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의 신앙 고백의 중요성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서를 다룬다는 것은 교회의 신앙 고백을 다루는 것이다. 교리 문답서는 교리를 가르칠 때 사용되는 교제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교회의 신앙 고백이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서는 교회가 엄숙하게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이며 동시에 그 고백을 문서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믿음을 교리 문답서로 표현할 때 그 가치는 무엇일까? 처음에 이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신앙 고백이 도대체 내게 무슨 유익을 주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주 앞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바란다면 내 중심으로 교회의 신앙 고백을 대하는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물론 교리 문답서는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후반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라는 질문도 한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당신에게 지금 어떤 유익을 주는가?”라고 직설적으로 묻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 질문들이 반드시 개인의 유익을 가장 먼저 앞세우려는 의도가 아닌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은 보통 두가지 목적을 취한다. 첫째는, 교회 내부의 하나됨을 보호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백함으로써 각 시대의 이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둘째는, 외부 세상을 향해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에 진리를 계시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에는 헌신의 요소가 들어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만일 헌신과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이 믿음에 의한 고백일 때 성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태도에는 주를 향한 경배가 가장 앞서게 된다. 헌신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내용을 바라보고 그 내용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이때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붙든다. 물론 하나님은 주의 말씀에 의해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여 주신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다시 주의 말씀에 의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한 신실하심을 붙든다. 믿음의 증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머물며 누리는 평강이다. 그럼에도 믿음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신실하심을 결코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광대함과 능력에 사로 잡혀 압도 당하게 된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믿음을 사로잡아 압도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마음은 언제나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함으로 가득차게 되어 있다.
우리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조를 선언하는 것과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를 아직은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의 고백 행위와 고백 내용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구분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따로 떼어내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 자체를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 교회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주를 향한 경외와 예배의 마음을 잃을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신앙 고백 행위는 형식에 갇힌 죽은 고백과 다름없게 된다. 만일 교회가 형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면 교회는 신앙을 고백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삶과 교회의 신앙 고백 사이에는 점점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교회가 참으로 교리 문답서의 모든 내용을 보화처럼 귀중하게 여기고 마음속에 새긴다면 교리 문답서는 교회에 큰 자원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는 단순한 형식적 고백 행위가 아니다. 이때의 교회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행위가 된다.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 안에 주를 향한 찬양과 감사의 마음이 담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교회가 신앙 고백을 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또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 고백을 행하여야 하며 또한 신앙 고백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이는 신앙 고백을 듣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교회가 신앙 고백의 내용을 이해한 가운데 마음으로부터 고백할 때 신앙 고백의 의도대로 성도들은 주를 향하여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신앙 고백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신앙을 참되게 고백할 때, 우리가 언급한 신앙 고백의 두가지 목표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교회 내부의 하나됨을 보호하게 되고, 외부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신앙 고백은 결코 “교회 공동체의 동의”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상호간의 계약과 같은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신앙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핵심이다.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면서 경외함과 헌신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고백은 교회의 하나됨을 보존하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 신앙 고백이 없이 교회가 공동체를 결속 시키기 위해 여러 수단들을 동원하고 노력하더라도 실제로 교회의 하나됨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물론 교회는 여전히 신앙 고백의 내용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고 또한 비슷한 종교적 감정과 영적 체험을 나눌 수 있다. 심지어 신앙 고백이 다르더라도 공통적인 종교적 감정을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는 참된 신앙 고백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또한 공동체 내의 신앙 고백의 차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옳바르게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결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참된 예배는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함으로 가능하여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헌신하는 자세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이 찬양의 행위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교회의 참된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교회가 기도하는 자세로 신앙 고백을 붙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외부 세상에 전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여진다. 만일 교회가 제멋대로 신앙 고백을 조정하고 제한하고 변경한다면 교회는 어느새 본래의 믿음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세상의 조직체가 된다. 이때 교회는 세상을 향해 전해야 할 메시지를 잃게 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 때에 이 땅에서 특별하고 유일한 기관으로 존재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며 교회를 주관하고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신앙 고백에 대한 교회의 관점과 자세가 지금까지 말한 것과 다르다면 그러한 교회의 고백은 믿지 않는 세상이 들을 때 알맹이 없는 슬로건으로 밖에 들릴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증거가 없을 때, 교회는 세상 방법을 사용하면서 세상 원칙을 외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과 원칙을 사용하는 교회는 세상에 물든 타락한 교회로서 결국 세상의 조직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배로서의 신앙 고백은 교회에 위로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는 종종 교리 문답이 우리의 삶과 죽음 가운데 과연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교리 문답은 교회의 신앙 고백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 자들에게 위로보다는 도리어 불편함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자가 신앙 고백을 통한 경배와 기도 외에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기도하기를 “오 주여,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깨닫게 하소서. 그것은 주를 부르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참된 도움과 위로를 위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구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영적으로 교만하고 사악한 인간들은 교리 문답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신앙 고백을 강탈하여 제거한 후에 인간 스스로 위로를 얻으려고 추구하여 왔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서의 교리 문답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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