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교회
Ⅰ. 말씀을 들음으로 일어나는 교회 부흥.<합 3:1~19>
그리스도의 교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도처에서 크고 작은 부흥집회를 열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연중무휴(年中無休)로 가장 많은 심령부흥회를 곳곳에서 가져 은혜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부흥집회의 결과는 좋은 면도 많지만 교회의 내적 혼란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예도 허다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참된 교회의 부흥이 무엇이며 왜 부흥이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부흥은 일어나며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 진정한 교회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서 하박국 3장 2절의 말씀을 중심하여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교회의 부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2절 중간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부흥케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여기 ‘주의 일’이란 말은 구령사업(救靈事業)곧 영혼 구원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린 구령사업과 구제사업(救濟事業)을 구별할 줄 알아야겠다. 이 말은 가난한 이웃돕기 운동을 반대하는 말은 아니다. 도리어 권장해야 할 운동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구제사업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알고 치우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신자의 모든 선행은 전도의 좋은 방편(方便)이 아닐 수 없다. 등촌 교회의 김복임 집사는 비 오는 날 낯모르는 사람의 이삿짐을 운반해 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그 분의 이름이 양복실씨다.
그러나 영혼 구원과 관계없는 구제사업은 주의 일이라고는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구령사업과 구제사업을 혼동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주의 일’이란 역시 교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말은 생명 있게 해 달라는 말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골짜기의 해골 떼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기(生氣)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부흥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떠난 이상야릇한 불건전한 신비적인 행동 곧 성령이 내릴 때 향내가 나기도 하고 죄 타는 냄새가 나고 몸이 뜨겁고 진동이 오며 입신했다고 정신없이 넘어져 입에 거품을 품고 방언을 한다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부흥이랄 수 없다.
내가 아는 점잖은 어른 한 분은 부흥회 때 자부와 그밖에 몇몇 교인들이 입신 방언 한다고 자빠져서 입에 거품을 품고 야단하는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한동안 쉰 일이 있었으며 그 교회의 건전한 신자들과 동네의 불신자들에게도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진정한 부흥은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지 육체적(肉體的)인 감각 곧 눈, 코, 입, 그밖에 지체 등에 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기독교의 부흥은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에 뜨겁게 믿는 생명의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눅 24:27, 32).
2. 교회의 부흥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교회가 생명 있게 부흥이 되어야 나와 가정과 국가가 잘 살 수 있고 반면에 교회가 생기를 잃고 부패하면 국가 민족이 망하기 때문이다.
암 9:1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여기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천사를 시켜 ‘성전의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고 또 그 기둥이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심은 종교가 타락하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진멸될 것을 보여 주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당신의 말씀대로 바로 믿고 바로 살지 못할 때는 그의 교회를 파멸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 2:5을 보면 교회가 회개치 않으면 주님께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촛대는 기름을 넣어 불을 밝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옮긴다는 것은 성령의 불의 역사를 거둔다는 말인 것이다.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의 교회가 쇠멸(衰滅)하는 곳에는 그 민족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를 걱정해야 하고 가정과 학교와 직장을 걱정해야 되지만 먼저 교회 일을 걱정해야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삶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고후 7:10에 보니, “세상 근심은 멸망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 깨나 하나님의 사람 하박국처럼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중세(中世)의 교회가 극도로 부패한 때가 있었다. 클레멘트 6세를 전후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첩을 두기도 하고 성직을 팔아 높은 자리를 돈으로 가격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죗값으로 말미암아 유럽은 재앙을 받았다. 1348년으로 1349년 사이에 흑사병(黑死病)이 전 유럽에 휩쓸 때 시에나에선 8만 명이 죽고 베니스에선 10만 명이 죽었고 볼로나에선 인구의 2/3가 죽었고 폴로레스에선 인구의 3/5이 죽었고 말세이유에선 1개월에 죽은 자가 5만 7천명, 영국에선 그 당시 인구 250만의 반수가 죽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밭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역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가 부패하면 하나님의 징벌이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부패하지 않도록 각자가 조심해야 하겠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 결코 부업(副業)처럼 생각하지 말고 전력(全力)을 쏟아야겠다.
3. 그럼 교회의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말씀을 들음으로 되는 것이다.
2절 상반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라고 했다.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은 2장에 기록한대로 여호와께서 유대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하늘 소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듣는데서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눅 24:27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했고 32절엔,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심령부흥인 것이다.
베뢰아 교회의 부흥도 성경을 상고하는데서 일어났다. 행 17:11~12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의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하였다.
2) 기도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1절 하반에서 2절을 보니,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오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교회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만이 부흥을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자.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부흥의 소망을 확실히 갖고 기도하자. 그러므로 본문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했고, 시 30:5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고 하셨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기도해야겠다. 본문에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여기 수년 내란 말이 두 번 나오므로 그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적당한 때를 말하는 것인데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다. 교회 부흥이 너무 일찍이 되면 교만하기 쉽고 너무 늦으면 해이(解弛)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그 날과 그 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부흥을 위하여 기다리면서 기도해야 된다.
우린 초대 교회의 부흥을 잊을 수 없다. 그들에겐 교육도 없었고 재물도 정치의 힘도 다른 무슨 힘 같은 것도 없었고 인물도 없었고 모두가 부족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허락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이 기도가 응답이 되어 오순절 교회는 부흥했던 것이다.
3) 찬송가를 열심히 불러야 한다.
1절에,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하였다. 여기 ‘시기오놋’은 곡조의 이름인데 열광적(熱狂的)인 성격을 띤 종류의 곡조를 말한다.
하박국은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기도문을 만들었고 이것을 작곡하여 열심히 불렀다.
그러므로 교회 부흥을 원하거든 찬송가를 많이 불러야 한다. 찬송가는 잘 믿는 성도들이 성경에서 뽑은 말씀으로 가사를 만들었고 기도 중에 작곡한 것이기 때문에 찬송가는 이른바 곡이 붙은 성경, 곡이 붙은 기도. 곡이 붙은 설교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찬송가를 성도들이 합창하면 흩어졌던 마음이 하나가 되고 땅에 속한 마음이 하늘로 향하게 되고 슬프던 마음이 기쁨이 충만해지는 심령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4. 부흥의 결과는 충만한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외쳤다.
우린 여기서 참된 기쁨과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농작물과 가축이 모두 없어질지라도 여호와께서 필경 그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기쁨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기쁨은 없어질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성도가 노래지어 부르기를
“예수 소유하여서 나는 부자 되고
예수 한 분 잃어서 나는 거지 되네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고 하였다.
Ⅱ. 말씀 중심의 교회 부흥 <행 6:1~7>
교회란 택한 백성을 불러 모은 단체를 말한다. 한자(漢字)로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이니 신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단체가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 주께 예배하는 순서를 보면 설교가 중심이요 시간을 길게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말씀을 잘 받기 위해 찬송하고 기도하고 정성 드려 헌금을 하고 말씀을 받았으니 감사 찬송을 하고 끝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맛있고 영양 많은 음식과 같고 교회는 받아먹고 사는 몸과 같은 관계라 하겠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하여 ‘말씀 중심의 교회부흥’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1절에 수간 “많아졌는데”라고 했지만 내용을 보니 진정한 부흥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한 교회 안에서 파 가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라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지상교회는 불완전하니 그럴 수 있다”고 체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란 것을 안다면 파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2) 물질거래가 공정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구제대상이 있다. 잘하면 좋으나 대개의 경우 말썽이 많다. 또 신자끼리 물질거래로 시험이 들어 은혜가 안 되는 일이 간혹 있다. 육신을 가진 인간생활에 물질은 반드시 있어야 산다. 그러나 물질의 종이 되어 거기에 얽매어 살 때 영적 생활이 마비되어 인간이하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교회부흥의 장애물은 물질이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겠다.
3)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사업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교회부흥의 핵심이 말씀에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제쳐놓고’ 공궤 곧 재정출납에 힘썼으니 될 리가 없었다. 그렇다! ‘말씀을 제쳐놓고’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진정한 교회부흥은 아닌 것이다. 항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지식을 얻으려면 경동교회로, 사람을 만나려면 영락교회로, 은혜를 받으려면 충현교회로, 불을 받으려거든 순복음교회로 병을 고치려거든 현권사에게로, 사업 복을 받으려면 헌얼산으로 가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이 택한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지식도, 교제도, 불도, 건강도, 축복도 다 좋다. 그러나 ‘말씀을 제쳐놓았다’면 알맹이 없는 빈 껍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2. 교회부흥의 비결은 무엇인가?
1) “마땅치” 않는 것을 고쳤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해 나가는 중에 방법이 잘못 된 줄 알 때가 있다. 그런데 고치려 하지 않고 체면과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고집불통 밀고 나가므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간혹 있다. 그러나 교회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옳은 일이면 방해가 있어도 밀고 나가야 되지마는 잘못되었으면 속히 시정할 줄 아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사도들은 교회가 시험들 때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하고 돌이킨 것이었다.
2) 대중의 동의를 얻어 일곱 집사를 선거하여 일을 분담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은 만능일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자에게 은사를 달리 주셨다. 그러므로 은사 받은 대로 일을 분담해야 되는 것이다. 출 18:18에 보니 모세 같은 분도 “혼자 할 수 없으리라”는 장인의 말을 듣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일했다.
3)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전무”란 말은 하던 일을 버리지 않고 계속하는 것과 또 전문적으로 맡은 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교역자는 오직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일을 계속 전문적으로 그것만 일편단심 연구하고 전해야 된다. 무슨 일이든지 큰 일을 하려면 힘을 한 곳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교역자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는 오만한 죄를 범하는 일인 것이다. 인간 사역자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하는 일에 열매가 있도록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특히 사역의 원료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 없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경은 구 신약 어디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성경의 본의를 알고 소개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원 뜻을 저버리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인간조작으로 푸는 무서운 죄악을 범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연구해야 하고 주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니 만큼 강단에 오르기를 두려워 떨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교역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 외에는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박윤선 목사는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만 알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른이었다. 부산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한 학생에게 100원을 주면서 이것 가지고 치약, 칫솔, 비누, 수건, 잉크 등을 사달라 하고는 “거스름돈은 학생 하시오!”라고 하더란 것이다. 가난한 학생이지만 자기 돈 700원 정도를 보태어 사서 드렸더니 또 “고맙습니다. 거스름돈은 학생 하시오!”라고 하더란 것이다. 오직 그 분에겐 기도하고 말씀연구하고 전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사상 세계 최초로 신구약 성경 주석을 다 내어놓는 위대한 작업을 하신 것이었다.
오늘의 교역자들도 선배어른들처럼 오직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한다면 교회는 틀림없이 부흥되고야 말 것이다.
3. 말씀을 바로 증거 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했다.
이 말은 말씀이 능동이 되어 그 은혜가 지배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역자가 말씀에 잡히고 교인들도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야말로 이상적 교회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말씀의 은혜에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는 무아지경에 빠졌다면 이것이 바로 천국 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
말씀만 전하는 곳엔 많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외국에선 말씀만 바로 전파하면 교인이 많이 모인다는 것이다. 미국 어느 교회는 방언이니 신유의 은사니 하는 것 없이 오직 말씀만 전해도 5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들었다. 현대 신신학의 본산지 독일은 큰 교회당이 텅텅 비는 실정이지만 오직 말씀만 전하는 유트 목사가 시무 하는 교회는 2천명이나 모인다는 기쁜 소식이다. 한국교회도 말씀만 전하는 곳에 수천수만 수십만 명이 모이는 건전한 교회로 자리가 잡혔으면 한다.
3)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
예수님이나 사도시대에 제사장들은 복음증거 앞에 유대교의 정통이란 탈을 쓰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 완고한 고집불통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찾아 힘차게 전하자.
예나 지금이나 말씀의 위력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1965년(?) 12월 마지막 주간 울주군 인보면 인보교회서 사경회 강사로 말씀을 전할 때였다. 담임인 문광곤 목사가 밖에 서 있는 할머니를 예배당으로 끌어 들였다. 그는 20년간 언양천주교회 신도였으며 그날 밤 집에 돌아가 예수상 마리아상 염주등을 다 버렸다. 나중 언양천주교회 신부와 수녀 신도들이 와서 아무리 권면해도 듣지 않으니 그 자리에서 저주받을 자라고 파문선교를 내리고 말았다. 그때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딸이 된 나를 저주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하고 개종했다. 나중 신망애양로원에 들어가 주와 동행하다가 소천 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만 전하자. 열매는 주께 맡기고……
Ⅲ. 한 목자의 주신 말씀 <전 12:11>
이 본문은 지혜자 솔로몬이 말년(末年)에 가서 남긴 주옥(珠玉)같은 말씀이다.
‘인(人)은 노(老)를 쓴다’는 격언대로 그의 젊은 때의 말보다 오랜 인생 경험을 지닌 노숙(老熟)한 때의 말은 더욱 값있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보다 이 말은 유언적(遺言的)이란 의미에서도 권위적(權威的)이라 하겠다(히 9:16~17). 그러나 이 말의 근원(根源)을 살펴 볼 때 영감(靈感)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본문 끝에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고 고백한 말이 증거 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한 목자요(마2:5), 선한 목자요(요 10:11), 영혼의 목자요(벧전 2:25), 목자장이시다(벧전 5:4).
그리고 그의 말씀은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말씀이었다(마 24:35). 그러므로 이 본문은 솔로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럼 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자.
1. 지혜의 말씀이다.
그것은 본문에 ‘지혜자의 말씀은’이란 말이 밝혀 준다. 이 말을 보니 결코 주의 종은 솥뚜껑을 가지고 자라 잡는 식의 무모하고 직선적이고 노골적인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혜가 없으면 교역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보라! 주의 종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왕이 되자마자 어려운 재판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두 여인이 한 집에 사는데 비슷하게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하룻밤은 한 여인이 아이 위에 누우므로 아이가 질식하여 죽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시체를 치워 버리면 남의 흉은 사흘뿐이라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데 이 여인이 옆자리에 누워 있는 여인과 아이를 보니 그만 심술이 올라와 아이를 바꿔 버리면 누가 알겠느냐고 생각한 나머지 그만 남의 산 아이를 자기 요에 눕히고 자기가 죽인 아이를 그 여인의 품에 몰래 안겨 주고 시침을 떼고 자는 척 했다. 나중 옆에 여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자기아이를 돌려 달라고 했지만 도리어 자기 아이라고 우겨댐으로 하는 수 없이 소송을 걸게 되었다.
여러 곳을 거쳐 최종 판결소인 왕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한 후 “산아들을 둘로 나눠 반씩 주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한 여인이 왕께 아뢰기를 “청컨대 내 주여 산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울며 호소하나 한 여인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저 여자의 것도 되게 말고 나누소서.”라고 했다. 왕은 칼을 거두게 하고 산, 아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 여인에게 돌려주라고 심리적인 판결을 내리므로 그는 대 지혜자로 군림(君臨)하게 됐다(왕상 3:16~28).
오늘의 교역자도 교인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지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지혜를 누가 솔로몬에게 주셨는가? 그것은 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마 1:42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 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는 인적산물(人的産物)이 아니고 신적산물(神的産物)이었다.
그런데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았는가 그것은 솔로몬이 주께 부르짖어 받은 것이었다. 왕상 3:9에,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더니 그것이 주의 마음에 맞아 받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은 다른 것 보다 주의 백성을 잘 먹이고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고 지혜를 얻은 야고보장로는 약 1:5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곧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곧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의 종은 다른데 정력을 소모하지 말아야겠다. 교인들의 장사지도, 결혼, 중매, 진학, 취직, 사건소개 등 딴 데 정신을 쓰지 말고 다음 수요일에는, 다음주일에는 무슨 말씀을 증거 할까 “주여 내게 지혜로운 말씀을 주옵소서.”하고 여기에 집념(執念)해야 될 것이다. 영등포 양평동에 이태리식 식당이 있다. 매일 메뉴가 달라 맛도 있고 값도 싸기 때문에 언제나 대만원을 이루고 있다. 우리 교회도 주의 종이 지혜를 받아 말씀 먹이는 일에만 전념하면 교회부흥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2. 찌르는 채찍 같은 말씀이다.
주가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은 본문의 말씀대로 ‘찌르는 채찍 같은’것이었다. 그러므로 히 4:12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셨다.
채찍은 부모가 자식을 바로 키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바로 양육하기 위해 때론 주께서 징계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 12:7~9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히 12:5~6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차신자는 꾸지람을 달게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시 141:5에,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고 했다. 옛 말에도 양약이 고구나 이어병이요 충언이 역이나 이어 행이라고 했다(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곧 좋은 약이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로운 것처럼 옳은 말이 귀에 거슬려도 잘 들으면 행실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성경에 주의 종의 바른 말을 받아 들여 죄를 회개한 아름다운 기사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범죄 했을 때 선지자 나단이 왕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그의 죄를 찔러 주었다. 나단이 말하기를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심히 부하여 양과 소가 많았지만 하나는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암양 새끼 하나뿐인데 딸처럼 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그네가 그 부자에게 왔을 때 자기의 짐승은 아끼고 가난한 삶의 양을 빼앗아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습니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이 노하여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지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 일을 행했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고 호통을 쳤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하나님이 부족함이 없이 축복했는데 왜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까?”라고 했다. 다윗이 즉시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습니다.”고 겸손히 자복했다. 나단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지는 않지만 이로 말미암아 받을 징계는 각오하셔야 되겠습니다.”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말씀으로 책망할 때 삐치지도 말고 “왜 저럴까 누가 애를 먹였는가.”라고도 말고 면책(面責)이 숨은 사라오다 나은 줄 알고(참 27:5) 달게 발길 바란다. 히 13:17에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3. 회중(會衆)의 스승의 말씀이다.
회중은 일반대중을 말한다. 본문에 ‘회중의 스승의 말씀’이라고 했으니 기독교는 동서양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총망라하여 전해지는 대중적인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언제나 대중 상대로 말씀하셨다. 마 13:34~35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으며, 또 고전 9:22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대중화를 힘써야 한다. 일본의 기독교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귀족사회에 치중하여 전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은 처음부터 대중전도에 힘썼기 때문에 뜻밖에 많은 수확을 거둘 수가 있었다.
우린 야고보장로가 책망한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다. 약 2:1~4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란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스도안에서는 빈부의 차별, 유무식의 차별, 지방차별은 절대금물은 것이다. 유식한 학박사도 무식한 사람도 사장도 아래 사람도 부유층도 서민층도 은혜 받는 데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결코 교회 안엔 특수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워 육군소장이 되고 1880년에 제20대 대통령이 된 가이필드 장군은 취임 후 백악관에서 그의 담임목사에게 말하기를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는 병법하고 단순한 제임스・에이・가이필드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오 부름을 입은 모든 신자는 모두 형제란 말이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가 대중에게 골고루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준비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고 대중을 상대하기 위해 서민적이 돼야겠다. 왜냐하면 인간미(人間味)가 없는 설교는 대중의 마음속에 파고 들 수 없기 때문이다.
4. 잘 박힌 못 같은 말씀이다.
본문에 ‘잘 박힌 못 같으니’라고 하였다. 나무에 못을 박는 것은 흔들리지 않게 고정(固定)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주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확정(確定)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 57:7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되지 말자. 마음의 정함이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다.
교회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지 말자. 말씀의 은혜가 있는 곳에 확정하길 바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말씀으로 훈련시켜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해 요6:67을 보니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68에 보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 주는 이런 신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어떠한 난관에 부딪혀도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신자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내게 불리한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한다. 시 112:7에,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라고 하였다.
끝 맺음
이때껏 한 말은 임목사의 말도 솔로몬의 말도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그것은 본문 끝에 ‘한 목사의 주신바니라.’는 말씀이 밝혀 준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된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살전 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다.
Ⅳ. 말씀 듣는 좋은 편을 택하자 <눅 10:38~42>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라 부르는 삼남매가 살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의 신세로 외롭게 지내는 중 주의 말씀에 감동되어 삼남매가 믿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생각해보니 육적불행이 때로는 영적유익을 가져오는 예가 많음을 알고 낙심하지 말아야겠다.
오라비 나사로는 성격이 침착하고 말은 적은 사람이며 언니 마르다는 언제나 활동적이며 동생 마리아는 생각이 깊은 사색적인 인물이었다.
어느 날 나사로는 없었고 두 자매만 집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심방을 가셨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고 마리아는 말씀을 들으려고 주의 무릎 앞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가지만 마르다는 음식 준비가 잘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나서 그만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라고 자기를 내세우며 말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우린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고롭게 대접하려는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라고 오해를 가지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 사랑의 대접을 결코 무시한 것은 아니다. 마 10:40~42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으니 말씀을 가르치는 교역자를 물질로 대접하는 것을 금하는 말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 왜 마르다를 책망하셨는가?
1. 동생을 무시하고 자기를 옳게 본 까닭이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한 것은 ‘동생은 일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요 나는 주를 사랑하여 대접하느라고 혼자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자고(自高)의 말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 봉사는 잘한 일이지만 교만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었다.
오늘 이런 일은 교회를 잘 섬긴다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죄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남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왜 이것 밖에 하지 않는가 라고 하기 쉬운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보다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겠지만 그러나 헌금이란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으면 많이 할 것이고 적으면 적게 할 것이고 없으면 있어도 못하는 것이 헌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많이 하기도 하고 적게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했으니 하나님이 판단할 것이지 사람이 판단은 못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는 잘하고 남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마르다는 자기의 물질적 봉사만 옳고 마음으로 봉사하는 동생을 무시하는 교만 때문에 주의 책망을 받은 것이었다.
2. 말씀을 사모하는 동생의 마음을 이해 못하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 일은 예수님께 대해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 게으른 자로 간주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칭찬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않으시고 중심을 보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집을 찾아오시기 전부터 그 마음이 목마른 자가 물을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찾는 것 같이 그 영혼이 주를 사모하고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그는 영혼의 기갈을 면하기 위해 언니 마르다를 도와서 준비하는 것 보다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 것이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워하려고 섬기려 오셨으니 물질로 육신을 대접하려는 것 보다 영혼을 위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 당연(當然)한 일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동생을 이해 못하고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었다.
3. 봉사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다음에 봉사를 해야겠는데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물질 대접하는 것을 먼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었다. 마 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하셨다. 그런데 마르다는 선후(先後)가 바뀐 것이었다. 앞에 할 것을 뒤에 하고 뒤에 할 것을 앞에 한 것이었다. 소가 수레를 끌어야지 수레가 소를 끌게 되면 소도 죽고 수레도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지도를 받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는데 내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먼저 주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감사함으로 교회를 섬겨야 바로 되는 것이지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고 교회를 섬기려고 하니 마르다와 같이 마음이 분주하여 일이 잘 되질 않고 짜증만 나는 것이다.
요즘같이 일은 많고 마음은 분주하고 짜증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급선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리아와 같이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좋은 편을 택하는 이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린 다 같이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되자. 목사는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데만 전무하고(행 6:4) 교인은 수시로 성령 안에서 주의 종의 입에 말씀을 주사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어 주옵소서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한 마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열과 열이 부딪힐 때에 은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교인이 열심히 있어도 교역자가 냉랭하면 불이 붙을 수 없고 반면에 아무리 교역자가 열심히 있지만 교인이 열심히 없으면 냉랭해지고 마는 것이다. 불붙는 나뭇가지를 냉수에 집어넣으면 불이 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은혜문제는 교역자와 교인이 다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린 집회 시간을 잘 지키도록 하자. 미리 와서 기도와 찬송으로 성경을 읽으므로 준비하도록 하자. 특별한 일 없이 늦게 참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피차 준비한 곳에 반드시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왜 40일이나 기도하고 받은 십계명 돌 판을 깨뜨렸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모세는 준비했지만 받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섬기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의 종들이 힘쓰고 애써 받은 말씀 교인들에게 전하려고 하지만 모인 교인들의 마음에 준비가 없으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전에 다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오늘 참된 교역자 목사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전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모하여 모여드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파우셑 목사는 한 작은 지방 욕솨이어에서 목회하다가 런던의 길 박사가 시무하던 큰 교회의 청빙을 받아 가게 된 일이 있었다. 그가 모든 수속을 마치고 이삿짐을 묶어 놓고 떠나려 할 때에 모든 교인들이 와서 울며 떠나기를 아쉬워하였다. 그것을 본 파우셑 목사와 그의 부인은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욕솨이어의 작은 교회에 유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것은 목자로서 양떼의 사정을 깊이 느낀 결과로 된 것이다. 이렇게 선한 목자는 말씀을 사모하는 교인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Ⅴ. 유력한 말씀의 증거자가 되려면 <고전 4:20>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이(렘 23:29) 위력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전하는 자가 무능하면 무력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 힘 있는 말씀의 증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야 하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나를 살려(엡 2:1) 하늘의 천사도 흠모하는 복음전파의 전권대사로 세워 주심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유력한 말씀의 증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딤전 1:12~16).
송양원 목사는 구원의 은혜와 직분을 받은 은사에 감격하여 성경에 표지에 붓글로 시 116:12 곧,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써 두고는 매일 새벽 일어나 먼저 이 성구를 크게 봉독한 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하루의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죄책감에 억눌려 있는 사람은 기를 펴지 못하기 때문에 힘 있게 주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죄의 확신, 구원의 즐거움 거기에 직분 받은 은사에 감격할 줄 알아야 힘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 사명감이 투철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무슨 사명을 주셨는지 확실히 알아야 하고 사상이 철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교역자로 세우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난관에 봉착해도 짜증이나 낙심이나 포기함이 없을 것이고 또 수고를 해도 즐겁게 되므로 피곤함이 없으면 반면 칭찬을 들어도 교만하지 않으며 당연한 일로 알고 계속 충성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간 선지 사도들과 역대의 주의 종들이 다 함께 이렇게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역은 유력하였고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행 20:24). 이렇게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말씀전파를 위해 생명을 걸었으니 어찌 유력한 교역자가 안될 수 있겠는가! 계 2:10 끝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은 셈치고 충성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죽을 각오하고 사명에 충성한다면 틀림없이 유력한 교역자가 되고 말 것이다.
3. 천부(天賦)의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유력한 말씀의 증거자는 주의 긍휼로 가르치는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 19:11에,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하셨고 롬 9:16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셨고 고전 1:5~6에는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역자로 출발하기 전에 유년, 중, 고, 대, 장년, 주교 교사로 또는 구역예배 설교 등을 맡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는 중에 자신도 은혜가 되고 청중이 가르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는 소질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반면에 말글을 배웠으나 되 글로 못써 먹는다는 격이 되면 소질이 없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교역자는 잘 가르치는 자니 이는 아는 것이 많아도 가르칠 줄 모르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여러 사람의 심령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하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알아듣기 쉬운 말로 가르쳐 감동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사도 안 되고 취직도 어렵고 등록금도 적고 보기에 하기 쉬운 것 같아서 신학을 하고 과정을 거쳐 교역자가 되어졌다면 이는 그 자신도 불행이요 그런 사람이 담임한 교회도 불행이 되는 것이다. 타고난 은사 곧 천부의 재능을 받아야 유력한 말씀의 증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어느 노파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담임목사를 청했다. 목사가 오니 노파는 아무 말 없이 찢어져 몇 장 남지 않는 성경을 내 놓는 것이었다. “성경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 말이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하거나 희미하게 말씀할 때마다 한 장씩 찢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주의 양은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하나님께 받은 재능을 가지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자신이 먼저 믿음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야(딤전 3:9) 원고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고 유창한 하나님의 말씀에 청중을 휘어잡는 유력한 증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행 18:5과 8을 보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 아는 것, 내 경험에 성경을 인용하지 말고 말씀에 내가 사로잡히는 자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말씀에 붙잡히려면 시 1:2의 말씀과 같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계 5:3에 보면 요한이 밧모섬에서 책을 펴고 볼 자가 없어서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울지말라 승리의 주가 열어 보여 주시리라고 하셨으니 눈물로서 받은 말씀 눈물 없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과 동시에 주의 양떼들에게 먹일 양식을 얻기 위해 눈물로 연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 과거의 유력한 교역자들은 주야로 성경연구와 설교준비에 힘썼다. 주기철 목사는 목회의 95%를 설교준비에 두고 매일 눈물로 연구했으며 금요일에는 그 동안 기도하며 메모해 두었던 것을 모아 원고를 작성했으며 토요일에는 사모님 앞에서 연습을 하고 주일에 강단에 올라갔기 때문에 그 설교가 힘 있고 은혜로운 것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5. 행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는데도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의 교훈은 힘이 없었고 예수님의 교훈은 권세가 있었다. 마 7:28, 9에 보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셨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서기관들의 교훈은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란 말대로 성경은 성경대로 자기는 자기대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교훈은 먼저 당신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행 1:1 하반에,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르쳐야 권위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Ⅵ. 성경을 어떻게 후대에게 전달할 것인가?
롬 15:4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하셨고, 딤후 2:2엔,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셨다. 기독교는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부흥 발전하는 생명의 종교이다. 그 과정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바로 후대에 전하므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베드로는 마가에게,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말씀을 바로 전달하는 후계자로 세웠다. 그러므로 전통의 신앙과 순결한 생활을 이념으로 하는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교육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럼 성경을 어떻게 후대에게 전달할 것인가?
1.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만 가지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이다(벧후 1:20, 21).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의 입의 명령하신 바요 그의 신이 모아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책이 아니요 여호와의 책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그 짝이 맞지 않는 것이 없는 정확 무오한 말씀인 것이다(사 34:16).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줄거리로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눅 24:27) 그 속에 영생이 있으며(요 5:39)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딤후 3:15) 또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유일의 교과서인 것이다(딤후 3:16,7). 그러므로 이 완전하고 권위 있는 말씀으로만 말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며(수 1:7) 넘어가지도 말며(고전 4:6) 가감 없이 가르쳐야 되는 것이다(계 22:18, 9).
2. 성경을 조직하여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고전 14:33). 그러므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셨다(고전 14:40). 하나님은 사람을 모태에서부터 신묘막측하게 조직하여 지어 주신 분이시다(시 139:13,4). 그러므로 성경은 조직적으로 되어 있다. 크게 나누면 구약은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이요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로 삼구 이십칠로 짝을 맞추어 놓았으며 성경 각 권마다 먼저 도리(道理)요 그 다음이 도덕(道德)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로마서는 1장~11장까지는 교리요 12장~16장까지는 생활이며 에베소서도 1장~3장은 교리요 4장~6장은 생활로 되어 있다. 부분적으로도 성부 성자 성령, 믿음・소망・사랑, 하나님 자신 타인, 과거 현재 미래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조직적으로 배워야 하고 깊이 연구하여 가르쳐야 한다. 딤후 3:14에 보니, “그러나 나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사로이 또는 억지로 풀어서는 안되는 것이다(벧후 1:20~3:16). 오직 원리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오랜 전통의 해석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결코 신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기반인 성경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교단에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의 신학에 변함 없이 충실한 하나뿐인 것이다. 말세는 반철 반흙의 혼합시대가 되어 성경을 제멋대로 푸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뉘게서 배운 것을 ‘알’고 이 전통을 이어 가도록 하자.
3.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마음으로 감동이 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 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을 상대하는 교역자는 영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영력은 죄를 회개해야 하고(사 59:1,2), 기도해야 하고(행 6:4),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학(눅 24:27, 행 17:11), 은혜 받은 체험이 있어야 하고(딤후 2:1), 외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어야하고(사 55:10, 11), 성령의 나타나는 권능으로 말해야 한다(고전 2:4).
여기에서 청중의 마음이 찔려 회개가 일어나며(행 2:37~42),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딤전 4:16).
Ⅶ. 성경과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지만 세계선교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성장해 왔다.
외형적인 것이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느낀 첫 인상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고개만 돌리면 예배당이 보인다.”는 말과 “수요일, 금요일, 특히 일요일은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교회당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것이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의 통계로는 4천만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1천만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니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른 성장을 해 왔는가 혹은 비정상인가를 한국교회사를 통해 살펴보므로 오늘 우리가 서야할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다.
먼저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을 때 누구로부터 받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였다(딤후 3:14). 이는 바로 받은 복음을 바로 지켜 나가는데 절대 필요하기 때문에 그 뿌리를 알아야 된다는 뜻의 말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을 때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았는가를 바로 알아야겠다.
19세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선교사들은 건전한 장로교 목사들로서 철저한 신앙을 소유한 분들이며 특히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감 없이 우리 선조들에게 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신교 전파의 특성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먼저 성경이 들어온 점이었다.
1816년 영국인 바실 홀이 백령도와 청도에 상륙하여 성경을 전파했으며 1832년에는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동인도회사 통역관으로 내한하여 금강 하류와 홍천 지방에 한문 성경을 전파했었다.
그 후 1866년 영국사람 토마스 목사가 마가복음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미국 무역선을 이용,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국군의 포격을 받아 침몰했는데 그는 성경을 한 아름 안고 내려와서 “야소!” “야소!” 하고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다. 1933년 9월 14일에 대동강변의 순교터 위에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 예배당이 설립되고 당시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 대표들이 참석하여 헌당식을 가진바가 있다.
그리고 같은 영국사람 알렉산더 윌리암스 목사가 토마스 목사와 함께 중국선교사로 왔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대리인으로서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토마스 목사 순교 1주년이 되는 1867년에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지방 전도여행에 나섰을 때 그곳에서 한국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팔았다.
한국 최초의 신자는 이응찬이란 사람인데 당시 만주에 있던 죤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1876년에 세례를 받고 신교의 교인이 되었으며 그 후 서상윤이라는 분이 만주봉천에서 홍삼행상을 하다가 주의 인도로 죤 로스 목사를 만나 복음을 받고 1879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는 로스목사를 도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고향 황해도 장연군 송천에 돌아와 솔내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였다.
특히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의 기도로 만주에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0년까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번역했고 1887년에는 신약을 인쇄 완료하였다.
그리고 1881년 한국정부의 특사격으로 도일한 이수정이 일본 농학계 권위자 쯔다 박사를 만나 신자가 되어 1883년 4월 세례를 받았으며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목사의 권고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4년에 마가복음 한글판을 발행하였다. 그러므로 이수정역의 한글 성경은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식적인 선교사의 내한이 없어도 성경이 먼저 전파된 것은 한국 기독교의 급진적 성장을 보여 주는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베뢰아 교회처럼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부흥 발전되어 왔다.
성경 보급의 역사를 보면 1890년대에 한국에서의 성경 보급량은 중국에서 50년 동안에 보급했던 양을 한국에서는 10년 동안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886년까지 15,690권, 1887년 한 해에 6,600권, 1892년까지는 578,000권이라고 보고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성령이 말씀하시기를”라고 했으며 성경을 봉독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 아무 책 몇 장 몇 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반신도들도 성경 읽기를 힘썼다. 그리스도 신문에 제중원 여의사 필 부인이 경남 죽산 둠병이란 곳에 가보니 12호 중 두 집을 제하고는 다 믿는데 그 중 여신도 60여명은 예수를 믿은 다음 국문을 배워 책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글이 있다. 이는 그 당시 신자들이 얼마나 성경 읽기에 열심이었던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길선주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다 외우고 가르쳤으며 김아무개란 분은 마태복음을 다 외우고 나니 남들이 김마태라고 불렀고 신약을 다 외우니 김신약이라고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초대교회는 요즘처럼 심령부흥회가 아니고 부흥사경회를 열었으며 한 교회서 열면 먼데서 양식을 가져와서 성경을 배우곤 했다. 그래서 ‘국제선교 라뷰’라는 잡지에 소개하기를 “성경의 권위와 그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이 널리 퍼져 있으며 한국 사람은 성경을 그들 생활의 가장 깊은 곳에 갖다 놓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선교사 페제트 윌케스의 일기에서 한국초대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911년 언더우드 목사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약 한달 동안 신의주로부터 부산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남겼다.
① 어디를 가나 교인들은 성경공부에 열심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성경공부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참으로 성경은 한국의 책이다.
② 한국교회 교인들은 주일성수에 철두철미하다. 그 모습은 마치 옛날 스코틀랜드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③ 자립정신이 강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목사 조사를 섬길 뿐만 아니라 예배당도 건축하고 있다.
④ 전도열이 강하고 특히 개인전도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새 신자가 생기면 그들을 위해서 교사가 특별 지도를 하고 있었다.
⑤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신앙이 강했다. 선교사들은 예수의 재림을 그저 평범하게 가르치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아주 진지했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 강했다.
⑥ 성경연구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고등비평이 전혀 없었다.
우린 여기서 한국초대교회가 주일을 성수했으며 성경공부에 열심한 것을 배워야겠다. 요즘 교인들은 주일 낮 예배로 족하다는 관념이 많은 것 같다. 성교자의 책임도 없지는 않겠지만 집이 멀어서 밤 예배까지 오기 힘들어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든지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각부에서 활동하다 보니 몸이 지쳐 밤 예배는 피곤해서 못 드린다든지 텔레비전 연속 프로를 보기 위해서 혹은 예배는 한번만 드려도 족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는 것 같다. 집이 아주 먼 거리라면 할 수 없지만 도보로 20분, 차로 3,40분 정도의 거리라면 밤 예배도 본 교회에서 드려야겠다. 그리고 주일에 와서 각 기관별 성경공부에 적극 참여해야겠다.
영양실조가 되면 병들기 쉬우며 무력해지기 때문에 말씀을 고루 섭취해야겠다. 머리만 크다든지 또 지능이 모자라는 것처럼 아는 것은 많은데 행함이 없는 영적 과 분수는 되지 말아야겠고 열심은 있는데 성경지식이 없는 영적 바보도 되지 말아야겠다.
또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이며 세계적인 대인물 마포삼열 목사는 1934년 희년기념예배 석상에서 “저가 한국에 처음 와서 복음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외에는 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죽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초대 선교사들의 신앙자세와 신학사상의 중심을 보여준 말이었다. 초대 선교사들은 신구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특히 고전 15:3,4의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전했다.
이렇게 한국 초대교회는 성경말씀이 기초가 되었으며 성경말씀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모진 일제의 대박해가 있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두말 할 것 없이 진실로 크리스천이면 진정한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한국교회 성도들은 그 누구 못지않게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면할 수가 없었다. 이 운동이 활짝 피어 오른 것이 3・1운동이었으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민족대표 33인중 16인의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므로 이 독립운동의 사상을 근절하기 위해 이 땅에서 기독교를 말살할 목적으로 교회에 대하여 마침내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굴복했지만 바알에게 절하지 않는 소수는 용감하게 저항했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양원 손명복 이기선 김인희 박신근 서정환 박관중 전봉성 안이숙 이광록 오윤선 김화준 고흥봉 장두희 양대록 조수옥 박인순 최덕지 채연빈 이현숙 방계성 등이 억울한 죄명을 덮어쓰고 옥고를 치렀다. 이 지도자들 중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고 항거하다가 순교를 했으며 박관준 장로는 일본 국회의사당에까지 들어가 “신사참배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침으로 체포되어 결국 감옥에서 순교하셨다. 그 뿐 아니라 6・25 당시 북괴군이 남침하여 대한민국을 유린했을 때 북쪽과 남쪽에 있는 목사 장로 집사들을 체포하여 심한 고문 끝에 총살 또는 생매장을 한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럼 이들이 왜 이런 비참하고 모진 고문 중에 죽어 가면서도 굴하지 않았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신앙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이며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배반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는 성경표지에 붓글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써 두고는 새벽에 잠이 깨면 먼저 그 말씀을 큰 소리로 봉독한 다음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수는 집안 식구라고 해외유학을 갔다 온 목사들을 통해 신신학이 들어 왔으며 게다가 탄압에 못 견디어 한국기독교는 일본식 기독교로 몰락되고 말았다.
한국에 건너온 초기 선교사들은 철저한 보수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교육받은 한국인 목사들도 정통의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해외 유학을 하고 온 한국인 목사들이 늘어났고 이들이 세계의 신학조류를 소개하기 시작하므로 그들의 영향력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박형룡 박사의 보수주의 신학과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대립이었다. 이것이 1934년부터였으며 마침내 한국교회를 보수와 진보로 크게 갈라놓은 원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친일 집단의 앞잡이들을 통해 세례 대신에 일본신사의 미소기바라이를 했으며 1942년 3월엔 조선혁신 교단이 조직되었고 성경 중 구약은 없애고 요한계시록과 찬송가를 개편하여 일본에 유리한 것만 말하게 하고 그 외엔 먹으로 지워 없애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7월 19일에는 모든 교파들을 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만들어 일본화로 몰락되고 말았다.
일본신사참배를 거부, 투옥되어 50여명의 순교자를 낸 한국교회는 8・15해방으로 살아남은 수난 성도들이 중심이 도어 재건 운동을 일으켰으나 일제 치하 지도자들의 거부반응 때문에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1945년 11월 14일, 평양에서는 38이북지방의 노회 대표들이 이북 5도 연합노회를 조직하여 재건운동을 일으켰으나 공산당의 박해로 다시 수난의 걸음을 걷게 되었고 반면 남한교회는 북한과는 달리 미군의 진주로 신앙자유를 누리게 되므로 이제와 타협한 무리들이 수의 횡포로 수난성도들의 재건운동을 반대하여 나서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난성도들 중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는 옥중에서 “주께서 저희들을 살려 주시면 폐쇄된 평양신학교와 같은 신학교를 세워 속화되고 타락한 교역자들을 재훈련시키며 또 진실한 후배 교역자들을 양성하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응답되어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때문에 1950년 4월 대구에서 모인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고려신학교 문제와 일제 때부터 있던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전신) 문제로 소란해지자 비상정회가 되었고 5월 24일 부산에서 모인 제 36회 속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단절하므로 고려파 교단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이 해 민족의 대 수난 6・25가 일어났다. 일찍 한국교회가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일본신사참배 결의 성명서를 가결했다. “우리는 신도(神道)가 종교도 아니요 기독교교리에 위배되지도 않는다는 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신사참배를 솔선 권행 하고 비상시국 하에 황국신민으로 적성을 다하기로 결심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정면으로 맞서서 항의했던 한부선 방위량 두 선교사는 제명 축출을 당했고 그때부터 많은 목사 장로 집사들이 수난을 겪게 된 것이었다. 어느 성도는 “한국교회가 이 무서운 죄를 가결할 때가 38년이요 일본천황이 38세였다. 그러니 국토양단의 38선이 생긴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마찬가지로 신사 참배한 것을 회개하자고 외치는 수난성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 고려신학교를 잘랐으니 어찌 6・25의 몽둥이를 맞지 않겠는가!”라고 했으니 음미해 볼 말이 아닐 수 없다.
6・25 동란이후 한국교회는 수백만 이북성도들이 출애굽 같은 남으로의 피난과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형집회 등으로 수적 대 부흥이 일어났다.
6・25의 비국과 4・19와 5・16의 경험한 한국교회는 불쌍한 민족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자는 굳은 열의로 각 교회가 전도에 힘썼다. 1965년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전국복음화운동이 발기되었고 뒤엔 민족복음화운동 전군 신자화 등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 와서는 100만 명이 넘는 전도대회가 세 차례나 있었다. 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74년의 엑스폴로 74, 77년 민족복음화성회 등이 그것이다.
이제 필자는 현재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우리의 신앙노선을 밝히고자 한다.
1. 보수적 성경 관이어야 한다.
한국의 장로교의 신학교육은 수준 높은 교육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로교의 4교단 곧 고신 합동 통합 기장은 모두 정규 신학대학의 인가를 받았으며 기장을 제외한 3교단은 대학 졸업생을 받아 3년간 교육시키며 또 졸업 후 강도사고시 또는 2년간 개척교회전도 후 목사고시를 거쳐 목회가가 되도록 하고 있다.
신학의 경향은 고신과 합동은 보수적 개혁주의, 통합은 신정통주의, 기장은 자유주의로 되어 있다.
보수주의란 성경을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고 자유주의는 여기의 반대되는 사상이고 신정통주의란 칼 발트의 사상이다. 칼 발트의 성경관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항세계(永恒世界=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완전하지만 역사 계에 들어 와서는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인간이 불완전하니 영감 받아쓰는 기자가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이지만 실수하지 않게 받아쓸 수 있다는 것이 정통의 해석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어야겠다.
요즘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된다고 믿으십시오! 그대로 됩니다!” “병이 낫는다고 믿으십시오! 곧 낫습니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말들은 좀 깊이 생각해야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원한다고 해서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 8:2)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고 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절대적인 자기 주권대로 행하시는 분이시지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하는 분은 아니시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고 전할 뿐이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마리아와 같은 순교자적 신앙이 있어야겠다.
3. 이적을 구하는 습성을 버려야겠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적병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적은 성령이 하신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것도 있으니 주의해야 된다. 이적을 통해 자기가 구세주인양 고자세를 취하는 자가 있는 반면 또 일반교인이 이적에 정신을 못 차리는 습성이 있으며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장소보다 기도원에서 안수기도 하는 곳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현상을 볼 때 한국교회의 장래가 어둡기만 하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이적 곧 나의 나 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4. 불건전한 방언을 지양해야겠다.
요즘 한국교회는 방언 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다. 심하게는 방언을 못하면 성령의 은사를 못 받는 자처럼 말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방언하기 위하여 기도원에 가서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언 하는 분들은 자기만 하고 조용하면 좋겠다. 아무리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성경이 아니면 그것은 옳은 일이 못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서는 여신도들이 기도원에 가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대신(對神) 방언, 대인(對人) 방언, 심하겐 대수(對獸) 방언 곧 짐승을 향한 방언도 있는데 예를 들면 사나운 개가 짖을 때 개를 향해 방언을 하면 개도 함께 하면서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칼빈 선생은 그의 역작 기독교 강요 제1권 9장 1절에서 “성경을 버리고 무슨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오를 범했다기 보다 광기증에 걸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성경의 사용은 단순한 과도기적이요 일시적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의 정신착란은 얼마나 악마적일까?”라고 하였다.
어떤 교역자에게 왜 교인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느냐 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안하면 그것을 좋아하는 교인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말씀 중심이 아닌 신비주의집회는 차츰 교인들의 신앙을 병들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5. 부흥회말고 사경회(査經會) 곧 성경을 살펴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이 되어야겠다.
요즘 부흥회는 왜 그렇게 소란을 피워야 하는지? 대부분의 부흥사가 성경교재나 설교노트만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성가를 부른다는 것을 빙자하여 매스컴을 타고 있는 대중가요의 가수와 전문적으로 간증하는 사람까지 대동한다. 부흥회를 위해 전문적인 조명사가 동원되고 부흥사의 의상은 베이지색 양복에다 주로 빨간 넥타이로 분장에 신경을 쓴다. 이 정도면 부흥사는 일류 스타가 아닐 수 없다. 대중을 휘어잡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부흥회에 나가서 웃고 울고 박수 치고 뛰다보면 교회의 공식집회가 시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인들은 소란한 곳만 찾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교회의 공식예배에 대한 방법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류의 방법으로 오염되고 있다. 왜 방언을 해야 하고 입신을 해야 하고 소란을 피워야만 예배가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이비 신앙의 온상이 되고 있는 이상기류의 집회열이 결코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그러나 부흥회는 해야 된다. 하되 옛날 선배들이 하던 부흥사경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연합운동은 삼가야겠다.
요즘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연합사업을 벌린다. 그러나 진리끼리의 연합이어야겠다. 천당 지옥을 부인하는 이단자가 대표로 기도하고 조상 숭배를 아름다운 풍속이라면서 죽은 부모에게 제사해도 괜찮다는 사람을 연합집회 강사로 세워 교인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단자와 합하지 말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다.
7. 신앙생활의 표준은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장로교 헌법 신조 제1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대한 성서공회가 발행한 공동번역 성서는 외경 9권을 합쳐 성경이 75권 인양 내놓고 있다. 이는 저주받을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계 22:18,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셨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구약성경에선 엄중히 인용하사 말씀하시고 기록에 남기기도 했지만 외경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말씀이나 인용한 일이 없다. 이것만 보아도 외경은 성경이 아닌 증거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야겠다.
[출처] 제6부, 성경과 교회|작성자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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