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보혜사 하나님!!

성령님 의 9가지 열매

하나님아들 2023. 10. 21. 23:27

성령의 9가지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5:22~23)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9가지의 열매는 육신의 일과 극적으로 대립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5:19~2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디아서5:24)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행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5:25) 

그런 즉, 헛된 영광을 구하여 육체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은 서로가 대립하며 현저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일은 공동체를 세우고 은혜를 은혜로 유지하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일은 끊임없는 분쟁과 소요와 다툼으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그것을 인간관계속에서 경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끊어내고

성령의 소속감을 갖는 성령의 공동체를 세워 나가도록 훈련하고 경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사랑(love)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구약성경에서 인용되는 "도드"(dod)와 "라야"(rayah)는 "아가페"(agape)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 모두 아가페적인 사랑의 범주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필레오"(phileo)는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를 설명할 때(요한복음11:3)와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관계속에서 사용되었습니다(요한복음20:2)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언어와 말로써 그것을 표현하거나 이해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깊고 오묘한 것이어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성령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인간인 우리가 그 흔적과 발자취만을 따를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일 뿐 본성을 쫓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거나 배우거나 쫓아가려는 의지 조차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과 공동체와 백성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과 인간에 대한 사랑, 아내와 남편, 가족과 이웃, 국가와 민족의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리, 성경, 말씀, 희생, 은혜, 존경, 인내, 영원, 치유, 믿음, 소망 등 하나님의 본성이 그속에 포함되어 점점 더 확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세번씩이나 질문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소통과 신뢰와 약속과 사명과 복음이 함께 연관을 가지며 베드로에게 다시 되돌려 졌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에 의해 이 모든 것은 성취되어 갔습니다

 

 

 

사랑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한일서4:7)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대속물로 내어 주심도 결국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요한일서4:9~10)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분은 죽으셔야만 했고 그것으로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5:8)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었고(로마서5:5),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빌립보서2:2~5)  성경의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요한일서4:11)  

 

 

 

예수님의 말씀은 계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에 와서 더 광범위해지고 더 율법적인 형태로 변화하였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더 방대해지고 회개와 죄의 고백은 신속을 요구하였습니다(마태복음22:37~40)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더 크고 더 놀라운 복음으로 나타나 우리의 생활과 행실을 지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요한일서3:18)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을 용납하거나 허용하지 않았습니다(로마서12:9),요한일서4:20)  더 진실되어야 하고, 더 깊은 곳까지 용서해야 하는 광범위한 규모의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감내하기 어렵고 사용하기도 벅찬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한 사랑이었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가장 수용하기 어렵고, 사용하기도 어렵고, 행위하기도 어려운 첫번째의 과실인 사랑이 없이는 사실 나머지 8개의 열매를 맺거나 맺게 할 수 있는 길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때로 우리에게 명령으로 다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명령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취한 것이라면 우리는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머지 열매들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희락(Joy)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는 그 안에서 누려야 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유지하는 지속적 상태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사랑의 한 줄기로서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잠간의 행복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세상의 성취된 욕망의 열매들과 전혀 다른 성격의 기쁨이 있으며 그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2대 왕에 취임하는 다윗의 즉위식을 바라보는 백성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희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역대상12:40)  히스기야 왕 유월절에 이르러서도 예루살렘에 없었던 큰 기쁨의 희락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역대하30:26)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조명하였습니다(로마서14:17)

 

 

 

성령의 열매들은 세상의 환경과 요구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들이 오직 하나님 나라와 연결 되어 있을 뿐, 그 어느 것 하나도 세상의 것과 연결되어 있지 않거나 지배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 희락의 굴레속에서 이미 굳어져 버린 사고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잠간의 누리는 세상 희락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갈증과 염증으로 병들어 간다는 영적 시각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화평(Peace)

 

 

 

화평은 그리스도의 선물로서(요한복음14:27), 환난과 역경속에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내적 안식이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빌립보서4:7)  화평케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복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5:9)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로마서5:1, 에베소서2:41)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단절되어 왔고, 인간은 단절의 방향으로, 하나님은 회복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평행선위에서 교각을 쌓아 연결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골로새서1:20)  십자가의 피로서 화평을 이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속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었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세상의 화평을 즐기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사람들은 그 열매의 연장선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을 지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디모데후서2:22)  화평의 하나님(고린도전서14:33)께서 우리를 화평중에 부르셨습니다(고린도전서7:15)  화평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선을 동반하며 그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완전하라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2:22,로마서14:19)  이러한 관계속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화평의 그림자는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되어야 하는 오래 참음(인내)과 연계되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4) 오래참음(Patience)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이룬자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인내와 자비와 양선입니다  그 가운데 인내(오래참음)는 감정과 충돌하는 관계를 이겨내는 속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6:6,골로새서1:11)  인내의 어려움은 억울함과 누명을 쓰고 있을 때 입니다(베드로후서3:9,요한계시록:2:2)  하나님은 그것을 풀려고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와 시도를 갖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아무 죄도 없이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대속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어려움과 난관들을 변호하고 변명하여 억지로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내의 스승인 욥은 사탄의 맹비난에도 불구하고 입술로서 조차도 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욥2:10)  희롱과 채찍, 결박과 감옥,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 궁핍과 빈곤과 환난과 학대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내었던 선진들의 믿음과 인내의 본을 이어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히브리서11:36~38,야고보서5:10)

 

 

 

인내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하여 오래도록 참으심으로 아무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3:9)  하나님의 인내는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절대적으로 요구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참으심이 없었다면 인류는 재앙을 피할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하며 그것을 온전히 감내 하셨습니다  때로 그 잔을 피하기 위하여 촌음과 같은 잠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 잔을 마셔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2:3)  때로는 옥에 갇히고, 모든 고문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구원의 설교를 하였던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은 죄악으로 뒤덮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돌을 맞아야 할 사람들이 돌을 던져야 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로서 하늘나라에 인도된 것입니다  인내는 악으로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성령이 주시는 선한 열매로서 끝까지 견디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야고보서1:3~4)

 

 

 

(5) 자비(Kindness)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자비로우심은 모든 죄인들을 향하신 긍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로마서2;4,에베소서2:7)  이러한 박애와 자비로움은 우리들에게도 남겨져 있습니다(골로새서3:12)  자비로움은 "인자하심"(창세기19:19), "은혜로우심"(창세기20:13), "긍휼하심"(마태복음9:13)과 동일한 맥락과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라함"이라는 단어도 긍휼의 감정으로 영어로 번역될 때에는 사랑(Love)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자비는 인애라는 단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역대상16:41이 그와 같은 구절이었습니다  자비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의 보배와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자비를 구하고 요청하였으며 예수님은 그때마다 그들의 필요를 충족하였습니다(마태복음9:27,15:22,17:15,마가복음10:47~48,누가복음18:38~39)  예수께서는 자비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가르쳤습니다(마태복음5:43~48)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7)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자비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류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비는 일부 총족요건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였습니다

 

 

 

율법에 치우친 구약의 지도자들은 자비를 간과함으로서 그들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완전해 질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이 어렵고 힘든 과정에 있어서 실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하는 인간이 스스로 완전에 이른다는 것은 이제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안에서 모든것을 성취하였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속에서 구현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도 동일한 의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비는 세상 가운데에서 아주 짧은 형태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방인(레위기19:34), 고아(스가랴7:9~10), 궁핍한 자(마태복음5:7), 약한 자(사도행전20:35), 우는 자(로마서12:15), 이웃(로마서15:2), 시험을 받는 자(갈라디아서6:1~2), 성도(에베소서4:32), 과부(디모데전서5:9~10), 반대편에 있는 사람(누가복음6:34~35) 들과 같이 자비의 대상과의 관계속에서 성령의 긴밀한 인도하심으로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져 가야 할 것입니다(빌립보서2:1~2)

 

 

 

(6) 양선(Goodness)

 

 

 

양선을 의미하는 헬라어 "아가도수네"(agathosune)는 착함, 올바름, 너그러움을 뜻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선(善)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로마서15;14,데살로니가후서1:11)  성령의 사람으로서 선은 일반적인 윤리와 도덕적 범주를 초월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행위로 이어지는 종교적인 태도로 보았을때 가장 기초적이고 효과적인 측면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를 인도하고 공동체를 이어가야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있어서 선은 하나님의 본질을 형성하는 사랑에게 기인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랑도 교만도 아닌 것으로 마치 숨쉬는 호흡과 같은 생활속의 행위적 운동이라 할 것입니다  양선의 열매는 성령님이 세상에 뿌려 주시는 단비와 같은 것으로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빠르고 선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함이란 복음을 믿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선한 흔적들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는 것으로 확대되고 진보되어야 할 것입니다 

 

 

 

(7) 충성(Faithfulness)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성도들이 생활속에서 드러남이 있는 일반적인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확실, 진실"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만"(’aman)에서 유래한 "네에만"(ne’eman)은 나라, 조직, 지도자 등을 위해 몸바쳐 순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성은 종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 할 것입니다  노아와 모세(민수기12:7)와 요셉과 아브라함(느혜미아9:8)은 성경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충성가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을 다함으로서 만인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히브리서3:2,2:17)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요한계시록2:10)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상가운데 변질과 배신으로 얼룩진 조변석개(朝變夕改)와 같은 불신앙적 태도를 제거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입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받은 자와 달리 주인이 없는 중에도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복음25:21~23)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4:2)  필요성과 정쟁으로 소용돌이 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까지 누가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서로에게 미룬다면 그 현장에는 충성된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누가복음16:10)

 

 

 

(8) 온유(Gentleness)

 

 

 

"자기를 낮춘다, 괴롭힘을 당한다, 겸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아나와"(nawah)에서 유래한 온유함이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냄과 성냄이 없고 자비로운 마음과 절제된 평화가 유지되는 온유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배려와 관용으로 한걸음 물러서서 이해해 주는 마음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사와 같은 것입니다(야고보1:12,갈라디아6:1)  온유함은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으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마태복음11:29)  온유란 세상의 강퍅함, 폭력적 우위, 약육강식적 세계사의 흐름과 대비하여 천국은 온유한 자의 몫이란 것을 대의하고 있습니다(시편37:1~2,11,22,34)  온유한 자의 성품을 소유한 대표적인 인물로 모세와 욥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왕과 충돌하지 않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으며, 백성들의 온갖 비난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섬기는 모세의 훌륭한 생애는 그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사례가 될 것입니다(출애굽기32:32)  욥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슬픔과 우울함의 늪에 깊이 빠졌지만 그 성품과 성정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하였으므로 불가사의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들에게 온유를 쫓아 행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경주하여 영생을 취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디모데전서6:11~12)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으로 온유한 자가 되고 이로서 서로 용납함으로 피차 용서하라고 명하셨습니다(골로새서3:12~13)  온유한 심령은 한 발 물러서서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온유는 여유로움과 자비로움과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져 일어나는 참다운 공동체의 환경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함이 지속되는 교회와 가정과 교제속에는 불협화음과 분쟁과 분냄이 소용돌이 칠 수 없고 화평만이 그곳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성령이 아니면 이러한 이상적 공동체가 실현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맺어지는 하나하나의 속성은 따로 분리되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서로 연결되어 보완하고 협력하는 일치속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9) 절제(Self-control)

 

 

 

절제란 육체적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으로 성령을 떠나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정욕의 통제력이 성을 빼앗는 군대보다 낫다고 평할 만큼 절제는 어려운 과제입니다(잠언16:32)  절제는 영적 지도자들이 추구해야할 가장 큰 덕목중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어디에서 어느 틈에서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현장에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고 욕심이 있으며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면에서는 브레이크를 계속 밟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악세레이터를 밟고 영적 환경에서는 지속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반대의 현상,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베드로후서1:6)더 하라는 말씀에서 절제된 지식과 덕을 통하여 인내를 쌓고 그 인내를 통하여 경건생활을 유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툼과 분쟁속에는 항상 부족한 절제가 있습니다(고린도전서9:25)  근신의 자세와 회개의 생활은 절제를 가져오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디도서1:8)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은 불교인들이 고행과 수행을 통하여 덕도에 이르고자 하지만 더 깊은 고뇌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은 각 가지와 열매마다 풍성함으로 기대하지만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한 곳에서라도 바르게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이르기 까지 모든 성령의 열매들은 독자적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줄기속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갈망하고 성령받기를 원하는 모든 중심에 바로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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