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제 목 존 뉴턴의 몇 장의 편지들 - 존 뉴턴
"여기에 실린 몇 장의 편지들은 존 뉴턴이,
잘 알고 지내던 어느 형제에게 보낸 것들입니다."
* 선한 목자 *
도할 때마다 항상 형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형제 안에서 선하신 일을 시작하셨음을 알고 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끝까지 수행하시어 결국은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 속에서 그분의 구속하신 사랑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단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끝까지 소망을 버리지 마십시요.
초조해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십시요.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힘든 수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 속에 얼마나 많은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는 가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당신도 그에 관하여는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더욱더 알아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운 과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 가면 알아 갈 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분의 구속을 값진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저는 당신이 매일의 삶에서 체험을 통하여 얻은 당신 자신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이 당신을 더더욱 겸손하게 만들 것이라 믿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낙담하지는 마십시요. 단지 겸허함만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때때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같이 초라하고 부족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곤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으로 인하여 낙담하지 마십시요. 우리의 의사는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너무 어려워서 못고치는 병이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나아 오는 사람을 저버리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우리의 죄가 많으나, 그분의 자비는 그것보다 더 풍성하시며, 우리의 죄악이 너무도 아무리 할지라도 그분의 의는 그것보다 더 크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극히 연약하나, 그분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불평이란 모두 불신과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한 것들은 하루 아침에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다리십시요. 그분은 우리 대제사장의 은혜와 능력을 하루하루 새롭게 알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을 알면 알 수록 당신은 더더욱 그분을 신뢰하게 될 것이고, 또 그분을 신뢰하면 신뢰할 수록 그분을 더욱더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그분을 더더욱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속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자신에게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하십시요.)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분께 의지하십시요. 그러면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성장하는 것은 버섯이 자라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성장은 마치 참나무가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참나무는 그 성장 속도가 느리지만 참으로 견실하게 자라납니다. 수많은 날들 동안 햇볕을 쬐고 비를 맞으며 무서리를 수없이 뒤집어쓰는 사이, 참나무는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너무도 견실하게 자라납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나무는 죽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자양을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겸손해 지십시요. 항상 신중하고 성실하며, 진실을 꿰뚫어 보기 위해 노력하고, 무엇보다 당신의 눈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십시요.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선한 목자께서 당신을 돌보시고 계시니,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을 온전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767년 3월 18일, 존 뉴턴
** 시험 중에 힘을 주시는 주님 **
편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항상 형제님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종종 형제의 얼굴을 떠올리고, 기도할 때면 형제의 이름을 거의 빠트리지 않고 언급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쪼록 여행하는 동안 형제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형제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길, 지식을 늘리고 믿음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고, 그리하여 당신의 현재 상황에 만족을 느끼게 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형제는 지금, 런던이라는 곳이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몇 가지 좋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반적인 것을 놓고 봤을 적에는 조용한 시골에서 한 목회자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교유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실 여러 설교자들로부터 다양한 설교를 들어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다른 설교자보다 더 괜찮은 설교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어느 설교자도 듣는 이의 마음 저 깊숙한 데까지 말씀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의 이번 런던 초행 길에 주님이 형제에게 가르치는 바일 것입니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 동안 주님은 저에게 약간의 병고를 허락하셨습니다. 날씨도 더운 데다가 오랫 동안 말을 타서 그랬던 모양인지, 화요일까지 몸이 좀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수요일부터는 오한이 들더니 그 후로는 또 온 몸에 열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집에서 6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에게 평안을 주셨기에, 저는 그분이 저를 집으로 무사히 대려다 주실 것이란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망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오는 길 내내 몸에 열이 났지만, 그럼에도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병고를 주시면서, 동시에 놀라운 힘도 부여하셔서 주일에는 설교를 두 번이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 완전히 회복된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쭉 지금까지 아픈 데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지금 그분의 선하심을 이야기하려 하고, 또 주님이 내리신 질고를 기꺼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그분이 그 어려운 와중에도 주님께서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옥스포드에서 계속 병고에 시달린 것은 주님의 뜻이었던 듯합니다. 설사 주님이 거기서 저를 죽게 하셨다 할지라도 저는 그 뜻을 이의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비록 마음이 몹시 기뻤다거나 정서적으로 지극히 평온한 상태였던 것은 아니었지만(종종 그런 시간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고통이나 두려움, 혹은 염려와는 동떨어져 있던 나날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주님의 뜻에 따라 점점 빚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분은 진실로 우리에게 힘을 북돋우어 주시기로 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매번 시험의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든든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새로운 증거를 얻게 하시는 것 같아 무척 기쁩니다.
여러 가지 용무에 바쁘시겠지만, 시간을 내서 그분의 선한 말씀을 읽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를 바라십시요. 항상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그분께는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또한 열심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요. 그러나 율법적인 사고 방식은 경계하십시요. 그런 사고는 늘 주님을 엄격하기만 한 주인으로, 그저 약점을 이용하기 위해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분으로 생각하게끔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그분은 연민이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먼지에 불과한 존재임을 늘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질고에 시달릴 때면, 우리에게 낙담치 말라고 힘을 북돋워 주시며, 우리를 가엾게 여겨 자비를 베푸시고 최상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한 변호인이 우리 편에 서 계심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분의 이름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또 그 이름들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숙고해 보십시요. 그분은 자신을 구주이고 목자이며 친구이자 또 남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자신을 사랑과 보혈로, 의로우심과 신실한 약속으로, 또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드러내지 않으셨습니까?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그러므로 모든 의심과 불신을 저 멀리 던져 버리십시요. 의심과 불심은 마음을 낙심시킬 뿐 아니라 손에 힘을 쑥 빼 놓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깊은 사랑으로 당신을 자신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틀림없이 완수하시는 분이시며, 당신과 그분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영적 전투에 임한 당신에게 큰 힘이 될 것이고, 또한 사탄의 불붙은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되기도 합니다. 그 확신은 더불어 적들이 도저히 부술 수 없는 든든한 투구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면, 그저 눈에 보이고 마음에 당장 느껴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신뢰하려 들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물처럼 녹아 내릴 것이고 결국은 싸움에서 허망하게 패하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강건해 지십시요.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저도 형제를 잊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요.
1769년 5월 3일
존 뉴턴
*** 정말 필요한 한 가지 ***
런던에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튼, 형제가 제 편지들을 반갑게 맞이 해 주시는 것만큼이나 저도 형제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기껍습니다. 증거를 대라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상황 자체가 바로 그것인데, 저는 지금 형제에게 편지를 쓰면서 동시에 C 부인과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녀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 이때 말고는 없습니다. 그녀는 슬픈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말을 하는 도중에 종종 눈에서 눈물을 찍어내곤 합니다.그녀는 이곳 런던에서 여러 가지 유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차라리 형제처럼 시골에서 살았으며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형제도 이곳을 여행하면서 깨달았겠지만, 장소나 외적인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고자 하시는 한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매순간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순간 그분의 요원한 손길에 애가 탈 것이고, 우리 자신을 건사하기가 너무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꼭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는 겸손하고 순종적인 영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평안을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안전합니다. 그분은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고,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는 자들을 눈동자처럼 지키고 인도해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평하는 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과 싸우고 또한 그것을 주제로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주님께서 형제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을 상기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요. 죄에 관하여는 인간이 겸손해 지는 것이 좋으나, 그렇다고 낙담해서는 또 안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한 자들이기는 하나 우리의 주님은 완전한 구주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는 수천 가지 일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혼에 빛을 비추어 주시길, 또 믿음 안에서 형제의 마음을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워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형제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할 때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요.
3월 14일
존 뉴턴
**** 그리스도를 신뢰함 ****
편지를 보내드리겠다는 약속을 늘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펜을 들게 된 즈음에, 주님께서 저에게 그분의 말씀을 부어 주신 일이 생겨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어제 설교단 앞에 올라설 때의 제 마음은 몹시 냉랭하고 열의가 없었습니다. 본문을 준비해 뒀다고 행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강단에 올라가 보니 갑자기 그 본문으로 설교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로 설교를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머릿속에 텅 비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본문을 골라야 했습니다.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을 낚아채서 그날의 본문으로 삼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구절은 디모데후서 1장 12절이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을 가지고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의지할 것은 주님의 자비와 신실하심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경에서 제가 바랄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자비 외에 그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가 형제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그 설교단에서보다 더 풍성한 주님의 은총을 얻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형제에게 하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에 가장 민감해져 있을 때, 그분의 선하심을 기대하고 그분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진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보다 더 안전한 때는 사실 없습니다. 또 바로 그러한 때에 주님은 실로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바울이 배운 교훈입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을 했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광이 되지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인간들의 마음에는 탐탁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인간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고, 또한 인간들에게 자랑할 것이 없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이 구원은 사람들의 불신과 율법적인 생각 때문에 종종 방해를 받습니다. 우리 자신이 참으로 연약하고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 우리는 주님께서 그 연약함과 무가치함 때문에 우리를 저버리시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난한 영은 바로 그가 주님의 약속과 돌보심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
저는 늘 평안함과 복음의 소망 속에서 형제를 세워 주는 주님의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형제에게 거듭거듭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에 관하여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늘 주님께 지혜의 눈을 고정시키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더더욱 새롭게 알아 가십시요. 그분은 참된 주님이십니다. 그분께는 능력과 권위가 있으시며 우리를 향한 동정이 가득하십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으며, 우리 속에 선한 기대와 소망들을 일으키시고 또한 그것들은 신실하게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십시요. 항상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서, 안팎에서 말려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소들에 대항하십시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그는 모든 어려움들을 보아 넘길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경우에도 항상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한번 약속하신 일이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누이를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녀가 병고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는 큰 슬픔 중의 하나입니다. 제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면, 당장에 그녀의 병을 치유해 주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병을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고 나면 그녀의 병을 즉시 거두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속히 그렇게 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그녀를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주님께 병고로 징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매와 형제 자신을, 그리고 모든 가족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십시요. 주님께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다스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숙고해 본다면 우리에게는 불평할 꺼리가 없다는 고백을 절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주권이 자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보내신 모든 것은 분명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로막는 것 중에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졌었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형제가 주님께 간구하기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그 인내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주님께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에 평안은 없습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하십시요. 그분의 돌보심과 능력을 의지하십시요. 그분은 우리 혼의 가장 심각한 병, 즉 죄를 치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그분의 처방을 따르십시요. 인간적인 모든 생각들을 버리십시요.
어디로 가야 할 지 당장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인도자가 이시라는 사실에 만족하십시요. 당신의 영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할 지라도 주님은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쳐 쓰러져 있는 형제를 길가에 버려 두고 떠나가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때가 되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고, 형제는 주님이 형제를 잊지 않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늘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가십시요.
1775년 8월 19일 런던에서,
존 뉴턴
제 목 갈보리 - J. C. 라일
갈보리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장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입니다. 사실 갈보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이 설교의 제목을 "갈보리"라고 정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분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일에 관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주제에 비교적 무지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난의 기록 속에서 아무런 영광도, 아름다움도 발견해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그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던 일이었다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냥 듣기 껄거러운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께서 배신당해하시어 악한 자들의 손에 넘겨지신 것부터 시작해서, 부당한 재판에 의해 죄인으로 몰리시고, 사람들에게 침뱉음과 채찍질 그리고 구타를 당하시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이 저항도 불평도 않으시면서 그들의 손에 끌려 언덕을 올라가시고, 결국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시며 두 강도와 함께 갈보리에 세워지신 것, 그리고 그분의 옆구리가 창에 뚫리고 무지한 인간들의 조롱을 당하시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벌거벗겨진 채로 피를 흘리신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두구두고 상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서에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 아닙니다. 사복음서에 어떤 한 사건이 네번 모두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거기다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반복되는 경우는 이 십자가 사건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그 정도로 중요한 사건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겪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모두 사전에 예전되어 있던 일들이었음을 깜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계획되어 있던 일입니다.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하셨고 또 미리 내다보시고 계시던 일이었습니다. 십가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아래 그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예수께서 느끼셨던 모든 고통과 그분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 한 방울 한방울은 모두 이미 오래전에 계획해 두신 일인 것입니다. 그분은 무한하신 지혜로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속시키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미리하심을 통하여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받으신 고난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셔야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내려진 채찍질은 우리를 치유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상환책은 그분의 고난밖에 없었습니다. 이 갈보리의 사건은 우리의 영원을 위한 희생제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지도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지도 않으셨다면, 또 그분의 의로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그 틈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그리스도의 고난들은, 그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에게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분은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자신의 삶을 경영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갈보리에 올라가셔서 자신이 계획하신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 한 마디로 천사들의 군대를 불러올 수도 있었고, 빌라도와 헤롯의 작당을 와해시키실 수도 있었으며, 그분의 모든 원수들을 돌풍에 흩날리는 지푸라기처럼 순식간에 흩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엔 오로지 죄인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를 흘려서 죄인들과 깨끗치 못한 자들을 위한 생명샘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모든 일들은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주제가 조금이라도 언짢거나 마음에 담기 껄끄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는 그 속에서 지혜와 능력, 평안과 희망,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 또 위안과 위로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에 눈을 고정시키면 시킬 수록, 그 모든 것들은 점점 더 확연하게 인식되어옵니다. 제 사고의 뜨락에 십자가를 오래 세워 두고 있으면 있을 수록, 저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폭과 깊이를 확인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랑을 가늠해야 할까요? 감사할 줄 모르는 악인들의 머리 위에도 매일 같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저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느낍니까? 아니면, 해마다 뿌린 만큼의 풍성한 열애를 맺게 하시는 것을 보고서 그 자비를 느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분의 가장 강력한 사랑의 증거는 그러한 것들을 훨씬 능가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자비나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많은 인간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자신의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고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무도 높이 계시고 또 그만큼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이 가련하고 추악한 피조물들에겐 영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공상에 잠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에서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저는 제 속의 그 헛된 망상을 말끔히 걷어내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죄라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추악한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무슨 이야기를 가져와서 설명을 해야 할까요? 대홍수가 나와 있는 장면을 펴서 죄가 어떻게 온 세상을 물 속에 잠기게 했던가를 보여드릴까요? 아니면, 사해 바다로 가서 어떤 죄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멸망을 가져왔는지 살펴보아야 할까요? 혹은 유대인들을 온 지면에 흩어지게한 그 죄를 확인해 볼까요? 아닙니다. 죄의 진면목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곳은 바로 갈보리입니다. 그곳에 드러난 죄의 모습이란, 그것이 너무도 가증스럽고 추악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아니면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갈보리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놓여진, 하늘의 천사들도 좁힐 수 없는 큰 간극을 만든 죄의 진면목을 목도합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와 그분을 화해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끔씩 거만해져서 자신의 죄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갈보리를 볼 때면, 그 죄의 진면목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완성하신 구원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 가야 가장 확연하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편적인 자비를 선언해 놓은 구절을 찾아가야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일반적 진리를 찾아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갈보리의 십자가 아래로 갑니다. 십자가보다 더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나무 위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볼때 느끼게 되는 마음과 양심의 고통을 진정시킬 수 있는 향유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우리의 막대한 빚을 갚으신 것입니다. 바로 나와 당신을 대신하여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당신을 대신하여 율법 아래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요구는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단 한푼의 잔금도 없도 모든 빚을 갚으신 것입니다. 이제 저에게 빚을 독촉한 존재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제 자신이 구원을 받기에는 너무 사악한 것이 아닌가, 용서를 받기에는 너무 추악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면 이 바보 같은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갈보리를 볼 때마다 죄인 중의 죄인이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확인하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계명에 귀를 귀를 기울이면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요?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온총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를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까? 혹은 하늘나라와 지옥의 형벌을 바교하며 묵상을 해 보아야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 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말고 그분을 위하야 살라는 사랑의 권고를 듣습니다. 저는 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고귀한 값으로 팔린 존재입니다. 제 몸과 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엄숙한 의무에 묶여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저는 갈보리에서 발견합니다. 저의 몸과 영은 저의 것이 아닌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깨끗하게 정화 시키셨고, 나를 선한 일에 진력하는 독특한 백성들 속에 끼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지고 나무 위에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죄에는 죽었고 의에는 살아난 것입니다. 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강력한 성화의 동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같고, 또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인 것입니다. 혹자가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흔쾌히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의 제자들보다, 자신이 거룩해져야 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근심과 걱정에 시달릴 때, 어디로 가서 마음의 평안과 만족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아야 그 마음의 형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공부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나 그분의 섭리, 혹은 그분의 사랑에 관하여 공부해야 할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거기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놓아 저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분이라면 제게 진정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작은 일들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나를 집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 분이 제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평안이 부족하면 갈보리로 가십시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 아래까지 걸어가 보십시요.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또 어디에서 얻어야 할까요? 만일 저에게 그런 의심이 닥쳐온다면, 저는 어디로 가서 그 의심을 물리칠 증거들을 찾아와야 할까요? 제가 입은 은총들과 은사들을 주시해야 할까요? 아니면, 제 자신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저의 인내와 열심, 혹은 무수한 기도를 생각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불러와야 할까요? 또는 제 마음에다 대고, "괜찮아, 그런 마음이 있어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늘 침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대강 얼버무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갈보리로 가서 십자가를 바라볼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의지하는 유일한 기둥입니다. 저는 저의 혼을 구속하기 위해 그 혹독한 고난을 감수하신 분께서, 자신에게로 돌이킨 저를 멸망에 던져버리시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그럴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것들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들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값비싼 댓가를 치루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제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한 번 자신을 믿은 사람은 영원히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만일 마귀가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널 영원히 소유하시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하는 말을 속삭이거든, 즉시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요. 십자가를 보고서도 절망을 느낄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조금 아시겠습니까? 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깊은 속뜻을 말입니다. 혹시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도 냉담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수천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고서도 아무른 마음이 없다는 사실보다 인간의 심성이 타락했음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듣고서도 여전히 냉담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마음을 두고 굳어졌다고 하는 것이고, 마음의 눈이 감기고 양심은 병들었으며,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그분께서 그러한 고난을 받으신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러분, 만일 지금껏 갈보리와 그분의 십자가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 오늘의 설교를 통하여 무언가를 깨달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 목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 로버트 맥체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로버트 맥체인'이 던디에서 1836년에 했던 설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있는 인간들에게 위대한 자비를 베푸실 때면, 그분은 말씀을 통하여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더욱더 확연하게 드러내시곤 하셨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구절도 바로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을 때보다 더 자신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온유함이 넘쳐흘렀던 적은 일찌기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떠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주님을 배신할 것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며, 그들 모두는 바로 그 날 밤에 주님 때문에 실족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화가 나셔서 떠나가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임할 고난이 무엇 때문이건 간에, 그 때 주님의 가슴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서 그 사랑이 입 밖으로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어라』(요 14:1).
주님은 그토록 온유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적이, 아마 이 땅에서는 그제껏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라는 제자는 이 천상의 분위기를 깨는 차갑고도 몽매한 질문을 던집니다.
『도마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요 14:5).
그럼에도 주님은 이전의 온유함을 잃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음성으로 제자들에게 구원의 기초를 가르치십니다. 그저 도마의 질문에 대답을 하신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도마가 생각하거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넘어서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는 단순히 장소와 길에 관하여 물었지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이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거의 완벽한 설명입니다. 자, 이 구절을 부분부분으로 나누어 세세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Ⅰ. 그리스도는 길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로 가득차 있으나,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죄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마치 민감한 식물처럼, 그분은 인간들로부터, 그들의 죄의 손길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계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죄인들과 분리되어 계신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너무나 순수하여 죄악을 바라볼 수조차 없습니다.
(1) 이것은 아담과 족장 시대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아담이 거룩했을 때까지는, 하나님은 그와 함께 거하시고 동행하시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했을 때 그분이 어떻게 하셨나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타는 칼을 놓아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이 그룹들 사이의 불칼은 하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의로우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앞에서 만난 하나님은 바로 이 소멸하는 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다니시는 불타는 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죄를 미워하십니다. 이 칼을 주목해 보십시요. 이 불타는 칼은 생명 나무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두루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칼이 두루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어떤 외진 곳으로 나 있는 길을 미처 막지 못했더라면, 아담은 그 길을 통하여 몰래 생명 나무로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어떤 방법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즉 외진 길이나 또는 험하고 어려운 길을 택하여 아무리 몰래 들어가려 할 지라도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은, 이 불칼이 유성처럼 날아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을 가로막은 불타는 칼에서는 이런 음성이 들려 왔을 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우리요?』(욥 9: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롬 3:20).
그 말을 들은 아담은 아마, 생명을 찾아 나서면서 기울였을 자신의 그 헛된 노력에 지쳐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혼자서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시편 16편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내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리니』(시 16:11).
어느 누구도 이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낙원으로 들어가고자 애쓰는 아담의 자손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아버지의 품을 떠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하셨습니까? 불칼이 미처 오지 못하는 곳에 길을 마련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불칼은 어디로든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자신의 권위로 불칼을 명하여 뒤로 물러나게 하셨습니까? 역시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법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에 오명을 씌우는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대신하셨습니다. 즉, 죄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지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앞으로 나아가 불타는 칼을 마주하여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칼날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 때 그분은 마음 속에서 옛 선지자의 말을 떠올리고 계셨을 지도 모릅니다.
『오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대적하고 내 동료된 자를 대적하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스카랴 13:7).
그 불타는 칼은 주님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습니다. 이제 당신이 누구이건 간에 또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분께로 나아오십시요. 그분의 피흘리신 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갈 길이 생겼습니다. 어서 오십시요. 의심치 말고 오십시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2)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없다는 이 사실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운 가장 중요한 진리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거하시기 위하여 오셨을 때, 그분은 가장 거룩한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부분에 임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그룹들 사이에 주님이 계신다는 증거는 확실했습니다. 성전 안에는 때로 접근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빛이 나타났고, 또 때로는 구름으로 가득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내밀한 그곳은 장막으로 바깥과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장막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 받은 사람은 대제사장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일년에 한 번,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에 때때로 나타났던 그 자욱한 구름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가장 거룩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 가득찬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분으로부터 쫓겨나 그분의 면전으로 다시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몹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모든 기쁨의 근원이심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셨습니까? 장막을 걷고서 우리가 몰래, 또 손쉽게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공의를 만족시키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요 19:30).
『그런데,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마 27:51).
다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장막은 아래서부터 제일 위까지 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우리를 가로막던 그 무시무시한 장막이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이제는 찢어진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빛 속에서, 그분의 장막 안에서 거하면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분을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길이 당신이 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14:6).
당신이 지금도 당신만의 길을 고수하고 있다면(그것이 눈물이든, 고행이든, 아니면 어떤 선한 맹세이든, 혹은 하나님께서 그리 엄하시지 않으실 거란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있든 간에), 심판의 날이 오면 당신은 그룹 사이를 돌아다니던 그 불칼이 당신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당신 앞에 남은 것은 오직 불못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는 아무런 평안도 찾을 수 없어 하는 혼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자신의 혼이 잃어버린 바 되었음을 깨달은 이가 바로 당신이라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 보십시요.
『나는 길이요』
다른 곳에서 그분은 또 이렇게 말씁하셨습니다.
『나는 그 문이라』(요10:9).
이것은 값없이 주어진 활짝 열린 문이며, 죄인들을 위한 길입니다. 왜 주저하십니까? 한때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장막을 찢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때 우리에게 분노하셨으나, 주님이 만드신 길 위에는 그 분노가 없습니다.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기쁨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성경과 인간들의 역사에서 드러난 진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은, 인간이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심치 않은 자들도 많은 진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학적, 혹은 과학적 진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진실들도 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회심치 않은 사람들을 두고 진리를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참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방주의 열쇠와도 같은 분입니다. 만일 열쇠가 없다면 방주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 더미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열쇠라고 생겨 먹은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열쇠들은 타락했고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으며 질서도 목적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진리의 방주는 그저 혼잡스러운 쓰레기 더미로 남을 것입니다. 진리들은 여전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타락하게 되고 일관성을 상실해 버릴 것이며, 질서도 목적도 없이 혼란스럽기만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체계에서 태양과 같은 분이십니다. 만일 태양계에 태양이 없어진다면, 모든 행성은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많은 행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없다면 그것들은 적절한 힘의 안배 없이 서로 밀고 당기기만 하다가 극도의 혼란 속에서 다른 행성의 궤도를 향해 돌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진리는 뒤죽박죽이 되어 버립니다. 소소한 진리들이 마음 속에 그득하다 할지라도, 이들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악인의 길은 암흑과도 같아서 사람이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잠 4:1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회심치 않은 혼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성령께서 그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당신 앞에 진리의 방주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혹은 당신의 태양계에 태양을 다시 가지고 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진리가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게 만드십시요.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우리를 대신하여 진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종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하는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는 것입니다.
더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제 당신에게 내려질 저주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당신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혈로나 육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분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랬더라면 당신은 이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 속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숨겨져 있음을.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모든 지식의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다면, 당신은 진정 알아야 할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지식이란 기둥 없는 다리와 같고, 태양이 없는 태양계와도 같습니다. 당신이 만약 지옥에 가게 된다면, 이 세상의 과학적 지식이며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식견, 혹은 하루 하루의 일상 속에서 얻은 지혜들이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당신을 짓누르는 뼈아픈 추억이 될뿐입니다. 당신은 후회할 것입니다. 신문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었을 것을!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이해했지만, 아, 무엇보다 내가 구주를 알았어야 했던 것을,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을 알았어야 했던 것을!, 하고 말입니다.
Ⅲ.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인간은 또한 이 세상에 속하여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이 일어나서 걸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과 역사 모두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와 죄악으로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시체처럼 전적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인간들은 세상의 풍조와 공중 권세의 통치자의 영향을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선지자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에서 가장 명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 뼈로 가득찬 골짜기 가운데로 가게 됩니다. 그는 그 골짜기의 사면을 지나면서 그 안에 심히 많은 뼈들이 있는데, 그 뼈들 모두 바짝 말라 있는 상태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직시하게 되는 영적인 풍경입니다. 뼈들은 심히 많고 모두 바짝 말라 있습니다. 그 풍경을 본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던진 질문과 똑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게 됩니다.
"이 뼈들이 살 수 있을까요?"
네, 물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기적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진실로,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두드리시면, 그는 곧 진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마른 뼈들을 향해 말씀을 전합니다.(이것이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그들 속으로 호흡이 들어갑니다.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이여, 당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요. 당신은 이 세상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늘 물살을 타고 세상이 가는 데로 흘러갔을 뿐, 단 한번도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진중하게 들여다 보십시요. 당신의 마음은 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섰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해 보았다면, 당신의 눈을 부정한 욕망들의 도구가 되는 것으로부터 지키고, 당신의 입술에서 빈정거림과 헛된 말들을 멀리하며, 당신의 마음을 사악함과 시기, 그리고 탐욕으로부터 수호하려 해 보았다면, 당신이 진정으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보았다면(저는 대부분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노력을 한번쯤은 해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죽은 사람을 일어나 걸어가게 해 보십시요. 당신은 지금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곡히 권고하노니, 거듭나십시요! 당신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야만 합니다.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죽은 몸이 살아 있는 몸과 온전히 합하여져서 핏줄을 통하여 피를 공급받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요. 뼈와 뼈가 합하여지고, 핏줄이 핏줄에 가 닿고, 신경이 신경과 연결됩니다. 죽어 있던 사지가 어느새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변모합니다. 전에는 차갑고 딱딱하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몸이, 지금은 온기가 돌고 유연해 지며,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충만해 집니다. 생명과 합하여져서 살아 있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살아 있는 나무에 온전히 접붙여져서 원나무의 수액을 활수하게 받아 마시면서 죽어 있던 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전에는 바짝 마르고 오그라들어서 열매도 맺을 수 없던 것이, 수액과 생명력을 공급받아 살아 있는 가지가 됩니다. 자,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에게 연합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입니다. 당신의 혼이 죽어 있는 자가 아닙니까? 차갑고 딱딱하며, 조금도 움직일 수 없고 그저 하릴없이 부패해 가고 있는 시체와 같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 밀착하십시요. 믿음으로 그분께 합하여 지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그분과 한 영이 될 것이며, 차갑던 사지에는 온기가 돌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원기와 활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혹시 당신의 혼은 메마른 나뭇가지가 아닙니까? 바싹 말라서 열매도 맺지 못하며 잎사귀도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뭇가지가 아닙니까? 그리스도께 밀착하십시요. 그분께 참여하는 자가 되십시요. 그리하면 당신은 그분과 한 영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고, 당신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것이며, 당신은 또,『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하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 2:20). 믿지 않는 자들이여, 명심하십시요. 당신이 거룩하여 지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형제들이여, 지금 만약 거룩함의 길에서 헤이 해져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을 빼고 느슨히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십시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역시 그렇게 되리라』(요 15:4).
제 목 지금은 바로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로다 - 로버트 맥체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때를 아노니, 지금은 바로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로다. 이는 지금이 우리가 처음 믿은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음이라](롬 13:11).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믿는자들이 깨어나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 하는 바도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마치 열명의 처녀 처럼, 그들은 졸고 있거나 잠들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 몹시 두렵습니다. 믿는자들이여, 이제 깨어나야할 시간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이제 태양이 떠오를 시간이 닥쳐오고 있음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현재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지금 오신다면 주님은 죄악 속에 푹 빠져 있는 그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귀함을 실감하는 마음을, 그 생생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들은 처음 구주를 붙들 때의 그 생생한 기억을 잊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뼈저리게 느꼈던 그 죄에 대한 뉘우침은 이제 마음에서 가물가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자꾸만 더 바라보고 싶어지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것들은 쉽게 물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들은 싫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거룩한 것들은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더더욱 흥미로워집니다. 이와 같이 당신이 예수님을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그분은 더더욱 고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얼마 안가 그 향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샤론의 장미는 날이 가도, 아니 날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풍깁니다. 사과는 그 맛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과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건포도 과자로 나에게 힘을 돋우고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나이다』(솔로몬의 노래 2:5).
잠자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은 달콤한 사과의 맛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더이상 잠들어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믿는 자들이여, 당신이 잠들어 있는 상태라면, 도대체 내가 그리스도께 나아간 적이 있기라고 했던가 하는 의심마저 하기도 할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십시요. 그리고 실제하는 거룩한 것들을 두 눈으로 응시하십시요. 반쯤만 잠들어 있다해도, 그것들을 온전히 인식할 순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거룩한 실체들의 영향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죄를 있는 그대로, 당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또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바라보십시요. 그것이 방법입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실로 십자가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화도 느끼지 못하고, 죄의 뉘우침도 없으며, 그리스도께 나아갈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실로 이것보다 더 서글픈 상태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두 눈을 활짝 뜨십시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흐르는 강과 같고 우리 각자는 그 위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와 같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영원의 해안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아는 어느 그리스도인은 지금까지 40년 동안 예수님을 믿어왔습니다. 여러분, 그의 구원은 그가 처음 믿었던 때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습니다(로마서 8:23,24-역자). 당신의 구속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의 몸은 구속을 받을 것이며,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에는 면류관이 씌워질 것이며, 우리는 위대한 군주보다 더 고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어둡고 깜깜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너울은 걷히고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하나님의 옛 백성들인 유대인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날이 밝아올 징조입니다.
회심치 않은 죄인들이여,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죄인들이여!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누운 채로 서서히 더 깊은 숙면 상태로, 죽음의 깊은 잠속으로 잠들어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 잠자는 영혼들이여, 이제 깨어나야 합니다. 온땅을 두루 다녀본 천사들이 주님게 뭐라고 고했는지 아십니까?『보소서, 온 땅이 조용하며 평안하더이다』(슼 1:11)라고 했습니다. 슬프게도 여러분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잠자는 영을 부으신 것입니다. 아모스의 전언을 기억하십니까? 『시온에 평안히 있는 자들 ...에게 화로다』(암 6:1).라고 했습니다.이것은 여러분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금 이곳에는, 주님께서 잠자는 혼들이라고 부르신 그 혼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 중 많은 이들을 보시고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 잠자는 혼들이여, 이제 깨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은 지금 꿈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은 종장에 가서는 결국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영화를 쫓아 산 당신의 삶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꿈에도 행복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나십시요! 시한부 인생리라는 숙명이 짐지워진 사람이 가족에 대한 꿈, 아내에 아이들, 그리고 자유와 즐거움의 꿈을 아무리 꾸어본들 얼마 안가 죽음의 벨이 울리면 그는 금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꿈에 불과했음을.
그러므로, 회심치 않은 자들이여, 여러분은 지금 잠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당신은 계속 잠만 자다가 유쾌한 꿈에서 쓰라린 현실로 깨어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여러분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사역자는 야간 순찰자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야간 순찰자들은 불이 난 곳이 있으면 당장 경보를 울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이들이 불이 난 집에 앉아 있습니다. 때로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을 염려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당신은 또, "왜 그렇게 냉혹한 말을 하시오?"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혼이여! 당신의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단호하게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당신의 양심의 문을 아무리 세게 두드린들 진리를 아는 이라면 그 누가 그걸 소란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죽음을 앞둔 침상에 누워 있던 한 여인이 존 뉴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주었죠. 하지만 내가 처한 위험을 충분할 만큼 납득시켜 주진 않았던 것 같네요." 여러분들 중에도 저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이 많이 나올까 저는 내심 두렵습니다. 죽음의 침상이나 지옥에서 많은 이들이 저에게 저런 책망을 던지지나 않을까, 저는 내심 두렵습니다. 왜 내게 지옥에 관해 더 자주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책망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여 주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입을 열어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전달하게 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죄인들이여, 이제 깨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은 잠들어 있을지 모르나 여러분들을 향한 저주는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경고를 보내기 시작한 것도 벌써 삼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나날들이 그저 하루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처음 그 날부터 여러분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예수님게 돌아오기를 간청해왔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루하루 최후의 심판석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요.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잠들어 있고, 시간의 물결은 여러분을 죽음과 심판, 그리고 영원의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깨어나야 할 또다른 이유 하나는 여러분들을 향한 저주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땐 여러분의 죄악이 지금처럼 지대하진 않았습니다.『...네가 그분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냐? 다만 너의 완고함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계시될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을 뿐이로다.』(롬 2:4-5). 당신은 지금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은행에 돈을 저축하듯이 당신은 지금 진노를 쌓고 있는 중입니다. 다가올 영원을 향한 진노를 차곡차곡 쌍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오늘 밤은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잠자는 자들이여, 지금은 깨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왜 깨어나려 하지 않습니까? 제가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끝내는 이것이 진실임을, 자신이 진노의 날을 향하여 진노를 쌓아 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모든 죄에는 진노가 쏟아집니다. 마치 강물이 둑에 막혀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다가 결국은 둑을 터뜨리면서 앞으로 쏟아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두쇠처럼 진노를 모으고 있습니다. 영원한 진노가 쏟아지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십시요. 지금은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깨어나십시요. 그러면 그 모든 진노는 멀리 치워질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기만 한다면 진노는 즉시 사라집니다. 죄인들이여, 깨어나십시요!
여러분들은 지금껏 깨어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은 그냥 나쳐왔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것이니, 이 기회마저 놓치지 마십시요. 방주가 지금 당신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방주를 잡아서 올라타기만 한다면, 진노의 물결은 결코 당신을 뒤덮지 못할 것입니다. 여리코에 살았던 키작은 삭캐오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 여리코를 지나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번 지나가시고 나면, 주님은 다시는 그 길을 걷지 않으실 것이었습니다. 삭캐오에게 있어 그 걸음은 주님을 뵐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치실 때, 많은 군중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어서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앞을 지나시다가 멈추어 서서 그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삭캐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으리라』(눅 19:5).
아, 보십시요! 삭캐오는 그 말을 듣는 즉시 뽕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만일 그가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된 영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주님 앞에 나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더 이상 자비의 음성이 들려오는 않는 곳으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곳을 마지막으로 지나시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여,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어서 당신의 나무에서 내려와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요. 우리 중 누가 내일을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이 그분을 영접할 바로 그 때입니다. 지금 그분께 나아오십시요. 오늘 밤 그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 기쁨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제 성경도 없고 더이상 자비도 없는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이 밤이 다 끝나기 전에, 서두르십시요, 당신의 나무에서 내려오십시요. 주님께서 오늘 당신의 집에서 머무르시게 하십시요.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시록 3:20).
삭캐오도 잠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제껏 예수님을 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삭캐오처럼 당신도 깨어나십시요. 지금 깨어나지 않는다면, 언젠가 당신은 그분 때문에 슬피 울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제 목 구세주의 눈물 - 로버트 맥체인
구세주의 눈물
- 로버트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 1813-1843)
- 1841년 12월 31일 저녁에 했던 설교.
『주께서 가까이 오시어 그 도성을 보시고 울며, 말씀하시기를 "적어도 이 너의 날에 너만이라도 너의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너의 눈에서 감추어 졌느니라』(눅 19:41,42).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은 지난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던 그때와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이 땅에 계셨다면,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던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도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밤, 본문의 말씀을 통해 다음의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복음은 당신의 평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오늘은 은혜의 날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열망하십니다.
1). 복음은 인간의 화평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악인에게는 화평이 없다."고 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사 57:21).
1. 양심의 평안.
죄는 모든 슬픔의 근원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죄인 종인 당신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불안한 죄인들에게 최상의 평안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선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보시기에 구원은 죄인들의 등에 진 짐을 내려 놓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가 나를 더이상 지배하지 못하리라.' 도무지 삐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아도, 당신의 혼을 함정에 빠트릴 덫이 온 세상에 걸쳐 쳐져 있다 하더라도, 살아 계신 예수님만 바라본다면 당신의 혼에는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죄를 제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자에게 평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인들이여, 당신이 복음을 경멸하는 바로 그 만큼이나 당신은 평안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사탄의 기세가 너무도 등등한 이 세상에는 화평도 안전함도 없으나, 예수님의 날개 아래라면 모든 것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 바깥에 있으면서도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음에도 아주 행복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이 앞을 못보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무감각한 데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옥을 목전에 두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오! 죄인들이여, 이것이 바로 당신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리니, 그날에는 세상에 속해 있으며 태평스럽기 짝이 없는 죄인들에게 머무르던 평안은 순식간에, 그리고 영원히 분쇄될 것입니다.
2. 복음은 역경의 날에 평안을 줍니다.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납니다. 당신의 지난날이 그 증거입니다. 당신의 가족들 중 많은 이들이 병마와 싸웠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머릴 떠나갔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올해의 마지막 밤이 끝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역경의 날에 평안이 있을 리 없습니다. 폭풍이 으르렁거리며 몰려오는데 그들에게는 피신할 안전한 장소가 없습니다. 화평의 반석이 없으니, 큰 바람이 몰려와도 그 바람을 막아 줄 것이 없습니다. 폭풍의 날에 화평이 없다니, 이 얼마나 가련하고 가슴아픈 일입니까? 역경이 닥치기 전,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병이 몰려오고 죽음이 눈 앞에 다가서기 전에 말입니다. 실로, 복음만이 당신에게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껏 여러분들 곁에 있으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화평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평안도 당신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입니다. 비록 작금은 병도 없고 역경도 없어서 완악한 마음으로 평안을 누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죄인이여, 재난의 날에는 어찌하시렵니까?
『내가 너를 다루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어 낼 수 있으며 네 손이 튼튼할 수 있겠느냐?』(겔 22:14).
3. 복음은 죽음의 순간에 평안을 줍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무엇을 가지고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막는다고 평안이 찾아들겠습니까? 성경은 당신이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왔음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껏 살아온 악의 삶을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유쾌한 동료들이 그때에도 당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당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진노의 날에 돈은 또 무슨 소용에 닿겠습니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의 마지막을 진지하게 숙고해 보십시요.
죄인에게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생각을 비웃는 당신에게, 생의 마지막날에 무슨 평안이 임하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평안하리라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의 마지막 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죄인이여! 사탄이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음을 아십시요. 죄는 사망의 쏘는 것입니다. 그 죄, 지금 당신이 품에 꼭 껴안고 있는 그 죄 말입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그 달콤한 잔이 죽을 시에는 독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달콤하겠지만, 결국엔 살모사처럼 당신을 깨물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앉아 있고, 또 이 해가 당신의 머리 위를 마악 지나가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당신의 죄들은 죽지 않는 벌레로 변한다는 것이고, 지옥의 불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심판이 지금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복음은 평안의 열쇠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 일부는, 당신의 재난의 날에, 그리고 이 집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그 때에, 요단강 물이 당신의 발 밑을 적시게 될 그 시간에, 그리고 이제 평안이라는 것 자체가 당신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는 그 순간에, 제 말을 기억하면서 위의 일들이 바로 당신의 평안의 열쇠였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죄인이여! 그리스도만이 당신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에서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입니다.
올해 저는 여러분에게 수차례에 걸려 이 평안을 전파해 왔습니다. 저는 실로 평안의 전파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왜 아직 그 평안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왜 아직까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경멸하고만 있는 겁니까? 부디, 여러분, 지혜로워지십시요. 그리하여 당신의 평안에 관련된 일들을 깊이 숙고하십시요!
2). 은혜의 날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너의 날에 너만이라도 너의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너의 눈에서 감추어 졌느니라』하루 중에는 그의 새벽이 있고, 정오도 있으며, 또한 자정도 있습니다. 저는 은혜의 날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지자들이 구주의 오심을 예언할 때의 예루살렘은 은혜의 날의 새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거기 서셔서『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고 외치실 때는 정오였으며, 지금 예수께서 울고 계신 때는 바로 한밤중이었습니다. 은혜의 날이란,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실 때를 말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그 날은 전 생애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복음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은혜의 날이 죽음이 오기 전의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항해 마음을 점점더 완악하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앉은 분들 중 많은 이들을 오랫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당신은 이 앉아서 구원의 복음을 들으면 들을 수록 그 마음을 더더욱 굳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음의 우상을 더욱 공고히 세우고, 마음의 구상을 따르는 일에 점점더 몰두하기만 합니다.
저는 은혜의 날이라고 불리우는 날을 몇 개의 시기로 나누겠습니다.
1. 젊은 시절.
왜 그런지에 관해선 주제넘게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를 따라, 젊은 시절을 구원받기에 가장 좋은 시절로 정해 놓으신 듯합니다. 이는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고, 또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나 지나간 시대를 살펴보면, 큰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항상 젊은이들의 회심의 물결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뉴잉글랜드의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언급을 했고, Robe도 1742년 Kilsyth에서 일어난 부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진술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은 어렵지 않게 마음을 낮추고 회개를 하는 반면, 나이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가운데 완악한 마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간구하노니, 청춘을 아무 일 없이 그냥 보내지 마십시요. 아직 마음이 젊고 부드러운 그 시절에 주를 부르십시요. 뒤로 미루면 미룰 수록 당신의 마음은 더더욱 완악해질 뿐이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구원을 받기가 더더욱 힘들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인들을 어느 연령에서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특별히 젊은 시절을 많이 선택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들의 찬송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 듣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아직 젊은 때에 주님을 찾으십시요. 주를 찾을 만한 때에 그분을 부르십시요. 구원받지 못한 채 청춘을 다 보낸 뒤, 후일 지옥에 가게 된다면 당신은 무심히 지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할 것입니다.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2. 복음이 집중적으로 전파되는 기간..
이 또한 특별한 은혜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간을 통해 특별히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때로 어느 장소나 활기찬 사역이 행해지는 기간을 만드셨다가는, 그 다음에는 냉랭한 기간을 만드시는 듯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종종 보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한때 신실한 복음 전파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수해 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화평을 전파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파송된 주의 사자들은 그들 가운데 서서 화평을 전하고, 왕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의 기간이 지나자, 보십시요, 자신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 기간 이후로 선한 소식들은 그들의 눈으로부터 숨겨졌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역시 제 앞에 있고, 또한 은혜의 날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이 날을 아무 일 없이 그냥 보내시렵니까? 오 죄인이여,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 위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채로 새로운 해를 맞이할 작정입니까? 이 제 몇 시간만 지나면 이 해는 끝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다음해가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을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중 많은 사람들의 목전에 마지막 원수(사망, 고전15:26)가 다가서 있으며, 그들은 얼마 안 가 복음이 끊임없이 전파된 올 한해 동안 왜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십시요!
3. 성령님께서는 특정한 지역에 은혜의 날을 만들기도 하십니다.
이런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왕국으로 몰려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간에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당신이 바로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올 한 해가 바로 그러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 중 많은 이들이 이 호기를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예레미야 8:20은 바로 여러분들같은 사람들을 위해 기록하신 말씀입니다.『여름이 끝나고 추수가 지났어도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도다』(렘 8:20). 죄인들이여! 당신들은 지극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날은 곧 끝이나고 말 것입니다. 그 시기를 놓지고 구원받지 못한 채 사선(死線)을 넘게 된다면, 당신은 가련하고 비참한 존재로 영원을 지내야 합니다! 조금의 지혜라도 있다면, 부디 은혜로운 초대의 날을 그냥 흘려 보내지 마십시요!
3).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떤 완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구원하실 의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께서 가까이 오시어 그 도성을 보시고 울며, 말씀하시기를 "적어도 이 너의 날에 너만이라도 너의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너의 눈에서 감추어 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이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하실 의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증거를 남기셨습니다. 하나는 그분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이 눈물은 가식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오직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만을 하시는 분의 음성으로 타고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주님에게서 거짓이 나올리는 없습니다. 주님은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너의 눈에서 감추어 졌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소망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분의 위대한 사랑과 온유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혼들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연민으로 애를 끓이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분의 욕망은 진실된 욕망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 가운데 놓여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들의 말을 경멸했습니다. 주님은 또한 그들이 곧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손이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게 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주님은 그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는 심판을 내다보고 있었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이 지옥으로 끌려 내려갈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우시며 부르짖으셨습니다.
『적어도 이 너의 날에 너만이라도 너의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너의 눈에서 감추어 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셨다면, 그분은 분명 여러분들 중의 몇몇 때문에 예전처럼 그렇게 우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빛과 사랑을 거부하고 죄를 지으면서, 지난 한해를 성령께 반항하며 모두 보내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경고를 무시하고, 그분의 사역자들에게 어떻게 저항했던 가를 알고 있으며, 당신의 반역을 알고 계시며, 그분의 친구들의 집에서 주님을 상심시켰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만이라도 너의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조인이여 돌이키십시요. 다음 한 해가 지나기 전에 고통 중에 지옥에서 눈을 뜨게 될 지도 모를 죄인들이여, 어서 멸망에서 몸을 피하십시요. 거짓말하지 않는 그분께서는 당신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멸망한다면 당신의 피는 당신의 머리 위에 머무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기꺼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분은 어느 누구도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분께 나아와 생명을 얻게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원하셨다면, 예루살렘은 왜 구원하지 못하신 거죠?" 제 대답을 이렇습니다. "그 대답을 알고 싶으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요." 주님이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드는 건 저나 여러분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열망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대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죄인들이여, 간구하노니, 좁은 문으로 들어오십시요. 많은 이들이 이미 그 문을 통과했습니다. 당신은 왜 들어오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당신의 부모나 아이들, 혹은 아내나 남편은 이미 그 문을 통과했는데, 왜 당신은 뻗대고 앉아 있는 것입니까? 현명한 사람이 되십시요.
이 반이 다가고 나면,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신은 그 새해에는 이 자리에 다시 앉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복음의 메세지를 경멸하고 있군요. 당신은 자신이 하는 일을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오 죄인이여! 당신들을 보고 있자니, 자는 지금 눈물이 다 날 지경입니다. 스스로를 숙고해 보십시요. 왜 계속하여 진노의 자녀로, 하나님의 원수로, 그리고 지옥의 상속자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오, 내 머리가 물이고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내가 내 백성의 딸의 살륙으로 인하여 밤낮 울리라!』(렘 9:1).
제 목 평안히 가라 - 챨스 스펄젼(Charles H. Spurgeon)
『그러나 주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더라』(눅 7:50).
이번 설교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평안히 가라'가 적당할 것입니다. 본문의 여인은 바로 방금 전에 주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만약 주님께서 "가라"라고만 말씀하셨더라면 그녀는 속으로 탄식을 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을 용서하신 주님 곁에 머무르고 싶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에게 "가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앞에 한 단어를 더 붙여서 "평안히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악들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이제 평안이 예비된 것입니다.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던 그녀는 이제 일어나서 구원을 받은 사람, 또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으로의 첫 발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흔히 좌우명 하나씩을 새로 정하곤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큰 사업에 도전하거나, 큰 시험을 눈앞에 두고서 힘이 되는 말을 입으로 중얼거리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 아직 이른 새벽과도 같은 그 시절에 자신에게 특별한 성경 한 구절을 만나 평생 그 말씀과 함께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주 낯선 느낌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음성처럼 다가오는 그런 말씀은 처음 들었던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메아리칩니다. 이 말씀은 세월이 흘러 죽음의 침상에 이르렀을 때에도 여전히 그들의 가슴 속에서 속삭입니다. 요단강의 물결이 거셀 때, 이 속삭임은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듣게 되는 평안과 기쁨의 말씀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으로 갈 때에도 그들에게 다시 다가옵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 위대한 선언을 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섬김이 끝날 때에도 그 끝을 알리는 선언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음성은 천국문 앞에서 울려퍼지는 환영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자기의로 가득 차서 덮어놓고 트집을 잡으려는 냉랭한 분위기를 느끼고 즉시 회개한 여인을 내보내십니다. 그녀가 자신을 두고 부정하다느니 하는 논쟁을 하는 것을 듣지 않게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그것보다 더 은혜로운 축복을 발견합니다. 제가 보기에 주님은, 이 가난한 죄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박을 닦아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서 한 행동임을 아셨기에, 바리새인들에게 그녀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시고, 그녀에게는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 말씀은 당장은 그녀의 마음에 힘을 돋우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장차는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즉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야 할 시기에 그녀에게 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는 위로의 목소리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평생 "평안히 가라."하는 말씀이 메아리치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음성이겠습니까? 그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의 설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바라며, 또한 여기 참석한 몇몇 사람들을 통해 고귀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 이 설교를 듣고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메아리를 얻으실 분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여기 앉으신 사람들 중에는 힘을 돋우어 주시는 주님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성도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평안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늘 우리 속에 솟아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술은 기쁨의 샘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샘을 마시며 우리 여정의 끝까지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의 찬송가 가사 내용처럼 말입니다.
건강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그리고 잃을 때나 얻을 때나
주여, 내 마음의 평온함을 지켜 주소서.
주님의 품안에서 달콤한 쉼을 쉬게 하시고,
거룩한 시와 찬송가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며,
내 영에게 평안을 명하여 주소서.
아, 우리의 생이 유리 바다 같기를! 우리의 모든 교제들이 거룩한 평안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여러분, 우리에게 와서 쉬라고 하신 그분께서 또한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 어떻게 그 여인이 평안히 갔는가에 설명하는 근저가 될 '확고한 확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주님은 50절에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고 하셨고 48절에서는『네 죄들이 용서되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확신 가운데 구원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그녀는 평안 가운데 자기 길을 갔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사려 깊은 교훈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주께서는 그녀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당시에는 그녀의 평안을 지켜 주는 명령이었고, 장차는 그녀의 생을 인도하는 지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Ⅰ. 첫째로, '확고한 확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회개한 여인이 평안 가운데 갈 수 있었던 기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녀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주께서는 그녀에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셔서 그녀의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녀는 우리처럼 고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가 몹시 받고 싶어하는 또다른 한 가지를 받았습니다. 즉, 그녀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통해 구원의 확증을 받았던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주님께서 제게 직접 오셔서 그분의 입술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그녀처럼 평안을 얻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애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순한 환경적 조건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 그대로 육신을 입으시고 당신 앞에 서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시든,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든 결국 그 효력은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제 육신의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전해들을 때, 아버지를 대면해서 직접적으로 그 말을 듣던, 마치 직접 만나 이야기하듯 써서 부친 편지를 통해 그의 말을 전해 받든, 결국 제가 아버지의 말을 아버지의 말로 믿고 받아들이기는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으시거든 꼭 언덕 위에 있는 제 집으로 올라와서 직접 하시라고 당부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저는 아마 천치 축에 드는 사람이겠지요.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진 왜 편지로 사랑의 말을 전하세요? 그렇게 하니까 제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잖아요? 아버지 다음부터는 직접 제게 오셔서 눈과 눈을 맞대고 제 귀에다 직접 음성으로 전달해 주세요. 부탁해요." 그러면 아버지는 십중팔구, "얘야, 왜 도대체 그러느냐?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어릴땐 안 그랬는데. 이제까지 편지로도 충분했지 않느냐? 그런데 느닷없이 직접 만나서 얘길 하지 않으면 못믿겠다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도 그런 청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기록하신 말씀을 믿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직접 말씀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진실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제 말에 동의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는 갑니다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녀를 향해서 오직 그녀에게만 말씀하셨잖습니까? 물론 기록된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란 데는 의심이 없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확신시켜 주시지 않는 이상, 글쎄요, 우리가 평안히 갈 수 있을까요?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하는 말씀을 혼잣말로 하신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눅 8장에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노라』하셨을 때는 그저 혼잣말로 하신 것이 아니라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쳐다보시며 하셨고, 그녀는 분명 그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확신을 주어야 할 대상이 오인되는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구요. 누가복음 6장에서도, 다른 사람들도 방안에 있었지만, 주님은 그 말을 시몬에게 하신 것이 아니었잖아요? 물론 베드로나 요한을 향한 건 더더욱 아니구요. 그녀는 주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말씀이 분명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자작했을 거라구요. 오직 그녀만이 그 자리를 떠났으며, 그러므로 오직 한 사람만이 '평안히 갔던'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 속에도 분명 단수를 지칭하는 단어가 쓰였잖아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그러니까, 저도 주님이 저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씀해 주시길 바라는 거라구요." 하지만 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다시 비유를 들어 봅시다. 만약 제 아버지가 저와 제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얘들아, 난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 꽤 많은 재산을 아껴서 모아 두었단다."그런데 제가 이 말을 듣고선 아버지에게, "아버지, 전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겠어요. 아버지 말이 조금도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구요. 아버진 분명 절 제외시킨 다른 형제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거죠? 전 아버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왜 형제들과 자매들에게까지 그 말씀을 하시는 거죠? 콕 찍어서 저한테만 말씀하시지, 왜 두루뭉실하게 복수 격을 사용하셨냔 말입니다. 그래서 전 아버지가 보증하시는 말을 듣고서도 안심이 안 된단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을 한다면 저는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사람이겠습니까? 아버진 아마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나와 모든 형제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신 거라면, 그분의 말은 진실성이 떨어지기 보단 오히려 더 믿을 만한 약속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 혼자한테만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여러 형제에게 공언하는 것이 더 많은 신뢰를 형성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대상으로 저를 지목해 단독적인 계획을 추진하시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저를 은혜롭게 다루시는 것 사이에는, 믿음에 관하여는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끝끝내 토를 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 맞아요! 그런 게 있어요. 전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다수 사람 안에 제가 포함되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전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 속에 저도 속해 있는 건지 그게 궁금하단 말입니다." 친구여, 그런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성경은『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36)라고 말씀하셨네. 자네가 그분을 신뢰하는지 혹은 신뢰하지 않는 지는 자네 자신이 더 잘 아는 것일세. 자네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자네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이 하신 모든 약속 또한 자네 것일 걸세.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일반적인 법칙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모든 곳,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서든지 적용되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만약 주님 앞에 나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오니, 나의 도움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주님은 증거 하실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입니다. 무오한 증거자께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으므로, 이를 의심할 믿음의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직접 듣지 못했더라도, 이것은 분명 진리입니다. 그분은 단지 입으로 나온 말씀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증거하셨을 뿐인 것입니다. 직접 안 들린다고 해서 당신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곤 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글로 쓰여진 말이든 직접 음성에 실어 내놓는 말이든 그 사람이 진실되다면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언질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에 관한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말보다는 글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성은 발한 후 곧 사라지지만, 글로 기록된 말은 그보다 더 오래 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거듭거듭 읽어야 하기에, 말씀에 관한 한 그런 판단은 더더욱 타당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밤에 당신에게 나타나 "네 죄는 용서되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책으로 기록된 것을 거듭해서 읽는 것이 우리의 확신에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록된 문자가 일회성의 음성보다 더 낫습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군요. "아니예요. 전 당신 말을 도통 이해 못하겠어요." 그럼 이 얘길 해야겠군요.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산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드로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후일 영감을 받아 성경을 쓸 때,『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벧후 1:19)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보고 들었던 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테지만,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그에게 지속적인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제 생애의 어느 순간, 주님을 직접 뵈옵고 그분이 제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경험이 있어서, 오늘 이 아침에 그일을 다시 떠올린다면 제 가슴을 다시금 감동으로 벅차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일 우울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가끔씩 그러하듯이 흑암의 세력이 제 혼을 짓누르고 있다면, 저는 제 스스로에게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니가 보긴 뭘 봐? 잠시 정신이 이상해져서 헛것을 본 거겠지. 일시적인 정신착란이었던 거라구.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러나 제가 말씀으로 확신을 얻었다고 합시다. 제 눈앞에 그 말씀이 있는데, 제가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저는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으며, 제가 이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성경의 행간에 손가락을 얹고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주여, 저는 주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책에 있는 이 말씀을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들에는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있으나, 이 성경만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제 혼에게 하셨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몸소 겪은 경험들이 진실임을 확신하는 만큼이나 이 책이 주님이 쓰신 것임을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서 의심을 제거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게 직접 나타나셔서 주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성경의 기록으로 약속하신 것보다 더한 구원의 확신을 주진 못했을 것임을 저는 잘 압니다." 여러분 기록된 말씀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당신이 믿고 있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 확실하듯, 당신의 구원도 그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 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당신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36).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이 약속에 관한 위의 말씀 중에는 "만약"이나 "그러나"같은 단어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구원은 현재적이며,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경우에서도 확실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걱정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믿고 안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소한 논쟁들을 가지고 성경을 던져 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분명한 언약의 말씀으로 믿고 그 위에 굳게 서기만 한다면, 여러분들을 구원의 확신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책이 진리라면, 그리스도 안의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만큼이나 안전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믿어요.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이 말은 성경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 다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온전히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모두 믿을 것입니다.『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요일 5:11). 위대하신 아버지의 증거이며, 또한 영원하신 성령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말씀을 감히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는 아직도 자신이 믿고 있는 건지 안 믿고 있는 건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원인이 있으면 결과과 있듯이, 믿음이라는 원인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믿었다면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요. 평안히 가십시요. 의심을 거두고, 논쟁을 그치고, 평안히 가십시요. 가서 당신이 하는 일을 하십시요. 구원에 관한한 더 이상 볼일은 없습니다. 가서 완성된 구원을 즐거워하고, 더이상 이러쿵저러쿵 질문을 던지려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출 14:15). 어찌하여 계속 의심하고 질문을 던집니까?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들을 즐기십시요. 당신은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성화의 길을 떠나십시요.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은혜의 언약에 명시된 다른 모든 축복들을 찾아내십시요. 그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확신하고, 완전한 평안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예비하신 선한 것들을 누리십시요.
구원의 확신이야 말로 "평안히 가라"라고 하시는 명령의 근저입니다.
Ⅱ. 두 번째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깃든 사려 깊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지혜를 따라, 용서해 주신 여인을 뿌리치시며 "평안히 가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속에 깃든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은 『가라』하는 말씀을 보고, 그 후에는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라』는 말씀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는 어디로부터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어디로부터 떠나가는가?
첫째로, 그녀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떠나갑니다. 그 자리에 있던 시몬과 바리새인들은 침을 잔뜩 세우고 있는 벌떼들처럼 불만에 가득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들도 용서하는가?』하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완벽하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죄인인 여인이 가까이 접근하여 눈물을 자신의 발을 씻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을 꼬투리로 잡아 그분의 정결하심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긴 유약한 어린 아이 같은 성도가 머물기엔 너무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그녀의 혼은 사자 떼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담긴 속뜻은 아마, "더 머물러 있다간 이 트집을 일삼는 자들에게 고통을 당할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 너는 이미 엄청난 축복을 얻었다. 이 축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자들은 자기들끼리 으르렁대며 싸우게 놓아두어라. 너는 보물을 지녔다. 그 보물을 해적들에게 강탈당하지 않게, 어서 가거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주님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자기들끼리 놓아두고 그 자리를 떠나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 큰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자주 합니다.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적당한 질문을 주기 위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내용이 담긴 책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읽어야 하는 것이 비극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궁창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영적인 건강해 해롭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을 증명해 내셔야 합니다."예, 물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저녁 성찬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 위에는 각종 육류가 그득했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고기 접시 하나를 골라 고기를 얇게 저민 후 그 토막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입 속에 넣는 순간 고기가 상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고기가 상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고기를 다 먹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나쁜 책이라도 끝까지 샅샅이 다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악한 설교자의 설교도 그게 얼마나 나쁜지 알아보려고 끝까지 다 들어보곤 합니다. 5분이면 모든 걸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텐데도 말입니다! 당신이 만약 썩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면 속으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오우, 이런! 주인장 이건 개 먹이로나 적당할 음식인데! 난 괜히 이런 거 먹고 탈 나기 싫단 말이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보십시요. 주님도 여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으셨습니다. "잠깐, 게 섯거라. 시몬이 할 말을 한번 들어보거라. 선한 여인이여, 그대는 눈물로 내 발을 씼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 시대의 지성 바리새인의 말을 들어보거라. 그는 너에게 지식인답게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것이다. 조용히 귀 기울여 끝까지 들어보거라. 그리고 그 외에도 여기에는 내가 네 죄를 용서한 것에 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반대는 뼈에 새긴 맹세보다 더 뿌리깊은 것이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라. 내가 그들의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리니, 그렇게 너의 마음을 안심시키리라."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구주께서는, "평안히 가라."라고만 하셨습니다. 평안을 가졌으니, 잃어버리지 않게 조용히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안정과 기쁨을 얻었느니 그것을 말쟁이들에게 강탈당하지 않도록 그 자리를 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그 방안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거기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당신을 쏘아보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연히,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그들이 당신의 존경을 유도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 지켜보고 있기보다는 그저, "이 자리를 떠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며 방을 나와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반대가 극심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서 우리의 믿음을 강탈해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집으로 가라. 그들을 내버려두고, 평안히 가라."
저는 주님께서 이 잡다한 무리들로부터 그를 보호하신 것 외에 이런 숨은 뜻도 가지고 가지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본의 아니게 유명해지겠다. 이 자리를 피하라." 만일 주님이 요즈음의 어느 유명한 인물들과 같으셨다면 그분은 그녀에게, "이 사람들 앞에 서서 너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어라. 그리고 이번 주중에 6일은 시간을 내서 이모임에 참석해라. 그래서 여기 모인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네 이야길 해 주도록 해라."하고 말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구주의 발을 눈물로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대단한 여인이 아닙니까? 그녀가 만일 주님께 그런 부탁을 들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눈물과 머리카락에 얽힌 그 기막힌 이야기를 주저없이 구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그 들 중 몇 명이나 그녀의 말에 감명을 받았을까요? 그녀는 주님께 감사해 하는 그만큼 또 흥분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다시 말하면 이런 속뜻이셨을 것입니다. "너는 여자들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전해라. 너처럼 타락한 불쌍한 여인들을 찾아가서 내가 네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말해 주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너는 이것으로 족하다. 너는 네 사랑으로 참으로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서지 마라. 행여 멋있고 영웅적인 행동을 계속하려는 생각은 그만두고, 그만 평안히 가거라." 또, 여기에 더하여 이런 뜻도 담겨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라. 네 자매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사람들이 네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보게 하라. 그리하여 내 교리를 돋보이게 하라. 너를 백성들 중의 죄인이 되게 한 그 나약함이 또한 성도로서의 네 삶에서도 큰 위협이 되리라. 그래서 나는 너에게 내 제자들과 함께 하거나 나를 따라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평안히 가라." 저는 주님께서 이 부분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교훈을 알려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세세하게 말하자면, 저는 구주께서 그녀를 그녀의 생애를 통해서 단 한 번 수행했던 위대한 사역에서 물러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열정에서 우러나온 행동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동은 모든 곳에서 회자되고 기억될 만한 것이었으며, 우리 또한 그녀의 사랑은 물론하고 진실한 회개와 영웅적인 용기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그런 영웅적인 행동만을 행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삶이란 그야말로 평범한 행위들로 가득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묶은 머리를 풀어서 수건 대신 발을 닦는 것 같은 여웅적인 행동만을 하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늘 실수하기 일쑤여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늘 영웅적인 행동이 불러오는 경탄과 찬사에 귀가 솔깃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가 혼자서 어떤 대단한 일을 했다는 얘길 들으면 자신도 몸소 그 일을 해보고 싶어하고, 나아가서는 계속 그런 일만 하기를 원합니다. 오, 자매들이여! 당신에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을 열어야만 하는 순간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은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사랑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돌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말을 깁고, 아이들을 위해 작은 양말을 손수 만들면서, 그 여인이 주님의 발을 씻으며 아무 말도 입밖으로 내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일상의 삶을 영위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요.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앙은 천박한 것입니다. 일상의 고된 일들은 곧 거룩한 사역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손도끼와 대패를 손에 들고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혹은 계산대 뒤에서, 또는 연필을 들고서 사무를 보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는 자리에 나아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행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또 이런 일은 한 번 행하고 나면 그들은 평생을 들뜬 상태로 살아갑니다. 지금 플래쉬 불빛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안히 가라."저는 지금 여러분들 중에서 정말로 보통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서, 동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에 응당한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혹시나 일상적인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사역에 흥미를 잃을까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특별한 행위 하나 때문에 일상을 삶을 망쳐 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일상의 삶 속에서 나를 섬기고 가정에서 내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여기서 무거운 짐으로 고통받지 말고 가정으로 돌아가 가벼운 멍에를 지라."
저는 또 주님의 말씀에는 그녀에게 그녀가 잠시 누렸던 주님과의 단독적인 친밀한 교제를 그치도록 하신 뜻이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는 누가복음 7장에서 주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겠지만, 육신을 가지고는 다시는 그렇게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매우 고상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 종종 일상적인 삶을 망각하기 심상입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 앞에 앉는 것과 함께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신 일도 해야 합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한 영적인 기쁨이 아무리 지극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일이 서로 상충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의무를 지혜롭게 수행하고 한가지 일이 다른 일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루 종일 성경만 읽어야 한다거나, 하루 종일 기도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면, 버리십시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거룩한 모범을 따라 모든 일들을 알맞게 배치시킨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모양의 모자이크가 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리고 부지런히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런데, 그녀는 무엇을 하기 위해 가야 했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이런 의도를 자기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라. 너는 타락한 여자로 살아왔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네 집이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친지들을 만나라. 가정에 적응하라. 그리고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집이 아니더라도 가서 정착할 만한 곳이 있으면 거기로 가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어두운 유혹이 다시 너의 머리채를 잡아당길 것이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가정의 질서에 순응한다면, 너는 유혹에서 안전할 것이다. 머리와 마음, 그리고 두 손을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채운다면, 길에서 벗어나 다시 그릇되이 가는 사태가 있을 수 없으리라."
혹시 여러분 중에 자신을 특별한 인물, 말하자면, 흙을 밟지도 않고 꽃잎을 따먹으며 사는 환상 속의 성인쯤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망상에 빠져 있다면 어서 빠져나오십시요. 저는 중국에 가면 구름 위를 걷는 신발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기회만 된다면 그걸 돈 주고 사려고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마치 꿈 속을 걷는 것처럼, 망상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실제 이상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당신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뭣이나 된 듯한 착각에서 어서 벗어나십시요. 세상에서 같이 일하기 가장 까다로운 사람은 바로 젠체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중요한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 들어야 할 진실입니다. 가련한 인생들이여! 어리석은 자만으로 인한 망상에서 제발 벗어 나십시요!
머물러 있지 말고 가서 해야 할 일을 하십시요. "평안히 가라.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사랑을 증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눈물로 내 발을 씻은 너는, 너와 같이 타락한 자들에게 가서 네 눈물을 보여주거라. 가서 그 진실된 눈으로 그들에게 나의 사랑을 전한다면, 너는 내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안을 가지고 네 삶 속으로 돌아가서 나를 위하여 일상의 일들을 부지런히 행하라. 그러면 내가 나를 위해 일할 기회들을 만들어 주리라."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에 담긴 속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그 자리에 머물러 스스로를 즐겁게 하려는 생각이나 하고 있지 말고, 가십시요. 가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요. 가십시요!
자, 여기에서 다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평안히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안 속에서 남은 생의 여정을 모두 마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 주님의 용서하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요!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헛된 두려움을 몰아내어 주소서. 어둡고, 수치스러운 과거에 연연하지 마십시요. 못자국 난 그 손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우셨음을 잊었습니까? 더이상 옛 일로 마음에 소동을 일으키지 마십시요. 평안히 가십시요. 우리 죄의 짐이 벗겨졌으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합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이를 확실하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평안의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실 때의 상황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주님은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을 비평가들을 염두에 두고 그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즉 그녀에게, 그들을 신경 쓰지 말라 하시는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도 그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비평가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종은 그저 주인이 받아들이면 만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종은 타인들이 자신의 섬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으면, 그들이 뭐라고 불만을 터뜨리던 간에, 무어라고 혹독한 말을 들고 와서 우리의 마음을 들쑤셔 댄들, 우리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신랄한 비평가들처럼 호들갑 떨지 말고 평안히 가라.
저는 또 주님이 "네가 한 일로부터 물러나 평안히 가라."라고 하는 뜻으로 평안히 가라, 라고 하셨으리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는 지금껏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전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서, 저는 제 자신이 영적으로나 전하는 형식, 또는 전하는 시간의 길이,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부분을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괴롭게 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저를 받아주셨다면, 저는 평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야말로 대단한 행동을 했습니다.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그 자리를 물러나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했을까? 내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지? 내가 주님의 발을 씻길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나 같은 죄인이, 나 같은 여자가 그 거룩하신 분에게 그런 일을 하다니! 그분은 내 무례한 행동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도 몰라!"우리도 주님을 위해 용기 있는 행동을 행하고 나서는 종종 그렇게 느끼곤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너무 시건방진 행동을 한 건 아닌지 몰라? 아휴, 내가 너무 나섰나봐!" 어떤 선한 젊은이 하나가 처음으로 설교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엔 어떻게 설교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다시는 안 할 겁니다. 전 이런 거룩한 사역에 별로 적합하지 못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하신 겁니다. "평안히 가라. 나는 너의 섬김을 받아들였다. 네가 행한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네 사랑의 향기는 그윽했고 나에게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네가 한 일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말라. 너는 옳은 일을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평안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해 일 한 후에 얻는 평안, 인간들의 신랄한 비평에서 초연한 지극한 평안 말입니다.
"평안히 가라." 지금 이 시간부터 영원히, 그 거룩한 평안을 소유하시길!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짜증을 내곤 합니다. 저는 평소엔 늘 선하기만 한 형제들이 어느날 느닷없이 터무니없는 의심을 집어삼키고는 여기저기 그것들을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보아왔습니다. 어떤 자매들은, 매우 선하기는 하나 지나치게 예민합니다. "까다로운" 여인들로 소문난 사람들이죠. 아마 소문 대로인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더이상의 세세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경질이라는 질병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다른 것도 많겠지만, 특히 이 부분에 관해서 '형제회'의 형제들을 존경합니다. 그들은 굳건하고 자족할 줄 알며,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들은 다소 느릿하긴 하지만, 확신에 차 있고, 마음이 견고하며, 또한 늘 조용합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 중에는 너무 서두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한다면 일은 더 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좀 더 하나님께 내맡긴다면, 평안은 우리 속에서 강같이 흘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끊이지 않는 기쁨을 가지려고 합니다.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를 심란하게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거룩하신 그분이 우리를 지켜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험한 길을 걸을 때에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마음은 큰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이 말씀은 아름다운 음악과 같이 우리 생의 여정에 함께 할 것입니다.
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선한 여인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는 하곤 합니다. 그들이 대놓고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고 말했다면, 그녀는 그들에게 "하지만 그분은 저의 죄를 용서하셨어요, 그리고 제 마음을 변화시키셨는데, 왜 그런 말을 하세요?"라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그녀는 논쟁하라는 부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논쟁과 다툼을 겪어온 사람이 많고, 그래서 그 일이 그리 즐거운 일이 못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거룩한 여인처럼 그 논쟁에서 면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 혹독한 싸움에서 빠질 수 있어서 너무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녀는 수많은 채찍과 고역을 피한 것입니다. 그녀의 대장 되신 주님은 그녀를 행복한 마음을 안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녀가 그들과의 논쟁에 끼여들었다면 그녀의 마음은 방금 받은 모든 은혜를 잃어버리고, 그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싸움에 나서서 부상을 입어가며 싸우기에는 너무 고귀하고 연약하다. 평안히 가라. 너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싸움을 싸우고, 논쟁하고, 다투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평안히 가라." 그녀가 만일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무런 선한 열매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나 만일 어떤 말을 꺼냈더라면, 그 지독한 바리새인들은 아마 그녀의 말을 농담거리로 만들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연약함을 이용해 바리새인들이 더러운 승리를 얻도록 놔두어야 했겠습니까? 진실한 마음은 다툼에 적합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계신분은 우리의 변호인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그녀는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나 혼자서 상대하겠다. 너는 평안히 가라." 우리가 남아 있는 것이 주님께 방해만 된다면, 조용히 집으로 가는 것이 믿는 자의 의무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여인은 불경건한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여는 것을 금함으로, 주님께 더 큰 헌신을 했습니다. 조용하고 행복한 삶은 때로 주님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요. "이 소동에 끼어들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그리고 오늘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픈 말은 이것입니다. 세상에는 구원도 받지 못한 처지에 주님의 재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듣고 생각은 해 봤지만, 한 번도 믿은 적도 없고, 그래서 아는 것에서 그치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마십시요. 주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며, 믿음의 다리를 건너 그리스도의 황금의 해변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평안히 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표를 들고 은행에 갔습니다. 그 수표가 분명 그 사람의 것이며 서명도 똑바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수표를 카운터 위에 내놓았고, 은행원은 그에게 돈을 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웬일인지 그는 이 돈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시간을 허송하고 있을 뿐입니다. 직원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선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하는 눈길로 그를 쳐다봅니다. 결국,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가 자리를 떠나지 않자, 사람 좋은 은행원도 드디어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찾기 위해 수표를 들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예. 돈을 찾으러 온 게 맞습니다."
"그럼 돈을 가지고 가서 당신 일을 하시지, 왜 가지 않고 여기 서성대고 있는 겁니까?"
그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더 이상 뭉그적거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돈을 받는 순간 곧바로 제 갈 길을 갔었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 돈을 받았을 때, 곧장 그 자리를 떠났어야 정상입니다.
자, 보십시요.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요 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36).
이 말씀을 믿었습니까? 그럼 그 축복을 가슴에 안고서, 가서 당신의 일을 하십시요.
"글쎄요, 믿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면서 그 자리에 머뭇거리고 서 있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약속된 축복을 가슴에 품고 즐거워하십시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만일 혹자가 "교회도 오래 다녔고, 구원의 길을 믿긴 했는데, 제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군요." 한다면,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집에 가서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밥은 제대로 넘어가고, 일은 손에 잡히겠습니까?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는대요?"같은 말은 하지 마십시요. 당신은 알고 있으며, 또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믿었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당신이 의심하고 있다면, 당신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었다면, 평안히 가십시요.
『오 너 믿음이 적은 자야,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마 14:31).
주님을 신뢰하십시요!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히 가십시요. 주님께서 당신을 도우시기를! 아멘.
제 목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로버트 맥체인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로버트 맥체인(Robert Murry McCheyne, 1813-1843)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께서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주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의 목적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에게 기쁜 소식들을 전파하게 하셨으며』(사 61:1).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시고 모든 인간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16:24). 그리고 본문 바로 앞의 구절을 보십시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 맨처음 하신 말씀은『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요20:19)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앗아가고 싶어한다고 속일 것입니다.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삶을 파괴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분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불못으로 돌진하여 들어가기 전에 당신의 그릇된 즐거움을 깨고, 헛된 꿈에서 깨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는 당신에게 사그라들지 않고 사멸하지도 않는 충만한 기쁨을 주고 싶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이 제자들을 그렇게 기쁘게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에 앞서 그들을 기쁘게 한 요인이 아닌 것들부터 가려보도록 합시다.
Ⅰ.제자들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닌 요소들
1. 부(富). 제자들은 모두 가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그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님처럼, 그들 역시 가난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어떤 서기관이 주님께 나아와,『"선생님,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따르겠나이다."』라고 하자, 주님은 그에게『"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자기 머리 둘 곳조차 없노라."』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마 8:19-20).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그의 제자들에게 부를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길, 자신은 기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외형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고후 6:1). 그들이 즐거움은 부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은행에 얼마간의 돈을 맡겨 두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들입니다. 은행도 끝나고, 당신의 모든 돈도 어디론가 사라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진노의 날에 부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를 기억하십시요. 지옥에 간 그에게 생전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그는 그 돈으로 자신의 혀에 떨어뜨릴 물 한 방울도 살 수 없었습니다.
2. 제자들에게 기쁨을 준 것은 세상의 친구들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가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절친한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순 없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친구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함께 모인 장소의 문들을 모두 꽁꽁 걸어잠궜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주인을 싫어했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그의 제자들 또한 혐오했습니다. 제자들은 늑대 무리 속의 한 마리 양과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결코 땅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피조물들에게서 진정한 기쁨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요.
3. 그들의 기쁨은 그들 자신의 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기쁨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얻습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기쁨입니다. 나팔 소리가 들릴 때 그릇된 기쁨으로 판명될 것이며,『한밤중에 소리가 나기를 보라, '보라, 신랑이 오니 나가서 맞으라.'』할 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당신의 기쁨이 아닙니까? 그저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쳐다보면서 얻는 기쁨이 당신 기쁨의 전부인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요한복음 20장에서 보았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한때 주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고난을 받을 때, 모두 떠나가 버렸고, 그 중 한명은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낙심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를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다시 뵈었을 때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아!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돌아보십시요. 만일 당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거라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헛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4. 제자들의 기쁨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본 것에서 기인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 중에는 "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그 기쁨을 누리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결코 육신을 입고 주님을 보았다는 것 때문에 기쁨을 느낀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보았지만, 그저 고개를 흔들며 그분께 침을 뱉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실로 주님의 손에 못이 박히는 것과,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목도했지만, 그저 주님을 조롱했을 뿐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눈이 그를 볼』것입니다(계 1:7). 그리고 그 중 많은 이들은 그분으로 인하여 울부짖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영원한 저주의 시작입니다. 당신들 중에는 거기에 참여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 한 번도 육신의 눈을 가지고 주님을 뵌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제자들과 똑같은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5. 제자들의 기쁨은 자신들의 '스승'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본 데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예전처럼 그들과 함께 지내시기 위해 부활해서 그들에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었을 뿐입니다.『이 말씀을 하신 후 주께서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Ⅱ. 제자들을 기쁘게 한 것들
1. 그들은 주님이 자신의 사역을 완성한 것을 보았기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서 그분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어린양이 그의 옆구리에 창자국을 그대로 지닌 채 그들 앞에 서 계신 것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이사야서 53:5의 의미를 깨달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사 53:5). 또, 베드로는 후일 자신이 기록하게 될 베드로전서 2:24 속에 담긴 의미를 바로 그 순간에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들은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 예수님께 부어졌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빚은 단 한 푼도 남긴 없이 모조리 청산되었으니, 그들이 어찌 그렇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일을 온전히 수행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제자들을 기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받으셨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들 마음 속엔 더 이상 슬픔이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여, 당신들은 당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 자신의 의를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 예수님, 즉 그들의 의가 되신 그분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제자들을 기쁘게 한 것입니다.
당신은 기쁨이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까? 오 죄인들이여! 예수님을 보십시요. 당신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당신에게도 진정한 기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2.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살아 계신 머리가 되셨기에 기뻐했습니다.
『이는 내가 살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9).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
제자들에게는 죄의 무거운 짐으로 인하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전처럼 살아 계신 구주를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어떻게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복종시키는 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모든 원수들이 그분의 발 아래 부복할 때까지 다스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요, 죄인들이여! 당신들 모두 그분을 쳐다보십시요. 그리하면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서보다 더한 기쁨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그저 얕은 것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안식에 들어감이라』(히4:3).
1. 당신이 만약 그 제자들 속에 있었다면 이런 것을 배웠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기쁨은 어디에 기인한 것입니까? 돈이나 친구들에게서 생겨난 것은 아닙니까? 제자들의 기쁨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각에서 솟아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사업이 잘 돼 갈 때입니까? 친구들이 당신에게 호의적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을 때입니까? 그러면, 그것들이 사라지면 당신의 기쁨도 사라지겠군요. 그렇죠?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마귀의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다시 한번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요. 당신의 기쁨은 당신 자신의 의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한다는 자부심에서 솟아난 것이 아닙니까? 당신의 기쁨은 당신 자신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제자들의 기쁨은 당신과 다른 것이었음을 명심하십시요.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 제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요. 그분을 바라보는 데서 기쁨을 얻도록 하십시요! 그 기쁨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도 언젠가는 떠나가고, 돈도 날개를 달아 사라질 테지만, 그 기쁨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탁월함을 발견하십시요.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쁨의 창시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세상을 쳐다보느라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마는 우를 범하지 마시길! 그분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요.
3. 주님을 찾으십시요.
주님을 찾는 이에게 임할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구주를 보십시요!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십시요! 아 가련한 혼이여! 주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을 바라보고 기쁨을 얻으십시요!
4. 여러분 중에는 한때는 이 기쁨을 가졌으나 지금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제자들도 한때는 그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그들에게 왔을 때 어땠습니까?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당신은 주님이 완성하신 일과 그분의 살리시는 능력을 깨닫는 영적인 발견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을 간구하십시요! 충만한 기쁨을 말입니다!
자기의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만 쳐다보고 있었다면, 그들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었이었겠습니까? 그들 중 하나는 주님을 부인한 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오직 자신들이 아닌 주님을 바라봤을 때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요. 그리하면 진정한 평화가, 그리고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충만한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쁨을 언제나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건대, 기뻐하십시요.
주여, 우리를 축복하소서. 아멘.
제 목 평안, 얻을 때와 잃을 때 - 챨스 스펄젼(C.H. Spurgeon)
『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시 85:8).
『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수많은 음성과 음성이 있습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자비를 전하는 음성을 들어보십시요.『주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총을 베푸셨으니 주께서 야곱의 포로들을 데려오셨나이다』(시 85:1). 그러나 이 음성과 함께 슬픔에 겨운 음성도 공존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울부짖으며 간구합니다.『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주께서 모든 세대들을 향해 주의 분노를 발하시겠나이까?』(시 85:5). 그리고 시편 기자는 노래와 한숨이 뒤섞인 혼잡함에서 돌이켜 이렇게 울부짖습니다.『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시 85:8). 주목하십시요. 바로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길 자주 하십시요. 거리에서 나는 음성들이 마구 뒤섞일 때, 교회 안의 음성이 서로 엇갈릴 때,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하나님의 음성 앞으로 나아가십시요.
다윗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비석 앞에서 간구의 기도를 펼쳐 놓고 있습니다.『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어 주의 백성들로 주 안에서 기뻐하게 하지 않으시겠나이까? 오 주여,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 보이시고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시 85:6, 7).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대답을 주실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나를 몹시 아끼던 어떤 친구 하나는 정성스럽게 사연을 쓴 뒤에 제일 마지막에는 "답장은 필요 없네."하는 사족을 붙여 편지를 띄우곤 했었습니다. 이런 추신이 사람들의 기도에도 자주 따라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속으로, "나는 간구할만큼 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리라."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기도 뒤에는 항상 이런 거룩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해 놓고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죄악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간구의 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분의 존재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우상 대하듯 하는 자와 같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이방의 형상들 말입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면, 아버지가 자기 자녀의 말을 듣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매일『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라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목소리들 때문에 혼란스러워져 있을 때나 기도로 마음을 쏟아 놓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발하신 그분의 음성은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혼란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됩니다. 교리를 공부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기준을 정할 때에도 저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말씀은 우리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줍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85:105).『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시 85:8). 그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인다면, 뼈아픈 충고나 채찍이 없어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교훈이 아무리 많아도, 저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얼마나 위대합니까? 태고의 흑암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빛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말씀으로 그 흑암에 빛을 주셨다면, 우리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장차 죽은 자들도 이 음성을 들을 것이고, 또 이 음성을 듣는 자들은 생명을 얻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기쁨 가운데서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주님의 계명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그것들로 저를 살리지 않으셨나이까?"
우리 구주께서는 절름발이나 앉은뱅이, 또 눈이 한쪽밖에 없는 자일 지라도 그가 생명을 얻은 자라면 그에게 자신의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그러나 귀를 잊어버리고 생명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게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고 했습니다. 임마뉴엘 우리의 왕께서는 '귀의 문'을 통하여 '인간의 혼'이라는 마을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만지는 것이나 보는 것, 혹은 맛보는 것이나 냄새를 맡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들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 12).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어린 사무엘처럼 우리 각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다윗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대하고 또 그 말씀을 들으려고 열망하는 지에 관한 특별한 이유 하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시 85:8)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듣게 될 음성은 두려움들을 없애고, 마음에 힘을 돋우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천둥 소리를 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음성은 부드럽고, 그분의 말씀은 자비로우며, 그분의 영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메시지는 화평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발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오직 평안만을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설교의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첫번째 소제목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평안"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소제목은 "우리는 왜 평안을 잃어버리는가?"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1.첫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평안"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무리들에게만 평안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겠군요. 나는 주님께서 내게 평안을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분은 분명히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다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머거리가 된 자들에게는 아무 음성도 들려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평안의 복음을 듣지 않은 자는 절대 복음 안의 평안을 알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자는 용서를 뒤따라 오는 평안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통한 화해를 제시하실 때 이를 들으려 하지 않고,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실 때 귀를 막으며,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으라고 하시는 데 이를 무시하는 자는 절대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절대로. 그리스도 바깥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이 우리의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분 대사가 계시며 오직 한분 중보자가 계십니다. 오직 한 분뿐입니다. 속죄제도 하나님의 피를 통한 하나의 속제죄가 있습니다.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평안의 언약도 오직 하나이며, 절대 둘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 한길 외의 또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죄를 속죄하신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귀를 막는다면, 그런 이의 마음은 절대로 평안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귀를 열어 놓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의 표식과도 같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나는 선한 목자라』(요 10).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며, 그분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들은 실상 무신론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계획, 행동들 그리고 사업과 삶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느끼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행복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첫째도 하나님 둘째도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에도 하나님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들은 모든 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군중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위에서 다스리시고, 그의 밑에서 붙드시며, 그의 속에서 그에게 힘을 북돋우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서 기뻐합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면, 당신이 그의 백성 중에 속해 있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평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언제나 거룩함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분의 백성이란 말과 그분의 성도들이란 말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분이 거룩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하기 위해 늘 힘을 씁니다. 성도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삶을 사는 자는 그분께 평안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고, 조심성 없고, 불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마음에 많은 의심을 품고서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에게는 화평이 없느니라』(사 48:22). 그러나 그분의 백성들에겐,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자녀들에게는, 의를 따르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평안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아, 슬프다! 내가 어찌 감히 성도의 모임에 함부로 내 이름을 올릴 수 있으리오!" 이런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고,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한때는 어리석은 데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구요? 성경 구절을 보십시요.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이 구절은 그들이 한때는 어리석음을 쫓는 자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죄악을 쫓았고, 하나님을 모르며 그분을 섬기지도 않고 살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 회개를 하고, 죄와 수치 그리고 어리석음에서 돌이킨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현재 하나님께로 왔다면, 과거의 어리석음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 마십시요. 한때는 어리석은 자였으나, 주님께서 그 어리석음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을 그분의 백성으로, 또 거룩한 자로 계수하셨다면, 주님은 분명 당신에게 평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전 어리석음에서 돌이킨 것은 확실한데, 제 마음 속에는 자꾸 그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압니다. 저 역시 옛 아담이 저를 옛 길로 돌이키게 하려고 제 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에게 이런 경향이 없다면, 주님께서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기록하셨겠습니까?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그분의 백성이었으며, 또한 그분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옛 본성은 그들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들을 다시 옛 길로 돌이키게 하고자 수시로 그들의 소매를 이끌곤 합니다. 만일 당신 속에 옛 누룩이 작용을 해서 죄를 부풀리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 당장 구주 앞에 엎드려서 세리가 했던 것처럼 이렇게 간구하십시요.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눅 18:13). 기억하십시요. 당신에게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백성이며, 또 그분께 평안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고, 악을 전혀 혐오스러워 하지 않으며, 의를 간구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인 적도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절대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우뢰와 같은 소리가, 불같은 음성이, 격노하여 발하시는 말씀이 준비되어 있을 뿐입니다.『'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 25: 41). 여러분 중에는 이 분노의 음성을 들을 사람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평안의 음성이 여러분의 혼에 가득할 것으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이 아닌 또다른 평안을 갈망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입니다. 혹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우린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며, 선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 평화스럽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삶의 단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아니죠. 왜 악인들이 평안을 누릴까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들의 평안은 어리석음의 소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로, 뭘 숙고하거나 자숙하는 일이 좀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의 상황이나 한치 앞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눈뜬 소경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절벽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바로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도 모르고 또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벽의 맨 가장자리에서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내디디는 순간 그들의 평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을 곧게 하고서, 우리가 아무리 충고를 해 주어도 오히려 그 충고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지금 술잔을 높이 쳐들고 있지만, 그들의 발치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며, 즐겁고 유쾌하게 지내며 시집가고 또 장가가며, 또 취할 때까지 마시고 흥청대지만, 그 옛날처럼 홍수는 어김없이 닥칠 것이고 그날에는 비상구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양심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너무도 많은 일로 가득차 있어 양심의 소리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사업에 열중해서 아침 저녁으로 그것만 생각합니다. 돈을 세고, 주식 시세를 살피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뿐입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 몰두해 있었듯이, 이들은 그들의 사업장과 차고, 그리고 선박과 농장, 그리고 시장 상황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세상에 대해선 전혀 생각이 없는데, 이는 현세의 세상이 그들을 꿀꺽 삼켜 버린 까닭입니다. 이러한 류의 평안은 얼마 안 가서 깨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굳어 있습니다. 즉, 딱딱하고 무감각하며 냉담해진 상태란 말입니다. 전혀 감각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죠. 건강한 양심은 살갗이 벗겨진 피부처럼 예민합니다. 항상 무엇에 닿을 까봐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양심은 굳은살이 코끼리 가죽처럼 덮여 있어서 전혀 감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어떤 죄인들의 양심은 마치 인두로 지져 버린 것처럼, 신경이 모두 죽어 버려서 영원한 저주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탄이 지켜 주는 평안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강한 사람이 무장을 하고 자신의 관저를 지키면 자기의 소유물이 안전하리라』(눅 11:21). 사탄이 그 사람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으면, 그를 어지럽히는 생각은 전혀 틈을 타지 못하고, 그의 죄악된 마음은 늘 만족 가운데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고난에 처하지도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같이 재앙을 당하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시 85: 5). 그들은 평안 가운데 죽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들의 힘은 강건하며』(시 85: 4). 이는 사탄이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을 주어 거짓을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데후 2:11). 그들은 마치 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입 다물고서 조용한 가운데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우울함의 평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이 운명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며 그런 절망이 주는 고요함 가운데 평안을 누립니다. 소름끼치는 평안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혼이란 걸 알아요. 자비를 얻기엔 제 죄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제가 뭐하러 분투하면서 선한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서 단두대 앞에 서 있는 죄수 같이 그는 절망감이 휩싸여 있는 상태입니다. "난 이미 결판이 났어. 모든 끝난 거라구!" 그러나 친구여, 절대 그렇지 않다네. 사탄이 자네를 속이는 거야. 죽기 직전까지는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는 걸세. 아직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면, 이제 오게, 그리고 주님께 영생을 얻으시게. 무심한 마음과 우울, 그리고 완고함은 그들의 가장 큰 적이죠.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물은 종종 소리 없이 다가오는데, 이는 그 물이 너무도 깊고 도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는 영원한 심판을 비웃고 하나님을 무시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도 구원해 주시길!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아닌 다른 모든 평안들에서 어서 빨리 빠져나오십시요.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십시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고 다가올 진노에 떨고 있다면, 그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밖에 없습니다. 사역자들도 그들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저도 종종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려고 노력해 본 일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실패했죠. 책을 많이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우아한 말이 담긴 책이래도 말입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영만이 그에게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의식들, 즉 침례와 주의 만찬, 혹은 기도회나 선교 활동도, 만일 주님의 음성과 동떨어져 행해지고 있는 행사들이라면, 그것들도 다 부질없는 짓에 불과합니다. 저는 여러분들 중에 확신이 없어 헤매고 있는 분이 단 한명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십시요, 헤매는 자들의 눈 앞에 물결치고 있는 노도를! 그리고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 옵니다. 아, 베드로여, 일어나시오! 파도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시오! 요한 일어나시오, 그리고 저 파도에 기름을 부으시오! 그러나 보십시요. 사도들 자신들 마저도 가라앉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보다 더 위대하신 이가 나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아마 영영 가라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키 옆에서 잠들어 계셨던 그분만이 그들에게 화평을 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분은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죄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자들에게 『평안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그대들에게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빌 4:7). 성경을 보십시요. 폭풍이 소동하던 바다는 『아주 조용해』졌습니다(마 8: 27). 속죄의 능력을 알고 느낀 사람들의 혼에 임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고요가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앞서 오직 하나님만이 평안을 말씀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나온 한 마디는 모든 문제를 끝냅니다. 어떤 행위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말씀 하나면 됩니다. 평안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을 만드는 작업은 2000여년 전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우리의 평안의 근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나무에 매달리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던 불화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거기서 다툼을 끝내신 것입니다. 성경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요.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사 53:5).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평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다 이루었도다』(요 19:30). 의와 화평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한 화해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화평은 완성되었고, 그 이후로 이 화평은 오직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면 그 즉시 인간의 마음과 양심 속으로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멸시하지 마십시요. 그분의 음성은 전능한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암흑에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왕의 음성이 있는 곳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즉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시는데, 누가 감히 분란을 일으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죄지은 혼들을 위한 거룩한 평안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지극한 고통과 번민이 있을 지라도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그 즉시로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분의 백성이기만 하다면 주님께서는 조금 늦어지더라도 당신에게 반드시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당신은 그리스도께로 왔고, 또 그분을 신뢰하고 있으나, 지금 바라는 만큼의 평안을 누리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조만간에 그분은 당신에게 평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투쟁과 분투의 시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몇 달 동안이나 전쟁으로 인한 소란이 온 마음을 휘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이나 몹시 지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을 본 적도 있습니다. 야만인들의 해안에 난파한 채로 해도 달도 떠오르지 않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죠. 저는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힘이 빠져 있는데 더더욱 낙담할까 봐 그랬습니다. 그에겐 분명 무슨 잘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빛으로 나아와 사람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는 간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만일 그들 앞에 평안을 예비해 두지 않으셨더라면, 주님은 결코『온전한 사람을 살펴보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그 사람의 마지막은 화평이니라』(시 37:37)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녀를 어두운 침상에 방치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이의 곁에 양초를 켜실 것이고, 그 아이는 마치 죽음과도 같은 달콤한 잠을 이룰 것입니다. 몸의 쇠약함이나 마음의 피로, 그리고 여러 다른 사연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얼마 동안 즐거움을 앗아갈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결국에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낙망 중에 죽어 가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고통의 심연 가운데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팔이 당신 아래에 있음을 아십시요. 그 팔이 당신을 다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슬픈 영을 지닌 채로 어려운 세월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 팔이 당신을 다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슬픈 영을 지닌 채로 어려운 세월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주께서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오! 사로잡힌 딸들이여, 당신의 사슬이 영원하리라고 생각치 마십시요! 소망을 붙드십시오. 밤이 아무리 깊고 어두워도,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빛은 어둠을 물리치러 나아오기 마련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침의 찬란한 빛과도 같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그분의 자녀들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보십시요.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그 평안은 안전하고 건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자녀가 원하는 만큼 평안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가식이 없는 거룩한 것입니다. 이 평안은 얻으면 얻을 수록 당신은 주님과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 평안은 우리의 마음과 지성에 내려앉는 것이며, 단순히 혀와 얼굴에 찾아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모든 상황을 초월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일지라도, 평안이 있으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풍요롭습니다. 당신이 외롭다면 주님은 당신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며, 당신이 몸에 병을 얻는다 해도 주님은 불평없이 고통을 참을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고통스러운 영을 지녔다 할지라도 당신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찾아든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담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안에서 불안해 하느냐?』(시편 42:5).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면, 마귀는 이를 앗아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불어넣으시면, 이 세상 그 어떤 풍조도 당신 속의 평안을 날려보내지 못합니다. 이 평안을 누려본 사람들은 이 평안을 천상의 여명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걷는 순간만큼은 사람은 낙원을 걷는 왕과도 같습니다. 완전한 평안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천상에는 불협화음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 이 세 분이 모두 우리와 화해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도 다툼이 없습니다. 양심은 깨끗하게 되었고, 마음은 안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 속에는 지하의 왕 마귀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이를 갈지만, 우릴 어떻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자연과도 화평을 누립니다. 『이는 네가 들의 돌들과 제휴하게 될 것이며 들의 짐승들이 너희와 화목하게 될 것임이라』(욥 5:2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 깊고 높은, 그리고 넓고도 끝이 없는 평안이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누가 혐의를 씌우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 정죄하리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은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롬 8:33,3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느니라』(롬 5:1). 좋죠? 그리스도인들이여,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평안을 소유하지 못한 삶에 만족하거나 거기에 안주해 있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평안을 간구하십시요. 당신은 그 평안을 얻어야만 합니다. 이 평안은 당신을 왕보다 더 위대하게, 재벌보다 더 부유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인이 복종과 헌신으로 나아갈 때 발에 신는 신발입니다.『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2. 자, 이제 여기서부터는 어떤 것들이 이 놀라운 평안을 방해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평안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누리는 데는 개인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물론 거룩한 유업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항상 유업의 열매를 즐기진 못합니다. 믿음이 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닥치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고난과 싸웠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병으로 인해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병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집어삼키거든요. 때때로 사람의 마음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때문에 쇠약해집니다. 육체의 연약함은 영적인 평안을 쉽게 무너뜨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육체 모두가 무너져 내려도 우리의 마음에 힘을 돋우어 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내적인 갈등도 우리를 평안에서 멀리 떼어놓곤 합니다. 죄와 힘들게 싸우고 있을 때, 예전의 습관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타락한 성품이 너무도 강하게 작용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저도 사실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죠?" 여러분들 대부분은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예, 대답드리죠. 저는 제가 싸우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제가 만약 하나님의 잔가 아니라면 죄를 대항해 고된 싸움을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원수 마귀를 대적해서 죄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가 죄의 종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넘치는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러함에도 역시, 사탄의 공격 아래서 평안을 누리기란 참으로 힘들더군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진저리를 칠 때까지 집적대는 방법을 씁니다. 마귀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우리 머릿속에 주입시키고는, 우리가 그 생각의 창시자라고 몰아붙여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가 주입한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 내 원수야 나를 대적하여 기뻐하지 말라. 내가 쓰러진다 해도 일어날 것이요, 내가 어두움 가운데 앉을지라도 주께서는 내게 빛이 되시리라』(미카 7:8).
주님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때,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타락의 길로 내려가고 있을 때, 우리의 평안은 급격히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찾아가자, 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자!" 그분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다시 찾기까지, 그분의 성실한 자녀들 사이에 다시 들어가기까지 우리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평안을 잃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이키기"때문입니다. 어떤 어리석음이겠습니까?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죄와 잘못, 그리고 신성한 지혜에 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그 어리석음의 다양한 국면들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우선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지도 않고, 그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 버린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루시는 것에 관해 성급하게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적은 없습니까? "이건 무언가 잘못 된 거라구.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순 없는 거야. 무언가 잘못 되었어." 그러나 후일 당신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성급한 판단은 명백한 어리석음의 소치였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은 후에도 연이어 이런 어리석음을 범한다면 당신은 분명 평안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이 무한한 지혜를 당신의 유한한 판단 기준으로 성급히 판단하려 들지 마십시요. 영원한 목적을 시계 속에 갇힌 사고로 판단하려 들지 마십시요. 우리가 재판관이 되어서 주님을 고소하는 순간, 우리의 평안은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길들을 살필 때는 긴 시간을 두고 숙고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영원 속에 거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판단은 영원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원칙들을 알아야 그분의 길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드는 우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작은 어린아이가 되는 순간, 우리는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어리석음이란, 불평과 가장 높으신 분과 다투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창조주와 다투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잔디가 낫과 다투거나, 지푸라기가 화염과 다투는 건 그냥 웃을 일일지는 몰라도,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려 들면 나서서 말려야 됩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이 누구이길래 감히 하나님과 다투려고 듭니까?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롬 9:20). 하나님과 다투려 드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야곱처럼 격심한 타박상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순종의 자세를 취하십시요.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실 것입니다.가시채를 발로 걷어차는 우를 범하지 마시길. 갓 멍에를 메기 시작한 황소는 자신을 모는 몽둥이에 심하게 반항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옆구리에 몽둥이질만 더 불러들일 뿐입니다. 소를 모든 농부를 조금만 두려워했더라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행 9: 5). 하나님과 다투어서 득 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며, 그의 다스림은 영원의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돛단배가 바위를 보고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한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무릎을 꿇으십시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무릎을 꿇는 자세에 있는 것이며, 거만한 자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거만과 교만은 가장 천한 어리석음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빠져드는 어리석음 중에는 의심이나 불신이 있습니다. 평안은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며 믿음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주님을 의심하는 것보다 더한 어리석음은 없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저는 그분을 신뢰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마음 속에는 평안이 강같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리에 누워서도 그러한 평안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본다면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자넨 참으로 힘들게 살아왔는데, 뭐가 그리 행복한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온전한 평안을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의 평안을 온전히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십시요.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의심과 두려움들, 즉 가시채를 걷어차던 옛날로 돌아가지 마십시요. 여러분들 중에는 옛 의심들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개가 믿는 사람일 것이나, 게중에는 의심하는 자도 간혹 섞여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하늘 나라에 관해 설교를 해도 만일 불신의 습관이 있다면 그는 제 말을 귓등으로 받아칠 것입니다. 주님을 의심하고, 그분의 약속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지 않는 자 중에 주님께로부터 무언가를 얻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신실하시며, 스스로를 부인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신뢰하십시요.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의 말씀을 의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이 사악함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채로 너희의 눈 앞에 분명히 제시되었는데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갈 3:1).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온전해지려 하느냐?』(갈 3:3). 자신이나, 자신이 하는 일을 가지고 평안을 얻으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입니다. 자아란 것은 기껏해야 메마른 샘에 불과 합니다. 자신의 헌신이나 성화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자신의 성화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갖다 놓음으로 그리스도의 반대자가 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요. 그분은『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번도 사람에게 사람 자신의 의를 신뢰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얼마만한 거룩함에 이르렀건 간에, 심지어 거의 완벽한 수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욥의 현명한 말에 귀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온전하다 할지라도 내가 나의 혼을 알지 못하리니...』(욥 9:21). 우리의 지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 위에 있습니다. 그 지반을 떠나면, 당신은 얼음 위에 올라서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바닥이 녹아내리지 않더라도, 쫄딱 미끄러질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에 어떤 행위를 섞으려 든다면, 당신은 다시 어리석은 길로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예전에 당신에게 큰 멍에가 되었던 것처럼, 돌이키는 순간 다시 당신을 짓누르고 억압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오직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십시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키지 마십시요. 오직 주님께 기대를 두는 그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는 평안이 강물처럼 흘러 넘칠 것입니다.
지적인 공론에 빠져드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들 중 몇몇은, 한때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공중을 나는 한 마리 새처럼 행복한 삶을 살다가, 사악한 책을 몇 권 접하고 나서는 지난날에는 생각치도 못한 난관에 빠져들어 그들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닥친 난관들에 대해 일일이 답변을 해 주었을 것 같습니까? 제가 그들이 했던 것처럼 그 책을 읽고 그들과 똑같은 질문을 눈 앞에 고정시켜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또 다른 책을 읽고 또 다른 의심만 가득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설사 그 모든 질문을 해결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해적들이 그들의 마음의 해안으로 달려왔을 것입니다. 해치우고 또 해치워도 끝이 없는 무리들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눈앞의 모기들을 모조리 잡아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뭐하러 합니까? 수십 마리를 잡아 해치워 본들, 놈들은 다시 몰려올 텐데. 그냥 모기향으로 쫓아 버리거나 모기장에 들어가 자는 게 제일 좋습니다. 지적인 난관이란 것도 이와 같습니다. 몇 가지 해결했더라도, 더 지독한 놈들이 소제된 빈 방으로 기어들어오기 마련입니다. 저는 애매 모호한 말을 하며 살며시 다가서는 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새로 나온 책 읽어 보셨어요? 충격 그 자체예요." 그러나 전 그 책이 제 마음을 까딱도 하지 못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저는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말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내용일 지라도 저는 약간의 호기심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믿어 왔고, 또 지금 믿고 있는 분을 잘 압니다.' 저는 성령께서 무오한 말씀을 통하여 제게 가르치신 것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저는 의심하는 자들이 써 놓은 책을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유해한 독약들을 충분히 맛보았고, 이제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묻습니다. "책은 뭐든지 다 읽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저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해 줍니다. 저녁 성찬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식탁 위에 상한 음식이 올라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 저는 거기에 절대 손을 대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프로 건드려 보면 악취가 풍길 것이 분명하므로, 저는 그 음식을 절대로 제 접시에 옮겨 담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 동안 먹어온 달콤한 복음의 성찬이 내 앞에 놓여 있는데, 제가 무엇하러 개먹이로나 적당할 상한 음식에 손을 대겠습니까? 성경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욕되게 하는 책은 불쏘시개로나 쓰는 게 적당합니다. 읽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들 중에는 과거에 '현대 사상'에 취해 비틀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리로 돌이키지 마십시요. 성경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요. 성경을 너무 많이 읽어서 더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면, 다른 책을 읽는다고 해도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께서 쓰신 성경을 손에서 놓는 일을 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매일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모든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돌이켜 무오한 책을 대적하고 완전한 책을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돌이키는 어리석음에서 자신을 지키는 자들에게 평안을 지속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리석음이란 뭐니뭐니 해도 죄입니다. 성경은 거듭거듭 죄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실로 그들은 그렇습니다. 『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시 85:8).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눈앞에 푹퐁우가 울부짖고 있지는 안습니까? 그리하여 마음의 안정이 없이 너무도 황망한 상황은 아닙니까? 그럼 제게 잠깐만 귀를 빌려 주십시요. 누군가가 아무 까닭도 없이 당신을 이 폭풍우 속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렇죠? 폭풍우를 일으킨 원흉은 누구겠습니까? 그는 배에 타고 있는 정상적인 선원이 아닙니다. 그는 선장이나 항해사가 아닙니다. 그는 한낱 나그네입니다. 배 밑층에 내려가 보십시요. 거기엔 요나란 자가 자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혹시 폭풍의 원인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예요. 배삯을 냈는 걸요." 아닙니다. 그가 바로 재앙의 원인입니다. 어서 요나를 배 밖으로 내 던지십시요. 그러기 전에는 폭풍우는 절대 멎지 않습니다. 그를 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바다가 다시 잠잠해 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는 죄들을 숨기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실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은 반역자를 숨겨둔 그들을 향해 싸우십니다. 요압이 비크리의 아들 시바를 쫓고 있던 당시, 시바는 아벨에 있는 성읍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요압은 그 성읍을 포위합니다. 그러자 한 지혜로운 여인이 백성을 위해 요압에게 탄원합니다. 요압은 그녀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해명하기를, 자신은 성읍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반역자를 쫓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자만 넘겨주면 내가 성읍에서 떠나가리라』(삼하 20:21). 그러자 사람들은 시바의 머리를 잘라 요압에게 던져 줍니다. 그리고 요압은 나팔을 불고 군사들은 성읍에사 물러나와 각자 자기들의 장막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시험과 곤고함으로 당신을 포위하시고, 그분의 군대를 당신의 성벽을 대항해 배치시키실 때는 당신에게 평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반역자, 즉 죄를 처단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반역자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의 머리는 반드시 성벽 너머로 던져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전사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아칸을 지목하고, 그를 고소한 후, 돌을 들어 그를 내리쳐야 합니다. 살피고 또 살피십시요! 숨어 있는 원수를 철저하게 수색하여 찾아내십시요!『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 너에게 무슨 비밀스러운 것이 있느냐?』(욥 15: 11). 하나님은 이 아침에 우리의 성스러운 수색 작업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침입자를 찾으면 그를 철저하게 부셔버리십시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 누구도 어리석은 데로 돌이키지 맙시다. 우리가 한 번 하나님의 평안을 맛보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어 보았는데, 왜 땅에 속한 즐거움을 찾아나서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무안하신 사랑의 향연을 맛보았는데, 뭣하러 다시금 죄의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전에 죄악들이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슬픔들을 상기해 보십시요. 그 독사를 두번 다시 가슴에 품지 맙시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비통해 했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습니까? 다시 그리로 돌이켜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어리석음이 어떤 결과를 낳았으며, 주께서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기 위해 얼마만한 댓가를 지루셨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십시요. 그분은 우리를 어리석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가벼운 일입니까? 숙고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천상의 길을 따라 가십시요. 우리가 왜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에서 돌이켜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보십시요. 그 길의 끝에는 황금의 거리와 마르지 않는 강들, 그리고 영생의 열매를 맺는 나무와 끊임없이 노래하는 하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어리석은 데로 돌이키지 말아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거룩한 길에서 지켜주소서! 주님의 평안을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가득 부어주시고, 그 평안을 지켜주시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평안은 능히 우리를 어리석은 데로 돌이키는 것에서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어리석음들을 물리칠 힘을 줍니다. 형제들이여, 마음에는 주님의 온전한 평안을 지니고, 얼굴은 부싯돌 같이 해서, 끝없는 화평이 있는 저 항구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갑시다.
주여, 우리를 이 길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아멘.
제 목 그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 로버트 머리 맥채인
그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로버트 머리 맥채인(Robert Murray McCheyne)
『그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지내려고 미리 왔느니라』(막 14:8).
요한복음 11:2을 읽어보면 이 여인이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인 마리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고』있던 그 여인이었고(눅 10: 39), 주님께서 그녀에게 직접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42). 그런데 이 마리아가 다시 다른 면에서 훌륭한 인물로 부각됩니다. 묵상하는 믿음의 본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의 본으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자로서의 기쁨과 믿음의 경험들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나무에 비유한다면 꽃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순리에 따라 꽃이 지고 나면 반드시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가지를 접붙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수액을 공급받는 것도 역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눈에 보이는 열매입니다. 믿음도 좋고, 기쁨도 좋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의 궁극적인 열매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여러분들 중 대다수는 지난 주일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처럼, 열심히 설교를 경청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마리아처럼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하십시요. 여러분이 만약 값을 치르고 산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분의 것인 여러분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요.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여러분께 간구합니다.
Ⅰ. 다음의 것들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그분께 더 많은 기도와 찬미를 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그리스도께 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와 그녀의 오빠, 그리고 그녀의 자매의 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께 그 어떤 일을 해드린다 해도 부족할 뿐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값진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던 가난한 자들도 사랑했고, 그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곧 가시관이 씌어질 그분의 복된 머리에, 또 곧 못이 박히게 될 그분의 복된 발등에, 그녀는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최고의 사랑을 그분께 부어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과 사역자들을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의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최상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복된 머리와 거룩한 발에 향유를 부어드릴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발치에 엎드려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부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가까이 오셨을 때, 그녀가 든 향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 영광의 왕께 그 하찮은 기름 따위가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주님이 관심을 기울이신 것은 그분의 발치에 쏟아 놓은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경배와 존경, 사랑,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새로운 마음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옥합입니다.
2. 우리는 좀 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솔로몬의 노래에 묘사된 것과 같습니다. 『연기 기둥과도 같이, 몰약과 유향과 상인들의 모든 향유로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솔 3:6). 믿는 자들의 거룩함은 가장 값비싼 향수입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지나가면, 그곳은 향기로 가득차기 마련입니다. 만약 세상에 믿는 자들로 가득 차게 된다면, 세상은 향수 침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의 향기를 옮기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극소수에 불과한지! 만일 우리가 늘 거룩하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 앞에 우리의 몸을 희생제로 확고히 드린다면, 우리는 분명 훌륭한 구원의 도구들이 될 것입니다! 아내들이 말없는 가운데 그러한 삶을 산다면 많은 남편들이 두려움 가운데 그들의 정숙한 행실을 보고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벧전 3:1-2). 아이들은 많은 경우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종들이여, 모든 것에 있어서 당신의 구주 하나님의 교리를 존중하십시요. 그리하여 당신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도록 하십시요.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들에게 그러할 수 있으며, 젊은이들 또한 나이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러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 앞에는 어떠한 논쟁도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3.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값주고 사신 바 된 사람이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또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거기로 가야 할 처지임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지옥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루 온종일 두 팔을 벌리고서 죄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 이외에는 구원할 수 있는 죄인이 없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습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구요? 혹시 기도만 하고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기도는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도만 늘어놓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노를 발하실 것이니 두려워 하십시요. 별로 배우질 못해서 언변이 어눌하다구요? 그런 변명이 심판석에서도 통할 것 같습니까? 얼마나 배워야 죄인들에게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고 충고해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이 배워야, 불이 난 집에 들어서 그 속에 잠든 사람을 깨워 그들에게 임한 위기를 알려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집안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진 않습니까? 아이들이, 또는 하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구요? 당신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진리를 알려주고, 사역자들 앞으로 데려가고 기도회에 데려와 죄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기도를 시켰습니까?
이웃들은 어떻습니까? 몇 년 동안이나 이웃해 살면서 대문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들에게 경고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 데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들에게 적당한 소책자가 전단지 같은 것들을 충분히 활용해 보았습니까? 주일마다 놀러 다니기 바쁜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간절히 설득해 본 일이 있습니까? 주일 학교를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어린 아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설명해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 일은 없습니까?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까?
4. 가난한 형제들을 배려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형제들이요 자매들입니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까? 위대한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우편에 앉은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도다』(마 25: 34-35).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향유와 사마리아 여인의 마실 물 외에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으신 상태에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병들었고, 어떤 이들은 다리를 절며, 또 개중에는 나사로처럼 온 몸이 쓰라린 상처로 뒤덮힌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께 하듯이 그들에게도 무언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헛된 것들을 축척하고 값비싼 옷들이나 사 모으면서 가난한 형제들의 헐벗음은 방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끼고 모으기에만 급급해 있는 것은 아닙니까?
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하는 이유들
1.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포도원에 행했던 것 외에 무엇을 더 했어야 하느냐?』(사 5:4).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보여준 사람은 없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시작해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끝맺으신 그분의 생애 동안,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역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무안한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그분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종해야 하는데, 그분이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 고된 일들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협력하여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참으로 놀랍게도,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모두 우리에게 각각 무언가가 되어주십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아들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라고 하시고, 성령께서는 "내가 네 속에 거하며, 네 속에서 일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이만하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분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사탄이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는 우리에게 사자처럼 다가옵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벧전 5:8). 그는 때로 뱀처럼 간교하게 접근하기도 합니다.『뱀이 간계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고후 11:3). 또 그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합니다(고후 11:14). 그는 최선을 다해 성도들을 유혹하고 속여서 잘못된 선생들에게로 이끌어 가려 하며, 부패한 사고들을 그들의 마음 속에 가만히 집어넣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을 선동해 성도들을 박해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아들을 대적하도록 만들고 형제간의 불화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동원해 자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인도해 갑니다.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며, 더러운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게 하고, 절망으로 치닫게 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될 때, 더더욱 길길이 날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사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우리는 한 때 다른 데서 최선을 다한 전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게 능력 주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하노니, 이는 그분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박해하는 자요, 중상하는 자였으나』(딤전 1:12). 이러한 과거는 바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가장 위대한 동기였습니다. 바울은 한때 자신이 하나님을 박해하고 황폐화시킨 자였음을 결코 잊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큰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때 파괴시켰던 믿음을 전파했습니다. 과거를 잊지 못하기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그가 육체 안에서 자기의 남은 때를 더이상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 함이라. 우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혐오스런 우상 숭배를 행하여 이방인들의 뜻을 행한 것은 지난 날의 생활로 충분하도다』(벧전 4:2-3). 존 뉴튼('난 같은 죄인 살리신'을 쓴 목사)도 그와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한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였으니, 지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도 한때는 탐욕스럽게 죄를 따라가던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를 위해 엄청난 고통과 댓가를 치루며 살아갔습니다. 죄악스런 만족을 얻기 위해 당신은 건강과 돈, 그리고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리스도께는 그리도 인색하십니까? 한때 마귀를 섬겼던 그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겨 보십시요.
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행위는 바로 믿음의 행위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따른 말이 아니라, 믿음의 말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찌르십니다. 한 작은 계집 종의 말이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의 집에 복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나를 따라오라』(마 9:9)하신 한 마디는 마태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가 꽂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모두 그와 같습니다.
당신이 만약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면 당신이 사는 동네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찰 것이며, 주님은 이를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사랑으로 행한 일을 옹호하셨고, 거기다 그녀의 이야기가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심판석에서 또다시 언급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잔의 냉수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마 25:21).
5. 행함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아보는 것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없이 지키는 것이라』(약 1:27). 그리스도인을 그저 특별한 관점들과 신념들, 그리고 영적인 기쁨들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입니다. 물론 그 세 가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헌신된 삶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면, 글쎄요, 그저 망상에 불과한 것들은 아닌지 두렵군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Ⅲ. 머뭇거리는 자들의 질문에 답하여
1. "세상이 우리를 조롱할 텐데요."
예. 사실입니다. 그들은 마리아도 조롱했으니까요. 사람들은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사치요 낭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이 만약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면 세상은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으로 인해 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열심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미쳤고 마귀들렸다고 했습니다(요 10:20). 세상은 바울도 조롱했습니다. 그가 입을 열 때 그를 향해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라』(벧전 4:13).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딤전 2:12).
2. "저는 여자라서……."
마리아도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여자였지만, 그녀는 제일 먼저 주님의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성도들의 후원자가 된 페베도 여자였습니다(롬 16:1). 로드카 또한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욥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겉옷과 속옷을 지어주었습니다(행9장).
3. "저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온전케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아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부모들을 회심시키십니다.
4. "선한 일을 하기엔 받은 은혜가 얼마 안되서……."
『관대한 자는 풍족하게 되리니, 물을 주는 자는 자기 자신도 물을 받게 되리라』(잠 11:25).
『이는 모든 충만함이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음이며』(골 1:19).
성령께서 당신에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넉넉히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자각하고 거듭나지 않았습니까? 타인들에게 입을 열 기회를 잘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은혜를 충분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넉넉히 준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주머니가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실 수 있나니 모든 것을 언제나 너희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후 9:8).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와 내 집에 식량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의 창문들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부어 주지 않나 보라』(말 3:10).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산물의 첫 열매로 주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 차고 네 포도즙틀에서는 새 포도주가 넘치리라』(잠 3:9-10).
제 목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눅 17:32) - 라일(J.C. Ryle)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성경에서 이보다 더 엄중한 경고는 아마 몇 안 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의인"이었습니다(벧후 2:8). 소돔이 파괴되던 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그 도시를 떠났는데, 남편의 뒤를 따라가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뒤돌아 도시를 쳐다보는 바람에 그녀는 그만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여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지목하여 교회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이 말씀을 할 당시의 예수님의 의중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엄숙한 경고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혹은 사라나 한나, 또는 룻을 기억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된 한 혼을 지목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부르짖고 계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이 경고를 준 분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헤아려 보면, 이 경고는 참으로 엄숙한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동정으로 가득차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믿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그러한 분께서 엄숙하게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그분이 말씀하신 양식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엄숙한 경고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롯의 아내가 행한 대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든가, "그녀를 닮지 않도록 주의하라."라든지, 혹은 "롯의 아내처럼 되지 말아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색다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기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일을 잊어버리고 살 위험이 많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미욱한 기억력에 경각심을 심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롯의 아내의 경우를 마음에 깊이 새기라고 명령하십니다. 실로, 주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저는 지금 롯의 아내가 누렸던 특권들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날들에는 진정한 구원의 신앙을 접하기가 어렵던 시절입니다. 성경도 없었고, 사역자는 물론이고 교회나 소책자들, 그리고 선교사들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몇몇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한정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암과 무지, 미신, 그리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수백만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롯의 아내는 수백만 중의 한 명 꼴로 누릴 수 있을까 말까 한 특권들, 즉, 영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명확한 지식들을 얻었고, 명징한 경고까지 받았으니, 그녀는 참으로 사랑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가까운 친척인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녀는 이 두 의인의 믿음과 지식, 그리고 기도 제목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들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천막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과 그들이 섬기고 있는 분에 관한 지식이 하나도 없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앙은 그들 생을 다스리는 법칙이었고, 모든 행위의 주요한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이 모든 것을 보았고, 또 알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결코 가벼이 생각할 특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최초의 언약들을 받을 때, 롯의 아내도 그 자리에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아이와 벧엘 사이에 자신의 장막을 칠 때도 역시, 그녀는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소돔에 와서 그녀의 남편에게 달아나라고 경고할 그때도, 그녀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도시를 빠져나갈 때, 그녀는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이러한 사항들은 결코 사소한 특권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롯의 아내는 이러한 특권들로부터 아무런 선한 영향력도 얻지 못했습니다. 은혜로 주어진 그 수많은 기회들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특별한 메시지와 경고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타락한 상태로, 불경건하고 완고하며 믿음에 순종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다 그 모습 그대로 죽어 갔습니다. 그녀의 명철의 눈은 단 한 번도 뜨인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양심은 단 한번도 진리를 자각하거나 그 안에서 소생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신앙이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면극을 한 것이었을 뿐, 그녀는 신앙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롯의 집안 사람들처럼 행했습니다. 그녀와 남편의 생활 방식에 순응했으며, 그것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수동적으로 남편이 걷는 길을 따라 걸으며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을 뿐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늘 그릇된 상태였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세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녀의 관심은 오직 세상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마음 상태로 살아가다가, 그 모양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녀의 경우를 통해 오늘날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롯의 아내들로 가득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의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경우를 통해, 누군가가 신앙적 특권들을 많이 누리고 있다고 해서 그 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면에서 영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은혜로 주어지는 풍성한 기회들을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제공받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가장 좋은 설교를 듣고, 최상의 성경 공부를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거룩하고 성경 지식이 풍부한데다가 지극히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회개하지 않을 채로 살아가다가 끝내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제가 하는 말을 좀체 납득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신앙적 특권들만 풍성하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즉 그들이 인정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힘든 위치에서 많은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경건한 남편이나 아내를 주어 보십시요. 그들에게 훌륭한 복음 설교자를 주어 보십시요. 그 외에도 가능한 한 모든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까요? 아닙니다.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착각한 것입니다. 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특권이 필요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 대장이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이었습니다. 디도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롯은 의인이었지만, 세상에만 정신이 팔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내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올바른 지식과 엄중한 경고와 수많은 특권을 향유했지만, 바른 길을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한 가지는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적 특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옳지만, 전적으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 특권들을 통해 우리 삶 전반이 유익을 얻도록 간구해야겠지만, 그 특권들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려 놓아선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특권들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만,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살펴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 특권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시에는, 오히려 그들은 온전히 해악이 될 뿐입니다. 도리어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부담만 가중시키고, 상태만 더 악화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은 초를 녹게도 하지만, 진흙을 굳어지게도 만듭니다. 태양은 살아 있는 나무를 자라게 하지만, 죽은 나무를 불태우기 딱 좋게 말리기도 합니다. 거룩한 것들에 익숙한 사람의 마음만큼 단단한 것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특권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훌륭한 사역자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특히 제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훌륭한 사역자들이 시무하는 교회에 가 보십시요. 당신은 그들이 정말 대단한 설교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는 너무도 좋아할 테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과 같은 즐거움을 느낍니다. 당신은 그 교회에 참석한 뒤부터 실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은 또 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특권을 향유하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좋습니다. 물론 그것은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사역자들이 백배 천배로 늘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결국은 그 문제입니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롯의 아내와 같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부모를 둔 어린아이들은 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경건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모로 두고 그들의 신실한 기도 가운데 자라나는 것은 아이에게 참으로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복음을 듣고, 죄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성령과 거룩함, 또는 하늘에 관해 배우는 것은아주 복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주목하십시요. 당신은 혹시 이러한 혜택 가운데서도 여전히 아무런 열매 없이 황량한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마음을 완고하고 완악하며 세상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마십시요. 부모님이 믿었다고 해서 자식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당신의 당신 자신의 회개를, 당신 자신의 믿음을, 그리고 당신 자신의 거룩케 함을 경험하고 소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롯의 아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오늘날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슴 깊이 숙고해 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특권들을 많이 누린다고 해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시와 지식, 그리고 신실한 설교, 은혜로 말미암은 수많은 일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큰 축복이자 유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가 부족하다면, 여러분, 그 특권들은 모두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롯의 아내도 많은 특권들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녀는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제 목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 A. W. 토져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이사야 53:5).
요즈음 들어 세상에서는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비밀스런 음모 하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심판이 실재,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구주의 십자가에 관련된 음모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에 회부해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관한 역사적 책임을 거두어 줌으로써 그 마음에 평화를 주려는 운동이 드러내 놓고 아주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형제애 관용의 미명 아래 쏟아져나오는 여러 현대적인 선언들과 원칙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상처를 입으시고, 모욕을 당하였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짐지워진 기본적인 책임이며, 인간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려 드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유다나 빌라도만 비난하려 들지 마십시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돈을 받고 그분을 팔아 넘겼지!"같은 비난이나 하고 있으려 하지 마십시요.
빌라도만 탓하고 있지도 마십시요. 빌라도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가 없음을 선언해 놓고도, 그의 무죄함을 끝까지 수호해 줄 만한 배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유대인만 비난하고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로마만 비난하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몰론 그들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공범입니다. 그들의 손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오로지 그들만이 그 엄청난 범죄의 범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만연해 있는 죄악과, 사람들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분노도 그분을 거기에 있게 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고의적인 속임수와 세금을 속여 내는 부정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당신의 부정직함 역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요인입니다. 죄악, 증오, 의심, 질투, 거짓말, 음욕, 육욕에의 탐닉 등, 이 모든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그분을 십자가로 내몬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모두 그분을 십자가로 내 몬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남자와 여자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래, 나 역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든 사람 중의 하나지!" 하는 내적인 자각으로 인한 부끄러움이나 고통도 없는 상태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연인들은 너무도 사소한 일에 집중하는 나머지, 생과 존재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일을 간과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십시요.
남자와 여자를 불문하고, 어느때 어느 장소에서든지 늘상 최근의 패션 경향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플라톤이나 철학 사조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양한 폭을 오가며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들은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토론을 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교회가 어떻게 공산주의 대항해 든든한 보루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토론도 합니다. 그들이 꺼내는 화재 중에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가 꼭 논의되어야 하고, 저마다 숙고해 보아야 하는, 우리 혼에 관련된 너무도 중요한 영적인 주제들을 화재에 올리면, 순식간에 모든 대화는 뚝 끊기고 사람들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소위 교양있다는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앙에 관련된 주제를 화재에 올릴 시에는 그저 학설의 범주에서 논하고 말지 개인적으로 적용시키는 차원으로는 나아가지 말라야 한다는 묵계가 정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실로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하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는 두 가지의 끔찍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허물과 죄악입니다.
허물은 정당한 권위에 반역을 해서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전 우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존재는 타락한 천사와 인간밖에 없으며, 인간은 아직까지도 악명 높은 반역자로 살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영어에는 허물과 죄악이라는 단어에 담긴 끔찍한 뜻을, 그 엄청난 무게를 온전히 옮겨 전달할 만한 적당한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와 그분의 창조 질서에 대항한 인간의 범죄와 타락 속에서, 왜곡과 뒤틀림, 추함과 비뚤어짐, 그리고 반역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죄악'은 결코 좋은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말을 혐오스러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결과는 결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너무도 분명하게 구주께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모두들 "저는 아닙니다!"하고 부정할 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모든 인간의 손가락에 있는 지문이 우리를 거스르는 명백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경찰들은 범인을 잡을 때, 식탁과 문 손잡이에 남겨진 지문을 보고서 거기에 침입했던 강도가 누구인가를 찾아냅니다. 인간의 지문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어두운 지하실과 으쓱한 골목길, 그리고 어둑어둑한 악의 장소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 지문으로 모든 인간을 하나하나 식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죄악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당신의 도덕적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은 바로 당신과 관련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하여 그분이 상처를 입고, 상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상했다는 말 속에는 모독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찢기셨으며 더러운 것들로 얼룩졌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악한 자들의 손에 내맡기셨습니다. 그분은 수치와 모독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수염을 뽑고 그분의 몸을 피로 얼룩지게 했으며, 흙과 먼지로 더러워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느 누구도 비난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찢기고 상하셨던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상하신 분을 예루살렘의 언덕으로 끌고 가 거기서 형벌을 받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크나큰 오판이며 실책이 아닐 수 없으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짐진 무거운 짐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오판을 미리 내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 당한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사 53:4-5).
그분은 우리 때문에 모독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고, 무지하고 가치없는 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사 53:5).
이 화평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기 위한 징계가 그분에게 내려졌습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화평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아닌 그분에게 징계가 내려진 것입니다. 비난과 징벌, 그리고 혹독한 벌칙이 이 징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분은 로마의 법령 아래서 공적인 장소에서 매를 맞고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분에게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채찍을 맞고 형벌을 받았습니다. 상하고 피흘린 그 한 사람은, 세상과 인간의 마음에 있는 화평의 갈구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을 위해 매질을 당하신 것입니다.
저는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가운데 성인을 공적인 자리에 데려다 놓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질하고 채찍질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범법자들은 감옥에 다녀온 후 사람들 앞에서 영웅 행세를 하곤 합니다. 많은 범법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이 매겨지지만, 어떻게 벌금형을 빠져나와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악한이, 비웃고 조롱하는 대중 앞에 끌려나가 윗통을 벗은 채로 소리나게 채찍질을 당한다면, 그는 단단히 체면을 잃을 것이 분명하고, 그리하여 어디 가서 그일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전처럼 간이 배 밖에 나와서 설쳐대지도 못할 것입니다. 채찍질이나 매질은 사람에게 굴욕감을 심어 줍니다. 사실 등 위에 내리쳐지는 채찍보다 그 굴욕감이 더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상처를 입으시고 징계를 받은 것에 비한다면, 저를 포함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할 때 느꼈던 비참함은 그야말로 중병 앞의 생채기 정도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을 대항한 반역이 너무도 극악 무도한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자기 스스로에게 심한 혐오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께 형벌을 감면해 달라는 얘길 꺼내지도 못할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짐지워진 고난으로 말미암아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은 강도에게나 응당할 모욕과 수치를 감당하셨으며, 자신이 범하지도 않은 죄로 말미암아 채찍을 맞아 상처를 입고 찢기셨으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반역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분은 인간들 사이에 만연한 죄악의 물결로 인한 창조주이신 사랑의 하나님의 분노를 우리를 대신해 받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대속의 장면을 이런 아름다운 소식으로 마무리합니다.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사 53:5).
'채찍질' 당했다는 말은 그리 유쾌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온 몸이 한 개의 타박상으로 인한 증상인 것처럼 온통 검푸르게 멍들 때까지 상처를 입고 상한다는 뜻입니다. 인류는 지금껏 이러한 육체적 손상을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사회는 늘 잘못을 행한 사람을 징벌할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형벌은 범죄의 속성상 응당한 것입니다. 형벌이란 사회가 규칙을 무시한 개인에게 내리는 사회적 복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은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통은 자신 때문에, 혹은 자신이 하신 일 때문에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치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기꺼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고통은 고통에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고통으로 시작해서 치유로 끝이난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십자가의 위대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던 계셨던 희생의 위대함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과 평화롭고 영화롭게 교제를 나누게 하는 속죄의 위대함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고통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정결케 됨으로 끝이 났으며, 이것은 그분의 상하심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씻김으로 끝이 났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저는 회개의 요지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향해 품고 있던 반역적인 태도를 뉘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저는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 뉘우침을 번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가 씻겨짐과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일시적인 마음과 영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동반되는 그 고통스럽고 격렬한 죄의 자각은 평안과 죄를 용서받은 데서 오는 기쁨을 조금은 감소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어린양을 징계하고 그분에게 상처를 입히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며, 그는 이로 말미암아 충격에 휩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상처로 말미암아, 그분에게 상처를 입힌 바로 그자들과 자신의 죄가 씻겨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을 놀라움은, 그의 마음 속에 내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주의적 교회의 회원들에게는 거룩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감동은 마음에 영적인 순전함을 갈구하게 합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시대를 살았던 요한 웨슬리를 보면 잘 알 수 있고, 또 배울 수 있는 사실입니다.
『거룩함』이란 그 아름다운 말이 교회에 다시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저는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그 단어의 의미 그대로 교회가 다시 거룩해 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가지기를 바라고 소망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굴욕과 모욕 그리고 숱한 매질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상하시고 상처를 입으시고, 매질을 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깨끗케 하고 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순전해지고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여지길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그분의 고통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깨끗케 됨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피가 배어나는 찢긴 상처로 시작되어서 그분의 백성들의 화평과 평안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끝이 났습니다.
겸손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이라면 모두 이 경건의 신비를 항상 놀라워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 서셨고 또한 형벌을 받으였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사실을 듣고 별로 놀랍지 않다면, 당신은 무언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언급했듯이, 바울은 지금껏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거룩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살아 있을 동안 자신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이것을 상기시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옛죄들을 붙들고서 자신을 대적하시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계산이 이미 끝이 났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마음은 언제나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라워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난 정말이지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인데, 그럼에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사역에 부름을 받은거야. 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야."
제가 바울의 확신과 기쁨, 그리고 믿음에 대해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만일에 의롭게 된 사람에게서 참회하는 마음이 사그라져 있다면, 그는 타락하고 있는 중이란 이야길 하기 위해서 입니다.
찰스 피니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때때로 자신의 마음이 차가워 졌다는 고백을 하곤 했습니다.
그는 결코 구구한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에 보면, 그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서 금식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서 자신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했다고 합니다.
"나는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길 간구했다."라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얼마나 훌륭한 본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즉 그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을 기쁘게 섬기려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상처를 입으심으로 우리가 깨끗해 졌으며,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하나님의 화평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있을 때만이 우리는 올바른 영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상태에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깨끗케 하심으로 얻은 정결을 유지할 수 있고, 악이나 잘못된 행동을 변명하려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하시고 찢기신 그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의 마음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구속의 신비입니까? 상처를 입으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백만의 사람들이 치유를 얻었고, 한 분이 매질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았어야 할 상처와 고통을 그분이 받으셨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년전, 장로교파에 속한 일단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모든 인간을 위한 속죄제물로 내놓으셨다는 사실에 경도되어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신중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며, 하나님께 마음를 기울이면서 그분의 얼굴을 찾읍시다. 그리고 나서 준비된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합시다. 주의 만찬이 그저 흔해빠진 일상의 행사가 되지 않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겸손하고 마음이 순전하며 그분의 능력과 은혜 그리고 영생을 온 마음으로 믿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식물학자들은 사막에 자생하는 아카시아 덤불에 대해 모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설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덤불에서 타오르는 신성한 불 속에서 하나님이 무언가 말씀을 해 주시길 간절히 기다리는 겸손한 혼을 찾고 계십니다.
연구실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빵이나 포도주의 구성 성분, 혹은 특성에 대해 성경의 그 어느 사도들보다 더 훌륭한 설명을 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험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빛과 열심을 잃어버리고는, 그저 빵과 포도주만을 손에 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불은 덤불에서 떠나버리고 우리의 모임과 교제 속에는 그분의 영광이 소멸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사나 과학적 사실에 해박해 지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신,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제 목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 J. C. 라일
이것은 인간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전 교회 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거듭났을 거예요."하는 정도의 대답으론 충분치 못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제시한거듭남의 표적이나 증거 없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표적이나 증거나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여기를 주목하십시요. 지금부터 요한일서에서 그것에 관해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Ⅰ.『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거듭난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죄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온 의지를 다 쏟아부어 거기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도 한때는, 자신의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 따져본다거나, 악한 일에 탄식하는 법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그때는 그와 죄 사이에는 다툼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둘은 사이 좋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는 죄를미워하고,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며, 대항해 싸우기도 하고, 죄가 불러올 재앙을 숙고해 보고, 자기와 관련해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한 중압감을 느끼며, 죄로 말미암아 실족할 때면 스스로에게 탄식을 마지않고, 모든 죄악들로부터 구출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는 그에게 더이상 기쁨이 아니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는 그에게 지긋지긋한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죄가 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가 그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요일 1:8).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죄를 싫어하며, 자신의 혼이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는 것을 큰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로 나쁜 생각이 일어나고, 많은 결점들이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때때로 말이나 행동 속에 연약하고 미흡한 면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는 야고보가 『우리 모두는 많은 일에 실수하나니』(약 3:2)라고 한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점 거짓이 없는 말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추악한 부분이 매일 자신에게 슬픔과 탄식이 되며, 온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혐오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Ⅱ.『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요일 5:1).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시며, 그분만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그분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선택받은 거룩한 분이심을 믿으며, 그분 외에는 구주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신뢰할 기반을 찾고, 또한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의 죄들이 모두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았음을 믿고 있으며, 앞으로 닥칠 죽음과 심판 앞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의심과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때때로 당신에게 "나에겐 믿음이 전혀 없는 거 같아요."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렇게 한번 물어보십시요. "당신 자신의 선함과, 나아지려는 노력들, 그리고 당신이 한 기도와 사역들, 혹은 당신의 교회에 당신의 영원에 대한 소망을 두고 안정을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그만두고 당신의 신뢰를 다른 것에 두어보는 게 어떻습니까?"라고도 물어보십시요. 그러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 자신이 연약하고 악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전 그리스도를 저버릴 순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귀한 것들을 발견했고, 그분만이 내 혼의 안식처입니다. 그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저의 신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징표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Ⅲ.『의를 행하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서 난 것을 아느니라』(요일 2:29).
혹자가 거듭났다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분투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피해 가려고 애씁니다. 그의 삶의 목적과 열정은 온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구주이자 삶의 본이십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명한 대로 살아감으로 자신이 그분의 친구임을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누구보다 바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 속에 내제하는 사악함이 자신을 붙들고 늘어질 때마다 몹시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는 자신 속에 죄의 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여,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 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 법의 존재를 없애지는 못할 지라도 말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의 경향을 따져 보고 평가를 하자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의 행동은 거룩하고, 마음의 성향 또한 거룩하며, 습관들 역시 거룩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꾸만 삐끗하고, 가끔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는 배처럼, 그의 삶이 향하여 나아가는 큰 푯대는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실족하기도 하고,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존 뉴턴이 했던 고백을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되고자 소망하는 하는 그 사람이 아니며,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소망하고 있는 다른 세상에서 될 그 사람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Ⅳ.『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요일 3:14).
거듭난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그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구주처럼, 그도 역시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연민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과는 또다른 특별한 애정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편안한 느낌을 느낍니다. 또한 그는, 성도들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 더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은 학식이나 지력, 혹은 부의 축적 정도나 사회적 지위로 친구를 고를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온혜입니다. 큰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우리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런 이들을 한 가족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동일한 적을 대항해 싸우는 동료 군사로 생각하고 전우애를 느낍니다. 또한 그들을 같은 길을 걸어가는 길벗으로 생각하고 동료애를 느낍니다. 그는 그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 또한 그에 관하여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사이에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 혹은 부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거듭난 자의 징표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Ⅴ.『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요일 5:4).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의견을 들고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길과 생각들, 그리고 풍조들을 거스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하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사고나 행동을 전환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사랑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의 즐거움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를 피곤하게 할뿐입니다. 그의 눈에는 그저 헛되고, 무익하며, 하찮기 짝이 없는 것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영원한 것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그는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를 둘러싼 세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하며 만족을 느낍니다. 세상은 그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비난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를 비웃지만, 그는 가던 길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사모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혐오 거리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는 값을 계산하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그를 비난하든 칭찬하든, 그건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못됩니다. 그는 거듭난 이후로 더 이상 욕망이나 관습의 노예가 아닙니다.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Ⅵ.『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자신을 지키나니』(요일 5:18).
거듭난 사람은 그의 혼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그의 혼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지키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죄로 이끌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합니다. 그는 아무 단체에나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시답잖은 대화들은 마음을 타락시키고, 악은 항상 선보다 훨씬 더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건강은 지키기 어렵지만 병은 너무도 쉽게 전염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데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에게는 친절하다거나 붙임성이 있다거나 심성이 착하다는 것 등이 친구를 선별하는 기준의 모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면들은 물론 좋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의 혼에도 항상 좋기만 한 것일까요? 그는 매일의 습관이나 행동들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속기 쉬우며, 마귀는 자신을 해할 기회를 잡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그는 늘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적국 한 가운데 거주하는 군인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항상 완전 군장을 하고서 언제 닥쳐올 지 모르는 유혹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소 겪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혼은 적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며, 그래서 언제나 주변 정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겸손한 자세와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위의 여섯 가지가 거듭난 사람의 징표들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글을 주의를 집중해서 읽어온 이들은, 그 여섯 가지를 마음 깊이 새겨두기 바랍니다.
저는 사람에 따라서 이 징표들의 깊이나 드러나는 정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희미하고 어렴풋하고, 매우 미약하게 드러나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세차고 뚜렷하며 명백하고 분명해서 눈을 감고 봐도 명확히 보일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여섯 가지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 사람에게 좀 더 명확히 보이고, 또 어떤 것들은 저 사람에게 좀 더 명확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징표들이 한 사람에게 하나같이 균등하게 드러나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거듭남의 증거들을 아주 명확하게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사도들의 글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보내는 마지막 일반 서신 중의 하나인 요한일서를 살펴본 결과, 우리는 거듭남의 증거들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찾아내었습니다. 즉, 죄를 짓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세상을 이기며, 자신을 지키는 등이 그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앞에 여섯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듭남이란 그저 교회 회원이 되겠다는 고백을 의미하는 말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위의 사실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저는 이제 여기서 한가지 결론을 도달합니다. 그 결론은, 거듭난 사람만이 저 여섯 가지 증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증표가 없는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결론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의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징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제 목 보라 흰 말을 - 클라렌스 E. 맥카트니
본문: 계 19:11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바빌론이 멸망할 때 땅에서는 애곡이 하늘에서는 기쁨이 있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짐승과 용이 전복되고 흰말을 탄 자가 피에 적신 옷을 입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쓰고 그 옷과 허벅지에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게 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승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승리의 확실성과 그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필요성을 살펴보고, 두 번째로 어떻게 해서 그 승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오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승리의 확실성
바울이 탄 파선한 배에 있었던 선원들이 그들이 어떤 해변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들은 틀림없이 그 여행이 어떻게 해서 종료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표류하는 배와 같은 세상 역사의 끝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그런 후에 끝이 오리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위대한 언급입니다. 끝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논리적이고 필수적인 것인데, 자연의 모든 대상과 과정들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해가 떠올라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산 너머로 지고 날이 끝이 나고, 밤이 시작되면 달과 별들이 떠오르고 마침내 그것들은 희미해져서 사라집니다.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면 밤이 끝난 것입니다. 작은 개울이 산마루 높은 곳에서 흐르기 시작해서 커다란 강이 되어 그 물로 땅을 축복하고는 강은 마침내 대양에서 강이 끝나게 됩니다.
성경만이 우리에게 인간 역사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끝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의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는 것도 성경에서입니다. 그 절정의 광채가 요한계시록에서 반사되어 비추고 있습니다. 하늘의 군대와 함께 내려오는 흰말과 그 위에 탄 분의 모습보다 더 찬란한 광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승리의 비젼을 갖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인내와 소망에 필수적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보는 것들이 우리가 믿는 것보다 더 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진리가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승리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그 어떤 목사도 승리를 외칠 수 없습니다. 여기 서서 시간의 긴 복도를 내려다 볼 때까지는 어떤 목사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폭풍우 끝에 무지개를 보는 것도 여기서이며, 이 세상 나라들이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들이 되는 위대한 날에 울려 퍼지는 천둥 소리를 듣는 것도 바로 여기서입니다. 그 날은 너무나도 찬란한 광채가 넘치는 날이기 때문에 그 날과 비교해 볼 때 지금까지 이 세상에 비췄던 가장 밝은 날이라 할지라도 한 밤중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빛도 어두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이 소망은 로마제국 아래서의 교회에게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때 이교도 제국은 교회를 그 피 속에서 익사시키려고 분투하고 있었고 적그리스도가 그 얼굴에 새로운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퍼뜨리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 소망은 옛 로마시대의 교회 못지 않게 필요한 사항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저리나게 지속되는 악에 마음이 무뎌지고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악은 계속해서 부상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악의 확실한 멸망과 전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끊임없이 짐승과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후에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시온산에 서실 때, 모든 것이 그분 발 아래 굴복할 것이고 흰 말과 그 위에 탄 분과 그 머리 위에 많은 면류관들과 하늘의 군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투쟁과 노고와 시기와 미움과 죄와 열정과 피와 죽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굴복하고 그곳에서 의가 거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
의의 승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올 것입니다. 인간은 황금시대와 의와 공의의 승리와 우주적인 평화를 고대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 무엇에 의해 끝이 온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나 발전을 통해서는 오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천년 왕국시대에 접근하게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발전의 법칙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그 법칙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공의와 선과 의의 물결이 점점 높아져서 전 세계를 뒤덮을 것이고 불의와 사악의 조직들을 인간이 전복시키고 파괴시킬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시간일 뿐이다. 발전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도덕적 법칙과는 상관없이 끊임없는 발전만이 있을 것이라는 이 '가설'은 '사실' 앞에서 부서지고 맙니다. 이 '가설'은 제 1 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전멸되었습니다. 발전이 있으면 반드시 퇴보도 있게 마련이요, 건설이 있으면 반드시 파괴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걸 만한 모든 것이 점진적인 발전과 교육과 과학이라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재와 과거의 영원한 재현과 빛과 어둠 사이의 끝없는 전쟁과 인간의 몸을 놓고 싸우는 영원한 투쟁뿐인데, 이는 마치 미카엘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 싸웠던 것과 같습니다.
과학이 인간 몸의 3대 질병 즉 심장병과 결핵과 암을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지식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며 상한 마음을 치유케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의와 평화의 승리라는 위대한 끝이 점진적인 진보와 진화의 법칙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서 현재 작용하고 있는 영적 힘의 확장과 발전을 통해 이루어 지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너무나도 악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진보를 생각해 보십시오. 약속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은 [어떤 여인이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에 섞어 전체를 부풀게 한 것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을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그것은 참으로 모든 씨보다도 작지만 자라나면 푸성귀보다 커지고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보금자리를 만드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비유가 무엇을 뜻하든지 간에, 열려진 하늘과 흔들리는 땅과 노고와 고통과 저주, 해가 어두움으로 바뀌고 달이 피로 바뀌는 것 등은 확실히 완성을 향한 점차적이고 점진적인 발걸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과 더불어 악도 성장하고 발전하리라는 것을 비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독보리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곡식과 독보리는 추수 때까지 나란히 자라지만 최후의 승리는 지금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는 종교적인 세력의 확장과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위대한 일을 통해서 올 것입니다. 역사의 절정은 우리 구원의 대장되신 그 분이 직접 전쟁터에 나타나심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 영광은 요한이 본 것에 비견될 것인데, 즉 흰 말과 그 위에 탄 자가 그 머리 위에 많은 왕관을 쓰고서 정복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자정에 오실지도 모르고 그는 제 3시에 혹은 제 4시에 오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몇 시에 오시든지 간에 주께서 오실 때 깨어 있는 종들은 복이 있습니다.
클라렌스 에드워드 노블 맥카트니(Clarence Edward Noble Macartney, 1879-1957)는 뉴저지주의 패터슨과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했다. 그 후 피츠버그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다시 목회하여 27년 간 사역을 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설교는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화요일 정오 만찬에서 더욱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특히 성경의 전기를 다루는 데 은사가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미국의 알렉산더 휘트"라고 불렸다. 그의 설교는 대부분 일반적인 본문을 다루고 있지만 항상 성경적이고 교리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는 "겨울이 되기 전에 오소서"(Come before winter)일 것이다.
이 설교문은 <성경의 가장 위대한 본문; The Greatest Texts of the Bible>이라는 책에서 선정한 것으로 1947년 아빙돈 콕스베리 출판사에서 발행했으며, 1992년 크레켈 출판사에서 재발행한 것이다.
제 목 어린양의 혼인식 - C. H. 스펄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하더라.}(계 19:7-8)
오늘 아침 저의 주요 목표는 여러분에게 축복되고 영광스러운 연합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은 교회와 주님 사이에 거행되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될 것입니다. 저의 설교의 목표점은 희생제인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일 뿐만 아니라 끝이며, 은혜로 이루어진 신성한 전체 성전 건축물의 기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맨 마지막의 갓돌이라는 점입니다. 속죄 사역의 극치를 이루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혼인식입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 혼인식을 설명하겠습니다.
1. 먼저 이 혼인식 전에 일어날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혼인식이 거행되기 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창녀 교회의 멸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대신 다른 구원의 수단을 제시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라도 다 창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러한 제도는 완전히 멸절 되고 불에 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반대해서 세워진 것은 모두 던져져서 홍수 속에 휩쓸린 맷돌처럼 가라앉을 것입니다.
저는 그 시간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힘있게 외쳐 말하기를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계 18:2)라는 외침을 듣게 되기를, 우리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는 결혼식 전에 특이한 음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음성이 나서"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너희 모든 하나님의 종은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보좌에 있을 수 없습니다.
중보자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한 분이 어린 양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보좌에서 나는 음성을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지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 음성은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또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게 되는 영원한 보장을 받게 된 그가 찬양 가운데 여전히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제로 죽으셨으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교회는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2. 어린 양의 혼인식은 아버지의 영원한 선물의 결정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들을 그의 아들에게 주셔서 그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죄사함의 언약이 되셔서 때가 차매 그들의 본성을 짊어 지시고 그들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시고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고 자신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이 혼인식은 그들 각자에게 있었던 약혼의 완성입니다. 나는 세심하게 구분 짓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에게 있어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처음 그를 믿었을 때 우리 안에서 우리 각자와 약혼하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며 우리 역시 그와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혼의 기쁨이며 노래로, 우리를 기쁘게 하십니다. 그가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을 기뻐하며 약혼 기간 중에 결혼식을 고대하십시오. 우리의 목적지는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식 날은 교회 몸의 완성을 나타냅니다. 그 때는 교회가 완전해지리라는 것을 이미 말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지금 만들어지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신랑과 약혼한 교회는 지금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혼인식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축복된 신랑이 와서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며 구름도 끼지 않고 해도 지지 않는 땅인 주님의 축복된 자들의 집에 거할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교회가 집으로 데려가지는 것은 정말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혼인식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끝나지 않을 축복으로 들어가게 됨을 나타냅니다.
날들 중의 날인 한 날이 올 것입니다. 모든 투쟁과 위험과 심판이 끝나는 면류관과 영광의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 정렬해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함께 취하면서 살아 잇고, 사랑스러우며 계속되는 연합 안에서 그와 영원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3. 신랑이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이 가까웠다} 우리 구세주는 영원한 언약 속에서 어린 양이셨기 때문에 그래야만 합니다. 그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며 죄인들을 위한 확실한 보장과 대속자가 될 사람으로서 언약이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어린 양으로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증명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최고의 증거는 그가 어린 양으로서 도살당하기 위해 끌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의심 너머로 가장 사랑하는 자가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증명해 준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했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나를 위하여 자신을 준 것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결혼에 있어서 사랑이란 쌍방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처음 사랑하게 된 것은 어린 양으로서였습니다. 우리가 그의 상처와 피를 보기 전까지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는 어린 양으로서의 그를 사랑합니다.
혼인식은 가장 완벽한 연합입니다. 확실히 예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가장 밀접하게 연합되는 것은 어린 양으로서입니다. 우리가 그를 어린 양으로 볼 때만큼 그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내가 그의 열정을 바라볼 때 나는 요한처럼 그의 가슴에 기대어 거의 그의 팔을 의지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왔으며 그런 모습으로 있는 그를 보았을 때 우리가 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에 가장 고귀하고 영원한 연합을 "어린 양의 혼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4. 이제 마지막으로 신부의 준비를 보겠습니다. "그의 아내로 자신을 준비하였더라."
지금까지 교회는 항상 그의 신부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아내"입니다. 이 말은 "신부"보다 더 갚고 깊은 성숙한 단어입니다.
자신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그녀가 그녀의 주에게 가서 그의 것이 되어 영원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기꺼이 동의함을 내포합니다.
자유의지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은혜로 발휘될 때를 제외하고는 미지의 것입니다. 은혜는 자유케 하는 위대한 힘입니다. 은혜가 와서 의지를 자유케 해서 선한 것을 선택하기 전까지 의지는 악의 노예입니다.
혼의 행위는 의지로 죄를 그만 두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될 때 가장 자유합니다. 그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을 준비시켰습니다. 즉, 자유로운 은혜가 그녀로 하여금 자유로이 그를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그녀는 실수에 대항해 투쟁했으며 불신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준비가 무엇인지 알기를 바랍니다. 창녀 교회도 또한 세마포를 입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그러나 창년 교회는 자주색과 비단과 진홍색과 귀한 보석들과 진주로 치장했습니다.
아내의 옷을 보십시오. 그녀의 복장은 얼마나 단순합니까? 정결하고 흰 세마포 뿐입니다. 우리의 경배는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더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하얀 세마포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그녀는 창녀가 입고 있는 훌륭한 것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지혜를 피하고 예수 안에 있는 지혜에 만족합니다. 정결하고 하얀 세마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겨졌기 때문에 우리의 겉이나 속에는 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거룩함으로 덮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최상으로 꾸며져서 신랑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다시 질문 하겟습니다. 여러분은 어린 양을 신뢰합이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희생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를 어린 양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멸시한다면 그리스도의 전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의에서 떨어진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자신이 피로 산 교회를 취하셔서 영원 무궁토록 자신의 배우자로 삼으실 때 그 안에서 아무런 몫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설교문은 1889년 7월 21일 주일 아침에 한 설교로서 < The Metropolitan Pulpit> 제 35권에 실린 것을 간추린 것입니다.
제 목 성난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 - 조나단 에드워드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진 죄인들
[복수와 보응이 내게 속해 있으니, 그들의 발은 정해진 때에 실족하리라. 그들의 재앙의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임할 일들이 속히 되리라](신 32:35).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이 그들의 지옥행을 막아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 형태의 어려움에도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아니라면 한 순간도 죄인들이 보존될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의 사항들을 생각해 볼 때 진리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죄인들을 지옥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대적하신다면 인간의 도움은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손 안에서 죄인을 건져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지옥에 던져버릴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죄인을 지옥에 던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요새는 없으며 숨을 수 있는 장소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아무리 손에 손을 맞잡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간단히 조각 조각으로 부셔버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죄인들이 회오리바람 앞의 먼지와 같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 앞의 마른 검불과도 같습니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밟아 버리는 일이 쉬운 것 같이, 실밥을 잘라서 불속에 던져버리는 일이 쉬운 것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신다면 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패역한 자들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항상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죄인들을 멸망시키는 것에는 어떠한 반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의는 죄인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의 심판을 큰 소리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소돔이 맺었던 열매와 같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향해서 잘라 버리라. 어찌하여 쓸데없이 땅만 버리느냐?(눅 13:7)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칼은 매 순간마다 죄악에 찌든 자들의 머리 위를 내리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선하신 뜻만이 그 공의의 칼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미 지옥에 가도록 정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모든 인간들 사이에 정해놓으신 의의 법칙이 죄인들을 정죄해서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의의 법칙이 죄인들을 대적해서 정죄하며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이미 지옥으로 가기로 정해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요 3:18).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누구나 지옥행이 정해진 자들입니다. 죄인이 있어야 할 장소는 바로 지옥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 너희는 아래서 났고(요 8: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들은 저 아래에 있는 지옥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항상 아래에 매여 있으며, 그곳이야 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변치않는 법이 그들에게 지정한 장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매 순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서 분노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의 불길에 휩싸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보다 아직까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분노를 느끼고 계십니다. 틀림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손을 들어서 여러분을 치지 않으시는 이유는 여러분의 죄악에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여러분의 사악함에 분개치 않아서도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관심도 없으시고 분개치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같이 죄악에 무감각하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으며, 여러분의 파멸은 두 다리를 뻗고 잠자고 있지 않습니다. 지옥의 불구덩이는 이미 여러분을 맞을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선 공의의 칼은 이미 여러분의 머리 위를 내리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지옥은 여러분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의 혼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있으며 자신의 통치 아래에 두고 있습니다. 마귀는 죄악에 쩔은 자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탐욕스럽고 굶주린 사자가 아직은 보호받고 있는 사냥감이 보호에서 풀려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마귀도 악한 자들을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억제하고 있는 하나님의 팔이 거두어지기만 한다면 죄악에 쩔은 여러분의 불쌍한 혼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지옥에 내던져저 흔적도 없이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의 타락한 본성이야말로 지옥의 고통의 토대가 됩니다. 부패한 본성들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옥불의 연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 본성들은 매우 활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점점 더 폭력적이 되어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눌러 억제하고 있는 하나님의 팔이 없다면 그것들은 즉시로 파멸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 부패한 본성은 파멸받아 마땅한 여러분의 혼을 더욱더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도 혼과 함께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죄는 혼의 파멸과 비참함을 동반합니다. 죄는 파괴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그 죄를 억제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혼은 완전히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부패는 그 간교함에 있어서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마음은 죄악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우연한 사고로 인해 즉시 저 세상으로 갈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리 보아도 눈에 띄는 위험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시대를 거쳐서 다양하게 계속된 이 세상의 경험은 사람이 언제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 언제 저 세상으로 가게될 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지옥 구덩이를 덮고 있는 연약한 뚜껑 위를 걷고 있으며, 그 뚜껑에는 그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게 될 지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약한 지점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의 화살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 화살이 자신들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이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지옥으로 보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어떤 기적이나 섭리의 일상적인 계획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역사가 필요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모든 방법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방법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결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을 언제 지옥으로 보낼 것인지, 또는 어떤 방법으로 여러분을 멸망시킬 것인지는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지혜있고 수완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다른 점들이 발견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예기치 않은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현명한 자에 대한 기억이 어리석은 자에 대한 기억보다 영원히 더 남아 있지 못하며, 지금 있는 것이 장차 올 날들에는 모두 잊혀지게 됨을 볼 것임이라. 또한 현명한 자가 어떻게 죽는가? 어리석은 자와 같도다(전 2:16).
여러분이 계속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악한 인간으로 남아 있는 동안은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분의 계략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지옥에 대해 듣고 있는 죄인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죄인들은 스스로의 보장을 믿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한 일,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 혹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자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파멸과 저주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마음 속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그 계획이 잘 이루어질 것이며 자신의 도모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죄인들은 구원받은 자는 심히 적으며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지옥에 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효과적으로 지옥행을 피할 수 있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힘과 지혜를 신뢰함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뢰하는 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와같은 식으로 살다가 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옥에 가게된 것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스스로 지옥행을 피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을 만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들도 지옥에 가서 그 처참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기대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 곳에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의 생각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계획이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효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죽음이 그때 그런 식으로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마치 도둑처럼 임했습니다. 죽음이 저보다 한 수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급속히 임한 것이지요. 죽은 후에 어떻게 해보리라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평화롭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에 급작스러운 멸망이 저를 덮친 것이지요.?
하나님은 여러분 중 그 누구에게도 그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여러분을 하늘 나라로 보내실 만한 아무런 의무도 없습니다. 혹자는 죄인들도 열심히 찾고 구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종교적인 열심이 어느 정도든지 간에, 또 여러분이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해내실 어떠한 의무에도 구속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지옥의 구덩이 위에서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불타는 구덩이에 들어가야 마땅한 자들이며, 그러한 판결은 이미 선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준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실제로 지옥에서 모진 고통을 격고 있는 자들을 향하신 분노만큼이나 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러한 분노를 조금도 누그러뜨리거나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마귀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며 지옥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피난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순간 순간들은 전적으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인내의 손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여러분의 위험한 상황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처참한 세계, 펄펄 끓어오르는 유황불못은 여러분의 발 밑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옥은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그 지옥에는 여러분이 디디고 설만한 발판이나 붙잡고 매달릴만한 손잡이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지옥 사이에는 허공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즉시 여러분을 그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선하신 의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패역함은 여러분을 돌덩어리처럼 무겁게 만들어 지옥을 향하여 무서운 속도로 여러분을 끌어내릴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지금 허락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즉시 영원히 불타오르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의 튼튼한 육체, 학식, 재산, 그리고 여러분의 훌륭한 두뇌와 의로움은 거미줄이 떨어지는 바위를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을 지옥으로부터 지켜주는 데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이 여러분을 짐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순간이라도 견디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으로 선하신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와 마귀를 섬길 때, 태양은 억지로 여러분을 비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때, 땅은 억지로 산물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악을 행하고 있을 때, 땅은 억지로 여러분의 범죄의 활동무대가 되고 있으며,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을 대적하며 낭비하고 있을 때, 공기는 억지로 안개와 같은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호흡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악행에 대한 심판이 현재로서는 유보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보류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범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매일 진노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이미 시위에서 떠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공의는 화살로 여러분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으며 시위를 한껏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 화살이 여러분의 피를 마시지 못하도록 한 순간이라도 지켜 주고 있는 것은 어떠한 약속이나 의무에도 구속됨이 없으신 진노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임하시는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마음의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사람, 다시 말해서 죄로 인해서 죽은 존재에서 새로운 상태의 인간이 되지 못하고 빛과 생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징그러운 벌레를 손에 들고 있을 때와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을 지옥의 구덩이 위에 들고 계시며 여러분을 아주 싫어하시며 준엄하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불에 던져질 가치 밖에 없는 존재로 보십니다. 여러분이 용납되기에는 하나님의 눈은 너무나도 순수합니다. 그분의 눈에는 우리가 징그러운 뱀을 볼 때보다 몇 천배 더 여러분이 가증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왕좌에 반역을 시도했던 그 어떤 완강한 반역자보다 훨씬 더 엄청난 반역을 하나님께 계속 저질러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여러분을 불 속에 집어던지지 않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제 밤에 지옥에 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잠자기 위해서 눈을 감은 후에 이 세상에서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난 후 지금까지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위험천만한 상황들을 잘 보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곳은 거대한 진노의 용광로이며, 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넓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보다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중보자에게도 요구하지 않는 여러분은 자신을 구원할 방도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불도 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유나 업적이나 또는 앞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시지 말도록 설득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이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실에 따라 그렇게 갚으시되, 그의 대적들에게는 분노로 하시고, 그의 원수들에게는 보복으로 하실 것이며, 섬들에게도 보복으로 갚으시리라(사 59:18). 보라, 주가 불과 함께 올 것이며, 회오리바람과 같은 그의 병거들과 더불어 오리니, 진노함으로 그의 분노를, 불꽃으로 그의 책망을 나타내리라(사 66:15). 우리는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계 19:15)는 표현도 읽게 됩니다. 대단히 무시무시한 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맹렬히 쏟으시겠다는 것은 어떠한 동정심도 없이 징벌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실 때, 또 그 고통이 여러분의 기력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을 보실 때, 그리고 여러분의 불쌍한 혼이 짓이겨지며 영원한 흑암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형벌을 가볍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서운 진노의 폭풍을 가라앉히지도 않으실 것이며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행복을 염두에 두지 않으실 것이며, 여러분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지켜 주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은 너무나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진노로 다루리니, 내 눈이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내 귀에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해도,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겔 8:18).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실 준비를 하고 계신 때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며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부르짖을 수 있는 때입니다. 이때가 지나고 나면 여러분의 처참한 울부짖음도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지금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처참한 상황에 던져 넣는 것 이외의 다른 행동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파멸로 채워진 진노의 그릇이 될 것이며, 그 그릇은 분노를 가득 채우는 데 밖에는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비웃고 조롱하실 것입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역하였고, 내가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개의치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나의 모든 조언을 무시하였고, 나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도 너희가 재앙을 당할 때 비웃을 것이요,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 조롱하리니 이는 너희의 두려움이 멸망같이 이르고, 너희의 재앙이 회오리바람처럼 닥칠 때요, 고난과 고통이 너희에게 임할 때라.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것이나,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일찍 나를 찾을 것이나,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지식을 싫어하며, 주를 두려워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라. 그들은 나의 조언을 결코 원치 아니하며, 나의 모든 책망을 경멸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고, 자신들의 계략들로 배부르리라. 우매한 자들의 돌이킴은 그들을 죽이며,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은 그들을 멸망시키느니라. 그러나 내게 경청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게 거할 것이요, 악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하리라(잠 1:24-33).
지금이 지나고 나면,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슬픈 처지를 전혀 동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소한의 호의도 얻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발 아래에 짓밟힐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을 터뜨리시고 피를 흩어 버리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피는 하나님의 옷자락에 튀어서 그분의 옷은 여러분의 피로 얼룩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증오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극도의 모욕과 경멸 속으로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밑이 아니고는 여러분에게 적합한 장소가 없을 것이고 여러분은 길바닥의 진흙처럼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하게 될 상황의 비참함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끝까지 여러분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와 자신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왕들도 자기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기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진노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위대하고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가련한 죄인들에게 자신의 두려운 복수를 감행하실 때, 그리고 불쌍한 죄인들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분노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과 장엄한 주권을 바라보라고 온 우주를 초청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계속 회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함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늘 나라의 영광스러운 백성들은 여러분이 격고 있는 끔찍한 광경을 보기 위해 나아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능자의 진노의 맹렬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능자의 발 아래 엎드려 위대한 능력과 주권을 가진 자를 경배할 것입니다.
이 진노는 영원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함을 잠깐 동안 겪는 것도 무시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영원토록 그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그 격렬한 고통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앞을 내다 볼 때, 여러분의 앞에는 영원하고 끝없이 긴 시간이 놓여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아무런 구원자도 없고 고통이 끝도 없으며 형벌이 약해짐도 없고 전혀 휴식이 없음을 알고 완전히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적이고 무자비한 보응과 씨름하면서, 고통을 겪으며 수억만년을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러한 상태로 긴 세월을 지났을 때, 지나간 고통의 시간이 남은 것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에게 내려질 형벌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여러분의 상태를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약하고 희미한 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상황은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처절한 것입니다.
매일 매시간 이러한 엄청난 진노와 처참함의 위험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의 상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겠습니까? 이 책을 읽게 될 자나 복음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처참한 상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또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불안감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편히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사람들 속에 끼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처참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가 처해있는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가 누구인지 안다면 그 사람을 보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되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보고 외치는 슬픔과 안타까움의 소리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이 준엄한 책망을 기억하게 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특별한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큰 소리로 불쌍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로 모인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밀려 들어가는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동서남북 천지 사방으로부터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처해있던 것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빠져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신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지금은 아주 행복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죄를 씻음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뒤에 남겨진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갈망하며 야위어가고 있는 동안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또 여러분이 마음의 슬픔으로 애통해 하며 탄식을 발하고 있는 동안에 수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뒤에 남겨진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상황에 한 순간이라도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매일 매일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밖에서 지옥의 구덩이 위에 매달려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큰 소리를 들으십시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큰 은혜의 때가 여러분들에게는 엄청난 저주의 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질 것이고 죄악은 빠르게 증가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길이 지금처럼 활짝 열려 있는 때가 일찌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이 길을 무시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것입니다. 지금은 분명히 침례인 요한의 때와 같은 때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 위에 놓여져 있으며,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덜져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은 이제 깨어서 다가오는 진노의 심판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분명히 거듭나지 아니한 모든 죄인들 위에 떨어질 준비를 갖추고 매달려 있습니다. 소돔으로부터 빠져 나오십시오. 네 목숨을 위하여 도피하라. 네 뒤를 돌아보거나, 어떤 평지에도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그래야 소멸되지 않으리라(창 19:17).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진 죄인들]은 1741년 7월 8일 코네티컷의 앤필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 설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로 꼽히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가 어떻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할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실은 것은 이 설교를 요약한 것이다. 이 설교를 읽고 설교자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받기 바란다.
제 목 잘 가거라 사망이여! - C. H. 스펄젼
잘 가거라 사망이여!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켰다고 하셨으니](고전 15:26,27)
지난 4주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분의 위대한 업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마침이시요, 사탄을 정복하신 분이시며, 모든 새로운 것들의 창조주이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망을 멸망시키신 주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망을 멸망시키신 것은 구속주의 가장 위대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의미를 완전하게 계시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신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기자인 다윗이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본문을 두고 여러분은 아마 다윗이 겸손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을 높이기를 기뻐하실까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이 몇 마디 안에 영광스러운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편 8:6에서 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령님의 해석을 따라 바울이 시편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시편 8편은 단지 야만적인 피조 세계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본문에는 또 다른 훨씬 더 중요한 해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언자로서 다윗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신 분, 바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높임을 받은 인자이시요, 모범이 되는 인간이시며, 둘째 아담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는...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언급한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각에만 이상할 뿐이지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진리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람이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인간과 같이 되신 분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시편에서 부활의 필연성을 어떻게 추론해 냈는지 보도록 합시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모든 것'이 놓여져야만 한다면, 모든 악한 것도 그분께 정복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사망이 정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셔야 하리니. 그러므로 사망도 궁극적으로는 정복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간단한 시편의 한 문장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교리를 이끌어 냅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었다면 결코 시편 8편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일반 독자라면 결코 생각지 못했을 귀중한 진리를 도출해 내게 하십니다.
성경 본문은 요술 상자 같습니다. 상자를 열면 또 상자가 나오고 또 나오다가 제일 안에 있는 상자에 보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 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비밀들은 그 안에 비밀을 감추어 두신 분이 일깨워 주실 때에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책들은 대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아주 못미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책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책은 빛으로 차 있으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계시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성경에 무엇이 더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 안에 거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 안에는 우리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저장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저장고를 밝히는 계시의 불빛이 현재 우리 눈에는 너무나 밝아서 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성령의 조명을 통해 다윗의 노래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면, 우리도 바울 서신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우리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망은 원수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1. 원수인 사망
사망은 원수로 태어났습니다. 아각인 하만이 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은 우리의 가장 끔찍한 원수 ?죄?의 자녀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약 1:15).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롬 5:12).
죄의 열매가 인간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이 타락한 그 암울한 날에 이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이며 반역자인 마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볼 때 사망은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사망은 사실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같습니다. 사망은 원래의 창조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타락된 피조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온 세상이 손상되고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망은 목자장께 속한 양무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망이라는 이리는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초대하신 손님이 아닙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연회는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와 사탄이 낙원의 축제에 들어오려 할 때 어리석은 인간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사망을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멀어버린 눈으로도 그것이 잔인한 적인 것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에게 사망은 평원의 소떼를 노리는 사자와 같고, 싱싱한 들꽃을 내리치는 잘 드는 낫과 같으며, 시들어 버린 나뭇잎에 잔인하게 불어대는 강풍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본능적으로 사망을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죄의 자녀라고 양심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원수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망은 원수가 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오는 이유는 뿌리째 뽑아 버리고 넘어뜨리고 파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작품인 사람의 몸을 흉하게 썩어 문드러지고 없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토록 경이롭게 지으신 것을 말입니다. 사망은 하나님의 솜씨를 자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육신을 무덤 속의 벌레들에게 던져 줍니다. 그러면 이 벌레 군단은 포획물에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건장한 남성의 육신은 아름다운 집과 같지만, 파괴자인 사망은 그 창을 어둡게 하고 그 기둥을 흔들리게 하며, 결국 그 문은 닫히고, 맷돌질 소리를 그치게 만듭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딸들도, 강한 남자들도 사망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전 12:3,4). 이 파괴자는 그 사람의 생이 얼마나 많은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일순간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망은 생의 모든 영역을 여지없이 뚫고 들어오는 칩입자입니다. 사망이 들어오면 모든 훤칠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모든 샘들이 멈추며, 모든 훌륭한 땅이 돌밭으로 변합니다. 사망이 어떤 사람을 먹이삼을 때 그 사람은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재로 변하고 썩어 버립니다.
죽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힘을 과시합니다. 무덤이 없는 나라가 있습니까? 묘지가 없는 도시가 있습니까? 비석이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원수인 사망은 불칼을 들고 인류를 파괴시키며 전진해 왔습니다. 아무리 포악하고 야만적인 민족도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누구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습니다. 죽음은 모든 곳에 손을 뻗쳐 가정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과 한숨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해가 뜨는 모든 곳에서 죽음은 사람들의 시야를 눈물로 가렸습니다. 사별의 눈물, 과부의 울부짖음, 고아의 절망, 이런 것들은 죽음이 일으킨 전쟁의 음률이며, 거기서 죽음은 승리의 노래를 불러 왔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수하에 있는 사형 집행인에 불과하며, 죽음의 아수라장에서 일하는 고용된 도살업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죽음이 평상시보다 좀더 서둘러서 식인 축제를 열고 희생자를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어 본 사람이라면 사망이 어떤 원수인지 잘 알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친구를 빼앗아 가고, 우리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집안의 가장을 데려갑니다. 집안의 따뜻한 햇살 같은 어머니를 나꿔채 갑니다. 어린 아이를 그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갑니다.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를 그 아버지 곁에서 빼앗아 갑니다. 그 젊은이에게 걸었던 부모의 애정어린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입니다.
죽음은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누구에게도 전혀 자비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선하든, 아름답든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 죽음의 낫은 아름다운 꽃이나 백해무익한 잡초를 가리지 않고 잘라 버립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정원에 들어와서 백합화를 짓밟고 장미 송이를 땅에 흩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모퉁이에 심겨져서 수줍은 듯 나무 그늘 아래 그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수수한 꽃들조차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꽃들의 향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타는 호흡으로 그것들을 시들게 합니다.
특히 죽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침입해서 하나님의 일꾼을 데려갈 때, 죽음은 성도들의 원수입니다. 가장 유능한 사역자들이 죽음의 강타로 쓰러지면 교회는 애도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죄를 경계하던 예리한 눈초리를 어둠 속에서 감겨지게 하고, 훈계를 말하던 혀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망인 것입니다.
사망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대적합니다. 가장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지치지 않고 일하던 일꾼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가장 강력한 기도의 사람들, 마음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담고 있던 사람들, 생에서 모범이 되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창 일하다가 이들을 참으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를 뒤로하고 쓰러집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사망으로 넘겨지도록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분의 백성들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고 사망을 최악의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전쟁에서 면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년에 여러 차례 징병자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지만 마침내 그의 백발은 겨울 아침에 내린 서리를 무색하게 하며, 제아무리 철인일지라도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일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쇠를 막을 수 없으며 젊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불로장생의 묘약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권력자라도 ?멸망?을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값나가는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빛나는 면류관을 쓴 군주도 무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용감하고 강인한 용사도 무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통치자는 벌레의 형제요, 벌레와 같은 집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교활한 적으로서 사방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무해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도 사망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 복병을 매복시켜 놓지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죽음은 어디서나 우리를 공격합니다. 식탁 음식 속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샘에서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에 독을 넣기도 합니다. 죽음은 침실에서 우리를 붙잡기도 합니다. 죽음은 바다의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사람들과 동행하기도 합니다. 오 사망이여, 우리가 너를 피해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느냐? 교활한 원수 사망은 우리가 사망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 등뒤에서 소리없이 따라옵니다.
죽음은 우리 중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원수이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우회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다 되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새들처럼 우리 모두는 새 사냥꾼의 그물 속으로 날아들어가게 됩니다.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저 대양 속에 있는 모든 물고기는 그 때가 되면 죽음의 거대한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침에 떴던 해가 반드시 지는 것처럼, 한밤을 수놓던 별들이 마침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처럼, 땅을 돌며 여행하던 물이 결국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끝이 옵니다. 이른 나이에든 늦은 나이에든 반드시 끝은 오며, 그러면 우리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산 자들 가운데 더 이상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 원수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죽음을 인지할 틈도 없이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입술에 한 편의 시를 싣고 그들은 사라져 갑니다. 혹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에 분주하다가 대차 계정을 제출하라는 소환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간 신문에서 사업상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출근하기 위해 신발을 신으면서 자기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경시되거나 사소하게 여겨질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구속주께서 멸망시키신 잔인한 원수를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죽음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습니까? 죽음의 특징에 대해 살펴봅시다.
2. 멸망당할 원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평생 속박되어 있는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죽음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않으셨지만, 거의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통하여 죽음을 폐기하시고 불멸을 밝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죽음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에 대단히 근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영적인 죽음에서 구해내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을 때 우리는 모든 영적인 것들과 신성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려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키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망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자신의 희생자들을 단념했던 세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셔서 이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셨습니다. 그 소녀 주위에는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신 뒤 주님께서 소녀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파괴자가 강타를 당하고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나인성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운반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요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젊은이가 일어나 앉자 주님께서는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또 한 번 죽음의 희생자가 막강한 원수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너무 오랫 동안 무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누이는 주여,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에 복종하여 수의에 동여진 채 죽음에서 일으켜진 나사로가 걸어 나왔을 때, 죽음이 인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속박이 제거되고 포로가 석방된 것입니다.
그밖에도 구속주께서 부활하셨을 때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주님께서 사망과 무덤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한 위대한 승리는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음의 형벌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죄에 대한 형벌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한 가지 죄에 대해 두 번이나 똑같은 형벌을 요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에 대한 벌로서 지불해야 할 고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이 죽는 것입니까?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몸이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은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변화시키셔서 불멸과 영광에 어울리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죽음과 무덤은 말하자면 정제시키는 용광로 같은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몸은 미래의 축복에 합당하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아직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살아 계신 구속주께서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서서히 분해되고 떠날 뿐입니다.
죽음은 범선을 묶어 둔 밧줄을 끌러 아름다운 항구로 항해해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해 주는 불병거입니다. 위대하신 왕께서 자신의 연회장에 들어오셔서 다정한 음성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독수리의 날개 위에 타고 안개 구름 자욱한 이 세상을 멀리 떠나 영원한 평안의 집, 저 높은 곳에 있는 찬란한 하나님의 집으로 날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폐기하셨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이며,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속주께서는 그 쏘는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 쏘는 것을 제거당한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는 하지만 이들에게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죽음은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히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봅시다.
무덤의 한켠에서 잠깐 동안의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조용히 수의를 벗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여유 있게 움직이셨을까요! 먼저 작은 수건을 개서 옆으로 놓으신 뒤에 수의를 벗어서 따로 개어 놓으셨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무덤에 왔을 때 잘 개어져 있는 옷을 발견하도록 말입니다. 이제 무덤은 더 이상 무시무시한 지하 납골실이 아니었습니다. 잘 정돈되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기숙사 방처럼 된 것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습기차고 어둡고 으시시한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완전히 바꾸셨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우리 주님의 무덤에서 바위를 굴려 내어 신선한 공기와 빛이 안에 계신 주님께 닿도록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무덤 밖으로 걸어나오실 때, 주님은 정복자 그 이상의 모습이셨습니다. 죽음은 달아났습니다. 무덤은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성도들이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분은 모든 성도들의 몸이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증하셨습니다. 성도들의 혼의 생명은 단 한 순간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날의 커다란 승리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매일같이 죽음을 이기고 계십니다. 성도들에게 그분의 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안에 그분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두려움 없이 마지막 원수를 대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때로 노래하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대개 온화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으며 평화롭게 잠이 듭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죽음은 용처럼 보이지만 그 쏘는 것은 사라졌습니다. 죽음은 이빨 부러진 늙은 사자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다만 우리로 황금문을 통과하게 해 주는 사자(messenger)로서 보냄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문을 통과했을 때 우리의 구세주를 영원히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많은 성도들이 죽음의 잠을 자기 위한 침상이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침상 중에서 최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혼이여, 내게 말하라. 어떻게 이것이 죽음일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너무도 고상하고 즐거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근심을 다 벗고 안도했습니다. 이런 것이 평생 두려워했던 죽음일 수 있을까 하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죽음이 칼로 찌르는 것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는데 압정으로 찌르는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눈을 감았다가 하늘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때 이들은 죽음은 침대에서 기지개를 쭉 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섭고 섬뜩한 통로를 통과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높임을 받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이런 죽음의 쏘는 것을 없애 주셨습니다.
3. 그러나 사망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 본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를 볼 때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의미에서 죽음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멸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전에 몸의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들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호의를 입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있을 무수한 성도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해서 볼 때 죽음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잠들고 육체와 뼈가 썩어서 흙이 된 무수하게 많은 성도들에 대해서도 죽음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이들은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망이 멸망받는 것입니다.
저는 무덤으로 들어간 몸의 모든 입자가 그 전과 동일하게 재구성되어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리라고 가르친 적도 없으며, 그렇게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을 보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땅 속에 심겨진 씨가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몸은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씨 자체가 아니라 꽃입니다. 동일한 소재도, 모습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무덤이 아니라면 땅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바다 생물에게 잡혀 먹혔다면 바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지상에 거할 때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몸으로 나올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로 어떠한 해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망은 우리 주님의 승리로 인해 완전히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입게 될 새로운 몸은 노쇠함도 없을 것이며, 병색도 없을 것이며, 순교의 상흔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어떤 표도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흔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상흔처럼 그들에게 존귀를 가져다 줄 영광스러운 표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상흔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며, 못에 찔리신 손과 발은 성도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썩어짐의 흔적은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나팔 소리 이후에는 마침내 더 이상의 죽음도, 더 이상의 슬픔도, 더 이상의 울부짖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은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죽지 않으며, 죽음은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속받고 잠들었던 성도들도 부활한 뒤에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또 다시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을 겪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생각입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또한 살게 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혼의 불멸이라는 이 당연한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어떤 혼들은 미래에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어떤 혼들은 영원한 복을 받는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둘 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것이며,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받을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면 의인이 받는 생명도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이 형벌에 쓰이든지 생명에 쓰이든지, 그 의미는 다 같습니다.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무덤도 없는 나라에서 죽음은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4.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지막에 나가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원수들 중에서 첫 번째로 오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처음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이 죄이고, 그 다음이 사망입니다. 사망은 최악의 적은 아닙니다. 사망은 원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다른 대적들에 비하면 훨씬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는 수천 번이라도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죽음의 시련을 받는 것은 마귀의 유혹을 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과 연관된 단순한 육신의 고통은 죄로 야기되는 섬뜩한 슬픔과 죄에 대한 양심으로 혼에 지워지는 짐과 비교해 볼 때는 사소한 것입니다. 죄로 오염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죽음은 부차적인 재앙일 뿐입니다. 먼저 제일 강한 원수를 패배시켜야 합니다.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모든 악의 주인인 죄와 사탄을 먼저 패배시키십시오. 그러면 사망은 ?마지막?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망은 ?마지막? 원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망이 마지막이라고 했다면,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사망이 마지막 원수가 되게 하십시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죽기 오래 전부터 죽음을 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죽는 순간까지 죽음의 은혜를 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살아 있는데 죽는 은혜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강가에 이르렀을 때만이 배가 필요합니다. 사는 데 필요한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죽음의 은혜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는 멸망당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싸워야 할 적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 이 죽음이라는 원수를 내버려 두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수는 멸망당할 것이지만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가 받은 지혜대로 살면서 매일 이행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시련이 닥치면 시련을 그대로 받으십시오! 원수들이 몰려 오면 그들을 무찌르십시오. 계속해서 무찌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방을 강타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 뒤에 공격해 오는 후열을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적이 전진해 올 때까지 최후의 일격을 보류해 두십시오. 그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투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때가 되면 여러분이 마지막 원수를 이기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동시에 죽음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의 것이나 장래의 것이나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로다.
사망은 왜 마지막까지 남겨졌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크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기 전에 대단한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배웁니다. 친구들의 죽음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리석고 눈 먼 열정을 꺾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잡았던 고삐를 놓고 다가올 세상을 향해 날아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죽음만큼 강력한 설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하나님의 장엄한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남겨 두셔서 죽음으로 하여금 성도들에게 설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일 죽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성도들은 사랑의 최고의 열정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까? 화형대와 고문대에 묶여 죽어간 순교자들의 죽음에서였습니다. 박해의 숲에서 하늘 나라로 올라간 사람들은 손으로 엮은 화환을 주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것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것은 피의 시내를 건너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으로써 성도들은 그분을 가장 영예롭게 했던 것입니다.
평범한 죽음으로 죽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과 행위에 있어 인내했다는 승리의 간증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은혜 시대가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결코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의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승리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가져다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교회의 몇몇 회원들이 숨을 거두었을 때처럼 제가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저도 그런 장엄한 기회를 얻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들이 노래한 것처럼 노래할 수 있다면 저는 죽음을 피해 다른 우회로를 찾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빛나던 그런 호산나와 할렐루야의 빛이 제 눈에서 빛나게 된다면 죽음은 축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가장 크게 시험하는 사망은 마지막까지 멸망받는 것이 잠시 보류됩니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잠들 때 우리는 그분과 완전하게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성도들 사이에 약간의 질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된 성도들이 죽음을 맛보게 될 여러분과 저를 만나서 느끼는 질투일 것입니다. ?형제님, 제가 경험하지 못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무덤에 누워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결코 죽음의 차거운 손이 닿은 적이 없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나의 주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님은 죽음에 있어서까지 주님과 교제를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잠든 사람들보다 호의를 덜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편애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잠들어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깨어나게 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성도들을 본향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다가와서 죽음의 메시지를 속삭일 뿐입니다. 그러면 한 순간에 성도들은 지고의 복을 받게 됩니다. 죄와 근심과 저주가 없는 곳에서 이제 구주와 함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유용한 목적들에 소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사망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마지막 원수입니다. 현재 교회에게는 대항해서 싸워야 할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우리는 ?사망은 마지막 원수이고, 이제 다른 원수는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끝없는 축복 속에서 영원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변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 속에서는 훨씬 더 놀라운 축복의 시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지고의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분노하는 적들로 인한 갑작스런 경보도 없으며, 마지막 휴식이 깨질까봐 근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마지막 원수가 살해되면 더 이상의 적은 없습니다. 전투는 끝나고 영원한 승리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누구입니까?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분께 존귀와 영광과 위엄과 권세와 권능을 영원 무궁토록 돌립시다.
오 주여, 우리의 엄숙한 경배를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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