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에베소서 설교집

하나님아들 2025. 3. 24. 20:58

에베소서 설교집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다룬다.

A.D. 64 로마에서 기록

① 은혜를 통하여 높아진 성도의 위치

②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진리

③ 그러한 위치에 부합하는(걸맞는) 행함(실행) 

 

 

 

<서론>

 

세상에는 직위와 직급이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계급이 있고, 수직사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걸맞는 혜택을 누립니다. 위치에 따라 권력이 주어집니다.

소위 수평사회라고 부르는 학교에서도 직급을 따집니다. 평교사보다는 부장교사가 혜택을 많이 누립니다. 주번도 면제받고 궂은 일을 다소 면제받습니다. 얼마 전 순복음 교회의 장로인 외삼촌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이 아버지와 대화하던 중 외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래 보여도 장로서열이 50위 이내에 듭니다.”

저도 감리교회를 다닐 때에는 해마다 장로후보 서열을 마음 속으로 따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장로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와 서열을 곰곰이 따져 보고 자신과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위치와 혜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모든 그리스도에게 주는 영적인 복입니다.

 

 

<본론>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 복을 받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한 순간, 성령침례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고전 12:1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또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요 15:4-7) 『[4]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역시 그렇게 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들이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

[6]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가지처럼 버려져 말라 버리느니라.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거두어 불 속에 던질 것이요 그것들은 타 버릴 것이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우리의 복은 천상에 있습니다.

천상은 영어로 ‘Heavenly Places'라고 불리웁니다. 그곳은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3:12-13) 『[12] 내가 땅의 일들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에 그 몸은 이 땅 위에 계셨지만 영적으로 동시에 천상에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육적으로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천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은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습니다. 지상의 것들은 조금만 지나면 다 사라지고 없어져 버립니다. 이 땅 위의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장차 불타 없어지게 됩니다. 좋은 아파트, 승용차, 사무실 여러가지 좋은 물건들은 없어지게 될 것들입니다.

(벧후 3:12-13)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질 것이나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

그러나 천상에 있는 것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인데 영적으로는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와 합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6:17)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엡 5:30)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

또한 천상에 있는 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현재적이며 실제적이나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것으로 주어져 있으며, 결코 추상적이거나 허구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육체에 관한 것은 미래에 성취될 것입니다.

 

2. 영적인 복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에 나타나 있는 영적인 복은 모두 7가지입니다. 그것은 4,5,6,7,9,13,1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복’이라는 말의 뜻은 ‘좋은 말’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미리 축복을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영적인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그 복을 하나씩 헤아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4절에 보면, (엡 1:4)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딤후1:9-10과 조화를 이룹니다.

(딤후 1:9-10) 『[9]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목적과 은혜에 따라 하신 것이니, 이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10]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십니다. 세속적이고 더러운 존재이었던 우리를 따로 불러주셨습니다.

(엡 2:2-3) 『[2]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3]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입양이라는 말은 위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성년인 아들의 위치에 놓는 것을 입양이라고 말합니다.

(갈 4:1-7) 『[1] 이제 내가 말하노니, 그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린 아이일 동안은 종과 다를 바 없으며

[2]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때까지 보호자와 청지기 아래 있느니라.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서 종노릇하였으나

[4] 그 때가 차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셔서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너는 더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처럼 몸의 구속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롬 8:29) 『그 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6절에는 어떤 복이 있을까요?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복이 있군요. 유감스럽게도 개역 성경에는 이 복이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여 그 분 안에 있으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받아들여진 것은 영적인 복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에는 거부된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 7:21-23) 『[21]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23]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주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나 사상으로 복음을 가려버리고 시회참여 운운 하면서 성경을 쳐다보지도 않는 소위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으며 뉴에이지 운동은 거부한다고 하면서도 환경신학이니, 영성운동이니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세계평화와 교회일치운동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도 그의 석사 논문주제를 환경으로 택했습니다. 어느 주일에는 환경을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전공이 화학인지라 환경은 제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환경은 어차피 나빠지고 있는데 왜 설교 시간에 환경문제를 다루고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실천사항을 들먹거려야 되는지 그 당시에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수련회에서는 영성개발을 주제로 삼기에 저는 그 당시 교회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전도사에게 주제의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는 부목사의 재가를 얻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계획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7절의 축복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즉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값으로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죄의 종에서 풀려나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직 몸의 구속은 받지 못했지만 혼의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롬 5:9) 『그러므로 이제 그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더 우리가 그를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리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진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혼의 구속을 받은 우리는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성도들은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지만 성도들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서도 자백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봅시다. 9-12절을 보면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어 자기 안에서 계획하신 바 그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 신비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함게 모으려는 것인데 ‘만물’의 뜻은 하나님의 모든 다루심, 행위 , 계획, 경륜 등을 의미합니다. 그 때가 찬 경륜 안에서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그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값주고 사신 그 소유로서 입양되었기 때문에 유업을 받습니다.

이제 13,14절은 성령이 의해 인침을 받고 보증을 받는 내용입니다. 죄인이 말씀을 듣고 복의 진리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신뢰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영적인 할례를 행하시고 봉인하듯이 그를 인칩니다. 도장을 ‘꽝’하고 찍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주고 사신 그 소유로서 구속하기까지 보호되며,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엡 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값주고 사신 그 소유’란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고전 6:19-20) 『[19]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20]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의 구속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고전 15:50-53) 『[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52]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봉인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양자됨을 증거하셨으며, 우리가 양자이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진정한 아들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충분한 유업을 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유업들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몸과 같은 죄없고, 33세 반의 썩지 않을 남자의 몸을 받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천상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위치에 걸맞게 받은 바 영적인 복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됩니다. 이것은 실제적이며, 확고부동한 것입니다. 영적인 복은 확고부동한 것이며, 우리가 받을 썩지 않을 몸은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사면 보증서가 따라오듯이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보증을 받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 썩어서 벌레가 먹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된다는 복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크나큰 복에 대하여 보증이 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 사실에 대한 보증을 서셨습니다. 친히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또한 보증까지 되신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썩을 몸을 입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복을 알고, 믿고, 누리고, 바라는 우리는 실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죄들의 용서함을 받아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가고, 값주고 사신 소유로서 유업을 받게 될 것인데 그중 하나는 썩지 않을 몸입니다.

죄가 없는 썩지 않을 몸-얼마나 기대가 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가 있는 썩을 몸을 입고 있습니다. 죄가 없는 썩을 몸도 헛된 것이고, 죄가 있는 썩지 않을 몸도 저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죄가 없고 썩지 않을 몸이라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결국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완성시키고자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즉, 우리를 죄 없는 상태로 만드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썩지 않을 몸을 주시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성령님의 보증으로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보증서를 이미 받았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께서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치 병원이나 약국에서 자격증을 내보이듯이 우리는 자랑스럽게 보증서를 내걸 수 있습니다.

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죄들의 용서함을 받아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가고, 값주고 사신 소유로서 유업을 받게 될 것인데 그 중 하나는 썩지 않을 몸입니다.

 

상기 내용을 보증합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날

성령님

 

 

 

 

 

 

 

 

 

 

 

 

 

 

 

 

 

 

 

 

 

세상 지식은 다양합니다. 요즘은 컴퓨터를 모르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각 분야에는 분야별로 다양하고 깊은 지식이 있으며 그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은 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은 이 땅 위에서 먹고사는데 필요한 지식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구세군 교회에서 장로교회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에서는 제가 대학생이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청년회장과 교사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대우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세상 지식은 열심히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은 고압가스 계통의 학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대학생들이 지식을 얻고 취직하여 지금 가스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지식은 노력을 해서 얻거나 밥을 벌어먹기 위한 지식이 아닙니다.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지성의 눈이 밝아져 볼 수 있습니다.

(눅 24:31) 『그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를 알아 보자 주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시더라.』

또한 사람이 거듭나야 볼 수 있는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성도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성령이 거하셔야 영적인 지식을 볼 수 있습니다.

(고전 6:19-20) 『[19]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20]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 활동하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주님은 생각하고, 상황에 반응하며, 문제들을 다루시고, 일들을 논의하는 방식을 알고 계시며, 일들을 계획하고, 응답하며, 유머 감각을 가지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아보기 원한다면 사40-53장과 욥38-42장을 읽어보라고 러크만 박사는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이사야와 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욥의 하나님이신 분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 분과 영적이 교제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분의 영적이 지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영적인 지식을 지성의 눈으로 보아야 할까요?

 

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의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히 6:18)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들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로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공중에서 만날 분이십니다.

(딛 2:13)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예수님은 로마서 8:20-24의 소망을 성취하실 분입니다.

(롬 8:20-24) 『[20] 이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의가 아니요, 오직 소망 가운데 그것들을 굴복케 하시는 그 분 때문이니라.

[21] 이는 피조물 자체도 그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22]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23]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

[24] 이는 우리가 소망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음이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것을 왜 바라리요?』

(엡 4:4)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과 한 분 성령이 계시니』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때문이니, 이 소망은 너희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바라.』

(골 1:23) 『만일 너희가 자리잡고 정착된 믿음 안에 계속 있으며,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것은 너희가 들었고,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된 것이라. 이로써 나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 1:27)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함이 어떠한지를 알리고자 하셨으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2. 성도를 안에 있는그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아야 합니다.

18절은 11, 14절과 같은 내용으로 죄 없고 썩지 않는 몸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없고 썩지 않는 몸을 받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풍성한 유업입니까? 게놈연구소에서는 DNA를 조작하여 노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썩지 않고 젊은 몸으로 영원히 살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엄청난 연구 비용과 인력을 투자해서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엄청난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아직 받지는 못했지만 지성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물학자들은 현미경을 갖고 세포를 관찰합니다. 화학자들은 전자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없는 분자와 원자의 세계를 연구합니다. 우리는 지성의 눈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봅니다. 하나님을 보고, 마귀의 실체를 보며 미래에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을 봅니다.

 

3. 우리에게 향하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 그 무엇인들 하시지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능력은 성도의 육체적인 몸 안에 있습니다. 즉 우리들의 몸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다시 살리신 분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순간, 우리가 들림을 받는 순간 우리의 몸은 주님과 같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며 그 몸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갈 것입니다.

(엡 3: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인가를 잘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엄청난 길이와 너비를 지나 깊은 곳을 통과하여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능력이 대기권을 벗어나 태양계를 지나 성운과 성단을 통과하여 알파 드레코니스 위쪽으로 예수님을 끌어올리셨습니다. 이 때의 속력은 무려 초당10만 광년쯤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환산하면 초당 946000000000000000Km가 됩니다.(95경-조 위의 단위)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과학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초월하지 않습니까?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영적으로 그러하며 위치적으로 그러합니다. 영적으로는 현재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지리적인 면에서도 우주의 만물 위에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와 권위 위에 계십니다. 모든 인간들은 물론 천사들과 심지어 사탄과 마귀들도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골 1:16-19) 『[16]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17]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는 시작이시며, 죽은 자들로부터 첫 번째로 나셨으니 이는 그가 만물 안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19] 이는 모든 충만함이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음이며』

모든 정치권력들과 민족들, 짐승들과 식물들, 산과 바다, 별들과 은하수, 행성들과 위성들, 분자와 원자 그리고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인 양성자와 전자, 중성자, 더 나아가서는 에너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직접적인 뜻과 허용하시는 의지에 의해 존재하고 유지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시대와 천년왕국,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시기에 마땅합니다.

(빌 2:9)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을 그에게 주사』

이들 중 아직은 가시적으로 주님께 복종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잠시후면 모두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주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찬송가 29장 1절 가사를 보면

비록 우리의 몸은 대기오염으로 찌들고 갑갑한 공기를 마시고 있습니다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셋째하늘에 계시므로 우리는 셋째하늘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지성의 눈으로 이 사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유업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의 능력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지성의 눈으로 본 것들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려 주고 그들의 마음판에 영사기를 돌리듯이 선명하게 보여줍시다. 가능하다면 홀로그래피(3차원 영상)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우리가 본 것들을 생생하게 전달합시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니 지역교회도 예수님의 몸의 일부가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론 지역교회의 회원 중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1972-1998년 사이에 저는 여러교단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교단 교회에서 배운 내용과 그 교단의 장단점을 나름대로 말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지역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성경대로 믿는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지역교회이든 그 교회는 나름대로 냄새가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있고, 구령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교단 교회도 그 수준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딸 만한 점수가 있고, 반면 교리적 취약점이 상당 부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교회는 한국 실정에서 볼 때 초창기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단교회도 시간에 따라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주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넓은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규모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울 예수님의 몸은 엄청난 규모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까지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와 지역교회 그리고 대부분의 비성경적인 한국교회의 실상을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은 지상에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지구를 지키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참으로 안스럽습니다. 지구과학을 전공하는 학도 사이에는 ‘지구를 지키기위해 우리는 공부한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만화영화의 주제도 ‘지구를 지켜라.’이고, 인간들을 지배하는 생각이 외계의 악당들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것입니다. 과학의 힘으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지구를 지키려는 의도는 순수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과연 지구가 지켜지겠습니까? 지구는 지속적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있고, 자원은 고갈되고 있으며, 인구가 증가하여 식량부족을 겪고 있으며, 기상이변과 지각변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는 이들 문제 중 한가지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 비슷한 것도 없습니다.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사실은 기적으로 신비입니다. 그 과정을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것처럼 이해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리 묵상해 보아도 그것은 신비입니다.

구원을 받기 전의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사람은 쉽사리 많은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받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 상당 부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령하려는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아니라,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었던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1.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1-7)

우리는 위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영적으로 보아 허물과 죄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 주위는 온통 허물과 죄들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허물과 죄 그 자체이었습니다.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오물처럼, 흉측한 모습을 한 야수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함께 어울려 마시고, 적당히 타협하며, 유행가 가사에 귀중한 혼을 맡겨 버리고 눈물을 지으며, 방황하던 존재였습니다.

그 배후에는 공중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이 존재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 영은 바로 사탄이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의 자녀였으며 불신자였고, 벨리알의 자식이었으며, 우상숭배자들이었고, 진노의 자녀였으며, 지옥의 자식들이었고, 마귀의 아들들이었고, 독사의 세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했으며,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의 생각은 육신적이었으며, 명철은 어두웠고, 암흑 가운데서 사방을 더듬어 헤맸습니다.

여기까지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짐승의 모습으로 살았던 우리를 기억하십니까? 자기만족, 자기방어, 자기보존의 본능을 추구하는 개나 고양이처럼 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여가선용이라는 미명하에 “공중권에의 통치자”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는 잡지, 신문, 드라마, 인터넷 사이트, 게임, 영화, 소설 등에 심취되었던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결정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방바닥에 50환짜리 동전이 하나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그 동전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슬쩍 주머니 속에 넣었습니다. 그 집을 나와서 10환으로는 건빵을, 20환으로는 쥬스를, 20환으로는 사탕 4 개를 사 먹었습니다. 그 다음 날 친구가 저에게 와서 “너 어제 우리 집에 왔을 때 혹시 50환짜리 동전 못 봤나?” “아니 못 봤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을 저질러 10계명 중 6,7번째 계명을 어겼는데, 저는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여 8,9번째 계명을 어긴 셈입니다. 한 가지 죄를 지으면 그 다음 죄는 짓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림 없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담의 형상대로 지음으로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새로운 출생만이 이것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나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4절에 보니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께서  모태에서 우리를 조성하신 분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들을 낱낱이 알고 계신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큰 사랑에 감동하여 많은 성도들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 찬송가 110장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 샘물과 같은 보혈은 예수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4. 날 정케 하신 피보니 그 사랑 많도다.

   살 동안 받는 인애를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살 동안 받는 인애를 늘 찬송하겠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롬 5:6-10) 『[6]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7]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르지만

[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

[9] 그러므로 이제 그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더 우리가 그를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리라.

[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상태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을 거듭남, 또는 새로운 출생이라고 부릅니다. 육신적인 출생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 수정란이 된 다음 발생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사람이 되는 과정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게놈연구소도 이 과정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유전 정보에 의해 어떤 형질이 결정되어지는 것만을 설명할뿐이지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킵니다.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할 뿐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출생도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하고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내적 확신이 있으며, 성령님의 보증이 있고, 말씀을 사랑하며,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본의 아닌 죄를 지었을 때, 아무리 사소한 죄일지라도 마음의 찔림을 받아 자백하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이런 증세가 있는 사람은 틀림 없는 성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together) 살리셨고, 함께(together) 일으키셨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함께(together) 앉히셨습니다. 이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다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신분이 수직상승을 이룬 셈입니다. 이 땅 위에서는 아무리 출세를 하여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수직상승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신분의 수직상승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믿는 우리에게 신분의 수직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데렐라와 같은 신분상의 수직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성도는 자신이 받은 고귀한 선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38가지의 변화는 이런 신분 상승의 내용을 잘 설명해 줍니다.

자 우리는 아주 멋지게 초고속 로케트를 타고 셋째하늘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풍요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이 은혜의 풍요함을 이 세상은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며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 은혜의 풍요함을 이 세상이 아니라 오는 시대들에 보여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휴거와 대환란, 그리고 천년왕국과 영원세계가 이루어질 때 모든 사람들은 이 은혜의 풍요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구원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는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롬 6:23)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

만약 우리의 행위나 노력에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은혜나 선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을 삯이나 대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한 일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행위요소가 있어나 삯인데 우리의 구원에는 행위요소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있어야 자랑할텐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니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보다는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모든 은혜와 인자하심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옵니다,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붙잡았으므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롬 6:17-18)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이라.』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께 찬양을 드립시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롬 3:27) 『그러므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

(고전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권력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니라.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신 것은 없는 것들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려 하심이라.

[29]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 분의 임재하심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

[30] 그러나 너희는 그 분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와 같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3. 구원 받은 이후 우리는 작품의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144000명에 들기 위하여 열심히 심방을 하고,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등지에서 성경을 가르치려고 달려듭니다. 카톨릭 신자들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선행을 강조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합니다. 그 일은 성령충만한 가운데 이루어 나갑니다.

구원은 거저 받았으니 우리의 열성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성을 잘 못 이해하여 육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작품은 엡4-6장을 실행합니다. 그것도 육신적인 방법이 아닌 성령충만으로 실행합니다.

(엡 5:18)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 상계동 기도굴 이야기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은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이요 의지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이것을 오는 시대들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교회시대입니다. 다가오는 환란시대와 천년왕국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구원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랑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그것은 자랑입니다. 그런데 저는 구원을 위해서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구원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찬양할 수 있지만 저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은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작품입니다. 선한 일들이란 엡4-6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들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창조된 것입니다.

어떤 과학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컴퓨터도 명령어에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구원받은 성도로서 작품의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정상적으로 작품이 작동하기 위한 원동력은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이 중간의 벽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습니다. 제가 다니던 감리교회에서 어느날 부목사가 새로 왔습니다. 감리교 신하대학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친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설교한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었는데, 성도와 불신자와의 담이 무너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과 거절한 사람이 함께 공동보조를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화해와 종교일치를 부르짖는 오늘날의 실상은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와의 화목을 촉구한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이나 신학교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이시며 중보자이십니다.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보 역할과 하나님의 우리 사이의 중보역할을 하셨습니다.

 

2. 율법은 폐기하신 뜻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 예언, 역사의 기록, 시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인 우리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적용은 가능합니다. 제도권 교회에서는 구약을 교리적으로 가져와 적용시키는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율법으로 교회회원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나 목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 머리 위에 떨어져 벼락을 맞거나 교통사고로 죽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다니던 감리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장로가 있습니다. 그도 교회를 떠나려고 시도하였으나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는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 전에 여동생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의 집사가 가정에서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성경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 사람의 방식이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 큰 일이 난다고 가르치며 그 사람의 칭찬을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젊은이들을 미혹한다고 합니다.

구약의 예언은 교리적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많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필요한 도움말이 많습니다.

 

벽을 허물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고, 한  몸, 한 성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이 교회는 영적인 교회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이것은 조직체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직체를 만들어 그 조직을 키우고 그 힘을 과시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조직을 강화하여 그 세력을 확장합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로, 권사, 집사라는 간판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강력한 조직을 이루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유기체인 교회는 마28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이 교회를 사셨습니다. 주님의 피값이 아니면 이 교회는 존립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갈보리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구원을 받고 용서받는 길이 열렸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주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살아있는 유기체인 영적 건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건물에 속하는 구성원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칼 막스는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만 그 효력이 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인류를 한 새로운 인류로 만들었다는 칼 막스의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습니다. 그 화평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위한 화평입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휴거까지의 시대에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 한 몸으로 들어가는 한 침례를 받았습니다.

(고전 12:6) 『다양한 역사들이 있으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니라.』

(고전 12:1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한 편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건물 전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든 건물이라는 말로 변개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몸이 여럿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몸을 전체 인류로 확장하는 것과 예수님의 몸을 여러 개로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오직 하나이며 그 몸의 지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도뿐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라면 모두 한 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서울 성경침례교회의 회원과 대전성경침례교회의 회원은 모두 한 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드물기는 합니다만 제도권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 구원을 받은 성도가 있다면 그들로 우리와 같이 예수님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 그대로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을 우리가 합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합친 것을 우리 임의대로 나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관한 한 분리는 불가능합니다.

(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이미 제도권 교회로부터 분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몸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만약 극한 상황에 처하며 외 딴 섬에 혼자 가 있을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는 성도들처럼 주님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몸은 분명히 하나입니다.

(엡 4:4-6) 『[4]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과 한 분 성령이 계시니

[5] 한 분 주요, 한 믿음이며, 한 침례이고

[6] 모든 것의 한 분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시니 그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통하여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엡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더이상 나그네도 타국인도 아니요 오히려 성도들과 같은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니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귀중한 모퉁잇돌이 되셨고

[21]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며

[22]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

 

영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성장을 해야 합니다. 지역교회 또한 성장을 해야 하는데 영적인 교회는 하나인데 비하여 지역교회는 다수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는 절대다수의 비성경적인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장을 원하고 있으며 성경적인 지역교회는 그 가운데서 마땅히 성장해야합니다.

비록 소수에 그칠 성장이지만 예수님의 몸은 자라고 있으며, 충실한 몸을 이룰 것입니다. 이에 발맟추어 지역교회도 성장을 해야 합니다. 타협하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성장하며,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갓난 아이가 성장하지 않아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지역교회는 영적인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자라야 합니다. 이 세상의 기업들과 국가들도 목표를 세우고 실적달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세일즈맨들도 판매실적을 올려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까?

 

1. 우리들은 성도들과 같은 시민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지역교회의 구성원은 성도들이요,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빌 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 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

저의 사촌동생은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 건너간지 20년이 다 되었지만 시민권을 얻지 못하여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민권을 얻는 것도 큰 일일진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는 일을 얼마나 소중합니까?

바울은 로마의 시미권을 가진 것으로 목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미국이나 로마보다 영구하고 가치있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우리는 한 분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성도들을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brother, sister인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형님, 아우, 누님 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형제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형제를 향하여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정서와 언어의 용법에 잘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한 분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형제 자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가족은 혈연관계로 뭉쳐있습니다. 이 땅 위의 가족은 사람의 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만 만나도 반갑고 같은 가족이라는 동질성을 갖습니다. 저는 지난 신정 때 20여명의 가족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년에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본문은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였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 하나님의 구원 계획 >

①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② 죄의 삯은 사망이요, 심판입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죄를 깨끗이 제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④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 영접기도 -

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을 배우고 이용하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실행하여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하는 인생입니다.

이 땅 위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너무 허무합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을 알아 그 진리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년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설교를 저는 눈물을 흘리며 했습니다. 저 자신도 억제할 수 없어 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작년12월 마지막 주일의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시 126:5-6) 『[5]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귀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우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의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이루어집니다. 말과 행실 가운데 교제를 하며,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합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좋은 교제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한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이유 없이 다른 성도들을 헐뜯지 말아야 합니다.

(약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자기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만일 네가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재판관이로다.』

(약 3:8-11) 『[8]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억제할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도다.

[9]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이신 아버지를 송축하고, 또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사람을 저주하느니라.

[10] 같은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느니라.

[11]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있느냐?』

 

 

2. 예수님은 교회성장의 원동력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귀중한 모퉁잇돌이 되셨고’(20)

예수님은 교회성장의 기초가 되십니다. 모퉁잇돌이라는 뜻은 기초요 시험받은 돌이며, 귀중한 초석을 의미합니다. 모퉁잇돌은 주춧돌이라고도 하며 기둥 밑에 괴는 돌멩이를 의미합니다.

(벧전 2:6) 『그러므로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으니 "보라, 내가 택한 귀중한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사 28:16)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시온에 한 돌을 기초로 두었나니 시험받은 돌이요 귀한 모퉁잇돌이며 단단한 기초라.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시 118:22)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제가 대학을 다닐 때 교육학개론이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기언 교수라고 하는 사람이 ‘기초주의’라는 강의를 했습니다. 1년 내내 기초가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초가 무엇이었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기초가 중요하다는 자세는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기초가 되십니다. 건물전체가 하나의 건물로서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것은 한 몸이며 영적인 교회로서 유기체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지금 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기초가 될만한 일꾼들도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초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기초가 되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훌륭한 일꾼들이 많아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도 많은 일꾼들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장로가 10명, 권사가 50명, 집사가 수백명을 헤아립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기초가 예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사도와 선지자, 교사와 목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몸을 이루어나갑니다. 기초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면 그 건물은 우수울 것입니다. 어떤 건축물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기초공사만 마치고 건물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물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기초 위에 여러 성도들의 몸으로 건물을 지어 나가야 합니다.

 

3.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팀웍이 잘 맞아야 합니다.

팀웍을 잘 맞추기 위해 유능한 감독을 막대한 돈을 들여 초빙합니다. 같은 선수들이만 팀웍에 따라 성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도 팀웍이 필요합니다. 그 팀웍은 유기적이어야 합니다.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나가는 것은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신비입니다. 어떻게 수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몸을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상상이나 지식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주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장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인 우리가 각자 조화를 이루며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로서 교회는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한 편 마귀의 처소도 있습니다.

(계 18:2) 『그가 큰 음성으로 힘있게 외쳐 말하기를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

마귀의 처소가 있는 이 땅 위에서 위치적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존재한다는 것도 신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기능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이루어나가는 지체로서 우리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목사의 역할, 교사의 역할, 집사의 역할, 구령자의 역할 등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날마다 영적인 전쟁을 싸워 이겨야 합니다.

 

4.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유기체이므로 성장을 합니다. 교회의 성장은 곧 지체인 성도의 성장과 정비례합니다. 그것은 유기체의 관계입니다. 세포의 수가 증가하면 몸이 자랍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수와 영적인 성장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인 서울 성경침례교회는 성장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전국의 지역모임에 모델이 됩니다.

교회성장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1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일년 예산액이 10억 이상입니까? 교회성장의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성장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목사의 리더쉽입니까? 회원들의 열성입니까? 저희 집 옆에는 꽤 큰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버스도 2대이고, 봉고도 여러 대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는 헌금을 강조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목사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이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습니까? 교회성장의 원동력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교회의 성장을 가져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액을 받는 교회만이 진정한 성장을 가져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들이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우리가 모든 일에 성장하여 그에게 이르리니 그는 머리시며 곧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자란다는 말은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회원들의 영적인 지식이 증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이 증가하며 믿음이 증가하는 것이 곧 교회성장의 척도가 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독일의 패전이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독일의 패전일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우리에게도 소망은 오직 마귀의 세력이 멸망당하고 주님의 다스리시는 정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영적으로는 소돔이요, 고모라이며, 유대인의 거주구역인 게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이 증가하는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성경은 이 땅 위에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교회입니다.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구원을 받는 과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분명이 신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비라고 말씀합니다.

(롬 9:24-26) 『[24] 그가 우리까지도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것이 아니냐?

[25] 호세아의 글에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나의 백성이라, 사랑하지 않은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리라.

[26]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리라."고 하셨느니라.』

 

1. 신비와 비밀은 같은 것일까요?

성경은 또한 일곱 신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머리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거듭남 등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알려져 있으며 계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일곱 신비 중 ‘교회의 신비’라고 불리웁니다.

(엡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며 그의 약속에 동참자가 된다는 것이니라.』

우리나라가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개최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와 공동으로 상속자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롬 8:16-17)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리라.』

(딤후 2:12)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

한 편 성경에는 비밀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신비를 비밀로 번역하였습니다만 킹제임스성경에도 비밀이라는 단어가 별도로 나옵니다. 욥11:6에는 지혜의 비밀이 있고, 욥15:8,29:4에는 하나님의 비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충고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단2:18의 비밀은 문자 그대로 감추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신비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불가사의하고 영묘한 비밀이며, 비밀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알쏭달쏭한 정의입니다만 여하튼 신비와 비밀은 서로 다른 뜻입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본문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향상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전에 간략하게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쓴 것이란 갈2:2 또는 고전12장의 내용이라고 보여집니다.

엡3:6의 ‘신비’는 교회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6절에 나와 있는 내용 그 자체입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고, 공동상속자가 되며, 약속에 동참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수천년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으며 앞으로도 다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당한 고난의 역사는 다른 민족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환란시대를 통과하여 민족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도 유대인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것에서만 예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사실은 롬16:25, 롬2-3장, 고전12장, 갈2장, 롬12:4, 골1,3장 등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행15장 이전에 알았으며 지금 AD64에 에베소서에서 그 사실을 다시 말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갈보리에서 그 기반이 형성되었으며, 행2장에서 이미 시작했지만 과도기를 거쳐 바울에게 께시되고, 다른 사도들에게도 계시되었습니다.

 

3. 신비 가운데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있으며,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을 하지만 사실 헤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믿기는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성경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교회를 통하여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몸이 저 공중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셋째하늘까지 팽창하여 전 우주를 가득 채우고 된다는 놀라운 사실이 계시되었습니다.

(엡 3:8-12)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 보다도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을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라.

[9]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신비의 교제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니

[10] 이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천상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11]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계획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니라.

[12] 그 안에서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명의 신부를 갖고 계시십니다. 그 신부는 바로 교회입니다.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서 점이나 주름진 것이나 또는 그러한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아내입니다. 가족이란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모만 있는 가정을 가족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식이 있어야 가족다운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저는 결혼을 해서 5년 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남들은 다 자식이 있는데 나만 없는 것 같아 매우 서운했습니다. 가족은 부모도 있고 자식고 있어야 모양을 제대로 갖춥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만 계시고 그의 자녀들이 없다면 이 우주는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셨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가족 중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기도라는 단어는 신약에만 192번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기도는 바라는 것들에 대한 요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바울의 기도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 살펴봅시다.

먼저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그것보다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는 일어서서 손을 들고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도 관계 없습니다. ‘기도’란 말은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하나님 앞에 늘어놓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약4:2) 너희가 갈망하여도 얻지 못하고, 너희가 살인하고 갖고자 열망하여도 얻을 수 없으며,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얻지 못하니 이는 너희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

(골1:9) 이런 연유로 우리도 그것을 들은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노니, 곧 너희가 모든 지혜와 영적 지각 안에서 그 분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되어

기도는 장소와 때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기도하였고 저도 군대 생활을 할 때에는 옥외 화장실 근처의 한적한 장소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1. 바울의 기도 내용

1) 그의 성령을 통하여 너희 속 사람 안에서 능력으로 너희를 강건하게 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즉 바울은 성도들의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엡5:18)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바울은 성도들이 영적이 사람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롬8:6)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2) 그리스도께서 집에서와 같이 “믿음을 통하여 너희 마음 속에” 편안히 거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신다는 말은 성령께서 내주하심을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고전6:19-20)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런데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편안히 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땀을 흘려 운동을 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히 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일을 하시지만 그분은 안락의자에 앉아 쉬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안주할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성령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안락의자에 앉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시고 우리는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에 귀를 기울이는 어린아이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의 능력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우리가 쉴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편안히 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뛰는 축구선수들이 우왕좌왕 할 때 감독은 벤취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왔다갔다 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다가 심판에게 주의를 받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C.C.C.열단계 성경교재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왕좌에 앉아있는 모습이 종종 나옵니다. 

 

3) 성도들이 “교리뿐만 아니라”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닦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교회는 교리뿐만 아니라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교리도 중요하지만 사랑도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사랑만 강조하고 어떤 교회는 교리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와 사랑을 모두 강조해야 합니다. ‘뿌리를 내린다.’는 말은 고정되고 유착되어 자란다는 말입니다. 나쁜 것도 유착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유착되면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성도들도 교리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닦아야 합니다. 소위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뿌리를 내려야 생명력이 있고 움트고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쉽사리 죽지 않습니다. 

 

4) 너희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인가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높음’과 ‘깊음’이라는 말은 롬8:39에 나옵니다.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

높음과 깊음은 광활한 우주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 나그네요 타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는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아직 그 깊이와 높이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만 말합니다. 셋째하늘이 있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며, 그 아래쪽으로 광활한 우주와 펼쳐 있고, 우리의 은하는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은하 속에는 조그마한 태양계가 있으며 그 태양계 속에 지구가 있습니다. 지구의 반지름은 6400Km이고 둘레는 40000Km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자동차를 사서 40000Km를 주행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지구 속에 있는 대한민국, 서울 성경침례교회 그 속에 있는 나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현주소는 지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갈 곳은 넓디넓은 우주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작은 장소가 아닌 더 크고 광활한 우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처소가 얼마나 아름답고 큰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5)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했습니다.

 

6)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가득차기를 기도했습니다.

(엡5:18)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갈5:16)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7) 우리를 생각 이상으로 풍성하게 행하실 수 있는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한정된 공간과 제약된 시간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이 없는 세상과 모든 시대에 걸쳐 우리를 생각 이상으로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매우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큰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환란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음에는 가슴 떨리는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풍성한 삶이 문자적으로 이루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헨델의 메시야의 합창곡인 할렐루야의 마지막 부분의 가사는 ‘영원히(forever)’입니다.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라!

(엡4:1-3)

 

(엡 4:1-3) 『그러므로 주로 인해 죄수된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되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

 

여러분은 감옥에 들어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이 전과자이냐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투옥된 적이 없는 사람이 요셉이나.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옥의 환경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모두 직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감옥의 환경은 실로 열악하고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에도 먹여주고 입혀주지만 왠지 모르게 춥고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죄수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로 갇혀서 생활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1. 바울은 주님 때문에 죄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로마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졌지만 스스로 자초하여 죄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던 그가 감옥에 갇혀 죄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때문에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지금 시대는 주님을 믿는 일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을 고집하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믿는다면 아무도 우리를 간섭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고난은 우리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죄수가 되어 본 적이 없지만 바울은 주님 때문에 죄수가 되어 차가운 감옥에서 연단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연단의 과정이 없으면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죄수번호 000번인 바울이 우리에게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1.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로, 어떤 성도는 교사로, 집사로, 구령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엡4:11)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딤후1:11) 이를 위하여 내가 이방인들의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입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지만 그 직업을 소홀히 하여 대충 일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업의 현장에서 가능한 한 복음을 증거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잘 믿는 성도들로 둘러싸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불신자들과 잘 믿지 못하는 성도들로 둘러 싸여 있는 현실입니다. 얼마전 형이 중국의 교포를 만나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기독 실업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전화 통화를 간단히 해 보았는데 별로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아 만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성도라고 해서 마음대로 교제를 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2.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한 몸의 지체가 된 우리는 겸손하며, 온유하고(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오래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갈 5:22-23)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순종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친절, 선함,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아무 스스럼 없이 우리를 통하여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입니다. 즉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원동력은 바로 성령충만이라는 것입니다.

 

3.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화평의 띠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됨은 한 몸으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 몸 다운 열매와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어야 하고 각자의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서로 용납해야 하며, 화평의 띠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력하라는 말은 영어로 Endeavouring 인데 그것은 애를 쓰고 수고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땀도 흘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각자의 일을 담당할 때나 교제할 때, 서로 사랑하고 헌신할 때에 반드시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것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Endeavouring

 

 

 

 

 

 

 

 

 

 

 

 

 

 

 

 

 

 

 

 

 

 

 

 

 

 

 

 

(엡 4:11-16)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니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그들이 속이려고 기다리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우리가 모든 일에 성장하여 그에게 이르리니 그는 머리시며 곧 그리스도시니라. 그로부터 온 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과적인 역사를 따라 각 마디를 통하여 공급을 받아 결합되고 체격이 형성되어 몸을 성장시키며 사랑 안에서 몸 자체를 세워 나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은사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은사라고 하면 제도권 교회에서는 ‘방언’, ‘신유’ 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자체를 교회에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 은사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은사는 각 성도에게 중복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성도에게는 두 가지 이상의 은사가 주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람 자체를 교회에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은사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가 있습니다.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복음전도자

④ 목사

⑤ 교사

 

2. 은사의 목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가 주어진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 은사를 받은 사람 자체를 위한 것 보다는 다른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은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섬기는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낮추셔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13:4-5) 『저녁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옷을 벗어 한쪽에 놓고 수건을 가지고 허리에 두르시더라. 대야에 물을 부으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또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시기 시작하고』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은사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분열시켜서는 안됩니다. 변개된 성경과 잘못된 교리로 말미암아 사분오열된 우리나라의 교회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 믿음도 하나이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믿음도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됨과 동시에 우리의 주님의 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 개인이 그 분량에 이르도록 은사가 쓰여져야 합니다. 지역교회에서 한 성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 성도가 잘 양육되면 그만큼 예수님의 몸은 튼튼하게 세워져 나갑니다. 반면 한 성도가 그 힘을 잃고 방황하게 되면 병든 몸이 됩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온갖 교회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를 받은 일꾼들이 바른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교리를 정립하여 정직하게 실행한다면 온갖 이단 교리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땅 위에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방황하며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여 교회를 옮겨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최종권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방황합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거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동기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죽으심이 바로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면, 사랑이 없는 진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모든 일에 성장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르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머리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성장합니다. 교회는 몸이요, 예수님은 머리이십니다. 머리와 몸은 유기적 관계입니다. 머리로부터 양분이 공급되어야 몸이 자란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몸은 음식물을 섭취하여 소화시켜 활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양분을 머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얻습니다.

결국 교회에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온전한’(perfect)이라는 말은 ended, complete 로 궁극적 완성된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죄없는 상태의 완전함이 아니라, 경건함이 더 깊어지고 더 자라나는 성숙된 단계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롬 12:2)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빌 3:12-15) 『내가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요, 이미 온전해졌다 함도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예수에 의하여 붙잡힌 그것을 나도 붙잡으려고 좇아갈 뿐이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표적을 향해 좇아갈 뿐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온전한 사람들은 이같이 생각할지니라. 만일 너희가 어떤 일에 다르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너희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라.』

 

 

 

 

 

 

 

 

 

 

 

 

 

 

(엡 4:17-2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고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총명은 어두워졌으며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 과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 그에 의해 배웠을진대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너희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의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라. 화를 내되 죄는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더 이상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일하게 하라. 그가 손수 선한 일을 하여 궁핍한 자를 구제할 수 있게 하라. 너희 입에서 어떠한 더러운 말도 나오지 아니하게 하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좋은 것만을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옛사람은 롬6:6에 등장합니다.

(롬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옛사람이란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악을 향한 타고난 성향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연인 속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성도 안에서는 활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상태는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위치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바에 의해 옛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음으로써 옛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된 것으로 여겨 이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새사람은 거듭난 사람으로 성도라고 부릅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에 동참한 사람으로 엣사람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새사람은 믿는 자 안에서 형성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 위에는 개혁을 부르짖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과 바람대로 과연 개혁이 되었습니까?

 

1. 옛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허망하게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방인들의 실상은 18-19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엡 4:18-19)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총명은 어두워졌으며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듣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들이 성경에 대해 쓴 글들을 주의깊게 읽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이단들과 거짓교사들이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여 자기의 교리를 정당화 합니다. 그 거짓에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성경과 교리를 다른 지체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아는 것과 아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내용을 다른 성도에게 가르침으로써 더욱 교리를 확실하게 합니다.

 

3.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음 내용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다음의 행실을 이행해야 합니다.

①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진리를 배웠으면 그 진리를 누군가에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면 그 말을 써먹습니다. 우리도 성경적 교리를 배웠으면 그 교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기 이전에 그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설교자나 성경교사가 말씀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면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② 화를 내되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가능하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부득이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마귀는 우리가 화를 내어 분별력을 잃었을 때 죄를 짓도록 선동합니다. 그런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억제하고 화를 낸 순간에 죄를 짓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③ 손수 선한 일을 하여 구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땅 위에는 가난과 기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 가운데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손수 일을 하여 얻은 소득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물론 절대로 광고는 하지 마십시오.

④ 서로를 세우는데 필요한 좋은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의 단점을 들추어 내고 험담을 한다든가 쓸 데 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세워주기 위해 그들을 격려하는 좋은 말을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꼭 필요한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제를 한다는 명목으로 때로는 불필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상하게 다른 형제를 비방하게 되고 다른 자매의 단점을 지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세우는데 필요한 좋은 말을 가려서 해야합니다. 실로 말을 잘 하는 자가 참된 용사입니다. 영적 전쟁에서의 전사는 먼저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유창한 웅변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합니다.

(약 3:2) 『우리 모두는 많은 일에 실수 하나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며 온 몸도 제어할 수 있느니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하고, 또 누가 섬기려거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 이는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 분께 찬양과 권세가 영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1. 성령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을 우리가 슬프게 해드린다는 것은 성도답지 못합니다.

 

2.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집안에 각종 쓸모 없는 것들을 쌓아두면 나중에는 짐만 되고 쓰레기가 됩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집안이 정리되고 깨끗해집니다. 저도 얼마전에 쌓아둔 쓰레기를 처분하는데 꼬박 3일이 결렸습니다.

성도로서 성령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신랄함 : 어떤 일의 분석이나 지적이 매우 날카롭고 모질다는 말입니다. 찌르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찔림을 받고 씁쓸하고 처참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약 3:9-11)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이신 아버지를 송축하고, 또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사람을 저주하느니라. 같은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느니라.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있느냐?』

② 분개 : 몹시 화를 냄

③ 분노 : 몹시 화를 냄

④ 고함 지르는 것 :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것

⑤ 욕설 : stupid

⑥ 악의 : 악하고, 나쁜 것, 남을 해치려는 나쁜 마음과 그 동기, 마음이 중요

(롬 10:10)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

(딤전 6:5) 『생각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나오라.』

 

3.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행해야 합니다.

① 친절 : 인사로 나타납니다. “감사합니다.”

② 다정다감(多情多感) : 사소한 관심, 애정, 격려 cf.전화 : 설날에 처가에서 있었던 일-덕담을 나눌 때 서로 전화 좀 하자.

③ 용서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형제 자매들을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요일 2:10-11)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자기 안에 실족할 계기가 없으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되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일 3:14-15)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요, 살인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일 4:7-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하나님을 아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느니라. 이로써 우리가 그 분 안에,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이는 그 분이 우리에게 그의 영을 주셨음이라.』

 

 

 

 

 

 

 

 

 

 

 

 

 

 

 

 

 

 

 

 

우리는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자녀들 특히 사랑받는 자녀들은 아버지께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물과 희생으로 드린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으며 자신의 몸을 짐승처럼 희생으로 드리셨습니다.

(출 29:18) 『제단 위에서 그 숫양 전체를 불사를지니 이것이 주께 드리는 번제니라. 그것은 향기로운 냄새니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니라.』

(출 29:16) 『그 숫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제단 위의 주위에다 뿌리고』

예수님은 도살당한 어린 양이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장차 왕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계 5:6-7) 『이에 내가 보니, 보라, 보좌와 네 생물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 도살당하였던 것같은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더라.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그가 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책을 취하더라.』

(계 5:12)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하더라.』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으로 지켜질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할 뿐입니다. 그것은 헌신과 물질적인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빌 2:17) 『만일 내가 너희 믿음의 희생제물과 봉사 위에 나를 드린다 해도 나는 기쁘고 또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라.』

(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나는 너희가 보낸 것을 에파프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하게 되었노라. 이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2.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음행, 더러운 것, 탐욕은 이름조차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합당한 행위입니다. 합당하다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실행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더러운 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TV에 등장하는 강사들은 더러운 욕과 성적인 묘사로 시청자들을 미혹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이 음행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을 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TV 앞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TV, 비디오, 만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 혼들이 그들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는 심각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더러운 욕이 이 세상에 넘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1972-1974), 제가 속해 있는 학급의 학생들 중 욕을 상습적으로 하는 학생은 60명 중에 58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에 욕을 달고 다니며 생활했습니다. 그들의 욕의 대상은 주로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언어 환경은 더욱 심각합니다.

 

3.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감사를 표할 줄 압니다.

음탕한 말은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 휴식시간이 되면 잡담을 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의 대부분이 음탕한 말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말도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맞지 않는 말, 비성경적인 언행, 아무 의미도 없이 지껄이는 말 등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농담도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농담은 유머와 구별되어야 하는데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가벼운 이야기나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헛소리들이 우리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감사를 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대해 모든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형제들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형제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도우라고 주신 형제들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다. 작은 친절에고 감사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도움을 주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비지니스 관계로 이익을 위하여 뇌물성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학부형들이 때로는 뇌물성 감사를 표합니다. 그런 감사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드물기는 하지만 진정한 감사를 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직장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에도 기사들에게,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에도 직원들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혼을 이겨올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예절교육을 시킵니다. 선생님들 사이에도 인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인사를 잘 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그런 선생님은 일단 좋은 인상을 주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상속받을 것이 없는 상태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받아 지옥에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속받을 것이 없는 불쌍한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① 음행하는 자입니다.

② 더러운 자입니다.

③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숭배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롬8:17)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에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계5:10)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리라.』

(계 5:10)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 위에서 통치하리이다."라고 하니라.』

 

 

 

 

 

 

 

 

 

 

 

불순종의 자녀들은 마귀에게 속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성경적인 교리에 속한 종교심은 있으나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을 누가 속입니까? 바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거짓교사들이 그들을 미혹시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서 행해야 합니다.

 

1. 빛의 자녀들은 무엇이 주를 기쁘게 할 것인지 입증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요?

(롬 8:8)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육신 안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으로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롬 15:1) 『우리 강한 자들이 마땅히 연약한 자들의 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

연약한 자들의 약함을 담당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입니다.

(고전 7:32) 『그러나 나는 너희가 염려없게 되기를 바라노라.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은 주께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까 하여도』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간에 주님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고후 5:9) 『이 때문에 우리가 애쓰는 것은 거하든지 떠나 있든지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바라는 것이라.』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갈 1:10)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랴? 아니면 하나님께 사랴? 아니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겠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사람들의 호감을 인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 2:17) 『만일 내가 너희 믿음의 희생제물과 봉사 위에 나를 드린다 해도 나는 기쁘고 또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라.』

주님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기뻐하는 자세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나는 너희가 보낸 것을 에파프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하게 되었노라. 이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성도를 물질로 섬기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주를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딤후 2:4) 『군사로 복무하는 자는 아무도 자신의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인과 같은 자세로 헌신하는 성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 11: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 분이 존재하시는 것과 그 분이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 마땅히 믿어야 하느니라.』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구원을 받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주님을 지속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2. 빛의 자녀들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의 일들은 빛에 의해 드러납니다. 성령님의 조명으로 비진리는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은 우리에게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조명하십니다.

(출 25:37) 『너는 일곱 등을 만들고, 그들로 등들을 밝히어 그 옆을 비추게 하라.』

그러나 이 세상은 지금 너무 어둡습니다. 세상 신이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빛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을 강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무엇인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분이 친히 빛이 되심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빛의 역할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속히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빛이 되주셔야 합니다.

지성소 안처럼 더 이상 세상 빛이 필요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계 22:5)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그들에게는 촛불도 햇빛도 필요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 무궁토록 통치하리라.』

 

3. 빛의 자녀들은 정확하게 행해야 합니다.

희미하게 행한다든지 아무렇게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명한 사람들 처럼 행하여 시간을 사서 얻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 시간을 사서 얻을 수 있습니까?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루종일 PC방에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 그 다음 날 학교에 와서 하루종일 잠만 자다가 집에 가는 학생들이 가득 차 있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성도들은 시간을 사서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게서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시간을 우선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령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시간을 투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을 사서 얻는 길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서로 사랑하기만도 부족한 짧은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어떤 일에 인생을 투자할 것인지 신중하게 결정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조명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것을 이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요, 우리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의하여 각자 목사로 교사로 복음전도자로 기타 여러가지 은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의햐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도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죄입니다. 시간을 죽인다면 시간이 우리를 죽일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청소기를 밀면서 성경을 읽을 수도 있고 설교문을 타이핑하면서 영어회화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면서 책을 볼 수 있고 차 안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집중력을 요하는 일도 있지만 왠만한 일들은 두 가지씩 할 수 있습니다.

TV 뉴스를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소식은 제목만 보아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헤드라인 뉴스만 보아도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스포츠뉴스만 보아도 전 경기를 다 알 수 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대형사건만 터지만 신바람이 나서 그 뉴스를 과잉보도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집중보도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특집을 마련합니다. 방송국 사람들은 사고가 나야 취재를 하고 취재를 해야 진급을 하고 출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우리들이 말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한 번만 보아도 어떤 사건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알 권리 운운하면서 만든 모든 프로그램들을 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볼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을 때에는 멍청하게 모든 것을 봅니다만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제가 오등학교 5학년일 때 집에 TV가 들어왔습니다. 어찌나 신기했든지 채널 조정시간 오후6시부터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밤 12시까지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가치가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검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당한 운동과 휴식이 필요합니다. 사실 휴식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적당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휴식이 없는 강행군을 했습니다.

(고후 7:5)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육신은 편하지 못하였고 사면에서 고난을 받았으니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고후 7:5) 『For, when we were come into Macedonia, our flesh had no rest, but we were troubled on every side; without were fightings, within were fears.』

바울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은 휴식을 원치 않았습니다. 휴식을 할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 바울은 영원한 안식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살후 1:6-7)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의로운 일은 이것이니, 너희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고통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라. 주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성경은 미래의 안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안식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필요를 위해 주신 날입니다. 완전히 쉬는 날로서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첫째날을 지킵니다. 첫째날은 완성된 구속을 기념하는 날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자발적인 경배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성도의 내적생활의 근거, 즉 바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하라’입니다. 술취하지 말라!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라! 이 두가지는 서로 대립되는 상황합니다. 흔히 술취한 사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공통점을 이야기합니다만 이 두가지는 서로 다릅니다.

어떤 집안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무렵 감리교 목사집안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감리교 감독이 될만한 인물이었으나 외국유학을 갔다온 소위 유학파 목사들에게 밀려 감독을 하지 못하고 퇴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지켜 본 아들 목사도 사표를 쓰고 기독청년회니 해양소년단이니 YMCA운동이니 하며 외적 생활에 세월을 낭비하다가 그만 술을 많이 마시게 되어 말년에 중풍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그에게는 5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평탄치 않은 험악한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한마디로 술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집안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더라면 이런 비참한 지경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1. 성도의 내적생활은 찬송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찬양하라는 말은 시편에서만도 137번 나옵니다. 구약207번과 신약22번에 비교해 볼 때 시편은 찬양의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내용 자체가 찬양일 뿐만 아니라, 찬양하라는 단어가 성경전체의 59.8%를 차지합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찬양을 많이 불렀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감옥에 있을 때 찬양을 했습니다. 찬송생활의 권능이라는 책도 탐독했습니다. 찬양은 저의 생활의 주용한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2. 성도의 내적생활은 감사로 넘쳐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고난 중에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살전5:18

감사하라는 말은 신약에 71번 구약에 87번 나옵니다. 감사는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성도들에게도 감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친절과 그들의 도움에도 감사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설 때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 음료수대에서 물을 마실 때에 예의를 갖추고 다른 사람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것은 바람직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찬양과 감사가 우러 나옵니다. 바꾸어 말하면 찬양과 감사는 성령충만의 중거가 됩니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라 찬양과 감사입니다. 제도권 교회의 기도원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감사도 잊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목이 쉬라고 방언으로 기도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찬양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이런 생활은 결코 바람직한 성도의 내적생활이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의 인간관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부관계일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올바로 정립되어야 가정이 안정되고 가장이 잘 되어야 사회와 국가가 안정됩니다.

 

계21:9 주석참조

호2:2 주석참조

 

요3:29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친구는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형제들은 이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계19:6 또 내가 들으니, 큰 무리의 음성 같고 많은 물 소리 같으며, 굉장한 천둥 소리 같은데 말하기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도다.

1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분께 존귀를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19:8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하더라.

 

우리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혼인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죄사함으로 회복될 하나님의 아내이며, 교회는 어린 양의 처녀신부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에서 하나님의 아내가 되고 교회는 하늘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됩니다. 어린양의 아내는 신부인 교회이고 하늘의 예루살렘과 관계 있으며, 이스라엘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간음하여 거절당한 아내로서 다시 회복될 것인데 그들은 땅과 관계 있습니다. 그리므로 용서받고 회복된 아내는 처녀나 신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우리 사이의 구별입니다. 여하튼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예수님과 우리들 사아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네 종류의 아내가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교회, 보통 아내, 그리고 로마서 7장에 등장하는 아내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두려워함으로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서로 복종한다는 표현이 남녀평등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1. 아내들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22-24)

 

2. 남편들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25-31)

 

3.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23-24, 25-27, 29, 32)

 

결론(33)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적으로 부모와 자녀라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부모와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각각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서신의 곳곳에서 이런 당부의 말씀이 발견됩니다.

 

1.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①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순종이라는 말은 복종하는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윗사람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 아랫사람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군대에서 사령관이 훈시할 때 장병들은 사령관의 말을 경청합니다. 제가 가끔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께서 저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그 이야기는 수십 번이나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제가 노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재방송을 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그 말씀을 듣습니다. 바라기는 주님께서 우리가 노인이 되더라도 분별력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②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약속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10계명 중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5번째에 해당합니다만 약속이 있는 계명으로서는 첫번째입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왕이나 윗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높여 드리고 정중하게 대합니다. 옛날 왕 앞에서는 등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왕에 대한 예의입니다.

 

2. 부모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①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성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업준비를 소홀히 한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다가 수업분위기가 나빠지면 그 모든 책임을 학생들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래서 화를 내게 되고 급기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체벌을 가합니다. 그런 종류의 화와 체벌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런 교사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사소한 일로 어떤 학생을 지나치게 나무라는 경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냅니다. 측량할 수 없는 정도의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 교탁을 내리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면 몽둥이 찜질을 합니다.(to anger beyond measure)

②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리입니다. 그리고 교훈이라는 말은 가르치고 징계하고 훈련을 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교훈의 목적은 양육입니다. 교훈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녀가 교정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아무런 효과가 없는 교훈은 무의미하며 비성경적입니다.

훈계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심어져야 합니다. 교사와 부모가 1시간 동안 훈계를 했는데 자녀들은 딴 생각만 하며 마음 속에 담지 않는다면 그런 훈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요즘 청소년들은 다양한 멀티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어 단순하고 진부한 훈계는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 그들의 마음 속에 강하게 심어야 합니다. (a putting into the mind)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서로 복종하라.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주인은 종에게 종은 주인에게 복종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상호복종을 의미합니다.

(엡 5:21)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서로 복종하라.』

 

1.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주인,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여기서는 육신에 따르는 주인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종이라는 말은 조용히 겸손하게 권위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폭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옛날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서 행동에 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경우 심판을 행사하십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말로 조용히 타으리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물리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정당한 지시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면 해고당합니다. 떨림은 두려움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두려우면 떨립니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쳐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왜 피곤해서 엎드려 자는데 깨우느냐고 대듭니다.

② 순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중인격자입니다. 저도 학교에서는 악마, 교회에서는 천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이중인격자,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것은 순전함과 거리가 멉니다. 순전한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같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③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직장 상사가 볼 때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상사가 없으면 노는 직원은 눈가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기본 자세를 갖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직장은 밥을 벌어먹기 위한 아르바이트 장소입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라고 해서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돈을 받는 것은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저도 신학원을 다닐 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느라고 직장에서 적당히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직장은 시간을 때우는 장소가 아닙니다.

④ 선한 뜻으로 봉사하되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유를 달 수 없습니다. 선한 뜻으로 봉사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자세로 친절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직장이라는 조직체에서 동료직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선한 뜻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한다는 말은 섬긴다는 말이며, 자신이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더구난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잘 해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분에게 무엇인들 못해드리겠습니까? 그런데 그와 같이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갈 4:8) 『그러나 그때에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신들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딤전 6:2) 『믿는 주인을 섬기는 자들도 그들이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더욱 잘 섬겨야 하리니, 이는 그들이 신실하고 사랑받는 자들이며, 선한 일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라.』

종은 주인을 위해 유용하고 쓸모 있으며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 주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며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을 위해 일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국가나 직장이나 개인을 위해 섬긴다면, 그들을 위해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⑤ 선을 행하면 주로부터 그대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선한 뜻으로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주인을 도우려는 자세로 주인을 위해 유용한 일을 하면 주로부터 그대로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보상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보너스를 받고 표창장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의 칭찬과 상급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 땅위 상은 사라지고 휴지조각으로 변합니다만 하나님의 상급은 영원합니다. 저도 교직에 있으면서 상장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아무 쓸모가 없는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급을 기다립니다.

 

2. 주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① 종들에게 동일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선한 뜻으로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인도 종들에게 선한 뜻을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주인들도 종들의 유익을 생각해서 억누르지 말고 친절하게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② 위협을 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위협이라는 말은 상대방을 해치려는 의도로 하는 말입니다.

공갈이나 협박을 하며 부하 직원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 동료교사의 불평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실에 시설이 망가지면 학급담임이 변상을 하라는 교장의 지시가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담임이 변상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시는 교사의 불평만 일으킵니다.

③ 주인의 주인도 하늘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뛰는 자 위에는 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땅의 주인 위에는 진정한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께는 사람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인격, 재산, 생각, 신체조건 등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긴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스스로 잘났다고 뻐길 수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스스로 만든 것처럼 교만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친히 만드셨습니다.

 

 

 

 

 

 

 

 

 

 

 

 

 

 

 

 

 

(엡 6:10-17)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너희가 악한 날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서서 진리로 너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짐으로써 능히 너희가 악한 자의 모든 불붙은 화살을 끌 수 있을 것이라. 또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군사는 강해야 합니다.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역습을 가해야 합니다. 파워가 약하면 적의 공격에 금방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우리의 능력은 주 안에서 옵니다. 우리의 능력은 주님의 힘의 능력 안에서 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능력을 힘입어 강건해야 합니다.

강건하라! 그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강건이라는 것은 외적인 강건함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능력의 강건함을 세상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강건함이란 내적인 강건함입니다. 얼마전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 총각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유도를 하는 체육선생님이었습니다. 딱 벌어진 어깨에 한 눈에 보아도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부분은 그런 체격조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의 육체는 보잘 것 없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영적이고 내적인 강건함이야말로 영적 전쟁에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그러면 영적전쟁을 대비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술책이란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속이기 위한 마귀의 가공적인 무기입니다.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들이 바로 마귀의 방법입니다. 마귀는 결코 자신의 방법이 마귀에 속하는 것임을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우리를 속입니다. 그냥 빠져들어가다 보니 뒤늦게 마귀의 술책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립니다.

마귀는 그 사람의 유형에 알맞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우리가 구령할 때 참고하는 책이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오라’라고 하는 책인데 그 책에는 42가지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귀도 우리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지혜로운 답변을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속임수를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아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교활한 속임수로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일을 성취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속여서 그 나름대로의 이득을 취합니다.

이런 마귀의 책략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전신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자매는 주님께 전신갑옷을 보여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매가 전신갑옷을 보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실제적으로 우리가 전신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신갑옷이란 빠진 것이 없이 모든 부분을 갖춘 갑옷입니다. 갑옷은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한 철로 만든 옷입니다.

 

2. 우리의 적은 마귀와 그의 부하들입니다.

적을 알아야 적절한 대응을 하여 싸움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의 진영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영적인 싸움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면 마귀의 진영을 살펴봅시다.

① 정사들 : 공국의 권력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에 관한 일, 행정에 관한 일로 마귀의 수중에 들어 있는 권력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② 권세들 : 부와 높은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누리는 권리나 특혜를 말합니다. 이것 또한 이 세상의 신인 마귀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③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 : 이 세상은 부정적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멀리 합니다.

(요 8:23)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나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노라.』

(요 14:30) 『이후로는 내가 너희에게 많이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나, 그는 내 안에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아니함이라.』

(요 16:11) 『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

(롬 12:2)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도 아니요, 무로 돌아갈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니라.』

(고전 3:19) 『이는 이 세상 지혜가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라. 기록되기를 "주께서는 현명한 자들을 자신들의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느니라.』

(고후 4:4) 『그들 가운데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

(엡 2:2)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딤전 6:17) 『이 세상에 있는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마음이 교만해지지 말고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요하게 주셔서 향유케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라고 하라.』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크레스케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티아로 갔으며』

이렇게 이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주님의 통치하에 들어갈 때가 곧 다가옵니다. 그 때를 기다립시다.

(계 11:15) 『그 후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있어 말하기를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 분이 영원 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고 하더라.』

어두움 또한 부정적입니다. 어두우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밤은 어떻습니다. 밤은 빛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다만 제대로 볼 수 있을만큼의 빛의 양이 없는 상태입니다. 빛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가로등이 없는 야간국도를 운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갑자기 보행자가 뛰어들면 얼마나 당황하게 됩니까? 살인도로인 42번 국도에서 교회를 가던 도중 M교회의 집사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갑자기 국도에 뛰어들어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들은 이 세상의 일들을 좌지우지 하면서 우리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끕니다.

④ 높은 곳에 있는 영적인 악 : 마귀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몸도 없으며 물질적인 부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악하며, 해를 끼치는 존재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움과 평화로 위장하지만 불쾌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는 진실하지 않고 비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이 두려운 존재는 분명히 그룹들 중의 하나로 창조된 자이었고, 큰 권위를 지닌 기름부음 받은 존재이었지만 교만으로 타락하여 셋째 하늘에서 쫒겨나 땅과 공중을 자신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의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악한 날에 저항하며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stand) 있어야 합니다.

저항이라는 말은 적과 대치하여 서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필리스티아인들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삼상 17:21)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인들이 전열을 갖추었으니 진영과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더라.』

이 때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나갔습니다. 그는 사울왕의 옷을 입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갑옷을 입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삼상 17:38-40) 『사울이 자기 갑옷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쇠미늘 갑옷을 입히더라. 다윗이 그의 갑옷 위에 칼을 차고 걸으려고 해 보았으나 익숙하지 아니하므로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이것들이 내게 익숙치 아니하므로 입고 가지 않겠나이다." 하고 그에게 벗어준 후 그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시냇가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가 갖고 있는 목자의 자루 즉 여행자의 자루에 넣었으며, 손에 물매를 가지고 그 필리스티아인에게 다가가더라.』

우리는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다 이룬다는 것은 임무완수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군사에게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서’(stand) 있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신이 지배하는 이 땅 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영적인 골리앗이 우리를 조롱하고 서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영적으로 하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현대인들은 상황윤리 운운 하면서 제멋대로 처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우리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지 않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4. 전신갑옷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신갑옷은 빈틈이 없는 옷입니다. 우리는 전신갑옷 안에 있어야 안전합니다.(탱크 속에 있는 군인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적군이 쓰러진 줄 알고 머리를 탱크 밖으로 내밀면 죽음입니다.) 자 그러면 전신갑옷의 목록이 무엇인지, 얼마나 빈틈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① 진리로 허리띠를 해야 합니다. 머리도 중요하지만 허리도 신체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허리는 가슴과 허벅지의 중간 부분에 해당합니다. 허리라고 말은 성경에 이렇게 등장합니다.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형제인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왔을지라도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히 7:10) 『이는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에 레위는 아직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

조상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조상의 생식세포 속에 DNA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허리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벧전1:13에서는 생각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는 생각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끝까지 바라라.』

사람은 어렵거나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허리를 동이고 나섭니다.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도 집안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치맛끈으로 허리를 묶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적진을 바라보며 진리로 허리 띠를 질끈 묶어야 합니다. 이제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다음 진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진리는 상상이나 고안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실, 진실, 참된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진실되고 믿을만한 사실로 허리를 동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② 의의 흉배를 입어야 합니다. 흉배는 출애굽기에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20번)

(출 28:4) 『이것들이 그들이 만들 의복들이니, 흉배와 에봇과 겉옷과 자수옷과 관과 허리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의복을 만들어 그가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도록 하라.』

흉배는 가슴을 덮어 보호하는 갑옷의 한 가지입니다.

③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발에 신을 신어야 합니다.

우리는 준비합니다. 구령을 할 때에 성경과 전도지, 마이크, 그림 등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힘찬 출발을 합니다. 아참! 이런 맨발로 문을 나섰군요. 최종적으로 신을 신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서는 구령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을 신어야 합니다. 구두에 광도 내고...

④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집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가 중요합니다. 방패는 온 몸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방패는 충분히 커야 하고, 쇠난 가죽으로 만들어져 화살을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병사의 몸을 보호하고 전쟁 중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방패가 필요 없습니다. 군인들도 평상시에는 평상복만 가볍게 입습니다. 그러나 비상이 걸리면 단독군장을 하고 밥을 먹으러 갈 때에도 철모를 쓰고 수통이 달려 있는 요대를 허리에 찹니다. 우리는 항상 전쟁 중입니다. 육신과의 전쟁, 세상과의 전쟁, 마귀와의 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3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전쟁도 패하면 상급을 잃어버립니다. 그 어떤 전쟁도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 선하심, 도우심, 신실하심(약속을 지키심) 등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모든 불붙은 화살을 끌 수 있습니다. 마귀의 무기는 불붙은 화살입니다. 이 화살은 미사일과 같습니다. 저는 군대 생활을 병기탄약사령부에서 했습니다. 전군의 탄약을 관리하는 본부입니다. 그런데 수 백 종의 탄약 가운데 가장 위력이 있는 것이 바로 미사일입니다. 그래서 특수탄약이라고 해서 따로 취급합니다. 총알은 단순한 인마살상용입니다. 그러나 불붙은 화살은 공성무기가 됩니다. 견고한 진영을 파괴하는 가공할만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화살에는 독화살도 있고, 불화살도 있습니다. 때로는 총알보다 위력적인 이 화살은 번져나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하여 화살을 맞은 사람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불은 뜨거움을 가져옵니다. 불은 심판입니다. 마귀의 공격을 허용하면 건물에 불이 붙습니다.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믿음의 방패를 갖추는 것입니다. 아주 크고 튼튼한 방패입니다.

⑤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투구는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군인은 철모를 씁니다. 왜냐하면 머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사람도 헬멧을 씁니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우리 위에 있는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위에 있는 권위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⑥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칼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칼입니다. 우리의 칼인 줄 알고 함부로 휘둘러서는 주위 사람이 다칩니다.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우리는 통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 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도 생각나게 하십니다. 칼은 공격무기입니다. 영적전쟁은 방어만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강력한 공격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이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마귀의 공격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여 이겨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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