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신학적 명제
들어가는 말
예배 본질의 탐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어 왔고, 오늘 각 교단의 예배신학과 예전을 형성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 또다시 예배 본질을 탐구하려는 것은 한국교회 예배 변화의 속도와 폭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넓어서 예배 갈등과 예배 전쟁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 본질의 탐구의 필요성은 올바른 예배를 세우고 싶어 하는 변화 운동의 명칭에서 나타난다. 예배 갱신, 예배 회복, 예배 개혁, 예배 부흥이 추구하는 것은 예배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예배 본질에 대한 논의를 가속화시킨 두 가지 동인은 교회 일치운동과 소통이다. 교회 일치운동은 그동안 교단의 신학을 표현한 예배 안에 머물렀던 예배회중 들을 밖으로 불러내었고, 소통이라는 현대 문화의 키워드는 예전 간의 소통, 예배의 요소 들 간의 소통, 예배인도자와 예배자와의 소통의 주제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 리마예식서 와 BEM문서와 같은 에큐메니칼 문서들이 나오고, 예배 요소들 간의 소통, 즉 말씀과 성 찬, 찬양과 말씀, 찬양과 기도를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특히 예배자들이 예배 회중들의 입장에서 예배를 이해하고, 예배 참여를 독려해야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예배에 관한 표어들이 등장하였는데, 역동적인 예배, 감동적인 예배, 행 복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경건한 예배, 장엄한 예배, 초대교회와 같은 예배, 에큐메니칼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등이다. 이 모두가 예배 본질의 회복을 목표로 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예배 본질의 회복이 가능한가에 있다. 가능 하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찾았을 때 예배 본질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예배 본질은 성경이나 신앙의 교리가 형성되 기 이전부터 있어온 제사 또는 예배에 담겨있는 것인데, 그만큼 예배 본질의 탐구가 제 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배 본질 탐구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예배 본질은 하나님 의 실재와 임재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전제로 하는데, 실제 논의들은 인식론적 담론으 로 전환되는 경향 때문이다.7)
7) 예배본질 규명의 어려움에 대한 깊은 논의는 한재동 박사의 최근 논문, “예배갱신의 내포적 의미와 그 실 현범위,” 신학과 실천 18호, 2009, 36이하에 언급되어 있다.
예배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는데 따 른 어려움으로 인해 외연적 예배 형태와 구조 또는 내용에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예배 본질의 탐구로 얻은 결론들이 다르다는데 있다. 위에서 언 급한 예배 갱신과 회복 운동들마다 목표로 제시하는 예배 본질이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예배 본질은 현대교회의 새로운 형태의 교회패러다임에서 지향 하는 각각의 교회 이해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당연히 성서와 교회 전통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모든 교회가 공감하며 공유할 수 있는 예배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알고 예배 본질을 탐구하고 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본질의 탐구라는 목표로 우리가 여기서 하고자하는 것은 예배 이해, 예배 원리, 또는 예배 신학과 같은 의미다.
이 연구는 성경 형성 이전부터 존 재했던 예배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예배 이해 또는 신학들을 고찰함으로 기독교 예배의 성격과 원리를 찾는 것이다. 신학교 강의 실과 목회자 세미나와 교회 현장탐방을 통해서 얻은 통찰을 예배의 신학적 명제라는 카 테고리로 묶어보았다. 필자는 예배의 신학적 명제라는 용어를 예배 이해, 예배 본성, 예 배 원리, 예배 성격, 예배 영성, 예배 정의, 또는 예배 신학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였 다. 이 글에서 예배는 주일예배를 가리킨다. 골방예배나, 삶으로 드리는 일상의 예배는 포함하지 않는다. 31개의 명제를 둘로 나누어 6개의 기본적 예배 명제와 25개의 구체적 예배 명제로 나누어 다룬다.
I. 기본적 예배 명제
1. (예배 대상) 하나님을 아는 만큼 예배할 수 있다.
이 명제는 기독교 예배가 신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과, 따라서 같은 예배를 드 리는 예배자들이라도 자신들의 신지식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따라 질적으로 차이가 있 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명제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목격한 대로 인 간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진심으로 예배할 수 있는 종교적 본성이 있기 때문에(행17:23) 바른 예배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서 제일 먼저 물어야할 명제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 님을 알지 못하는 유다백성들을 꾸짖으면서(사1:3, 6:9, 40:21, 28, 44:8, 45:4, 5) 레 위기의 제사법에 따라 철저히 제사 종교에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통렬하게 비판한다(사1:11-13).8)
8)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 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 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신지식 없는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경책과 거절 을 마음에 담고 유대 백성에게 간곡하게 신지식의 필요성을 호소함으로 바른 예배 회복 의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신지식의 중요성은 칼빈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는 기 독교강요 1장에서 제일 먼저 신지식을 다루면서, 그는 신지식이 중요성 대해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사랑할 수 있고 경외할 수 있어서 자발적으로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점 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즉, 그는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경외(earnest fear)를 지 닌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성실한 경외란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이면서 동 시에 자발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
빈은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 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되 아무 뜻 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儀式) 이 허식으로 흐르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9)
9) 칼빈, 기독교강요, 1-2-2.
2. (예배 대상) 예배하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명제는 1번의 명제와 함께 다룰 때 더욱 공감이 된다.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예배할 수 없으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간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성경공부, 개인기도 체험, 자연계시, 극적인 사건처럼 개인적인 성격의 방법과는 달리 신 앙 공동체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말씀 선포, 공동 기도, 공동 찬양, 신앙고백과 같은 순서를 통해서 역사적 신앙공동체와의 연대감을 형성하며, 개인적 신앙 을 정통적 신앙까지 승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씀으로 (행2:42, 히 10:25) 그리스도의 형상에 나타난 하나님을 알아갔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3. (예배다양성) 가장 성서적이고 올바른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명제는 올바른 예배를 추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당황하게 하 는 명제 중에 하나인데, 실상은 예배의 본질이나 내용이 아니라 예배 형식과 예전적 표 현방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또한 규정 하신 예배가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예배자가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의미다.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가장 올바른 예배를 제시해야할 성경도 분명한 예배의 유형과 예전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10)
10) ◉ 예배를 뜻하는 6개의 신약성서 단어
προσκυνε 'ω (proskuneo); προσκυνητη 'ς “경배하다”엎드려 절하다” “예배하다”
λατρει 'α (latreia); λατρευ 'ειν “섬기다”, “예배”, “제사”, “봉사하다”
σε 'βεσθαι (sebesthai) ;“위하는(worship)” “숭배함을 받는” “경배하는” “공경하는”
λειτουργι 'α (leiturgia); “섬기는” “직무” “직분”(ministry) “일군”(minister)
θρησκει 'a (threskeia) “종교” “숭배함” “경건”
συνα 'γεσθαι(synagesthai) 모여서
◉ 성서의 예배모델:
1. 제사 2. 만남 3. 모임 4. 치유 5. 성례전 6. 해방 7. 천국
오늘날 교단마다 다르게 드리고 있는 다양한 예배의 모습들이 하나같이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예배자도 자기가 드리 는 예배가 성서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는 것이다. 전혀 상반된 모습의 예배여서 도저히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각 예배의 요소들이 모두 성서로부터 왔다고 주 장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예배를 위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서구절은
“아버지께 참 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 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 로 예배할지니라”(요4:23, 24)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 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일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또 다른 구절에서도 예배 정신과 예배 자세 이외에 명확한 예배규정을 찾아볼 수는 없다. 이러한 성서 구절들을 자신의 전통에 맞게 전유(專有)하여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이 속한 예배만이 성서적이라든지, 혹 은 더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파적이고 편협한 해석이다.
둘째, 현재 세계교회의 각 교회의 예배가 너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고 역사적, 신학 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1)
11) ◉ 교단에 따른 예배 정의
첫째, 예전적 예배에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회상하는 것이다.
둘째, 말씀 중심예배에서 예배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다.
셋째, 은사중심예배에서 예배란 성령의 역사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다
예전을 중요시하는 동방교회, 로마가톨릭교회에서부 터, 예전에 전혀 매이지 않는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하나님의 성회, 더 나아가 퀘이커 예배, 현대의 다양한 구도자적, 문화 친화적 예배들이 있다. 같은 교단이라 하더라도, 또 나라마다 지역교회마다 예배의 모습은 다르다. 마치 온 세계 사람들의 피부색과 얼굴모 습이 다르듯이, 교회마다 다른 모습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수십, 또는 수백 가지 나누어진 예배의 모습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 모든 예배들을 접해보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어떤 예배가 가장 올바른지 따져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른 교회의 예 배는 너무 세속화되었다든지, 너무 형식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들은 각 예배의 깊은 역사와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각 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이 속한 예배의 신학적 위치를 알게 되고 풍부한 그리스도교 예배 유산에 대한 새로운 안목도 열릴 것이다.
다음은 다양한 예배를 다음 두 축으로 구분하 여 그 차이를 알아보자.
예전중심의 예배(liturgical worship) 자유로운 예배(free style worship)
신앙의 공동체적 표현 개인적 자유로운 표현
질서, 장엄, 전통적 아름다움 역동, 생동감, 독창적, 현대적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스도와의 만남
자비 능력
성만찬 찬양, 말씀
4. (예배목표) 예배의 목표로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영화)’와 ‘은혜를 받기 위해서(성 화)’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예배 목표를 규정하는 이 명제는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예배자가 하나 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포함하는데, 유의할 것은 이 두 요소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 점이다. 예배 목표에 두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특별한 것이 없으나, 이 두 요소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 배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한다는 것은 예배 교육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데, 예배가 회중들을 지향하고 있고, 더구나 회중들을 위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명제 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배갱신과 예배회복운동에서 자주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영광을 받고 있다는 점인데, 그런 점에서 이 명제는 잘못된 것이고, 염려가 되는 명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신학교 수업 중 명제에 대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이 명제가 가장 논란을 야기하는 명제다. 많은 경우 이 명제를 약간 수정하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는데, 즉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면 예배자는 은혜를 받는다’라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런 제안이 적절하고 기존의 이해와 부합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명제에서 ‘같은 의미’라 는 것은 신중하게 선택된 단어라는 점을 강조한다. 두 요소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주 장하는 이유를 두 가지 측면, 하나는 현재 예배상황적인 측면과 다른 하나는 성서적-신 학적 측면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현재 예배상황적인 측면으로는
첫째, 현재 예배드 리는 현장에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 이중적이라는 사실이다. 교단 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예배에서 회중들이 은혜 받 아야할 것을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구체적인 방법과 범위에 대해 개 교회 목회자들마다 내리는 지침이 다른데. 회중들이 느끼는 혼란 은 심각하다. 예를 들면 찬송가 가사, 음악 장르, 앉은 자세, 박수, 아멘 등에 대한 교육 에서 하나님께 영광일까, 회중에게 은혜일까를 가름하는 기준들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 성서적-신학적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첫째, 예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막12:28-31)을 율법의 가장 큰 계명으로 제시하실 때, 이 둘은 함께 이해되어야할 불가 분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예배에서 표현될 때, 어떤 번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어야할 것을 강조하셨다.12)
12)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 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둘째, 하나님께 영 광 드리는 것과 회중이 은혜 받는 것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려는 것은 초대 교부 이레니 우스의 말에서 힘을 얻는다. 즉, 그는 “인간이 거룩해지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망보다 더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없 다”고 말함으로 하나님 영화와 인간의 성화를 같은 문맥에 놓고 이해한 것이다. 마찬가 지로,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순서와 회중이 은혜 받고 감동받고 기뻐하는 순서가 예배현 장에서 선후관계나 우열관계를 넘어서서 함께 놓여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 나님만 들으실 수 있는 기도와 찬양을 구분해내어 부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부모들은 자 식들이 서로 우애가 있고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효도보다 만족스러워하는 것처 럼, 하나님은 회중이 은혜와 감동을 받고 기뻐하고 있을 때 어떤 예배순서보다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5. (예배방향) 예배의 모든 순서는 쌍방향성, 즉 하나님을 향하고, 이웃(회중)을 향한다. 이 명제는 예배 순서들이 하나님과 회중 중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를 다룬 것인데, 모 든 순서마다 정해진 방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서가 하나님을 향하기도 하 고, 동시에 회중을 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 기도와 찬송과 헌금은 하나님께 향하는 순서이고, 설교는 회중에게 향하는 순서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실제 현재 드리 는 예배의 전면적인 조정이 요구된다. 기도자의 방향, 찬송 부르는 이들의 방향에서부터 기도의 내용, 찬송의 가사 등 하나님께만 향하는 것으로 구분해내야 하는데, 모든 교회가 공감할만한 기준을 정하기 쉽지 않다.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께 향할 뿐 아니라 회중에게도 향한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를 들 음으로 참여하고 공감하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향한 찬송을 통해 공감하고 은혜를 받 기 때문이다. 설교도 회중에게 향하는 설교는 하나님께도 향하여 드리는 곡조 없는 감사 와 영광의 찬양이 된다. 예배순서의 쌍방향성은 성만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향한 감사의 예 식이기 때문이다.
6. (예배정의) 예배란 성령의 이끄심으로 모인 회중들이, 예수의 삶과 성경에 나타난 하 나님의 계시(약속)에 대해서 찬양과 기도로 응답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화와 회중의 성화를 지향한다. 이 예배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 성례전적 성격, 종말론적 공동체 성격.
II. 구체적 예배 명제
7. (예배적 신학) 예배를 신학의 한 분야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신학을 예배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예배자가 건강하다.13)
13) ‘기도의 법이 신앙의 법의 기초가 된다’: lex orandi, lex credendi( the law of order, the law of faith)
8. (예배 갱신) 예배는 본질적 성격상 갱신한다.14)
14) ◉ 개신교예배의 갱신
1) 예배에서 성경봉독의 중심성 회복
2) 교회력회복
3) 시편송
4) 여성집례자
5) 새로운 예배서
6) 바티칸 제2공의회로 인한 에큐메니칼 예전에 관심
7) 말씀과 축을 이루는 성례전 에 대한 강조
◉ 로마가톨릭예배의 갱신:
트렌트공의회(1545-1563) 이후 바티칸 제2공의회(1962-1965)에서 역사적인 예 전헌장(Constitution on the Liturgy)의 목표는 현대에 맞는 새로운 예배였다.
1) 공동체적 감각을 살린 것이다.
2)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
3) 지역교회공동체의 특성을 자각하는 것,
4) 말씀과 성찬의 균형,
5) 공동체 찬송을 강화,
6) 단순하고, 핵심적이고, 융통성 있는 예배구조 개발,
7) 새로운 성례전 사역과 다양한 평신도 사역의 문을 열었다,
자신들의 반성:
1) 복잡한 상징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부족
2)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예전(The Irrelevant Spirituality)
3) 커뮤니케이션 단절(The Communication Gap)
4) 성스러움과 기이함이 사라지고 있음(The Eclipse of Sacredness and Wonder)
5) 기능주의의 도입(The Shallowness of Functionalism)
6) 지나친 성만찬 중심의 예전(Over-Massed Liturgy)
7) 예전적 교육의 과소평가(The Under-Estimation of Liturgical Catechetics)
8) 예배의 표준화(The Standardization of Worship) 15) 딤전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9. (예배변화) 예배의 모습은 문화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1) 성경의 예배가 시대 변화에 따라 변화해왔다.
2) 교회역사의 예배들이 변화해왔다.
3) 문화는 예배의 도구가 될 수 있다.15)
15) 딤전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10. (예배원리) 예배에는 변할 수 있는 것과 변치 말아야하는 것이 있다.
예배에서 변하지 말아야할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1) 예배의 모든 것은 이해되어야 한다.
2) 예배의 환경: 예배 시간과 예배 장소
3) 예배 신학: (1) 삼위일체적 주권 (2) 성육신적 (3) 종말론적 공동체
4) 예배 내용: (1) 말씀 (2) 기도 (3) 찬송 (4) 성례전 5) 예배 구조: 사중구조 : 모임(gathering)-말씀-감사-파송
11. (예배문화) 현대예배(또는 열린 예배)를 할 수 있는 교회가 따로 있다.
현대예배를 할 때 고려해야할 것들……
1) 문화적 표현이 자연스러운 회중들에 한해서
2)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 개방적인 회중
3) 적극적인 표현을 하고 싶어 하는 회중
4) 적어도 충분한 교육을 받은 회중
5) 열 린 예배가 전통예배보다 더 형식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회중
12. (회중이해) 아멘 없이도 은혜로운 교회가 있다.
1) 내적 표현을 선호하는 회중들도 존중함을 받는 분위기
2) 구도자도 존중함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
3) 예배 집례자나 설교자도 회중들의 반응보다 준비된 예배에 집중할 수 있다.
13. (예배정당성) 감격 없이도 지속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자가 되라.
1) 무덤덤한 예배자도 열등한 예배자가 아니다. 기질적으로 다르게 반응할 뿐이다.
2) 감격 있는 예배자가 때로 감격이 없을 때 갖는 좌절감이나 주정주의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3)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회중의 경험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 이다.
4) 하나님의 임재는 경험과 느낌보다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 다.
14. (세대통합예배) 매주일 모든 세대와 함께 예배할 수 있다.
세대 통합예배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찬송과 말씀의 예배에서 지적인 응답과 행위는 일부분일 뿐이라는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전인적 응답을 지향하는 그리스도교 예 배는 인간의 육감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예배를 지향한다. 즉, 듣고(hearing), 보고 (seeing), 만지고(touching), 움직이고(moving), 냄새 맡고(smelling), 맛보는(tasting) 예 배다. 던 샐리어스는 그리스도 예배가 오늘의 세상에 주어진 참되고(true) 적절한 (relevant) 예배가 되기 위해서 제시한 예배에서 점검해야할 네 가지 감각, 즉 경외 (awe), 기쁨(delight), hope(희망), truth(진리)은 이러한 육감을 사용할 때 가능함을 지 적한다. 그의 감각에 대한 통찰은 기도와 찬송은 지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언어로 구성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지적인 것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관찰에서 구체화되 었다. 예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회중이 읽고(speak) 듣는(hear) 예식문들 (words)이나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는(see)것은 예전적 행위 중 구어체가 아닌 언어 (nonverbal language)에 속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구어체가 아닌 언어의 사용을 통해 위 의 네 가지 감각이 가능함을 역설하였다.
세대 통합예배의 두 번째 가능성은 예배를 세대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년에 이르는 인간의 전 생애의 여정으로 만들어 천국까지 이르는 순례자적 신앙을 담 아낼 수 있다는데 있다.
세 번째 가능성으로, 세대 통합예배를 가족공동체, 신앙공동체, 민족공동체적 사건으로 가득한 성서사건들을 예배자들이 함께 표현해낼 수 있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대 통합예배의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예배의 소란스러움, 갈등, 불편 함, 번거로움으로부터 온다. 인간의 삶 자체가 불안정, 갈등, 불편으로 되어있는데, 그리 스도인의 삶은 영적으로는 세상과의 전투라고 할 정도로 긴장되고 갈등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이 예배에서 모든 예배자들은 질서와 안정, 타협과 양보, 수용, 참음의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세대 간의 차이, 인종, 성별, 사회계층의 차이와 갈등 의 경험을 예배에서 승화시킬 때 오히려 신적 성품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기 대하는 것이다.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 에 섰더라!”
15. (주일예배의 고유성)예배의 활성화는 모든 예배와 주일예배를 따로 구별하는데서 부 터 시작된다.
1) 주일예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향함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2) 그 이외의 집회(주일저녁찬양, 수요성경공부,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부흥집회, 가 정기도회)는 교회와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해 예배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전문적으로, 창조적으로, 자율적으로 계획 진행한다.
16. (예전의 역할) 예배 순서 자체에 의미가 있고 예전은 예배가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 는 것을 방지한다.
예배 순서가 필요한 이유:
1) 질서
2) 자유
3) 예배의 회중은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4) 집례자의 즉흥성에 의해 좌지우지됨을 방지
5) 회중들이 준비할 수 있게 하여 공동 참여케 함.
17. (교회력의 효과) 교회력은 성지(팔레스타인)에 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성서시대를 맛보게 한다.
18. (세례와 성찬의 위치)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에서 태어나고 성찬으로 자라난다.
19. (세례의 물) 세례식에서 사용되는 물은 가능한 한 많이 사용하는 것이 좋다.
20. 세례식은 참여한 성도들에게는 이미 받은 세례를 확인하고 갱신하는 의미를 지닌다.
21. (그리스도중심예배) 예배에서 성찬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표현하기 때문에 예배 의 순서에 성찬의 의미가 담겨있을수록 건강한 예배다. 성찬의 의미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찬의 5가지 의미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성부 하나님께 감사(Thanksgiving to the Father) 유카리스트(Eucharist 감사 찬 양)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Memorial of Christ) 아남네시스(Anamnesis)=기억.
3) 성령의 임재기원(Invocation of the Spirit) 에피클레시스(Epiclesis)
4)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the faith) 코이노니아(Koinonia)
5) 하나님 나라 식사(Meal of the Kingdom) 하나님 나라의 잔치
22. (성찬의미) 성찬이 어울리지 않다거나, 자주 집례하기 어려워하는 예배일수록 그리스 도예배의 본질로부터 그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다.
23. (예배와 예술) 예배 안의 모든 요소, 즉 시간과 공간, 언어, 음악, 미술, 건축, 움직임 (movement)과 제스처, 음성과 침묵, 밖을 바라봄과 안을 성찰함(눈을 감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예배자일수록 복되다.
24. (예전의 약속) 박수를 쳐야하는가, 찬송할 때 일어나야 하는가, 기도에 단을 바라보 아야하는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있는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 회중의 전통 과 약속의 문제다.
25. (예배로 부름)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초대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 대에 대한 감사로 시작된다.
26. 성경봉독 시간에 회중이 함께 봉독하든지 교독하는 것보다 준비된 봉독자에 의해 읽 을 때 회중들이 경청하는 것이 좋다.
이는 찬양대의 찬양, 기도자의 기도, 설교자의 설교 처럼 미리 준비된 봉독자에 의해 읽도록 하는 것이 좋다.16)
16) 말씀을 ‘듣는’ 것의 중요성은 신명기와 마태복음에 나타나있고, 말씀 봉독자 선정과 봉독의 중요성을 나 타나는 예전은 동방교회에서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 와이시니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3, 막12:29, 신9:1, 20:3, 26:17, 29:9 ‘잠잠하여 들으라’수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9, 43), 비유를 들으라(마 13:18, 21:33).
27. 예배 언어가 차별적(배타적)17)이지 않기 위해서 즉흥적이지 않을수록 좋다.
17) 배타적 언어란 연령, 성별, 인종, 직업, 외모, 지역 등을 기준으로 차별적 내용이 담긴 언어를 말한다.
28. 찬송과 세속적인 노래의 구분은 음악적 장르와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노래인가에 달려있다.
29. 찬송에 개인적인 신앙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처럼 성찬에도 개인의 신앙이야기가 담 길 수 있다.
30. 성찬을 예전적인 절차에 맞추어 집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찬을 자주하는 것이다.
31. 성찬의 감정적인 분위기는 하늘나라 식탁을 대하게 될 때의 분위기, 즉 질서 있고, 장엄한 분위기다.
현대교회에서 성찬의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그동안 장례식 분위기의 성찬에서 벗어나, 축제의 식사가 되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잔치라고 해서 성찬의 분위기가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찬은 종말론적 식사(이미 와있기도 하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식사)이기 때문이다. 즉, 환난 중에 소망을 잃지 않고 그 날을 기다 리며 성취될 것을 미리 바라보는 식사이므로, 장례식장의 엄숙주의나, 경박한 잔치 분위 기가 아니라, 신비감을 담은 장엄함의 분위기가 적절하다.
김세광(서울장신대학교 교수, 예배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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