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에 나타난 예배 찬양 연구
Ⅰ. 본론
예배에서 드려지는 음악의 요소와 함께 드려지는 찬양의 본질은 음악이 아니다.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예배에서 찬양은 특별은총의 영역을 포함할 때 진정한 찬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 때에 드려지는 찬양이 어떠해야 함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에베소서 1장 3~14절에 나타난 찬양할 수 있는 자의 자격과 찬양의 대상
찬양에는 반드시 찬양을 받는 대상이 있어야 하며, 찬양을 받는 대상을 향해 찬양을 드리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찬양을 받으시는 대상, 즉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찬양의 대상은 분명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체로 찬양의 대상이 됨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 즉 그분의 사역도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상은 온 피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성경적으로 가장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는 존재는 피조물 중의 으뜸인 인간이며, 인간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자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찬송하리로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데, 이 고백은 구원받은 감격을 깊이 누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하면서 첫 부분을 하나님의 선하심, 진실하심, 아름다우심 등에 대한 영광의 송영(doxology)으로 시작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면서 예술적인 배열을 통해 자기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모든 사역에 대한 진실한 갈망을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쏟아 놓았다.
이 단락에 등장하는 바울의 축복은 유대 문학 형태와 유사하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고 말문을 연 후 무엇을 찬송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3절 상반절은 “베라카”(berakah) 양식을 취하고 있고, 3절 하반절은 찬송의 주제적 진술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을 일반적인 용어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베소서는 무엇을 찬양하고 있을까?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우주적 교회의 영광, 성도들의 구원과 특권을 다루는 숭엄한 서신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예배 찬양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성도의 구원을 신령한 복으로 이야기하고 이 신령한 하나님의 복들을 찬양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찬양을 드리는 사람의 자격, 찬송의 대상 등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이 어떻게 펼쳐지고 완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도 바울은 창세 전의 하나님의 예정을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우주 전체에 대한 계획과 경영에 연관 되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경의 보증되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귀, 교회가 우주적 ‘주’를 받으므로 그의 충만이 된 것도 다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즉, 사도 바울은 구원의 완성과 만물의 통일이 하나님의 주도적 행동으로 전개되는 것임을 에베소서
에서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진술하고 찬송하기 위해 에베소서를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1장 1절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에베소서의 독자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들을 성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명칭을 이스라엘과 연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출 19:5-6, 레 19:1-2, 신 6:14:2)과 메시아적 구원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복을 기억하게 함으로 성도들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하고자 하였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떠한 기교나 아름다운 것들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양곡들을 불러도 그것은 음악일 뿐이다. 예를 들어 비그리스도인 음악가가 헨델의 메시아,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한다면 그것은 연주곡일 뿐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 음악가가 위의 곡들을 구원받은 감격으로 연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될 수 있다.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부르는 찬송가도 찬양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음악으로의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공로를 믿는 믿음과 그 구원의 감격을 깊이 누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제 바울은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에베소서를 시작한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찬송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신령한 복’이다.
2)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신 목적에 대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6절),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14절)라고 세 번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본 단락을 기록한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단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3~14절은 하나님(3절)과 함께 그리스도(7절)와 성령(13-14절)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본 단락에 등장하기 때문에 단락 전체의 성격을 삼위일체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3-6절). 그리스도가 하신 일(7-12절), 성령이 하신 일(13-14절)을 언급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단락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실을 통해 지지를 받을 수 있다. (6, 12, 14절) 그러나 본 단락은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단락 전체에서 성부 하나님이 거의 모든 문장의 주어로 등장하며,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하신 일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본 단락에 드러난 문맥적 흐름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며,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며,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일에 동참할 뿐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구원 사역을 계획하며 시행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 중심적(theo centric)인 본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단락은 하나님 중심인 동시에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함께 등장하며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난다. 본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소유가 되며, 성령께서 그 복을 우리에게 적용하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 단락은 하나님 중심적이면서 삼위일체적(trinitarian)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찬양의 대상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찬양 속에는 언제나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3)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찬송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서두에서 분명히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인간에게 적용됨에 있어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구원의 행동인데, 이 신적인 복의 충만함이 ‘신령한’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이 ‘신령한’의 의미는 성령의 임재와 사역의 결과로서 에베소서 5장 19절에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절 이하는 3절에 사용된 “베라카” 양식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3절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하여 4절 이하에서 상세하고 정교하게 설명해 내려가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3~14절을 기록하면서 자기 문장력을 최대한 동원하였다. 한글번역성경은 본 단락을 12절에 걸쳐 4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본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긴 문장으로 무려 202개의 헬라어로 이루어져 있다. 바울이 그렇게 단숨에 문장을 써 내려간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사실에 대한 최고의 감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찬양하면서 그 대상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얼마나 감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의 찬송의 대상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a. 성부 하나님의 선택 (4절)
4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첫 내용에 관하여 “선택하셨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결과로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개념은 구약성경에서도 익숙한 개념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운명 중에서 우여곡절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서 열방들이 복을 받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선택이 자기 마음대로 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방이 복을 받도록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그 선택은 또한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이 선택은 사람의 신분이나 행위와 관계없는 하나님의 선택은 복 중의 복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택은 단회적이며 법정적이기에 더욱 복스러우며, 하나님은 선택하면 다시 버리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깊고 오묘한 합의로 이루어진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선택에 그리스도가 동역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내다보며, 그 십자가 구속을 믿을 이들을 선택하셨다. 이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한 성도의 선택은 대단히 고귀한 것이다. 또한, 선택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선택이다. 따라서 영원에서 성취된 선택이 시간에서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침범할 수 없는 영원에서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은 흔들리거나 불확실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선택하신 목적은 “성결과 무흠”이다. 이것은 우리의 역 상황을 전제로 한다. 구원 이전에 우리는 불결하고 부정한 존재였다. 즉, 구원받기 전의 인간은 타락과 비참의 상태였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 시대 교회의 문제점은 이런 인간의 타락과 비참을 강조하지 않는 것에 있다. 현대교회는 마음의 치료와 육체의 치료에는 관심이 많지만, 죄의 치료에는 관심이 적다. 지금 죄에 대한 준엄한 지적과 인간의 비참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필요하다. 그런 뒤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타락과 비참을 치료해야 한다. 인간이 비참한 것은 하나님과의 무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로는 순결과 무흠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러한 인간 비참을 미리 극복한 것이다. 인간의 비참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 구원이란 것은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extra nos)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선택의 목적은 매우 포괄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들, 즉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함과 자녀됨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찬양을 드럼에 있어서 자기 의가 드러나거나 자신이 어떤 상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찬양 속에는 하나님께서 타락과 비참 가운데 빠진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셨음이 나타나야 하며, 창세 전에 이루어진 영원한 선택, 확고한 선택에 들어와 있는 성도의 감격이 드러나야 한다.
b. 성부 하나님의 예정 (5-6절)
사도 바울은 5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둘째 요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입양하려고 예정하신 것을 언급한다. 한글개역개정 성경에서 “예정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동사 “프로오리조”(proorizw)는 “미리 결정하다”라는 뜻이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한 것이며, 4절에 나온 하나님 선택의 개념을 5, 6절에 걸쳐 발전시킨 것이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당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인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으시려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신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보다 더 큰 사랑,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신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외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 3: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가 우리의 찬양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c. 성자 예수님의 구속과 죄 사함(7-12절)
구속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출됨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성도들의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도 공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5장 8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이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죄 사함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은 갈라디아서 1장 13~16절에도 잘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만큼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했으며 유대교에 열심이었는지를 갈라디아서 1장 13~14절에서 설명한 다음,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택하심에 의한 은혜임을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에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할 수 없는 이 은혜를 아무런 대가 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와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자기 아들에게 전가하셨으며,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 그렇게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죽음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이다.
위의 내용에 근거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찬양에 이런 죄 사함과 관련된 하나님의 사역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찬양은 진정한 찬양으로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죄를 사하는 구속의 은혜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4장 7~8절에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을 노래한다.
이렇게 찬양에는 성자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한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영광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d. 성령 하나님의 인(印)치심 (13절)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이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은 성령으로 인 침을 받는 체험으로 확증되었다고 말한다. 고대 사회에서 인(印)을 치는 것은 소유를 확증하는 행위이며, 또한 자신의 소유를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행위였다. 당시 사회에서 불에 달군 쇠도장을 가축이나 노예에 찍어 그 가축이나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 본문에서도 인을 치는 것은 일차적으로 소유를 표명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이 성령으로 인 침을 받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특정한 복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에베소서 1장 3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찬송에 나오는 모든 복이 성령에서 기인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이 복들이 ‘신령한 복’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14절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치신 목적을 밝힌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케 하기 위함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문을 기록한 것이다. 이 찬양문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문에서 바울은 예전(禮典)적인 언어로 하나님과 그가 이루신 영광스러운 구원을 찬송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찬송은 찬양문의 중요한 대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라’라는 구절들을 통해 점차 고조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바울은 이방인 독자들의 구원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구원받은 목적이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 있음을 상기시킴으로 이 놀라운 헬라어 찬양문장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감사와 찬양의 자리로 끌어내려 하는 것이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함축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이다. 그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에베소서 1장 3~14절에 분명
히 나타나는 구속 사역의 내용이 빠져 있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으로 장식된 찬양곡이라도 그것은 찬양이 될 수 없다.
2. 예배와 찬미
예배와 음악으로 된 찬양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연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가? 혹은 상대적인가? 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한다. 예배 속에는 분명 본질적인 찬양의 요소가 들어가야 하지만, 음악적 요소와 결합한 찬양이 없다고 해서 예배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내에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음악의 요소를 가진 찬양을 제외한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본 단락에서는 예배와 찬양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예배의 주체
예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경배하며, 그분을 섬기는 봉사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섬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일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즉, 예배의 근본적인 출발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에게 놓여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예배와 예전은 먼저 인간 편의 노력에 의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계속적인 선포와 작용으로써 인간을 섬겨 주시는 하나님의 봉사로 인식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의 중심에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목의 복음이 선포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섬기시며, 예배에 참여한 회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따라서 예배의 본질과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예배의 주체이시면서 대상이시고, 섬기시면서 동시에 경배의 대상으로부터 섬김과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2) 구원받은 백성의 특권인 찬양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라고 말한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신령한 복들을 스스로는 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 죄인을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해야 한다. 이런 찬양의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절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하나님을 향한 찬양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구원 사건을 체험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찬송가를 부르고, 찬양으로 가득한 글을 낭독하여도 그것은 음악 활동 혹은 예술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찬양은 그리스도인의 특권 중의 특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찬양을 드릴 때는 특권에 합당한 의무도 있다. 그것은 죄인이었던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자기 모든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성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성도들의 구원, 성자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이루어진 성도들의 구원,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이루어진 성도들의 구원은 하나님 영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의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없이 찬양하는 것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실제 찬양대나 찬양단의 단원들의 삶으로 인해 실족한 성도 중에 그들이 예배 시간에 찬양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입술로 드리는 찬양의 내용과 삶의 내용의 괴리 가운데 시험에 빠져 찬양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예배 찬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붙임으로 신령한 복의 범위를 한정시켰다. 이것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한 신령한 복은 햇빛, 공기 등과 같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따라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그런 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3장 1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복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는 신령한 복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구원받은 백성으로의 특권인 찬양을 드리면서 자기 삶과 행동에 책임져야 한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영광의 표현이요, 하나님 지혜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3) 음악적 요소가 결여된 예배는 예배가 아닌가?
음악으로 작곡된 찬양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닌가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가장 높은 것은 찬송이다. 그러나 이런 찬양은 음악적인 요소가 없어도 찬양이 된다. 아무런 음악적인 요소가 없어도 우리의 몸과 전인격을 가지고 드린 하나님을 높이는 모든 것은 찬양이 된다. 즉, 찬양이란 단순히 사람의 몸을 통한 발성이나 악기의 연주를 통한 음악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질서를 찾지 않는다면 어떤 찬양의 목소리나 악기의 연주도 찬양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에서 출발하며, 하나님을 위한 넓은 실천에서 진행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찬양은 음악적인 요소와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찬양은
음악적인 요소가 결여되어도 찬양의 본질인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에 문제가 없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찬양은 음악이 아닌 거듭난 하나님 백성의 중심과 삶이다.
4) 예배 속에서 음악의 역할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배를 위한 기능 음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예배음악은 철저히 예배를 위한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리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음악이 예배의 관심에서 떠나 너무 음악적인 부분에 치우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예배음악에 있어서 예술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가짐을 말하고자 함이다. 물론, 예배음악을 통해 예배에 임하는 예배자는 가장 예술성 있는 아름다운 음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음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며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최고의 음악이라도 예배자의 관심이 오직 음악의 아름다움이나 연주 기교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음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술적으로 기교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음악일지라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영으로 드리는 찬양을 받으신다. 즉, 최고의 예술적인 음악이든지, 혹은 예술성이 결여된 음악이든지 예배자의 초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음악을 최고 연주가의 음악보다 예술성과 기교가 부족해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으로의 음악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신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는 요소 중에서 찬양의 내용은 주요소이지만, 찬양의 내용을 담는 음악은 보조적인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음악적 요소가 없어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사역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찬양이다.
에베소서 5장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며,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18~20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명령형 분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을 받을 때 있어야 할 내용 혹은 원인들을 이 부분에서 기록했다고 할 수 있고, 혹은 성령 충만으로 인해 나타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본 단락에서는 성령 충만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중심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찬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는 초대교회 당시의 노래에 대한 세 가지 표현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세 가지가 ‘시(psalm)와 찬송 (hymn)과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이다. 분명한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모두 18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에베소서 5장 18~19절을 통해 찬양의 주관성이 아닌 객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찬양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는 객관성이 요구된다. 성경 속에서 찬양의 객관성에 대한 부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에베소서 5장 18~19절은 찬양에 대한 객관성을 나타내 주는 좋은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 시
개역개정성경에서 ‘시’라고 번역된 “프살모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배 중에 인용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신약성경은 누가복음 20장 42절, 누가복음 24장 44절, 사도행전 1장 20절, 사도행전 13장 33절이다. 여기서는 구약성경의 시편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시편’은 구약 시편 저자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진 기독교 찬송을 가리킨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찬송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어는 성경 가운데 한 권의 책인 시편에 수록된 ”경건한 시“라는 특별한 형태의 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시편)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악기의 줄을 뜯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이 단어가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경건한 노래”를 의미한다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19절에서 사용한 ‘시’라는 단어 역시 성경 가운데 한 권인 ‘시편’ 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단어를 구약의 시편이나 찬송시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종류의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시편을 작사하고 작곡하였을 것이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시편의 형태로 경건한 시를 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2) 찬송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찬송’의 본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찬송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리는 노래, 하나님에 관한 노래, 거룩하고도 시적인 곡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찬송’에 대한 정의인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어야만 한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통용되는 찬송이라는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찬송’이라고 번역된 “휨노스”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3장 16절에만 나타나며, 이 단어의 동족 동사는 마가복음 14장 26절, 마태복음 26장 30절 사도행전 16장 25절, 히브리서 2장 12절 등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그 구원을 이루신 유월절 찬미와 관련하여 사용하였으며, 아마도 명사 ‘찬송’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관한 노래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형태상으로 WBC주석에서는 “찬송은 시(시편)보다 긴 악곡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일부는 실제로 신약성경에 인용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서 5장 19절에서 말하는 ‘찬송’이 음악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반드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하며,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이 반드시 나타나는 음악적 요소를 지닌 악곡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찬송에 관하여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도 위와 같은 찬송에 대한 견해를 펼쳤으며, 에베소서 5장 18~19절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3) 신령한 노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노래’는 단순한 성스러운 노래(성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령한 노래’로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원어 (프뉴마티카이스 오다이스, spiritual song)로 직역하면 “영혼의 노래”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신령한’의 바른 번역은 “영”(spirit)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을 가리킨다. 또한, ‘노래’로 번역된 헬라어는 요한계시록에서 승리를 거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 5장 9절, 14장 3절, 15장 3절에서 하늘 예배의 노래에 대해 사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령한 노래’는 성가란 말이 아니라 심령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순종과 헌신으로 이르는 영성과 직결된 노래이다. 인간의 지·정·의를 뛰어넘어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고자 하나님 앞에서 처절한 굴복과 신뢰 속에 감사로 응답하는 것이 “영혼의 노래”, 즉 ‘신령한 노래’이다. 따라서 ‘신령한 노래’는 단순히 차분하고 경건함을 연상케 하는 종교적 분위기 정도로 설명할 수 없다. ‘신령한 노래’는 음악 양식에 속한 볼륨의 고저, 리듬의 빠르기, 수려한 멜로디 등의 특징으로부터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표현 속에서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신령한 소리”이다.
따라서 ‘신령한 노래’는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의 형태가 아니라 ‘신령한 노래’로 찬양을 드리는 사람의 영혼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신령한 노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영혼이며, 그 구원의 감격을 영혼 깊은 곳에서 체험한 사람들이 부르는 절제가 있는 자유의 노래일 것이다.
4) 서로 화답하여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면서 서로 화답함과 마음으로 찬양해야 함을 19절에서 말하고 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할 것과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찬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과 서로에 대한 것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주님께 올려드려지는 찬송과 주님을 찬양하지만 서로 함께 불러야 할 찬양, 서로가 함께 부르는 영적인 노래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입술로만의 찬양이 아니라 ‘너희 마음으로’ 드려지는 찬양이어야 한다.
19절 하반절인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사도 바울은 전반부에서 성도들이 교창(交唱)하면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말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성도들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면서 주고받는 형식으로 주님께 대한 찬양을 드렸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일들을 서로 상기시킨다. 이렇게 하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교훈하고 세워 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찬양의 수평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은 찬송의 수직적이며 개인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은 마음을 다하고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한다. 이처럼 찬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성도들을 위한 교훈이 함께 녹아 있다. 이처럼 찬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성도들을 위한 교훈이라는 이중적인 기능과 목적이 있다.
이러한 찬양의 이중적인 기능과 목적은 찬양에 있어서 객관성을 요구하는 요소일 것이다. 찬양의 수평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나 외의 다른 성도들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수직적인 하나님의 관계에서 어떤 감동과 자신의 성향으로 인해 찬양의 방법과 정도를 자기 기준에 맞추어 표현했을 때 다른 성도에게 거북함이나 힘겨움을 느끼게 한다면 개인적인 찬양을 삼가야 한다. 찬양은 서로 화답하는 것이지 나 혼자만의 감정 표출이 아니기 때문이다.
5) 에베소서 5장 18~19절에 근거한 예배 찬양
에베소서 5장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각각 다른 종류의 찬송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첫째, 반드시 시편 찬양만을 드려야 할 필요는 없지만, 찬양곡의 내용, 즉 찬양의 가사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찬양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또한, 그 내용을 표현하면서 경박한 표현이나 예배에 적절하지 못한 문장 혹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경건한 시로 된 찬송을 예배 찬양에 사용해야 한다.
둘째, 찬양곡에 사용된 음악 장르와 형식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인간 영혼의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찬양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죄 사함의 은혜로 거듭났는지 확인해야 하며, 찬양을 드리는 동안 그 은혜에 깊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한 찬양과 성령 충만한 삶은 병행되어야 한다. 성령 충만의 결과 나타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도 찬양을 드리는 성도의 삶이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그 찬양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진정한 성령 충만한 찬양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성령께서 감화를 주시는 것에 의지하여 모든 삶의 영역에 서로 화답하고 덕을 세우고, 공동예배에서 성령의 감화로 성도들이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을 찬양드릴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이처럼 에베소서 5장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찬양을 드리는 방법과 찬양의 내용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4. 개혁주의적 예배 음악이 지향해야 할 방향
본 단락에서는 예배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에 대한 문제보다도 예배 찬양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어떠해야 함과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내면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예배 찬양이 추구해야 할 음악적인 성격을 음악 자체에 대한 고찰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한 예배 찬양의 음악적 지향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예배 음악의 성격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예배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계시와 은혜에 대해 인간이 응답할 때 그 표현을 도와주는 도구의 역할을 감당한다. 이때 사용되는 음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음악에 사용되는 선율, 리듬, 음악의 형식을 고려해 볼 때 음악의 모든 요소는 분명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반은총의 영역 속에 포함되는 되는 것이다. 음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배에서 음악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도구 역할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조명을 받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예배에서 찬양으로 연주되는 음악은 예배의 순서와 내용에 따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비춰주시는 조명을 받도록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그렇게 인간은 예배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원활하게 이룰 수 있다. 예배 가운데 행하여지는 직접적인 성경 봉독, 설교 찬양 등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성경의 조명이 있을 수 있지만, 설교 중에 간혹 사용되는 음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깨닫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렇게 예배 찬양(음악)의 성격은 음악 자체에 있어서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진정한 찬양이 되는 것은 음악 때문이 아니라, 음악을 만드신 하나님과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일반은총의 영역이 아닌 특별은총의 영역을 찬양하면서 구원받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의 결과로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고 감격함으로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한다. 예배 찬양의 성격은 하강적인 은혜를 바탕으로 하는 상승적 찬양이 되어야 한다.
2) 예배에 있어서 음악의 위치
예배를 드릴 때 사용되는 음악은 진리가 아니다. 즉, 복음은 진리이지만, 음악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배 음악은 찬양에 도움을 주려는 음악 자체에 치중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예배 찬양에 사용된 음악은 가사, 즉 복음의 진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이다. 예배 때 드려지는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을 이야기할 때 종종 복음과 음악의 차이가 없는 듯한 경우들을 만나게 된다. 복음과 음악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과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독교에서 진리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의 본질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을 나타내는 절대성이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14: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진리 되심을 선포한 것이기에 어떠한 다른 의견이나 예외적인 사항이 따라올 수 없다. 둘째로는 진리는 단순히 불변함의 차원만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6~17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진리인 복음은 결단코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절대성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다. 그런데 예배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 찬양을 대하다 보면 음악 자체가 진리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음악은 복음처럼 절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이미 엄청난 양의 음악사를 적을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되어서 그에 따라 변화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개개의 민족 혹은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문화의 소리가 음악이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문화 속에서 거듭나고 발전되어 갈 뿐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든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똑같은 진리에 비교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약 음악 소리에 그 어떤 절대적 기준과 권위가 부여된다면 음악은 진리와 다를 바 없는 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역사인 음악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음악의 한 장르, 특히 클래식 음악만을 예배 찬양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클래식 음악이 일반 은총적 영역인 음악 예술의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하여도 그 음악 자체가 예배 음악으로서 절대적인 가치나 기준을 가질 수 없다. 만약, 클래식 음악이 그런 절대성을 가진다면 진리와 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 세대를 위해 예배 찬양의 형태를 파격적이고 무분별하게 변화시키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다. 문화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음악의 형태를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 같이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교회의 예배 찬양에 사용되고 있는 음악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검증된 것들이다. 최신 찬양이라는 명목으로 검증 없이 또는 짧은 검증을 거친 음악들을 예배 찬양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 예배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에 대한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음악 자체에 어떠한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잘못된 신뢰가 발전하여 음악을 통한 영적, 육체적 치유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문헌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Thales)가 음악으로 흑사병을 치료받았으며, 피타고라스 (Pythagoras)는 정신적인 치료를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또한 6세기 음악의 권위자였던 보에티우스(Boethius)는 그의 음악 원리(De Institutione Musica) 중에서 인성의 음악(Musica Humana)을 통해 음악이 육체와 영혼 및 그의 각 부분을 통제한다고 봄으로서 보다 확고한 이론적인 설명의 체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철학, 즉 음악을 통해 육신의 질병과 정신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하여 영적인 영역이 음악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은 그릇된 사고와 믿음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널드 휴스태드(Donald P. Hustad)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는 “정서적 언어인 음악을 통해서 인간 영혼 치유에 도움을 준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음악은 어디까지나 도움의 차원이지 직접적인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음악이 영혼에 도움을 주는 특성이 있더라도 영혼 자체의 변화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 감정의 움직임을 통하여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음악의 과정과 영혼의 직접적이며 진정한 변화를 이루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음악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도움은 음악 스스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말씀, 그 말씀에 기초하여 새롭게 지어진 것 혹은 말씀의 경험에 기초한 고백들로 이뤄진 가사들이 중심이 된다. 실제로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와 함께한 가사에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 4장 12절과 시편 51편 10절에 잘 나타난다. 이 말씀들은 완전한 영적 치유와 변화, 마음과 영혼의 소생은 참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명백하게 해주는 것이다. 분명 음악은 인간의 정서, 심리, 물질적인 영역에서 직접적인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예배 찬양에 있어서 음악은 절대적인 위치나 진리의 위치에 있을 수 없다. 예배 찬양에 있어서 음악은 도움의 역할을 하며,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3) 예배에서 찬양을 드리는 사람의 자세
찬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길성남 교수가 자신의 저서 「에베소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통해 에베소서를 읽는 독자들의 자세를 말한 부분과 연관이 있다. 그는 에베소서를 읽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목적이나 취향에 따라 읽지 말고 저자의 기록목적에 맞게 본 서신서를 읽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구원의 영광에 참여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들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본 서신을 기록한 바울의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중략)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우리도 과거에는 허물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존재들이었다.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던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얻게 하시고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심지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존재가 되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는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영광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구원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렇다 에베소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면 우리 찬양의 마음가짐과 자세도 같아야 한다.
나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Deo vivere)이 찬양의 능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없는 단순한 음악적 기교를 이용한 찬양의 흥분이나 감정 이입은 이방적인 요소이다. 실제로 이런 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7~19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전에 속하였던 이방인의 삶을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방인들의 제사 의식에서도 분명히 많은 정교한 악기들이 사용되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음악적인 성숙이나 발전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지식의 습득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찬양하는 사람은 깊은 구원 받은 감격과 구원받은 백성에게 합당한 삶을 살아감 없이 찬양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얻은 사람만이 찬양할 수 있다. 찬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신령한 복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만이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원의 기쁨을 표현하면서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이 구원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 구속 성취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는 회복된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 이런 놀라운 은혜에 대한 기쁨을 표현할 때 우리는 경박함이 느껴져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은 가벼움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찬양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기쁨을 찬양하면서 감정에 의한 단순한 자극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찬양하는 사람은 음악이 아닌 찬양의 가사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감정을 절제하는 한 방법이며, 찬양을 부르는 동안 정확한 이성적 사고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찬양을 드리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절제이다. 이 절제는 인간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절제이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19절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통한 찬양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특히,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에베소서 5장 18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존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교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5장 19절 이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말씀하는 것이다. 찬양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해야 한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그의 모든 것, 즉 전인격을 성령의 지도하에 두고 순종하는 삶을 나타낸다. 또한, 이렇게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충만함에는 과다함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방탕한 결과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영광스러운 연합만이 왕성하게 진흥되게 된다. 이렇게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찬양을 드리는 성도는 예배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과 그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드릴 때 절제가 반드시 요구된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복음과 성령 충만은 사람에게 뜨거움을 주기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의 심령은 영혼 깊은 곳에서 거룩한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가라앉은 마음과 평정심으로 찬양을 드리게 된다면 우리의 예배 찬양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찬양을 드린다면 소위 음악적으로 경박한 리듬이나 템포의 찬양을 택하지 않을 것이며, 찬양을 드릴 때의 태도 역시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제하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4) 아름다움을 필수로 하는 예배 음악
예배에 사용하는 음악의 형태에 있어서 어떤 음악을 사용하고 어떤 음악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지 지루한 소모전을 하기 전에 가장 궁극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예배 찬양에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는 음악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가사)에 무엇 때문에 음악의 요소를 추가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일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아름답기 때문에 그의 피조 세계가 아름다운 것처럼 일반은총의 영역인 음악과 특별은총의 영역 가운데 그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드릴 수 있는 예배가 함께 만나는 예배의 자리에서 드려지는 예배 찬양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즉, 예배 찬양은 반드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그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은 할 수 있는 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찬양의 아름다움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5장 19절의 ‘찬송하며’를 킹 제임스 번역 성경에서 “making melody”(아름다운 곡조를 만들다)라고 번역한 것에 주안점을 두어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이 어떠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헬라어에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다”라는 표현은 “수금을 뜯는다” 또는 “악기를 쳐서 선율을 만들어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다”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물론이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이 살았던 당시에 “곡조”라는 단어에는 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곡조”(melody)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있다. “감미로운 음악, 아름답게 배열된 음악적인 소리, 음악적인 소리가 만들 내는 아름다움, 아름다운 선율과 가락” 따라서 우리는 “곡조”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19에서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9절에서 “곡조”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음악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하기에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음악이 항상 지닌 특성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옥스퍼드 사전을 바탕으로 “곡조”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에베소서 5장 19절의 ‘찬송하며’를 성경적 찬양의 근거로 설명한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의 절제 속에서 표현되는 아름다움은 찬양에 사용되는 “곡조”의 필수 요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아름다운 곡조가 있고, 아름다운 형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내는 모든 예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아름다운 곡조를 피하고자 흔히 사람들이 예상하는 음을 넣지 않거나 자기 음악이 일정한 형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에 있도록 하기 위해 고의로 엉뚱한 음을 넣는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의 음악에 용납될 수 없다.
5)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의 드려지는 찬미
성도는 예배를 통해 이루어지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런 예배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도들은 받은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반응”한다. 그 반응의 한 종류가 찬미와 찬양이다. 찬양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를 통해 나누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올려질 때 그 찬양은 예배 속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성도를 강건하게 한다.
또한 성도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위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은혜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은 은혜를 찬양으로 반응해야 한다. 성도는 성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눈으로 확인하며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 그 생명의 풍성함을 또한 찬양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처럼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솟아 나와야만 한다. 에베소서 5장 19절의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이 거할 때 우리 속에서 진정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이 흘러나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찬미와 찬양은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드려지는 인간의 반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찬미와 찬양은 성례의 절차와 말씀의 바른 가르치심이 있듯이 적합한 규범과 방법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찬양과 찬미를 드려야 한다.
6) 신학적 내용이 포함된 찬양
본 논문의 전반부에서는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말씀하는 신령한 복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찬양, 특히 예배 찬양에 필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위로부터 임하는 신령한 복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이것은 신학적인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면에서 기도와 찬양은 같다. 내용이 없는 기도를 상상할 수 없듯이 내용이 없는 찬양을 찬양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게 되듯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고 싶어지고, 내 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더 구체적으로 찬양하고 싶어진다. 찬양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채워져서 드려질 때 찬양은 우리에게 바른 가르침의 도구가 된다. 우리는 즐겨 부르는 찬양 가사들을 통해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기에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학적 내용을 담아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찬양이라는 명목으로 부르는 곡들을 살펴보면 그 가사와 내용에 신학적인 내용보다는 개인의 감정이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고전적인 찬송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것이 신학, 설교, 가르침, 예배의 초점이기 때문이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찬송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 활동을 대하는 개인의 감정에 집중한다. 하지만 오늘날 찬양과 경배의 찬송은 내 감정을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 활동에 대한 진리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내용이 거의 빠져 있을 때가 많고, 내 감정에만 치중함으로써 더욱더 주관적으로 치우친다.
찬양의 내용은 신학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찬양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찬양이 아니다. 신학적인 내용이 없이 인간의 감정에 치중한 곡들은 찬양이라고 할 수 없고, 노래일 뿐이다.
예배에서 드려지는 음악의 요소를 갖춘 찬양에서 음악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음악도 하나님의 일반은총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기에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의 합당한 삶과 구원받은 감격을 깊이 누리는 가운데 감정이나 개인의 고백이 아닌 명백한 신학적 내용을 포함한 찬양을 드려야 진정한 개혁주의적 찬양이 지향하는 바가 될 것이다.
Ⅱ. 결론
예배 찬양에 대한 논쟁은 과거나 현재에 계속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쟁은 찬양에 사용하는 음악의 형식에 대한 논쟁이 크다. 찬양에 사용된 음악의 형식은 찬양의 가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예배 찬양의 내용은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우주적 비전, 교회의 영광, 성도들의 구원과 특권을 나타내야만 한다. 즉, 성도들은 위로부터 임하는 신령한 복을 찬양해야 한다.
찬양은 구원받은 백성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다. 찬양은 구원의 감격이 필수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다면 우리의 찬양이 어떤 형식을 띠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나올 것이다. 물론, 찬양은 교회론과 마찬가지로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할 수 없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변화가 가능하다. 음악에 대해 예찬론을 가졌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악기들은 단지 말 없는 음악만을 남겨줌에 반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수많은 찬송 시와 시편은 음악과 함께 결합함으로써 듣는 자의 영혼을 감동시켜 준다.”라고 하여 영혼의 참된 감동은 음악이 담긴 하나님 말씀으로 된 가사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는 노래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래의 주체(대상)에 의해 영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도들 찬양의 중심에는 언제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
또한 예배 찬양을 선택하면서 가사와 음악의 검증은 필수적이다. 가사는 바른 신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음악은 그 가사에 합당한 음악이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예배 찬양을 작곡하거나, 연주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절제함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영광스럽고, 성도를 기쁨과 환희로 가슴 벅차게 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절제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나 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곳에는 자극과 생명력과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절제와 자제도 함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 구원의 기쁨에 대한 표현도 좋지만, 그 표현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음악은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 감정의 표현도 자기 통제가 가능한 범위에서 다른 성도들에게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음악의 특성상 일반은총의 영역인 문화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예배 찬양에 사용되는 음악은 구별되어야 한다. 음식을 담는 그릇의 모양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이렇듯이 바른 신학적인 내용과 성경적 내용으로 이루어진 찬양 가사를 담는 음악도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검증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배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곳이며, 철저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현장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주권적인 역사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그렇게 성도들은 예배의 자리에 임해야 한다. 예배에서 드리는 찬양은 이런 주권적인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인간의 표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감동이라는 핑계로 예배 찬양을 감정적 흥분과 기교로 드리는 것은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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