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스크랩] 종말론에 관한 현대의 다양한 견해들

하나님아들 2014. 9. 20. 23:25
종말론에 관한 현대의 다양한 견해들

(1) 도덕적 종말론
알브레흐트 릿츌(Albrecht Ritschl, 1822-1889)은 기독교를 하나님나라를 창건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진 영적 윤리적 종교로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라, 두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종교적 또는 영적 중심과 도덕적 중심이 그것이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속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한 영적이다. 후자는 그리스도가 창건한 윤리적인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교회인 동시에 하나님나라이다. 그것의 목표는 인간 사회 전체를 하나님나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사랑에 감동된 행위를 통하여 이룩된 인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동시에 인간의 최고선이다. 기독교인의 임무는 그것을 확산하는 것이다. 리출은 하나님 나라를 지고의 윤리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리출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특징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윤리적인 인간 공동체였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창건한 예수는 윤리적으로 위대한 교사요 인류의 원형이었다. 리츌 신학의 문제점은 기독교의 본질을 예수그리스도보다는 영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로 간주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하나님나라를 단지 인류의 도덕적 기관으로 취급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낳은 탁월한 교회사가 하르낙에 따르면,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pole)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외적 통치로, 그리고 그것의 도래를 미래 적인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내적 통치로, 그것의 도래를 이미 실현된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르낙은 예수의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의 개념이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전승된 것과 예수 자신의 것이 혼합되어 있다. 전술한 두 극 가운데 전자는 유대 민족의 종교적 전승으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후자는 예수 자신의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개념이 껍질이라면, 이미 도래했다는 개념은 예수 자신의 생각인 동시에 알맹이였다. 하르낙은 하나님나라를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하르낙은 예수의 인격과 설교에서 종말론적 측면을 명확히 주목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특히 바울에게 충만해 있던 종말론적인 의식을 정당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도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껍질로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다시 오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그 핵심이다. '리출과 하르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이나 미래 적인 성격을 거부하고 현재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을 경시하고 그것을 진보적 역사관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윤리적 영역이나 내적 체험의 영역으로 제한했다.

(2) 철저적 종말론(Die Konsequente Eschatologie)
(1) J. Weiß(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 1892)
A. Ritschl의 사위인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1863∼1914)는 "그의 저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1892)는 종래의 예수 연구에 종지부를 찍고 신약성서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예수의 인격과 설교의 종말론적 성격에 대한 철저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했다. . 그는 예수의 메시지와 실존, 원시 기독교의 종말론의 중심적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그 당시 관념주의적인, 본질적으로 세계 내적이고 윤리적 특징을 갖춘 하나님의 나라 이해(특히 Ritschl (계몽주의 사상, 즉 진화론적이며 비종말론적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확신한다는 점)→ Harnack(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개별적인 종교 경험에 내재하며 지상의 이상적인 사회에서 점진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간주))에 대해 묵시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날카롭게 대립시켰다.
Weiss는 예수의 선포 속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연구하기 위하여 신약성서의 임박한 종말 기대를 후기 유대교적인 원형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에게서 미래의 왕국이 곧 도래할 것임을 확신하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종말적인 실체이고, 현재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면 종말이 바로 옆 모퉁이에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Weiss는 예수가 해명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의 원형의 3가지 요소는 :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 이원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은 완전히 초월적인 것, 완성기의 천상의 축복의 총체로서 이해되었다. 예수는 그 초세계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박하게 도래할 것임을 선포했다. 그러기에 거기엔 세계 내적인 흔적이 전혀 없다.(C.Walter)
여기서 예수는 산상설교의 도덕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같이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가 되었다.(J. Moltmann, 45f.)
(2)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6, Von Reimarus zu Wrede, Ein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1906) 슈바이처도 19C의 자유주의적 예수상에 드러난 현대적 이념에 대해 반기를 들고, 예수의 인격과 삶의 역사적 지식을 유대적 묵시문학에 비추어 해석했다. 슈바이처의 주장은 ①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는 묵시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② 예수의 메시지는 철저히 종말론적, 묵시적이다. ③ 예수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애 중에 곧 오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이론을 바이스의 견해와 구별하기 위해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나, 종말을 묵시적 환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을 파괴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 의도한 바 없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인물에 불과했다."는 기독론의 피해를 남겼다.

(3) 실현된 종말론 (C. H. Dodd :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6)
이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와 그의 활동 안에서 이미 왔기 때문에, 미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가까운 미래와 관련된 듯한 모든 텍스트가 현재적 성취로부터 이해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자신의 삶,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서 현존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여러 개의 사건들로 볼 수 없고, 예수의 사상에서 하나의 복잡한 사건의 여러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비유들은 심판의 위기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오랜 기간의 성장은 끝났고 결단의 시간이 도래했다. 남아 있는 것이란 낫을 대어 추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Dodd는 J.Jeremias의 비판을 받아들여 자기의 견해를 조정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적인 미래성을 허용했다(The Founder of Christianity, The Coming of Christ, 1954)

(G.E.Ladd, 32ff.)





(3) 실현된 종말론
슈바이처의 종말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종말론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이다. 그가 종말론을 예수의 교훈의 중요한 주제로 본 것은 슈바이처와 유사하나, 하나님나라를 미래 적인 것이 아닌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 것은 슈바이처와 전혀 다르다. 그는 예수의 초림과 함께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었다고 하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제시했다. 다드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어떤 것이 아닌 현재의 경험의 문제로 취급했으며,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그의 선언은 복음서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신약성서 저자들 역시 마지막 때가 이미 온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나(눅 10:18),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이나(요3:18∼19),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했다는 구절(요5:24) 등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다드는 "종말은 미래로부터 현재에로, 기대의 영역으로부터 실현된 경험의 영역에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드는「사도적 설교와 그 발전에서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종말론을 체계화했다. 이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는 주의 날이 미래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반해, 신약성서에서는 현재적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신약성서 저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종말이 역사 속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통치가 계시되었다. 장차 올 세대가 도래했다. 원시 기독교의 복음은 실현된 종말론의 복음이었다. 다드는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의 날, 새 땅등과 같이 신약에서 발견되는 미래 종말론적 요소들을 교회가 예수의 재림의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인의 묵시문학으로부터 도입하여 나중에 첨부한 것으로 해석했다. 원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으로부터 용어들을 빌려왔으나 그 내용에서는 전혀 달랐다. 하나님나라가 메시야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예상외로 지연되자, 신자들은 임박한 재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종말론의 재구성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가 미래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다드는 미래 종말론은 기독교 본래의 것이 아니며 후대에 유대묵시문학의 자료에 근거하여 재구성된 종말론으로 취급했다.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은 슈바이처의 철저적 종말론에 대한 반동으로 제시된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적이라고 주장한 일방적인 견해를 교정한 것이 그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러나 다드 역시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을 전적으로 간과하고 그 현재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인 면과 미래 적인 면을 동시에 증거하고 있는 성서적 종말론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서는 미흡한 것으로 평가된다.

(4) 수직적 종말론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종말론은 장차 미래에 발생하게 될 어떤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마주 서게 되는 순간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강림(Parousia)은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실제로 재림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실존적 상황 속에서 영원에 대한 끝없는 진지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 그가 저술한 로마서 주석을 보면 하나님의 초월성과 다리는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가는 다리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세계의 종말은 연대적 의미의 시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 또한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아 온 대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다 일어난 일이며, 그는 그것을 이미 성취하셨다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미래의 유형한 재림을 부인한 것이다.

(5) 실존주의 종말론
현재적 종말론을 더욱 강조하는 또 다른 접근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기 위한 적절한 도구로서 실존주의 철학, 특히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철학적 개념들을 사용했다.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이며, 성서 해석은 실존의 이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한편 불트만은 종말론 역시 비신화화 작업의 일부로 취급했다.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는 신화적인 형태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보존되고 계속되었다." 따라서 불트만은 하나님나라, 지옥,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개념을 신화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비신화화의 방법을 통해 실존적 종말론을 제시했다.
실존적 종말론은 미래에 일어날 문자적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과 관계된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도래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하나님이 최후심판을 함으로써 세상의 끝이 온다는 전통적인 종말론을 부정하고, 이를 개인의 수직적 위기와 심판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은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영생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천국이나 지옥 역시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의미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성서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본질적인 것은 세상의 끝이 매우 가까웠다는 신념이 아니다. 그 메시지 속에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개념과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개념이다. 실존은 인간의 본질이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인간자체가 바로 실존이다. 그것은 또한 기존 적인 것이 아니라 사건 적인 것이다. 언제나 순간적인 결단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현재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은 이러한 실존적 종말론의 근거를 사도 바울과 요한에서 찾았다. 바울은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의 비신화화 작업을 부분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옛 세상으로부터 새로운 세상에로의 전환점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오심에서 일어난 현재의 경험이라고 선언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보내사···"(갈4:4). 그는 구원을 현재의 존재에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부활 역시 현재적 경험이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 불트만에 따르면, 그러나 바울에게는 아직도 장래의 우주적 사건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이를 완전히 포기하고 현재에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의 개념을 더욱 철저히 전개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최후심판은 예수의 오심에서 이루어진 현재적 현상이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영생과 죽은 자의 부활도 미래적 사건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재의 경험으로 표현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불트만에 따르면,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 예수의 재림(parousia)은 하나이며 동일한 사건이다. 그리고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부활, 영생, 적 그리스도의 영의 도래와 같은 종말론적 실재들은 어떤 특정 사건이 일어났는가 여부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시간적이며 실존적인 의미에서 참되기 때문이다. 한편 불트만은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임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미래적 종말론의 주요한 근거인 마가복음 9장 1절, "내가 진실로 너회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을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후세의 편집자가 첨가한 것으로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밝히기 위해 비신화화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종말론의 특징은 종말의 미래 적인 면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 현재적이며 실존적인 면만을 강조한 것이며, 이것이 그의 종말론의 약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종말론적 사건들의 실존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들의 사실성을 간과했다. 따라서 불트만의 현재적 종말론은 그의 제자 케제만(E. Kasemann)을 통해 수정되었다. 그는 바울에 근거하여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양자 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전자를 후자의 구성 요소로 취급했다.

(6) 미래주의 종말론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을 그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견해를 미래주의 종말론이라고 부른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그것은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매개체"이다. "이러한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의 「희망의 신학」이다. 그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종말론을 독립된 교리의 일부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이 희망으로부터 시작을 하여 종말론적인 조명 아래 어떻게 그것의 테마들을 고찰할 수 있는가를 제시한 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기독교의 희망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하고, 그것은 바라는 대상과 그 대상에 의해 일어난 희망 모두를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 언어는 "이스라엘의 언어와 희망과 경험을 만들어냈던 약속"이다. 성경의 종말론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종말론이 회랍적 의미나 현대의 경험 과학의 의미에서는 학문으로 가능할 수 없으며 다만 희망의 인식으로서 그리고 그 한도 내의 역사에 관한 인식으로서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종말론적 메시지의 이해를 위해 신구약성서에서의 약속의 의미를 검토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계시는 약속의 형식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약속의 방식으로 그리고 약속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계시는 이 사건에서 현존하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말론적인 종류이다." 그는 계시들을 새롭고 역사적이며 종말론적 미래의 지평을 드러내는 약속들로 이해했다.
한편 몰트만에 따르면, 약속은 어떤 사건 속에서 성취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미래를 가르쳐주는 잔여물이 있다. 구약성서를 통해 약속된 하나님나라의도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미래 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미래를 향한 인류 역사의 움직임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희망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고 있어 미래적 종말론이란 평을 듣는다.
그에게는 하나님나라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 적인 것이다. 한편 그가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한 점에서는 그의 종말론을 역사 내재적 또는 정치, 사회적 종말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몰트만은 기독교인의 희망의 실현에 목표를 두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정치신학을 발전시켰다. 희망의 성취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래의 도래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는 없다. 희망의 성취는 많은 부분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은 이론의 신학이 아니라 행동의 신학이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세상의 악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시지 않는가를 묻는 대신, 그 악을 변화시키려고 행동한다. 교회는 현 역사 안에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어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현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몰트만은 역사 초월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을 거부하고 역사 내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주장했다. 그의 공헌은 종말론을 교의학의 일부가 아닌 신학의 전체로 간주한 것과 종말을 역사화하고 사회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몰트만의 미래적 종말론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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