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유대성서와 구약성서의 비교연구

하나님아들 2023. 12. 12. 23:17

유대성서와 구약성서의 비교연구

 

 

 

1. 머리말

 

구약성서가 히브리어로 쓰여지고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쓰여진 것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i] 그러나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가 내용은 히브리 성서를 따르면서도 그 순서는 칠십인 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순서야 앞뒤가 바뀐들 그 내용만 같다면 무슨 상관이랴. 그럴까? “신사 숙녀 여러분”과 “저 연놈들”에서 보여주는 남녀의 뉘앙스는 같지 않다. 전자는 좋은 의미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지만 후자는 나쁜 의미로 여자와 남자를 함께 일컫는 표현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구약과 신약의 순서를 굳이 바꾸어 가며 “신구약 성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신약(만?)을 강조한 우리 선조 들의 성서 관(觀)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살피고, 아울러 신약성서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현존하는 여러 모습의 구약 성서들을 비교하려고 한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 성서의 구성과 이해, 칠십인 역의 구성과 이해, 구약과 신약이라는 주제 하에 구약성서 입문의 첫 글을 쓰고자 한다.

 

2. 구약성서들의 형태

유대 성서와 가지 구약성서 비교

유대성경 칠십인역 개신교성경 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
타나크   구약 구약 구약 구약
토라 오경 오경 오경 오경 오경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유대성경 칠십인역 개신교성경 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
타나크   구약 구약 구약 구약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무엘 룻기 룻기 룻기 룻기 룻기
열왕기 1-4 왕국 사무엘 상하 사무엘 상하 1-4 왕국 1-4 왕국
이사야 역대기 상하 열왕기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역대기 상하
예레미야 1 에스드라(외경) 역대기 상하 역대기 상하 1 에스드라 2-3 에스드라
에스겔 2 에스드라 에스라 에스라 에스라 1 에스드라=에스라
호세아 (에스라-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요엘 토비트   토비트 토비트 토비트
아모스 유딧   유딧 유딧 유딧
오바댜 에스더+첨가 에스더 에스더+첨가 에스더+첨가 에스더+첨가
요나 1-2(3-4)마카비   1-2 마카비 1-3 (4) 마카비 1-3 마카비
미가          
나훔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하박국 욥기 욥기 욥기 욥기 욥기
스바냐 시편 시편 시편 시편+시편 151 시편+시편 151
학개 잠언 잠언 잠언 잠언 잠언
스가랴       므낫세 기도 므낫세 기도
말라기 전도서 전도서 전도서 전도서 전도서
  아가(雅歌) 아가(雅歌) 아가(雅歌) 아가(雅歌) 아가(雅歌)
  솔로몬 지혜서   솔로몬 지혜서 솔로몬 지혜서 솔로몬 지혜서
  집회서(시라크)   집회서(시라크) 집회서(시라크) 집회서(시라크)
           
성문서 예언서 예언서 예언서 예언서 예언서
시편 호세아 이사야 이사야 이사야 이사야
욥기 아모스 예레미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잠언 미가 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룻기 요엘   바룩 바룩 바룩
아가(雅歌) 오바댜   예레미야 서신 예레미야 서신 예레미야 서신
전도서 요나 에스겔 에스겔 에스겔 에스겔
예레미야애가 나훔 다니엘 다니엘-그외(外) 다니엘-그외(外) 다니엘-그외(外)
에스더 하박국   아자랴의 노래 아자랴의 노래 아자랴의 노래
다니엘 스바냐   세아이노래 세아이노래 세아이노래
에스라 학개   수잔나 수잔나 수잔나
느헤미야 스가랴   벨과 드레곤 벨과 드레곤 벨과 드레곤
역대기 말라기 호세아 호세아 호세아 호세아
  이사야 요엘 요엘 요엘 요엘
  예레미야 아모스 아모스 아모스 아모스
  바룩 오바댜 오바댜 오바댜 오바댜
  예레미야 애가 요나 요나 요나 요나
  예레미아서신 미가 미가 미가 미가
  에스겔 나훔 나훔 나훔 나훔
  다니엘-그외(外) 하박국 하박국 하박국 하박국
  아자랴의 노래 스바냐 스바냐 스바냐 스바냐
  세아이노래 학개 학개 학개 학개
  수잔나 스가랴 스가랴 스가랴 스가랴
  벨과 드레곤        

먼저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히브리 성서(이후, MT로 약함)와 개신교 구약 성서는 같은 내용의 책들을 순서만 다르게 열거하고 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문서들이 구교 성서들에 추가되었다: 제 1-3 에스드라, 토비트, 유딧, 에스더 추가문, 솔로몬 지혜서, 집회서(시라크), 바룩, 예레미야 서신, 다니엘서 추가문 (아자랴의 노래, 세 아이의 노래, 수잔나, 벨과 드레곤), 므낫세 기도, 시편 151, 제 1-4 마카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947)을 따르는 일부 개신교에서는 이를 숨겨진 책 (Apocrypha < Latin, Libri Apocryphi < Gr. avpokru,foi이라 하며, 그들의 성경에서 제외시킨다.[ii]

칠십인 역(이후, LXX로 약함)의 배열 순서는 사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사등분 구조에 맞추어 바티칸 본(B), 알렉산드리아 본(a)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았다.[iii]

서기 4세기에 제롬(Jerome)은 LXX에 기초한 구(舊) 라틴어 성서를 대신할 목적으로 당시의 MT에 기초하여 Vulgate를 번역해 냈다. 그 결과 LXX에는 있으나 MT에는 없던 많은 추가 문서들이 라틴어 번역본에서는 제외되었었다. 그 후 서방(西方) 교회에서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거부하는 뜻에서,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해 이 모두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iv]

LXX은 므낫세 기도문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에서는 므낫세 기도문과 함께 제 3, 4 마카비를 제외시키고 있다. 므낫세 기도문과 시편 151편은 정(Orthodox)교회에서만 받아들여진다.

위의 도표가 말해 주듯 오늘날 각 기독교 교회에서 이해하는 구약성서는 히브리 성경과 다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 내에서도 구교, 신교, 또 각 교파에 따라 그 모양이 다양하다. 여기에 서로 다른 번역본을 추가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된다.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외경(外經), 위경(僞經)이란 표현 등은 이미 자신들의 성서를 정경(正經)으로 보는 보수, 비판적 성격이 있음으로, 학문적 용어로 적합치 않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사실은, 개신교의 구약 성경이 히브리 성경을 모체로 삼으면서도, 내용이나 순서에 있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v] 여기에 초점을 두고, MT와 구약성서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3. 히브리 성서의 구성과 이해

MT는 세 단계(threefold division)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토라 (Torah, hr’AT)요, 둘째는 예언서 (Prophets, ~yaiybin>)요, 셋째는 성문서 (Writings, ~ybiWtK.)이다. 히브리어의 첫 글자들($nt)을 따서 MT를 타나크 (Tanakh)라 부른다. 이러한 세 등분 구조는 서기전 2 세기경 쓰여진 문서로 추정되는 시라크 서문에도 나와 있다.

토라와 예언자들, 그리고 그것들 뒤에 나오는 다른 것(문서)들 (tou/ no,mou kai. tw/n profhtw/n kai. tw/n a;llwn tw/n katV auvtou.j hvkolouqhko,twn)

토라와 예언자들과 조상들의 다른 책들 (tou/ no,mou kai. tw/n profhtw/n kai. tw/n a;llwn patri,wn bibli,wn)

토라와 예언들과 성서의 나머지 책들 (o` no,moj kai. ai` profhtei/ai kai. ta. loipa. tw/n bibli,wn)

토라 (hr’AT)는 “Teaching, instruction”이라는 뜻이다. 명사형을 이루는 접두어 t를 뺀 hry는 “가르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이로부터 hr,Ah(부모), hr,Am(선생)와 같은 명사가 파생되었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오경이란 기본적으로 “가르침”이란 의미이며, 더 나아가 그런 성격을 띈 문서라는 말이다. 이를 법(法)이니 율법(律法)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실제 일부 개신교인들 중에는 마치 유대교가 율법(律法)만 중시하는 종교라고 지래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최소한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좁은 의미의 유대교 이해란 없었다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정경 비판(Canonical Criticism)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한 샌더스(Sanders)에 의하면, 오경에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vi]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며, 또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문제(Ontology)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 도덕적 측면의 현실적 문제(Ethics)를 다룬다고 보는 입장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신들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믿었다. 마치 고대 희랍 철학자 플라톤이 현상 속에서 불변하는 선(善) 혹은 궁극적 진리를 조명해 본 것과 유사한 논리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11:1-3 이나, 구약성서 사무엘 상 5-6장에 나타나는 법궤 이야기는 이런 이원론적 우주관을 잘 나타내 준다.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빼앗기고 다시 돌려 받는 과정에 다곤 신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블레셋 신 다곤보다 강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일련의 사건은 앞으로 지상에서 펼쳐질 블레셋 부족에 대한 (다윗 왕국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견한 신명기 사가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히브리 인들의 생각에, 인간은 신 혹은 하느님 (~yhil{a/)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즉,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앞서야 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참 자아를 발견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당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믿음에 반대하는 의견, 철학, 관(觀)은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메소포타미아 우주관, 신관을 통해 엘(lae)로 알려진 최고 우두머리 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요, 그 외의 신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는 생각이 구약을 통해 나타나는 히브리 신론(神論)이다.[vii]

고대 근동 시대에, 전쟁에서 패함은 곧 패배자들이 섬기는 신의 무력함을 상징했다. 앞에서 본 야훼 신상과 다곤의 한 판 승부가 그렇고, 유다 멸망 (587 BCE)을 보는 이들의 생각이 그랬을 것이다.[viii]

창세기 1장은 포로기 혹은 그 후에 정리된 제사장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 야훼가 바벨론 신 마르둑에 패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아울러 유대 멸망은 그들의 가치관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창세기 1장은 새 꿈과 비전을 제시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니라”(창 1:1). 하느님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창 1:14-19), 또한 자신(들)의 형상을 좇아 인간을 만드셨다(창 1:26-27).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신으로 받들어지는 형상들이다. 특히 셈족 언어인 vm,v,(해)는 고대 근동에 가장 널리 알려진 태양신으로, 열왕기 하 23:11에 따르면, 요시아 왕이 태양신 제사에 쓰인 말들(horses)을 제거했고, 에스겔 8:16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제사장들이 태양신을 숭배했다고 기록한다. 결국 창세기 1장의 신학적 주장은 유다를 멸망케 한 바벨론의 신은 피조물일 뿐 신이 아니며, 이스라엘 하느님의 패배는 더더욱 아니라는 주장이다. 생각해 보라. 용기와 희망을 잃은 포로기 유대인에게 이 말씀이 주는 신학적 메시지를! 창세기 1장에서, 6000여 년이니 하는 인류 기원을 찾고자 한다면, 방향을 크게 벗어난 해석이다. 성서가 전혀 뜻도, 생각도,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성서의 이름으로 우기는 “내가 복음”이요 어리석음의 말기 현상이다. 창세기 1:1-13 사이에 3일간의 사건이 기록되었다 하자. 어떻게 제4일째 등장하는 해와 달도 없이 밤이 되고 아침이 됨을 말 할 수 있을까.

창세기 1-11장 신화와 설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된 사상 중 하나는 신들의 세계를, 그리고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신(들)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다. 성서를 가리켜 신화나 설화라고 말하면,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 중 펄펄 뛰며 흥분할 이가 있을 텐데 다음 설명을 보자.

신화(Myth)란 일종의 시의 형태나 진리를 선포한다는 면에서 시를 능가하고, 또 일종의 사고 능력이나 진리를 끄집어내고자 한다는 면에서 단순 사고 노동이 아니다. 또, 일종의 제사적 행위나 단지 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시적 진리를 선포하고 설명한다는 면에서 제사 행위를 초월한다.[ix]

즉, 신화나 설화란 시, 잠언, 법조문, 예언, 신탁 등과 함께 고대 문학 장르에 속한다는 말이다.

창세기 12장 이후는 창세기 1-11장에 걸쳐서 소개된 신(하느님, 야훼)이 바로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아브라함을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존재, 속성을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신들은 누구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종교, 철학적 성찰의 결과라는 면에 그 신학적 의미가 있다. 12-21장에 걸쳐 하느님이 과연 이스라엘의 신이 되기에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는데, 이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모세를 통한 야훼의 소개(6:3), 또 출애굽 등 일련의 사건들은,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 실존적 질문에 대한 성서적 대답이요 가르침(토라)이다. 시내 산에서의 사건 등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블렌킨솝은 열 가지 generations (톨레돗, tAdl.AT) 형식을 빌어, 오경 내(內)의 레위기의 중요성 및 포로기 시대 배경을 밝혔는데,[x] 그 만큼 윤리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필연성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로 “예언서”라 번역된 ~yaiybin>(Prophets)은 “예언자들”이라 옮겨야 더 정확하다. (여기서는 편의상 예언서로 부르기로 한다.) 예언서에는 전기, 후기 예언서가 있다.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를 일괄 통칭하며, 그 순서는 집필자 연대순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다.[xi] 후기 예언서는 보통 “The three and the twelve”라 부르는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대(大) 선지서와 열 두 소(小) 선지서를 일컫는다. 외경 시라크(집회서) 48:23; 49:6,8,10 등에 이미 토라와 예언서, 대소(大小) 선지서가 구분돼 있다.

여호수아 1:7-8은 모세 이후 지도자로 지명된 여호수아에 대한 말씀이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에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니라 네가 형통하리라(개역 한글).

어떤 새로운 계명도, 정치적 공약도 나타나지 않고, 단지 이미 주어진 토라에 충실할 것만 강조한다. 예언서의 끝을 이루는 말라기 3:22에서도 모세를 통해 소개된 토라는 반복된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개역 한글 4:4).

“예언자들은 … 근본적으로 그들을 앞서 산 현자들과 같은 기능을 가졌으니, 곧 토라를 보호, 전수하는 일이었다”고 블렌킨솝은 본다.[xii] 열왕기하 17:13은 이를 잘 나타낸다: “야훼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전한 모든 가르침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러나 예언자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율법”을 지키기만 할 뿐은 아니었다. 아모스 5:26; 이사야 1:10-17; 예레미야 6:20 등의 말씀은 신명기 18:1-8; 레위기 1-7장; 민수기 28-29장들과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토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치는 생활 지침서라면, 예언서는 이 토라를 둘러싸고 이를 보호, 전수할 뿐 아니라, 후대에 맞게 새로운 해석을 가(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성문서(Writings, ~ybiWtK.)는 문자적으로 볼 때 “쓰여진 문서들”(Those that are written)을 말한다. 예언서와 달리 토라와의 직접적 유대 관계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권위가 예언서만큼 크지 못 했는지 모르겠다. 성서에서 “토라와 예언서”라는 표현은 종종 접할 수 있으나 (단 9:2; 2 마카비 15:9; 마 5:17; 7:12; 11:13) 토라, 예언서, 성문서를 함께 일컫는 표현은 볼 수 없다. 두 가지 면에서 설명이 가능 한 데, 하나는 예언서와 성문서 구분 없이 예언서라는 표현이 이 둘을 함께 지칭했다는 생각이며, 다른 하나는 성문서라 지칭할 문서들(body of literature)이 당시에 아직(혹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가설이다.[xiii]

성문서는 시편, 욥기, 잠언과 다섯 개의 절기 문서들(룻기, 아가(雅歌),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哀歌), 에스더),[xiv] 그리고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상하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다니엘서가 개신교의 성경과는 달리 예언서에 속하지 않고 성문서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성문서의 특징 중 하나는 어느 하나 예언서에서 보듯 하느님이 앞으로 어찌 행동할 지에 대한 성찰(reflection)이 없다는 점이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뜻을 발견했다(단 9:2)는 사실은 ①에스라 이후 예언의 중단과 ②토라와 예언서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들에 대한 답을 구했다는 점을 나타낸다.[xv] 이렇게 토라와 예언서를 읽고, 지켜 시험과 환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가르치는 점이다. 다니엘서 하면 7장을 떠올리는 뭇 교회의 가르침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성문서의 첫 장을[xvi] 이루는 시편 1:2에서도 토라의 중요성(central position)은 강조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보통 시편 1-2 편이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이해하는데 이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 위치 상으로 볼 때 시편 1 편에서 강조한 토라의 중요성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상에서 본 바와 같이, MT는 토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예언서를, 그리고 그 주위에 성문서를 배치하는 동심(同心, concentric) 구조를 취한다. 이스라엘의 자아의식 (철학)과 삶의 방향 (윤리)을 설정해 주는 토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도식에는 기독교나 회교에서 믿는 또 다른 예언자의 등장이 불가하다. 문제나 질문이 있는가? 토라를 읽으라 그 말이다.

 

4. 칠십인 역의 구성과 이해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LXX은 MT에 없는 여러 문서들을 포함하고, 그 배열 순서 또한 일정치 않다. 같은 책이라 할지라도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이는데, 책이름의 변화, 다른 순서 배열, 내용의 가감(加減), MT와 서로 다른 히브리 본 사용 등등을 들 수 있다.[xvii]예를 들어 예레미야의 경우, LXX는 MT보다 약 1/7 가량 짧고, 소위 말하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도 LXX에서는 26-32장에, MT에서는 25:15-38(LXX 32)와 46-51장에 걸쳐서 나타난다. LXX가 MT보다 짧다는 사실은 LXX가 일반적으로 보충 설명적 성격을 띈 번역본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발견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LXX의 예레미야서가 MT의 그것보다 오래된 사본에 기초하여 번역되었다 주장한다.[xviii]

MT와 달리, LXX가 오경, 역사서, 시문/지혜서, 예언서라는 4단계 구조(fourfold division)를 갖추고 있다.[xix] LXX 사본들의 다양한 형태 중에도, 이 4단계 구조는 공(共)히 나타나고, 특히 제일 많이 읽히던 바티칸 사본의 경우, 예언서가 가장 나중에 배치되어 있다. 오경을 고대 역사에 속한 문서로 보면, 구약성서가 반드시 시대적으로 배열되었음이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관여가 점진적으로 발전 내지는 구체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또 그 범위(scope)가 점차 우주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MT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의해 좁은 히브리 문화권에서 더 넓은 헬라 문화권으로 소개되는 과정에서 오는 적절한 적응 혹은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억할 것은, 본래의 LXX는 서기 전 3세기에 쓰였다 할지라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온전한 사본인 바티칸(B), 시내(a), 알렉산드리아(A) 사본 등은 서기 4세기 이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며,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LXX에서 나타나는 4단계 구성이란 초기 기독교인의 구약 이해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집회서 서문에서도 밝히듯, 히브리어를 직역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종종 무의미 할 때가 있다.

나는 여러분이 이것에 흥미를 가지고 주의 깊게 읽어 주기를 바라며,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절의 번역이 혹 잘못되었으면 널리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원래 히브리어로 표현된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에 놓으면,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수가 많다(ouv ga.r ivsodunamei/ auvta. evn e`autoi/j Ebrai?sti. lego,mena kai. o[tan metacqh/| eivj e`te,ran glw/ssan; for things spoken in Hebrew itself [themselves] do not have equal power, whenever translated into another language). 이것은 비단 이 책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예언서와 그 외의 다른 저서들, 심지어는 율법서마저도 그 번역서와 원서와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공동번역).

실제 구약 성서의 한 책을 MT와 LXX로 함께 비교, 분석한 이들은 LXX에서 문자적 직역 외에 의역 또는 주석에 가까운 번역을 대할 것이다.[xx] 그러므로, LXX은 단순한 번역(들) 그 이상이며, 따라서 키텔(Rudolf Kittel)은 LXX을 신학적 주해(theological commentary)라 부르기까지 했다.[xxi]

LXX는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번역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 개 개의 책들을 모은 것임으로, 그 일관된 신학 혹은 사상을 말하기는 무리다. 단지 눈에 띄게 당시 시대 배경 속에 일어나는 중대한 신학적 변화 중 하나는 유대 교파에 등장하는 메시아 사상이다.[xxii] 이 사상이 종종 번역자의 펜을 바꾸어 놓았고, 이를 읽는 신약성서 저자들의 구약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5. 구약과 신약

기독교 구약 성서들이 예언서를 끝에 배치함으로써 오실 메시아의 사상을 강조했다면, 신약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화, 현실화했다. 이미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등장을 엘리야의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말라기 예언(3:24// 막 1:2)을 성취시켰다. 마가복음 1:6에 의하면,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 하 1:8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의 종들이 묘사한 엘리야의 모습이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개역 한글).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는 마가복음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마가복음 1:3 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40:3을 MT에 있는 대로 읽으면,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 fwnh. bow/ntoj evn th/| evrh,mw| e`toima,sate th.n o`do.n kuri,ou euvqei,aj poiei/te ta.j tri,bouj tou/ qeou/ h`mw/n)고 쓰여 있고, 한편 마가복음 1:3 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fwnh. bow/ntoj evn th/| evrh,mw|\ e`toima,sate th.n o`do.n kuri,ou( euvqei,aj poiei/te ta.j tri,bouj auvtou/)고 쓰여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는 LXX을 통해 구약을 읽었다.[xxiii] LXX 이사야 40:3는 “너희 하느님의”(tou/ qeou/ h`mw/n) 그리고 마가복음 1:3은 “그의”(auvtou/)라고 쓰고 있다. “주의 길”(th.n o`do.n kuri,ou)은 똑같이 써있다. 보통 LXX에서 “주”(ku,rioj)는 야훼(hA’hy>)를 유대인 전통에 따라 번역한 것이며,[xxiv] “하느님(qeo,j)은 엘로힘(~yhil{a/)의 번역이다. MT와 마찬가지로, LXX에서는 “주의 길”에서 “주”와 “너희 하느님”이 동격으로 쓰인 반면, 신약 성서에서는 예수를 “주”로 부름으로써 야훼, 곧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를 동일시했다.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막 1:1)한 초대 교회의 산물이다. 여기에, “광야”라는 단어를 외치는 자의 생활 공간으로 이해함으로써, 엘리야의 광야 생활을 세례 요한의 그것과 기막히게 접목시켰다(막 1:3-4).

결국 세례 요한의 등장은 당시 대다수의 유대교 지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언서의 연장선상에 있으며[xxv] 예수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서 10:4에서는 예수가 “율법의 마침”(개역 한글) 또는 예수로 인해 “율법은 끝이 났고”(공동번역)라 번역하는데, 이는 헬라어 te,loj를 너무 일방적으로 이해한 결과라 여겨진다. te,loj는 시작의 반대말인 “끝, 마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취, 목적, 결과”를 뜻하기도 한다. 즉, 폐함 또는 거부의 의미가 아니라 절정 또는 완성의 의미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바울이 앞서 말한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다(롬 7:12)는 뜻에도 맞고, 누가복음 22:37에 말한 “이루어짐” (te,loj)과도 통한다. 현대 히브리 신약 성경(Salkinson-Ginsburg Hebrew New Testament)에서 누가복음 22:37의 te,loj e;cei를 AMTu-d[; ~Wqy” (“온전히 이루리라”)로 풀어 쓴 것(paraphrasing)이나 또, 로마서 10:4의 te,loj를 목적, 목표를 뜻하는 타크리이트(tylik.t;)란 명사를 써 표현한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일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토라가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듯, 예수가 기독교인들의 삶을 가르치는 토라가 된다고 이해하면 어디 덧날까?

구약성서가 네 단계 구성을 통해 수평적, 점진적(linear and progressive) 성격을 취하였듯이 신약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즉, 복음서는 오경에 해당하고, 사도행전은 역사서에, 서신들은 시편/지혜 문서에, 그리고 예언서는 계시록에 비교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 계시(啓示)의 결정체(結晶體)가 토라(오경)에 있다고 믿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그 절정을 예수의 삶(복음서)에서 찾는다. 신약의 눈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글로 또 신약은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글로 마무리 지고 있는 것이다.

 

6. 맺음말

이상은 성서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는 노력의 결과다. 성서를 신구약으로 읽지 않고, 구약 그리고 신약의 순서로 읽었다는 뜻이다. 히브리 성서가 보여 주듯, 예언서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토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또한 사해 근처 쿰란 공동체나 다른 유대 교파들의 작품에서도 성서가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도 성서로써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칠십인역 또한 그 결과이다.

그렇다면, 구약을 신약 시대에 맞게 읽으려는 노력은 이해할 수 있으나, 신약을 통해 구약을 읽는 것은 시대를 역행(anachronistic)하는 행위이다. 신약성서에서 메시아 사상을 예수 사건과 더불어 새롭게 적용시키는 해석은 늘 있어 온 성서 해석의 한 방법이나, 구약이 예수 사건을 예견했다고 주장하고 그 안에서 구약을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성서를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기본적 사고 능력의 상실이다.

이제는 성서를 공부하고 연구할 단계이다. 그리고 새 시대에 맞는 뜻을 창출할 단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는 환영할 만하다. 성서에서 답을 찾자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성서는 수많은 성경들 중 어느 하나만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 있는 독자는 읽었으리라.)

이를 위해 성서 언어(히브리어, 헬라어)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들어 북미에서는 신학교에서조차 성서 언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다. 내가 성서를 읽고 이해할 수 없으면 번역본에 의존해야 아는데, 그 번역 자체가 또 하나의 해석이기 때문에 성서를 직접 읽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모든 번역이란 일종의 해석 행위이기 때문이다(Every translation is an act of interpretation).

만일 번역본마저 읽지 않고, 남의 해석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그 삶은 주체성을 잃은 노예의 삶과 같다. 또 그런 설교자를 도둑에 비유하였다 (렘 23:30). 아직도 성서의 무흠(無欠) 무오(無誤)를 말하고 그 일점일획(一點一劃)에 오자가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성경을 보여달라고. 아마도 19세기말 카이로 게니자, 20세기 나그하마디, 사해문서 발굴 등을 훨씬 능가하는 천지개벽이래 최대의 사건이 될 것이다. 만일 보여줄 수 없다면 자신들에서 주어진 성서를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고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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