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인간 창조의 목적 (창 1:26-28)

하나님아들 2024. 12. 22. 20:33

인간 창조의 목적 (창 1:26-28)

 

_손종태 목사(진행교회)

 

각 나라의 언어 중에 단수와 복수가 명확하게 구분된 언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언어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는 단수와 복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영어는 단수와 복수의 구분이 명확하다. "여기 책이 있다.”고 할 때 영어는 한 권일 경우 “Here is a book."이라고 표현한다. 두 권 이상의 책이 있을 때는 "Here are books."라고 표현한다. 동사와 명사를 분명하게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히브리어는 단수와 복수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한 한국어와 달리 단수와 복수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원래의 성경이 단수와 복수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단수와 복수를 잘 구분할 때 때때로 자칫 간과할 수 있는 부분에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창세기 22장 5절을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개역한글판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후 내가 돌아오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원문을 보면 ‘내가’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실 복수형이다. 그래서 개역개정판 성경은 “우리가(복수)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로 번역하였다. 아브라함만 돌아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개역한글판과 달리 아브라함과 이삭이 돌아온다는 의미를 살린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은 이삭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만약 이삭이 결혼하여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면 이삭이 죽더라도 그 자녀들을 통하여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시점에 이삭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자녀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삭이 결혼하지 않아서 자녀가 없는데 번제로 바쳐져서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말이다. 번제로 바쳐진 이삭이 공중의 재가 될지라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들을 이루실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7-1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이 그 종들에게 ‘우리가(아브라함과 이삭)’ 돌아오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단수와 복수를 잘 구분해서 읽는 것은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인사이트를 얻게 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때 하나님으로 번역된 단어인 엘로힘은 복수형 단어이다(단수는 엘로아흐이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이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이해한다.

 

 사실 문법적으로 볼 때 주어가 복수형이기에 ‘창조하다’라는 뜻의 동사는 복수형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동사는 단수형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미 창세기 1장 1절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더 명확히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three persons)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 6:4)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시다.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한 분이시다.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신비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이론 중 삼신론이 있다. 하나님이 세 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양태론은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목사님, 집에서는 아버지, 다른 곳에서는 아저씨로 불리는 것처럼 한 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그렇게 표현된다는 주장이다. 얼핏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자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성부께서 안 계신 것이 아니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하나님은 아버지로 역사하시고 예수님은 아들로 역사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동시에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여러 가지 이론을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므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다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인격으로 존재하신다. 성경은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한다. 이것은 신비이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창조

 

 

“하나님이(복)​ 이르시되(단) 우리의(복) 형상을 따라 우리의(복) 모양대로 우리가(복) 사람을 만들고(단)”(창 1:26)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장면이다. 역시 하나님은 복수형인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르시되’와 ‘만들고’라는 동사가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처럼 단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 창조에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인 27절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나타난다.

 

 “하나님이(복) 자기(단) 형상(in his own image)곧 하나님의(복)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단)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단)”(창 1:27)

 

 27절을 자세히 보면 복수형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자기’라는 표현이 복수형이 단수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인격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 한 인격이 누구인가? 그분은 제 2위격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형상과 모양”은 단순히 내면적인 성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외형적인 모습도 의미한다. 그 모습이 한 분으로 귀결된다. 예수님이시다. 왜 인간을, 아담을 예수님의 외형으로 만드셨는가? 

 

 

 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대로 만드셨을까? 역사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 위해서 인간을 그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대로 만드신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입고 있는 상의의 모양은 사람의 몸 상체를 본떠 만든 것이다. 바지의 모양은 사람의 몸의 하체를 본떠 만든 것이다. 옷의 모양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사람의 몸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옷은 두 팔을 집어넣고 두 다리를 넣었을 때 꼭 맞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의 상의를 바지를 입고 있는 다리 쪽에 걸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하의를 상체에 입으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어야 했는지는 영원 과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 그 계획은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 안에 거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우리의 외형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 그분을 닮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신다.

 

*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간다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구원받고 천당 가기 위해서인가? 우리가 만약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대답에 그친다면 이런 이야기와도 같다.

 

누군가 나에게 “목사님 왜 사모님과 결혼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 이유가 “밥해줄 사람 필요해서”라고 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단순히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더 구하며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구속하셨는가?

 

로마서 8장은 성경에서 복음의 가장 하이라이트를 말씀하는 부분이다. 놀라운 축복을 확신 가운데서 바울이 28절에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 여기서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다. 좋은 회사,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몸이 건강하고 좋은 교회에 다니고 이런 것만이 아니다.

 

말씀에서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 안에는 우리의 과거에 있었던 아픔, 수치, 실패, 좌절까지도 담겨 있다. 과거에 넘어졌던 부분들, 버림받았던 것들, 자살을 시도했던 것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들, 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인격으로 이 말씀에 동의할 수 있는가?

 

어떻게 과거의 수치의 사건이 선을 이룰 수 있는가?

 

선을 이룬다는 의미를 보통은 내가 생각하는 차원으로 이해한다. 통장에 잔액이 많이 늘어나서 재정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나 불치병이 치유되고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고 인생이 평탄한 길로 가는 것, 큰 집에 사는 것, 미모의 아내를 얻는 것 등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이 말씀을 은혜로운 말씀 정도로 생각하지 이 구절의 문자적인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온 인격을 다해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선을 이룬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을 이루는 것의 의미는 로마서 8장 28절의 다음 구절인 29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선을 이루는 것의 의미는 바로 우리 안에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병약하든 건강하든 지위가 있든 없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실패했든 성공했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선이다. 이 선을 이루어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로마서 8장 28절은 당신의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또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을 천당 가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면 복음은 훼손된다. 그것은 따라오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왜곡된 가르침으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갈라디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바울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내한다고까지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교회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당 가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왜 구원 받았으면 됐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한가?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이 땅을 다스리게 하시기 원하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삶을 드려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을 통해 온 땅을 통치하기 원하시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졌다면 그만큼 그 사람이 하나님이 나라를 세워갈 수 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영향력은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리가 그 사람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때때로 매스컴에서 크리스천의 부정부패 사건 등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아픔이 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숫자가 많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었느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기를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영향력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명이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사람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지위나 학식, 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어차피 죽어서 육신을 벗어야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는 적당히 죄짓고 회개하다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일까?

 

물론 세상을 떠나 장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영화를 입은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 삶은 오늘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할지어다.” 이 말씀이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라. 우리의 기준이 아닌 성경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나도 거룩하길 추구하며 주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나도 온전하길 기도하자.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 아래에 놓인 채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롬 8:19).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을 의지하라. 오늘도 당신에게 주의 영광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며 나아갈 때 성령님께서 당신을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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