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
(행 13:1-3)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 증거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을 ‘교회의 본질’이라고 정하였는으나 막상 ‘본질’이라는 말이 거창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본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다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만일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존재는 무가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존재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1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소금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양이 아니라 짠맛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리게 되면 소금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종교개혁 당시 상황을 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성사(聖事)에 있다고 하고, 특히 속죄는 거기에 상응하는 선행의 보속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면죄부(免罪符)를 사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래서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성당 건축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도 면죄부의 판매가 성행했습니다. 이런 교황청이 발부한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내용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고 당시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1517)을 게시한 것이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선행과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어떤 크리스챤이든지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고 했으며, 면죄부 사느라 돈을 빼앗긴 사람을 위해서라면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라도 그 돈을 되갚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79조에서는 교황이 사용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 95개조 반박문을 루터가 계시한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루터는 결국 이런 주장으로 인하여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결별을 선언 당하게 됩니다. 바로 루터가 주장한 것이 교회 본질의 회복이었습니다.
예화 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첫 교회인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 이오니아의 수도이며, 시리아의 안디옥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 동쪽의 세 개의 큰 도시 중 하나로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시대 소아시아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유적지를 보게 되면 교회들의 옛터에 장식한 많은 십자가들은 당시 창궐했던 다이아나 숭배에 대한 기독교의 전적인 승리를 증거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는 지금 다 무너진 폐허에 잔재만 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경고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 지 오랜 사람은 그동안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책도 읽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찾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 교회
오늘도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일번 지는 거의가 다 성령 충만한 교회, 말씀 충만한 교회, 사랑 충만한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을 돌이켜 보는 것처럼 교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상적인 교회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지상 건물은 없었으나 교회가 갖추어야 할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1) 성령 충만한 교회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를 현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형으로 손꼽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은 것처럼,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예루살렘 교회가 그와 같이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신신 당부하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기도에 전혀 힘을 썼습니다.
(행 1: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더라’는 말(proskarterevw)이 동분사 현재 능동 주격(현재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백이십명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현대 교회 중에 아무리 은혜로운 교회일지라도, 예루살렘 교회처럼 온 교인들이 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말씀과 기도가 있는 교회
지상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가건물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말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서도 깨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무식한 갈릴리 어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형제들아 어찌할꼬! 가슴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에는 불과 백이십 명으로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가 급기야 삼천 명이 세례를 받는 대형 교회로 급성장하였습니다. 불과 백 이십 명이었던 교회가 삼천 명으로 성장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수년에서 수십 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급조한 가설무대나 판잣집처럼 태풍에 쉽게 넘어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양적인 변화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것입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3)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있는 교회
성령 충만하고, 말씀과 기도가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또 다른 변화는 바리새인들이 모인 기존 성전과 차별화된 모임이었습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 같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나서 자연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는 전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씨 뿌리는 일이라면 먼저 그 씨를 뿌릴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만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수 신앙을 빙자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위해서라고 오해합니다. 물론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답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불식시키려면 무엇보다 사랑과 나눔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완벽한 교회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일까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지상에 어떤 교회보다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나눔이 가득한 교회이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본질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시고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균형 잡힌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모델 교회가 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 안디옥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그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과 기도가 있고,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있는 교회였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부족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교회가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안디옥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넘치도록 축복하신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는 교회의 본질이 다름이 아닌 선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이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만이 아니라 지상에 모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또한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일에 열심을 다하여 외형적으로 교회가 양적 부흥은 가져 왔지만, 그 때문에 핍박을 자초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만이 아니라 집과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선교에 대해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행 11: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여기서 ‘비난하여’라는 말(diakrivnw)은 ‘구별하다, 판단하다, 정확하게 분별하다, 결정을 내리다, 의심하다, 흔들리다, 주저하다.’라는 뜻으로 미완료 동사입니다. 쉽게 말해서 계속해서 비난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는다고 핍박을 받아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평신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물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무슨 신학적인 지식이 있거나 오랜 신앙 연조로 많은 체험이 있거나 한 사람들이 아니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새 신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말미암아 가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명령하신 이방 땅에도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뒤늦게 그 소문 들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뒤늦게라도 이방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방 교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송하였습니다.
(행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바나바는 사도가 아니었지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선교에 대해서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제 생명을 걸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가 네트워크를 하였습니다. 하나의 팀이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안디옥 교회입니다.
뒤늦게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경험과 이방 성도들이 오직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설립된 교회라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안디옥 교회는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었을 때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한 후 바나바와 사울을 사절로 보내어 예루살렘 교회를 최초로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을 무사히 마친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마가 요한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게 된 간증을 듣고 헌신하겠다고 자원한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렇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도 역사도 짧고 구성원도 미약하고 숫자도 적지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열린 교회, 깨어있는 교회, 앞서가는 교회였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헤롯의 박해로 인해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 사도가 투옥이 되는 수난을 겪고 있을 때, 안디옥 교회는 이방 땅에 세워진 개척교회에 불과하였지만 오히려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위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 1:8절에 당부하신 말씀처럼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선교를 지상 교회 가운데서 최초로 시작한 선교의 어머니 교회가 되었습니다.
1) 말씀이 있는 교회
오늘 성경 본문 속에 안디옥 교회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안에 선지자와 교사의 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따르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그와 같은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서 ‘니게르’는 검다라는 뜻이고,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말은 어려서 헤롯왕과 함께 양육을 받은 형제였다는 말(suvntrofo")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부터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강한 교회로 이방인에게 문을 열지 못하고 좋은 일군들을 영입하지 못하였으나, 안디옥 교회는 정반대로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주안에서 평등한 교회였습니다.
2) 깊은 기도가 있는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말씀과 기도의 균형을 이루었다면 안디옥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기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보다 영적인 깊이 더 있는 기도였습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서 ‘주를 섬겨’라는 말(leitourgevw)은 동분사 현재 진행형으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기도를 하게 된 이유가 자신들의 필요를 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를 섬기기 위한 도구로 예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성령 충만이란? 성령에 지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 것은 땅 끝까지 선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선교를 명령하였을 때 안디옥 교회에 가장 필요한 두 사람을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여 안수한 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하지 못한 일을 안디옥 교회가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안디옥 교회를 세우신 이유요 목적이요, 존재이유요, 본질입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라는 말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에는 핍박이 지속되었습니다.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역사가 짧습니다. 교회 구성원이 다양합니다. 교회의 숫자가 많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후원하고, 행 1:8 말씀대로 바나바와 사울, 바울과 실라, 바나바와 마가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 미미한 시작이 결과적으로 소아시아와 유럽과 로마와 영국과 미국을 걸쳐 조선 땅에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한국 교회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처럼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밖에 버리어 밟히게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를 깜작 놀라게 하는 대 부흥과 성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합동측 교회가 12000여 교회가 되고 선교사를 2133 명을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12000 교회 가운데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불과 505개 교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금번 선교대회를 통해서 1000개 교회 선교사 파송운동을 벌리는 선교대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은 예배를 잘 드리고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실천만 있으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행 1:8절의 말씀과 같이 선교입니다. 교인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선교가 진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전도하고 선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망각하는 교회는 아무리 예루살렘 교회처럼 외형적으로 숫자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 같아도 이방인을 사랑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인도의 지도자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자서전을 보면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예배 자리 내주기를 거부하며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만약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발길을 돌려버렸습니다. 훗날 간디는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는 동의를 하지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막는 것은 마귀도 아니고 불신자들도 아니고 바로 이웃 사랑을 망각한 기독교인 자신들입니다.
I like Christ but I don't like christian, because they aren't like Christ.(나는 예수는 좋아하나, 크리스챤은 좋아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왜 주님이 세상에다 십자가에 피 흘려 값 주고 교회를 세우신 이유 즉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있어야 하고, 말씀과 기도가 있어야 하고, 성도들간에 교제와 나눔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행 1:8 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세우는 그 일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왜 선교가 그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일을 위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성령님이 그일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와 같은 선교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편견을 버리고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 오늘의 우리의 교회, 오늘의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고 아무리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만일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인 사랑과 선교를 외면한다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고 교회의 본질인 사랑과 선교에 보다 더 깊은 관심과 기도와 구체적인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구와 가능성이 많은 인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간디를 실망케 한 영국 교회는 외부적으로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으나 내부적으로 선교의 본질인 사랑이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그 영국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 아니 우리 교회 그리고 나는 영국교회 신자들처럼 이율배반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
(행 13:1-3)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 증거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을 ‘교회의 본질’이라고 정하였는으나 막상 ‘본질’이라는 말이 거창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본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다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만일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존재는 무가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존재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1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소금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양이 아니라 짠맛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리게 되면 소금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종교개혁 당시 상황을 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성사(聖事)에 있다고 하고, 특히 속죄는 거기에 상응하는 선행의 보속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면죄부(免罪符)를 사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래서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성당 건축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도 면죄부의 판매가 성행했습니다. 이런 교황청이 발부한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내용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고 당시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1517)을 게시한 것이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선행과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어떤 크리스챤이든지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고 했으며, 면죄부 사느라 돈을 빼앗긴 사람을 위해서라면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라도 그 돈을 되갚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79조에서는 교황이 사용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 95개조 반박문을 루터가 계시한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루터는 결국 이런 주장으로 인하여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결별을 선언 당하게 됩니다. 바로 루터가 주장한 것이 교회 본질의 회복이었습니다.
예화 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첫 교회인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 이오니아의 수도이며, 시리아의 안디옥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 동쪽의 세 개의 큰 도시 중 하나로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시대 소아시아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유적지를 보게 되면 교회들의 옛터에 장식한 많은 십자가들은 당시 창궐했던 다이아나 숭배에 대한 기독교의 전적인 승리를 증거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는 지금 다 무너진 폐허에 잔재만 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경고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 지 오랜 사람은 그동안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책도 읽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찾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 교회
오늘도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일번 지는 거의가 다 성령 충만한 교회, 말씀 충만한 교회, 사랑 충만한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을 돌이켜 보는 것처럼 교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상적인 교회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지상 건물은 없었으나 교회가 갖추어야 할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1) 성령 충만한 교회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를 현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형으로 손꼽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은 것처럼,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예루살렘 교회가 그와 같이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신신 당부하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기도에 전혀 힘을 썼습니다.
(행 1: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더라’는 말(proskarterevw)이 동분사 현재 능동 주격(현재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백이십명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현대 교회 중에 아무리 은혜로운 교회일지라도, 예루살렘 교회처럼 온 교인들이 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말씀과 기도가 있는 교회
지상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가건물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말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서도 깨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무식한 갈릴리 어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형제들아 어찌할꼬! 가슴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에는 불과 백이십 명으로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가 급기야 삼천 명이 세례를 받는 대형 교회로 급성장하였습니다. 불과 백 이십 명이었던 교회가 삼천 명으로 성장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수년에서 수십 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급조한 가설무대나 판잣집처럼 태풍에 쉽게 넘어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양적인 변화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것입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3)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있는 교회
성령 충만하고, 말씀과 기도가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또 다른 변화는 바리새인들이 모인 기존 성전과 차별화된 모임이었습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 같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나서 자연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는 전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씨 뿌리는 일이라면 먼저 그 씨를 뿌릴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만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수 신앙을 빙자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위해서라고 오해합니다. 물론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답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불식시키려면 무엇보다 사랑과 나눔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완벽한 교회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일까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지상에 어떤 교회보다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나눔이 가득한 교회이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본질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시고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균형 잡힌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모델 교회가 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 안디옥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그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과 기도가 있고,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있는 교회였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부족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교회가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안디옥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넘치도록 축복하신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는 교회의 본질이 다름이 아닌 선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이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만이 아니라 지상에 모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또한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일에 열심을 다하여 외형적으로 교회가 양적 부흥은 가져 왔지만, 그 때문에 핍박을 자초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만이 아니라 집과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선교에 대해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행 11: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여기서 ‘비난하여’라는 말(diakrivnw)은 ‘구별하다, 판단하다, 정확하게 분별하다, 결정을 내리다, 의심하다, 흔들리다, 주저하다.’라는 뜻으로 미완료 동사입니다. 쉽게 말해서 계속해서 비난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는다고 핍박을 받아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평신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물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무슨 신학적인 지식이 있거나 오랜 신앙 연조로 많은 체험이 있거나 한 사람들이 아니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새 신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말미암아 가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명령하신 이방 땅에도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뒤늦게 그 소문 들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뒤늦게라도 이방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방 교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송하였습니다.
(행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바나바는 사도가 아니었지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선교에 대해서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제 생명을 걸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가 네트워크를 하였습니다. 하나의 팀이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안디옥 교회입니다.
뒤늦게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경험과 이방 성도들이 오직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설립된 교회라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안디옥 교회는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었을 때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한 후 바나바와 사울을 사절로 보내어 예루살렘 교회를 최초로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을 무사히 마친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마가 요한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게 된 간증을 듣고 헌신하겠다고 자원한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렇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도 역사도 짧고 구성원도 미약하고 숫자도 적지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열린 교회, 깨어있는 교회, 앞서가는 교회였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헤롯의 박해로 인해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 사도가 투옥이 되는 수난을 겪고 있을 때, 안디옥 교회는 이방 땅에 세워진 개척교회에 불과하였지만 오히려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위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 1:8절에 당부하신 말씀처럼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선교를 지상 교회 가운데서 최초로 시작한 선교의 어머니 교회가 되었습니다.
1) 말씀이 있는 교회
오늘 성경 본문 속에 안디옥 교회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안에 선지자와 교사의 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따르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그와 같은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서 ‘니게르’는 검다라는 뜻이고,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말은 어려서 헤롯왕과 함께 양육을 받은 형제였다는 말(suvntrofo")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부터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강한 교회로 이방인에게 문을 열지 못하고 좋은 일군들을 영입하지 못하였으나, 안디옥 교회는 정반대로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주안에서 평등한 교회였습니다.
2) 깊은 기도가 있는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말씀과 기도의 균형을 이루었다면 안디옥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기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보다 영적인 깊이 더 있는 기도였습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서 ‘주를 섬겨’라는 말(leitourgevw)은 동분사 현재 진행형으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기도를 하게 된 이유가 자신들의 필요를 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를 섬기기 위한 도구로 예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성령 충만이란? 성령에 지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 것은 땅 끝까지 선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선교를 명령하였을 때 안디옥 교회에 가장 필요한 두 사람을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여 안수한 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하지 못한 일을 안디옥 교회가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안디옥 교회를 세우신 이유요 목적이요, 존재이유요, 본질입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라는 말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에는 핍박이 지속되었습니다.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역사가 짧습니다. 교회 구성원이 다양합니다. 교회의 숫자가 많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후원하고, 행 1:8 말씀대로 바나바와 사울, 바울과 실라, 바나바와 마가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 미미한 시작이 결과적으로 소아시아와 유럽과 로마와 영국과 미국을 걸쳐 조선 땅에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한국 교회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처럼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밖에 버리어 밟히게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를 깜작 놀라게 하는 대 부흥과 성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합동측 교회가 12000여 교회가 되고 선교사를 2133 명을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12000 교회 가운데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불과 505개 교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금번 선교대회를 통해서 1000개 교회 선교사 파송운동을 벌리는 선교대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은 예배를 잘 드리고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실천만 있으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행 1:8절의 말씀과 같이 선교입니다. 교인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선교가 진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전도하고 선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망각하는 교회는 아무리 예루살렘 교회처럼 외형적으로 숫자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 같아도 이방인을 사랑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인도의 지도자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자서전을 보면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예배 자리 내주기를 거부하며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만약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발길을 돌려버렸습니다. 훗날 간디는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는 동의를 하지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막는 것은 마귀도 아니고 불신자들도 아니고 바로 이웃 사랑을 망각한 기독교인 자신들입니다.
I like Christ but I don't like christian, because they aren't like Christ.(나는 예수는 좋아하나, 크리스챤은 좋아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왜 주님이 세상에다 십자가에 피 흘려 값 주고 교회를 세우신 이유 즉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있어야 하고, 말씀과 기도가 있어야 하고, 성도들간에 교제와 나눔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행 1:8 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세우는 그 일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왜 선교가 그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일을 위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성령님이 그일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와 같은 선교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편견을 버리고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 오늘의 우리의 교회, 오늘의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고 아무리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만일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인 사랑과 선교를 외면한다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고 교회의 본질인 사랑과 선교에 보다 더 깊은 관심과 기도와 구체적인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구와 가능성이 많은 인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간디를 실망케 한 영국 교회는 외부적으로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으나 내부적으로 선교의 본질인 사랑이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그 영국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 아니 우리 교회 그리고 나는 영국교회 신자들처럼 이율배반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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