 피난처가 되며 모든 사람으로 정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그는 여러분의 죄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내면에 죄가 가득했을 때에도 거리낌 없이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 불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그가 얼마나 더 여러분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보이시겠습니까?
영적 싸움에서 공격에 나서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싸워야 할 많은 전투가 단지 우리 자신이 취한 행동의 결과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육으로부터 오는 것과 마귀로부터 오는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아내와 한때 예쁘고 빨간 홍관조 한 마리가 근처에 깃을 들인 곳에 살았습니다. 홍관조는 자기 영역의 세력 유지에 아주 철저하여 다른 홍관조들이 이를 침범하면 미친 듯이 싸워서 쫓아낼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봉고차가 한 대 있었는데 그 차의 양옆에는 큰 거울이 달렸고 크롬으로 만든 범퍼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따금 그 홍관조는 범퍼나 거울을 쪼아대며 공격하곤 했는데 거기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다른 새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그 홍관조가 거울을 쪼며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참 어리석은 녀석이군. 싸움의 상대가 그저 자기 그림자뿐이라니...”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제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싸우고 있는 많은 상대가 네 자신의 그림자니라.”
우리는 사탄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전에 우리 자신의 육적인 본성이 우리의 진짜 상대가 아님을 확실히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를 짓누르는 것들이 우리가 어제 심은 것을 추수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고발하는 자와 합의하라
여러분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합의)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 ~26).
예수님은 여기서 법률 소송을 피하라는 것 이상의 뜻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상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바로 이 송사하는 자와 바로 이 재판관과 관련하여 우리는 늘 소송에 지고 감옥에 갇히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설명합니다. 이야기 속의 송사하는 자는 마귀이며 재판관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송사하는 자 사탄은 모든 이의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참소하고 서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진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기초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를 고발하는 자는 “(우리를) 옥에 던져 넣으라”고 할 합법적 근거를 항상 갖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란 “더러운 옷 같기” 때문입니다(사 64:6).
예수께서 “고발하는 자와 급히 합의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마귀를 “따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사탄이 어떤 죄와 결점을 들어 여러분을 참소할 때 마귀의 참소가 조금 밖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불의하다는 그의 말에 합의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여러분이 부정하다거나 사랑하지 않고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 “그가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의를 놓고 마귀와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의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변명하며 자신을 정당화시켜 볼지라도 종종 마귀의 참소 가운데는 얼마간의 진리가 들어 있음을 여러분은 속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에 기초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롬 5:1). 사탄이 여러분을 상대하러 올 때 그는 여러분을 속여서 여러분의 관심의 초점을 여러분 자신의 의에 맞추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의가 되심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송사하는 자가 우리의 부족함이 있는 곳을 습격해 오는 일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소자가 사랑이 부족하다며 여러분을 정죄하려고 올 때 여러분은 “네 말이 옳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모든 죄, 사랑이 불완전한 죄까지도 위해서 죽으셨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사탄이 퍼붓는 공격의 그늘에서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밝은 빛 가운데 서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내어드리고 여러분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로 바뀌도록 구하십시오.
사탄이 참을성이 없다고 여러분을 정죄하려 할 때는 여러분은 다시 한 번 “그래 육체로는 내가 아주 참을성이 없다. 그러나 내가 거듭났기에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피로 나는 용서하심을 받아 깨끗함을 입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사탄의 고소를 들을 때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심판의 보좌가 아니요 오히려 은혜의 보좌 앞이며 따라서 도우심을 얻기 위해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십시오(히 4:16).
그러므로 마귀를 이기는 결정적인 열쇠는 겸손입니다. 겸손히 여러분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여러분의 체면을 지키려고 자신을 변호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옛 본성을 따라서는 여러분이 부패했고 죄 투성이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성품을 지녔습니다(엡 4:24).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육의 상태에 대해 우리를 고발하는 자와 합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분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원칙을 단지 영적 싸움을 하고 있을 때에만 국한하지 마십시오. 이 교훈은 다른 상황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여러분의 영혼을 영적 방어진으로 둘러쌓아 다툼과 경쟁심, 또 삶 가운데서 짜증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여러분의 평안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를 실천하기가 기막히게 좋은 데가 여러분의 가족과 갖는 관계성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로부터 감정이 둔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육신적으로 반응하면 부부사이의 대화가 쉽사리 싸움으로 확대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대안은 단순히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아내의 말에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둔감했다는 것이 아마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함께 하나님께 보다 다정한 사랑을 구하십시오.
아내들은 아마도 남편으로부터 자신이 직장에서 얼마나 시달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말이 거의 틀림없이 맞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편이 당하는 일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비난에 역습으로 반응하는 대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남편의 말에 동의하십시오. 함께 기도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해심을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마음이 겸손하여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을 것이며 사탄은 많은 전선에서 무장 해제를 당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덕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겸손 앞에 기겁을 합니다. 그는 겸손이 하나님께 영혼을 바쳐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을 미워합니다. 마귀는 또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기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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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의 세 영역 3 /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 3 장 원수의 요새들을 파함
사람들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두신 계획의 첫 단계일 뿐이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성품과 능력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아주 많은 영역들이 변화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있게 될 것입니다. 요새들을 파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옛 사고방식을 허물어 제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하심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요새인가?
“우리가 육체으로 행하나 육체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구출 작전에 성공하려면 먼저 적의 방어진을 제거함으로써 시작해야만합니다. 영적 싸움에 관해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견고한 진” (Strongholds)이란 낱말을 써서 사탄과 그의 군대들이 숨어서 보호받고 있는 영적 요새들을 뜻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이 요새들은 개인과 교회, 아울러 지역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사고방식과 이념들 가운데 존재합니다. 승리를 외칠 수 있기 전에 이 요새들을 파하여 사탄의 무장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병기가 효과적으로 사탄의 집을 약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고한 진(혹은 요새)”이란 낱말의 성서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견고한 진은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던 요새화 된 주거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광야 수풀 요새들에 숨어 있었던 것을 봅니다(삼상 23:14,19). 이 요새들은 자연적인 구조물들로 보통 산 중턱 높은 곳에 있는 동굴들이었으며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들이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마음에 그리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서를 기록한 이들은 “요새”란 말을 써서 강력하며 힘을 다해 지키는 영적인 실체들을 정의한 것입니다.
요새는 주님이 우리의 요새가 되시는 경우처럼(시 18:2) 우리를 마귀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의 근원지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역으로 요새는 마귀를 위한 방어의 근원지일 수도 있어서 악에 대한 우리의 동정적인 생각들을 통해 귀신 또는 죄악의 활동이 우리 안에서 실재로 방어되고 있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폭로하려는 요새는 옛 자아의 삶을 감싸고 지키려는 그릇된 자세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종종 한 개인의 삶 속에 귀신으로부터 짓눌리는 “요새화 된 거처”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요새의 하나를 모든 이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라고 정의합니다(고후 10:5). 마귀의 요새는 하나님을 아는 것 위에다가 스스로를 높이고 이로써 마귀에게 개인의 의식 생활 가운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하는 온갖 형태의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악령에 사로잡힌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 귀신에 붙잡힐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귀신에 붙잡힘을 당하면 성령이 기독교인의 영을 충만케 하시는 식으로 그 귀신은 잡은 자의 영을 충만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귀신들에게 눌림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이 귀신들은 거듭나지 못한 사고의 체계를 점령할 수 있으며 특별히 그런 체계를 이루고 있는 생각들이 자기기만과 거짓된 교리들로 방어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므로 내게는 귀신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귀신이 영원토록 소유한다는 의미로서는 여러분은 붙잡을 수 없지만 만약 여러분이 악에 대한 동정적인 생각들을 회개하기를 거절하면 여러분에게도 귀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반역이 여러분의 삶 속에 마귀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러 모양의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상담을 받고 또 기도를 받아 보지만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기도보다 더한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원수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영과 대적하여 그를 묶고 두려움의 요새를 파할 때까지 아마도 해방은 그들에게서 멀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에게 성령이 계시므로 유혹에 속을 수가 없다고 배워왔습니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의 영을 보내신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쉽사리 자기기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실상 기독교인은 유혹에 속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생각 자체가 속임수입니다. 바로 이 거짓말이 일단 신자의 마음에 번지면 그의 생각과 의견은 수정처럼 굳어져서 그가 영적으로 어떤 미숙한 상태에 있든지 그대로 변할 줄을 모릅니다. 온갖 종류의 악령들이 그 사람 자신의 생각과 교리의 무장으로 자기들이 보호받는 것을 알기에 마음 놓고 그 영혼을 공격할 것입니다.
종교적인 자기기만의 세력을 부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본질 자체가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혹에 속아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속은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속임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잘못일 수도 있다는 점도 아울러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을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은 영역이 모두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입니다. 그래서 유독 신자의 마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의식 생활이 차지하는 영역, 바로 그 곳에서 요새를 파하는 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참으로 원수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낮추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사탄은 죄를 먹고삽니다. 신자의 삶 가운데 어디든지 죄의 버릇이 있는 곳이면 그 분야에서 귀신의 활동을 보게 되리라고 예상해야 합니다. 죄의 버릇은 종종 신자에게서 힘과 기쁨을 빼앗아가는 악령의 거처가 되는데 바로 그 거처(habitation 혹은 버릇-habit)가 요새입니다.
악령들이 신자의 삶 가운데 마음가짐이라는 영역을 드나들며 이를 점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들 각자가 육적인 마음을 (역자 주 : 마음으로 번역된 영어의 낱말에는 “mind”와 “heart”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저자는 “mind”를 인간 사고의 영역으로 “heart”와 구별합니다. 이 구분이 문맥상 확실치 않을 경우 역자는 “mind”를 생각으로 “heart”를 심령으로 옮겼습니다.) 갖고 있으며 이것이 막연한 공상과 자기를 하나님 위로 높이려는 생각들(고후 10:3-5)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데는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사고의 체계, 곧 원수를 보호하고 있는 요새를 처리함으로써 마귀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요새, 그릇된 마음가짐, 그릇된 사고의 과정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을 바로 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흠정역 : 내안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요 14:30).
사탄은 예수 안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사탄이 우리 속에 아무런 비밀 지역, 사탄이 단추만 누르면 악을 향해 우리의 영혼의 문을 열게 하는 유혹의 신호기가 없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의 요새가 무너지면 비록 우리가 여전히 이따금씩 죄에 빠진다 해도 우리는 큰 승리 가운데 행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아울러서 다른 이들을 도와 원수로부터 해방되도록 하는데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에 앞서 회개가 있어야 함
요새를 파하는 것은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막 6:12-13). 마음을 괴롭히는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해 말하자면 해방에 앞서 회개가 있어야 하며 이런 해방은 종종 다른 영역의 치유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신자 생활의 기간이 얼마이었든 지간에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의 삶속에 있던 많은 요새들을 허물어지도록 했습니다. 요새들이 허물어진 것은 여러분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왔을 때였습니다. 원수로부터의 해방은 종종 본인이 이를 원할 때 이처럼 아주 간단한 일이 됩니다. 그럴지라도 어느 정도의 회개가 없이는 해방은 거의 언제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귀신에게 떠나라고 명령한다 해도 만약 그 사람의 사고의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의 죄에 대한 그릇된 마음가짐이 그 귀신을 도로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중 한 면은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눅 2:35). 여러분이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행한다면 여러분의 생각하는 과정이 많은 면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임하여 여러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덕을 허락하시리라는 것을 믿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새들이 무너지고 승리가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경고해야만 할 것은 바로 악으로 찬 세상, 또 아울러서 여러분의 육체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극소화하거나 무시하도록 여러분에게 압력을 가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진짜 문제들은 깊숙이 잘 숨겨 놓은 채 그저 겉으로 드러난 죄 또는 어떤 사소한 잘못이나 내어놓으라는 유혹을 받게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비밀로 하는데 소모되는 에너지가 실제로 요새를 짓는 재료들이 됨을 깨달읍시다. 여러분이 싸우고 있는 귀신은 여러분의 삶에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지키기 위해 여러분의 생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의 삶 가운데 제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지 못한 영역들이 있습니다.(소리를 내어 버릇이 되어 있는 죄목을 말하십시오) 주여, 제가 타협해온 것을 용서하소서. 제가 또 주님께 구하옵기는 제게 용기를 주셔서 제 심령에 거리끼거나 고의적으로 자기를 속임이 없이 요새들을 파하러 나설 수 있게 하옵소서. 제 속에서 타협과 죄의 세력을 보강하고 있는 사탄의 영향력을 제가 성령의 능력과 예수의 이름으로 묶습니다. 제가 제 속에 자리 잡은 죄의 요새들이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의 영의 빛 앞에 제 자신을 드립니다. 성령과 말씀의 강력한 병기로써 제가 선포합니다. 제 삶속의 요새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제 속에 단 하나의 요새를 갖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의 요새를 말입니다.
주님, 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씻기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오늘 허물어진 요새의 잔해마저 제 마음에서 몰아내기까지 이 문제를 놓고 계속 싸울 것을 서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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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의 세 영역 4 /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 4 장 생각들로 지어진 집
나라들과 지역사회들을 지배하는 사탄의 요새들이 있는가 하면 또 교회와 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새들이 있습니다. 요새들은 그것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귀에 의해 유도된 사고방식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요새는 사탄의 활동 거점이 되어온 생각들로 지어진 집입니다.
원수로부터의 해방에 앞선 경고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마 12:43-44 상)
더러운 귀신의 본질이 영적이며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귀신은 여전히 쉴만한 집, 거할 곳을 찾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 본성에 실제로 악한 귀신들을 접대하고 어떤 형의 쉼을 줄 수 있는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박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밝히고 우리 속에서 귀신이 거할 곳을 짓는 건축 자료가 될 바로 그런 면을 활짝 벗겨 보십시다.
첫째로 귀신은 참 기독교인의 “영”안에 거할 수 없음을 깨달읍시다. 거듭남을 통해서 인간의 영은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실로 원수가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 중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악한 자의 본성에 가장 닮은 면은 육을 따른 의식 생활로 이는 바로 혼적 차원 또는 인간의 개성이 됩니다. 유독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우리의 생각들과 성결하게 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가짐이야말로 더러운 귀신들이 스스로 우리의 생각인양 가장하고 우리의 마음가짐 속에 숨어서 우리의 삶에 드나들 통로를 찾아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 12:44 후-45).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에 따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수로부터 해방된 영혼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야 할 필요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셔서 한때 사탄이 거하던 바로 그 장소에 주님 자신이 거하실 의의 집을 짓도록 해야만 합니다. 육신적인 질병의 경우를 제외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의식 생활을 복종하여 드리려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는 귀신을 몰아내 원수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의 무장을 빼앗음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1-22).
우리가 구원받기 전 여러분과 저는 마귀의 “평온한 소유물”이었습니다. 사탄은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 영혼의 집을 지키는 “강한 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던 날, 영광스러운 “더 강한 자”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공격하여 이기시고 저의 무장을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우리들이 거듭난 체험들은 육신적인 수준에서 보면 여러모로 다를 수 있지만 영계에서 일어나 전쟁은 모두가 아주 비슷하며 이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승리가 안겨졌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가 있었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천사들과 함께 방어 제일선이라고 할 저의 무장을 부수시려고 역사하시는 것을 자세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귀를 보호하고 우리의 구원을 막던 이 무장이란 바로 무엇입니까? 귀신들이 의지하는 무장은 악에 동의하는 우리 자신의 “생각, 마음가짐, 의견들”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장”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사도 바울은 “요새들”로 분류했습니다(고후 10:1-4).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요새에 관해서 말할 때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상대는 바로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했으므로 모든 잘못된 생각들과 마음가짐들, 즉 여전히 우리의 인식과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새들이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참으로 새 것이 왔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가운데 행할 때까지 우리는 변화의 과정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장의 뒤에 가서 이들 요새 가운데 몇몇의 정체를 밝히렵니다. 지금으로서는 개인적인 선에서 우리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십니다 : 영적 싸움에 계속 승리하도록 기초를 닦는 길은 주님이 이 요새들을 드러내실 때 주님께 두 손 들고 나와 주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통해 이들을 파하시도록 동의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요새라고 할 때 어쩌다 문득 들어오는 생각들이나 이따금씩 짓는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새들은 우리의 사고방식 속 깊이 숨어 있어서 우리가 이들을 알아차릴 수 없거나 악이라고 보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이 장의 첫 머리에 예수께서 귀신들이 쉬기를 구하고 있다고 밝히셨다고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구하는 쉼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주변과 화합함으로써 비롯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의식 생활이 불신앙, 두려움이나 습관적인 죄에 동의 할 때 원수는 쉼을 얻습니다.
원수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는 과정에서 흔히 얼마 동안 내적 갈등과 격동을 거친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는 좋은 징조로서 당사자의 의지가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올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벧전 5:9상). 바울은 정사와 권세에 맞서서 교회가 해야 할 씨름에 관하여 말합니다. 요새를 파하는 과정에는 싸움의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원수와 맺은 합의를 파하려 하며 원수는 여러분의 삶속에 남아 있기 위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사로잡아 옴
우리가 기독교인이란 점에서 안심할지 모르나 기독교인이란 것이 우리를 온전케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요새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 요새들 가운데 몇몇의 정체를 드러내봅시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음의 요새들 중 적어도 어느 하나에는 걸려서 한계에 묶이게 됩니다. 즉 불신앙, 사랑에 냉랭함, 두려움, 교만, 용서하지 않음, 정욕, 욕심 또는 이런 것들이 복합된 것과 아울러 있을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
우리가 변명하기에 빠르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눌림을 받는 곳을 분별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결국 이런 곳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가짐, 우리의 인식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고 변호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정당화하고 변호합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합니다”(잠 23:7).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존재의 핵심이 우리의 의식 생활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로부터의 어떤 해방이라도 참으로 쟁취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부족을 정직하게 깨닫고 이를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가식을 집어 치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실로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치우시지 않으면 안될 첫 요새는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요새로부터 자유하게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잘못을 깨달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기준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환희의 절정에 오른 다윗이나 고통의 심연 속에 빠졌던 욥, 아울러 두 사람의 중간쯤에 있는 우리 모두가 드리는 해묵은 질문은 “사람은 무엇입니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질문을 하지만 그는 바로 성령의 감동 하에 이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오직 우리가 ... 예수를 보니"(히 2: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것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하시는 새로운 인간형의 본보기가 되십니다(엡 4:23-24). 그는 우리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녀들로 된 가족의 맏아들 되신 자신의 형상을 우리에게 본받게 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히 2:10, 롬 8:28-29).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꼭 예수님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깨달읍시다. 우리가 점점 더 자신을 드려 주님께 복종할 때 또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이 생명은 단순히 주님 자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의 삶”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을 주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바로 주 예수의 임재가 이와 같이 우리 속에 임할 때 우리가 싸우는 병기는 강력이 되며 우리가 요새를 파할 때 발하는 우리의 말은 권세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본받지 못하는 모든 생각들과 마음가짐들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런 생각들은 사로잡고 그릇된 마음가짐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이 오실 길을 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스리심의 더함”이 퍼져 나가도록 하여 마침내 우리가 주님의 영안으로 완전히 빠지고 이로써 우리가 주님 안에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믿게 되며 주님의 사랑, 생각과 소원들이 우리 속으로부터 흘러 나가게 되어야만 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귀신들의 요새의 정체들을 밝히려 할 때 없애버려야 할 두 번째 요새는 불신앙의 요새입니다. 바로 이 불신앙의 사고 체계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닮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그 이상의 영적 성장을 모두 볼모로 잡는 것입니다. 이 같은 거짓과 그것이 우리 심령을 묶어 놓은 사슬을 우리의 삶으로부터 벗어버려야만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순간 시간을 내어 여러분의 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성령께서 일어나 여러분의 심령을 폭포수처럼 부어 충만케 하시도록 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결코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다고 하는 요새로 고통을 당한다면 그 요새가 바로 지금 허물어지기 시작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주 예수여 제가 주님께 복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가 선언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 자신께 복종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 때문에 제가 싸우는 무기는 요새들을 파하는 강력이 됩니다(고후 10:3-4). “나는 결코 예수를 닮을 수 없다”고 하는 거짓을 구실로 하여 제가 죄를 짓고 또 죄에 대한 책망을 적당히 타협해버린 것을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가 저의 허물지고 죄악된 옛사람의 본성을 버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영의 능력으로써 제 마음에 존재하는 불신앙의 요새를 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희생 때문에 저는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또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를 것을 믿습니다.
실패의 요새를 격파하라!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을만한 다른 요새들을 살펴봅시다. 그들의 기원과 또한 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가를 알아봅시다. 첫째로 요새는 생각들로 지어진 집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 같은 모양의 싸움에 관하여 바울은 설명하기를 우리의 승리의 기초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데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0:5).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영혼을 활짝 열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그리스도의 노예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실패의 요새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를 우리의 일상 생활방식으로 삼아야만 하겠습니다. 또 마음에 둘 것은 회개가 “변화”를 뜻하는 것이지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 변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떼거리란 것들이 우리의 마음 밭을 배회하며 불신앙과 실패의 풀과 짚을 있는 대로 뜯고 있습니다. “나는 늘 실패하기 마련일걸”, “나는 다만 죄인인데”, 또는 “성령 안에서 행하려고 애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거든” 따위의 생각들이 한데 모여 벽, 마루 또 천정을 이루어 실패의 요새를 짓는 건축재료가 됩니다.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 같은 그릇된 생각들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각을 사로잡으십시오 : “나는 실패자!” 이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불신앙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비록 실패를 경험했고 또 아마도 장차 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계시므로 여러분은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나는 실패자이나 나의 만족은 하나님께로서 났고 내게로서가 아니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분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생각을 떨어뜨리십시오 : “나는 다만 죄인!”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대신하여 말하십시오 “나는 죄인이었으나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 또 비록 내가 여전히 때때로 죄를 짓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불의에서 나를 깨끗케 하신다”(요일 1:9). 보혈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 각자를 주님 자신처럼 청결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한 때 여러분을 억누르던 패배의 요새를 허물어뜨리며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나님께로서 난 믿음의 요새를 세우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옛 요새가 밝히 드러나고 패배주의의 사고방식이 무너져 내리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실패의 요새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계속 새롭게 되면서 여러분은 엄청난 능력과 평화로써 행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서 난 믿음의 요새에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목표와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임이 여러분의 마음 자세에 확립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롬 8:29) 마귀를 정복하시고 여러분의 심령을 구원으로 자유케 하신 바로 그 주님께서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이 새롭게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약속의 땅이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주님의 약속의 땅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 있는 거인들 또는 장대한 자들이 비록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여지없이 납작하게 만들었어도 그들은 주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여호수아이시며 패배를 모르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새로운 모습으로의 계속적인 변형이며 또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는 한 우리는 우리가 발견하는 요새들로 인하여 낙심하여서도 안되며 또 이따금 일시적으로 맛보는 좌절이 우리를 무력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볼 때 우리는 또 하나의 거인 또는 장대한 자가 제거되는 것이 다만 시간문제임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요새를 파괴함!
사람들을 억누르는 또 하나의 요새는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경험상으로 보아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할 경우 특히 그것이 사람들 앞에서일 때 아마도 당황하여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련의 반응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앞에 나서야 할 때 뒤에 앉아 수수방관합니다. 말해야 할 때에 잠잠합니다. 이처럼 잠잠하고 두려워서 자기 자신 속으로 움츠러 들어가는 것이 생각으로 짓는 집이 되고 거기에 두려움의 영이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속박 가운데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귀신의 요새를 이루어 놓은 생각들과 경험들의 얼마를 살펴봅시다. 아마도 여러분이 나이 어린 아이였을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가 가족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생각 없는 말들이 아주 깊이 들어가 아픔을 피해 뒷걸음치면서 여러분은 본의 아니게 뒷걸음친 또는 움츠러든 위치에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래 여러분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 쉬운 입장에 처하기를 거부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사건들을 기억하지도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뒷걸음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여 줄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부당하게 보일지 모르나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건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행동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반응은 실재로 여러분의 성품의 한 부분이 되어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풀어 용서하여 줌으로써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억눌림 받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 일이 지나간 일로 끝나게 하고 그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주는 정도에 따라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마음을 회복시키셔서 사람들을 대하는 여러분들의 태도가 침착하고 강건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같은 용서하는 과정이 더해 가면서 여러분은 사랑이 자라나게 되고 또 성경 말씀대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게 됩니다”(요일 4:18). 두려움의 요새가 있던 곳에 사랑의 요새가 들어설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십시오 : “승리는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도록 하는 것”(마 12:44)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의식 생활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점령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께 무릎 꿇기를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동안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사탄의 무장을 빼앗아 가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무엇을 허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싸우는 병기가 요새를 파하는 강력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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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의 세 영역 5 /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 5 장 원수의 요새들의 세 가지 원천
만약 여러분의 삶 가운데 숨어 있는 요새들의 정체를 밝히려면 여러분의 마음속의 자세들을 조사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바라는 소망으로 반짝이는 모든 영역들이 그리스도께서 풀어 자유롭게 하실 영역이 됩니다. 그러나 소망을 갖고 있지 않는 사고의 체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파해 버려야만 할 요새입니다.
요새들의 첫 번째 원천 : 세상
일반적으로 말해서 요새들은 세 가지 원천에서 유래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태어난 바로 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끊임없이 접해온 일련의 정보 자료와 경험이 계속해서 우리의 아동기 지각 능력을 형성했고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요새의 가장 큰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사랑의 정도(또는 사랑의 부족), 우리의 문화 환경, 같은 또래들이 갖는 가치관과 그들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심리적 압박감, 아울러서 사람 앞에 나서기와 무시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 심지어 우리 몸의 생김새와 지능, 이 모두가 합하여서 우리의 주체의식과 우리의 인생관을 형성합니다.
불안으로 꾸며진 우리의 영혼은 다른 이것들로부터 오는 비난과 칭찬에 고도로 민감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그 같은 말들은 녹아있는 강철과도 같이 달아 있는 젊은 심령 속에 부어지고 열이 식을 때 우리의 성품 속으로 융합해 들어와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단순히 어렸을 때 교사나 부모가 생각 없이 한 부정적인 꾸지람을 그대로 받아들여 형성한 자아상 때문에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늦다고 믿고 있는지요?
이 같은 관념들과 제한들이 어릴 때부터 우리 안에 체계를 이루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을 만듭니다. 실로 삶에 대한 많은 우리의 의견들이 다만 우리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을 변호하고 지키며 우리의 의견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마치 우리 자신의 독창력이 그들을 낳기라도 한 것 같이 합니다.
이 같은 예를 하나 더 들면 점성술입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들의 “십이궁 별자리”의 특징과 약점들에 잠재의식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자아 발견의 탐구 과정에서 이처럼 거짓된 사실들과 착각들이 뒤섞여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가고 거기서 오늘까지도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정면으로 대적하며 버티고 서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어울리는 유일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다만 “(우리의) 선생만큼 될 뿐”이며 결코 “(우리의) 아비가 행한 일”을 하는 것 밖에 하지 못할 것입니다(새번역 눅 6:40, 요 8:41다. 우리의 “선생들”과 “아비들”은 아마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우리의 아비가 행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어떤 이의 인생관에 순복하기 전에 그의 삶의 방법 또는 행실의 “종말 또는 목표(영어의 종말 - end는 목표의 뜻이 있음)를 주의하여 보라”고 하십니다(히 13:7다. 그렇게 주의하여 보노라면 단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부활로써 그가 삶의 비밀을 아신다는 것을 확증하신 분이심이 명백합니다. 죽음을 정복하심으로써 주님은 자신이 삶을 깊이 이해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닮지 못한 한낱 인간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 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본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단 한 가지 목적을 뒷받침하지 않는 어떤 가르침도 우리를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자아 발견을 위한 이 같은 인생 순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옛 삶을 하나님께 넘겨 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잃지 않으면 우리는 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올 때 우리의 본질상 또 성격상 모든 것은 변하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마음, 새 생각, 새 영, 새 성품 또 궁극적으로 새 이름마저 주셨다고 합니다(히 8:10, 고전 2:16, 고후 5:16-17,계 2:17).
여러분이 거듭날 때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고 성령으로 또 하나의 세계 곧 하늘나라에 태어났음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발은 여전히 땅위에 있지만 여러분은 성령의 수레를 타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인격에 연합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손발이 여러분의 몸통에 붙어 있듯이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여 매인바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 여러분의 인품을 다시 갖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모든 것, 여러분의 지능과 육신의 모양마저도 이제 보다 나은 것으로 변화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실패들, 선입관과 마음가짐들은 지나가고 새로운 믿음과 소망이 여러분 안에서 날마다 자라나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새 출발에 이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우리에게 능력을 베푸시도록 하며 또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워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합니다. 또 예수 닮지 못한 것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대로 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 경험의 요새
우리 속에 요새를 짓는 또 하나의 방식은 우리의 경험들과 이들로부터 내리는 결론들을 통한 것입니다. 좋건 나쁘건 간에 이런 경험들은 이른바 실재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 우리가 현재 어떤 조직망의 사고와 의결들로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게 하고 있는가에 기초하고 있음을 깨달읍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진리로서 실재를 정의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실재 속으로 옮겨가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나라를 들어가는 관문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통틀어 종합한 뜻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삶의 실재라는 수준에까지 맞추어 놓을 때 승리는 옵니다.
우리의 경험의 요새를 쓰러뜨리려면 우리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해야만 합니다(롬 3:4). 우리의 삶을 모양 짓도록 할 권리를 가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 그 누구도,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까지도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합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을 모양 짓도록 허락해선 안됩니다.
실재로 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까? 또는 우리의 경험들입니까? 우리의 경험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않을수록 간교하게도 하나님은 그가 누구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인생관을 형성하는 의견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이 고침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치유의 은사가 오늘날은 없다(끝났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은 영원합니다. 이는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를 베푸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 관하여 말하자면 비록 여러분이 거듭 거듭 넘어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기도록 하실 것을 계속 믿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통찰력을 갖도록 자라날 여지를 마련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경험들이 타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복음서에 나오는 그분과 오늘에는 동일하시지 않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여러분이 끌어낸 결론은 잘못입니다. 이는 파하지 않으면 안될 요새입니다.
잘못된 교리들의 원천
요새의 셋째 원천은 거짓된 교회의 교리들과 가르침에서 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24:4).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에게 미혹 받지 않도록 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성경을 배우고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듣는 가르침 속에 있는 잘못을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특정한 목사님을 사랑하는만큼 그로부터 교훈을 받을 때마다 의심스러운 교리들에 대해 주님이 확증해 주시도록 겸손히 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라갈 만큼 참된 교사나 깨끗한 예언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인도한다 해도 우리는 눈을 뜨고 귀를 예수님의 확증하시는 음성에 민감하게 열어 놓아야만 합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해야 합니다”(고후 13:1). 참된 교사들조차 순진하게 거짓된 교리들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선생이 얼마나 신실한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받고 있는 가르침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거룩하심 또는 그의 능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또 우리가 이와 같은 영적 차원에서 예수님을 위해 또 그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고 있지 않다면 그 교리는 우리를 제한하고 억누르는 요새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혹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정직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만 합니다. 사탄의 계획은 우리의 자라온 과정이나 우리의 경험들 또는 교회의 교리를 통해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삶의 어떤 부분들은 사실이 아니거나 우리의 경우에는 타당치 않다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 직면하는 모든 영적 전투는 말씀을 놓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에 기초하여 우리의 삶을 세울 수 있는가를 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확신하는 바를 굳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모든 요새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온전히 그의 나라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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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의 세 영역 6 /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 6 장 그리스도의 형상의 요새
승리는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완성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단지 현재의 곤궁으로부터 풀려나거나 정상적인 생활을 가지려는 희망으로 영적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영적 싸움을 포함해서 영적인 것의 모든 면이 갖는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 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믿음의 유일한 목적인 그리스도 닮기를 빠뜨린다면 예배든지 싸움이든지 사랑이든지 원수로부터의 해방이든지 그 무엇도 참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돌이켜 봅시다. 주님은 고대 히브리 사람들을 애굽 밖으로 해방시키셔서 약속의 땅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의 세력 밖으로 해방된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들은 하나님의 목표에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본성이 변하지 않으면 처음에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들을 일으킨 바로 똑같은 문제들에 우리가 반드시 얽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듣기 싫은 소리일지 모르나 많은 우리의 영적 갈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 심령에 형성되기까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원수로부터의 해방에 두신 아버지의 목표는 단순히 우리의 짐 또는 마귀를 우리의 등에서 벗겨주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통한 역사의 키를 잡으시고 향하여 나가시는 구체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에 대한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롬 8:28-29).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실현하는 길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것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에 영의 침투가 있으며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임재하심이 우리의 영에 흠뻑 스며들어 충만케 하시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홍수처럼 흘러 넘쳐 우리 안에 “조금도 어두운 데가 남아 있지 않게” 합니다(눅 11:36). 주님의 임재가 이처럼 직접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파괴할 수 없는 방어진, 그 안에 우리가 악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요새를 만듭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관계성 즉 아버지와 갖고 또 우리 서로 간에 갖는 관계성 둘 다에서 뛰어난 주님의 길로 들어가며 이로써 헤아릴 수 없는 사탄의 공격에 영향을 받지 않고 행하게 됩니다. 실로 주님의 충만하심이 우리 가운데서 더해갈 때 바로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