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①
눅 4;16-22. / 강문호 목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30년 동안 조용히 지내셨습니다. 30은 사역의 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 30살이 되야 시작하였습니다. 성막부터 성전까지 모든 제사장들이 30살에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도 30살에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첫 오신 목적을 확실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가죽이나 송아지 가죽에 성경을 베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두루마리 성경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회당에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 섰습니다. 성경을 맡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이사야서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서 성경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다음 말씀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2.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4. 눌린 자를 자유케 함을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오늘부터 4번에 걸쳐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선언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풀어 드리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것이 첫 목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가난을 부요로 바꾸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러 [주]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2-27)
하나님의 뜻은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 번 선포는 복을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2:27-28)
온 인류가 홍수로 다 멸망 당하였습니다. 노아와 가정만 남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말씀도 복을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아브라함을 메시야의 첫 조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자 말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처음 하신 말씀도 복이었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엉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26:3)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시고는 꼭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복되게 살지 못 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어느 날 가난한 여인이 병든 아들을 위하여 포도를 찾아 헤메었습니다. 왕궁 정원에 포도가 바로 아들 병을 낳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포도임을 알았습니다. 몇 개 사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다음 날 돈을 더 많이 가지고 가서 사려고 하였으니 역시 거절이었습니다. 다음 날은 집안 재산을 몽땅 가지고 가서 사려고 하였으나 역시 이루지 못 하였습니다. 그는 왕궁 앞에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왕궁을 산책하던 공주가 이 통곡소리를 들었습니다. 공주는 이 여인의 사정을 다 들은 후에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착각하였소. 우리 아버지는 파는 분이 아니요. 거져 주는 분이요. 백성들은 우리 왕궁의 포도를 거져 먹을 수 있소.” 이렇게 말하면서 위로하면서 포도를 따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모든 것을 거져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 가난으로부터 해방으로 시켜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요하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 이상입니다. 물질에서 자유함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에 관계하지 않는 것이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과 행복과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13)
지난 주간 신문과 TV에서 비슷한 감동의 이야기를 읽고 들었습니다. 연대에서 일어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연대 사무실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관리하는 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주었습니다. 풀었습니다. 3천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공부 잘 하는 데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주세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마 전에도 1억원을 가지고 왔던 할머니였습니다. 두 번째였습니다.
그 때에도 이름도 주소도 주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할머니를 꼭 붙들고 물었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름이 없어요.” “어디에 사세요.” “몰라도 되요.”
“어떻게 생긴 돈이예요?” “묻지 않아도 되요.” 그리고 촘촘히 사라셨습니다.
부지런히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는 연대 앞에서 일산쪽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더니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움이 바로 자유함입니다.
나는 어느 청년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아낌없이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선교비로 바쳐서 영혼구원에 사용하였습니다. 그 해 가뭄이 들었습니다. 앞에 있는 저수지가 말랐습니다. 그 곳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가뭄속에서 그래도 습기가 남아 있는 땅이라 채소가 잘 자랐습니다. 다른 밭에 심은 채소는 다 타죽었습니다. 그 곳에 심은 채소가 금값이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 돈으로 돼지 새끼 사서 길렀습니다. 돼지들이 잘 자라서 팔아서 13마리 소를 샀습니다. 큰 농장이 되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건강이 가난한 자에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가난만 가난이 아닙니다. 건강적으로 가난도 가난입니다. 건강에 자신이 없는 가난이 있습니다. 건강에 부요한 사람이 있고, 건강에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49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6.25때 방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6식구가 자다가 다 죽고 어머니와 어머니 품에 있던 나만 살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도 그 때 얻은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고 나만 남은 셈입니다. 그래서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 알고 주님께 복음을 위하여 이 생명을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순교하는 것만 생명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몸아끼지 않고 주의 일하는 것이 더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심장병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늘 말했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좋으니 잠시만이라고 아프지 않고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려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고 나니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종종 하셨습니다. “아들 문호야! 너무 아프다. 어느 날 문호 엄마 죽었대. 이 말 한 마디만 들으면 되는 데...아파서 못 견디겠다. 차라리 순간적으로 죽으면 이렇게 안 아플 텐데....”
이렇게 건강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부지기수로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얼마든지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신유의 기적을 맛보는 것도 큰복이지만 건강에 가난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은 복음중에 복음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낯을 벽에 대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에게 그 때 가장 큰 복음은 생명 연장이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복음이 임하였습니다. 15년 생명 연장보다 더 큰 복된 소식, 복음인 영생이 그에게 주어셨습니다. 그는 지금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IS들이 기독교인들을 테러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성경대로 목을 베어 죽입니다. 목을 베어 죽일 때 나는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야! 순교하니 상급이 크겠구나. 나도 그렇게 순교하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가난한 것도 가난입니다. 건강을 잃은 자에게 복음은 건강입니다. 그 보다 더 큰 복음은 영생입니다.
마음 가난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것도 가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도 복음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가 와 앉아 있나요? 마음이 약합니다.
항상 슬프게 삽니다. 부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잃어 버리고 삽니다. 세상사람들도 자신있게 살아가는 데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면서 왜 그렇게 마음이 가난하게 사는가요?
작년 말 우리 동네 정치인 망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술을 한 잔씩 따라 높이 쳐들고 모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전자!” 무슨 말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주>는 주권의식, <전>은 전문의식 그리고 <자>는 자존감 의식이랍니다. 자존감을 가져야 살 수 있다고 세상 사람들도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 자신감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 사업가가 부도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무엇을 잃었나요?”
“회사를 잃고, 돈을 잃고, 직원들도 다 다른 곳을 가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래요? 아내도 잃었나요?” “아니요. 아내는 내 곁에 있습니다.” “건강은요?”
“다행히 건강은 이상이 없습니다.” “신용은요.” “지금 부도 났지만 신용은 그대로 있습니다.”
“친구는요?” “친구들도 그대로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던 중에 그 분은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만 하세요. 나는 다 잃어버렸는 줄 알았는 데 남은 것이 더 많군요. 겨우 돈만 잃어버렸군요.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셔서 마음을 강하게 하여 주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수학선생님만 수업하러 들어오면 구역질이 나서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면 나와야 했습니다.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심리학자가 동원되어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랜 조사후에 결과가 확실하게 밝혀졌습니다. 여학생은 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 목소리와 수학선생 목소리가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학선생님 목소리만 들으면 그 남자의 목소리같아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나약하여졌습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 하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 한 지극히 불안한 정신상태였습니다.
그 해결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여렵고 힘들어도 용서하고 사랑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힘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만 가지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영적으로 가난
예수님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건강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기도 복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게도 복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영적으로 가난하여 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기가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실망하고 목사에게 절망하고 회의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가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성경 최고의 선지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합왕 시대에 예언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아합왕은 바알신 우상을 섬기는 이세벨과 결혼한 후 온 나라를 바알 종교로 뒤덮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년 6개월 가뭄을 주었습니다. 경제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경제가 망가지기 시작하면 정치가 혼란스럽습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지 못 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강대국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때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이가 엘리야입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알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온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생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갈멜산으로 바알 선지가 450 명을 초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도 모이게 하였습니다. 송아지를 잡아 제단에 올려 놓고 기도하여 불이 떨어지는 신이 참 신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듣 450명이 먼저 바알 신에게 기도하였습니다. 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며 피를 흘리며 결사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불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였습니다. 기진백진한 포기였습니다.
엘리야 차례였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당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이 숨어 있었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혼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불이 떨어졌습니다. 온 백성들이 소리질렀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다. 바알신은 거짓 신이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 450명의 목을 자르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갈멜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대단한 사건입니다. 용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자기 편 450명 바알 선지자들 엘리야가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영적으로 약해졌습니다. 멀리 브엘쉐바 광야까지 도망쳤습니다.
아무도 쫓아 올 수 없는 사막지대로 도망쳤습니다. 로뎀나무 밑에 누웠습니다.
“하나님! 죽기에 넉넉하오니 차라리 나를 죽여 주옵소서!” 그 용기, 그 당당함, 그 위풍이 사라져 버린 영적으로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진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쓸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이 변하여도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토록 놀라운 선지자도 그토록 영적으로 나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 그에게 다가 온 것은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걷게 하였습니다. 다시 영적으로 회복한 엘리야는 힘있게 40주야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엇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이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배도하는 일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확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배도가 일어나면 마지막 때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 하리니”(살전 2;3)
그런데 미국은 이미 예수님을 등지고 배도하로 기우러져 가고 있습니다. 빌리 그래햄, 로버트 슐러, 릭 워렌 모두 배도하였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에 빠져서 천주교와 통일 종교를 만들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한국도 배도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름만대로 다 알고 있는 이들이 종교다원주의에 빠져서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전 효성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집회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가 두 가지 인상깊은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는 우간다 대통령 이야기입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유엔 사무총장 반 기문이 4천억을 원조하여 줄 테니 동성애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우간다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안 받고 통과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우간다 대통령은 목사님이라는 것입니다. 돈에 배도하지 않는 절대 신앙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이래저래 배도 역사가 전 세계를 휘몰아 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징조입니다. 배도란 예수그리스도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로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부요입니다.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건강입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정신 건강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영적 건강입니다. 이 복음을 주시려고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당신 옆에 계십니다. 그것을 믿으시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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