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스크랩] [손성은의 교리강단(8)]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③

하나님아들 2012. 8. 9. 16:33

[손성은의 교리강단(8)]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③
성자의 ‘낳음’은, 그 성자 안에서 낳은 바 되어져서 의인으로 인정되는 사건, 곧 우리의 중생과 거듭남을 강조하기 위하여서 특별하게 계시된 용어입니다.

제목 : ‘낳으심’과 ‘나오심’
본문 : 요한복음15:26-27/사도행전13:32-41
삼위일체신앙에 대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삼위일체신앙은, 사랑의 하나님, 빛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두 L자로 시작됩니다. Love(사랑), Light(빛), Life(생명). 우리 성도들이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삼위일체신앙의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외면되고 있는 한 국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삼위일체신앙은, 한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3분의 1이 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합하여 1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는 성부대로 완전하셔서 참 하나님이시고, 성자는 성자대로 완전하시고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령대로 완전하고 참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한 하나님이십니다. 신비입니다. 오늘은 이 세 분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그 관계가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어떤 연관성, 혹은 함축성을 갖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아들’이십니다. 이 관계는 두 분의 관계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성자의 지상사역을 예언하면서, 한 아들이 날 것인데, 그 이름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사9:6).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가 됩니까? 예수님이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아들’이 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계시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1:18에서도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낳으신 바 된 하나님’, 곧 아들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낳으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일상적인 언어용법에 있어서, ‘낳는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생물적 존재가 똑같은 종류의 다른 존재를 생기게 할 때 사용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어머니는 기르시고, 아버지가 날 낳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낳으신 바 되었다는 말을 이런 생물학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에게 하는 설교 중에 33절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시편2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을 비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윗을 높이 들어 인정받게 하실 때에 쓴 시편입니다. 6절부터 7절까지 보십시오:“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맥락은 분명히 왕의 위임식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낳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산이 아니라, 인정되는 것, 특별히 공인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면서 바울이 인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무시되고 감춰졌었지만, 이제는 그 영광이 나타나시게 되었다, 그것을 부활하신 때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도 이 말이 사용됩니다. 히브리서1장5절에 보면,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때의 오늘은 분명히 부활의 때가 아닙니다. 영원 전, 시간이 시작되기 전, 천사들 앞에서 아들의 존재를 공인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들이란 존재가 아버지의 어떤 생식적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공적 인정의 선포가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왜 이렇게 ‘낳았다’는 관계로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 ‘낳음’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공인해 주시는 것이 없으면, 우리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성자의 ‘낳음’은, 그 성자 안에서 낳은 바 되어져서 의인으로 인정되는 사건, 곧 우리의 중생과 거듭남을 강조하기 위하여서 특별하게 계시된 용어입니다. 이런 결론이 옳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도행전13장38,39절에 나오는 강조점을 묵상하면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니라”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는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곧 ‘낳으신 바 되는’ 선포가 맞물려 있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낳으심을 위하여 낳으신 바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성령의 나오심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요한복음15장26절은,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나오시는 것이 아버지께로만 아니라, 아들에게서도 나온다고 본 것이 서방교회 천년의 역사입니다. 신학적 논의는 생략하고, 이 나오심이 우리들에게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나오심은 분명히 ‘증언’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낳으심’의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중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중생했느냐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과 성부, 성령과 성자의 관계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목적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중생 이후의 삶,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것은 사명의 삶입니다. 사명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계획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열매 맺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명성취의 삶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증언의 삶’인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삼위일체신앙을 표방합니다. 교회는 어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까? 바로 중생의 신앙, 사명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신앙이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분들이 ‘중생’하신 분들이기를 소망합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모두 ‘사명’을 깨달은 분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중생과 사명, 회심과 문화, 얼마나 중요한 주제들인지 모릅니다. 이 두 가지에 기본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의 교회로 거듭나 이 신앙을 증언하는 사명을 갖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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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적 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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