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이 글은 클라랜스 라킨(Clarence Larkin)의 경륜적 진리(Dispensational Trurh)를 중심으로 쓰여졌습니다. 계시록은 사도 요한에 의해 밧모섬에서 A.D 96년에 쓰여졌습니다.
계시록은 말세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일곱 교회에 대한 격려와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는 것입니다
이 일곱 교회의 이름들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이름이 아닌데 적어도 다른 세 교회가 더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골1:2), 히에라폴리(골4:13), 트로아(행20:6,7) 그렇다면 이 일곱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나타날 일곱 교회 기간의 교회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1세기 말렵에 있던 교회들을 선택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기독교 일곱 교회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에베소 교회 (계2:1-7)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하시는 부분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 입니다. 이 교회의 성격은 이 교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에베소는 가게하다(let go, 느슨해지다(to lex))라는 뜻입니다.
즉, 실족하는 교회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일부 내용에서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9~30) 또 내가 이것을 아노니,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 너희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나서 왜곡된 것을 말하여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좇게 할 것이라.
이 계시록 2장 6절 에서 같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즉 네가 니콜라파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하노라."
바울이 말한 "이리들"도 "니콜라파"를 말합니다.
그들은 분파가 아니라, "제사장 직분"을 정착시키려는 교회 안의 한 무리들입니다.
구약의 레위지파와 유사한 제사장 직분을 따르는 교회를 이루려고 시도가 있었을 것 입니다. "니콜라파"란 그 단어가 의미하는대로 "지배한다"라는 "니코(Niko)"와 "평민" 혹은 "평신도"라는
"라오스(Laos)"로 이루어진 단어의 의미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그 말을 씁니다. 지배 당한다는 뜻도 모르고. .)
이들의 목적은 "성직자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것 입니다.
그들은 평신도 위에 서서, 그들을 목자들(Pastors)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직자들(clergy), 주교(Bishops), 대주교(Archbishops), 추기경(Cardinals) 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사도직 계승"의 교리의 기원을 알게 되며, 평신도로부터 성직자를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예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속지 않았으며, 그들이 거짓말쟁이이며, 거짓 사도라는 것을 찾아 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특징은 교회사 A.D 70년에서 A.D 140년이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담고 있습니다. 2. 서머나 교회 (계2:8-11)
서머나의 어원은 "쓴맛"이며, "몰약"을 의미한며, 이 약은 죽음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교회 성도들에게 닥칠 박해와 죽음을 예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자들의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박해의 주동자가 마귀이며, "10일"동안 고난이 지속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10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로마제국 통치 기간인 네로A.D 64년에서 시작하여 이오클레디안 A.D 310년 까지 진행된 "10번의 큰 박해"을 예언한 설명입니다. 이 기간은 A.D 170년에서 A.D. 312까지입니다.
3. 버가모 교회 (계2:12-17)
버가모 교회의 메세지에서 "사탄의 회당"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칼데아의 대제사장이며 왕이었던 아탈루스 3세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에 버가모로 가서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그의 수도를 바빌론에서 버가모로 옮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했는데, 안티파스도 그 순교자들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전술을 바꾸어 교회를 높이기 시작했으며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콘스탄틴의 의도는 종교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는 한 백성으로써 통치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를 융합시키기를 원했으며, 그의 의도대로 그의 제국은 융합되었습니다.
이 연합의 결과 두가지 거짓되고 잔악한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첫 번째는 "발라암의 교리"이며 두 번째는 "니콜라파의 교리"입니다.
두 번째 것은 이미 에베소 교회의 편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A.D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렸던 첫번째 가장 큰 교회 회의(공회)는 교회 안에 이러한 교리가 확고히 되는 발판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회의는 약 1500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에서 주된 의결과제는 성직자 계급이 평신도를 지배하며, 정치적 통합과 종교체제를 이루는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들은 "니콜라파의 교리"를 교회의 정통교리로 확고하게 정착시켜 버렸습니다. "발람의 교리"는 민수기 22장 25장 에서 발람의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가나안으로 가던 길에 있던 모압 땅에 이르렀습니다. 모압의 왕이었던 발락은 프올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서 그들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발라암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발락에게 "바알 프올"의 음탕한 제사에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하도록 제안했으며, 이로써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분노하실 올무에 빠뜨렸습니다. 발락은 그대로 하였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들의 음탕한 축제에 갔으며, "모압의 딸들"을 보고 그들과 함께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붙어 그들에게 역병을 보내었고, 그들 중 42,000명이 멸망당하였습니다.
여기서 "버가모"라는 단어의 의미는 "숱한 결혼"이며, 교회가 국가와 함께 연합하는 "영적인 음행" 즉,"발람주의"의 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콘스탄틴대제는 이교도들을 교회로 개종하도록 하기 위해 이교도들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때 "바실리카스"(Basilicas)라는 웅장한 건물들을 지어주었으며, 교회를 장식할 수 있도록 많은 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들에게 최상의 제의를 입도록 해 주었습니다. 주교들은 값비싼 제의를 입고 바실리카의 높은 강단 위의 대리석 제단 옆에 만들어 놓은높은 보좌에 앉게 했습니다. 그의 앞에는 낮은 계급이 앉았으며, 금과 보석으로 장식으로 광채를 더했으며, 경배에서 감각적인 형태가 도입되었으며, 설교의 성격도 바뀌어졌습니다. 교회에 들어온 이교도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이교도 의식"이 교회에 그대로 채택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가지 예로 크리스마스를 들수 있습니다. 태양을 숭배하던 이교도들은 12월 21일이 동지로 12월25일이 되면 낮이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날이 태양신의 아들이 탄생한 날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이 날을 거대한 축일로 삼았으며, 로마에서도 각종 써커스를 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태양과 같으므로 교회는 이 둘을 융합하여 12월 25일을 주님이 탄생하신 날로 정하고 이교도의 태양신(Sun-God)과 일치시켜 버렸던 것 입니다. 이때부터 "전천년주의"(천년왕국 전에 주님이 재림하심)는 모두 "후천년주의" (천년왕국 이 후에 주님이 재림하심)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점점 강성해지고 부유해졌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정교일치는 주님의 재림없이 이 땅에 인간의 힘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무천년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이 기간은 콘스탄틴 대제의 즉위가 시작된 A.D.312년에서 A.D. 606년 보니파스 3세가 우주적인 감독(Universial Bishop)의 자리에 오른 때 까지입니다. 4. 두아디라 교회 (계2:18-29)
예수님이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한 것은 그들이 자칭 여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 이란 여자를 교회에서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음행을 "가르치도록" 그냥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이 여자는 선지자가 아니면서 자신을 선지자로 가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세벨은 우상을 섬기던 두로왕국의 공주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과 결혼했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을 숭배할 수있도록 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주의 선지자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녀의 영향력은 남편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그녀의 두아들인 아하시아와 여호람의 통치기간 중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딸 아탈리야를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시켜서 우상숭배를 유다땅으로도 전파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에도 바알의 산당이 지어졌고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 (왕상 16:29-33)
신약 시대에 교회내에서 이세벨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음행을 저지르게 하고 선지자 노릇 한 사람은 오직 교황밖에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에 있는 사람은 이세벨이 섬겼던 아스다롯 여신과 비슷한 마리아에게 경배함으로써 저절로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카톨릭 교리의 "피의 미사", "마리아 숭배", "이교도 의식"은 이세벨의 페니키아 종교와 흡사합니다. 이 기간에는 이세벨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을 통해 의로운 성도를 수 없이 박해했습니다. 붉은 색 옷을 입고 성도의 피를 흘린 교황은 계시록 17장의 음녀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시험을 이기는 성도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간은 A.D. 606년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20년까지입니다. 5. 사데교회 (계3:1-6)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는 살았으나 죽은 교회라고 칭하십니다. 이 교회는 형식과 의식만이 존재할 뿐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없는 교회는 의식과 형식적인 예배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사데란 뜻은 "모면하는 사람", 또는 "나오는 사람" 입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에서 나온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마틴 루터와 수많은 개혁자들이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거짓 가르침, 교권정치의 학정에 항거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독일의 위텐베르그의 수도원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써 교황의 독점적 고유 권한을 침범한 최초의 항거자가 되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기독교의 종교개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 개혁에 가까웠습니다. 성령께서 도우셔서 이 반박문이 널리 유포되었고, 또 인쇄술로 인해 성경이 많이 발행되었습니다. 이 때까지 카톨릭에 의해 갇혀져 있던 "이신득의"(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교리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종교 개혁자들은 그동안 자행되어 왔던 수많은 종교적 의식과 거짓 교리들을 제거했지만 세례나 교권주의 같은 로마 카톨릭의 구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켰지만, "하늘들로부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A.D.1520년부터 175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6. 필라델피아 교회 (계3:7-13)
필라델피아(빌라델비아)란 단어의 의미는 "형제사랑" 입니다. 이 교회는 사데 기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날카로운 교리 논쟁이나 상호간의 적대감 대신 형제들간의 친교와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3가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째,
"적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충성하였습니다.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부활하듯이 이 시대에는 영적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영적 부흥은 필라델피아교회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적은 능력이라고 하신 것은 온전한 진리만큼 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흥은 A.D. 1739년에 죠지 휫필드에 의해 시작되어졌으며, 존 웨슬레와 찰스 피니, DL 무디가 뒤를 따랐습니다.
둘째,
그들 앞에는 "열린문"을 두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었습니다. 1793년 윌리암 케리는 세계선교를 외치며 배를 타고 인도로 갔고 거기서 이방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곧이어 주님은 중국, 일본, 한국, 아프리카와 여러 작은 섬들로까지 계속해서 문을 열어 나가셨습니다.
셋째,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 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온 세계에 닥칠 환난을 말합니다. 필라델피아아 교회는 일곱교회 중 유일하게 칭찬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 기간에 닥쳤던 10번의 시험에 비하면 시험이라고 할 만한 어떤 시험도 받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시험의 때"란 장차 온 세상에 임한다는 말씀을 놓고 볼 때 미래에 있을 "대환난"(Great Tribulation)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주님이 "그 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시기 전에 있을 것 입니다.(계 3/10) 필라델피아 교회는 이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 분명히 주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른 믿음을 지키는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기 전에 들림받을 것이란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은 1750년에서 1900년까지입니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이 결국은 쇠퇴해지고 타락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이 필라델피아 교회기간 동안 융성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인 능력대신에 일종의 선교사업으로, 기계적인 방법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또한 20세기 전반부터 자유주의 신학이나 오순절 성령운동(은사주의)이 일어났습니다.
7. 라오디케아 교회 (계3:14-22)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들은 교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
(계시록 3/16)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미지근한 물"은 혐오감을 일으키거나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미지근한" 교회 만큼 그리스도께서 더 싫어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 분은 차라리 차거나 덥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존 웨슬리가 야외 설교를 하러 온 영국을 순회하러 다니기 전까지 영국 교회의 냉담한 영적인 상태를 잘 묘사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 이 "미적지근한 상태"에 있습니다. 아주 극소수만이 영적으로 덥고 뜨겁습니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만 대부분은 사업상이거나 사교적인 장소로 다니기 때문이며 위원회, 사교 모임, 클럽처럼 양적 증가는 있으나, "영적인 뜨거움"은 전혀 없습니다.
부흥 집회가 열리지만, 주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대신, 돈을 주고 불러온 부흥사들과 복음 가수들을 고용해서 분위기만을 띄웁니다. 이제 구령도 하나의 사업이 되어 버린 것 입니다. 미지근 하게 된 원인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것 입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자기 기만"에 빠져 있습니다. 계시록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외적으로 매우 부유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십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교회들이 도처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라오디케아만큼 부요한 교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성곽같은 웅장한 교회건물을 지었고, 오색찬란한 유리창, 웅장한 강단, 아름다운 성가대, 엄청나게 많은 교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교회들은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하고 은행에 넣어서 이자놀이도 합니다. 물론 모든 교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술을 먹고, 도박을 하며, 춤을 추러 다니는 아주 세상적인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영적인 사람들은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출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들이야말로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교회에 초청을 받는다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자기들이 지어놓은 교회의 웅장한 외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할 것 입니다.
또한 웅장한 강대상과 수많은 성가대를 자랑하며, 교인수를 자랑할 것 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인 생활에 관한 질문"이나 "잃어버린 영혼에 관한 구령"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그들은 "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임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두어 들인 부에 눌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없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만 갖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을 사람을 회심시키지 못 합니다.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입니다.
오늘날 라오디케아 교회가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정의롭지 못한 돈"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로써 단련된 금"을 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 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금은 어떤 종류의 금 입니까?
불로써 단련된 금은 깨끗한 돈 입니다.
"녹이 슬지않는 금"은 사기로 얻은 금이나 추수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그런 금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라오디케아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되어 있습니까? (약5:1-4).
흰 옷을 사서 입으란 말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행실을 하란 말입니다. 벌거 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란 말은 목회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을 사치, 부정 축재, 성적 타락 등을 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가난하면서도, 눈이 멀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근시안" 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재물만 탐할 줄 알지 하늘의 영적인 보화를 탐할 줄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름과 박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안약은 사서 바르지 않습니다.
라오디케아 교회에 주어진 가장 놀라운 계시는 계시록 3/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죄인들에게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문 밖에 서 계시고 이 문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라오디케아 교회 문밖에 서있다는 것은 교회에서 예수님이 배척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며, 예수님이 다시 들어갈 수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뜻 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외적으로 그렇게 부요해 보이는 교회가 그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말입니까?
"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배척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 밖에 있을 수 있습니까?
교회가 일부러 주님을 밖으로 나가도록 밀어 내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께
예배를 드렸고, 그 분을 찬양했고 온갖 종류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물러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니까?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한국 일부 교회에서는 현재 효율적인 교회운영과 성도관리를 위해 세상의 경영기법까지
동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교회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교인들의 투표나 초청으로 되는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 3/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미지근한 물이 되어 버린 라오디케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길은 교회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성경적 진리를 회복하는 개혁을 하거나, 각 개인이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다시 들어오도록 하는 것 입니다.
오늘 날 교회는 바로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거듭난 사람"들을 데리고 가실 그 날까지 계속 될 것 입니다. * 오늘날의 교회는 크게 7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 여러 속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자유주의적인 교회 - 성경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고,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을 부인하며, 사회활동을 강조하는 교회 2. 은사주의적인 교회 - 진리를 중심하지 않고 성령체험, 귀신 쫓음, 신유, 예언, 방언 등 은사를 중심하는 교회
3. 기복적 신앙을 가진 교회 - 예수님 믿으면 건강축복, 물질축복 받는다고 하면서 복 받기 위해 예수님 믿는 교회
4. 물질 중심하는 교회 - 헌금을 강요하거나, 성전 건축이나 교회확장을 중심하거나, 목회자가 치부하는 교회
5. 교권주의적인 교회 - 목사의 권위가 하늘에 닿아 목사 중심으로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교회
6. 지식적 말씀을 선호하는 교회 -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성경적 진리보다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교훈을 중심하는 교회
7. 근본적 믿음을 지키는 교회 - 기독교의 근본 믿음과 교리를 지키고, 세상에 물들지 않은 교회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정욕에 따라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을 많이 둔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잘 믿어지지도 않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아서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건전한 교리를 강조하는 교회보다는 지식적 말씀을 전하거나, 황홀한 체험을 줄 수 있거나, 복을 빌어 준다거나, 문화활동이 풍성하거나, 사교적인 교회가 더 인기가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교세 확장을 위해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말세가 다가온다거나 지옥이 고통스럽거나 마귀가 존재한다는 말은 이제 거의 금기 사항이 되 버렸습니다. 교인들이 세상에 물들거나 타락해도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교회 건물과 성도의 숫자와 헌금 액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뜨겁거나 차가운 신앙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뜨거운 신앙은 존 웨슬리가 했던 것처럼 믿음과 말씀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영적부흥 상태이고, 차가운 신앙은 청교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시하고 세상을 멀리해 금욕적으로 사는 신앙입니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있는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 (마태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
(계시록 22/14)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계시록 21/18~19) 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삭제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책과 거룩한 도성과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마가 7/7~9)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니, 단지와 잔을 물로 씻는 것과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자행하는도다."라고 하시니라. 또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자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쉬 버리는도다.
제가 가진 입장은 근본주의 중에서도 성경 말씀을 최우선시 하고, 신약 성경에 적힌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한다는 '성경 근본주의'(Bible Fundamentalism) 입니다.
사람이 만든 어떠한 교리나 전통이나 의식도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 율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종결지셨기 때문에 참고할 뿐 지킬 필요는 없으며, 더 큰 계명인 사랑으로 완성합니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로마서 13/10)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니라.
특히 사탄과 마귀의 실체를 파악하여 더 이상 속지 말고, 진리의 검으로 악한 세력의 음모와 계략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찬송가 중에서 하늘 군대가 되어 마귀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가사를 살펴 보겠습니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384장, F.J. Crosby 1820~1915)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누가 당하랴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2. 마귀들과 싸울지라 (388장, J.W, Howe, 1819~1910)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심판 날과 멸망의 날 네가 섰는 눈 앞에 곧 다가 오리라. 3. 우리들의 싸울 것은 (393장, T.Sasao) 우리들이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이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권세 힘써 싸워 깨쳐 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4. 주 믿는 사람 일어나 (397장, J.H. Yates, 1891)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 하면서 겁 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위 찬송가의 작사가들은 모두 주님께 칭찬 받았던 필라델피아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찬송가는 엄청난 영적 부흥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썼으므로 찬송가에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 권세는 마귀가 쥐고 있고, 모략과 궤휼로 사람들을 미혹하니 진리와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심판 날에 적그리스도가 눈 앞에 나타날 것까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선 철저한 진리와 믿음 위에 서야 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나 뱀처럼 지혜로우라 하셨습니다. (마태 10/16) 다니엘서 12장에 마지막 때에 관해서 주님은 '지혜 있는'(현명한, wise) 자가 창공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고, 지혜 있는 자가 진실을 깨닫는다고 말씀하셔서 지혜의 중요성을 2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혼란한 시기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온전한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죽음을 상징하는 요단강을 건널 때 진리를 상징하는 법궤만 메고 의지한 것과 같습니다. 착한 사람도 법에 대해 모르면 사깃군에게 속듯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진리 위에 서지 않으면 선과 평화를 가장한 마귀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 하시는 분들은 지금 교세를 확장하거나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데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정결한 신부로 단장시켜야 합니다.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며, 찬송 불러 예수님께 칭찬 받았던 필라델피아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라델피아의 신앙만 가져도 시험을 면하게 해 준다고 약속 해 주셨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나 박사님은 인간적, 철학적인 생각에 자유주의나 해방신학 같은 이상한 것 자꾸 만들지 말고, 성경적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교권주의, 기복주의, 은사주의, 자유주의, 성장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을 몰아 내야 합니다.
오직 성경을 중심하고, 존 웨슬리나 앤드류 머레이나 클라랜스 라킨 같은 근대 신학자들의 신학을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가운데 진리로 거룩히 자라난 사람을 마지막 때 찾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온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휴거되고 나면 다시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교만한 모든 사망의 세력을 멸하신 후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 돌린 자들을 천국의 상속자와 치리자로 삼아 영원히 함께 하시려는 것입니다.
(벧전 1/16) 이는 기록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니라.
(요한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사도행전 26/18)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흑암에서 광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며 그들로 죄사함을 받게 하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서 유업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나이다.
3. 결론 (글을 마치며)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 사람들을 타락시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결국은 자신을 섬기게 해 이 땅에 사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끊임 없이 노력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이 처음 오시기 200년 전 사탄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타락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2, 3세기 동안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헬라 왕국들인 시리아와 이집트의 싸움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특히 헬라문명의 광신자(狂信者)인 북방의 시리아(셀루쿠스 왕조)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에 의해 헬라화를 강요당했습니다. (다니엘 11장 북방왕과 남방왕의 싸움) 매력적인 헬라문명에 압도되어 그토록 보수적이었던 유대인들은 앞을 다투어 헬라의 언어, 관습, 의복, 제도를 채택했으며 히브리 신앙은 진부(陳腐)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올림픽의 본산인 헬라의 체육관이 세워졌고, 나체로 경주하는등 스포츠의 공세는 대단하여, 심지어는 성전의 제사장들도 성소봉사보다는 운동 경기에 더욱 매력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제 히브리인의 정통적인 신앙과 전통은 헬라의 관습과 철학에 뒤섞여졌으며, 그 결과로 사두개파가 생겨났고, 이에 반대하는 바리새파도 일어나, 수천년 동안 보전돼 온 히브리 신앙은 사분오열(四分五裂)이 되었으며, 성전예배의 의미는 망각되고 형식만이 남게 되어 구속의 경륜은 사람들의 눈에서 가리워졌습니다.
심지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에서 조석으로 드리던 상번제마저 중지되었으며, 성전 앞에는 우상의 제단이 세워지고, 돼지가 제물이 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대신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와 디오니수스(Dionysus)를 예배하도록 강요되었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의 금지령이 내렸고, 돼지고기는 식용(食用)으로 권장됐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예수님의 재림을 앞둔 지금 이 시대에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물질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는 사람들의 도덕을 땅에 떨어 뜨렸고,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고,유대인들이 100년 전에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모의한 스포츠, 연예, 오락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섬기지만 예수님에 때한 뜨거운 사랑 없이 목회자에게는 사업 수단이 되어 버렸고, 장년층에게는 사교나 친목 모임이, 젊은이들에게는 연애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편 16/8)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 모셨도다.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전도서 10/2)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그의 오른편에 있으나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그의 왼편에 있느니라.
(마태 7/13~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협소하여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마가 8/34) 주께서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불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요일 2/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위 그림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 인생을 단순화 시킨 것 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 선택은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갈까?', '넓은 문으로 들어갈까?' 입니다.
인생 평면도를 살펴 보면 우리는 보통 군중들과 함께 넓은 문과 넓은 길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길의 끝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남들이 가니까 나도 무작정 따라 가 보지만 그 길은 끊겨 있고, 결국 뒷 사람에게 떠 밀려서 떨어지게 됩니다. 반면 좁은문과 좁은 길은 아무도 찾지 않아 외롭고 쓸쓸한 길이지만 그 길의 끝에는 넓은 세계가 연결되 있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게 됩니다.
인생 정면도를 보면 육적인 삶을 사는 왼쪽 방향에는 추세와 유행을 따라 많은 사람이 몰려 갑니다. 내리막 길이라 가기도 편하지만 계속 가다 보면 가속이 붙어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데도 멈출 수 없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져 차곡 차곡 쌓여 갑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 오른쪽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고리타분하게 성경 읽는다고 주위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수백만원짜리 명품 핸드백이나 시계를 갖추지 않았다고 왕 따 당할 것입니다. 게다가 오르막 길이라 누구도 힘든 고난의 가시밭 길을 외면하지만, 결국 맨 꼭대기에 현재보다 더 크고 화려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사탄은 오늘도 나의 왼쪽에서 크고 화려하고 탐스러운 선악나무를 흔들어 대며(네온사인을 번쩍거리며) 세상적 성공과, 돈, 향락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귀가 즐거운 거짓과 수준 낮은 이성으로 교만에 가득 차게 합니다. 그래서 탕자는 하나님이나 도덕 같은 것은 무시하고, 쾌락을 위해 방탕하게 살고, 서로 뺏고 뺏기면서 아귀 다툼을 벌이다가 복수와 전쟁으로 뒤 범벅이 되고, 결국에는 사망으로 치달아 영원한 불못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나의 오른쪽에서 작고 초라한 생명나무를 보여 주며, 진리와 믿음으로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라고 손짓합니다. 이를 위해서 의인은 세상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고, 의롭고 겸손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고, 사랑과 용서로 서로에게 힘을 실어 주다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
(누가 17/25) 그러나 먼저 그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며, 이 세대에게는 버림을 받아야만 하리라.
(누가 16/13) 어떤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그가 한편은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은 존경하고 다른 편을 경시하게 됨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더라.
(요한 12/24~25)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영생에까지 보존하리라.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 세대로부터 버림 받았듯이, 우리 또한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이 세대로부터 버림 받아야 합니다.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사탄이 소유한 세상과 하늘에 속한 예수님과 동시에 친해질 수 없습니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자신을 버려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듯이, 내 자신(고집,관념,욕심)을 버리고 새 생명을 덧 입어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벧후 3/3~6)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마지막 때에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 예수님의 심판과 재림을 외치면,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은 재림은 허왕된 이야기이며 이 땅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믿음은 단순했으며 항상 몸의 부활과 예수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 내에서조차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며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기 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나라는 시간과 상관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곳이지만 지구는 일시적인 장소이고, 이미 2~5번이나 운석 충돌로 멸망한 뒤 불타오르는 지구를 물로 덮어 진압한 뒤 소생되었다는 사실과, 홍수심판 때 물로서 멸망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충돌 가능성이 있는 소행성은 천 개 이상임) 또한 지구는 고작 직경 10km의 운석과 충돌해도 충격 에너지로 인한 열파로 잿더미가 되고, 먼지 구름으로 암흑천지가 되거나 대규모 해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누가 17/26~27) 노아의 날들에 일어났던 것같이 인자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으나,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진멸시켰느니라.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 받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노아 때처럼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다가 일순간에 멸망이 닥칠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 때가서 후회하고 돌이켜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 두려워하는 것이 이를 것이나, 의로운 자에게는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로마서 2/7~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 다투고 진리에 복종하지 아니하며 불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분개와 진노로 하시리라.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마지막 때 방종했던 악인에게는 그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 임할 것이나, 참고 기다렸던 의인에게는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이 세상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 새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이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주위 분들에게 알려 다가올 멸망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망과 천국의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파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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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opic & Issue
글쓴이 : blingbli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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