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그리스도인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을 말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이고, 평일에는 이방인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직장에서는 비 그리스도인인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나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고 가정과 사회 모든 전 분야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1 장 온전한 인격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인격이 하나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이나 행동이 다르지 않은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을 하나로 묶는(인격적인 통합을 이루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lordship)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신다는 신앙의 고백 아래서 우리의 인격의 모든 부분이 하나될 때,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주 내의 영예, 존엄, 지위에서 최상의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십니다(빌2:9-10).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주되심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고전12:3).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롬10:9-10).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할 때, 주(主,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칭하던 용어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그들은 ‘야훼’라는 단어 대신에 ‘주(LORD)’라는 단어를 대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님의 제자들은 바로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그 호칭을 주저 없이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라는 단어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역사의 주인,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 온전히 복종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당시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을 숭배하는 예식을 가졌습니다. 로마 황제의 흉상이나 동상을 만들어 놓고 식민지 백성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다음 “시저는 주님이시다”라는 단어를 외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는 시저를 주님이라 부를 수 없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만 무릎을 꿇는다. 따라서 시저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으며 경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교의 아픔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인격이 - 삶의 모든 부분이- 어떠한 힘겨운 역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종속시키고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⑴예수님은 우리 지성의 주님이십니다(고전 14:2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 사악함, 악의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처럼 무지하고 순결하고 미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대가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바른 판단력으로 분별력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주님께 복종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까지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을 주께 온전히 복종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①성경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은 바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배울 수 있고, 그대로 순종하면 우리의 삶에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②창조주 하나님,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은총들을 찾아 감사하고 찬양하면 우리의 생각들은 밝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⑵예수님은 우리 감정의 주님이십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인격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격이란 그의 모든 부분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지성과 사고만의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주님도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으며, 감정적인 피조물로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도 주셨으며, 동시에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감정도 주셨습니다. 차갑고 냉철한 판단력만이 훌륭한 사람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풍부한 감정이 곁들여진 인생이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두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아주 냉철하게 또 논리적으로 그들을 제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은 민망히 여기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풍성한 감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⑶예수님은 우리 의지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두 개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째 동산은 에덴 동산입니다. 거기서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함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둘째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키심으로 죄에 빠진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인 예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역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의지 앞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할 때, 진정한 자유가 임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우리의 인격적인 성숙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들이 됩시다.
제 2 장 직업과 소명
성경에 보면 소명이라는 단어는 아주 넓고 큰 의미를 지니는데, 그 뜻은 "부르심(calling)"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부른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칼레오(kaleo)"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최소한 150번 이상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무언가 되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소명이란 단순히 어떤 직업보다는 우리의 성격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더 많이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훌륭한 그리스도인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교적 소명
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십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 분과 교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그 분께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가지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하라는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⑵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우리가 예수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내 자아의 어둡고 작은 토굴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두려움, 죽음 등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⑶ 하나님은 우리를 교제에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골3:15)” 성경이 말하는 평강-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해는 물론 모든 사람들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모든 사람과 화목케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와도 고립되어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⑷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롬1:7)”, 또는 고린도전서 1:2에서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속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도는 어떤 것이 속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표준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세상의 표준과 가치 기준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찾아봅시다.
(디모데후서 1:9 베드로전서 1:15 데살로니가전서 4:7)
우리는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⑸ 하나님은 우리를 증거에로 부르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또 다른 소명은 그분의 놀라운 행위를 전세계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어두움과 소외와 진노아래 있던 우리들이 빛과 자유와 하나님의 자비아래 놓이게 된 이 놀라운 은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⑹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한 사탄의 영향력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할 때,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물론 이 고난은 나의 실수와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고 한 말씀처럼, 선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며 참으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의 일부분입니다(마5:10-12).
⑺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십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삶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 부름에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확신이 있는 사람, 바로 그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섬김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사역)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사역)이 반드시 기독교 사역(교회 사역/ 목회자와 같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직업)이 우리에게는 사역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바치는 사역입니다.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7)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일, 선포하는 일, 굶주린 자를 먹이는 일,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일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투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저희 사이에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행동으로 섬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섬기는 일에 자신을 투신 하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하게 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대함이란 섬김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상은 성공 또는 권력에 의해 위대함을 측정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대함은 섬기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그 직업을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의 일(직업)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섬김의 핵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합니다. 장차 갖고자 하는 직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섬김의 관점에서 평생의 직업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일(직업)이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결혼과 더불어 생겨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직업)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이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되어 귀찮고 힘든 고역이 될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야망의 견지, 즉 자신의 부, 지위 권력, 안정을 위해 직업을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직업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목적이 돈이든, 지위든, 권력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직업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 적인 사역(일, 직업)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가, 사업가, 의사, 언론인, 농업 및 다른 전문직, 또는 전업 주부 등그 어느 것 하나라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도록 부르시며 또 어떻게 그 분을 섬기기를 의도하시는가?’입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
1. 일은 일하는 자의 성취를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성취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그 분의 지배권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쁜 대신에 게으르다면, 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창조적인 일 대신에 파괴적이라면, 자신의 인간적 성취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잠언 2:24)는 말씀처럼, 실제적으로 위험하고 힘들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일지라도 그것을 좀더 창조적이고 만족스러운 일로 전환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2. 일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땅을 경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가난한 자들, 고아들, 과부들, 이방인들, 그리고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그 땅의 열매를 즐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통해서 공동체(다른 사람들)를 섬기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실 때,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과 협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정복하고 경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꽃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정원사를 두셨고, 질병으로 고통하는 이들을 위해 의사를 준비하십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로 너무 고귀한 존재이지만, 그 아이를 어머니의 무릎에 맡겨서 키우도록 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하나님은 자연을 경작하기 위해 농부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고 있다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일(직업/사역)이란 육체적인 일이건 정신적인 일이건, 일하는 자에게는 성취를,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제 3 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 전도적인 책임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인 책임입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사회적인 책임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아프게 하고 닳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백성들에게 외치는 그 분의 목소리, 그가 행하신 것처럼 잃어버린 외로운 세상에 나아가 그 세상을 섬기라고 부르시는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분처럼 살고 사랑하며 증거하고 섬기며 고난받고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교리들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좀더 나의 교리
1.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시33:13-15).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열방으로부터,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언약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을 때에도 다른 민족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나라를 지배하시며,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칭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시146:7-10).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자이십니다. 또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화내기를 더디하시며, 온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의 종교적인 활동에만 있지 않고, 인간 생활의 전체, 곧 일과 가정과 문화와 국가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곳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책망하시기에 앞서서 잔악 무도한 수리아, 한 민족을 놀=예로 판 블레셋, 평화조약을 파기한 두로,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적대한 에돔, 전쟁에서 잔악한 행위를 한 암몸, 이웃 동족의 뼈를 모독한 모압에 대해서도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압제를 미워하며,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 된 우리들도 그 분의 관심사를 공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며, 사랑하며,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하며, 영적인 경험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 형상을 왜곡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영원한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영적인 존재만이 아닙니다. 또 먹고 입히고 치유하는 데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육체적인 존재만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 내에 있는 영적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적 존재이자 동시에 영적인 존재로 그리고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처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복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들은 학교와 병원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세웠습니다.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마약을 근절시키며, 공장 근로자들과 죄수들의 생활조건을 개선 시켰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차별과 싸우며 의료 환경을 개선시키고 정치, 경제적 압제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빈민들을 돌보며, 환경을 지키며, 가난한 자들, 빼앗긴 자들, 굶주린 자 등, 많은 인간에게 지워진 비인간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노력해야 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을 비인간화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며,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섬기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우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빌립보서 2:5-10에서 예수님 하늘의 안전한 곳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비우시고 섬기기 위해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하찮고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고통과 소외 가운데로 오셨으며, 우리가 받는 유혹들을 몸소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자를 치료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시고, 버림받은 자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엄청난 불의의 희생물이 되셨으며, 손과 발에 못이 박혔을 때에도 원수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 즉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와 동일된 분이십니다. 이제 그 분은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세상을 섬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구원은 우리 개인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사회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변화의 과정에서 구원이 개인적인 의미에서 사회적인 의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칭의(의롭다 하심을 받음)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믿음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선행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 가운데 나타나며, 참된 사랑은 봉사 가운데 나타납니다. 이처럼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낳지 않으면 그것은 엉터리인 것입니다(고전13:1-). 그러므로 구원하는 믿음과 섬기는 사랑은 함께 하며, 그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세상의 모든 단체들은 구성원들의 이익과 특권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윌리엄 템플)’입니다. 교회의 주된 책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있으며 또 세상 가운데서 봉사하고 증거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백성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2-16). 그 비유는 사회가 썩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가 주어야만 하는 영향을 가리킵니다. 빛이 어두움을 밝히듯이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보존적인 기능과 계몽적인 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패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가 부패해 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의 증인이셨으며 동시에 종이 되어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과 증거는 그 어느 것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증거 하라고 부름을 받았으며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나아가서 교회가 섬김과 증거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다른 전문 사역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 봉사와 의료, 돌보는 직업에, 또 어떤 이들은 가사에, 또한 목회 사역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서 섬김과 증거의 사역을 다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긴급한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들이 그를 돌보는 전문적인 지식(의료)이 없기 때문에 지나쳤다고 변명한다면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봉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일을 할 때에 우리는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역 교회는 바로 이렇게 다양한 은사, 다양한 소명, 다양한 사역을 가진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모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의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나, 사회적인 책임, 즉 병자, 가난한 자, 노인을 돌보는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소중한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사람들이므로 서로 격려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Mass)라는 말은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드리는 기도문의 마지막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이제 나가시오’라는 뜻이랍니다. 하나님을 경배 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이제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으로 나가라. 하나님과 닮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나가라. 그리스도께서 고통받으셨고 죽으셨던 세상으로 나가라. 우리들이 구원을 삶 속에서 드러내고 교회가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세상으로 나가라” 교회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는 우리가 예배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곳입니다.
제 4 장 세상과 구별되는 삶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 세상과는 구별되는 도덕적․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고 융합되어 들어갈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의 동질성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한 동질성 가운데서 안전함을 느끼며, 또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이질적인 사람이 있으면 불쾌해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다르게 되도록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에서는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다르게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창세기 12장 첫머리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게 될 땅에 이르러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사람과 구별되게 하기 위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나머지 인류와 구별되어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18:1-5에서 “너희는 내가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에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너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행치 말라” 즉 우리는 독특해야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소금과 빛(마5:13-16)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사회에 끼치기 원하셨던 영향력, 또는 충격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소금과 빛이라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12명의 소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했고 빛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세상의 소금 또는 빛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셨던 것입니다(온전히 헌신된 소수). 소금과 빛의 비유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두움의 밤, 악의 밤, 비극의 밤, 슬픔의 밤, 소외의 밤이 있는 곳이며, 동시에 세상은 썩어 가는 고기와 같은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도인과 세상이 빛과 어두움처럼, 소금과 부패한 고기처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와 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적 세상과 비그리스도인들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을 두는 목적은 집안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소금의 목적의 고기에 뿌려져 부패되는 것을 저지하거나 늦추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잔을 말 아래 감추어 두거나 소금을 창고에 처박아 두기만 한다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상하고 작은 교회라는 창고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적인 사회에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효과는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타락해 가는 것을 방지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빛의 효과는 어두움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빛(복음)을 퍼뜨리는 복음전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두 비유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소금으로 빛으로서 세상에서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들어갈 때는, 자신의 독특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금이 고기에 뿌려질 때,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고 말 것입니다. 빛 또한 그 밝음을 보유하고 밝게 빛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성을 보유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화되지 않고 닮지 않으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들어갈 때, 비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들, 우리의 기독교적 윤리 기준들, 우리의 기독교적 가치 체계를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세상에 의해 타락하는 병든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공동체에 들어갈 때,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빛의 밝음이란 무엇이며 소금의 짠맛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다음의 네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살 수 있는 독특성들입니다.
1. 세상보다 좀더 큰 의(義)
마태복음 5: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시기관들은 당시 최고의 의를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계명들을 암기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완벽하게 거의 모든 것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보다 의로워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란 마음의 의, 사고와 동기의 내적인 의를 말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외적으로는 순결했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의는 내적인 통합성, 내적인 동기와 그에 따라 나타나는 외적인 모습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리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마7: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장 끝 부분에서 6개의 대구, 또는 대조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마음의 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움은 곧 살인이요, 음란한 마음은 곧 간음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의 탐욕적인 생각들이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은 그것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한 분만 보이는 깊고 비밀스러운 영적인 위치를 정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는 좀 더 나은 의로 부르십니다.
2. 세상보다 좀더 넓은 사랑
마태복음 5:43에서 주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같은 유대인이요, 이방인은 미워해도 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동료 유대인뿐만 아니라 원수도 포함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은 인종적, 종교적 배경과는 관계없이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는 보편적입니다(마5:45). 사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5:46). 우리와 관계가 없는 사람,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사람도 사랑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죄인들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 때, 세상은 우리로 인하여 감동을 받아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3. 세상보다 좀더 깊은 경건
마태복음 6:1-18에 보면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행하던 종교적인 의식들보다 더 깊은 경건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그들은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칭찬 받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에 맞추어 기도를 왜곡시킴으로써 기도를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종교적인 몸짓으로 바꾸었습니다.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실제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양 가장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방인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기계적입니다. 공허한 구절들만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기도가 상달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가정하면서 중언부언합니다. 그것은 마음에 담기지 않은 채 입으로만 하는 기도 형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바리새인들과 같이 위선적이지도, 이방인들과 같이 기계적이지도 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나아오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진실한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구제와 금식 등,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던 형식적인 종교의식들을 따라 하지 말고, 좀더 깊은 경건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4. 세상보다 좀더 높은 야망
모든 인간은 야심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일에 성공하고 싶어하거나 생을 걸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거나, 권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시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물질적 안락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하나님의 나라 및 그의 의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언제나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물질적 안락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육체의 요구나, 물질적인 필요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진력할 목표로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필요를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생각을 몰두하여 구하여야 할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과 그이 나라,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 복지보다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의를 우리의 삶을 헌신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야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삶에서 최우선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우리들의 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소금이 짠 맛을 낼 것이며, 우리들의 빛이 비췰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비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제 5 장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통합된 그리스도인이다. 마태복음 28:18-20과 사도행전 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을 향해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역설하신 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선교적 신앙입니다. 선교 없는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여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그 분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선교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1.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모든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하나님의 약속의 우주적 전망을 망각하고 선택의 축복을 편애의 교리로 강등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목적이 포함될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 메시아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종이 모든 민족을 밝힌 빛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2.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한정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또한 사복음서 중 가장 유대적인 마태복음은 많은 사람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올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앉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신 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 (至上命令)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3. 사도행전의 성령은 선교의 영이십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진리의 영이 오셔서 죄의 세계와 구세주의 필요를 깨닫게 하실 것이며, 또 적대적인 세상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후에 그들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며 또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써 그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약속된 권능은 군사력, 로마에게서 해방시킬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계를 너머 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될 영적 권세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도행전에서 복음은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세계의 수도 로마에까지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교적 진보를 추진한 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셨던 것입니다.
4. 서신서의 교회는 선교적 교회입니다.
신약성경의 21개 서신서들은, 개개인에게 쓰여진 것조차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작성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원으로 그려질 때,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밖으로 돌아서서,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공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계를 선교하기 위해 돌아설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역사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5.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완성입니다.
요한계시록 7:9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아주 작은 소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구속받은 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창15장). 하나님은 어느 날 밤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는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모든 민족의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마지막 날에 모임으로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선교적 사명이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세계 선교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중심에 자리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중심에 자리해야 합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증거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것이 세계를 품는 우리의 시각, 곧 세계적 하나님의 세계적 백성에 의한 세계적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역 교회 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지역 사회나 이웃 안에서, 우리의 직업과 삶을 통하여 끊임없는 관심으로 세계 선교를 향한 방법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885년 런던의 구세군 집회에서 “세계의 둘레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군중가운데서 “4만 킬로미터입니다.”라고 대답이 나오자, 부스는 그의 팔을 활짝 펼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팔로 지구를 감싸 안을 수 있을 때까지 자라야 합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을 말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이고, 평일에는 이방인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직장에서는 비 그리스도인인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나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고 가정과 사회 모든 전 분야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1 장 온전한 인격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인격이 하나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이나 행동이 다르지 않은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을 하나로 묶는(인격적인 통합을 이루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lordship)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신다는 신앙의 고백 아래서 우리의 인격의 모든 부분이 하나될 때,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주 내의 영예, 존엄, 지위에서 최상의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십니다(빌2:9-10).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주되심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고전12:3).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롬10:9-10).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할 때, 주(主,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칭하던 용어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그들은 ‘야훼’라는 단어 대신에 ‘주(LORD)’라는 단어를 대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님의 제자들은 바로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그 호칭을 주저 없이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라는 단어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역사의 주인,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 온전히 복종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당시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을 숭배하는 예식을 가졌습니다. 로마 황제의 흉상이나 동상을 만들어 놓고 식민지 백성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다음 “시저는 주님이시다”라는 단어를 외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는 시저를 주님이라 부를 수 없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만 무릎을 꿇는다. 따라서 시저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으며 경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교의 아픔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인격이 - 삶의 모든 부분이- 어떠한 힘겨운 역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종속시키고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⑴예수님은 우리 지성의 주님이십니다(고전 14:2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 사악함, 악의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처럼 무지하고 순결하고 미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대가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바른 판단력으로 분별력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주님께 복종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까지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을 주께 온전히 복종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①성경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은 바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배울 수 있고, 그대로 순종하면 우리의 삶에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②창조주 하나님,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은총들을 찾아 감사하고 찬양하면 우리의 생각들은 밝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⑵예수님은 우리 감정의 주님이십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인격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격이란 그의 모든 부분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지성과 사고만의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주님도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으며, 감정적인 피조물로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도 주셨으며, 동시에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감정도 주셨습니다. 차갑고 냉철한 판단력만이 훌륭한 사람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풍부한 감정이 곁들여진 인생이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두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아주 냉철하게 또 논리적으로 그들을 제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은 민망히 여기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풍성한 감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⑶예수님은 우리 의지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두 개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째 동산은 에덴 동산입니다. 거기서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함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둘째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키심으로 죄에 빠진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인 예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역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의지 앞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할 때, 진정한 자유가 임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우리의 인격적인 성숙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들이 됩시다.
제 2 장 직업과 소명
성경에 보면 소명이라는 단어는 아주 넓고 큰 의미를 지니는데, 그 뜻은 "부르심(calling)"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부른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칼레오(kaleo)"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최소한 150번 이상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무언가 되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소명이란 단순히 어떤 직업보다는 우리의 성격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더 많이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훌륭한 그리스도인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교적 소명
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십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 분과 교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그 분께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가지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하라는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⑵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우리가 예수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내 자아의 어둡고 작은 토굴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두려움, 죽음 등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⑶ 하나님은 우리를 교제에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골3:15)” 성경이 말하는 평강-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해는 물론 모든 사람들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모든 사람과 화목케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와도 고립되어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⑷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롬1:7)”, 또는 고린도전서 1:2에서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속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도는 어떤 것이 속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표준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세상의 표준과 가치 기준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찾아봅시다.
(디모데후서 1:9 베드로전서 1:15 데살로니가전서 4:7)
우리는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⑸ 하나님은 우리를 증거에로 부르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또 다른 소명은 그분의 놀라운 행위를 전세계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어두움과 소외와 진노아래 있던 우리들이 빛과 자유와 하나님의 자비아래 놓이게 된 이 놀라운 은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⑹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한 사탄의 영향력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할 때,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물론 이 고난은 나의 실수와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고 한 말씀처럼, 선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며 참으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의 일부분입니다(마5:10-12).
⑺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십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삶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 부름에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확신이 있는 사람, 바로 그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섬김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사역)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사역)이 반드시 기독교 사역(교회 사역/ 목회자와 같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직업)이 우리에게는 사역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바치는 사역입니다.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7)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일, 선포하는 일, 굶주린 자를 먹이는 일,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일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투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저희 사이에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행동으로 섬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섬기는 일에 자신을 투신 하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하게 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대함이란 섬김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상은 성공 또는 권력에 의해 위대함을 측정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대함은 섬기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그 직업을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의 일(직업)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섬김의 핵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합니다. 장차 갖고자 하는 직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섬김의 관점에서 평생의 직업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일(직업)이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결혼과 더불어 생겨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직업)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이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되어 귀찮고 힘든 고역이 될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야망의 견지, 즉 자신의 부, 지위 권력, 안정을 위해 직업을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직업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목적이 돈이든, 지위든, 권력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직업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 적인 사역(일, 직업)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가, 사업가, 의사, 언론인, 농업 및 다른 전문직, 또는 전업 주부 등그 어느 것 하나라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도록 부르시며 또 어떻게 그 분을 섬기기를 의도하시는가?’입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
1. 일은 일하는 자의 성취를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성취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그 분의 지배권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쁜 대신에 게으르다면, 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창조적인 일 대신에 파괴적이라면, 자신의 인간적 성취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잠언 2:24)는 말씀처럼, 실제적으로 위험하고 힘들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일지라도 그것을 좀더 창조적이고 만족스러운 일로 전환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2. 일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땅을 경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가난한 자들, 고아들, 과부들, 이방인들, 그리고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그 땅의 열매를 즐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통해서 공동체(다른 사람들)를 섬기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실 때,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과 협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정복하고 경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꽃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정원사를 두셨고, 질병으로 고통하는 이들을 위해 의사를 준비하십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로 너무 고귀한 존재이지만, 그 아이를 어머니의 무릎에 맡겨서 키우도록 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하나님은 자연을 경작하기 위해 농부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고 있다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일(직업/사역)이란 육체적인 일이건 정신적인 일이건, 일하는 자에게는 성취를,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제 3 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 전도적인 책임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인 책임입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사회적인 책임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아프게 하고 닳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백성들에게 외치는 그 분의 목소리, 그가 행하신 것처럼 잃어버린 외로운 세상에 나아가 그 세상을 섬기라고 부르시는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분처럼 살고 사랑하며 증거하고 섬기며 고난받고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교리들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좀더 나의 교리
1.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시33:13-15).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열방으로부터,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언약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을 때에도 다른 민족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나라를 지배하시며,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칭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시146:7-10).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자이십니다. 또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화내기를 더디하시며, 온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의 종교적인 활동에만 있지 않고, 인간 생활의 전체, 곧 일과 가정과 문화와 국가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곳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책망하시기에 앞서서 잔악 무도한 수리아, 한 민족을 놀=예로 판 블레셋, 평화조약을 파기한 두로,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적대한 에돔, 전쟁에서 잔악한 행위를 한 암몸, 이웃 동족의 뼈를 모독한 모압에 대해서도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압제를 미워하며,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 된 우리들도 그 분의 관심사를 공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며, 사랑하며,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하며, 영적인 경험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 형상을 왜곡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영원한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영적인 존재만이 아닙니다. 또 먹고 입히고 치유하는 데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육체적인 존재만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 내에 있는 영적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적 존재이자 동시에 영적인 존재로 그리고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처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복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들은 학교와 병원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세웠습니다.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마약을 근절시키며, 공장 근로자들과 죄수들의 생활조건을 개선 시켰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차별과 싸우며 의료 환경을 개선시키고 정치, 경제적 압제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빈민들을 돌보며, 환경을 지키며, 가난한 자들, 빼앗긴 자들, 굶주린 자 등, 많은 인간에게 지워진 비인간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노력해야 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을 비인간화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며,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섬기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우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빌립보서 2:5-10에서 예수님 하늘의 안전한 곳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비우시고 섬기기 위해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하찮고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고통과 소외 가운데로 오셨으며, 우리가 받는 유혹들을 몸소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자를 치료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시고, 버림받은 자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엄청난 불의의 희생물이 되셨으며, 손과 발에 못이 박혔을 때에도 원수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 즉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와 동일된 분이십니다. 이제 그 분은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세상을 섬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구원은 우리 개인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사회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변화의 과정에서 구원이 개인적인 의미에서 사회적인 의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칭의(의롭다 하심을 받음)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믿음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선행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 가운데 나타나며, 참된 사랑은 봉사 가운데 나타납니다. 이처럼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낳지 않으면 그것은 엉터리인 것입니다(고전13:1-). 그러므로 구원하는 믿음과 섬기는 사랑은 함께 하며, 그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세상의 모든 단체들은 구성원들의 이익과 특권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윌리엄 템플)’입니다. 교회의 주된 책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있으며 또 세상 가운데서 봉사하고 증거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백성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2-16). 그 비유는 사회가 썩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가 주어야만 하는 영향을 가리킵니다. 빛이 어두움을 밝히듯이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보존적인 기능과 계몽적인 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패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가 부패해 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의 증인이셨으며 동시에 종이 되어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과 증거는 그 어느 것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증거 하라고 부름을 받았으며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나아가서 교회가 섬김과 증거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다른 전문 사역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 봉사와 의료, 돌보는 직업에, 또 어떤 이들은 가사에, 또한 목회 사역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서 섬김과 증거의 사역을 다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긴급한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들이 그를 돌보는 전문적인 지식(의료)이 없기 때문에 지나쳤다고 변명한다면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봉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일을 할 때에 우리는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역 교회는 바로 이렇게 다양한 은사, 다양한 소명, 다양한 사역을 가진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모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의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나, 사회적인 책임, 즉 병자, 가난한 자, 노인을 돌보는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소중한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사람들이므로 서로 격려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Mass)라는 말은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드리는 기도문의 마지막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이제 나가시오’라는 뜻이랍니다. 하나님을 경배 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이제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으로 나가라. 하나님과 닮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나가라. 그리스도께서 고통받으셨고 죽으셨던 세상으로 나가라. 우리들이 구원을 삶 속에서 드러내고 교회가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세상으로 나가라” 교회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는 우리가 예배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곳입니다.
제 4 장 세상과 구별되는 삶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 세상과는 구별되는 도덕적․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고 융합되어 들어갈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의 동질성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한 동질성 가운데서 안전함을 느끼며, 또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이질적인 사람이 있으면 불쾌해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다르게 되도록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에서는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다르게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창세기 12장 첫머리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게 될 땅에 이르러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사람과 구별되게 하기 위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나머지 인류와 구별되어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18:1-5에서 “너희는 내가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에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너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행치 말라” 즉 우리는 독특해야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소금과 빛(마5:13-16)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사회에 끼치기 원하셨던 영향력, 또는 충격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소금과 빛이라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12명의 소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했고 빛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세상의 소금 또는 빛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셨던 것입니다(온전히 헌신된 소수). 소금과 빛의 비유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두움의 밤, 악의 밤, 비극의 밤, 슬픔의 밤, 소외의 밤이 있는 곳이며, 동시에 세상은 썩어 가는 고기와 같은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도인과 세상이 빛과 어두움처럼, 소금과 부패한 고기처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와 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적 세상과 비그리스도인들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을 두는 목적은 집안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소금의 목적의 고기에 뿌려져 부패되는 것을 저지하거나 늦추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잔을 말 아래 감추어 두거나 소금을 창고에 처박아 두기만 한다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상하고 작은 교회라는 창고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적인 사회에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효과는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타락해 가는 것을 방지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빛의 효과는 어두움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빛(복음)을 퍼뜨리는 복음전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두 비유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소금으로 빛으로서 세상에서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들어갈 때는, 자신의 독특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금이 고기에 뿌려질 때,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고 말 것입니다. 빛 또한 그 밝음을 보유하고 밝게 빛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성을 보유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화되지 않고 닮지 않으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들어갈 때, 비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들, 우리의 기독교적 윤리 기준들, 우리의 기독교적 가치 체계를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세상에 의해 타락하는 병든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공동체에 들어갈 때,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빛의 밝음이란 무엇이며 소금의 짠맛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다음의 네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살 수 있는 독특성들입니다.
1. 세상보다 좀더 큰 의(義)
마태복음 5: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시기관들은 당시 최고의 의를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계명들을 암기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완벽하게 거의 모든 것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보다 의로워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란 마음의 의, 사고와 동기의 내적인 의를 말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외적으로는 순결했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의는 내적인 통합성, 내적인 동기와 그에 따라 나타나는 외적인 모습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리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마7: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장 끝 부분에서 6개의 대구, 또는 대조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마음의 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움은 곧 살인이요, 음란한 마음은 곧 간음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의 탐욕적인 생각들이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은 그것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한 분만 보이는 깊고 비밀스러운 영적인 위치를 정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는 좀 더 나은 의로 부르십니다.
2. 세상보다 좀더 넓은 사랑
마태복음 5:43에서 주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같은 유대인이요, 이방인은 미워해도 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동료 유대인뿐만 아니라 원수도 포함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은 인종적, 종교적 배경과는 관계없이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는 보편적입니다(마5:45). 사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5:46). 우리와 관계가 없는 사람,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사람도 사랑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죄인들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 때, 세상은 우리로 인하여 감동을 받아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3. 세상보다 좀더 깊은 경건
마태복음 6:1-18에 보면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행하던 종교적인 의식들보다 더 깊은 경건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그들은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칭찬 받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에 맞추어 기도를 왜곡시킴으로써 기도를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종교적인 몸짓으로 바꾸었습니다.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실제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양 가장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방인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기계적입니다. 공허한 구절들만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기도가 상달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가정하면서 중언부언합니다. 그것은 마음에 담기지 않은 채 입으로만 하는 기도 형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바리새인들과 같이 위선적이지도, 이방인들과 같이 기계적이지도 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나아오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진실한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구제와 금식 등,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던 형식적인 종교의식들을 따라 하지 말고, 좀더 깊은 경건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4. 세상보다 좀더 높은 야망
모든 인간은 야심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일에 성공하고 싶어하거나 생을 걸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거나, 권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시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물질적 안락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하나님의 나라 및 그의 의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언제나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물질적 안락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육체의 요구나, 물질적인 필요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진력할 목표로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필요를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생각을 몰두하여 구하여야 할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과 그이 나라,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 복지보다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의를 우리의 삶을 헌신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야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삶에서 최우선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우리들의 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소금이 짠 맛을 낼 것이며, 우리들의 빛이 비췰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비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제 5 장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통합된 그리스도인이다. 마태복음 28:18-20과 사도행전 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을 향해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역설하신 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선교적 신앙입니다. 선교 없는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여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그 분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선교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1.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모든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하나님의 약속의 우주적 전망을 망각하고 선택의 축복을 편애의 교리로 강등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목적이 포함될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 메시아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종이 모든 민족을 밝힌 빛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2.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한정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또한 사복음서 중 가장 유대적인 마태복음은 많은 사람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올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앉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신 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 (至上命令)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3. 사도행전의 성령은 선교의 영이십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진리의 영이 오셔서 죄의 세계와 구세주의 필요를 깨닫게 하실 것이며, 또 적대적인 세상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후에 그들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며 또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써 그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약속된 권능은 군사력, 로마에게서 해방시킬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계를 너머 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될 영적 권세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도행전에서 복음은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세계의 수도 로마에까지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교적 진보를 추진한 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셨던 것입니다.
4. 서신서의 교회는 선교적 교회입니다.
신약성경의 21개 서신서들은, 개개인에게 쓰여진 것조차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작성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원으로 그려질 때,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밖으로 돌아서서,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공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계를 선교하기 위해 돌아설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역사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5.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완성입니다.
요한계시록 7:9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아주 작은 소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구속받은 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창15장). 하나님은 어느 날 밤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는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모든 민족의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마지막 날에 모임으로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선교적 사명이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세계 선교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중심에 자리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중심에 자리해야 합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증거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것이 세계를 품는 우리의 시각, 곧 세계적 하나님의 세계적 백성에 의한 세계적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역 교회 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지역 사회나 이웃 안에서, 우리의 직업과 삶을 통하여 끊임없는 관심으로 세계 선교를 향한 방법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885년 런던의 구세군 집회에서 “세계의 둘레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군중가운데서 “4만 킬로미터입니다.”라고 대답이 나오자, 부스는 그의 팔을 활짝 펼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팔로 지구를 감싸 안을 수 있을 때까지 자라야 합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출처 : 주일학교사역자의모임(주.사.모)
글쓴이 : 고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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